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개척자(開拓者) ◈
◇ 21 장 ◇
카탈로그   목차 (총 : 21권)     이전 21권 ▶마지막
1917년
이광수
목   차
[숨기기]
 

21장

 

21.1

 
3
성순은 그 길로 사랑에 들어갔다가 탁자 위에 놓인 유산병을 들고 뛰어나왔다. 성순은 아무 정신이 없고 유산을 마시고 죽어 버리는 것이 가장 편한 해결 방법인 것 같이 생각하였다. 이 몸 하나이 있게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니, 이 몸만 소멸하여 버리면 모든 문제도 따라서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장래의 모든 희망과 인생에 대한 모든 의무를 관념도 이 큰 결심 앞에는 아무 권위도 없었다. 성순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는 중앙 학교 문을 들어서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운동장을 지나, 신축된 교사 모퉁이를 돌아 성문과 같이 된 돌문을 나섰다. 거기를 나서면 우울한 송림,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눈뭉텅이도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놀라서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 내려갔다.
 
4
얼마를 가다가 성순은 늙은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우뚝 섰다. 성순의 가슴은 마치 참새의 가슴 모양으로 자주 들먹거렸다.
 
5
송림은 암흑 속에 잠겼다. 나무 끝이 바람을 맞아 우수수 우는 소리는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고, 송지 냄새가 황토 냄새를 합하여 성순의 코를 찔렀다. 이 속에 오기만 하여도 벌써 죽음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았다.
 
6
여기는 이미 성순을 책망하는 자도 없고 조롱하는 자도 없고, 죽는다고 하여도 붙드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었다고 슬퍼할 자도 없을 것이다. 자연은 사람인 성순이라고 더 사랑할 리 없다. 저 소나무들이나, 바위나, 풀이나 다름없이, 성순도 자연의 가슴에 난 털 한 개에 불과하다. 성순의 목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자연에게는 저 소나무의 가지 하나가 꺽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7
성순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이 약병을 들어서 눈 앞에 대었다. 그것은 성재가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서는 시험관에 쏟던 약병이다. 성순은 이윽히 그것을 보다가 절레절레 흔들어 보았다. 그 속에서는 확실히 액체의 유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순은 그 소리를 들을 때에 무의식적으로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나는 약체가 한번 목으로 넘어가면, 아니 입어서부터 성순의 살을 태우기 시작하여 몇 십 분 내에 성순의 생명의 뿌리까지 태워 버리고 말 것이다.
 
8
(내 몸이 다 타서 없어져-) 하고 성순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공육이 온통 다 타 버리고 만다 하여라도 무엇이나 타지지 않고 남을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성순의 생각에는 자기의 사랑이었다. 그렇게 미묘한 것이, 그렇게 신가한 것이 타 버리고 말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육체가 소멸되고 만 뒤에, 그 사랑만이 뛰어나서 영원히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성순은 한번 더 약병을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액체의 동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번 좌우를 둘러보았다. 모두 침묵하고 냉랭한 속에 자기의 조그마한 생명이 홀로 미미한 소리를 내어 따뜻한 기운을 띠었으며, 만물이 자기를 협박하며 자기네와 같이 침묵하게 냉랭하게 되기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큰 바람이 지나가는지, 마른 송엽 떨어지는 소리가 큰 배 모양으로 흔들혼들 움직인다. 성순도 그 소나무를 따라 움직인다.
 
9
성순의 눈에서는 부지불각에 눈물이 흐른다. 아주 방해도 아니 받는 눈물은 제 마음대로, 혹은 저고리 자락에 혹은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10
성순의 눈앞에는 모친과 성재와 민과 변과 불쌍한 성훈 부인과 어멈의 얼굴이 환등에 비추인 모양으로 쑥 떠오른다.
 
11
그네의 얼굴은 모두 다 피곤한 듯하다. 실망한 듯하다. 웃지도 아니하거니와 울지도 아니하고, 마치 정신없는 사람들과 같이, 졸리는 사람들과 같이 멍멍하다. 그들은 자기에게 대하여 특별한 주의도 아니 하는 모양으로 무심히 스르르 지나가고 만다.
 
