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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자(墮落者) ◈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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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 ~3.
현진건
1
타락자
 
2
4
 
 
3
내가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잠을 깬 때는 눈을 부시게 하는 햇발이 문살을 쏘고 있었다.
 
4
어찌 된 셈인가? 지금껏 나의 가슴에는 춘심의 온유한 몸이 녹신거리고 있었는데…… 여기는 암만해도 그의 방은 아니다. 확실히 우리 집이다. 보라! 윗목을 빽빽하게 차지한 옷걸이, 삼층장, 반다지 그 위에 이불을 싼 모란꽃을 수 놓은 물 날은 야단 보(褓). 문갑 위와 밑과 가운데 뒤 숭숭하게 재이고 꼽혀있고 누인 책자들, 틀림없는 우리집 건넌방이다.
 
5
흐릿한 기억 가운데 문득 어젯밤 헤어지던 광경이 떠나왔다.
 
6
몇 아니 남은 손들도 외투를 입으며 모자를 찾게 되었다. 그 때가 되도록 나는 춘심을 놓지 않았다. 언제든지 언제든지 그의 곁을 떠나기 싫었음이라. 하건만 딴 기생들이 제 만토도 있고 셈도 따질 요리점 사무실로 사라질 제 춘심이도 아니 일어설 수 없었다.
 
7
"어데를 가?"
 
8
"사무실에 가야지요."
 
9
"나하고 같이 가!"
 
10
나는 어린애 모양으로 울 듯이 부르짖으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마치 한번 놓치면 다시 못 잡을 행복을 붙드는 것처럼. 그럴 때 어째 구두 생각이 났던지 그것을 불현듯 집어 들고 그의 뒤를 따르려 하였다.
 
11
"창피합니다. 남이 흉을 봅니다. 대문에서 기다릴 것이니."
 
12
그는 이렇게 타이르자 나를 내어 버리고 그림자를 감추었다. 그 때 시커먼 실망이 납덩이같이 나의 가슴을 나리지르던 것을 지금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하여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까맣게 모를 일이다.
 
13
나는 고개를 들어 둘러 보았으나 자리끼는 벌써 거기 없었다.
 
14
"물! 물 주어!"
 
15
라고, 나는 성난 듯이 소리를 질렀다.
 
16
황망한 발자최가 마루를 울릴 겨를도 없이 안해가 물그릇을 들고 들어온다. 김이 무럭무럭 남은, 미리 덥혀 두었음이리라.
 
17
"무슨 술을 그렇게 잡수신단 말입니까? 왼 골목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치고 대문을 부서지라고 짓두드리고……. 야단야단 해도 그런 야단이 어데 있겠습니까?"
 
18
내가 살 듯이 물을 들입다 켜고 있는 동안, 안해는 발간, 물 묻은 손을 요 밑에 넣고 이런 말을 하였다.
 
19
"내 원 참."
 
20
안해는 말을 이어,
 
21
"마루에 그냥 털썩 드러 누우시더니, 세상 일어나시나요. 죽을 애를 써서 근근히 방에 모셔다 놓으니 외투를 입으신 채 쓰러지시지요."
 
22
나는 묵묵히 물만 마시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론 또 무척 성가셨구나 하였다.
 
23
나는 가끔 이런 괴로움을 그에게 끼치었다. 이뿐 아니라 가슴이 답답할 제, 비위가 틀릴 제, 화증 풀이도 그에게 하였다. 설운 사정도 그에게 하였다. 사회에서 받는 나의 불평, 가정에서 있는 나의 울분, 또는 운명에 대한 저주들 말끔 그에게 퍼부었다. 그가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인 듯하게 나는 그를 들볶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싫다 아니하였다. 쓰리다 아니하였다, 달게 받아주었다. 까닭없이 자아치는 애닯은 슬픔으로 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뿌릴 제,
 
24
"왜 이리 하셔요, 왜 이리 하셔요?"
 
25
하는 그의 눈물 젖은 부드러운 소리가 슬픔을 거두어 주었다. 또는 공연히 부글부글 피어오르는 심사를 어찌할 수 없어 억메를 덮어 죄 없는 그를 야단을 치다가도 그 또렷또렷한 눈치를 보면 어느 결엔지 마음이 가라앉음을 깨달았다. 여기 나는 불충분하나마 불만족하나마 위자(慰藉)도 얻고 행복도 스러웠다.
 
26
만일 그가 없었던들 나는 벌써 타락의 심연에 왼 몸, 왼 마음을 다 빠뜨리고 지금 쯤은 헤어날 수도 없게 되었으리라.
 
27
"에그, 물 고만 잡수셔요. 진지가 벌써 다 되었는데."
 
28
하고 그는 물그릇을 앗는다. 그리고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그의 눈과 입술에 문득 의미 있는 웃음이 흐른다.
 
29
"어젯밤에 날더러 무에라고 한 줄 아셔요?"
 
30
"무에라고 하기는!"
 
31
"그래, 모르셔요?"
 
32
"나 몰라."
 
33
"그런데 어젯밤에 어데 가셨습니까?"
 
34
"명월관 지점에 갔었지."
 
