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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자(墮落者) ◈
◇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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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 ~3.
현진건
1
타락자
 
2
11
 
 
3
마음의 방축(防築)은 고만 터지고 말았다. 유혹의 흐름은 거리낌없이 밀리었다. 이 물결 가운데는 싸늘한 이지(理智)와 뜨거운 감정이 서로 부딪고서로 쳤건만 이지는 흔히 쩔쩔 끓는 열수(熱水)에 넣은 얼음 조각 모양으로 사라졌다. 모든 것을 잊고 나는 종종 춘심을 방문하였다. 그 역시 언제든지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4
"왜 그처럼 아니 오셔요?"
 
5
그는 중문간에서 마당으로 삐죽이 나타나는 나를 보자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부르짖는 것이 항례(恒例)이었다.
 
6
"아까 왜 만나지 않았어?"
 
7
어느 때는 내가 이렇게 대답할 경우도 있었다.
 
8
"참 그랬지요. 나는 또 깜빡 잊었지. 금방 보고도 금방 아니 본 것 같애요."
 
9
하고 둘이 웃는 수도 있었다. 그리고는 밖이야 햇발이 따뜻하든 달빛이 밝든 밀장은 합문(合門)이 되었다. 사랑은 낙원을 지을 수 있다. 진세의 아모런 경치와 아모런 풍정도 이에 미칠 것이 무엇이랴! 거울같이 마주만 앉으면 그뿐이다! 말은 말 끝을 좇고 웃음은 웃음 뒤를 이었다. 피차의 처지를 설명하자 오뇌도 하고 번민도 한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여 하는 오뇌요 번민이라. 딴 일로 말미암은 그것보담 달랐다. 그것은 하고 싶어하는 때문이다.
 
10
"그런 생각을 다 하면 무엇합니까? 한시라도 재미있게 놀면 그 뿐이지."
 
11
찰나주의자인 그는 이렇게 끝을 맺고 가야금을 뜯기도 하였다. 이러다 돌아오는 날은 만족과 행복을 느꼈다. 물린 것은 아니지만 며칠 아니 보아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 갔다가 못 만나면 하로도 두세 번을 가고 싶었다. 저나 내나 무슨 고장이 생겨서 곧 아니 헤어질 수 없게 된 때도 그러하였다.
 
12
어머님이 밤 열 점 반 차로 동래(東萊)에서 돌아오시던 날이었다. 정거장 나가는 길에 나는 춘심의 집에 들렀다. 금심이가 있기 때문에 키스 한 번, 포옹 한 번 못하고는 나는 몸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다.
 
13
"왜 벌써 가셔요?"
 
14
금심은 나에게 매어달리며 모자 집으려는 팔을 막았다.
 
15
"아니, 집에 가 보아야 될 일이 있다."
 
16
라고 대답하였다. 웬일인지 말소리가 내 귀에도 허전허전하는 것 같았다. 어째 춘심에게는 가야만 될 사정을 말할 수 없는 것 같았다.
 
17
"이애, 고만 두어라. 오긴 어려워도 가긴 잘 가지. 만날 천날 간다, 간다."
 
18
라고, 춘심은 새모록하게 긁어 잡아당기었다. 모자는 썼건만 그 음향이 전기같이 나에게 끼치어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깐 답답한 침묵에 왼 방안 공기가 응결되는 듯 싶었다. 금심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만 있다. 춘심은 차마 가는 뒤 꼴을 못 보겠다고 하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시키시마(敷島[부도])’ 의 권연을 빼어 입으로 그 담배를 불어 빼고 흰 종이를 볼록볼록하게 맨들고 있다. 차라리 가지 말라고 나의 소매를 잡아 당겼던들 이렇게 가기 어렵지 않으련만!
 
19
"아이고, 좀 붙잡으셔요."
 
20
민망하였던지 금심이가 마츰내 침묵을 깨뜨렸다.
 
21
"고만 두어라. 양류(楊柳)가 천만사(千萬絲)인들 가는 님 어이하리."
 