12
그 뒤에는 돌아간 부친의 얼굴이 쑥 떠오른다. 그 얼굴은 다른 모든 얼굴보다 더욱 분명하게, 비참하게 보인다. 마치 비운을 못 이기어서 피선 눈을 부릅뜬 것 같다. 그 얼굴이 성순의 면전에 왔다갔다할 때에 성순은 한번 몸을 떨었다.
 
13
그리고.
 
14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따라가요.' 할 때에는 벌써 그 얼굴은 없어졌다.
 
15
다음의 민의 얼굴이 한번 다시 떠오른다. 슬픈 듯한 얼굴이다. 멀었나 가까웠다. 적었다 컸다 한다. 그러나 말도 없고 웃지도 아니하고 졸리는 듯이, 모든 것에 다 염증이 나는 듯이 눈을 반쯤 감았다. 성순은 허공에 팔을 내밀어 안으려 하였다.
 
 
 

21.2

 
17
성순에게는 이제 모친보다도 성재보다도 민이 가장 가깝다. 자기가 죽더라도 모친은 슬퍼할 뿐이요 성재는 세상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뿐이지마는, 불쌍한 생각과 아까운 생각도 있겠지마는, 자기의 반신이 죽은 듯이 슬퍼하고 낙망할 자는 민이다. 진실로 성순은 이미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떠나서 오직 민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인류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우주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사생을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본다. '웬 셈인지 이제는 당신과 저와의 분간할 수가 없어요' 한 성순의 서한 중 일절은 그의 진정을 토로한 것이다. 그러면 성순은 자기를 죽임은 믿을, 죽더라도 민의 일부분을 죽임인 줄을 알 것이다. 자기가 죽은 뒤에 민이 얼마나 슬퍼하고 낙담할 것을 알 것이다.
 
18
성순의 눈 앞에 근심하는 듯한 민의 얼굴이 떠오를 때에 성순은 손에 약병을 감추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리고 혼잣말로,
 
 
19
(용서하십시오. 당신을 의롭게 찬 세상에 두고 나만 편안한 나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죄인 줄 아옵니다. 그러나 모친의 슬퍼하심과 오빠의 책망하심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거웁니다. 앞날에 우리의 전도에 마닥뜨릴 비난과 공격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십시오.
20
저는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먼저 달아납니다.
21
이것이 물론 슬픈 일이올시다.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나라와 꽃같은 청춘을 버리고, 다른 모든 것 보다는 사랑을 버리고 가는 것이.
22
아아 사랑! 그 사랑을 어떻게 버리고 가리까. 사랑이란 그렇게 버려지기 쉬운 것이오리까? 내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면 곧 내 가슴에 불길이 타던 사랑도 식어 가는 육체와 같이 식어 버리고 쓰러지는 조직과 같이 쓰러질 것이오니까. 그럴 수가 있겠읍니까.
23
만일 그렇다 하면 이 생명이 스러지는 것보다 이 사랑이 스러짐이 아픕니다.
24
내 육체가 죽으면 온전한 사랑만이 뛰어나서 당신의 품속에 들어갈 것이 아니겠읍니까. 아무 저항도 아무 방해도 받지 아니하고. 만일 그렇게 된다 하면 차라리 이 육체를 죽이는 것이 기쁜 일이 아니겠읍니까.
25
...... 아아! 그러나 사후의 일을 누가 아나, 누가 아나. 만일 이 몸과 같이 사랑도 스러진다면 그것이 무서운 사실이 아닙니까...... 하느님! 어떤 것이 참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26
왜 그렇게 말씀도 아니하시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십니까?
27
왜 나를 안아 주시도 아니 하시고 키스도 아니하십니까. 왜 그렇게 수십 보의 거리를 두고 나를 싸고 빙빙 돌기만 하십니까?
28
그저 죽어라! 하십시오. 제가 이 약을 먹는 것을 무서워함은 아니올시다마는, 이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어떻게 가겠읍니까.
29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쁘겠읍니까. 저는 제 슬픔이 무서워서 죽으려 함을 당신께 대하여 미안해 하옵니다.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면, 가령, 당신이 병이 중활때에 내 생명을 드려서 당신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쁘겠읍니까.
30
그러나, 제가 산다고 해도 당신께 비방과 고통을 드릴 뿐이겠지요. 세상은 당신을 핍박할 수 있는 대로 핍박하겠지요? 당신이 평온할 수 있는 인생을 도리어 저를 위하여 불행한 일생이 되겠지요. 제가 사랑하여 드리는 데서 받으시는 기쁨이 족히 그 불행과 상쇄하고 남음이 있겠읍니까. 어떻게 어떻게. 제 사랑이 무엇이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아아, 위대한 당신에게 조그마한 제 사랑이 무엇이겠읍니까. 제가 제 몸과 마음을 다 마친들 그것이 무엇이겠읍니까.
31
그래요. 그래요! 제가 살아 있음이 제게도 불행이요, 당신께도 불행이외다.
32
아아, 당신은 왜 저를 물끄러미 보시기만 하십니까. 죽어라! 해 주십시오. 죽어라! 해 주십시오.
33
저는 지금 죽어도 불행은 아니지요. 저는 행복하지요. 저는 살아 보았고 사랑해 보았읍니다. 이제 더 산다 하더라도 다만 그것을 연장해 갈 뿐이겠지요. 네, 저는 사회에 대하여 다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직책이 있읍니다. 그것을 피하는 것은 죄겠지요. 그나, 어찌합니까.
34
아아, 여러분! 저라는 생명이 이 세상에 아니 왔던 줄로 단념해 주십시오! 그리고 죄가 있거든 책망해 주시되 불쌍하거든 동정해 주십시오.)
 
