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소년(少年)은 자란다 ◈
◇ 비싼 해방(解放) ◇
카탈로그   목차 (총 : 15권)     이전 7권 다음
1949년 2월 25일
채만식
1
少年[소년]은 자란다
2
- 비싼 解放[해방]
 
 
3
영호네가 옷가지와 이불과 쟁개비 나부랑이와 며칠 동안 먹을 양식과 이렇게만을 짐 만들어서 갈라 지고 이고 들고 낙타산으로 나오던 길이었다. 젖먹이 영수만 빼놓고는 식구가 식구마다 몇번이나 살던 집과 밭이 있는 곳과를 돌아다보고 또 돌아다보고 하면서 대이수구 마을을 떠나왔다. 그런 중에서도 영호의 어머니는 유난히 더하였고, 줄곧 눈물을 흘려 마지 아니하였다.
 
4
해방날이던 8월 15일로부터 한 달이 지난, 바로 9월 보름이었었다.
 
5
낙타산에는 차를 타려고 모여든 조선 사람이 많았다.
 
6
북간도는 가을이 일러, 9월 보름이면 서리가 올 적이 있고, 날이 여간 살랑 거리는 것이 아니었으나, 더우기 밤 저녁으로는 이가 마치도록 추웠으나, 할 수 없이 한뎃잠자리를 하면서, 차 탈 기회를 기다려야 하였다. 고국에만 돌아가는 날이면, 버리고 떠난 집과 세간과 농사를 또 이 고생을 하며 차를 기다리는 곤란을 죄다 대갚음하고도 남을 호강이 있을 것을 즐거이 여기면서.
 
7
조선 사람이 살다 비워 던지고 떠난 집이 있어, 재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집의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거접을 하면서 기다리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얼마 아니 되는 수효였었다.
 
8
영호네도 정거장 옆에다 한뎃 자리를 잡았다.
 
9
가지고 온 양식으로 밥을 끓여 식구가 둘러앉아서 저녁을 먹으면서였다.
 
10
"상(床)을, 그걸 가지구 왔으면 이렇게 땅바닥에 놓구 먹느니보다 조 옴 좋았어? 그까짓것, 상 하나가, 짐이 시러면 얼마나 더 짐 시럽 다 구…… "
 
11
영호의 어머니가 또 그 상을 두고 뇌사리는 말이었었다.
 
12
다 부서진 개다리소반 하나를 가지고 식구가 밥을 먹으면서, 제발 상 좀한 개 장만하였으면 하고 노래부르듯 하던 영호의 어머니였었다.
 
13
그러던 끝에 작년 가을에, 마침 천교령열 나갔던 길에 상 하나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재료는 소나무요, 칠도 윤이 없고 물건이라야 그다지 탐 탁 치도 못한 것이었었다.
 
14
이것을 영호의 어머니는 마치 무슨 보물이나 생긴 것처럼 좋아하였고, 늘 닦으면서 아끼기를 사자 어금니 아끼듯 하였다. 여느때는 쓰는 법이 없고, 손님이나 혹시 오면 잠깐 내려서 쓰고는 얼른 잘 닦아 방 시렁에다 위해 두 곤 하였었다.
 
15
비단 영호네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들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령 푸 달진 소나무 소반 하나를 사기에 오래도록 별러야 하고, 그것을 보물같이 귀히 여기고 하도록 지지리 가난한 사람들이었었다.
 
16
이날 아침부터 영호의 어머니는 마지못해 짐을 챙기기는 하면서도, 이상히 기색이 좋지가 않았다. 어쩌면 화가 난 것 같은, 어쩌면 몹시 절망한 것 같은 그런 얼굴이면서, 무단히 아이들을 지청구하고 하였다.
 
17
그러면서 그 소반을 부득부득 가지고 가겠노라고 고집을 세웠다.
 
18
영호의 아버지도 노상 마음 편안한 얼굴은 아니었었다.
 
19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소반은 짐스러 못 가지고 간다고 한 것까지는 별다른 것이 없었는데, 끝끝내 영호의 어머니가 소반을 들고 나서는 것을 보더니
 
20
"그 옘병헐, 소반이 젤이람?"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었다.
 
21
소리도 깜짝 놀라게 컸고 말씨도 우악스럽고 하였지만, 눈을 부라리는 얼굴은 일찌기 보지 못하던 험상스런 얼굴이었었다.
 
22
그 일찌기 보지 못하던 험상스런 얼굴과 마주치는 영호의 어머니는 금새 겁에 탁 질리며 어깨와 얼굴을 떨어뜨리더니, 두말 않고 소반을 도로 방으로 들여다놓았다. 돌아서는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23
그런 멀고 가까운 내력의 소반이었다.
 
24
영호의 아버지가 또 무어라고 지청구를 하면서 그런 험상스런 얼굴을 보일줄 알고 속이 섬뜩하였으나, 아버지는 오히려 부드러운 말로 어머니를 달래었다. 고국에 돌아가 잘 살게 되면, 그런 소반 아냐 자개박이의 교자상은 못 장만하느냐고.
 
25
어머니는 그래도 못 잊어운 모양으로 아무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26
영호는 어머니가 가엾고, 그러는 어머니를 위하여 소반을 가지고 갔으면 즐거울 것 같았다.
 
27
"아버지, 나 내일 아침에 집이 가서 소반 가지구 오까요?"
 
28
영호는 어리광 비슷하게 어버지더러 물어보았다.
 
29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30
'나는 모르겠다!’ 하는 얼굴이었다.
 
31
어머니도 아버지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렸든지, 가도 내가 가야지 네가 어떻게 가느냐고 하였다. 그러고는 아무도 거기에는 더 말을 내지 않았다.
 
32
이튿날 첫새벽이었다.
 
33
아직 어둑어둑한데 영호가 먼저 잠이 깨어서 보니 어머니가 없었다.
 