22
라고 춘심은 노래 부르는 어조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건만 나를 쳐다본 애 끊는 정이 서린 추파는 무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다만 한 시간이라도 반 시간이라도 더 놀았으면 하였다. 그러나 기차 대일 정각은 이미 임박하였다. 뒷마루까지 나오는 수 밖에 없었건만 그와 작별치 않고는 차마 나려설 수가 없다. 나는 닫혔던 미닫이를 다시금 열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오직 한 번이라도 나를 보아나 주었으면!
 
23
"그냥 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 걸."
 
24
나는 진정을 농담으로 엄벙하였다. 그는 얼골을 들었다. 하염없이 웃으며,
 
25
"아모리 무정한 님인들 작별이야 안 할 수 없지."
 
26
하고 일어서 나온다.
 
27
사람 눈 없는 어슴푸레한 마루에서 둘의 그림자는 하나가 되었다.
 
28
"밖에 볼 일이 무슨 볼 일이오?"
 
29
그는 물었다. 그 소리는 성난 듯도 하고 우는 듯도 하였다.
 
30
"어머님이 오늘밤에 오신대. 시방 정거장에 나가는 길이야."
 
31
"진작 그런 말씀을 하실 게지. 그러면 어서 나가셔야 되겠구려."
 
32
하면서도 나를 놓지는 않았다. 더욱더욱 그의 몸이 달라붙음을 느끼었다.
 
33
나의 다리가 마루 끝을 나려서렬 적마다 무릎으로 막았다. 입으로 가지 말라는 것보담 그 몸짓의 말이 더욱 웅변이었다.
 
34
이윽고 나는 구두를 신었다. 그도 나를 따랐다. 중문과 대문 어름에서 우리의 그림자는 또 한번 합하였다.
 
35
"어서 가셔요."
 
36
"응."
 
37
"나는 어찌할꼬?"
 
38
"일찍이 좀 자려무나."
 
39
나는 그가 녹주홍등(綠酒紅燈)에 시달리며 밤마다 밤마다 잘 잠을 못 자는 것을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였다.
 
40
"어데 잠이나 오나요? 어슴푸레하게 달은 비치고……."
 
41
그 날은 봄의 기운이 벌써 뚜렷한 밤이었다. 담회색 구름은 연기같이 흐르고 있다. 그 속으로 윤곽조차 확실치 않은 달 그림자가 희미(稀微)한 광선을 흩고 있다. 무에라고 말할 수 없는 봄 향기에 채운 이 공기, 이 정적, 이 박명(薄明),, 더구나 베일에 감긴 처녀의 나체 같은 어스름 달 ─ 이 모든 것들에게는 비밀의 정열의 발효(醱酵)를 느낄 수 있었다. 봄 마음(春心)으로는 잠도 아니 올 밤이다. 나도 한참 황홀하였다.
 
42
"참 가셔야지, 차 시간 늦을라."
 
43
하고 그는 문득 감았던 팔을 풀었다.
 
44
"자아, 가십시다."
 
45
하면서 그는 양인(洋人)이 하듯 내 팔을 얼싸끼고 게을한 발자욱을 옮겼다. 그러면서,
 
46
"이러고 멀리멀리 갔으면."
 
47
이라고 꿈꾸는 듯이 말을 하였다.
 
48
문간 전등 밑에서 우리는 떨어졌다.
 
49
"어서 들어가."
 
50
나는 한 마디를 던지고 돌아섰다. 두어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오니 그는 그대로 서 있다. 두 눈이 이상하게 빛나는 것 같다. 내 마음 탓인지 모르되 분명히 눈물이 도는 듯 하였다. 몇 걸음 가다가 또 돌아보았다. 반만 대문안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의 초연(悄然)히 돌아선 꼴이 눈에 띄었다. 그것이 아주 사라지자 청승궂게 부르는 노래 한 가락이 나의 뒤를 따라왔다.
 
51
"욕망이난망(欲忘而難忘)이요, 불사이자사(不思而自思)로다. 갈 거(去) 자 설워 마라, 보낼 송(送) 자 나도 있다."
 
52
이런 뒤로는 정이 더욱 깊어진 듯하였다.
【원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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