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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랑사 (玉娘祠) ◈
◇ 1. 아전의 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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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채만식
채만식 사후 《희망》에 13회 연재, 격변의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의식을 드러내고자 한 작품
1
玉娘祠[옥랑사]
 
2
1. 아전의 자식
 
 
3
마침내 그날로 선용(張[장]先用)은 강보의 불명(不名)을 안아다 아내 서씨에게 부탁한 후 표연히 다시 집을 나가 산으로 들어갔다. 진정 이번은 입산(入山) 이었다. 노루재(獐峴[장현]) 산막(山幕)에서 멀지 아니한 백학동의 백련암으로 가, 머리 깎고 혜광(惠光)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된 것이었다. 그것이 광무(光武) 4년 경자(庚子) — 서기 1900년…… 선용의 나이 서른한 살 적이었다.
 
 
4
이보다 10년을 앞서 고종(高宗) 28년 신묘(辛卯).
 
5
섣달 열나흗날 밤 달이 휘영청 밝고 이윽고 깊은 밤이었다.
 
6
과실로, 고기로, 생선으로, 그 밖에 여러 가지 제사장 보기한 것을 멱서리에 넣어 멜빵 걸어 지고 양손에 갈라 들기도 하고 선용은 빠른 걸음을 더욱 급히 하면서 곰의고개(熊峴[웅현])를 넘고 있었다. 내일이 부친의 제사였고 그 제사장보기를 하여 가지고 오는 길이었다.
 
7
가슴을 받힐 듯 강파른 고갯길이 좌우는 아름드리 솔이 직직히 둘러섰기 아니면 가다오다 한 옆으로 몇 길씩 깎아지른 낭떠러지 위를 위태로이 건너는 험한 고개였다. 겸하여 오르기 십 리, 내리기 십 리, 안팎 이십 리에, 그 이십 리 동안은 주막 하나 없는 호젓한 고개였다.
 
8
범이 간혹 나오고 도적은 종종 났다. 초군들이나 아니면 물정 모르는 타관 나그네나 단신으로 이 고개를 넘다 봉변도 하고, 요행 무사도 하고 하였지, 늘 왕래하는 장꾼들은 으례 대여섯씩 여남은씩 패를 지어 그리고 낮을 골라서 다니고 하였다.
 
9
그러한 험한 고개를 단신으로, 더욱이 밤중에 넘는다는 것이 자못 무모한 짓이라 하겠으나 선용은 저의 힘을 믿는 것이 있어 짐승이나 도적 같은 것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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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한 섬씩 양편 팔에 끼고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빈 몸처럼 다니는 장골이라, 제사장보기한 멱서리나 지고 강파른 고개를 오르기 쯤 별반 힘이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날이 푹한 탓인지 마루턱까지 올라서니 이마에 땀이 배었다.
 
11
마루턱에서 잠깐 땀을 들였다.
 
12
짐승도 산새도 다 잠들었는지 푸드득 소리 하나 일지 않고 달만 길 양 옆으로 우거진 숲과 솔 사이로 높다랗게 솟아 있다.
 
13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시면서 기다리시는지! 첫닭이나 울기 전에 집엘 당도해야 할텐데……’
 
14
다시금 선용은 이런 조급한 마음이면서 고개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15
고개 밑까지 십 리, 그리고 다시 이십 리, 아직도 삼십 리를 더 가야 황산골(黃山洞[황산동]) 이요 집이었다.
 
16
원력이 남보다 월등히 솟는 선용이라 걸음도 예사 세 갑절은 빨라 장에만 가서 제사상만 보아가지고 돌아오기고 한 것이라면, 왕복 일백이십 리 길이니 해가 있어서 돌아오고도 넉넉하였을 참이었다. 한 것을 외가엘 들러오느라고……
 
17
장에 당도한 것이 아침 새때였고 이것저것 제사장보기를 한 후에 점심 요기를 하고 나니 마침 오때(午正[오정])였었다.
 
18
장에서 외가가 사십 리.
 
19
어려서부터 선용을 끔직 귀여워하였고 한번이나 간다치면 퍽은 반겨하면서 부디 가끔 좀 오라고, 내가 기운이 있거나 길이 삼십 리 길만 되었어도 하루 걸러큼 너를 보러 갔으리라고 못내 그래쌓는 외조모가 있는 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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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나 쌓이고 하면 정월에 세배도 갈지 말지 한 터였다. 가서 노인을 기쁘게 하여줌도 즐거움이요, 외조모의 안부를 가지고 돌아가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것도 또한 즐거움이었다.
 