34
아버지도 이내 잠이 깨어 영호 어머니가 간 줄을 알고는 지각 없는 사람도 있다고, 이왕 천천히 가도 할 것을, 이 험한 때에 날도 다 밝기 전에 가더란 말이냐고, 가뜩이나 배탈로 앓는 아이를 업고까지 갈 것은 무어란 말이냐고, 혼잣말로 꿍얼거려싸면서 거듭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벌써 가고 없는 사람이니 탓을 해도 소용이 없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35
영호의 어머니는 좀처럼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36
낙타산 정거장에서 대이수구까지 20리 상거였다.
 
37
애기를 업고 여자의 걸음이라고 하여도 네 시간이면 다녀올 수가 있었다. 가서 소반 하나만 집어 들고 돌아서면 그만이요, 달리 충그릴 일도 없고 하니, 여섯시에 떠났다고 하고, 열시까지에는 돌아왔어야 할 터이었었다.
 
38
영호가 아버지를 거들어 조반을 지어 먹고, 그러고 나서 한나절이 되어도 어머니는 돌아오는 기색이 없었다.
 
39
영호가 정거장으로 가 사무실의 시계를 들여다보니 열한시였다.
 
40
열한시면,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었다.
 
41
영호는 아버지와 함께 걱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42
차를 아침에 타게 될는지 저녁때 타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에 마침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줄을 번연히 모르지 않았으니 한달음에 다녀왔을 것이지 한 만 히 충그리고 할 이치가 없었다.
 
43
혹시 무슨 변이 생기지나 않았나?……
 
44
그 변이라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무서운 것이었었다. 그러나 그런 변이 생긴 것이 아니고는 이렇게 늦도록 돌아오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45
이치로는 그렇지만 하도 끔찍한 생각이어서
 
46
'설마…… 아직 여러 집 남아 있는 동네 사람 누구네 집에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았는 게지. 소반 들고, 쉬이 저기만치서 웃으면서 나타나겠지……’ 하고 억지로 무사할 편으로만 마음을 돌리면서, 그럭저럭 기다린 것이 어느 덧 오정이 지났다.
 
47
그러나 어머니는 종시 소반을 들고 저기만치서 웃으면서 나타나지는 아니하였다.
 
48
아버지는 영호와 영자를 기다리게 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 하면서 대이수구를 바라고 나섰다.
 
49
영호는 어머니가 만인들에게 붙들려 간 것이나 아닌가 하였다. 어린 영호로는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50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51
아버지가 혼자서 찾아나섰으니 그것이 걱정이었다.
 
52
그런 생각을 하면 아버지와 함께 가야 하겠는데, 영자와 짐을 놓아두고 가는 수도 없었다.
 
53
가슴만 두근거리고, 연방 정거장 사무실의 시계를 보러 갔다 왔다 조바심을 하면서 기다리기 세 시간…… 네시가 거진 되어서였다.
 
54
대이수구로 난 행길로 좇아, 짐 보퉁이를 지고 이고 한 사람들이 남녀 어린 아이들을 해서 여남은이나 왁자 떠들면서 오고 있고, 그 맨 앞엣 사람은 먼 발로 도 분명 아버지였다.
 
55
아버지는 기다란 이불 같은 것을 등에 업고, 앞참서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업고 오는 건 정녕 어머니에 갈데없었다.
 
56
눈물이 핑 돌면서 영호는 영자의 손목을 이끌고 정신없이 마주 달려 나갔다.
 
57
오서방은 대이수구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58
중간쯤 되는 곳에 산발(山麓)이 미끄러져 내리다 두릿하니 분지( 盆地) 를 이룬 목이 있었다. 여느때에도 다니기가 호젓한 자리였었다. 거기서 한 떼의 조선 사람들이 둘러서서 심상치 않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먼 빛으로 오서방은 보았다.
 
59
가슴이 마지막으로 덜컥 내려앉으면서, 허덕지덕 달려간 오서방의 눈 앞에 드러나는 광경은 역시 짐작턴 대로였으면서, 짐작 이상의 참담한 광경 이었었다.
 
60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네 팔다리 함부로 내던지고서, 번듯이 나가떨어져 눈 감고 숨은 숨통에서만 발딱발딱…… 하고 있는 것은 두번 볼것도 없이 오서방 자기의 아낙이었다.
 
61
가슴과 아랫도리에는 피가 묻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웃도리는 팔이랑에 손톱에 할퀸 상채기가 군데군데 나서 있고 하였다. 반쯤 벌린 입술과 이빨에는 피 흔적과 함께, 조그만큼 고깃덩이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이것은 나 중에야 인간의 귓부리를 이빨로 물어뗀 살점이라는 것을 동네 사람 하나가 알아내었다.
 
62
사람들은 오늘 아침, 대이수구를 떠나 낙타산으로 나오고 있는 엊 그저께까지 한동네에서 살던 사람이었었다.
 
63
그중 애기 데린 여인 하나가 영수를 안고 젖을 물리고 있었다.
 
64
동네 사람들의 말은 간단하였다.
 
65
어디선지 자지라진 애기 울음 소리가 들리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굽은 길을 마악 돌아나오는데, 저기만치에 벌거벗은 몸뚱이가 누웠고, 어린아이가 가슴으로 기어오르면서 울고 있었다.
 
66
놀라서는 발걸음을 주춤하였고, 필경 가까이 와서 보니 이 꼴이요, 오서방의 아낙이더라는 것이었었다.
 
67
동네 사람들도 방금 당도하여 사실을 발견하였을 뿐 미처 어떻게 할 의논도 못하고 있는 참이었었다.
 
68
"아직 숨은 있는 모양이니, 둘쳐 업구 가, 구원을 하던지 해야 할 게 아닌가, 이 사람."
 
69
어떻게 할 바를 몰라, 이게 웬 일. 이게 웬 일…… 소리만 지르면서 허둥대는 오서방을, 일행 중의 한 노인이 그렇게 지청구로써 재촉을 하였다.
 
70
그와 때를 같이하여 돌아앉아서 자기네의 짐 보퉁이를 활활 풀고 있던 여인이, 이불을 꺼내다 알몸뚱이 위에다 덤쑥 덮어 주었다.
 
71
여럿이 오서방의 등에 업혀 주려고 부축하여 일으키는데, 두 코에서 검 은피가 주르르 흘렀다.
 
