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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少年)은 자란다 ◈
◇ 일등공(一等功)과 북어와 기타(其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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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2월 25일
채만식
1
少年[소년]은 자란다
2
- 一等功[일등공]과 북어와 其他[ 기타]
 
 
3
"제기, 이 아깐 걸 그대로 내버리구섬 떠나야 옳담 !"
 
4
영호의 아버지 오서방이 손에 잡히는 대로 서속 목쟁이를 한 묶음 집어 멀 찍이 들고는, 고옴곰 바라다보다가 퍼뜩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였었다. 그 느리적느리적하는 말로……
 
5
서속 이삭은 참말 탐스럽다. 근년 보기 드문 풍년으로 서속 이삭 하나가 개 꼬리만 씩 하다고들 하였다.
 
6
"매양, 새허구 만인들 존 일이나 시킬 테죠 !"
 
7
영호의 어머니가 토닥토닥 서속을 털면서 약간 좀 부르튼 대껄이었다. 그러고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
 
8
"이럴 줄 알았으면 누가 그 비지땀 흘려가믄서 이걸 매가꾸 ?"하고 한숨을 몰아쉰다.
 
9
영호의 아버지가 이왕이면 일찌감치 떠날 편으로 뜻이 기우는 데 대하여 영 호의 어머니는 웬 일인지 내키지가 않는 편이었었다.
 
10
20년 가까이 공력 들여 가꾸고 장만한 밭, 집, 세간 들이 차마 버리고 떠나기가 여자의 연한 마음으로 못내 아까왔을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11
영호는 아버지의 편이었었다. 집안 식구 가운데 제일, 시방 고국에 대한 화려한 꿈을 그리면서 마음이 달떠 가지고 하루바삐 떠나기를 은근히 재촉 하는 것이 영호였다.
 
12
"어머니, 어머니 ?"
 
13
영호는 그렇게 불러놓고는
 
14
"조선으로 가믄 말이우, 오선생님이 그리시는데 말이우, 참 좋대 !"
 
15
"무어가 그대지 좋다든 ?"
 
16
"어머니두 접때 그날 학교 와서 오선생님이 연설하는 거 다아 듣구두 그래 !"
 
17
"것두, 머리 두루구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 말이지 !"
 
18
철없는 어린 아들더러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혼자엣 넋두리 비슷한 말이었다.
 
19
고향…… 친정…… 친정집에는 어머니 아버지도 어쩌면 아직 살아 계실는지 몰랐다. 동생들도 있고 일가도 있었다.
 
20
대추 많이 나는 청산 보은(靑山 報恩)하는 보은이었다. 살던 마을과 더불어 부모, 동생, 일가 사람들의 모습이 선히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면서 불현듯이 가고 싶은 생각이 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역시 떠오르는 한 사나이의 몸서리가 치도록 사나운 얼굴 !
 
21
무서운 매질. 아무 근거도 없이 다만 저 혼자만의 의혹과 질투로 하루 도거 르는 날이 없이 매질을 해쌓던 무서운 매질…… 마침내 시퍼런 칼을 가슴패기에 겨누고, 없는 자복을 하라면서 대들던 그 쌍심지 선 눈…… 소박을 맞았노라고 한 것은 둘러댄 말이요, 실상은 목숨을 보전키 위 하여 도망을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선뜻 만주로 가기를 찬성한 것도, 그 사나이의 뒤쫓음을 아주 면하자는 노릇이 아니었던가.
 
22
그 사나이는 지금도 고향에 살아 있을 것이요, 그 사나이가 살아 있는 날까지는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이었다.
 
23
영호의 어머니는 또다시 한숨을 몰아쉰다.
 
24
"그리구 말이우, 어머니…… "영호는 어머니의 그런 마음속을 알 턱이 없는 것이라 연해 신이 나서 하는말이었다.
 
25
"학교두 참 좋대 ! 선생님들이 모두 훌륭한 자격이 있구…… 그리구, 중학교두 대학교두 맘대루 갈 수 있대…… "
 
26
그러다가 영호는 아버지더러 조금 큰 소리로 묻는다.
 
27
"아버지, 나, 대학교꺼정 가죠 ?"
 
