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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척자(開拓者) ◈
◇ 17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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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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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17.1

 
3
성순은 오래간만에 여러 동창 학우를 만나서 자기와 함께 졸업한 여자들의 근상(近狀)을 알아보려 하여 밀감을 먹어가며,
 
4
"경운(景雲)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5
하고 물었다.
 
6
경운이라는 여자는 반 중에서 가장 미모로 유명하였고 장낭꾼 남자들의 익명 편지도 제일 많이 받기로 유명(類明)이라는 여자가 바로 곁에 앉은 얼굴 길쭉한 여자의 무릎을 툭 치며,
 
7
"경운의 일이야 명운(明雲)이가 잘 알지요. 꼭 한 주일에 두번씩은 편지가 오니까......"
 
8
명운은 부끄러운 듯이 순명의 다리를 꼬집으며,
 
9
"응, 거짓말!"
 
10
"내가 거짓말이야? 성순씨, 이 애 품을 보십시오. 경운의 편지가 스무 장은 있을 테니, 만지장설에......"
 
11
"거짓말이야요. 또 그런 말 할테요?"
 
12
하고 명운은 순명의 귀를 잡아당긴다.
 
13
"아야, 아얏! 이것 놓시오, 안 그래, 안 그래."
 
14
"그러면 몰라도."
 
15
명운은 순명의 귀를 놓는다. 성순은 그것을 보고 한참 웃다가,
 
16
"아니, 경운씨가 어디 가 있는데?"
 
17
"저는 강원도 보통 학교에 훈도를 갔는데, 무엇이 그리 슬픈지, 슬퍼서 죽을 지경이라구려. 밤낮 죽, 그것들이 밉던지...... 글쎄, 그게 무슨 꼴이야요. 아이 참...... 부끄럽지도 않는가 봐."
 
18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그것들이, 남자들이 체면을 아나...... 그 짐승 같은 것들이......"
 
19
하고 명운이가 자기의 말에 찬성을 얻는 것이 기쁜 듯이 웃는다.
 
20
"지금은 없지마는 토지 조사국 측량 기수(測量技手)들은 어쨌어요. 또 ○○학교, ○○학교, 그것들은 공부는 아니하고 밤낮 여학생 따라다닐 생각들만 하나 보지...... 과연 경운의 말이 옳아! 그까짓 것들이 사람이람!"
 
21
하고 또 하나 뚱뚱한 여자가 말한다.
 
22
"그러면 모두들 시집은 아니 가겠네.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니깐......"
 
23
하고 성순이가 웃는다.
 
24
"시집은 왜 가? 우리도 악마가 되게?"
 
25
하고 명운은 흥분한 어조로 말한다.
 
26
"다들 시집 아니 간다고 하더니 그래도 다 가데."
 
27
하는 명순의 말에,
 
28
"나는 아니 갈 테야! 이제 내가 시집을 가나 보구려."
 
29
하고 명운은 결심이 굳음을 보인다.
 
30
"무어 다 그렇지, 다 그래."
 
31
하고 명운이가.
 
32
"경운이가 왜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는지 알기나 하우? 한 번은 동대문 밖에서 ○○학교 학생한테 하마터면 큰 욕을 볼 뻔했지. 또 한번은 어떤 녀석이 학교엘 왔다지?"
 
33
하고 순명이가 명운의 공격을 예방하느라고 한 판을 내어 명운을 버티면서 말한다.
 
34
"글쎄, 어떤 남자한테 그렇게 곯았는지, 편지마다 남자 원망이지...... 남자란 모두 악마다, 야수다, 어두기 여지에 대하여는 조금도 믿을 수 없는 사기자다. 나는 일생에 결코 남자란 것을 믿지 아니한다. 명운이 너도 결코 남자를 믿지 말아라. 남자는 우리 여자의 원수요, 대적이요, 악마다......"
 
35
명운은 순명이가 자기의 사랑하는 경운의 진정으로 나오는 말을 조롱거리로 여기는 껏이 불쾌하여 낯빛을 붉히면서,
 
36
"에그, 그럼 남자가 안 그건가? 남자야 다 악마지. 그래, 순명은 남자를 천사같이 믿으오?"
 