72
입에 물렸던 살점도 잔디 위로 흘러 떨어졌다. 한 사람이 그것을 유심 히 들여다보았다.
 
73
여인네들은 혀를 차면서 가엾어하였다. 눈물을 씻는 이도 있었다.
 
74
이불을 위에 덮어 업고서 오서방이 앞을 서고 동네 사람들이 각기 짐을 챙기어 지고 이고 하고 뒤를 따라 그 자리를 떠났다.
 
75
"되놈(胡人[호인] : 滿人[만인])들의 짓이지, 갈데없어! 물어 뗀 살점이, 그게 귓부린데, 땟국이 새까만 걸 보아두…… 한 달에 생각나야, 세수 한번 할까말까 하는 놈들…… "
 
76
잔디 위로 흘러 떨어지는 살점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사람이, 일행이 이윽고 걷기 시작하여서 혼잣말같이 하는 말이었었다.
 
77
한 사람이 그 말을 받아,
 
78
"그럼, 되놈들의 짓이지, 설마 조선놈으루야, 당장 날벼락을 맞을 영으루?"
 
79
다시 또 한 사람이 그 뒤를 이어
 
80
"옷 벳겨간 걸 보겠지? 그놈들은 으례껀 사람을 궂히거나 여자를 겁탈 하구 나서는 옷을 벳겨간다구 아니해?"
 
81
이런 말이 아니라도, 그들은 첫눈에 벌써 이것은 만인의 짓이다 하는 것을 직각적으로 알아채었고, 달리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82
"한 놈의 짓두 아냐!"
 
83
"물론이지! 적어두 4,5 인…… "
 
84
"워너니, 아무리 연약한 여자기로서니 한 놈한테야…… "
 
85
젊은 사람들이 입입이 지껄이는 말을 들으면서 묵묵히 따라오고 있던 먼저의 그 오서방을 재촉하던 노인이 자르듯 말을 하였다.
 
86
"모르면 몰라두, 여남은 놈은 되리…… 내가 젊어서 고국에 있을 제 징 험한 배지만, 4,5 인이나한테 당했다면, 사람이 저 지경투룩은 아니 되지…… 그리구, 저 여인, 살아나지 못하기 쉬우리!"
 
87
노인은 그러다가, 커다랗게 앞으로 대고, 오서방더러
 
88
"거, 어떡하다 혼자서 옐 왔더라는가?" 하고 묻는다.
 
89
일행은 다같이 궁금거리였었다.
 
90
"집에 무얼 가질러 온다구…… "
 
91
오서방은 무거운 짐을 업고 힘도 들었지만, 말끝을 흐려버린다.
 
92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면서,
 
93
"이게 어느 판이라구, 젊은 여자를 혼자 내보낼 일여 ?……그래, 어느 만 때쯤 나서기는 나서구?"
 
94
"오늘 새벽, 어둑어둑해서요."
 
95
"정녕, 오다 바루 그랬구먼 ?……"
 
96
노인은 일행더러 영호의 어머니를 동네에서 만난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97
아무도 없다는 대답이었다.
 
98
미루어 동네로 향해 오다 만인의 떼를 만나 일을 당한 것이 확실하여졌다.
 
99
노인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지막 가로 설레설레 저으면서, 오서방은 들리지 않도록 나직이 말을 한다.
 
100
"살아나지 못해…… 오늘 새벽이니, 그 동안이 몇 시간야? 그때 바루 무슨 손을 썼어두 살릴까말까한 노릇인데…… "
 
101
일행은 누구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말없이 한동안 걸었다.
 
102
"죽일놈들!"
 
103
젊은 한 사람이 퍼뜩, 저주라느니보다 한탄조로 한마디 흘린다.
 
104
적실히 그것은 힘없는 한탄이었다. 약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힘이 없어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서 부질없이 흘리는 한탄이었다.
 
105
일행은 그리고 누구나 다들 그 한탄의 죽일놈들 소리가 한가지로 동감 이었었다.
 
106
남들은 남들인 만큼, 마음이 그렇기라도 할 여유는 있었으나 오서방은 도무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아무 정신이 없었다.
 
107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그는 송장이나 진배없는 아낙을 업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한번 쉬지도 않고 십리길을 올 수가 있었던 것이었었다. 일행의 젊은 사람이 좀 번갈아 주마고 하여도 그는 괜찮다면서 씽씽 걷기만 하였었다.
 
108
일행이 낙타산에 당도하자 심상치 않은 거동에 변에 생긴 줄을 알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먼저 나와 있던 대이수구 사람들이 모이고, 다른곳 사람들도 오고 하였다.
 
109
자위단 사람도 와서 곡절을 물었다.
 
110
사람마다 일을 안 되었어 하고, 죽일놈들이라고 저주를 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 어떻게 하지는 못하였다.
 
111
만인들의 짓인 줄은 확실하다지만 누구인 줄을 알며, 가사 알기로소니, 가뜩이나 시방 사처에서 만인들이 들고 일어나 조선 사람을 해친다는 소문이 자자한 이 판에 감히 그들과 시비를 가리자고 덤비어 본댔자 자는 호랑이 코침 주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112
도리어 여기는 아직껏 조용하여 폭동의 해를 입지 않은 것이 다행일 지경 이었었다.
 
113
"제길헐! 해방값 비싸다!"
 
114
둘러선 사람들 가운데, 뒤 곁에서 누군지가 혼잣말로 뱉고 돌아서는 소리 였었다. 이때는 벌써 여기서도 독립이라는 말 대신 해방이라는 말로 쓰고있었다.
 
115
듣는 사람들은 너나 할것없이 그 말 참 적절한 말이라고, 이것이 저 여인네 한 사람의 일이 아니요, 우리도 이러다는 본전도 못 찾는 해방이 되고말기 쉬울지 모르느니라고들 생각하였다.
 
116
자위단 사람이 여느 사람과는 조금 달라 죽어가는 병인을 한데다 뉘어 놓아 쓸까 보냐고, 바로 정거장 옆에다 방 하나를 치워 주어서, 그것 한가지만은 다행 이었다.
 