28
"너만 열심히 하렴 ! 독립두 되구 했다는데, 너 대학교 하나 못 보내서야 독립한 보람 있니 ?"
 
29
영호는 입이 귀밑까지 째진다.
 
30
마악 그럴 때에 오선생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31
"독립두 되구 볼 거 아뇨, 종씨 ?…… 이 고장에서 소주맛을 다 보니."
 
32
오선생은 동상 같은 얼굴로 흐물흐물 웃으면서, 손에 든 대두병을 쳐 들어 보인다. 한손에다는 마침으로 북어까지 댓 마리나 들고.
 
33
식구들이 저저끔 일어서면서 인사를 한다.
 
34
"그 귀한 걸, 어디서 ?……"
 
35
오서방이 미상불 반가와하면서 묻는다. 소주보다도 이곳에서는 북어가 오히려 더 귀물이었다.
 
36
"아 궁구움하길래 소식두 알 겸 형편두 볼 겸, 오늘두 낙타산엘 좀 나갔죠. 했더니, 이런 게 다 얻어걸리는군요 !"
 
37
오선생은 그리고는 북어를 일어서서 맞이하는 영호의 어머니를 주면서
 
38
"귀한 거니, 두 마리만 뜯어 술상에 놔주시고, 남겨질랑 아즈머니 잡수시우. 저 영호랑, 영자랑. ……너 영호 독립돼 좋지 ?"
 
39
"내."
 
40
영호가 벙글거리면서 대답이었다.
 
41
"인전 뻐젓한 독립국민이야 ! 세계 어딜 가두 얼굴 번쩍 쳐들구 나설 수 있는 독립국민 조선 사람야 ! 알겠지 ?"
 
42
"내."
 
43
"허허허허…… 그동안은 느이가 가엾구 느이한테 면목이 없더니, 하여 커나 독립이 돼, 무어보담두 느일 위해 다행이요 기쁘다 !…… 그렇지만 인제부터 느이가 할 일이 크구나. 새 조선의 건설은 느이가 해야 할테니깐…… "
 
44
"아버지가 절 대학교꺼정 공부시켜 주신대요 !"
 
45
"아무렴, 대학 가야 하구말구…… 우리 종씨 만세다 ! 허허허허…… 그동안은 왜사람들이 조선 사람은 암만 많이 지원을 해두, 꼬옥 저이가 정해 논 수효만 대학엘 들여주군, 그 이상은 절대루 아니 들여주더니라. 또 교육 하는 법식이나 내용두, 소학교버틈 대학까지 왜사람 저이네 밑에서 심 부림꾼 노릇 해먹기 졸 만치만 교육을 했지, 학생이 자유롭게 연구하구, 제 타구난 재주를 뻗히게 하구, 그런 건 일체루 꺾구 금했더니라. 그렇지만 인제버틈은 그런 염려는 죄끔두 없지. 맘대루 학교에 들어가구, 자유롭구 활발하게 배우며 연구하며 천재를 떨치구…… "
 
46
오선생은, 뜻인즉은 민주주의 교육을 의미하던 것이나, 그 민주주의라는 말이 미처 이 고장에는 들어오지를 않았었다.
 
47
마당 거기 아무데나 거적을 영호더러 펴게 하고, 오선생과 오서방이 마주 앉았다. 영호가 오선생이 더워하는 것을 알고 알심 있이 세수물을 가져왔 다.
 
48
"그래, 가보신깐 어떻지요 ?"
 
49
오서방이 묻는 말에, 오선생은 푸푸 낯을 씻으면서 일변
 
50
"소련군이 운전하는 차가 가끔 더러 댕긴대나 바요. 대개 화물찬데, 귀국 하는 조선 사람을 태워 주기는 주나, 오기를 꽉꽉 차가지구 와 얻어 타기가 좀 힘이 드는 모양이드군요."
 
51
오선생은 세수하기를 마치고 돌아앉아서 다시
 
52
"그러니깐, 종씨네두 어서어서 떠날 도리를 하서야지 ?" 하고 묻는다.
 
53
오서방은 그 말에는 대답치 않고, 끄먹끄먹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다가
 
54
"우리 동네서 간 사람들은 ? 다 떠났던가요 ?"
 
55
"모두 해, 한 20가구가 낙타산으로 나와 있는데, 그중 절반은 벌써 떠났 읍 디다."
 
