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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자(墮落者) ◈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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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 ~3.
현진건
1
타락자
 
2
8
 
 
3
따라준 독삼탕(獨蔘湯)을 마시고 문간에서 발발 떠는 그와 작별한 나는 인적없는 쓸쓸한 거리로 나왔다. 식전 꼭두는 치웠다. 몹시 치웠다. 치움 그것이었다. 쓰라리는 발은 자욱자욱이 얼어붙는 듯 하였다. 귀가 떨어지는 것 같다. 발갛게 단 쇠가 얼굴에 척척 달라붙는 것 같다. 앞으로 휙 하고 닥치는 매운 바람은 나의 몸을 썩은 나뭇가지나 무엇처럼 지끈지끈 부수며 세포 속속들이 불어 들어가는 듯 싶었다.
 
4
'다시는 이런 짓을 아니하리라.’
 
5
나는 다시곰 생각하였다.
 
6
어머님은 고종 사촌 혼인 구경 겸 소풍 겸 동래에 나려가시고 집에 계시지 않았다. 할머님만 속이면 그 뿐이다. 어젯밤은 여러 친구에게 끌리어 청량사(淸凉寺)에 나갔다가 술이 취해서 못 왔다는 것을 돌차간(咄嗟間)에 생각해 내었다.
 
7
아랫목에 쪼그리고 앉아 계시던 할머님은 샐쭉한 입을 두 가장자리를 동글게 호로형(壺蘆形)으로 여시며,
 
8
"못된 데만 아니 갔으면, 못된 데만 아니 갔으면."
 
9
하고 소근거리셨다.
 
10
"늦게 졸고 보니 전차가 끈쳤겠지요. 어데 올 수 있습니까? 하는 수 없이 자고 왔습니다."
 
11
하고 거짓말을 꾸며댄 후 나는 우리 방으로 건너왔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12
머리를 빗고 있던 안해도 빙그레 웃으며,
 
13
"인제 속이 시원하지요?"
 
14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빛은 피로 물들인 것 같았다.
 
15
나는 고만 나무 둥치같이 곤한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오종(午種) 가까이 되어 간신히 안해에게 깨이어 일어난 나는 냉수로 세수(洗嗽)를 하면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社)에 들어가기는 갔으되 머리가 뿌연 안개에 깔린 듯이 몽롱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저 자고만 싶었다. 저녁 숟가락을 놓자마자 또 다시 죽은 듯이 잠이 들고 말았다.
 
16
그 이튿날 잠을 깨자 제일 먼저 해결해야 될 것은 그것을 어째 치를까 하는 문제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돈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주머니에서 잘각거리는 몇 푼 동전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많지 않은 월급이라도 또박또박 타기나 하였으면 그믐을 하로 밖에 아니 지낸 때이니 그것 수세할 것이야 남았으련만 곤란이 도극(到極)한 ○○사(社)는 사원 월급 지불은 커녕 신문 박을 종이도 못 사서 쩔쩔매는 판이다. 집으로 말하여도 아들의 방탕에 이바지할 재정은 없었다. 그러나 몇 십 원 장만할 거리는 나에게 있었나니 그것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미국제 18금 시계였다. 오랜 것이라 모양이 이쁘지 않은 대신 투박하고 튼튼하며 달리아 꽃도 앞 뒤 뚜껑에 아로새겼고 기계에 보석조차 박힌 값진 물건이었다.
 
17
"이것만 잡히면, 4,50원이야 얻겠지."
 
18
춘심이 집에 가던 날이나 이제나 힘 미덥게 생각하였다. 난생 처음으로 전당포를 찾아다녔다. 조심 많은 흰옷 입은 취리(取利)꾼들은 이 속모를 물건을 퇴각하기에 서슴지 않았다. 어느 일본 질옥(質屋)에서 35 원에 잡히는 수 밖에 없었다.
 
19
그 다음 문제는 전달할 수단이었다. 봉투에 넣어 우편으로 보내고 아주 끈을 떼어버리려 하였다. 양심의 반성도 맹렬하였거니와 한 번 겪어 보니 그 탐탐스럽지도 않았음이라. 그러나 야릇한 염려가 나로 하여금 주저하게 하였다. 봉투에 넣어 보내는 것은 많은 금액에만 쓰는 격식인 것 같았다. 더구나 그리함은 그와 나의 사이를 이도(利刀)로 싹 비어 버리는 것 같다.
 
20
그는 실망하리라. 실망한 그만치 나를 욕하리라. 영구히 그를 대할 낯이 없으리라 하매 어째 차마 못할 일인 듯 싶었다. 끊는데도 톱으로 슬근슬근 나무 썰듯 누그러운 방법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21
'그것은 꾸며대는 소리일다! 정말 끊으려면 저야 실망을 하든 욕을 하든 대할 낯이 없든, 꺼릴 것이 무엇이냐?! 그런 염려를 하는 것은 끊으려면서 아니 끊으려는 것이다!’
 
22
나는 마음 어데인지 이런 가책을 느꼈다.
 
23
'끊고 아니 끊는 문제보담도 네가 침닉(沈溺)이 될까 아니 될까가 더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빠지지만 않으면 그 뿐이 아니냐? 슬근슬근 정을 붙여 둔 들 너에게 해로울 것이야 무엇 있나? 울적하고 무료할 제 일시의 위안거리는 꽤 될 것이다.’
 
24
다른 소리가 또 이렇게 변명하는 듯하였다. 마츰내 이런 결론을 얻었다.
 
25
'이왕이면 한번 보기나 하자, 그 역시 사람이니 너무 매몰스럽게 함은 내 도리가 아니다.’
 
