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 이튿날이다. 아츰을 마치고 권연(卷煙) 한 개를 피워 문 나는 이리저리 마당을 거닐 때였다.
5
하는 소리를 듣자 누런 복장이 얼른하며 하얀 네모난 종이가 중문 앞에 떨어진다.
6
그것은 엽서형 서양 봉투였다. 매우 이상하다 하는 듯이 나는 겉봉을 앞뒤로 뒤치며 한참 보고 있었다. 그러다 사방을 둘러보기가 무섭게 얼른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또 꺼내었다. 또 넣으려다 말고 손에 움켜쥔 채 어찌 할 줄 모르는 것처럼 왔다갔다 하였다. 문득 미친 듯이 건넌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것은 춘심의 편지일다! 앞장엔 한 자 한 획 틀림없이 우리 집 번지와 나의 이름을 적었고, 그 뒷장엔 '다옥정(茶屋町) ○○번지 김소정(金小汀)으로 부터’라고 쓰이었다.
7
나는 번개같이 봉투 윗머리를 찢었다. 안에서 그림 엽서 한 장이 나온다. 굽이치는 물결 모양으로 검누른 머리를 좌우로 구불구불 늘어뜨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얄따란 한 오리 벼 자최가 아른아른하게 감긴 풍염한 두 팔과 앞가슴을 눈같이 드러내었는데, 장미꽃 한 송이를 시름없이 든 손으로 턱을 고이고 눈물이 도는 듯한 추파에 님 생각이 어린 금발 미인의 그림이었다. 그리고 이쁘게 언문 반초(諺文半草)를 날린 그 사연은 아주 간단하였다.
8
항용이면 수신자의 주소 씨명을 쓸 자리 한복판에 두 줄로 '아모리 기다려도 아니 오시기로 두어 자 적사오니 속 보시지 마시압.’이라 하였고 그 밑칸 글월은 이러하였다.
10
왜 오시지 않습니까? 기다리는 제 마음 행여나 아실는지?
13
이 때의 기쁨이야 무에라 할는지! 가슴에 무슨 경기구(輕氣球) 같은 것이 있어 나를 위로위로 치슬러 올리는 듯하였다. 길길이 뛰고 싶었다. 날고 싶었다.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쁨을 말하고 싶었다. 종로 네 거리에 뛰어나가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춘심이가 나에게 편지한 것을 알려도 주고 싶었다. 밀장을 화닥닥 열었다. 무슨 큰 일이나 난 듯이 안방에 있는 안해를 소리쳐 불렀다.
15
안해가 방에 들어도 서기 전에 무슨 경급한 일을 말하는 사람 모양으로 나의 소리는 헐떡거렸다.
16
"춘심이가 나에게 편지를 했구려. 편지를!"
18
그 날 해 지기가 바쁘게 나는 정서(情書) 준 이를 찾아 나섰다. 안해는 일부러 저녁을 일찍이 걷어치고 또 청하는 대로 술조차 받아 주었다. 나는 무념 무상으로 거의 달음박질하듯 걸음을 재게 하였다. 발이 공중으로 날며 땅에 닿지도 않았다. 그 집 골목에 휙 들어서자 갑자기 걸음이 누그러지며 가슴이 방망이질하였다. '예까지 와 가지고’ 하고, 하마터면 뒤로 돌 발자욱을 앞으로 콱 내디디었다. 중문턱을 넘으매 머리는 모든 의식을 잃었다는듯이 힝하였다.
20
마츰 마당에 있던 금심은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하였다.
26
그의 말마따나 얼마 아니되어 춘심이가 돌아는 왔다. 하건만 그의 태도는 의외이었다. 방문을 열고는 아랫목 보료 위에 엉성하게 앉은 나를 보고 시답잖게 다만,
28
란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면도 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경대 앞에 착 돌아앉는다. 한 번도 못 본 사람에게 하듯 서름서름하다. 그날밤 일은 고사하고 편지한 것조차 씻은 듯이 잊은 것 같다.
29
"오늘밤에 해동관(海東館)으로 부르지 않았어요?"
30
분지(粉紙)로써 얼굴을 요모조모 골고루 닦으며 나를 돌아도 아니 보고 그는 이렇게 묻는다.
32
"그러면 누구일까?…… 새로 한 시에 수유를 받았는데……. 나는 '나리’라고."
34
요리점에서 호기있게 불러보지 못하고 제 집으로 온 것이 구구한 듯도 싶었다. 창피도 하였다. 바늘 방석에나 앉은 듯이 무릎을 누일락 세울락 하며 팔을 짚어도 보고 떼어도 보았다. 왜 왔던고 후회까지 하였다. 고만 갈까도 싶었다.
35
그러나 이 답답한 상태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경대를 살짝 떠난 그는 나의 코 밑에 바싹 다가앉았다. 나는 또 그 말할 수 없는 매력있는 향기를 느끼었다.
37
하고, 한숨을 휘 쉬더니 나의 눈 속을 물끄더미 들여다보며,
40
"그 날 밤새도록 기다리니 어데 와야지."
42
"그러면 그렇지, 무슨 두드러진 정이 있어 이 못난이를 찾을라고? 기다리는 년이 미친 년이지……. 잠 못 잔 것이 어떻게 앵한지 몰랐어요."
43
하고, 이 매정한 놈아 하는 것처럼 눈을 깔아 메친다.
44
"워낙 술이 취해서 여기 온다는 것이 친우들에게 끌리어 집으로 간 모양이야. 아츰에 잠이 깨고야 알았어."
45
"그저께 날 밤에 유일관에 갔다가 집에 오니 오셨다겠지요. 놀음에 왜 갔던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오시려니 하고 어제는 아모 데도 아니 갔지요. 거짓말? 이 금심이한테 물어보셔요? 거짓말인가……. 그래 생각다 못해서 편지를 하였습니다."
46
그리고 요릿집에 갈 적마다 나를 만날 줄 알고 남 모르게 기뻐하던 것과 진답지 않은 딴 사람만 있고 그리운 내 얼굴을 못 볼 제 얼마나 상심하였으며 얼마나 흥미삭연(興味索然) 하던 것을 하소연하였다.
49
"수(誰)야 모(某)야 다 앉은 자리 정 가는 곳은 한 곳뿐이라, 이런 소리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저희들끼리 네니 내니 하겠지요. 무슨 아리 알심이나 있는 듯이 눈을 끔벅끔벅하며 남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겠지요. 하하 하하……. 정 가는 곳은 이곳 뿐인데."
52
꺽세인 차부의 목소리가 우리의 정담을 깨뜨렸다.
55
춘심의 눈썹은 보일 듯 말 듯 찌푸리었다. 무엇을 한참 생각하더니 큰소리로,
59
나는 대담스럽게 이런 말을 하였다. 그만치 춘심을 보내기 싫었다.
60
"그럴 수 있어요? 미리 수유 받은 것이 되어서 그럴 수도 없고……."
63
라고 안타깝게 속살거리고는 몸을 나에게 쓸어 붙이었다…….
64
"…… 무슨 탈을 하고 나 곧 올 터이니 기다리겠습니까?"
66
"집안에 우환이 있다 하고서 인사나 하고 선걸음에 돌아올 테야. 기다리고 계셔요."
70
"꼭 기다리셔요, 꼭 . 아홉 점 안으로는 기어이 올 터이니……."
72
"가시면 일후(日後) 봐도 말도 안 할 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