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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자(墮落者)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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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 ~3.
현진건
1
타락자
 
2
2
 
 
3
시간은 이미 일곱 점 반이나 되었건만 손들은 오히려 모여 들지 않았다. 너르다는 명월관 C지점 일호실은 쓸쓸하게 비어 있다. 손이라고는 C와 나 외에 우리를 초대한 K와, 그의 절친한 친구로 이 연회의 설계자이고 준비원인 D가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들뿐은 아니다. 우리가 들어올 때 밥을 먹다가 일어선 기생둘도 있다.
 
4
그의 하나는 한 번 본 일이 있는 계선(桂仙)이란 것이었다. 그는 이미 기생으론 노자(老子)를 붙일 만한 낫세이다. 삼십 가까웠으리라. 그도 한참 당년에는 어여쁜 자태와 능란한 가무로 많은 장부의 간장을 녹이었다 한다. 어느 이름난 대관을 감투 끝까지 빠지게도 맨들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 보는 나의 눈에는 그런 일이 거짓말인 듯 싶을 만큼 그의 얼굴은 사람을 끄는 무슨 힘도 없었다. 두 뺨은 부은 듯이 불룩하고 이마는 민 듯이 훌렁하였다. 더구나 그 시들시들한 살빛에는 벌써 늙은 그림자가 깃들인 것 같다.하건만 여성으로는 차마 못 들을 음담외설(淫談猥設)이 날 적마다 그 검은 눈을 스르르 감아 붙이며, '흥흥’ 하는 콧소리와 함께 그 뜨거운 입술을 비죽비죽하는 것은 음탕 그것이었다. 저기 옛날 솜씨의 남은 자최를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는지!
 
5
그렇다고 그에게 나와 고향을 같이 한 명예 있음조차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그가 나를 처음 볼 때,
 
6
"저 이가 아모 지배인의 아우가 아닌가요?"
 
7
라고 C에게 물었으리만큼 그는 지금 어느 시골 ○○회사 지배인으로 있는우리 형님을 잘 알았다. 어린 나를 몇 번 보기조차 하였다 한다. 따라서 그는 기생 중 나를 아는 오즉 한 사람이었다.
 
8
또 하나는 처음 보는 기생이었다. 나의 주의는 처음부터 그에게로 끌리었다. 공평하게 말하면 그 또한 미인 축에 끼이지는 못할는지 모르리라. 이마는 조금 좁고 코끝은 약간 옥은 듯 하였다. 하나 그 어여쁜 뺨볼과 귀여운 입 언저리가, 그런 흠점을 감추고도 남았었다. 그것보담 그 어린 우유(牛乳) 모양으로 하늘하늘한 앳된 살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적어도 그 날 밤에는 그렇게 보였다.
 
9
"너 요사이 나지미 많이 정했니? 그래 나는 네 나지미 될 자격이 없단말이냐? 나도 좀 되어 보자꾸나, 응?"
 
10
몇 만금(萬金) 부모의 재산을 오입의 구덩에 쓸어 넣고, 그 대신 몇 곡조 노래와 몇 마디 농담을 얻은 D는, 그 통통하게 살찐 손을 늘여 그 기생의 손목을 잡고 , 빙글빙글 웃어가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들은 밥을 다 먹고 상도 치운 때이었다.
 
11
"네 좋습니다."
 
12
하고 그 기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13
"그래 정말이냐?"
 
14
"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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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대어드는 D를 밀치며 문득 소리를 쳐 웃는다. 입술이 귀염성 있게 방싯 열리며 하얀 쌀낟같이 찬찬한 이빨 사이에 다문다문 섞인 금니가 유혹적으로 번쩍인다. 나의 입술에도 어느 결에 웃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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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흥, 논을 팔란 말이지, 밭을 팔란 말이지? 에이고 요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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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D는 손으로 그의 뺨을 치고, 쳤다느니보담 스치고 물러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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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좀 오게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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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을 보면 감질이 나서 못 견디는 C는 애교의 웃음을 흘리며 그 기생을 부른다. 그 때 나는 C와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슴이 출렁하였다.
 
20
"우리가 어째 여태껏 서로 만나지 못했담?"
 
21
채 앉지도 않은 그의 손을 잡아다리며 C는 말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22
"이름이 무엇?"
 
23
"춘심이야요."
 
24
"고장이 어데야?"
 