37
지금토록 방긋방긋 웃으면서 가만히 듣고만 앉았던 얼굴 동그스름하고 극히 침착하여 보이는 선경이가,
 
38
"참, 그렇기는 그래. 남학생들은 길게 나서 다니면 여학생만 보는 게야. 왜 우리도 그런 일이 아니 있소?...... 저 성순씨하고 나하고 박물관에 갈 적에 ○○학교 학생 둘이 뒤로 따라오면서 '여보시오, 날이 춥습니다. 저희들도 그 부드러운 비단 목도리로 좀 싸 주십시오.' 그러지 않습디까. 그리고는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꼭 뒤로 줄줄 따라다니지 않아요?...... 에그, 그 때에 어떻게 무서웠는지. 어떻게도 집에 투서를 하여서 큰 책망을 받았는지. 또 한번은 철석같이 혼인을 하자고 약속한 녀석이 후에 알아보니까 아내가 시퍼렇게 살아 있더라는구려. 그리고(소리를 낮추며) ○선생 말이요, 그것이 경운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아우?그것 만인가, 왜 남자를 아니 미워하겠어요, 글쎄."
 
39
"참 여보, 성순! 저어, 김 영인(金永仁)씨 말이요, 영인이가 왜 홍(洪) 무엇인가 한 유학생과 혼인하지 않았소?"
 
40
"그랬나요?"
 
41
"그런데, 집에 가 보니까 본처가 있더라는구려. 그래, 밤낮 운대...... 글쎄, 저것을 어찌해!"
 
 
 

17.2

 
43
성순은 자기가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을 생각하매 그러한 말을 듣기가 고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모르는 그의 친구들은 여러 가지로 아내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부도덕됨을 공격하고, 또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이 여자의 큰 수치인 것과, 이혼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도 교육받은 여자의 하지 못할 일이라 함을 역설하였다.
 
44
성순도 재학 당시에는 그네에게 지지 않게 자유 연애와 이혼을 공격하던 것을 생각하매 자기의 변천을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45
단순한 그들의 담화는 기실 무슨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다만 세상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동으로 서로 쏠리는 어린 처녀들의 말이언마는, 그것이 확실히 이 사회의 대표적 비판이다.
 
46
수 없는 여자들이 이러한 신념 아닌 신념하에서 나고 자라고 죽고 한다. 그것이 도리어 행복일 것이다. 인습이라는 닳아진 궤도 위로 드르르 굴러가는 것이 무엇이 곤란하랴. 설혹 그 궤도의 끝은 지옥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옥으로 빠지는 순간까지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성순은 자기 혼자 그 궤도 밖에 나서서 궤도 위로 맹목적으로 실려가는 무수한 동성의 동포를 볼 때에, 그네들이 자기가 굴러가는 궤도가 어떤 종류의 것이며, 과거에 그 궤도로 굴러간 여자들의 결과가 어떠하였으며, 지금 굴러가는 자기네의 운명이 어떠한지 반성도 아니 하고 다만 그네의 조모와 모와 자(姉)와 붕우가 하던, 또는 하는 모양으로 울고 웃고 함을 볼 때 에 자기 혼자 그 궤도에서 뛰어나온 것이 이상하였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47
명운이나, 선경이나, 경운이나 순명이나 다 아무 생각도 없이 여러 백년 묵은 닳아진 궤도로 달아나는 사람이다. 지금 비록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밀감을 먹어가며 이야기를 하지마는, 그네와 자기와는 확실히 만 세계 사람이다. 성순 자기는 그네의 세계의 말을 알되, 그네는 성순의 말을 모른다.
 
