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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少年)은 자란다 ◈
◇ 부득불(不得不) 조선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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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2월 25일
채만식
1
少年[소년]은 자란다
2
- 不得不[부득불] 조선 사람
 
 
3
영호는 만주서 나서 만주서 자라 열세 살이었다.
 
4
다른 아이들도 만주서 나서 만주서 자랐기 아니면, 너댓 살 혹은 젖 먹는 애기 적에 만주로 와 이날이 자란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5
아이들은 조선이 어디 가 붙은지도 몰랐다.
 
6
학교에서 지리(地理) 시간에 글로는 배웠으나 실지로는 조선이 어디며 어떤 곳이며 하다는 것은 알지를 못하였다.
 
7
조선이 무엇인지도 따라서 몰랐다.
 
8
아이들의 부모는 각기 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대단한 열심들이었다.
 
9
5,60호의 집단부락(集團部落)이면 무엇보다도 먼저 돈을 추렴하고 몸으로 나와 일을 하고 하여서 학교집(校舍建物[교사건물])을 지어놓고는 현( 縣)을 졸라 교원을 얻어다 인하여 학교를 가지곤 하였다.
 
10
간도성(間島省)에 있어서는, 그래서 조선 내지가 학령아동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50퍼센트도 차지 못하던 1940년 이전에 벌써 90퍼센트라는 높은 율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시설이 충분하지가 못하고 교원도 질로나 양으로나 매우 부족한 것이 있어, 교육되는 정도가 두루 빈약한 것은 면치를 못 하였지만……
 
11
만주에서도 주장 간도로 흘러간 조선 사람들이, 특히 이민(移民)으로간 농민들이 그와 같이 교육열이 왕성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12
우리는 무식하고 가난하였다.
 
13
무식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만만하였다.
 
14
만만하기 때문에 땅 기름지고 기후 좋은 고국에서 살지 못하고 쫓기어 이 풍토( 風土) 사나운 만주로 흘러와 강냉이 조팝을 먹으면서 고생을 하는 것이다.
 
15
우리는 이왕 무식하고 가난하여 만만했기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한다. 그러나 자식들에게까지 이 고생을 차마 전장시킬 수는 없다.
 
16
자식들은 이 고생을 면해야 한다.
 
17
면하자면 만만치 않아야 한다.
 
18
만만치 않자면 부자가 되거나 공부를 하여서 발신(發身)을 하거나 해야만한 다.
 
19
부자가 되게 하여 준다는 것은 막상 어려운 노릇이나 공부쯤은 뜻 하나로 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20
오냐, 공부시키자. 나는 뼈가 휘고 가죽이 닳아도 좋다. 자식들 공부 시켜 발신 해서 이 삭막한 만주살이의 고생을 면하고 고국에 돌아가 어엿이 잘 살도록 하자.
 
21
이렇게 그들은 마음을 골똘히 먹고 자녀의 교육에 온갖 열심을 다하였다.
 
22
'어서어서 부지런히 공부해라. 나는 오늘 소를 팔아 학교 후원회에 기부를 했다.’
 
23
'공부 잘해서 부디 훌륭한 사람 되게 해라.’
 
24
'이 흉악한 고생 면하고 살기 좋은 고국에 돌아가 이런 말 일러가면서 남처럼 잘 살아보자꾸나.’
 
25
가정에서도 교훈이 그러므로 늘 이러하였다.
 
26
그들은 만만하여서 고국을 쫓기어 만주로 굴러온 것이 단지 무식하고 가난하였기 때문인 줄만 알았지 그 외엣것은 알지를 못하였다.
 
27
무식하고 가난하다고 만만하여 고국에서 살지 못하고 살기 사나운 타국으로 쫓기어나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을 따지기에는 그들은 미처 깨닫기에 이르지 못하였다. 깨달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적은 수효 일 따름이었다.
 