 
 

21.3

 
36
(저는 갑니다. 제가 간 뒤에도 어머님께서는 내내 하고 빙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을 벌릴 수가 없고, 가슴 속과 뼛속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정한 자무양하시고 오빠께서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실험에 성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집안이 속히 제가 죽은 슬픔을 입고 행복되게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나라가 문명하고 번창하여 주십시오. 정의와, 자유와, 행복과, 사랑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37
오오! 당신께서는 아직도 거기 계십니까. 부디 행복되게 건강하게 오래 사시며 일 많이 하여 주십시오. 가슴에 품은 이상을 달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 아,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38
성순은 눈을 떠서 암흑의 사방을 둘러보다가 몸을 푸드덕 떨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하고 확실히 결심한 듯이 유산병을 들어서 한번 다시 흔들고 보고 코르크 병 마개를 뽑자마자 입에다 대고 서너 모금 들이마셨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약병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입 안과 목에 격력한 아픔을 깨닫고 가슴 속과 뱃 속도 차차 찢어지는 듯이 아픔을 깨달았다. 성순은 누울 자리를 찾을 양으로 다리를 옮겨 놓으려 하였으나 그만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성순은 겨우 몸을 돌려 나무 뿌리를 베개로 삼고 치마로 몸을 잘 가리우고 반듯이 하늘을 향하여 누웠다.
 
39
늙은 소나무 사이로 심청한 밤 하늘이 보이고 거기는 반짝하는 별이 말없이 자기를 내려다본다.
 
40
(내가 지금 저 별 있는 데로 가나?) 하고 빙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별이 안 보이게 된다.
 
41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은 벌릴 수가 없고, 가슴 속과 뼛속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가슴을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정한 자세를 변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불쌍한 최후의 노력!
 
42
성순의 눈에는 또 민이 떠오른다. 성순은 두 팔을 벌려서 안는 모양을 하였다. 그러나, 안기는 것을 자기의 가슴뿐이었다.
 
 
43
(저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따뜻한 가슴 속에 제가 영원히 살에 하여 주십시오. 제 몸을 당신의 품에 들기를 방해하거니와, 제 영이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니오니까. 가끔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니오니까. 가끔 당신을 일하시던 손을 쉬고 마음으로 '성순아!' 하고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눈앞에 제 모양을 한번 그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산보삼아 제 무덤을 돌아보아 주십시오. 세상에는 죄인의 무덤이나 당신께는 불쌍한 - 불쌍한 아내의 무덤이 아닙니까.
44
아니야요. 제 무덤은 당신의 가슴 속이야요. 이 뜨거운 사랑을 품고 차디찬 땅의 가슴에 어떻게 들어가 있읍니까. 네, 당신의 가슴이 제 무덤이야요, 무덤이 아니라 제 집이야요.
45
차차 고통이 더하여 갑니다. 아아 제 위와 식도는 이미 재가 되었겠지요. 제 피는 지금 비등합니다. 제 전신이 바늘로 쑤시는 듯이 아픕니다. 이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사랑으로 타서 죽습니다. 저는 제 몸이 불길이 되어 올라가기를 바랍니다.)
 