117
방으로 옮겨는 뉘었으나 의사나 의원이 있는 게 아니요, 약인들 있을리 없는 형편이어서, 식구가 둘러앉아 울기나 하는 것밖에 없었다.
 
118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헌 옷을 보따리에서 꺼내어 몸의 피를 닦아 내 고서 입혀 준 것, 물을 끓여서 흘려넣어 주는 것뿐이었었다. 물은 그러나 도로 흘러내리고 한 방울도 넘어가지 않았다.
 
119
해가 넘어갈 무렵에야 영호의 어머니는 눈을 떴다.
 
120
성한 사람 같은, 눈두겁이 천근이나 무거운 모양이었다. 몇번을 눈 두 겁을 가늘게 떨고 하더니 가까스로 눈을 떴다.
 
121
눈은 떴으나, 눈동자만 드러났을 뿐이지 흐릿하니 정신이 든 눈은 아니었었다.
 
122
눈 뜨는 것이 살아나기나 한 듯 반가와, 아이들이 어머니를 부르고, 오서방은 여보 영호네를 부르고, 한꺼번에 소리를 외쳤다.
 
123
몇번 그렇게 불러서야 비로소 아득하게나마 정신이 드는 모양, 눈동자에 약간 생기가 돌고 조금 움직이는 시늉도 하였다. 몸은 종시 손가락 하나 꼼 틀하지도 않았고.
 
124
눈은 무엇을 찾아 움직이었다.
 
125
처음 영자의 얼굴에 가 멎었다. 다음 영호의 얼굴에 가 멎었다. 그 다음 오서방의 얼굴에 가 멎었다. 그리고도 또 찾았다. 젖먹이 영수를 찾던 것 이었다.
 
126
"잠든 걸."
 
127
영호의 아버지가 알아차리고서 턱으로 한옆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128
영호 어머니는 그리고 고개를 돌리고 싶은 듯 애를 쓰는 것 같았으나 고개는 움직여지려고 아니하였다.
 
129
생각지 못하게 큰 한숨…… 그리고는 영호의 아버지로부터 영자에게로, 영자에게서 영호에게로 눈은 또 한번 움직이었다. 그러는 눈에는 이슬이 배었다.
 
130
양편으로 갈라앉았는 두 아이의 머리라도 쓸어주고 싶었음이리라. 팔을 들려고 애를 썼다.
 
131
그러는 어머니의 손을 영호가 저의 손으로 쥐면서 울먹울먹
 
132
"어머니!" 하고 불렀다.
 
133
영자도 오라비의 하는 대로 어머니의 한편짝 손을 만지면서
 
134
"어머니이!" 하고 울먹거렸다.
 
135
두 아이에게로 번갈아 눈을 보내면서 가느다랗게 말이, 기적(奇蹟)처럼 흘러져 나왔다.
 
136
"어서서 자라라아…… 아버지 고생 안되시게 어서서 자라라아…… 엄마 찾지 말구우…… "
 
137
토막 토막이 겨우 들릴까말까, 그러고는 힘이 지쳐 스르르 눈을 감는다. 감는 눈으로 눈물이 비어지고.
 
138
그 뒤로는 다시 눈 한번 떠보지 못하였고.
 
139
숨통에서만 발딱발딱하던 숨이 차차로 더 힘이 없어가다가, 시계라고 하는것을 가지는 백성들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으로는 몰랐어도 늦은 저녁때 만하여서 마침내 숨은 지고 말았다.
 
140
이리하여 곳 아닌 곳에서, 뜻 아니한 초상이 나 철야꾼이 모이고, 몇 푼씩의 부의가 들어오고 하는 목 맺힌 정경을 하룻밤 이루었다.
 
141
정거장 앞을 가슴 닫칠 듯 바투 가려 섰는 조그마한 산이 ─ 산이라기보다는 오똑한 언덕이었다 ─ 흡사 낙타의 형용이어서, 동네 이름도 산 이름도 정거장도 낙타산이었다.
 
142
그 낙타산의 낙타 등에, 동네 사람들의 손으로 깊숙이 광(壙)이 파졌다.
 
143
별빛조차 없는 어둔 밤이었다. 20년, 이 삭막한 호지에서 더불어 고생을 하다가 해방된 조국에서 기다리는 호강을 꿈꾸면서 길 떠나려던 길에 뜻도 아니한 변사를 한 마누라를 마포 한필 쓰지도 못하고, 헌 누더기 입힌 채 거적으로 싸 끝끝내 이 호지에다 묻고 있는 윤서 오서방의 눈물은, 말 그대로의 창자가 녹는 눈물이었다.
 
144
한 삽 두 삽, 흙을 덮을 때 세 부자는 얼마든지 눈물을 뿌렸고, 참으로 눈물 한 켜 흙 한 켜의 장사였다.
 
145
영호는 울면서도 돌을 하나 안아다 어머니의 발치에 함께 묻으면서 내 자라거든 반드시 여기를 와서 어머니의 백골을 파 안고 고국으로 돌아가리라 맹세를 하였다.
 
146
좁디좁은 단간방이건만 사람이 죽어나간 뒤는 어쩌면 그다지도 휑 뎅그렁 한 것이지.
 
147
젖먹이는 어머니의 젖꼭지를 찾으며 울어 보채고.
 
148
지난해 섣달에 나서 아직 제 돌도 차지 못한 아이였다.
 
149
배탈이 난 끝인데, 어젯밤 한뎃잠자리를 하고, 오늘은 새벽부터 거의 종일 바람을 쏘이고 한 것으로, 촉랭이 되었는지 몸이 불덩이같이 끓고 기침을 하였다. 그러느라니, 찾느니 더욱 어머니의 젖꼭지일밖에 없었다.
 
150
아낙을 죽여 묵은 간은 제쳐놓고라도, 이 병들어 어미의 젖꼭지만 찾으면서 울어 보채는 어린것을 안고 오서방은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151
이런 때에 오선생이라도 있었으면 싶은 것은 영호 부자의 꼭 같은 간절한 생각 이었다.
 