56
오서방은 또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다가 ─ 바로 할 말도 무단히 한참씩 끄 먹 끄 먹하고 있는 것이 오서방의 오서방다운 짓이었었다.
 
57
"낙타산서는 집이랑 무얼 더러 판 사람 있는가요 ?"
 
58
"천만에……"
 
59
오선생은 동상 같은 커다란 얼굴을 커다랗게 여러 번 흔들면서
 
60
"만인들 참 무선 사람들입디다 !"
 
61
"………"
 
62
"무선 사람들인 것이, 가령 백 원짜리 집은 넉넉 되는 집인데 단 10원 만내구 사라구 해두 부요 부요 ─ 하면서 사질 않는다는군요 !"
 
63
"………"
 
64
"그리군 저이끼리 하는 말이, 우리가 안 사면 조선 사람들이 집 떠가지 구가지는 못할 터. 할 수 없이 벼 내던지구 갈 게 아니냐. 그때 가서 공짜 루 차지하지, 시방 돈 주구 살 것이 무엇이냐. 이런답니다그려 ! 그러니 무선 사람들 아녜요 ?"
 
65
오서방은 알아듣겠다고 고개를 끄덱끄덱하고 나서
 
66
"곡식두 그럴까요?"
 
67
"일반이죠 !…… 한 말 두 말이라면 가지구 간다지만, 제마다 열 섬 스무 섬 거두는 걸 어떻게 가지구 갑니까 ? 이불이나 옷보퉁이만 해두 짐이 짐스럴 지경인데."
 
68
"세간 나부랭이두 ?"
 
69
"세간 나부랭이두 !"
 
70
영호 어머니가 북어 찢은 것에다 고추장이야 김치 따위를 논 술상을 가져다 놓았다.
 
71
놓고 물러서면서
 
72
"올일랑 농사두 잘 되구 해서 부디 소주를 좀 내려, 선생님 대접을 하려니 했더니. 막걸리만 잡숫게 해 민망해서, 그랬더니…… "
 
73
"그런데, 독립이 소주를 지레 가져왔군요 ? 허허허허. 가만 기십시요, 아 즈 머니. 고국으루 돌아가 내 댁에 찾아가께시니 입쌀 소주에다 씨암탉 삶어, 술 한잔 주십시요 !"
 
74
"드리기만 해요 ! 머 참, 이렇게 서루 어렵던 일 일러 가 믄 서…… "오서방이 술을 쳐 오선생더러 들라고 권을 한다.
 
75
오선생은 오서방더러 먼저 들라고 사양을 하다가 잔을 받는다.
 
76
"소주 오라간만이다. 지나간 봄에 왕청 나가서 먹군 첨이군 !"
 
77
오선생은 잔을 채워 오서방에게 건네면서
 
78
"드시우…… 그리구, 종씨 ?"
 
79
"네 ?"
 
80
오서방은 몇해 만인지 모르는 소주라, 카 하지도 않고 약주술처럼 쪽 마신다.
 
81
"종씨두 폐일언하구, 내일이라두 웬만한 것만 대강 챙겨가지구, 낙타산 으루 나가시우. 나가 기시다, 마침 차 얻어 타구서 네 ?"
 
82
"글쎄요, 원…… "
 
83
"생각 하면, 내버리구 일어서기가 차마 발길이 안 돌려 뇌겠지만, 그래 두어 떡 헙니까 ? 붙잡구 있어 무슨 도리가 생긴다면 혹시 몰라두…… 도리가 그런데 없거든요. 되려 위험이나 더해 올 뿐이지."
 
84
"………"
 
85
오서방은 대답이 없고 앉아서 잔만 받아 마시고 다시 술을 따른다.
 
86
"고향이 청주라구 하섰지 ?"
 
87
"네…… 그렇지만…… "
 
88
"그렇지만, 무어 ?"
 
89
"고향은……"
 
90
"재미가 없어요 ?"
 
91
"………"
 
92
"아뭏든 우선 고향으루 가서야 할 게 아녜요 ?"
 
93
"글쎄요, 원…… "
 
94
"아따, 고향으룬 세상 없어도 안 가기루 했대요."
 