21
외가에 들러 노인의 잔 사설도 듣고 술잔 요기도 하고, 그러고 나선 것이 해가 거진 질 무렵이었다. 외가에서는 외조모랑 험한 길을 어찌 밤에 갈까 보냐고 누누이 만류는 하였으나 내일이 제사요 제사장을 보아가지고 가는 길이라 끝끝내 붙잡지는 못하였다.
 
22
그 외가에 들른 안팎 팔십 리가 길이 터져 이렇게 저물어진 것이었다.
 
23
고개 마루턱에서 한 마장 가량 내려오면 옹달샘이 있고 험한 이 곰의고개에서도 가장 험한 고비였다. 바른편으로는 산짐승조차 깃들기 어려운 솔과 잡목의 숲이 한결 더 짙어, 대낮에도 어두컴컴하고 왼편은 넉넉 열 길은 되는 낭떠러지. 이 자리에서 도적의 연장에 상하여 혹은 산 채로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주검이 해마다 얼만지를 모른다. 도적은 피묻은 연장을 번번이 옹달샘물에 씻고.
 
24
선용이 방심을 아니하면서 마악 옹달샘 앞에 이르는데, 그러자 무엇인지 모르게 마음이 섬뜩하였다. 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둔 숲속으로부터 중기중기 한떼가 뛰쳐나왔다.
 
25
선용은 태연히 멈춰 섰다.
 
26
도적은 두 놈이 앞을 서고 두 놈이 그 뒤에 가 서서 넌지시 길을 가로 막았다. 앞선 두 놈의 손에서 달빛에 번쩍이는 것은 창 ‧ 칼이 분명하였고, 뒤에 선 두 놈은 각기 몽둥이를 어깨에 둘쳐 메었다.
 
27
"돈 지닌 대루 다 털어 내놓구 짊어진 것이랑 손에 든 것이랑 다 내려 놓구 가거라."
 
28
앞선 한 놈이 손의 칼을 한번 번쩍여 보이면서 꾸짖듯 하는 말이었다.
 
29
선용은 도적이라는 것을 말은 많이 들었어도 실지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보아야 체격이며 입성이며 말과 음성이며, 또 달빛에 잘 보이는 얼굴이며 모두가 아무 때 아무 데서나 만나는 여느 사람 ── 백성들이었지 조금치도 어데가 '도적놈 같은’ 무엇이 있어 보이는 것이 없었다. 혹시 그 중 앞선 한 놈이 수염이 보기 싫게 텁수룩한 것이 그 소위 도적놈 같다고 할는지 몰라도.
 
30
선용은 양손에 들었던 것을 내려놓으면서 조용히 대답하였다.
 
31
"돈은 장에 가서 다 쓰구 없구 이건 제사장 본 것인데…… "
 
32
"제사장 본 것은 우리가 먹으면 동티가 난다드냐? 잔말 말구 다 내려놔. 돈두 내놓구."
 
33
"돈은 글쎄 없구…… 임자네들은 선영두 없단 말이요? 남의 제사장 보아가는 걸 다…… "
 
34
"자식 보아허니 아직 젖비린내 나게 생긴 것이 퍽은 앙뚱스러이…… 하룻강아지 범 무선 줄 모르드라구……"
 
35
도적들은 말로 상지하기를 단념하였노라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털보가 맨 앞 참을 서고 칼든 또 한 놈이 그 뒤를 따르고 그 뒤를 몽둥이 멘 두 놈이 따르고.
 
36
"이런 걸 살려보내면 워너니 후환거리어든."
 
37
털보가 씹어 배앝듯 그러면서 번쩍 치켜든 창칼이 선용의 앙가슴을 내리 질렀다.
 
38
그래도 서 있었다면 선용의 가슴은 본새 있게 산적을 꿰었을 참이었다. 그러나……
 
39
선용은 까딱 않고 도적의 몸 동작에다 눈총기를 들이고 섰다가 칼이 내리 쏟히려는 순간 몸을 살짝, 그러되 날쌔게 바른편으로 비끼었다.
 