152
오선생이 있기로 우는 아이 울음을 그치게 하는 재주가 있는 바 아니요, 죽은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수가 있는 바 아니요 하였지만, 그래도 오선생이 있었으면 저으기 마음 의지가 될 것 같았다.
 
153
그런 생각을 하면 당초에 오선생이 함께 떠나자고 하던 것을 듣지 않고 충 그린 일이 가슴 저리게 후회스럽다. 오선생은 한 주일 전에 떠났었다.
 
154
한시라도 이 지긋지긋한 곳에 머무르고 있을 정은 없으나 앓는 어린것을안고 뚜껑도 없는 찻간인데 기름짜듯 사람이 찬 차를 타자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155
좀 나으면 하고 하루 이틀 기다려 보았다.
 
156
그러나 아이는 낫기는 고사하고 차차로 더하여 갔다.
 
157
마지막 이틀인가는 입술이 새까맣게 타가지고 마디숨을 꽁꽁 쉬면서 어깨로 기침을 하더니 엿새 만에는 마침내 숨이 떨어졌다.
 
158
난지 제돌도 못된 영수는 그리하여 어머니를 따라 낙타산의 낙타등에 어머니와 나란히 묻히고 말았다.
 
159
오서방은 그렇지 않아도 얼뜬 사람이 이제는 아주 넋이 나간 사람같이 되었다. 몸가짐도 더 꿈떠지고, 무엇을 잘 잊어버리고…… 담뱃대를 방금 쥐고 있다가 잃어버리고는 쩔쩔매면서 찾고.
 
160
그 뒤 낙타산을 떠나 도문(圖們)으로 해서 국경을 넘어 소련군이 차지 하고있는 고국의 이북땅을 함경도로 내려와 38선이라는 것을 넘어, 그러는 동안 여러 곳에서 차를 내려 며칠씩 기다렸단 겨우 다시 얻어 타고 하면서, 그러다가 가까스로'남대문’정거장에 닿아, 전재민 열차로부터 영호 남매를 손목을 이끌고 내리기는 시월도 다 가는 그믐이 임박하여서였었다.
 
161
열다섯 해 전, 이 남대문 정거장에서 영만의 손목 이끌고, 새로 만난 아낙과 더불어 간도를 향하여 떠나던 그날의 윤서 오서방은, 30대의 젊음이 있었고, 가서 안락하게 살아보겠다는 희망이 뿌듯하고 하였었다.
 
162
그러나, 가서 안락히 잘 사는 대신, 15년을 강낭이 조팝과 일본 사람 만 주 사람의 핍박과 모진 추위와, 이것으로 살았고, 어미 없이 기른 영만은 집을 나가서 잃었고, 아낙은 그 원통한 죽음을 하여 그곳에다 시체를 묻었고, 또 하나의 자식을 날렸고, 그리고 이미 늙어 흰머리를 휘날리면서 다시금 어미 없는 두 어린것의 손목을 이끌고 이 남대문 정거장에 내려서는 윤서 오서방은 문득 가슴이 메이면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르지 아니치 못하였다.
 
163
생이별을 한 자식 영만을 만나리라는 것과 땅이야 집을 얻어 평안히 농사 하면서 가난과 압제 없는 세상을 살게 된다는 것과 이 두 가지의 꿈을 품은 것이 없었다면, 오서방은 그동안 하마 애가 밭아, 중로에서 미쳐 버렸든지 죽었든지 하고 말았을는지도 몰랐다.
 
164
꿈은 골똘하였었다. 그러나……
 
165
그 많다던, 그 좋다던 왜사람들이 살다가 비워놓고 갔다는 집들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지…… 매양 회사의 사무실로 쓰던 집이리라, 벽돌집에 외양은 크고 번듯하였으나, 유리창은 절반도 더 깨어먹어 찬바람이 휘돌고 양회 바닥에 가마니폭을 깐 넓기만 무단히 넓은 방인데, 시꺼멓고 지치고 병든 전재민의 떼가 여기저기 함부로 눕고 앉았고 한 그런 방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에 즐거운 고국에의 꿈은 한귀퉁이가 벌써 무너지던 것이었었다. 무너져가는 것……
 
166
 
167
영호네가 서울로 와서 알 사람이라고는 오선생밖에 없었다. 또 찾아야 할 사람도 오선생밖에는 없었다.
 
168
당도하던 이튿날 하루를 쉬어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오선생이 한걸음 앞서 떠나면서 내 친구의 집인데 가면 십상 거기서 유하게 될 것이요, 가사 다른 곳에 유숙을 하더라도 이대로만 찾아오면 좌우간 만날 도리가 있으리라면서, 삼청동 몇번지 아무개라고 적어 준 종이쪽을 손에 들고, 오서방은 영호 남매와 함께 대학병원 옆의 전재민원호소를 나섰다.
 
169
원호소의 사무실 사람에게 자상히 설명은 들었으나, 오서방은 열다섯 해전에 4,5년 서울서 살았다고 하지만, 오래도 되었을 뿐 아니라 집과 거리의 모습이 모두 변하여 집을 나서면서부터 연해 몇번이고 삼청동을 어디로 가느냐고, 삼천동을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야 하였다.
 
170
고국과 서울을 한꺼번에 처음으로 보는 영호는 모든 것이 좋고도 이상한것 뿐이었었다.
 
171
큰 집(建物[건물])들, 으리으리한 좁은 집(住宅[주택])들, 넓은 거리, 전차, 많은 자동차, 물건이 얼마든지 들여쌓인 가게들, 다 좋았다.
 
172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 좋은 서울이 어쩌면 이다지도 더러운지 몰랐다.
 
173
골목골목이, 너저분한 쓰레기가 그득그득 버려져 있었다.
 
174
양편은 사람이 다니도록 조금 높아가지고, 네모 반듯반듯한 양회 공구리의 돌을 깔고 한가운데는 차가 다니는 말씬말씬한 것이 고무를 먹인 것 같은 바닥이요, 그런 좋은 길인데, 길 옆은 맨판 똥과 오줌을 갈겨논 자국 이었다.
 