95
영호의 어머니가 서속 털던 자리에서 영호와 영자에게 북어를 뜯어 주고있다가, 남편이 답답하다는 듯이 거드는 말이었었다.
 
96
오선생은 고개를   끄 떡 하면서
 
97
"무슨 곡절이 기신감 ? 그렇길래 고향으룬 아니 가실 령으루 하시지 ?"
 
98
"쯧, 거저…… "
 
99
오서방의 모호한 대답.
 
100
오선생은 새로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101
"정말 곡절이 있어 고향으루 가시기가 내키지 않는다면, 그야 할 수 없는 일 이지요…… 그렇지만, 고향엔 아니 가시드래두 말이죠, 조선으룬 돌아가시 기는 가서야죠 ?"
 
102
"가야지요만……"
 
103
"역시, 가 농사를 하시지 ?"
 
104
"별수 있나요."
 
105
"그럼, 저 전라도(全羅道)루 가시지. 왜사람의 땅이 그중에도 많은…… "
 
106
"전라도가 그런가요 ?"
 
107
"동양척식(東拓[동척])이야, 웅본농장(熊本農場)이야, 무슨 농장이야 해서 무어 열에 여덟 깐은 왜사람네 땅였죠…… 나두 익산(益山)이란 델 가 몇 해 교원질을 하면서 지내보았지만, 그리구 태생이 경기 태생여서, 경 기 땅두 여러 군데 돌아다녔구, 처가(妻家) 황해도에서두 일러루 오기 전까지 한 3년 있어보구 했지만, 땅 좋구 물 흔하구……농사를 하기루 할 말이면 전라도에서 덮을 데가 없으리다."
 
108
"전버틈 그런 말을 듣기는 들어왔지만…… "
 
109
"이름난 김만경 뻘(金萬頃平野[김만경평야])은 끝이 보이지 않습넨다. 한 가을에 찰타구 지나느라면, 끝 닿은 데 없는 들이, 누런 벼이삭으루 사 뭇 바다예요 !…… 그런 좋은 들, 그 많은 쌀 왜사람한테 뺏기구, 우리는 이 구석으로 쫓겨와 흉악한 고생 아니했읍니까 ? 허허허."
 
110
오선생은 술도 들어가 얼근한 김에 유쾌하게 웃던 것이나, 오서방은 차차로 딴 생각에 팔려, 모처럼의 맛있는 소주를 맛없이 마시고 마시고 하면서, 고개는 이윽고 아래로 떨어진다. 검고 거친 얼굴이 근심과 슬픔으로 자욱이 흐리었다.
 
111
그 코가 쑥 빠져가지고 앉았는 것을 오선생은 건너다보고, 또 한번 건너다 보고 하더니
 
112
"종씨." 하고 부른다.
 
113
오서방은 한참만에
 
114
"네 ?"
 
115
"정녕. 큰자제 영만이 생각이 나시는가 보군 ?"
 
116
"생각 아니 날 수가 있나요 !……"
 
117
오서방은 그러고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 다시
 
118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 그걸, 열 살에 에미를 여읜 것을 손목 잡구 만주루 와, 서툰 고생 시키면서 기르던 일 생각하면 애차랍기두 하구…… "
 
119
끔벅 하는 오서방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굵다랗게 한 방울씩 비어진다.
 
120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려고도 않고, 우두커니 앉아 먼산 바라보기를 한다.
 
121
오서방은, 먼저 아낙은 상처를 하였다고 말하였었다.
 
122
또,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 어머니를 찾고 우는 영만더러도, 엄마는 저기 다니러 갔다 죽었다고 하면서 달래고 하였다.
 
123
그 못내, 엄마는 안 오우, 엄마는 안 오우 하고 어둔 밤 뒤를 돌아다 보아 싸면서 울음 먹은 목소리로 몇번이고 묻는 영만을, 오냐 엄마는 죽었으니깐 못 온단다, 엄마는 죽었으니깐 못 온단다 하고 달래면서, 손목 잡아 이끌고 밤, 어둔 고향 마을을 떠나오던 일이 그대로 지금 눈앞에 떠 오르고 있었다.
 
