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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자(墮落者) ◈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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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 ~3.
현진건
1
타락자
 
2
6
 
 
3
그 이튿날이다. 아츰을 마치고 권연(卷煙) 한 개를 피워 문 나는 이리저리 마당을 거닐 때였다.
 
4
"편지 받으오."
 
5
하는 소리를 듣자 누런 복장이 얼른하며 하얀 네모난 종이가 중문 앞에 떨어진다.
 
6
그것은 엽서형 서양 봉투였다. 매우 이상하다 하는 듯이 나는 겉봉을 앞뒤로 뒤치며 한참 보고 있었다. 그러다 사방을 둘러보기가 무섭게 얼른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또 꺼내었다. 또 넣으려다 말고 손에 움켜쥔 채 어찌 할 줄 모르는 것처럼 왔다갔다 하였다. 문득 미친 듯이 건넌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것은 춘심의 편지일다! 앞장엔 한 자 한 획 틀림없이 우리 집 번지와 나의 이름을 적었고, 그 뒷장엔 '다옥정(茶屋町) ○○번지 김소정(金小汀)으로 부터’라고 쓰이었다.
 
7
나는 번개같이 봉투 윗머리를 찢었다. 안에서 그림 엽서 한 장이 나온다. 굽이치는 물결 모양으로 검누른 머리를 좌우로 구불구불 늘어뜨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얄따란 한 오리 벼 자최가 아른아른하게 감긴 풍염한 두 팔과 앞가슴을 눈같이 드러내었는데, 장미꽃 한 송이를 시름없이 든 손으로 턱을 고이고 눈물이 도는 듯한 추파에 님 생각이 어린 금발 미인의 그림이었다. 그리고 이쁘게 언문 반초(諺文半草)를 날린 그 사연은 아주 간단하였다.
 
8
항용이면 수신자의 주소 씨명을 쓸 자리 한복판에 두 줄로 '아모리 기다려도 아니 오시기로 두어 자 적사오니 속 보시지 마시압.’이라 하였고 그 밑칸 글월은 이러하였다.
 
 
9
보고 싶어 홍응.
10
왜 오시지 않습니까? 기다리는 제 마음 행여나 아실는지?
11
지정일변 아시겠소?
12
어찌하면 좋을까요?
 
 
13
이 때의 기쁨이야 무에라 할는지! 가슴에 무슨 경기구(輕氣球) 같은 것이 있어 나를 위로위로 치슬러 올리는 듯하였다. 길길이 뛰고 싶었다. 날고 싶었다.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쁨을 말하고 싶었다. 종로 네 거리에 뛰어나가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춘심이가 나에게 편지한 것을 알려도 주고 싶었다. 밀장을 화닥닥 열었다. 무슨 큰 일이나 난 듯이 안방에 있는 안해를 소리쳐 불렀다.
 
14
"이것을 좀 보아요. 이것을!"
 
15
안해가 방에 들어도 서기 전에 무슨 경급한 일을 말하는 사람 모양으로 나의 소리는 헐떡거렸다.
 
16
"춘심이가 나에게 편지를 했구려. 편지를!"
 
17
하고, 왼 얼굴이 웃음에 무너졌다.
 
 
18
그 날 해 지기가 바쁘게 나는 정서(情書) 준 이를 찾아 나섰다. 안해는 일부러 저녁을 일찍이 걷어치고 또 청하는 대로 술조차 받아 주었다. 나는 무념 무상으로 거의 달음박질하듯 걸음을 재게 하였다. 발이 공중으로 날며 땅에 닿지도 않았다. 그 집 골목에 휙 들어서자 갑자기 걸음이 누그러지며 가슴이 방망이질하였다. '예까지 와 가지고’ 하고, 하마터면 뒤로 돌 발자욱을 앞으로 콱 내디디었다. 중문턱을 넘으매 머리는 모든 의식을 잃었다는듯이 힝하였다.
 
19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20
마츰 마당에 있던 금심은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하였다.
 
21
"너의 형 있니?"
 
22
"잠깐 어데 나갔습니다."
 
23
하다가 나의 꼴이 애처로웠던지,
 
24
"지금 곧 올 것입니다. 올라가셔요."
 
25
라고 말을 뒤붙였다.
 
26
그의 말마따나 얼마 아니되어 춘심이가 돌아는 왔다. 하건만 그의 태도는 의외이었다. 방문을 열고는 아랫목 보료 위에 엉성하게 앉은 나를 보고 시답잖게 다만,
 
27
"오셨어요?"
 
28
란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면도 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경대 앞에 착 돌아앉는다. 한 번도 못 본 사람에게 하듯 서름서름하다. 그날밤 일은 고사하고 편지한 것조차 씻은 듯이 잊은 것 같다.
 