40
허공을 내리지른 도적은 제바람에 몸이 앞으로 와락 쏠렸다. 그러는데다 선용이 때를 놓치지 않고 왼팔로 갈기는 한주먹이 뒤통수를 보기 좋게 따악…… 도적은 어이쿠 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납작 엎드려져 바르르 사지를 떨었다. 모양이 아이들이 회초리로 개구리를 때려 사지를 쪽 뻗고 바르르 떠는 형국과 방불하였다.
 
41
칼 든 또 한 놈은 앞선 동료가 불의에 실패를 당하는 것을 보고 놀라 주춤 멈춰 섰다 다음 순간 이를 뿌드득 갈면서
 
42
"이눔 봐라…… "
 
43
하고 달려들었다. 먼저의 털보처럼 창칼을 번쩍 치켜들고 내리지를 자세로.
 
44
선용은 다음의 적을 막을 태세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털보의 칼을 살짝 비끼면서 한주먹으로 놈의 뒤통수를 갈기면서 그러고는 어느 겨를에 다시 바르르 사지를 떨고 엎드러진 그 개구리를 한 다리를 집어들면서 막 덤벼 드는 둘쨋번 도적의 옆구리를 후려갈기면서 하였다.
 
45
"픽."
 
46
무딘 소리에 뒤이어 무어라곤지 비명과 함께 둘쨋번 도적의 몸뚱이는 왼편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졌다.
 
47
털보가 맨처음 덤벼들면서부터 둘쨋번 놈의 몸뚱이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까지 눈 깜작할 사이의 일이었다.
 
48
몽둥이를 멘 두 놈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벌린 채 뻐언하고 섰다 몸을 날려 뛰었다. 그러나 몇 걸음을 못 뛰고 선용에게 한 놈씩 상투를 움킨 바 되었다.
 
49
"살려 줍시요."
 
50
두 놈은 한가지로 그러면서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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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아, 하필 불한당질야? 해먹을 게 그다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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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용이 꾸짖는 말에 한 놈이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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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허니 불한당질입니까? 양민으로 살자해두 양반 등쌀 원님 등쌀 아전 등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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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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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용은 할 말이 없었다. 양반이며 원이며 아전의 극성스런 토색질 등, 그리고 백성이 양민으로는 부지하기가 어려운 사세인 것을 살이 아프도록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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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일랑 남의 제사장 보기 해가는 건 털어먹지 말아."
 
57
선용이 발끝으로 두 놈의 방둥이를 직신직신하면서 타일렀다.
 
58
"네에 거저 다시는…… "
 
59
"그리구 한 놈은 저 아래루 떨어졌으니깐 죽었을테니 할 수 없지만 저놈 털보는 죽지는 아니했나 보니 업구 가서 잘 구원해 주구."
 
60
"네에 이르시다뿐이겠읍니까!"
 
61
선용은 한 놈을 죽게 한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62
결코 도적들에게 도적이 되지 아니치 못하는 핍절한 곡절이 있음을 듣고서 이 자리에서 비로소 감동이 된 바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본시가 그는 도적이 되었거나 무엇이 되었거나 저의 손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차마 못하여 하는 천품이었다. 그런지라 아까 그는 털보를 주먹으로 쳐 눕히고 둘쨋 번 놈을 털보의 몸뚱이를 집어 후려갈기고 한 것도 무슨 그들을 죽게 할 의사가 있어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었다. 다만 내 몸에 닥치는 해를 막자는 노릇이 힘이 지나쳐 그만 한 놈이 재수 없는 다들림을 입었을 뿐이었지.
 
63
잠시라도 바쁜 길이 무단히 충그려졌다고 선용은 땅에 내려놓았던 것을 거두어 들고 총총히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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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 걸음이나 걷고 있는데 등 뒤에서 도적의 한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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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여봅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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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른다.
 
67
선용은 그대로 걷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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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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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거시키…… 기운두 대단 좋구 하신가 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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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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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웬만하시면 저어 우리 두목 노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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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바람 맞인 놈…… "
 
73
선용은 코로 웃고 씽씽 고개를 내려갔다. 그러나 속으로는 '나도 혹시 그때……’ 하는 생각이 문득 나는 것이 있었다.
 
74
나도 혹시 그때 한바탕 휘젓고서 뛰쳐나가 녹림객(綠林客) ── 도적이나 되었더라면 '속이 후련은 했을는지 몰라?’ 이런 생각이었다.
 
