경기체가(景幾體歌)
• 정의 : 고려 고종 때 발생하여 조선 선조 때까지약 350년간 이어진 별곡체 형태의 시가를 이른다. 그최초의 작품은 한림학사들이 지은 '한림별곡(翰林別曲)'이다. • 형성 : 고려 중엽에 무신들이 정권을 잡게 되자, 여기에서 패배한 문신들은재야에묻혀서 시와 술로써 자신들의 감정을 토로했는데 이로부터 발생됨. • 발생동기 : 귀족들의 특권 의식과 유흥적이고, 향락적인 생활에서 나왔으며, 문신들의풍류 생활에서 나왔다는 의견과 지나치게 융성하게 된 한문학에대한 반동으로 나왔다는 견해가 있다. • 형식 : 분절체, 연장체, 3음보로되어 있다. 기본 형식은 고려 속요와 같은 연시이며, 기본율은 3·3·4조이다. 형식은 대체로 기본형·변격형·파격형으로나눌 수 있고, 여러 장이 연속되는 장가 형식으로 되어 있다. • 명칭 : 노래 말미에반드시 '경긔 엇더하니잇고' 또는 '경기하여'라는 구를 붙이기 때문에 '경기체가' 또는 '경기하여가'라고도 하며, 제목에 '별곡'이라는 말이 붙어 있어, 속요의 '청산별곡' 등과 구별하기 위해 '별곡체'라고도 한다. • 특징 : 고려고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존속한 문학이다. 한학자들의파한(破閑)에서 발생한 과도기적 시가이다. 한문구를나열하였으며, 부분적으로 이두를 사용했다. 내용은퇴폐적, 고답적, 현실도피적이다. 일부작품은 신진 사류들의 의욕적인 기개와 의식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고려 중엽 이후에 발생한 장가(長歌). 또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라고도 한다. 노래 말미에 반드시 “경(景) 긔 엇더니잇고” 또는 “景幾何如”라는 구(句)를 붙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고려 중엽 이후로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주로 한학자들에 의하여 읊어졌는데,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고종 때의 제유(諸儒)의 작으로 알려진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고려 말의 안축(安軸)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것으로는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 정극인(丁克仁)의 《불우헌곡(不憂軒曲)》과 작자 미상의 《오륜가(五倫歌)》 《유림가(儒林歌)》 《연형제곡(宴兄弟曲)》, 이 밖에도 김구(金絿)의 《화전별곡(花田別曲)》, 권호문(權好文)의 《독락곡(獨樂曲)》 등이 있다.
처음 발생시에는 무신들에 의하여 초야로 쫓겨난 문신들이 향락적·유흥적인 생활과 그들 심상(心像)을 읊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형식을 본떠 조선 건국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기도 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는 한글을 약간 섞어 짓기도 하였으나, 그 이전에는 한학자들이 순전히 한문으로 지었다. 따라서 일반대중과는 유리된 일종의 기형적인 문학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점에서 《청산별곡(靑山別曲)》 《가시리》 등 고려의 속요와 대조를 이룬다. 이들 속요는 일반대중 가운데에서 발달하여 구전되었기 때문에 보통 그 작자를 알 수 없으나 경기체가는 한학자라는 특수층이 한자만으로 지었기 때문에 대개 작자가 알려져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경기체가는 사물이나 경치를 나열·서술하는 것이 특징인 데 대하여, 속요는 사랑의 노래가 흔하며 사랑도 육감적이고 노골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
경기체가와 속요가 그 형태상 특질이 일치한다 하여 이를 통틀어 ‘고려별곡(高麗別曲)’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형태상으로 본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첫째, 음수율(音數律)은 주로 3음절이 우세하다. 둘째, 음보율(音步律)은 일반적으로 3음보이다. 셋째, 구수율(句數律)은 6구를 기준으로 하여 다소의 가감을 보인다. 넷째, 대체로 전후 양절(兩節)로 구분된다. 다섯째, 일률적으로 수련(數聯)이 중첩되어 하나의 가요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별곡은 신라의 향가가 발원적(發願的)인 기능을 잃고, 나례(儺禮)·잡희(雜戱)·백희(百戱) 등 무대 위에서 불리는 무악곡(舞樂曲)이 요청됨에 따라서 생겨난 형식으로 추정되고 있다.지금까지 발견된 <경기체가> 작품- <한림별곡>(13세기 고려 고종) ~ 16세기 정효문의 <독락팔곡> 약 20여 편 기타, 중종 21(1526)년에 지었다는 <관산별곡>이 이름만 전하고, 19세기 철종 11(1860)년 작품인 민규의 <충효가>가 남아 전하기도 하지만 <충효가>는 파격이 심하여 <경기체가>의 잔영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학성에 의하여 우아미로 설명된다. 작가층인 사대부계층은 이상적인 것을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이념이나 사상체계에서 추구하지 않고, 현실 자체에서 추구해냄으로써, 경기체가를 통해 한결같이 우아미를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랑스런 현실을 마음껏 구가하고 즐기는 풍류생활을 호기 있기 그리면서, 이상과 현실의 조화로운 융합에 의한 우아한 미의식만을 표현할 뿐,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자세나 골계적 시선은 전혀 없다. 오직 사대부 계층의 자만과 신념에 찬 세계관적 우아미만을 보여주는데, 이는 평민적 우아미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기체가는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새로운 시가형태인 가사문학에 의해 점차 대치되어 자취를 감추었다고 보고 있다.