 
46
성재는 열 한 시가 지나서 실망하고 집에 돌아와 모친의 머리맡에 말없이 앉았다가 문득 대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러 나갔던 어멈은 어떤 소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성내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소년을 향하여,
 
47
"왜 왔니?"
 
48
하였다.
 
49
소년은 숨이 차서,
 
50
"속히 좀 나오세요."
 
51
하는 말에 성재는 다 알아차린 듯이 따라나왔다. 모친도 고개를 들며,
 
52
"무신 일이냐?"
 
53
하고 놀랐으나, 소년은 아무 대답도 없이 성재의 뒤를 따라서 뛰어나갔다.
 
54
성재는 소년이 인도하는 대로 송림을 향하여 간다.
 
55
성재가 송림 속에 등불이 있음을 볼 때에는 만사를 다 깨 달았다.
 
56
성재는 성순을 안아 일어키며 눈물을 섞어,
 
57
"성순아, 성순아!"
 
58
하고 불렀다.
 
59
성순은 가만히 눈을 떠서 성재를 보고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혀와 구개(口蓋)가 부란(腐爛)하여 발음이 분명치 못함을 자각하고 잠잠하였다.
 
60
성재는 성순을 안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집으로 내려왔다.
 
61
성순이가 안방 아랫목에 누울 때에는 모친을 위시하여 일동이 일제히 통곡하였다.
 
62
성순은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해 하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63
성재는 소년이 들어다가 놓고 간 유산병을 보이면서,
 
64
"이것을 마셨어요. 한 보시기나 마셨어요. 이젠 한 시간도 못 지낼 것이외다."
 
65
하고 호흡이 곤란하여 자주 들먹거리는 성순의 가슴을 내려 쓸면서 운다. 모친은 성순의 허리에 낯을 비비며 흑흑 느낄 뿐이요, 아무 말도 없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66
"얘, 성순아!"
 
67
하고 길게 부른다.
 
 
 

21.4

 
69
"얘, 성순아! 이게 웬 일이냐?"
 
70
할 때에 성순은 눈물 흐르는 눈을 떠서 모친을 보며 분명치 아니한 어조로,
 
71
"어머니, 불효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72
하고는 더 말을 못한다.
 
73
"글쎄, 약을 왜 먹었단 말이냐.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구나...... 얘 성재야, 무슨 약 없겠니? 얼른 먹이려므나."
 
74
"쓸데 없어요. 벌써 늦었어요."
 
75
"성순아! 정신을 차려라."
 
76
"오빠, 용서하셔요!"
 
77
"오냐.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 다오. 네 속을 모르는 것도 아니련마는 그랬고나."
 
78
성순은 성재를 보던 눈으로 모친을 보며,
 
79
"어머니 용서해 주셔요!"
 
80
하고 절을 하는 듯 약간 고개를 숙인다.
 
81
"오냐, 어서 나아서 일어나기만 해 다오. 다 네 마음대로 하여 줄 것이다."
 
82
성순은 손을 들어서 모친께 드리면서,
 
83
"어머니!"
 
84
"무슨 말이나 해라!"
 
85
"어머니 저는 아직 어머님 딸입지요?"
 
86
"그렇지 내 딸이지."
 
87
"저는 아직 처녀야요. 마음은 허하였지마는 몸은 허하지 아니하였어요. 저는 아직......"
 
88
모친과 성재는 놀랐다. 꼭 민과 관계 있는 줄만 알았었다.
 
89
성순은 고민을 못 참는 듯이 이를 두어 번 갈더니 붉게 상기한 눈을 반쯤 뜨면서,
 
90
"어머니, 오빠!"
 
91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운다.
 
92
성재는 손수 성순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93
"무슨 말이나 해라, 네 원대로 해 주마."
 
94
"어머니! 오빠-"
 
95
"오냐, 말을 해라, 아이구, 이를 어쩐단 말이냐."
 
96
하고 모친은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97
"어머니! 울지 말으셔요!"
 