75
지금 선용은 스물두 살이었다. 담력도 인제는 엔간하였다. 만일 그러므로 지금이라면 그는 넉넉 그 휘젓기를 하였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때만 하여도 아직 어렸었다. 열일곱 살…… 기운이야 그때도 벌써 또래에 훨씬 솟았다 하지만 기운이 주장인 것이 아니었다. 담력이 미처 나지를 못하였었다.
 
76
"후유!"
 
77
선용은 한숨을 내어쉰다. 생각이 번지매 자연 그 때 그 마당의 광경에 눈이 다시금 서언히 밟히기 때문이었다. ── 부친의 그 공주 병정의 말꼬리에 상투를 매여 고꾸라지면서 네 손발로 기면서 질질 끌려가던 광경이.
 
78
다섯 해 전 병술년(丙戌年) 동지달 잊히지도 않는 바로 스무날이었었다.
 
79
선용이 글방에 갔다 점심을 먹으러 오는데 집 문 앞에 웬 말이 여러 바리가 매어 있고 사랑마당에서는 왁자지껄 여럿이 들레는 소리가 들리고 하였다.
 
80
선용은 무슨 일인지는 몰랐으나 가슴이 울렁거렸고 얼른 사랑마당으로 들어섰다.
 
81
사랑마당에는 차마 바로 보기 어려운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82
감기로 여러 날째 사랑에 누웠던 부친 장도청(都廳)이 풀대님 풀상투를 한 채 당시랗게 뒷결박을 지우고 대뜰 아래 꿇어앉고. 망건 위에 사포(帽子: 軍帽[모자: 군모])를 눌러 쓰고 검정 군복에 바랑을 메고 발감기에 짚신 걸 메신고 한 병정이 칠팔 명이나 빙 둘러서서 몽둥이와 총개머리로 부친을 함부로 때리고. 차림새가 좀 나아 보이는 한 놈은 상관인 듯 싶어 마루에 가 걸터 앉아서 무어라고 호령을 해쌓고.
 
83
선용은 놀람과 분함이 한꺼번에 치밀어 가슴은 두근거리고 사지는 와들와들 떨리고 하였다.
 
84
선용이 이때 만일 나이 좀 더 들어 담력이 차고 하였다면 힘꼴이나 쓰고 하는 터이니 달려들어 놈들을 좨쳐대자고 하였을 것이었었다. 우선 좨쳐대고 나서 뒷일이 각다분하게 되면 그때는 부모 모시고 산으로든 먼 타관으로든 피하여 가든지, 혹은 그도 저도 못해 보다 더한 일을 당하는 한이 있든지 할 값이라도.
 
85
선용은 그러나 아직 어렸었다. 담력이 미처 없었다. 권력(權力)이라고 하면 무서운 것이요, 그 앞에 굴종을 하도록 마련인 것일 따름이지, 백성으로 그에 항거를 할 수도 있는 것인 줄을 알기에는 선용은 아직도 나이 어렸던 것이었었다.
 
86
선용의 부친 장학수는 도서원(都書員)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도청이었다.
 
87
도서원은 서청(書廳)의 우두머리요, 서청은 세납(稅納)을 도맡아 보는 기관이었다.
 
88
서청은 지방에서 세납을 맡아보는 말단 행정의 한 기관은 한 기관이로되, 그러나 그 지방행정의 총주재자인 그 고을 원이나 원 밑에 있는 육방(六房)의 어느 한 방이나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중앙정부의 호조(戶曹: 度支部[도지부])의 지도와 감독을 받도록 마련이었다. 물론 원이나 이방(吏房) · 호장(戶長)들이 서청이면 서청, 도서원이면 도서원에게 대하여 어느 정도의 간섭을 하지 아니하는 바는 아니었다. 원이 곧잘 도서원을 붙잡아 올려다 문초하고 때리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서청의 납세 사무에 있어서 과실이나 태만에 대하여는 그 책임을 원이 지지를 아니하였다. 서청의 우두머리 되는 도서원이 직접 졌다. 납세가 한 때 불란서(佛蘭西)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일종의 청부제(請負制)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었었다.
 
89
조정에서는 그 고을에 대하여 가령 십만 냥이면 십만 냥의 그 해 세전(稅錢)을 도거리로 매겨 내려 보낸다. 그 고을 원은 한 오만 냥이고 보태어 십오만 냥을 서청으로 넘긴다. 서청에서는 도서원의 보짱 따라 다시 한 오만냥 보탠 이십만 냥을 놓고 백성에게 호호이 뿐다. 각호에 뿐 세전을 받아들이는 소임은 각 동리의 이감(里監)이 맡는다.
 