175
마침 앞서 가던 아버지가 한눈을 팔았든지, 하마터면 똥을 밟을 뻔하고는 이크 하고 놀랐다. 그러고는 침을 페페 뱉으면서 다시 걸으면서
 
176
"에이! 길에다 똥오줌 싸라는 해방인가 부다!" 하고 두런거렸다.
 
177
그 말에 영호는 아버지더러 물었다.
 
178
"전에는 이러지 않았우 아버지?"
 
179
"어디가 이랬니? 퍽 깨끗했지."
 
180
"그랬는데 어째 지금은 이렇게…… "
 
181
"낸 들 아니?"
 
182
영호는 암만 생각하여도 모를 일이었다. 설마 아버지가 아까 혼잣말로 한 말대로, 똥오줌 싸라는 해방이야 아닐 것인데…… 남에게 나라를 뺏기고 서남에게 매어 살다가 해방이 되어 나라를 도로 찾고, 나라가 내 것이 되었으니 전보다 오히려 길 같은 것만 하더라도 더 깨끗이 하면서 아끼고 해야 할것인데 말이었다.
 
183
영호네가 시방 가고 있는 길은 창경원과 종묘(宗廟) 뒤 곁 사이로 난 길 이었었다.
 
184
돈화문 앞 넓은 마당에 다다랐다.
 
185
오서방은 돈화문(敦化門)을 이윽고 바라다보더니 혼잣말로
 
186
"오오! 예가 인제 보니 창덕궁 대궐이구먼…… " 하고는 영호 남매를 돌려다보면서 말하였다.
 
187
"예가, 이 안이, 우리 나라 나라님이 기시던 대궐이란다. 창덕궁이라 구."
 
188
영호는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들은 옛이야기(童話[동화])대로 이 화려하고도 이상한 옷을 입고, 화려하고도 큰 궁궐에서 궁녀와 신하들의 옹위를 받으며 오락가락하고 있을 나라님이라는 사람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궁궐은 보이지도 않는 바깥문(돈화문)만 황홀하여 바라다보고 있었다.
 
189
아버지는 한참을 서서 둘러보다가 팔을 들어 오던 쪽을 가리키면서 말 하였다. 그러고 보니까 저기가 아마 동물원일 거라고. 지금 높은 담 밑으로 해서 오지 않았느냐고. 그 담 안이 동물원인데, 사자랑 호랑이랑 코끼리랑 이상한 여러 가지 새랑 꽃이랑 식물들이랑 별별 것이 다 있느니라고. 너의 형영만이를 데리고 한번 구경을 왔었더니라고. 너희도 인제 한번 구경을 시켜 주마고……
 
190
영자는 큰 눈을 동그랗게 하면서 손뼉을 칠 듯 좋아하였다.
 
191
영호는 학교에서 선생님들한테서 이야기로만 듣던 동물을 실지로 보게 된것이 껑충껑충 뛰고 싶게 좋았다.
 
192
계동 어귀에 이르렀을 때였다.
 
193
좋은 모자에, 좋은 외투(봄 외투)에 윤이 반짝반짝하는 구두에, 단장 짚고한 깨끔하게 생긴 남자와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얼굴을 이쁘게 단장하고 머리는 새둥우리를 인 듯하고, 손가락에는 반지를 여러 개나 끼고 새까만 손가방을 들고 한 여자의 내외가 다섯 살이나 먹었을까 그런 계집아이를, 아직 은 그다지 춥지도 않은데, 보얗고 부얼부얼한 털외투를 입히고, 털모자를 씌우고, 간드라진 구두를 신기고 하여 양편에서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앞을 가로질러 큰길로 나서고 있었다.
 
194
영호는 이렇게 잘 차리고, 그래서 버젓하여 보이는 조선 사람을 보아 본적이 없었다.
 
195
이 사람들에 비하여, 영호 저희들의 옷 주제는 너무도 초라하고 궁기가 흘렀다.
 
196
아버지는 누덕누덕 깁고, 시꺼멓게 드렌 홑고의적삼을 썽렁하니 걸치고, 내다 버려야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게 생긴 헌 고무신을 신었다. 머리는 박박 깍은 맨머리.
 
197
영자는 겹옷, 명색은 겹옷 명색이나 아버지와 다를 것 없이 노닥노닥 깁고 땟국이 묻고 한 치마저고리요, 맨발에 닳아빠진 게다를 끌었다.
 
198
영호 저는 무릎 아래 종아리가 뻘겋게 드러난 동강바지의 통학복 위 아랫 막이에 역시 해어진 운동화를 꿰었다.
 
199
이런 저희의 차림차리를 둘러보면서 저 사람들은 다시금 볼 때에, 어쩐 지영호는 저 사람들이 저희들처럼 조선 사람이 아닌성만 싶어졌다.
 
200
옷을 그렇게 잘 입고, 버젓하여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입술에는 기름기가 번지르하였다. 군 고기에 누런 기름이 둥둥 뜨는 고깃국에 맛있는 김치에 설설 녹는 입쌀밥으로 배가 불룩하도록 밥을 마침 먹고 나선 그 입술들이었다.
 
201
영호네는 시래기를 숭숭 썰어 소금에 끓인 쓰디쓴 국에다 콩이 절반도 더 섞인 원호소의 조밥을 한술씩 먹었을 뿐이었었다.
 
202
그 사람들은 행길로 나서더니, 지나가는 자동차를 손들어 붙잡아 타고는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리었다.
 
203
영호는 어떡하면 이렇게도 다른 조선 사람이 있는고 하였다. 시방까지 살다 온 대이수구 동네에는 같은 조선 사람들끼리 이렇게 다른 법이 없었다.
 
204
그들도 정녕 조선 사람인 것은 번연하였다. 그러나 영호는 그들은 아무래도 조선 사람이라는 것이 거짓말인 것이라야만 할 것 같았다.
 
205
"지끔 그 사람들두 조선 사람이우, 아버지?"
 
206
영호는 이미 자동차가 멀리 사라진 뒤를 또 한번 돌아다보면서 물었다. 결코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님은 물론이었다.
 
207
아버지는 실없는 자식이라는 듯이 벌쭉 웃으면서
 
208
"그럼 대국(大國:中國[중국]) 사람이겠늬? 하였다.
 