29
"오늘밤에 해동관(海東館)으로 부르지 않았어요?"
 
30
분지(粉紙)로써 얼굴을 요모조모 골고루 닦으며 나를 돌아도 아니 보고 그는 이렇게 묻는다.
 
31
"아니."
 
32
"그러면 누구일까?…… 새로 한 시에 수유를 받았는데……. 나는 '나리’라고."
 
33
"나는 그런 일이 없는걸."
 
34
요리점에서 호기있게 불러보지 못하고 제 집으로 온 것이 구구한 듯도 싶었다. 창피도 하였다. 바늘 방석에나 앉은 듯이 무릎을 누일락 세울락 하며 팔을 짚어도 보고 떼어도 보았다. 왜 왔던고 후회까지 하였다. 고만 갈까도 싶었다.
 
35
그러나 이 답답한 상태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경대를 살짝 떠난 그는 나의 코 밑에 바싹 다가앉았다. 나는 또 그 말할 수 없는 매력있는 향기를 느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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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시지 않았어요? 흥."
 
37
하고, 한숨을 휘 쉬더니 나의 눈 속을 물끄더미 들여다보며,
 
38
"편지 보셨어요?"
 
39
"응."
 
40
"그 날 밤새도록 기다리니 어데 와야지."
 
41
춘심은 말을 이었다.
 
42
"그러면 그렇지, 무슨 두드러진 정이 있어 이 못난이를 찾을라고? 기다리는 년이 미친 년이지……. 잠 못 잔 것이 어떻게 앵한지 몰랐어요."
 
43
하고, 이 매정한 놈아 하는 것처럼 눈을 깔아 메친다.
 
44
"워낙 술이 취해서 여기 온다는 것이 친우들에게 끌리어 집으로 간 모양이야. 아츰에 잠이 깨고야 알았어."
 
45
"그저께 날 밤에 유일관에 갔다가 집에 오니 오셨다겠지요. 놀음에 왜 갔던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오시려니 하고 어제는 아모 데도 아니 갔지요. 거짓말? 이 금심이한테 물어보셔요? 거짓말인가……. 그래 생각다 못해서 편지를 하였습니다."
 
46
그리고 요릿집에 갈 적마다 나를 만날 줄 알고 남 모르게 기뻐하던 것과 진답지 않은 딴 사람만 있고 그리운 내 얼굴을 못 볼 제 얼마나 상심하였으며 얼마나 흥미삭연(興味索然) 하던 것을 하소연하였다.
 
47
"속없는 사나이도 다 많지."
 
48
춘심은 또 다시 말을 이었다.
 
49
"수(誰)야 모(某)야 다 앉은 자리 정 가는 곳은 한 곳뿐이라, 이런 소리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저희들끼리 네니 내니 하겠지요. 무슨 아리 알심이나 있는 듯이 눈을 끔벅끔벅하며 남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겠지요. 하하 하하……. 정 가는 곳은 이곳 뿐인데."
 
50
하고 나의 등을 가볍게 뚜드렸다.
 
51
"춘심 아씨 모시러 왔습니다."
 
52
꺽세인 차부의 목소리가 우리의 정담을 깨뜨렸다.
 
53
"어데서 왔는가?"
 
54
"해동관에서 왔어요."
 
55
춘심의 눈썹은 보일 듯 말 듯 찌푸리었다. 무엇을 한참 생각하더니 큰소리로,
 
56
"거기 있게, 지금 갈 터이니."
 
57
라고 일렀다.
 
58
"술잔 값이나 주어 보내지."
 
59
나는 대담스럽게 이런 말을 하였다. 그만치 춘심을 보내기 싫었다.
 
60
"그럴 수 있어요? 미리 수유 받은 것이 되어서 그럴 수도 없고……."
 
61
하면서 나의 손을 꼭 쥔다.
 
62
"어쩌면 좋아!"
 
63
라고 안타깝게 속살거리고는 몸을 나에게 쓸어 붙이었다…….
 
64
"…… 무슨 탈을 하고 나 곧 올 터이니 기다리겠습니까?"
 
65
"그리 쉽게 올 수 있을라구."
 
66
"집안에 우환이 있다 하고서 인사나 하고 선걸음에 돌아올 테야. 기다리고 계셔요."
 
67
"글쎄."
 
68
"글쎄가 아니라 꼭 기다리셔요."
 
69
"기다리지."
 
70
"꼭 기다리셔요, 꼭 . 아홉 점 안으로는 기어이 올 터이니……."
 
71
"그래, 아홉 점까지만 기다리지."
 
72
"가시면 일후(日後) 봐도 말도 안 할 테야."
 
73
"아홉 점만 지나면 간다."
【원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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