124
서울 남대문 밖 보행객주집, 그 집에서 식은 밥덩이 먹이면서 헌 누더기를 홀아비 손으로 밤 깊도록 앉아 기우면서, 옆에 잠들어 자는 영만을 들여다보고는 홀로 눈물을 흘리기 몇몇번이던고 ─ 그러면서 5년 동안을 기르던 일.
 
125
영만은 아이가 외양부터 우선 아버지를 닮지 않고 저의 난 어머니를 닮아 매우 똘똘하게 생기고 성깔이 다부지고, 그리고 재주가 신통히 있고 하였다.
 
126
주인집에 영만과 한동갑짜리 손자 아이가 있어 학교에 다녔는데, 그 아이가 공부하는 것을 늘 옆에 앉아 보곤 하면서 곧잘 그대로 흉내를 내었고, 그러면서 저도 학교에 다니겠노라고 아버지를 졸라쌓던 일.
 
127
마침 손이 맞아, 두 아이가 일쑤 싸움을 하고 그럴라치면 잘못이 번번이 주인 집 아이한테 있는 줄을 알면서도 내 자식을 나무라고 지청구하고, 때려 주기도 하고 하여야 했던 일.
 
128
지금의 아낙 영호 어머니를 만나 가지고 열네 살에 데리고 다시 이 간도로 떠나오던 일.
 
129
이 대이수구로 와 자리를 잡고 앉기까지에 개산둔(開山屯)을 비롯하여 왕 청으로 쌍하진(雙河鎭)으로 연방 구르면서 고생 많은 세월 중에도 가장 고생을 시키던 일.
 
130
언제 어디를 가나 학교에 다니는 남을 부러워하면서 공부를 하지 못해 안타까와 하던 일. 글자라고 있는 것이면 종이쪽은 눈에 띄는 대로 거두어 가지고 다니면서 알려고 애를 쓰고, 남더러 묻고 하던 일.
 
131
나이 한 살 두 살 들어감을 따라, 무단히 저의 계모 ─ 영호의 어머니와 사이가 잘 맞지 않아 둘 사이에 종종 큰소리가 있던 일.
 
132
계모와 사이가 맞지 않은 걸로 하여, 집안에 낙을 붙이지 못하던 아이가 철이 들던 열 8,9세 그 무렵부터는 백년을 이 구석에 박혀 사니 장래가 무어냐 면서, 사나이 자식이 세상에 났다 이 지경으로 살아 무얼 하느냐 면서, 차라리 대처로 나가 되든 안 되든, 한바탕 납뛰어 보고 마는 게 옳다면서 마음이 떠가지고 늘 불평이던 일.
 
133
재주가 있고, 겸해서 제가 하고자 하는 정성이 있어 틈을 내어서는 책을 빌려다 읽고, 학교의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묻고 배우고 하여, 집을 나갈 무렵에는 남들이 이르기를, 학교의 교원을 한 자리 맡겨도 넉넉히 감당 해치우겠다고 하기에 이르렀었고. 그 끝에 필경 김일성이라더냐의 패를, 짐지고 따라간 채 한마디의 전갈을 보내고는 돌아오지 않고 만 일.
 
134
꼬박 여덟 해 전이요 죽지 않고 살았으면 올해 스물여덟 살이었다.
 
135
오서방이 떠나기는 떠날 생각이면서도 막상 떠나기를 저으기 충그리는 것도, 머리 두르고 갈 곳이 마땅히 없다는 것 외에 한편으로는 그 영만이 퍼뜩 돌아오지나 않나, 총 메고 여럿과 함께 독립만세 부르면서 어엿이 돌아오지나 않나, 행여 돌아왔다 내가 떠나고 없으면 영영 다시 만날 길이 끊기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없지 못하기 때문이었었다.
 
136
오선생은 잔을 마신 후에, 오서방에게 부어 권하면서 말하였다.
 
137
"자, 종씨 드슈. 그리구 내 이야기 들으슈…… 그야 생사를 점치기 어렵지요. 8 년…… 내가 일러루 오던 해요, 와서 얼마 아니 있다 그랬겠다요 ? 그러니깐 8 년이군요…… 그 8 년을 예사 일두 아니요 총 쏘구 접전하는 전장으루만 굴러댕기질 않았다구요 ? 그러니깐 불행히 죽었을는지두 모르죠. 그렇지만 종씨 여보, 그렇다구 반드시 죽었으란 법두 없는 게 아녜요 ? 요행 죽지 않구 살아 있을는지두 모르는 노릇이어든요. 그렇잖아요 ?"
 