25
"○○이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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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그가 나와 한 고을 사람임을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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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온 지 얼마나 되었나?"
 
28
"한 삼 년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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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참 내가 너무 고루하군."
 
30
C는 인제 내 판이라 하는 듯이 일변 몸을 그리로 다그며 일변 그 독특한 농담을 늘어놓기 비롯하였다. C의 하는 양은 마치 열 번 스무 번 보아 친히아는 듯하였다. 나는 물끄러미 그들의 하는 양을 보고만 있었다. 나의 눈에는 요술쟁이가 입으로 오색 종이를 뽑아냄을 구경하는 촌뜨기의 그것 모양으로 의아(疑訝)와 경탄의 빛이 있었으리라. 보기 사나웁기도 하였다. 부럽기도 하였다. 어찌하면 저렇게도 말을 잘 붙일 수 있는가 하고, 가는 손을 함부로 쥘 수 있는가, 한시바삐 C의 대신에 내가 그와 말을 하였으면, 손을 쥐었으면 하였다. 선망(羨望)에 타고 있는 나의 눈은 맛난 음식을 먹는 어른의 입만 바라보는 어린애의 그것 같았으리라.
 
31
어느덧 C의 팔은 비스듬히 춘심을 안고 있다. 사랑을 속살거리는 애인들처럼 C의 입술은 춘심의 귀에 닿을 듯 말 듯하다.
 
32
"에그, 점잖은 이가 그게 무슨 말씀이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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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춘심은 몸을 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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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길래 그런 말을 하지, 어린애가 그런 소리를 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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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C는 제 말솜씨에 만족한 것 같이 빙그레 웃었다.
 
36
춘심은 나에게 곁눈질하며 빈정대는 듯이 방긋 웃는다. 마츰 그 순간인즉, 나도 춘심을 보고 웃을 때이었다. 그것은 C의 재담 때문이 아니다. 아까부터 생각하고 생각하던 춘심에게 건넬 묘한 말을 얻고 나오는 줄 모르게 띠운 웃음이라. 그런데 의외에 두 웃음은 마주쳤다. 어째 내 마음을 춘심에게 꿰뚫려 보인 듯싶어 나는 하염없이 얼굴을 붉히었다. 그래도 나의 가슴에는 기쁜 물결이 술렁하고 퍼지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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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좋아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나의 피를 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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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오고 간 이 웃음이 둘 사이에 거멀못을 친 듯이 그와 나를 달라붙게 하는 듯 싶었다. 나는 고만 무조건으로 그가 정다웠다. 뜻도 모를 무슨 말이 불쑥 올라온다. 그 찰나이었다. 밀창이 고이 열리며 보얀 얼굴과 푸른 치마가 얼른한다. 그 다음 순간에 나는 누구를 향하는지 모르게 한 팔을 짚고 인사하는 기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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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생도 계선이보담 나이 많았으면 많았지 어리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얼굴이야! 분으로 메이고 메인 보람도 없이 드문드문한 손티, 가뭇가뭇한 주근깨, 깎은 듯한 뺨, 그야말로 아모렇게나 생긴 것이었다.
 
40
'저까짓 것을 왜 불렀을까?’
 
41
나는 속으로 의아히 여길 지경이었다.
 
42
"형님! 인제 오셔요?"
 
43
춘심은 반갑게 부르짖으며 불현듯 몸을 일으킨다. 몹시 시달리는 C로 부터 벗어날 핑계 얻음을 못내 기뻐하는 듯이.
 
44
C는 아모 일도 없었던 모양으로 시침을 뚝 따고 그 곱슬곱슬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제야 손들이 모이지 않음을 깨달은 것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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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들 오지를 않아?"
 
46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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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의 거리는 멀어지고 말았다. 그에게 말을 건넬 절호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자아 수십 명이나 올 터이니 그는 어느 틈에 끼일는지! 누구하고 꿀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을는지! 나는 하릴없이 뒷전만 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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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못생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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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속으로 애닯게 부르짖었다.
 
50
저희들끼리 모인 그들은 이야기꽃을 필 대로 되게 한다. 연잎에 실비 뿌리듯 속살속살하기도 하며 때때로 옥반(玉盤)을 깨뜨리듯 때그르르 하고 웃기도 하였다. 나는 어린 듯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선이가 눈으로 나를 가리키며 춘심이더러 무에라 무에라 하는 듯 하였다. 그는 고개를 까딱까딱 하기도 하고 슬쩍슬쩍 나에게 시선을 던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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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하는가 보다."
 