28
따라서 한편으로 그들은 누구로 인하여 고국을 버리고 만주로 쫓기어 나왔느냐 하는 그 누구라는 것에 대하여서도 생각이 막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문제를 삼을 것이 없었다.
 
29
그들은 물론 보았다.
 
30
일본 사람들이 조선을 합방(合邦)한 일본 사람들이 나와서 장을 치고 잘사는 것을 그들은 보았다. 그리고 그 등쌀에 자기네가 밀리어난 줄도 알고있었다.
 
31
그러나 그들은 일본 사람 아닌 조선 사람으로도 무식치 않고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면 어엿하게 밀려남이 없이 그대로 앉아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것을 또한 알고 있었다.
 
32
결국 그러므로, 사람이 일본 사람이냐 조선 사람이냐 하는 ' 누구’ 이냐가 상관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야 일본 사람이거나 조선 사람이거나 혹은 중국사람 이 거나 미국 사람이거나 어떤 사람이 되었든지, 다만 재산이 있고 학식이 있고 한 사람이기만 하면 자연 권세가 있어서 쫓겨나거나 할 며리가 없이 살기 좋은 데서 편안히 잘 살게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동시에 그들이 고국으로부터 쫓기어 만주로 몰려난 것은 조선 사람 ── 나라를 잃은 백 성 이기 때문인 것보다도 오히려 가난하고 무식하여 만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33
이렇게만 그들은 생각하였었다.
 
34
이러한 생각이나 판단이 옳으냐 옳지 못하냐 하는 것은 어찌 되었든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35
하기야 그들 만주로 흘러나간 무식하고 가난한 농민이라고 남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 한 조각 마음 섭섭하지 아니한 바는 아니었었다.
 
36
나라를 뺏긴 것이 어쨌으니 섭섭다는 것은 모르겠으나 아뭏든 섭섭하기는 섭섭하였다.
 
37
그들은 어느 때나 어디를 가서나 조선 사람이었고, 조금도 조선 사람이 아닌 적이 없었다.
 
38
조선 내지에서는'센징’혹은'한또징’이었다. 만주에서는 선계(鮮系) 혹은 ' 센 징’ 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 센 징’ 이니 ' 한 또징’ 이니 선계니 하는 것 같은 것으로는 전혀 느끼지도 여기지도 아니하였다.
 
39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어느 때나 어디를 가서나 오직 조선 사람으로 느끼고 조선 사람으로 여기고 할 뿐이었었다. 조금도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조선 사람이 아니오로 느끼거나 조선 사람이 아니오로 여기거나 할 수도 없었고 하려고도 아니하였었다.
 
40
단지 그들은 조선 사람이었었다.
 
41
"조선은 나라가 망하고 일본에 합방이 되었다. 그런 고로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아니라 일본 나라의 백성인 일본 국민이다. 조선 사람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인 것이다."
 
42
또는
 
43
"만주에 있는 조선 사람, 즉 선계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인 동시에 만주국의 국민인 것이다."
 
44
일본 사람에게서 혹은 일본 사람과 가까운 유력자(有力者)라는 조선 사람에게서 그들은 늘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런 소리를 들어도, 도무지 그들 스스로가 일본 사람이거나 만주 사람이 거나 한 줄을 모르겠었다.
 
45
번연히 조선 사람인 것을 가지고 너희는 일본 국민이다, 일본 사람이다 하는 것은 마치 흰옷을 입고 있는 사람더러 너의 옷은 검다, 너는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줄 알아라 하고 자꾸만 말하건만, 입고 있는 흰옷이 검어지지도 않고,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있느니라고 여겨지지도 않고하는 것과 마찬가지 였었다.
 