98
"하느님! 내 목숨을 대신 가져가시고 내 딸을 살려줍소서...... 아이구, 이게 웬 일이냐."
 
99
성재가 모친의 무릎을 흔들면서,
 
100
"어머니! 잠간 참읍시오! 이 애 목숨이 이제 한 시간이 못 남았으니 제 원을 들읍시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 줍시다."
 
101
하고 성순을 향하여,
 
102
"자, 말을 해라."
 
103
할 때에 성순은 입에서 걸쭉한 핏덩이를 두어 번 토한다.
 
104
성재는 얼른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모친과 어멈은 그것을 보고 소리를 내어 울고, 성훈 부인도 치맛자락으로 낯을 가리고 운다. 얼마 동안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가 성순이가 다시,
 
105
"어머니! 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106
하고 언어와 호흡이 차차 곤란해 가면서,
 
107
"저 사람에게는 아무 허물이 없어요. 죄가 있으면 제 죄야요. 부디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108
하고 말끝이 눈물에 스러진다.
 
109
"원망 아니한다."
 
110
하고 모친과 성재가 일제히 말하였다.
 
111
"원망 아니 하셔요?"
 
112
하고 눈물이 흐르는 성순의 얼굴에는 만족과 감사의 웃음이 뜬다. 그것을 볼 때에 보는 자는 더욱 슬펐다.
 
113
"무엇이나 네 말대로 하마."
 
114
하고 성재는 말없이 문을 차고 뛰어 나간다. 모친은,
 
115
"그 밖에 무엇이나 할 말이 없느냐...... 아이구 내 딸아, 왜 약을 먹었단 말이냐!"
 
116
"어머니!"
 
117
"무슨 말이나 해라!"
 
118
"제가 죽기에 어머니 사랑을 또 받게 되었지요. 제가 살아 있으면 어머니께서는 죽일 년이라고 미워하셨겠지요. 이렇게 어머니 사랑 속에서 죽는 것이 오래 살아 있는 것 보다 늦지 아니합니까."
 
119
"성순아,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느님 맙시사. 저를 대신 죽이시고 내 딸을 살려 줍소사."
 
120
하면서 손가락으로 냉수를 떠서 성순의 입에다 흘려 넣는다.
 
121
"어머니!"
 
122
하고 성순은,
 
123
"어머니!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으셔요? 네? 미워하지 말으셔요!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와 같이 용서해 주셔요!"
 
124
"오냐, 알아들었다. 그렇게 해주지. 어서 나아서 일어나거라. 설마 죽으랴."
 
125
"어머니, 제 목숨은 이제 몇 십분 안 남았어요! 그러나, 한가지......"
 
126
하고 흑갈색 핏덩어리를 토한다. 이번에는 성훈 부인이 성순을 안고 어멈이 손으로 피를 받았다. 어멈은
 
127
"아씨, 이게 웬 일이셔요. 자, 물, 물 잡수시오."
 
128
"물 먹으면 더 괴로워......"
 
129
하고 성순은 눈을 감고 숨이 막힌다.
 
130
삼인(三人)은 가슴을 쓸고 인중(人中)을 쓸고 몸을 흔들어 겨우 다시 숨결을 들렸다.
 
 
 

21.5

 
132
성재가 들어온다. 그 뒤에 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민이다. 민의 얼굴은 푸르게 되었다. 민은 아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성순이가 아니 왔더라는 말을 듣고 도로 성재의 집을 향하여 오다가 중간에서 성재를 만나서,
 
133
"마침 잘 만났소. 급한 일이 있으니 속히 내 집으로 갑시다."
 
134
하는 성재의 말에 깜짝 놀라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줄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이불을 가슴까지나 덮고 정신없이 누운 것과 모친이 성순의 곁에 울며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에 붉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이 붉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전신의 피가 일시에 동결함을 깨달았다.
 
135
실내의 공기는 연(鉛)과 같이 무거워서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가슴으로 천근의 무게로 내려 누르는 듯하고 천정에는 벌써 죽음의 그늘이 서리어 있는 듯하였다. 방 한복판에 달린 양등(洋燈) 불의 춤을 추는 불길도 무서운 조짐으로 사람을 협박하는 것 같아서 민은 소름이 쭉 끼침을 깨달았다.
 