52
하고 나는 눈을 나리 감았다. 얼굴에 춘심의 시선을 느끼면서.
 
 
53
사람들은 여덟 점이나 되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서로 맞춰 둔 것 같이 한 사람 뒤를 한 사람이 잇고 그 사람이 채 자리도 잡기 전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었다. 어느 결에 갈고리란 갈고리는 모자와 외투가 빈틈 없이 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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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기생 소리나 한 마디 들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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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늘 하는 인사와 무미한 담화(談話)가 끝나고 잠깐 무료한 침묵이 있은 후 누가 이런 제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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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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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소리가 찬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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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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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면 내가 도맡지요, 하는 듯한 얼굴로 D는 말을 하였다. 그의 쉰 듯한 소리는 뽀이는 불렀다. 퉁명스럽게 꾸짖는 듯이 뽀이에게 분부하기 시작하였다. 가야금이 들어왔다. 장구가 들어왔다.
 
60
갈강갈강한 뽀이는 가야금을 잊(忘)기도 하고, 장구가 소리가 잘 아니 나기도 하여 D에게 톡톡히 꾸중을 모시었다. 하건만 그 뽀이는 '그런 야단이야 밤마다 만납니다.’ 하는 듯이 그 하이칼라 한 머리를 긁적긁적하고는 허리를 굽실굽실하며 연해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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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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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시키는 대로 하였다.
 
63
먼저 춘심이가 가야금을 뜯기로 하였다. 그는 나에게 등을 향하고 줄을 검사하기 비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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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계집애가 왜 돌아를 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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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증을 내었다. 그대도록 나는 그의 얼굴을 보기나마 언제든지 계속하고 싶었다.
 
66
줄을 고르고 저희들끼리 문의도 끝난 뒤, 우는 듯한 구슬픈 가야금 가락을 맞추어 느리고 순한 춘심의 소리가 섞여 들리었다.
 
67
"가자가자 어서 가, 위수 건너 백로가……."
 
68
말소리는 뚝 끈치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리로 몰리었다. 그리고 제각기 고대 음률에 지식이 있어 그 잘잘못을 가릴 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 지식의 발표로 어느 구절에 '좋다’ 하여야 옳을지 정신을 모르고 있는 듯 싶었다.
 
69
"……기경선자(騎鯨仙子)간 연후 공추월지단단 자라 등 저 반달 실어라 우리 고향을 함께 가……."
 
70
노랫가락은 멋있게 슬쩍 넘어간다.
 
71
'흥흥’ 하는 콧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72
나도 부지불식간에 '흥’ 하고 말았다. 그 노래는 마치 봄바람 모양으로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 서슬에 얼어붙은 무엇이 스르르 풀리는듯 싶었다. 그 무엇이 활개를 벌리고 우줄우줄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어깨가 우쭐우쭐할 리 있으랴! 이럴수록 그 노래의 임자가 보고 싶었다. 그 표정이 어떨까? 그 입술이!…….
 
73
'저 맞은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는 척하고 슬그머니 그의 정면에 가 앉을까?’
 
74
절묘한 낙상(落想)이다! 그러나 나의 몸은 무엇으로 동여 맨 것같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의 눈은 박힌 듯이 그의 뒤 꼴에 어리고 있었다. 앞으로 구부릴 적마다 반질하고 빛나는 그의 머리, 연분홍 숙고사 저구리 밑에서 곰실곰실 움직이는 어깨의 윤곽, 늘었다 굽혔다 하는 팔, 그 꾸김 꾸김 한 치마 주름…… 이 모든 것보담도 가야금 줄 위에서 남실남실 춤추는 보얀 손가락이 나의 넋을 사르고 말았다. 보면 볼수록 그 모든 것에 미(美)가 더하고 매력이 더하였다. 때때로 정신이 아찔해지며 모든 것이 한데 뒤범벅도 되었다. 그 고사(庫紗) 무늬가 서로 뭉켜지기도 하고 치마 주름이 한 데로 몰려지기도 하였다. 어슴푸레한 어둠 가운데서 보얀 손가락만 파뜩파뜩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아물아물해지며, 눈앞에 불꽃이 주렁주렁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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