46
그리하여 그들은 혹시 결이 나서
 
47
"그래 나라가 망했으면 망했지, 조선놈은 죽으란 말인가?" 하고 조선 사람인 것을 주장하는 경우에서도, 혹은
 
48
"쯧, 나라 팔아먹은 조선놈의 신세가 그렇지 별수 있나!" 하고 조선 사람인 것을 서글퍼하는 경우에서도 매양 조선 사람이었고, 조금도 조선 사람이 아닌 적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참으로 조선사람이 아니지 못하는 조선 사람이요, 부득불 조선 사람이요 한 것이었었다.
 
49
그들은 또 일본 사람을 괘씸히 여기고 보기 싫어하고 원망하고 하는 생각도 있을 만큼 있기는 하였다.
 
50
남의 나라를 함부로 빼앗아가지고 자기의 속국을 만들다니 그런 괘씸 할 도리가 없었다. 힘꼴이나 쓴대서 멀쩡하게 남의 집을 쫓아들어가 재산 뺏고, 집 뺏고 하여가지고는 주인을 종으로 부려먹고 앉았는 녀석과 다름없는 날 불한당 짓이었다.
 
51
옷이나 아니나, 세상 빌어먹게 생긴 것을 옷이라고 걸치고는 펄럭펄럭 아 랫도리를 드러내놓고 다니고, 시애비놈이 며느리년 앞에서 전짐으로 ✕✕ 만 가리고는 벌거벗고 나서고, 며느리년이 시애비 앞에서 웃통 훌떡 벗고 자빠졌고.
 
52
사촌끼리 혼인을 하고. 애비가 제 딸자식을 데리고 살고.
 
53
부자간에 맞담배질하고. 구렁이 잡아 구워 먹고. 고양이 잡아 전골 지져 먹고.
 
54
쌍놈 쌍놈 하여도 이런 천하 불쌍놈이 없었다.
 
55
발가락에다 나막신짝 꿰고는 딸가락거리고 돌아다니고.
 
56
인사는 한다는 시늉이, 고개만 깝신깝신하기 아니면 마주 대고 서서 절을 오백 번씩도 더 하고.
 
57
밥은 공기에다 퍼서 젓가락으로 할짝할짝하고 앉았고.
 
58
이런 천하에 방정맞은 인종이었다.
 
59
그렇게 불쌍놈이요 방정맞은 것들이 저희가 잘난 체, 웃사람인 체 온갖 거만을 다 피우고, 눈 부라리고, '고라’ '빠가’ '기사마’하면서 욕지거리하고, 따귀 때리고.
 
60
그 얄밉상스럽고 뇌꼴스럽고 창피하기라니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61
그 왜사람들이 수없이 쏟아져나와 안 박힌 데 없이 박혀가지고 권세와 기승을 부리는 등쌀에, 산 좋고 물 좋고 땅 좋은 고국을 그야말로 기름 자르르 흐르고, 입에 회회 감기는 입쌀밥과 함께 버리고서 이 흉악한 만주 구석으로 밀려나 강냉이, 서속 밥 먹으면서 몹쓸 고생하는 일을 생각하면 그만 못 견디게 안타깝고 또 안타까와
 
62
"원수놈들! 죽일놈들!" 하고 원망과 저주가 한숨과 더불어 절로 흘러져 나오곤 하였다.
 
63
이와 같이 그들은 살에 배어져 있는 민족의식(民族意識)도 그들답게 수수한 것이 있고, 일본 사람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적개심(敵慨心)도 괄괄 치는아니하나마 지녀져 있는 것이 있고 하기는 하였었다.
 
64
이것은 그러나 하나도 힘은 되지를 못하였다.
 
65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비록 민족의식과 적개심이 지녀져 있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핍박하고 괴롭히는 정복자(征服者) 일본에 대하여 그것이 반항하고 싸우는 힘이 되기 위하여서는 집단적(集團的)인 한 개의 운동을 가질 수 있는 조직(組織) 이것이 생겼어야 하는 법인데 막상 그들은 거기까지에 는 이르지를 못하였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구슬이라 고하 거니 와, 그들은 꿰지 아니한 구슬과 같은 것이었었다.
 