48
이에 성순은 분기점에 선다. 자기도 그네의 세계를 돌아가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네를 자기의 세계에 불러 들이든지,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취하여야 한다. 성순은 이것이 자기 일 개인의 문제가 아니요, 조선 여자 전체를 포괄하는 사회 문제인 줄 안다. 성순은 지금 조선이 큰 기로에선 줄을 안다. 조선이 과거 한 생활 방식의 취하여야 할 줄은 안다. 성순은 이러할 말을 성재에게도 늘 듣고 민에게도 늘 들었다. 들을 때마다 과연 옳은 말이다 하고 속으로 감복하여 오다가 근래에 와서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49
가정에 있어서 자매는 형제보다 지위가 낮은 것,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글자나 보게 됨에 말할 것, 부모의 명령대로 가정의 사정과 자기네 체면과를 주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명령대로 시집 갈 것, 시집 가서는 부(夫)의 소유물이 될 것, 부가 죽거든 수절할 것...... 이것이 과거한 사회의 여자의 취할 유일한 생활 방식이었다. 그리곤 근래에 양제집에서 물리 화학과 행물학과 수학을 배우고 양제 머리를 쪽찌고 신문과 잡지와 신사상을 전하는 서적을 읽던 여자들도 일단 교문을 나서면 그렇지 아니한 다른 여자들과 같이 재래의 생활 방식이라는 규구(規矩)에 아니 들어가면 아니 된다. 성순은 도저히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50
우선 딸이란 무엇인지, 아내란 무엇이요, 지아비란 무엇인지, 시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아야 한다고 부모가 가르쳐 주었고, 도 지금토록 그대로 실행하여 왔으나 어찌해서 숟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아야 할 것인지 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51
어찌해서 부모의 명령을 순종해야 옳고, 아내는 지아비의 소유물, 완롱물(玩弄物)이 되어야 옳고, 어찌해서 이혼이 그르고,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그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내 두뇌로, 내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장차 오는 조선은 어떠한 조선을 만들어야 하고, 장차 오는 자녀들에게는 어떠한 생활을 주어야 할는지도 내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52
경운이나, 명운이나, 순명이나, 선경이나 다 길을 몰라한다.
 
53
말 없이 그 궤도 위로 굴러가기는 하면서도 그것에 다소의 불만을 가진다. 더욱이 경운의 고민과, 성훈의 부인의 가련함이 다 그 표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일동을 볼 때에 일동은 말없이 몇 개 아니 남은 밀감 껍데기를 벗긴다. 성순은 '너희들은 장차 어찌 될는고......' 하는 눈으로 일동을 보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17.3

 
55
동무들에게 들은 말을 종합하건대, 성순의 동창의 근황은 대개 이러하다.
 
56
몇 사람은 보통 학교의 훈도가 되어 시골에 내려가고, 그네들은 대개 서울 있는 친구들에게 '슬프다. 괴롭다. 세상이 재미 없다. 죽고 싶다. 밤마다 울기만 한다. 나는 너밖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믿는 사람이 없다. 너도 변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여 다오. 우리 둘이서 손을 마주 잡고 세상을 살아가자.....' 이러한 감상적, 염세적 편지를 자주하고, 몇 사람은 졸업 후 집에 돌아가 있는데 부모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슬프다. 자꾸 시집을 가라고 조르시는데 시집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슬프다. 세상이 재미가 없다. 그러니까 죽고만 싶다. 다만 너만 사랑한다...... 이러한 편지.
 
57
또 몇 사람은 어떤 남자와 철석같이 맹세를 하였더니 마침내 다른 데로 장가를 들었거나, 혹은 처가 살아있거나, 혹은 뜻대로 가정을 이루었지마는 며칠이 못 되어 염증이 났거나, 혹은 시집은 갔더니 시부모와 마음이 맞지 아니하여 쫓겨 왔거나, 혹은 동경으로 유학하러 갔거나, 혹은 사진 결혼을 하여 가지고 호놀룰루로 갔거나......, 대개 이러한 소식이요, 그 중의 하나는 지난 여름부터 기생이 된 자도 있다.
 
58
이러한 말들을 그네는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말같이 조롱하여 가며 웃어 가며 말한다. 그 중에 아내 있는 민(閔)을 사랑하여 가정과 사회에 모반을 일으키려 하는 성순을 집어 넣으면 성순의 동차의 근황 보고를 완성할 것이다.
 
59
일동은 한참이나 열심히 자기네가 아는 동창의 근황을 말하다가 모두 침묵하였다. 그리고는 각각 자기네의 전도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네의 생각에 자기네는 결코 그러한 불행한, 또는 부도덕한 길을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60
그네도 시집갈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아니다. 그네는 정신으로 보면 아직 극히 유치하지마는 (그네뿐이 아니라 전 사회가 다 그러하지마는) 생리적으로는 성숙할 수 있는 대로 다 성숙하였다. 그네는 지아비 그리운 줄을 알 만하고 또 혼인하는 날이면 곧 자녀를 생산할 만하다.
 