90
각 이감이 받아들인 도합 이십만 냥에서 도서원은 우선 오만 냥을 제 앞으로 젖혀 놓고 본다.
 
91
원이 저의 몫 오만 냥은 먹고.
 
92
십만 냥은 서울로.
 
93
그러나 오만 냥만 먹고 투정을 아니하는 얌전스런 원은 드물다.
 
94
도서원을 넌지시 불러놓고
 
95
"좀 옹색한 데가 있어 그러니 호포(戶布:納稅[납세]) 받은 돈에서 한 삼만 냥만 며칠간 돌려 쓸 수 없겠느냐?"
 
96
한다.
 
97
도서원이 혹시
 
98
"못하오."
 
99
하면 그는 돌아가 저의 집 문안에 들어서기 전에 도로 붙잡혀 들어와 형장을 맞고 갇히고 하여야 한다. 도서원의 뒤를 파면 그만한 죄는 얼마든지 나오는 것이다.
 
100
원이 그러는가 하면 이방이 쪽지를 적어 보내어 한 오천 냥이고 취해 간다. 취해 간다고 하지만 물론 도로 갚는 적은 없다.
 
101
호장이 또 몇 천 냥 취해 간다.
 
102
이렇게 해서 원이, 이방이, 호장이 먹은 몇 만 몇 천 냥을 도서원은 맨 먼저 젖혀논 오만 냥을 가지고 충을 채워놓는다. 만일 채워놓지 못하고 기한에 십만 냥을 올려보내지 못하는 날이면 포흠(逋欠)이라고 하여 감영으로 묶여가 졸경을 치르고서 가재를 팔든지 하여 물어놓든지 물 힘이 없는 사람이 면목을 바치든지 한다.
 
103
그 자리에서 백번 원이 암만을 취해다 쓰고 자빠졌소, 이방이 몇 천 냥, 호장이 몇 천 냥 집어 삼켰소 하고 발명하였자 아무 소용도 없다. 원이나 이방, 호장, 아냐 영의정이나 나라님이 가져갔더라도 그것은 사사니 네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104
포흠낸 도서원을 다스림에 있어서 적법(適法)이요 정당한 수단이라 할 것이었다.
 
105
조정은 그러나 또 한가지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106
조정은 늘 재정이 군색하였다. 김씨네가 세도를 하거나, 대원군이 세도를 하거나, 민씨네가 세도를 하거나, 세도하는 그 일문과 그 낭당은 살이 찌고 배가 불러도, 아니 그들이 살이 찌고 배가 부르면 살이 찌고 배가 부를수록 그와 반비례하여 조정의 재정은 더욱 군색하였다.
 
107
조정은 재정이 군색한 중에도 가장 딱한 것이 병정들의 요포(料布: 給料[급료])가 밀리는 것이었다. 한 달 두 달은 예사요 반 년치씩 밀리곤 하였다. 임오년(壬午年) 같은 해는 훈국군(訓局軍)의 요포가 자그마치 열석 달치나 밀렸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은 이 병정의 요포 밀린 것이 도화선이었다.
 
108
조정에서는 어떤 병영(兵營)에 요포가 밀린다치면 그 병영 가까운 고을 가운데 세납전이 기한에 미처 올라오지 아니한 고을 하나를 골라가지고
 
109
"너희가 아모 고을에 가서 세납전을 받아 그것으로 밀린 요포를 찾아 먹도록 하여라."
 
110
하는 지시를 한다.
 
111
병정들은 얼씨구나 좋다였다. 가서 밀린 세납전을 받아만 오너라 하여도 가면 세도를 부리고 잘 얻어먹고 뒷줄로 돈이 생기고 하는 판이라 마다 아니 할 터이거든, 항차 저희의 찾아먹을 것을 가 찾아 먹으라는데야 범연할 이치가 없었다.
 
112
정부가 자신의 직권(職權)의 한 부분을, 그 직권을 행사할 근거도 유래도 없고 적당치도 않고 한, 국가의 어떤 기관이랄지 심지어 사사로운 민간 단체 같은 것에다 일시일 망정 떼어 맡긴다는 것은 어지러운 국가와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인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가뜩이나 어지러운 국가와 사회의 어지러움을 더하게 하여 마침내는 국가와 사회를 망케 하는 원인의 한가지 고랑을 짓게 하는 것이다.
 