66
간도(間島)는 일찌기 독립운동이 성하던 곳이었다.
 
67
간도는 인구의 7 할이 조선 사람이었고, 소위 함 경북 북도( 咸鏡北北道)라는 말이 생길 만큼 만주라느니보다 조선의 한 부분이라고 하염직한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조선 내지보다는 일본 경찰의 손이 덜 미치는 관계로 독립운동을 하기에 유리한 것이 많았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68
저 1931년, 소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고패로 이듬해 1932년에는 만주국이라는 가짜 나라에 괴뢰 정부를 만들어놓는 등 만주 전판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마음껏 군대와 경찰을 내세워 일반 조선사람을 투철 히 꺾 누르고, 이른바'불령선인(不逞鮮人)’을 단속하고 하기 때문에 간도에 있 어서의 독립운동은 급속하게 불이 꺼져갔다.
 
69
1937년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일으킬 무렵부터는 그리하여 간도에서 한때 그 드세던 독립군 독립군 하던 독립군은 어느덧 자취도 구경을 할 수가 없이 되었었다. 그중 많이가 붙잡혀 혹은 토벌에 죽었고, 일부분이 오지( 奧地) 나 밀림지대로 피해 들어가 공산주의의 빨치산 운동에 전향 합류를 하여 항쟁을 계속하거나, 혹은 노령과 중국 본토로 자리를 옮겨가거나 하였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독립운동을 버리거나 단념하고 물러서고 그중의 약간은 절개를 팔아 관동군(關東軍 : 日本軍[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가지고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를 붙잡아 주는 것과 아편 장사 같은 것을 하여 한편으로 재산을 모으곤 하였다.
 
70
1935 ‧ 6년으로부터, 1945년의 해방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은 만주에는 ─ 그 중에서도 간도에는 독립군이나 독립운동이란 말은 옛말같이 되었고, 있다는 것은 저의 본심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몸에는 협화복(協和服)을 입고, 입으로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조선 사람의 일본 황민화(日本皇民化)를 외치는 소위 지식층과 하급 벼슬아치들에, 일본군의 밀정에, 그리고 눌리고 볶이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농민들이 있을 따름이었다.
 
71
가다오다 김일성의 휘하라는 공산당의 빨치산 부대가 마을을 엄습하여 오는 수가 있었다.
 
72
영호네가 사는 대이수구(大梨樹溝)도 1938년에 그런 엄습을 받은 일이 있었다.
 
73
그들은 경찰과 자위단으로 된 수비편과 접전을 하여 여럿을 죽였고, ( 그 순직을 조상 ‧ 기념한다는 목비(木碑)가 시방도 대이수구 부락의 목책 정문 밖으로 서서 있었다.) 그렇게 해서 부락을 일시 점령한 빨치산부대는 부락에서 소와 곡식을 징발하였다. 징발이라고 하지만, 시세보다 훨씬 더한 돈을 치르고 가져갔다. 민심을 끌고, 일변 경제교란을 일으키고 하기 위한 두 겹의 수단인 것이었다.
 
74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들은 부락민을 모아놓고 한바탕 선동연설을 하였다.
 
75
연설은 여러 가지로 장황하였으나, 뜻인즉은 조선의 농민이 가난하고 불행한 것은, 더우기 우리가 고국을 버리고 이런 살기 사나운 고장으로 쫓기어 온 것은 일본 사람과 및 그 일본 사람과 부동이 된 조선 사람 지주와 재산가들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같이 일어나 싸워 서일본을 물리치고 독립을 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서 토지는 농민이 차지하고, 노동 하는 사람과 농민이 새 조선의 주인이 되어 가난과 압제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었다.
 
76
연설에 감동이 되어 20 안팎의 청년이 세 사람이나 빨치산부대를 따라가 투신을 하였다.
 