61
그네는 밤에 자리를 들어갈 때에 길에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나고 행복스러운 젊은 부부가 가지런히 있는 것을 볼 때에 부러워할 줄 안다. 그네가 무수한 남자 중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지아비가 있음을 믿고 눈을 들어 어느 것이 그 사람인가 찾는다. 사람도 잘나고 돈도 있고 재주도 있고 학문도 있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여 줄지 아비를 찾는다. 겉으로는 그러한 생각이 없는 체하지마는 마음 속이는 잠시도 그를 찾기를 쉬지 아니한다.
 
62
그네는 아무쪼록 시집이라는 말을 아니하려 하고, 만일 이따금 한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인 듯이, 자기는 조금도 거기에 흥미를 가지지 아니하는 듯이 말한다. 이것이 그네의 행세다. 가장 잘 행세를 하려면 시집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아니하고 남이 그러한 말을 할 때에는 귀를 기울이어 듣지도 아니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네는 특별히 행세를 잘하려 하는 여자는 그러한 말이 들릴 때에는 얼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려 염오의 정을 표하려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나는 그러한 것을 당초에 염두에 두지도 아니 하오, 하는 뜻으로 남에게 보이려 한다. 명운이나 순명은 시집이라는 말을 하되 남의 일같이 하는 사람이요, 선경은 당초에 하지도 아니하려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네는 우(愚)한 자이다. 여자의 일생이 혼인같이 중대한 사건이 없다 할진대(남자도 그렇지마는, 남자에게도 국사 이외에는 혼인이 가장 둥한 일이지만 여자에게는 그보다 더하니까) 여자는 항상 혼인을 생각하여야 하고 기회 있는 대로 그것에 관한 지식을 얻으며 토론을 하여야 하겠거늘, 그네는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배우지 못하면서, 혼자 생각해 보려고도 아니하고 친구나 선배에게 문의하여 보려고도 아니한다. 그러하다가 그네는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정하에,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는 남자에게 어떠한 장래일는지도 고려함이 없이 시집을 가서, 아내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아내가 되고, 어미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어미가 되어 자기네의 선조의 실패한 생활을 꼭 그대로 되풀이한 뒤에, 마침내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람의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성순은 일동을 향해,
 
63
"그래 다들 시집을 안 가고 혼자 늙으실라우?"
 
64
하며 차례로 일동의 안색을 보았다. 이때에는 명운도 '그럼!' 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한다. 성순은 말을 이어,
 
65
"시집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아내란 대체 무엇일까요? 여자란 대체 무엇일까요?"
 
66
하였다.
 
67
일동은 말없이 무슨 생각을 하였다.
 
 
 

17.4

 
69
이것은 그네에게는 실로 처음 듣는 말이다. 비록 지금까지 시집이라든지, 아내라든지, 여자라든지 하는 제목으로 남의 말을 듣기도 하였고, 자기네의 입으로 말을 하기도 하였다 하더라도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여자란 무엇이뇨'이렇게 완전한 명제로 된 문제를 생각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네의 모친이나, 조모나, 자매나, 아마 그네의 부친이나, 조부나, 형제까지도, 또 아마 그네들 교육하는 남녀 선생까지요.
 