113
더딘 세납을 빨리 받으니 좋고, 그러함으로써 병정의 요포 밀린 것이 저절로 치르어지니 좋고, 진 소위 일거양득이요 조정으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그런 편리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병독은 무서운 것이 있었다.
 
114
때의 병정이라는 것은 거개가 막된 불량패들이었다. 일이 있는 아침 총 잡고 나가 목숨을 던지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 군인의 사명이요 의무요 하다는 각오를 지닌 자는 백 명에 한 명도 드문 형편이었다.
 
115
억지로 뽑혀온 자, 일이 하기 싫어서 들어온 자, 구복을 위하여 자원하고 들어온 자, 죄짓고 도망하여 들어온 자 이런 무리들이었다. 무지막지하고 교양인들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다 병정은 아뭏든 병정이랍시고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놈…… 이라는 것, 이것 한가지만은 남의 병정 못지 않게 강렬하였다. 본시가 막된 무리들이었는데 가뜩이나 병정이 됨으로써 생명에 대한 명일의 기약까지 없고 보니, 생각과 행동이 극단으로 막되어 먹을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116
입 하나만은 희떠웠다.
 
117
'전쟁이 나면 총 메고 나가 목숨 내던지고 외적 때려 쫓을 사람이 누군데? 우리네 병정 말고 또 있어?’
 
118
'우리는 나라에 목숨을 바친 몸이야. 함부로 굴다가는 괜히……’
 
119
'이 놈아 병인년(丙寅年) 정족산(鼎足山) 접전에 양인(洋人)놈들 혼똥을 쌘 게 누구신데? 바로 이 대감이셔.’
 
120
앞에서 총소리가 나면 꽁무리 뺄 궁리 먼저 할 잡이들이면서 입은 이렇게 희떠웠다.
 
121
이런 무리들로 하여금 가서 세납전을 받아 너희들의 요포 밀린 것을 찾아 먹으라 하였으니,
 
122
"오라질, 이 요는 주는 셈인가 마는 셈인가? 병정은 머 흙 쥐어 먹고 사는 재주있는 줄 아는감?"
 
123
하고 불뚝거리는 판이겠다 저희야 좋아 날뛰겠지만, 정히 광인에게 보검을 맡김과 다름이 없었다.
 
 
124
병정들은 도서원 장학수를 우선 초주검을 시켜논 후에 그 다음 뚜드려 먹는 판이었다.
 
125
저희가 나서서 도야지울의 도야지를 잡았다. 닭도 잡았다. 술을 도가지째 들어내다 걸렀다. 일변 밥을 짓게 하고.
 
126
열여섯 살 먹은 소부 선용의 아내는 부엌에서 밥을 짓는데 병정 놈 하나가 유독 흉악하게 생긴 것이 부엌을 들여다보면서
 
127
"각시 밥 얼른 지어. 그러구 이따 나와서 술 부어. 권주가 할 줄 알아?"
 
128
하고 제딴에는 농이겠지만 눈방울 부라리면서 꿱꿱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놀라 하마 기색할 뻔하였고, 그 빌미로 병이 들어 시름시름하다가 이듬해 봄에 죽고 말았다. 덕분에 선용은 소년 상처까지 하였었다.
 
129
병정들은 한 직판 뚜드려 먹고 나서는 발감기할 미영을 내오라 하였다.
 
130
가족은 선뜻 미영을 몇 필 내왔다.
 
131
병정들은 미영을 쭉쭉 찢어 발감기를 고쳐 하고 수건감을 장만하고 하였다.
 
132
짚신을 사들여라 하여 선뜻 짚신을 사들였다.
 
133
노자돈을 내오라 하였다.
 
134
가족은 선뜻 백 냥을 내다놓았다.
 
135
적다고 투정을 하여 다시 백 냥을 내다놓았다.
 
136
이렇게 무엇이고 요구하는 대로 선뜻선뜻 가족들은 응종하였다. 대주(大主)를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이 이네들의 솜씨에 ── 권한이 아니라 솜씨에 ── 매었으니 가족들 더러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보람은 그러나 장학수가 말꼬리에 상투 매여 끌려가면서 뒷 결박을 풀어주는 선심 한가지에서 밖에는 난 것이 없었다.
 