77
부락에서 징발한 곡식을 부락의 장정을 30명이나 풀어내어 지워가지고 떠났는데, 그중 세 사람의 청년이 각기 부모에게 저희들은 이 패를 따라가노라는 전갈을 보내고는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그 세 사람의 청년 중에는 영호의 배 다른 형(異腹兄[이복형]) 영만(永萬)도 섞여 있었다.
 
78
영만은 집을 나가 공산당의 빨치산부대에 투신을 한 것이 달리도 곡절이 없던 바는 아니었으나, 아뭏든 그 노동하는 사람과 농민이 새 조선의 주인이 되어 가난과 압제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연설은, 가난과 압제에 시달리어 불평과 울분을 품은 청년들에게 얼른 귀에 안기는 소리였었다.
 
79
팔팔한 청년들이 아니라도 남녀 노소 없이 일반 부락 사람들에게도 노상 솔깃한 말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80
독립을 한다. 고국으로 돌아간다. 농사 질 토지가 생긴다. 그러고도 가난과 압제가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 대체, 이 좋은 노릇을 누가 마 달까 보냐였다.
 
81
그들은 공산당의 연설을 듣기 전엔들 조선이 독립이 된다는 것이 불가하거나 싫거나 할 까닭은 없었다.
 
82
독립이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83
나라가 망한 것이 어쨌으니 섭섭하다는 것은 모르겠으나 아뭏든 섭섭하기는 섭섭한 것처럼 이번에는 독립이 되어 망했던 나라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좌우간 기쁜 노릇이었다. 독립이 되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독립 그것만이 우선 기쁜 노릇인 것이었었다.
 
84
그런데 독립이 되고 보면 그 아니꼽고 보기 싫던 왜사람들이 쫓기어 갈 것이요, 대신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무어 새 조선의 주인이 되느니, 가난과 압제가 없는 세상을 사느니 한다는 것이야 바랄 수 없는 일이지만, 남의 소작이라도 좀 넉넉히 부쳐 먹으면서 자식들 교육이나 시키고, 그러다 고향 에 뼈나 묻히고 한다면 조옴이나 좋을 일이며, 그것을 마달 녀석이 있을까 보냐였었다.
 
85
그러나……
 
86
그들은 생각하였다.
 
87
'독립? 글쎄, 온……’
 
88
그들은 조선이 독립이 된다는 것이 차라리 꿈 같은 말인 것 같았다. 다 망해 먹고, 아무 힘도 없고 한 조선이 어떻게 저 강성하고 기승스런 일본과 싸우며, 싸워 이겨서 독립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하면, 도무지 가망이 없는 꿈인 것만 같았다.
 
89
하물며 그들이 나서서 독립운동을 하다니.
 
90
그런 일이란 두루 자격이 있고 훌륭한 사람들이 할 노릇이지 무식하고 땅이나 파먹을 줄밖에 모르는 농투성이가 무슨 수로 독립운동을 하느냔 말이었다. 더구나 그런 일에 종사를 하자면 집안 살림과 부모 처자 다 불고하게 되는 법인데, 이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 이 울레줄레 매달린 부모 처자를 어떻게 내버리고 그런 길로 들어서느냔 말이었다. 그러는 날이면, 그렇지 않아도 살기 어려운 이 고장에서 늙은 부모와 어린 처자식은 그 즉시 굶어 죽고 말 것이 아니냔 말이었다.
 
91
그뿐만 아니라 들으면 이 간도에서도 들이껴서는 독립운동이 퍽도 드세었 더라고 하는데, 그렇게 드세게 독립운동을 하고도 얻은 것이라고는 아까운 목숨들을 내다버린 외에 아무것도 없지가 않으냔 말이었다.
 
92
독립이나 독립운동은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한갓 부질없은 이야기에 그 칠 따름 이었다.
 
93
독립이나 독립운동보다는 당장 눈앞에 훨씬 더 절박한 일과 소원이 있었다.
 