연장체(동일한 구조의 연들이 중첩되어 한 작품을 이루는 형식) 한 연 7행의 전/후 분절체(전-1,2,3,4행 후-5,6,7행) 원칙적으로 각 절의 마지막 행(4행, 7행)의 고정 후렴구 '偉(爲) ~景 긔 엇더하(ㅎ+아래하)니잇고' 뒷절(후소절)의 둘째 행(6행)은 반드시 첫 행(5행)의 반복 제 1~3행은 4음 3보격, 제 5~6행은 4음 2보격, 4행과 7행(후렴구)은 변형 4보격
이러한 형식적 특성을 두고 조동일은 개별화와 포괄화의 양립, "위 ~경"에 의한 사물화 등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조동일, 「경기체가의 장르적 성격」)
- 성기옥, 「경기체가」, 『한국문학신강』, 새문사, pp.93 ~ 97 - 구본혁 외저, 「경기체가」, 『한국문학신강』, 개문사, pp.61 ~ 66 - 김학성.권두환 편, 「여요론」, 『고전시가론』, 새문사, pp.242 ~ 286
고려 후기는 향가가 사라진 시대였다. 신라 이래의 오랜 역사를 가진 향가가 고려 전기가 끝나는 것과 함께 그 잔존 형태마저 자취를 감추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향찰 표기법으로 우리말 노래를 적는 관습이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고, 향가라고 하는 문학의 갈래가 역사적인 종말을 고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문학사의 커다란 흐름을 역사 전반의 동향과 관련시켜 이해해야만 그 이유와 의미가 드러난다. 향가는 신라 이래의 귀족문학이었고, 고려 전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이은 문벌 귀족이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면서 상층 문화를 담당했기에 어떤 형태로든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무신란이 일어나고 문벌귀족의 지배체제가 무너지자 향가를 이을 수 있는 기반이 사라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세 전기 문학의 오랜 시기가 끝났다.
고혀 후기의 지배 세력은 권문세족이라 할 수 있으며, 신흥 사대부가 이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 또한 그 시기의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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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에 볼 수 없었던 노래와 놀이가 속악가사로, 속악정재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흥 사대부는 이에 불만을 가지고 상층문화를 가다듬고, 지배 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이념을 마련하고자 했다.
신흥 사대부가 나서서 상층의 시가문학을 새롭게 일으키고자 한 데서 중세 전기문학과는 구별되는 중세 후기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이 구현되었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경기체가·시조·가사이다. 향가 시대가 끝난 다음에 조성된 상층 시가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경기체가·시조·가사가 공존하는 갈래 체계를 마련하면서 문학사의 커다란 전환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 전환은 결과를 보면 선명하게 정리될 수 있어도 일거에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계획된 것이 아니고, 기존의 문학적 관습과 다각도로 얽힌 상황에서 단계적으로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신흥사대부의 출현과 성장 자체가 그렇듯이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어떤 영역은 선종의 승려들이 앞서서 개척했는데 나중에 사대부문학으로 수렴되기도 했다.