137
마침내 병정들은 미리서 마련해 가지고 온 실직한 참노로 장학수의 상투를 든든히 옭아 꼬리에 비끄러 매어 가지고 말에 올라 말을 몰았다.
 
138
말은 사람보다 걸음이 빨랐다.
 
139
장학수는 미처 말 걸음을 따르지 못하여 말이 상투를 끄는 대로 앞으로 꼬꾸라져서는 얼마씩을 질질 끌려도 가다, 네 손발로 기기도 하다, 겨우 일어서서 달음질도 치다 하였다.
 
140
얼굴에는 피가 흐르고 다리는 맞아서 절름절름 절고 하면서 부친이 그 모양으로 끌려가던 일이 선용은 그 뒤에 부친이 그 빌미로 필경 죽고 말았을 때보다도 더 분하고 치가 떨렸다.
 
141
양반이니 권력이니 하는 것에 대하여 선용이 어린 가슴에 사무치는 원한과 반감을 품게 된 것이 바로 이때에 비롯한 것이었었다.
 
142
장학수는 그렇게 붙잡혀 간 지 이레만에 감영에서 놓여 교군에 누워 집으로 돌아왔다.
 
143
녹지(綠紙)를 써놓고 놓여 나온 것이었었다. 녹지란 아무 때까지 포흠 낸 돈을 해다 바치겠다는 서약서 비슷한 것이었다.
 
144
장학수는 병석에 누워 땅을 팔고 빚을 내고 하여 이만 냥 포흠을 물었다.
 
145
도서원 삼 년이면 엔간히 힘을 잡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학수는 물욕도 과하지 못하고 사람이 다부지지도 못하고, 그런데다 원 백 아무(白某[백 모])의 무서운 갈퀴질과 사나운 이방과 호장의 손에 휘둘려 우난 돈을 모은 것이 없었다.
 
146
포흠을 물고는 며칠 있다 저승길을 떠났다. 병중에 실섭한 것과 모진 매를 맞고서 옥중에서 신음한 것과 그리고 울화, 이 빌미로 마침내 목숨을 버린 것이었다. 그것이 내일 제사를 받는 모레 ── 섣달 열엿샛날이었다.
 
147
선용은 모친과 상의하여 부친의 빚도 갚고 가대도 줄이고 하느라고 집을 팔고 변두리의 시방 사는 오막살이로 옮았다.
 
148
글공부를 작파하고 모친이 논 한섬지기를 속살로 장만하였던 것이 있어 그것을 끈삼아 농사를 지었다.
 
149
산에 올라가 나무도 하고 노루며 토끼 같은 것을 몰아 사냥도 하고 하였다.
 
150
그러는 동안에 기운이 놀랍게 늘어가고 몸이 날쌔어지고 하였다.
 
151
어떤 자신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52
활빈당(活貧黨)이 이름을 떨치고 의병이 일고 하던 시절이라 그런데서 오는 자극이 있었는데, 겸하여 기운과 몸 쓰기에 자신이 생기던 터라 선용은 이윽고 '나도 장차 보아서 한바탕……’ 막연하나마 이런 생각이 들게 까지 되었다. 그러면서부터 그는 태껸을 배우고, 마침 검객(劍客)으로 자처하는 노인이 있어 칼쓰기도 익히고 하였다. 또 포수를 따라 다니면서 총 쏘는 솜씨도 배웠다.
 
153
모친을 비롯하여 외숙들이며 부친과 가깝던 사람들은 선용이 일조에 글공부를 작파하고 농투성이가 되는 것을 애석히 여겨 글공부 더 계속하기를 권하였다.
 
154
그럴 때마다 선용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하였다.
 
155
"아전의 자식이 글이 암만 들으니 아전질이나 해먹었지 별 조화 있소? 아전이란 건 원이나 양반의 밥 아니오? 우리 아버지를 보시요. 돈이나 있으면 돈으로 벼슬을 사 원도 되고 양반도 되고 한다지만 돈이 어데 있소? 또 돈이 있다 하드래두 돈으로 사서 구차하게 뼉다귀 없는 양반 되어가지고 소위 관(冠) 쓴 도적 노릇 하기가 소원도 아니고…… 그저 마음 편케 땅이나 파먹지요."
【원문】1. 아전의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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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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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