209
영호는 시방 또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이상하다기보다 섭섭하였다.
 
210
영호는 길로 나서면서부터 지나치는 사람들의 낯꽃을 유심히 보았다.
 
211
어른, 아이, 노인네, 여인네, 학생, 신사, 노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저희 네와 같은 전재민, 이렇게 만나는 대로 그 사람들이 영호 저희네를 어떤 낯꽃으로 보는가 하고 그 얼굴들을 유심히 보았다.
 
212
그러나 그들은 같은 전재민만 말고는 열이면 열 스물이면 스물 죄다가 그저 본숭만숭이었다.
 
213
어떤 한 사람이나 얼굴 한구석에도 ' 아, 타국에서 돌아온 동포! 전재민! 고생하다가 해방된 고국을 찾아 돌아온 반가운 동포!’
 
214
이런 생각을 하면서, 뜻있는 눈으로 보아주는 기색은 아무리 유심히 살펴도 나타나는 것이 없었다.
 
215
이것은 그저께 처음으로 서울에 닿아서 닿던 멀로도 그랬고 원호소로 오면서도 그러했었다. 심지어 전재민을 맞이하여 원호를 하여주고 있는 원 호소의 사무실 사람들까지도 그러하였었다.
 
216
아버지가 앞에서 오는 사람을 가로막듯 나서면서
 
217
"저어, 삼청동을 어디루 해 가지우?" 하고 묻는다치면, 멈춰 서려고도 않고
 
218
"일러루 곧장 더 가다 물어보우." 하면서 획 지나가 버리고.
 
219
그중 조금 친절하다는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가다 군정청 옆을 끼고 올라가라고 가리켜는 주던 것이나, 전재민이로구나, 외국에서 해방을 듣고 돌아온 동포로구나 여기어 유심히 보거나 더우기 동정의 빛을 보이거나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220
오직 영호네를 주의하며 지나치는 것은 의복이 추레하고 철 지난 것이며, 기운이 없고 어릿어릿하는 것으로 한번 보아 전재민인 것을 분간 할 수 있는 같은 전재민들뿐이었었다.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전재민인게다…… 어디서 들온 사람인지? 하는 얼굴이면서, 짯짯이 보고 지나치곤 하였던 것 이었었다.
 
221
영호는 고국 사람들이 그와 같은 범연하고 푸접 없음을 생각하면, 고국이 아무 재미도 없어지는 것 같았다.
 
222
'우리는 거기서 살 때, 언젠가 고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온 것을 퍽도 반가와 하면서 세상에 없는 손님으로 맞이하여 알뜰히들 대접을 하고 하였건만!……’
 
223
그 끝을 영호는 이런 생각을 문득 하고, 더우기나 마음이 언짢았다.
 
224
옛날은 총독부라고 하여 왜사람들이 왕 노릇을 하며 조선 사람을 못 살게 굴었고, 지금은 왜사람들 대신 미국 사람들이 대신 들어앉아 이름도 군정청이라고 한다는 무섭게 큰 집을 왼편으로 구경하면서 개천을 끼고 올라가 다시 몇번이고 물어서야 가까스로 오선생이 적어 준 집을 찾기는 찾았다.
 
225
늙수그레한 여인네가 나와서, 대답이, 며칠 전까지 유하고 있었는데, 황해도에 다니러 간다고 떠났다는 것이었었다.
 
226
영호네는 맥이 탁 풀렸다.
 
227
"다시 오시기루 했나요?"
 
228
오서방이 이윽고 묻는 말에
 
229
"오구말구요!" 하여서, 조금 기운을 얻었다.
 
230
"언제쯤 돌아오시기루 하셨나요?"
 
231
"한 보름 걸리겠다구 합니다만…… "
 
232
오서방은 한참 서서 생각하다가, 그때쯤 해서 또 한번 찾아오겠노라고, 혹시 그 안에 오선생이 돌아오거든 간도서 같이 지내던 오서방네가 찾아왔더란 말을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한 후에 발길을 돌이켰다.
 
233
처가가 황해도요 가족이 거기에 있고 하다더니 다니러 간 모양이라고. 그렇지만, 이번에 오면서 본 바 38선을 넘어오기는 수월하여도, 이쪽에서 넘어가기는 퍽 까다롭다고 하는데, 무사히 다녀 쉬 오기나 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 하였다.
 
234
이왕 나선 길이니 거리 구경이나 하자고 군정청 앞으로 좇아 광화문 네거리로 내려왔다.
 
235
빗발치듯 하는 자동차와 전차가 열십자로 엇갈리는 네거리 복판을 어떡하다 들어섰다. 그 속에서 미국 병정의 자동차(지프)는 어쩌면 그다지도 우악스럽고 사정이 없는지 하마터면 세 식구가 한꺼번에 치일 뻔하였다.
 
236
교통순사가 성이 꼭뒤까지 나서 붙잡아 세워놓고, 눈을 부라리면서 딱 딱 거렸다. 곧 한대 갈길 것만 같았다.
 
237
"용서헙쇼, 나리! …… 타국에서 온 전재민이라 그렇습니다."
 
238
오서방은 연방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개개 빌었다.
 
239
순사는 오히려 더 호통이었다.
 
240
"전재민이 무슨 유센가?"
 
241
"아니올시다. 거저…… "
 
242
"망할 자식들! 걸핏하면 전재민 전재민 하구 나서구…… "
 
243
"네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
 
244
"전재민은 전차나 자동차에 칵 쳐 뒈지지 말란 법 있어?"
 
245
"네, 거저 이번 한번만…… "
 
246
"임자네 따위 뒈지거나 말거나 내야 아랑곳없지만서두, 정리 잘못 했다구, 위에서 책망이 내리니깐 그래 말이야…… "
 
247
마지막 이렇게 씹어뱉고는 겨우 놓아주었다.
 
248
딱딱거리고, 반말지거리로 욕하고, 함부로 때리고, 붙잡아 가두고 하면서 백성을 압제 하는 순사는, 왜사람들이 쫓기어 감과 함께 없어졌으리라는 것은 허망한 생각이었다.
 