경기체가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 '한림별곡'은 속악가사와 그리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최씨 무신 정권에서 벼슬하는 문인들이 놀면서 즐기려고 지은 노래이며, 음란하다고 할 수 있는 놀이를 소재로 삼기도 했다. 그런 문인은 신흥 사대부의 선구자라고는 할 수 있어도 사대부다운 이념을 마련해서 시가문학의 새로운 기풍을 마련하는 데까지 나아갈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 사람 저 사람이 한 대목씩 지어 부르는 동안에 어쩌다가 생겼을 법한 노래인데, 그 형식과 표현방법이 이어진 결과 경기체가라고 하는 새로운 갈래가 성립되었다.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던 고종 초기인 그 당시에 향락적인 기풍의 속악가사가 어느 정도 궁중에 들어와 있었던가는 의문이다. 권문세족이 속악가사의 모습을 온통 바꾸어놓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림별곡'은 규범이나 도리 같은 것은 돌보지 않고 오직 즐기자고 부른다는 점에서나, 장을 나누고 여음에 상당하는 것을 삽입하는 형식에서나, 속악가사에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상통하는 성격을 갖추고 있으며, '고려사'악지에서는 그것 또한 속악가사의 하나로 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림별곡'이 장차 속악가사로 부각될 민간전승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이루어졌으면서, 또한 이미 궁중의 놀이를 위해 채택된 속악의 음악적 형식을 따르지 않았던가 하는 추측을 자아낸다.
그러나 '한림별곡'에서 시작된 경기체가는 유식한 문인이 창작한 것이며,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실을 열거하면서 감흥을 찾는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갈래이다. 서정시로 본다면 일찍이 사뇌가가 이룩한 수준은 물론이고, 속악가사에 편입된 민요 계통의 노래가 흔히 갖춘 묘미마저도 도저히 따르지 못한다 하겠으나, 바로 그 점이 갈래 성격을 다른 각도에서 파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근거이다.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실을 열거하면서 감흥을 찾는다는 것은 경기체가가 아니고 서정시가 아니고 교술시라는 증거이다. 그동안 교술시는 민요의 영역에서만 존재했으며 표면으로 부각된 적이 없었는데, 신흥 사대부는 '한림별곡'이 자기네의 사고방식을 나타내는 데 아주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용할 모형으로 삼았다. 그래서 교술시가 상층시가로 나타나 갈래체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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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노래를 지어 기생들이 부르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이황이 한림별곡류를 비판하면서, 교만하고 방탕한 기풍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비루하게 희롱하며 남녀가 서로 어울린 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한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림별곡'에서의 그네놀이가 그런 것이고, '관동별곡'도 유람을 다니는 풍류에 겨워 기녀들과 놀면서 불렀을 만하고, 여기서는 더욱 분명한 증거가 발견된다. 그런 기풍은 권문세족에게 둘러싸인 왕이 음란한 속악가사를 즐겼던 것과는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하겠으나, 경기체가는 신흥 사대부가 남다른 학식과 체험을 동원해서 스스로 지은 점이 크게 다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속악가사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어도 경기체가는 새로운 이념을 구현하는데 긴요한 노래로 계승될 수 있었던 이유가 일찍부터 마련되었다 하겠다.(출처 : 조동일 교수 저 한국문학통사 2권 187쪽 ∼ 201쪽)
고려시대 장가(長歌)의 한 형태. 고려 고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약 350년간 계속된 시가형태이다. 대부분 ‘경(景)긔엇더悧니잇고’ 또는 ‘경기하여(景幾何如)’라는구절이 제4·6구에 있어서 붙여진 장르상의 명칭이다.
이 명칭 밖에도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경기하여체가(景幾何如體歌)’·‘별곡체(別曲體)’·‘별곡체가(別曲體歌)’ 등으로 불린다.
경기체가의형성에 관한 견해는 세 유형으로 정리된다. 즉, 국내기원설과 외래기원설·절충설이그것이다. 국내기원설은 향가와 고려속요와 민요에 기원을 두고 있다. 외래기원설은 중국의 사(詞)와 변려문(騈麗文)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절충설은 중국의사륙문(四六文)·송사(宋詞)·송악(宋樂)과 우리의 전통적인시형, 향가 등을 절충하여 경기체가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들 학설 가운데송사 내지 송악과 향가가 절충되어 경기체가가 발생했다는 설과, 교술민요가 상층사회로 상승해서 경기체가가 발생했다는 설이 주목된다. 현존하는 작품은고려시대의 것이 3편, 조선시대의 작품이 22편으로 모두 25편이다. 최초의작품은 〈한림별곡〉이고, 최후의 작품은 〈충효가 忠孝歌〉이다. 현존 25편의 자료는 다음의 〔표〕와 같다.