94
믿는 것이라고는 농사 ── 강냉이와 서속 농사밖에 없는데, 기후가 사납고 그런 중에도 서리가 일러 까딱하면 농사가 낭패되기 쉬운 이 고장에서 어떻게 하면 굶어죽지 않고 살아나가느냐.
 
95
어떻게 하면 서속 한 톨이라도 공출에 덜 빼앗기고 아껴 두었다 돈으로 바꾸어 단 백목(무명) 한 필이라도 끊어서 무서운 추위에 어린 자식들을 옷가지나마 해 입히느냐.
 
96
어떻게 하면 자식들을 잘 공부시켜 제발 이 고생 면하게 하여 주느냐.
 
97
이 생각과 거기에 대한 노력으로 그들의 생활은 꽉 차 있어 무얼 다른 것을 돌아본다거나 생각한다거나 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98
가정과 어른들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들의 다음 대(代)인 어린 사람들에게 는 그것이 민족적인 것의 가르침이나 깨우침을 진작부터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되질 못하였다.
 
99
열두어 살, 열너댓 살, 이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100
만주서 낳기 아니면 서너 살 적 젖먹이 적에 온 아이들이었다.
 
101
조선이 고국이라고는 들었지만, 대체 고국이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102
거친 언덕 기슭에 옴닥옴닥 아무렇게나 집을 진 마을. 그 마을을 백화 나무( 白樺[ 백화]) 울지렁으로 빙 둘러 목책을 하고, 문에는 자위단이 총을 메고 파수를 서고, 이것이 오직 그 아이들의 세계였다.
 
103
부모네는 늘, 너희는 어서어서 공부를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가지고 고국 조선으로 돌아가서 편안히 잘살아야 한다고 이르는 것이지만, 어린 사람들이라 어른들이 입버릇으로 하는 소리거니 할 뿐이었다.
 
104
좀더 자라 나이도 한 20은 되어서 문견이 넓어지고 소견이 트이고 하면, 그때 가서는 누가 가르치고 할 여부도 없이 부지중 민족의식이며 적개심 같은 것이 생기고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들 열두서너 살배기 동자( 童子) 들에게는 아직은 그런 것 저런 것이 없었다.
 
105
그러하기 때문에 오선생이 그처럼 뛰어 닥쳐, 독립이 ── 조선이 독립이 되었다면서 하마 미친 사람 날뛰듯 좋아 날뛰던 것이나 아이들은 태반이 덤덤 이었다.
 
106
독립이 무엇이며 독립이 되었으면 어쨌으니 좋다는 것인지며를 섬뻑 알아챌 수가 없었다.
 
107
오선생은 좋아라고 기를 휘두르며 목청껏 만세를 부르던 것이나 만세라고는 천황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에 황제폐하 만세, 만주국 만세 같은 것밖에는 불러본 적이 없었다.
 
108
옳아 참, 옛날에들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 붙잡혀 가고 죽고 그랬는데…… 이렇게 겁을 내는 아이도 있을 지경이었다.
 
109
아이들은 그랬거니와, 오선생을 뒤따라와서도 몇몇 외에는 오선생의 부르는 만세에 화하지 않고 뻔히 섰는 동네 사람들, 이 사람들은 속으로
 
110
'조선이 독립이 되었다구? 거 모를 소린 데……’
 
111
'일본이 항복을 해? 정말이지?…… 그렇더라도 일본이 전쟁에 지면 그날로 조선은 독립이 되기로 마련이 될 이치가 없는데?’
 
112
'저 사람이 시방 어디서 섣불리 알아가지고 와 저 야단이 아닌가?’
 
113
'잘못하다 괜히 독립군으로 몰려 사자 없는 죽음 하지.’
 
114
이런 의심과 겁을 먹고 몸을 사리던 것이었었다.
【원문】부득불(不得不) 조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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