26
맨숭맨숭한 정신으로야 직접으로 돈을 건넬 수 없었다. 어느 요리점에 다리고 가서 자미있게 놀다가 그도 취하고 나도 취한 후 그의 품속에 슬그머니 넣어주리라 하였다.
 
27
여기에 대하여 안해는 극렬히 반대하였다. 안해의 태도는 하롯밤 사이에 돌변하였다. 그의 주장을 의지하면 그런 짓은 성공도 하고 재산도 넉넉한 뒤에 할 일이었다. 하롯밤이면 무던하지 이틀 밤부터는 과한 짓이었다. 참말 끈을 떼려 할진댄 춘심을 아니 보는 것이 상책인 동시에 돈을 봉투에 넣어 보냄이 지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돈도 다 줄 것이 아니니 20 원이면 넉넉하였다. 10 원은 내가 쓰고 5 원은 자기가 써야 되겠노라 하였다.
 
28
"무슨 짝에 35 원 템이나 주어요? 만날 용돈이 없어 허덕지덕하면서. 나도 한 5 원 있어야 되겠어요. 먹고 싶은 것 좀 사서 먹을 터이야요."
 
29
안해는 이렇게 말을 마치었다. 태기있는 지 삼사 개월 되는 그는 불가항의 힘으로 도미국이 먹고 싶었다. 물 많은 배(梨[이])가 먹고 싶었다. 나는 이 요구를 아니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돈만 치르고 열 점이 아니 넘어 돌아올 것을 재삼 타이른 후 나는 춘심의 집으로 왔다.
 
30
"오늘은 오실 줄 알고 아모 데도 아니 갔지."
 
31
춘심은 웃는 낯으로 나를 맞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는 못 알아보리만큼 어여뻤다. 끊으리 말리 한 것이 죄송할 지경이었다.
 
32
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도원으로 나는 춘심을 끌고 왔다.
 
33
우리는 한동안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다. 이야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포옹도 하고 키스도 하였다. 홀연 춘심은 내 손을 잡아다리어 제 바지를 만져 보이며,
 
34
"퍽도 뻣뻣하지요. 따뜻하라고 서양목(西洋木)으로 바지를 해 입었더니만……."
 
35
"툭툭한 게 좋구먼."
 
36
나는 무심한 듯이 대답을 하였으나 춘심의 그 말에 무슨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았다. 사치만 일삼는 시체(時體) 기생과 다른 저의 질소(質素)를 자랑함일까? 또는 명주(明紬) 바지를 해 달란 말인가? 마츰 그 때에 그는 게으르게 기지개를 켠다. 누구에게 절이나 할 것처럼 깍지 낀 손을 내어밀었다. 나는 반지 하나 없는 그의 손가락을 보았다. 명월관 지점에서 처음 만나던 때에 나는 그의 손가락에 적어도 두어 개 반지가 끼인 것을 보았다. 나는아까 의심조차 한꺼번에 푼 듯 싶었다.
 
37
"흥, 내가 반지를 해 줄까 하고."
 
38
나는 속으로 '요년!’ 싶었다. 그러면서 해 주고도 싶었다. 묵연(黙然)의 욕망을 못 채워 주는 것이 남아(男兒)로 치욕인 듯도 하였다.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의사 표시를 보기 전에 한시 바삐 주려던 돈을 주었으면 하였다. 그러나 요리 값이 얼마인지 알 수 없어 주저주저 하고 있었다.
 
39
"고만 가요."
 
40
그는 후끈후끈 단 뺨을 나의 어깨에 쓰러뜨리며, 나의 마음을 안 듯이 소근거렸다. 요리 값은 8 원 얼마이었다.
 
41
나는 남은 돈 20 원을 쥔 주먹을 내어 밀며,
 
42
"저어…… 이 것 담배용에나 보태 써라."
 
43
라고 나는 목에 걸린 소리로 머뭇머뭇하였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44
"싫어요, 싫어요."
 
45
하고 부르짖었다.
 
46
"얼마 아니 된다마는 정으로 받으렴. 돈이 아니고 정이다."
 
47
"기생은 돈 주어야 정 붙는 줄 언제부터 알았소? 흥 돈! 돈! 기생년 은정을 정으로 못 찾고 돈으로 찾는담!"
 
48
하고, 춘심은 한숨을 내어쉬었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49
"흥, 돈이 정, 정이 돈! 기생년의 팔자란!"
 
50
춘심은 또 한번 괴로운 한숨을 토하였다. 애닯은 슬픔에 쌓인 그 뜨거운 입김이 마치 나의 심장을 스치는 듯하였다. 그도 사람이다, 여성이다. 시들고 곯아졌을지언정, 뜯기고 짓밟히었을지언정, 그의 가슴에도 사랑의 움은 있으리라. 지금 그 말은 인몰(湮沒)해 가는 사랑의 애끊는 신음이리라. 나는 마치 그 사랑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그를 휩싸 안았다. 나는 그의 가슴에 온미(溫味)와 고동을 느꼈다. 마치 그의 사랑이 나에게 이렇게 속살거리는 듯 하였다.
 
51
"나는 다 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봄 날과 같이 따뜻합니다. 나의 숨은아주 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맥이 뜁니다. 오오! 나를 덥혀 주셔요! 북 돋워 주셔요!"
 
52
그 말에 응하는 것처럼 나의 목소리도 소근거렸다.
 
53
"덥혀 주고 말고. 북돋워 주고 말고. 아아 불쌍한 사랑의 넋이여!"
 
54
우리는 십 분 동안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진 뒤에도 우리는 어깨를 겨누고 같이 걸었다. 돌아온 데는 물론 그의 집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만토 포켓 안에 지폐 두 장을 넣고 말았다.
【원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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