이상 25수의전개과정을 통해 변천과정이 정리되고 있는데,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변천과정에 대한 여러 학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형성기(고려고종∼고려 말, 1214∼1348)·발전기(조선초∼세종, 1392∼1429)·변천기(성종∼선조, 1475∼1587)로 구분하는 설이 있다. 또, 생성기(1214∼1391)·발전기(1392∼1446)·변천기(1447∼1531)·쇠퇴기(1532∼1587)로구분하는 설도 있다.
이 밖에, 발생기(13세기)·발전기(14세기)·융성기(15∼16세기)·쇠퇴기(17∼19세기)로구분하는 설과, 형성기(1216∼1418)·완성기(1419∼1468)·변천기(1470∼1494)·쇠퇴기(1506∼1587)로구분하는 설이 있다.
이들 학설 중에서발생기·발전기·융성기·쇠퇴기로 구분하는 설이다소 특이하다. 이는 다른 학자들이 〈충효가〉를 너무 파격이 심하고시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시대구분에서 제외한 것을 쇠퇴기로설정한 데에 기인한다.
〈충효가〉를시대구분에 포함시킬지의 여부는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충효가〉는경기체가 장르가 이미 사라진 지 300여 년 뒤에, 한 개인이 단지 그양식을 모방하여 지었을 뿐이다.
바꾸어 말해경기체가의 형해(形骸)를 가져다가 살아 숨쉬는 따뜻한 생명이 없는색칠을 가필했을 뿐이어서 시대구분을 그을 때에는 대상에서 제외하는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많다.).
이를 제외하고, 각 시대의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형성기는 고려시대에 작품세 편이 지어지면서 경기체가의 장르가 형성된 시기로, 개인의 서정이주를 이룬다.
발전기는 〈상대별곡〉에서시작하여 〈기우목동가〉까지 12편이 창작된 시기로서, 형식이 완성되고, 개인의 정서보다는 악장과 불교 작품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변천기는 〈불우헌곡〉으로부터 〈독락팔곡〉까지의 9편이 창작된 시기로, 형식이 크게 붕괴되어 소멸해가는동시에 내용은 개인의 정서를 주로 노래하는 시기이다. 작자층은 사대부계층이전부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승려 말계 지은(末繼智賻)과 기화(己和) 등이 지은 경기체가가 새로이 발굴되면서 사대부계층과 승려계층으로확대되었다.
경기체가는주로 사대부계층의 화려하고 유연하며 도도한 생활을 노래하거나, 유교적이고도덕적인 뜻을 강조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한편, 승려들의작품은 아미타불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경기체가는각 작품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그 형식에 변화가 많다. 형식에 대해서는조윤제(趙潤濟)·김태준(金台俊)·양주동(梁柱東)·김사엽(金思燁)·이명구(李明九)·정병욱(鄭炳昱)·김창규(金倉圭)·이종출(李鍾出)·성호경(成昊慶)·김문기(金文基) 등이 다양한 이론을 펴고 있다.
이들 여러 학설중에서 조윤제·양주동·정병욱·이명구·김문기등의 형식 논의가 주목되며, 동시에 연구사까지도 살필 수 있는 근간이된다.
조윤제는 크게전절과 후절로 작품을 나눈다. 즉, 전절은 “3·3·4 3·3·43·3·4 위 2(4) 경기하여”로 구성되고, 후절은 “4·4 위 2(4) 경기하여”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양주동은 “3·3·43·3·4 4·4·4 위 3·3·4 (엽) 4·4·4·4 위 3·3·4”로 정리하여제3구를 4·4·4로 굳히는 반면, ‘경기하여’를 음수로계산하는 특성을 보인다.
한편, 정병욱은 “3·3·4 3·3·4 4·4·4 3·3·44·4·4·4 3·3·4”로 정리하면서 ‘위(爲, 偉)’를 계산에서 빼고 있다. 또 형태상의 특성으로, 음수율은 3음절과 4음절이며, 음보율은 일률적인 3음보에 4음보가 1회씩 끼어있다고 설명한다. 구수율(句數律)은 6구체이며, 1연은 전절과 후절로구분되고, 5∼8연이 중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이명구는정병욱이 음수에서 제거했던 ‘위’를 계산하여, “3·3·43·3·4 4·4·4 4·3·4 4·4·4·44·3·4”로 되어 있음을 정리하면서, 5∼9장이 중첩되어한 편의 노래를 이룬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학설은 음수율을 중심으로그 기준형식을 살피고 있다.