35
"기생이 왔지요?"
 
36
"그럼, 왜 그래?"
 
37
"그렇지요."
 
38
하고, 안해는 북받쳐 나오는 웃음을 못 참겠다는 듯이 진저리를 치며 웃는다. 사르르 감기는 눈초리에 가는 금이 잡히고 연한 뺨살이 광대뼈 위로 토실토실 하게 밀리자, 장미꽃 봉오리가 피어나듯 입술이 동글고 오목하게 열리는 것이 그의 웃음의 특징인 동시에 또 그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특징이었다.
 
39
"왜 말을 아니하고 웃기만 웃어?"
 
40
안해는 웃음에 막히어 말을 이루지 못 하면서,
 
41
"저어, 하하하하……. 아이고, 참 우스워 죽겠네……. 저어……."
 
42
"저어……하지 말고 말을 해요."
 
43
"저어……하하하하. 한잠을 주…… 주무시고 부시시 일어나시길래 외투와 두루막을 벗겨 드리려 하니까 하하하하."
 
44
하고, 그는 이불 위에 무너지며 어깨를 들썩거리고 한참 웃음에 잦아진다.
 
45
나는 멋모르고 빙그레 하며,
 
46
"말을 해요, 말을 해요."
 
47
하였다.
 
48
이윽고 안해는 웃음의 파문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다홍빛 같은 얼굴을 들더니,
 
49
"저어…… 눈을 감으신 채……하하하하, 나 나를 한 팔로 스르르 잡아당기시며 하하하하 춘심이 춘심이 하 하시겠지요. 하하하하, 그 춘심이란 게 누구이야요?"
 
50
나는 가슴이 뜨끔하였지만 무안새김으로 빙그레 웃으며,
 
51
"춘심이가 춘심이지."
 
52
하고 시침을 뚝 땄다.
 
53
그러나 별안간 춘심의 아름다운 모양이 선명한 활동사진같이 선뜩 머리에 비쳤다. 환영에 달뜬 나의 시각이 안해의 옥양목 저구리에 붉은 광선이 사르르 덮힘을 느끼자, 어느 결엔지 연분흥 국사(庫紗[고사]) 저구리 입은 춘심이가 연기같이 나의 앞에 앉아 있었다…….
 
54
"무엇을 이렇게 생각하셔요?"
 
55
하는 안해의 말소리를 들은 때에도 나의 눈은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말뚱말뚱 하였다.
 
56
그 다음날 밤에야 나는 C와 함께 춘심의 집에 갔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야 한 시가 바빴지만 다방골에 서투른 나는 C의 힘을 아니 빌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집 번지는 내가 알았다. 취중에 오직 한 번 들은 그 숫자가 야릇하게도 나의 기억에 새긴 듯이 남아 있었다. 다만 그 집 찾기가 곤란도 하고 또 이런 명예롭지 못한 방문을 혼자 하기 싫어서 C를 힘입으려는 것이라.
 
57
어젯밤에도 두 번이나 C를 만나려 하였건만 출입이 잦은 C는 여관에 붙어있지 않았다. 오늘도 저녁 일찍이 서둘렀지만 긴치 않은 C의 방문객으로 말미암아 나는 지리한 시간을 꿀꺽꿀꺽하고 아니 참을 수 없었다. 기쁜 기대와 달디단 희망에 눈을 번쩍이면서 가슴을 뛰면서 길에 나선 지는 아홉 시가 훨씬 지난 때이었다.
 
58
그의 집은 광천교(廣泉橋)에서 남쪽 개천을 끼고 한참 올라가다가 조그마한 다리 놓인 데서 가운데 다방골로 빠지면 오른편 셋째 골목 막다른 집이었다. 이 근처에 발이 넓은 듯한 C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발견하였다.
 
59
대문 안으로 쑥 들어선 우리는 흘러나오는 가야금 가락에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그 날 밤 춘심의 가야금 뜯던 채화(彩畵) 일폭이 다시금 얼른 하고 나의 안계를 스쳐 간다. 그 남실남실하는 보얀 손가락이…… 그 반질반질하는 까만 머리가…….
 
60
거침없이 중문을 열어젖힌 C는 점잖게,
 
61
"이리 오너라."
 
62
고 불렀다. 그 소리가 떨어짐을 따라 묵은 악기도 울림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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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십니까?"
 
64
안에서 고운 목소리가 묻는다. C는 성큼성큼 마당으로 사라졌다. 나는 오히려 하회(下回)를 기다리며 어둠침침한 중문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윽고,
 
65
"들어와요."
 
66
란 C의 부름을 듣자 환희의 전율이 찬물처럼 왼 몸에 쭉 끼치었다. 춘심이가 있구나 하였다.
 
67
나는 야릇한 불안을 느끼며 허청허청 발길을 옮기었다. 열린 미닫이 사이로 밝게 흐르는 광선을 막은 듯이 서 있던 처녀 하나가 이상한 눈치로 나를 살피다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68
"올라오셔요."
 