138
"그야……"
 
139
"그러니깐 말이죠. 요행히 죽지만 않았다면 지금 벌써 고국으루, 그 패들 허구 함께 들어갔을는지두 모를 겝니다.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라두, 독립운동 하던 패 아녜요 ? 왜사람 쫓을 영으루 싸우던 패 아녜요 ? 그런 사람네 패니깐 독립이 되는 그날루, 소리치면서 고국으루 들어갈 게 아녜요 ? 개선( 凱旋) 이란 말 아시지 ? 전쟁에 이기구 본국으루 돌아가는 거…… 그 사람네 들두 고국 조선으루 개선해 들어가는 거예요. 영만이두 그런 개선군의 뻐젓한 용사랍니다."
 
140
오선생은 신이 나서, 그야말로 개선장군처럼, 술잔을 처억 들어 커다랗게 마신다. 그러고는 다시
 
141
"우리 조선 독립에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자면 1등공을 상 받을 사람이 누구 누구 이겠는지 아시요. 1등공 말입니다…… 조선 안엣 사람으루는 비밀 운동( 地下運動[ 지하 운동]) 하던 공산당들이요, 밖에 나온 사람들루는 상해임시정부 사람들과 중국군대에 가담한 조선 독립군( 朝鮮八路軍[ 조 선팔로군]) 이요, 이 만주서는 영만이가 따라간 그 패엣 사람들이요. 그렇습니다. 1등 공은 그 사람들이 상을 받을 참예요, 두구 보시 우마는…… "
 
142
"그런 것이야 바랄 수 없지만서두…… 천행으루 살아 돌아가기나 했으면…… "오서방은 조금 경황이 나서 그런 말을 하다가 "그렇기 루니, 피차 남대문 입납이지 어떻게 만나는 수가 있나요 ?"
 
143
"있죠 ! 개선군이요, 1등공 받는 사람들이 신문에 아니 나며, 그 소문 못 들으실까 ? 염려 마슈 ! 속으루 축원이나 드리면서 하루바삐 떠날 차부나 차리 슈."
 
144
"그 축원은 제가 드려야겠어요…… "
 
145
영호 어머니가 거든 말이었었다.
 
146
"제발 살아 있어 잘돼 가지구, 고국에서 부재 상봉하구 해예지…… 글쎄, 속 모르는 남은 계모년이 몹시해서 집을 나갔다구 하니 불행히 죽기나 했으면, 글쎄…… "
 
147
"존 말씀이요, 아즈머니. 좌우간 축원드리시우…… 그리구 영호 너두, 인제 고국 돌아가면 훌륭히 돼 있는 형 만난다. 허허허허…… 너 참, 북어 더 먹어라. 이 북어란 물건에 대해서 재미있구두 기맥힌 이야기가 있느니라…… "
 
148
오선생은 안주하던 북어를 접시째 집어 영호에게로 주면서
 
149
"저, 미국에 가 있던 조선 동포 두 사람이…… 미국서두 아주 궁벽한 고장 이드 란 다. 그런 고장에서, 수만리 고국을 늘 그려하면서 사는데, 그러자 한 번은 어떡허다 조선 북어 세 마리가 생겼더래. 우리가 시방 먹는 이런 조선 북어가…… 그래, 이 사람들이 하두우 그만 반갑구두 일변 고국 생각 이 와락 더 치밀어올라서, 아 북어를 먹을 생각을 못하구는 놓구 앉어, 둘이서 방성 통곡을 했더란다. 방성통곡을…… 그럴 듯한 근경이지 !…… 사람이 고국이라는 게 그대지두 정이 있는 거란다, 영호야…… 그렇지만 인제는 우리는 북어를 놓구 설어서 우는 대신, 질겁게 먹어두 좋은 때야. 독립이 됐으니깐, 허허허허."
 
150
오선생의 높은 너털웃음 소리에 싸여 해는 이미 뉘였거리고, 이는 저녁 바람을 좇아 영호가 만들어 꽂은 싸리문 기둥의 가난한 태극기가 조용히 나부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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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은 자란다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9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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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少年)은 자란다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