이에 반해, 김문기는 음보를 기본으로 율격을 파악하여 다음과 같이 기본형식을제시하고 있다.
제1행 (3음보) 제2행 (3음보) 제3행 (3음보) 제4행 (위) (…景) (긔엇더) (悧니잇고)(4음보) 제5행 (4음보) 제6행 (위) (…景) (긔엇더) (悧니잇고)(4음보)
여기서 각 장은육행시 제1∼3행은 3음보, 제4∼6행은 4음보로 된 정형시라고 주장하고있다.
경기체가의장르적 성격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율문으로 표출된 서정시가라는 주장이지배적이었다. 이에 대해 조동일(調東一)은 서정시가 아니라 교술시라고주장하고 있다.
그는 장르체계를서정·서사·희곡 등으로 3분하던 종래 학계의 방법을 버리고, 서정·서사·희곡·교술 등의 4분법을 취하였다. 따라서 경기체가는 서정과 대립되는 교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서정은세계의 자아화인데, 경기체가는 서정과 대립되는 자아의 세계화인 교술이라는것이다. 경기체가는 실제로 존재하는 작품외적 세계상을 작품 안에 그대로옮겨놓았을 뿐이고, 작품에서 특별히 창조한 세계상을 발견할 수 없다는뜻이다.
그 세계상은작품화되기 전에 가졌던 문자 그대로의 외연적 의미를 제시하는 데 그치고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기체가의 초·중기 성격을 파악한 것으로, 후기의 경기체가에서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것을 고려할 때에, 경기체가는교술성과 서정성이 복합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자에와서 교술이라는 의견에 대해 다시 서정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견해가나와 있다. 최재남(崔載南)은 경기체가를 서정과 교술로 갈라 대립적인지표(자아의 세계화, 세계의 자아화)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한다.
즉, 기본적으로같은 층위인 서정으로 범주를 설정하고, 그 범주 내의 편차로 이해하는시각이 그 실성을 온전하게 밝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한림별곡〉을비롯한 경기체가, 처사적 문학으로서의 〈어부가〉류, 시조·가사등을 들어 13세기 이후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사대부들이 담당한 역사적장르로 존재한 작품군을 대상으로 하여 서정의 사대부적 범주를 설정할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주목할 만한 견해로 보인다.
〈한림별곡〉의경우만 해도 단순히 여러 사물을 나열해 놓은 듯하지만 실은 사물의이름을 들 때 이미 작자의 의식에는 그들 사물의 외형적인 이름을 넘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의와 성격에서 받는 감흥·환희·자만등의 미의식이 영롱한 서정적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학성(金學成)은경기체가의 미적 범주를 우아미(優雅美)로 설명한다. 작가층인 사대부계층은이상을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이념이나 사상체계에서 추구하지 않는다. 바로 현실 자체에서 추구해냄으로써, 경기체가를 통해 한결같이 우아미를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랑스런 현실을마음껏 즐기는 풍류생활을 호기 있게 그리면서, 이상과 현실의 조화로운융합에 의한 우아한 미의식만을 표현할 뿐이다.
여기에 현실에대한 비판적 자세나 골계적(滑稽的) 시선(視線)은 전혀 없다. 오직 사대부계층의자만과 신념에 찬 세계관적 우아미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는 평민적우아미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경기체가는새로운 시가형태인 가사문학에 대치되어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고 보고있다. 경기체가의 연구는 명칭·장르사·작자계층·형식및 장르적 성격과 작품성격·작품구조·표현특징·미의식등의 전체적인 검토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학설이 분분한 점들이 많다.