70
그네는 성순(性淳)의 간단한 이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네는 지금까지 각각 스스로 생각하기를 보통 학교를 졸업하였고,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여 산술도 할 줄 알고 대수도 일차 일원 방정식까지는 아직 잊어버리지 아니하였고, 일본말도 회화를 넉넉히 하고, 담은의 쉬운 곡조나마 학교에 비치한 풍금도 울릴 줄 알고, 그네는 서서제(瑞西製) 시계를 차서 오전 오후 몇 시 몇 분(초는 아직 사용하여 본 적이 없지마는) 이라고 불러도 보았고, 그 중에도 어떤 이는 ABCD까지도 알아서 자기네는 조모보다, 모친보다는 물론이 어니와, 같은 시대의 모든 여성 동포보다 훨씬 뛰어난 자로 자임하였다. 유식한 자로 자임하였다. 시집을 가려고 자기의 지아비될 만한 자격을 가진 남자가 없음을 한탄 할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빼어나게 교육을 받고 수양이 있는 이로 자임하였으며, 남자측에게서도 그네아 같은 여자를 아내로 삼음을 이상으로 알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교양 있는 자로 인정함을 받았다. (남자 자신이 그 보다 높은 교양이 없으니까, 고등 여학교를 졸업한 여자만 하여도 너무 교육이 높은 것을 한할이만큼 그렇게 남자 교육이 낮으니까, 실로 금일의 조선은 고등 보통 학교를 최고의 학교로 알아서, 남겨간 차교(此校)를 졸업하면 이미 사회의 지식 계급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사회니까.) 그렇게 높게 자임하였던 것이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어미란 무엇이뇨', '대체 여자란 무엇이뇨' 하는 자기네에게 가장 가깝고 긴절한 문제의 제출을 당할 때에 일언 일구가 대답도 발할 수 없는 자기네인 것을 생각할 때에, 그네가 만을 조금이라도 총명이 있는 여자일진대 반드시 더할 수 없는 수치와 경악을 느꼈어야 할 것이다.
 
71
명운이나, 선경이나, 그네는 자기네의 무식함을 깨달았다.
 
72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옳은 것인가, 모로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를 의심한다. 그리고 이제의 성순을 쳐다본다.
 
73
성순이가 어찌해서 그리한 생각을 하였을까 하고 이상히도 여겨 본다.
 
74
무론 그네는 자기네가 그 빈약한 두뇌 속에 저장하였던 것을 온통 떨어 놓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네의 두뇌는 마치 그네의 조그마한 보퉁이와 같다. 그네는 알록알룩한 골무며, 귀떨어진 바늘이며, 얼쑹덜쑹한 비단 헝겊 조각이며, 학교에서 선생이 주필로, 구십이라든지 팔십이라든지 매겨 준 습자 종이며, 사진 조각이며, '오늘은 비가 왔다. 낮잠을 자다가 꾸중을 들었다' 하는 일기책, 사랑하는 동창에게서 받은 편지장.......
 
75
이러한 것을 귀하게 귀하게 사 둔다. 이것이 그네의 세간이다.
 
76
그러나, 이러한 것을 온통 떨어 놓는 다 하면 그것이 무엇이랴. 그네는 이 보퉁이를 아침마다 저녁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 보고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걱정도 한다.
 
77
그가 슬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보퉁 이 속에 있는 비단 헝겊과 같은 슬픔이요, 기뻐한다 하더라도 잃어 버렸던 골무를 얻은 기쁨이거나, 쓸데 없는 수다를 늘어놓은 친구의 편지를 받는 기쁨에 불과한 것이다.
 
78
경운의 슬픔은 아마 이것보다는 근저가 깊을 것이다. 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사실에 직접으로 다닥뜨려서 그 의외임에 놀랄 뿐이요, 공부할 뿐이요, 증오할 뿐이요, 즉 감정으로 숭응할 뿐이요, 이상으로 그것을 해석할 줄을 모른다. 그의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79
여러 문답이 있는 끝에 선경은,
 
80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어요. 또 알아 보려고도 아니하였어요. 또 누가 우리더러 알아보라고 한 일도 없었어요."
 
81
"우리가 알아야지. 누가 우리를 위해서 알아 주겠어요. 우리의 일을 우리가 해야지요."
 
82
하고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좌중의 선각자임을 깨달았다.
 
83
그리고 일종 자부심의 쾌미를 얻었다.
 
84
순명은 가만히 생각만 하고, 명운은 금야에 얻은 지식을 곧 강원도 있는 경운에게 편지하기로 작정하고 경운이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였다. 일동은 성순이가 자기네보다 얼마큼 우월한 점이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돌아갈 때에는 각각 전에 없던 무슨 생각을 가지고 가게 되었다.
【원문】1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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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李光洙) [저자]
 
  매일 신보(每日申報) [출처]
 
  1917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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