249
되었다던 독립은 어디로 가버리고 옛날 왜사람이 앉아서 왕 노릇을 하며 조선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는 총독부 거기에는 왜사람 대신 미국 사람들이 들어 앉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사는 여전히 백성에게는 무서운 물건인 채로 있던 것이었었다.
 
250
한 보름 걸리겠다고 하였다니, 11월 열흘께는 돌아왔어야 할 오선생이, 11월 한 달이 다 가도록 돌아오지를 아니하였다.
 
251
사흘에 한번, 나흘에 한번 찾아갔다가는 허탕을 하고 돌아오면서 별 생각을 다 하였다.
 
252
38 선이 넘나들기가 차차로 어려워 간다더니, 그래서 길이 막혀 오지 못 하는 것인지.
 
253
그런 것이 아니고, 가족이 거기에 있고 하니 영 주저앉아 살기로 한 것인지.
 
254
오선생을 만나자고 하는 것은 영만의 거취를 알아보는 데 힘이 될까 함이었다.
 
255
그렇다면 막막히 이렇게 오선생만 기다리고 앉았을 것이 아니라, 되나 못 되나 이북으로 가보는 것이 옳지 않을는지. 들으면, 이북은 공산당 천지요, 김일성의 파도 평양으로, 벌써 왔다더냐, 쉬이 오리라더냐 하니 말이었다.
 
256
그러나 이 추위는 닥쳐오는데, 어린것들을 데리고 험하다는 38 선을 어찌 넘으며, 또 그런 대로 가기는 간다고 하더라도 아무 반연이나 의지도 없이섬뻑 가기로소니 매양 남대문 입납이 아닐는지.
 
257
이렇게 두루 답답히 지내면서, 그러나 계속해서 삼청동을 가보기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258
12월도 열흘이 지나서야 오선생은 돌아왔다.
 
259
또 허탕이나 아닌지 하면서 막상 몰라 가보았더니 뜻밖에 오선생은 와서 있었다.
 
260
이날도 다른 날처럼 세 식구가 같이 갔었다. 오서방은 귀가 먹고 어릿 거려 자동차랑 이 조심이 되어서 밖에 나갈 때면 영호가 함께 다녀야 마음이 놓였고, 그런데 영자를 혼자 떨어져 있게 하기가 애차라, 언제나 셋이 같이 다니고 하였다.
 
261
오선생은 무척 반겨하면서 어제 저물게야 당도하였노라고, 볼일이 여 의치 않아서 이렇게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였다.
 
262
그리고 영자의 머리를 쓸어주면서, 너희들도 고생 많이 했지야고, 그러다가 생각이 나서
 
263
"참, 아즈머니는? 영수랑…… "하고 물었다.
 
264
"죽었답니다!"
 
265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참이나 있다가 오서방이 대답하였다.
 
266
오선생은 껑충 뛰면서 어떡하다 그랬느냐고 물었다.
 
267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선생은 저런 천하에 무도한 놈들이 있을까보냐고 분해 하였다.
 
268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못내 슬퍼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때 낙타산 정거장 옆에서 어떤 사람이 하던 말대로
 
269
"참, 비싼 해방값을 치렀구려!" 하고 탄식을 하였다.
 
270
오선생은 헌것이나마 외투는 하나 입고 있어도, 대이수구에 있을 때보다 행색이 별로 나아진 구석은 없었다.
 
271
기운은 오히려 준 것 같았다.
 
272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가지고 와, 그 납뛰며 하던 기운을 별양 볼수가 없었다. 해방 전의 오선생으로 돌아간 느낌이 없지가 못하였다.
 
273
"제엔장맞일! 이거 해방 잘못됐어, 잘못돼…… 어서 해방을 곤쳐 해야지, 큰일 났어! 호랑이 한 마리를 내쫓군, 사자허구 곰허구 두 놈이 앞마당 뒷마당에 들앉은 형국이니! 제엔장맞일!"
 
274
해방이 되면서, 어디로 갔던 젠장맞을이 도로 나와싸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오선생에게도 해방이 실망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
 
275
"그런데……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니, 할 수 없거니와…… 그동안 영만이 소식, 물론 못 알아보셨지?"
 
276
오선생은 밖으로 나가 점심을 좀 분별하여 달라고 안주인더러 부탁을 하면서 돈도 주고 하는 모양이더니, 도로 들어와 앉으면서 먼저 그렇게 이야기를 꺼내었다.
 
277
"무슨 수루 알어볼 도리가 있나요, 그래서 그리잖어두 시방 바라구 기 대리 느니 선생님만 하 눌만 침…… "
 
278
"그러면…… "
 
279
오선생은 곰곰 생각을 하다가 말하였다.
 
280
"이럭허시지…… 시방 평양으루 저애들을 데리구 가기두 군색하구 고생스런 노릇이니, 서울서 그대루 기대리구 기시지…… 오라잖아 38 선이 터지구, 터지는 날이면 북쪽 사람들두 서울루 쓸어 올 테니깐…… ""그렇게 될까요?"
 
281
"아니 되구 어떡헙니까?…… 조선문제 때문에 미국허구 소련허구 수히 어디서 대표가 만난 상의를 하리라구 하니깐, 좌우간 그땐 무슨 하회던지 하 회가 있겠죠."
 
282
"어련히 알아서 하실 리 없으니깐, 선생님 하라시는 대루 하지요."
 
283
"그리구 말씀예요. 내가 날새 똑 북쪽을 다니러 가야 할 일이 있읍니다.
 
284
평양까지 갈 테니깐, 그 길에 소식은 우선 아는 대루 알아다 드리죠."
 
285
"그러신다면 더구나 머…… "그만하면 안심하고 기다려도 좋게 되었다.
【원문】비싼 해방(解放)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138
- 전체 순위 : 539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84 위 / 882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86) 삼대(三代)
• (23) 적도(赤道)
• (21) 어머니
• (20) 탁류(濁流)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소년은 자란다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9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15권)     이전 7권 다음 한글 
◈ 소년(少年)은 자란다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