≪참고문헌≫ 韓國詩歌史綱(趙潤濟, 乙酉文化社, 1954), 高麗歌謠의 硏究(李明九, 新雅社, 1973), 韓國古典詩歌의 硏究(金學成, 圓光大學校出版局, 1980), 韓國文學의 理解(金興圭, 민음사, 1986), 別曲의 歷史的 形態考(鄭炳昱, 思想界 3권 1호, 1955), 景幾體歌의장르적 性格(趙東一, 學術院論文集 15, 1976), 義相和尙의 西方歌硏究(金文基, 東洋文化硏究 5, 1978), 별곡체가의 보편적 성격(金倉圭, 韓國詩歌의 硏究, 螢雪出版社, 1981), 한림별곡에 대하여(金東旭, 高麗時代의 歌謠文學, 새문사, 1982), 장르론의 전망과 경기체가(金興圭, 白影鄭炳旭先生華甲紀念論叢, 新丘文化社, 1982), 景畿體歌의 장르(成昊慶, 韓國文學의 爭點, 集文堂, 1986), 景畿體歌의 장르적 성격과 그 변이(박일용, 한국학보 46, 一志社, 1987), 한림별곡의 선험적 세계(朴魯褻, 高麗歌謠의 硏究, 새문社, 1990), 翰林別曲(尹英玉, 高麗詩歌의 硏究, 嶺南大出版部, 1991), 高麗詩歌의 文學的 性格(金大幸, 高麗歌謠硏究의 現況과 展望, 成均館大學校人文科學硏究所, 集文堂, 1996), 翰林別曲과 關東別曲의 거리(朴魯褻, 高麗歌謠硏究의 現況과 展望, 成均館大學校人文科學硏究所, 1996), 景畿體歌 장르의현실적 과제(최재남, 韓國詩歌의 硏究, 제2집, 韓國詩歌學會, 太學社, 199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 고종 때 발생하여 조선 선조 때까지 약 350년간 계속된 가사 형식의 하나.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 <별곡체(別曲體)>라고도 하는데, 이 노래의 끝에 <경(景)긔엇더길니잇고> 또는 <경기하여(景幾何如)>라는 문구가 들어 있기 때문이며, 별곡체라고 하는 것은 제목에 <별곡>이라는 말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속요인 《청산별곡》 《서경별곡》 등과 구별하기 위해 특히 별곡체라고 한다. 주로 귀족 특권층이나 귀족 문인들이 학문적·도락적·파한적(破閑的)인 생활을 읊었기 때문에 귀족문학이라고도 하며, 따라서 국민문학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일찍 소멸하였다.
그 형식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기본형·변격형·파격형으로 나눌 수 있고, 음수율은 주로 3음절과 4음절로 되어 있다. 음보수(音步數)는 주로 3음보이며 가끔 4음보도 나타난다. 구수(句數)는 6구체가 가장 많으며 5연 내지 8연으로 되어 있고, 1연은 전절(前節)과 후절(後節)로 나누어진다. 경기체가의 발생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
정통 향가(鄕歌)의 뒤를 따른 문학이라는 견해는 매연 첩구(疊句)가 향가의 낙구(落句)의 발전이며 한구(漢句)의 나열은 민족적 개성을 상실하지 않은 종교적 지식성이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사로잡힌 귀족 관료적 고답성으로 대치된 결과라고 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이전의 어느 시가와도 관계없이 한 학자의 소일파적(消日破寂)으로 이 형태가 발생되었다고도 하며, 그 기본 음조는 중국의 사(詞)나 사륙(四六)의 모방이나, 전후절의 분단은 향가 형식에 의함이고, 그것을 중첩하는 것은 고려 장가(長歌)의 형식을 본뜬 것이라는 여러 가지 견해가 많다.
그 밖에 경기체가는 3·3·4와 4·4의 혼용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각행(各行) 3분절 구성은 고려가요의 특징이며, 3·3·4는 《정석가(鄭石歌)》 《가시리》 《사모곡》에서, 4·4의 중첩은 《서경별곡》 《쌍화점(雙花店)》에서 쓴 율조이므로 새로운 별개의 형식이 아니고 고려 가요에서 발생했다는 견해가 있다. 또 한시(漢詩)에서 경기체가를 비롯한 조선시대 송축(頌祝)의 노래가 발생했다는 견해 등이 있다. 순전히 한문으로 지었으나 조선시대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이 섞여 쓰여졌으며 후에는 <景幾何如>라는 말이 거의 없어지고 전체의 형식도 변모하였다.
작품면에서 볼 때 최초의 작품은 고려 고종 때 제유(諸儒)의 《한림별곡》이며, 고려말 안축(安軸)의 《관동별곡》과 《죽계별곡(竹溪別曲)》, 조선시대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 정극인(丁克仁)의 《불우헌곡(不憂軒曲)》, 김구(金絿)의 《화전별곡(花田別曲)》, 주세붕(周世鵬)의 《도동가(道東歌)》, 작자미상의 《오륜가(五倫歌)》 《연형제곡(宴兄弟曲)》이 있고, 최후의 작품은 철종 때 민규(閔圭)의 《충효가(忠孝歌)》이다. (출처 :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