69
하였다. 얼른 방안을 엿보았다. C는 벌써 방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70
춘심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71
안방에서나 옆방에서나 또는 나 못 본 어슴푸레한 한 구석에서나 춘심의 튀어나옴을 마음 그윽이 바라면서 나는 구두를 끌렀다.
 
72
"형이 어데 갔어?"
 
73
C의 이 말에 나의 어리석은 바람은 속절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나의 마음은 밤같이 어두웠다.
 
74
"유일관(唯一館)에 갔습니다."
 
75
하고 그 동기(童妓)는 놀랐다는 듯한 눈으로 묻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끝 모를 검은 빛에 맑은 광채가 도는 그의 눈매는 더할 수 없이 어여뻤다. 열 대여섯이 될락 말락 하리라. 봉올봉올 피려는 목련꽃처럼 그의 얼굴은 탐 스럽고 아름다웠다.
 
76
나는 묵묵히 숨소리만 씨근거렸다. 웬일인지 낯이 화끈화끈 타는 듯 하였다. 하염없이 시선만 이리저리 던졌다. 세간은 그리 화려하다고 못하리라. 옷걸이와 이불 얹힌 커다란 궤와 일본제 경대뿐이었다. 그러나 기생 방에만 있는 고혹적 색채는 모본단 보료에도, 비스듬히 세운 가야금에도 농후하게 흘러 있었다. 한편 벽 알맞은 자리에 화판(畵板)에 넣은 양화(洋畵) 한 장이 걸렸다. 그것은 푸른 연기가 어린 듯한 산 윗머리를 흰 구름이 휘휘 둘렀는데 수풀 우거진 곳에 푸른 '리본’ 같은 강이 흐르며 그 위로 몽롱한 달빛 안은 일엽편주(一葉扁舟)가 남녀 단 둘을 싣고 소리없이 떠나간다. 그것으로 나는 고만 주인의 취미가 고상하고 풍아한 줄 짐작하였다.
 
77
"애써 오니 어째 없담!"
 
78
이윽고 나는 자탄 비슷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농담같이 하랸 것이 어째 절망의 가락을 띠고 있었다. 벌린 입도 웃음을 이루지 못하였다.
 
79
"저어 형님한테 기별할까요?"
 
80
나를 살피기를 마지 않던 금심(琴心)은 ─ 이것이 그 동기(童妓)의 이름이다 ─ 인제 알았다, 하는 얼굴로, 우리에게 물었다.
 
81
"무얼 그럴 것은 없지."
 
82
C는 거절하였다.
 
83
"아니 저어…… 형님이 가실 때 손님이 오시거든 알게 하라 하였어요."
 
84
"어떤 손님이?"
 
85
나는 가슴을 뛰며 물었다.
 
86
그는 조금 망상거리다가,
 
87
"저어 오늘 오실 손님이 계시니 그 손님이 오시거든 ……."
 
88
"나를 가리킴이 아니로군."
 
89
나는 번개같이 생각하였다.
 
90
"우리는 오늘 온다고 한 손님이 아니야. 온다고 하기는 그저께 밤이야."
 
91
나는 비웃었다.
 
92
"네, 그렇습니까?"
 
93
하고, 금심은 무안한 듯이 고개를 숙이다가 무엇이 생각난 것같이,
 
94
"참, 저어 그저께 밤에 손님 두 분이 오신다고 식도원(食道園)에서 인력거꾼이 왔습니다."
 
95
나는 더욱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월관에서 놀았거늘 식도원이 또 웬 말인가!
 
96
"식도원에서!"
 
97
나는 부지불식간에 부르짖었다.
 
98
"우리는 명월관에서 놀았는데…… 그러면 딴 손님이던게지."
 
99
금심은 놀라 나를 바라본다. 그 큼직하게 뜬 눈은 마치 이런 말을 하는 듯 하였다.
 
100
"어째 그럴까? 우리 형님의 기다린 손님은 분명히 이분인데……. 그러면 내가 잘못 들었던가? 식도원아니라 명월관이던가?"
 
101
"그래 손님이 왔던?"
 
102
나의 말은 급하였다.
 
103
"아니야요. 형님 혼자만 왔어요. 와서 손님 두 분이 아니 왔더냐고 묻습디다."
 
104
모를 일이다! C의 말을 들으면 나보담 먼저 나온 그는 문간에서 춘심을 만났는데 춘심의 말이 준비가 다 있으니 나와 같이 오라고 신신부탁하였다 한다. (이 준비란 것은 곧 다른 기생을 C에게 붙여 주겠다는 뜻이라) 두 분 손님이라 함은 곧 나와 C를 지칭함이리라. 그러하지만 식도원 운운은 풀 수 없는 의문이다.
 
105
"그 날 밤에 매우 우리를 기다린 모양이지."
 
106
돌아오면서 나는 C에게 물어 보았다.
 
107
"기다리긴 무엇을 기다려?"
 
108
C는 이 천치야 하는 어조로,
 
109
"무엇 보고 기다리겠소? 오! 얼굴이 어여쁘니까. 얼굴 뜯어 먹고 사나, 논 팔고 밭 파는 놈이라야지, 서울 온 지 삼 년이나 되는 년이 나지미가 자녀 ××하나 뿐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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