136
성재는 성순의 곁에 구부리고 앉아서 손으로 성순의 턱을 흔들면서,
 
137
"성순아, 민군이 오셨다."
 
138
하는 그 소리를 떨렸다.
 
139
성순은 전기를 맞은 듯이 몸을 떨며 눈을 방싯 뜬다. 그리고 그 기운 없는 눈으로 민을 찾는다. 민은 곧 뛰어 들어가 성순을 껴안고 싶었으나 성재의 말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섰다. 성재는 성순에게 아직도 정신이 있는 것을 다행히 여기면서 일어나 민에게 자기의 앉았던 자리를 사양하고 자기는 민의 등 뒤에 선다. 민의 앉으며 성순의 눈을 보았다. 말없이 이윽히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일시에 눈물이 솟아올랐다.
 
140
민은 성재를 돌아보면서 그제야,
 
141
"무슨 약을 먹었어요?"
 
142
하고 물었다.
 
143
아까 길에서는 아무 말도 물어보지 못하였고, 하고 성재도 성순의 눈을 보고 운다.
 
144
"유산!"
 
145
하고 민이 다시 성순의 얼굴을 보며,
 
146
"왜 유산을 잡수셨읍니까, 왜 그런 생각을 내셨읍니까?"
 
147
그러나, 성순은 말이 없고 전신에 한번 경련이 일어나며 눈을 감는다. 성재는 그것을 보고 민의 앞으로 뛰어나오면서,
 
148
"민군! 성순을 안아 줍시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얼마가 안 남았어요!"
 
149
하고 '성순아'를 연호(連呼)한다.
 
150
모친도 새로 울기를 시작하고는 성순의 가슴에 매어 달린다.
 
151
민은 팔을 성순의 목으로 돌려 가만히 그를 일으켜 자기의 가슴에 안았다. 성재는 성순의 수족을 만져 보고 이미 거기는 맥이 끊어졌음을 고하였다.
 
152
웃방에서 혼자 울던 성훈의 부인도 뛰어 내려와 성순의 다리를 만진다. 각 사람은 구태어 가려는 성순의 영혼을 잠시라도 오래 머물게 할 양으로 울음 소리로 외쳐 부른다.
 
153
성순의 가슴에 마주 잡힌 민의 두 손은 벌벌 떨린다. 성순의 머리는 민의 왼편 어깨에 기대어지고 민의 헤쓱한 뺨은 성순의 찬땀이 흐르는 이마에 올려 놓았다.
 
154
성재는 죽은 빛이 된 성순의 손을 쳐들어 보면서.
 
155
"성순아,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156
하고 손에서 팔까지 올려 주물렀으나 대답이 없으매 또,
 
157
"성순아, 잠간만......"
 
158
할 때에 성순은 눈을 떴다.
 
159
"민군이 오신 줄 아느냐?"
 
160
성순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161
"민군이 어디 계신지 아니?"
 
162
성순은 가만히 눈을 들어 민을 보다가 민의 눈물이 자기의 이마에 떨어질 때에 다시 눈을 감는다.
 
163
성재는,
 
164
"성순아, 용서하여라. 너는...... 너는......"
 
165
하다가 곁에 울며 쓰러진 모친의 등을 흔들면서,
 
166
"어머니, 어머니, 이 애 생전에 어머니 입으로 제 뜻대로 하여 준다 해 주십시오."
 
167
모친은 겨우 고개를 들어,
 
168
"성순아, 네 뜻대로 하여 주마. 네 뜻대로 하여 줄 것이니 살아만 다오."
 
169
하고 도로 쓰러진다.
 
170
성재는 성순의 손과 민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171
"민군! 용서하시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불러 주시오."
 
172
하고 성순을 흔들며.
 
173
"성순아, 정신을 차리느냐?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성순아!"
 
174
성순은 또 한번 눈을 뜨며,
 
175
"네."
 
176
하고 분명치 못한 음성으로,
 
177
"자, 민군, 이제! 이제! 아내라고 불러 줍시오."
 
178
민은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성순을 보며,
 
179
"성순씨! 저는 영원히 성순씨를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고 부릅니다."
 
180
성순의 눈에서는 새 눈물이 흐른다.
 
 
 

21.6

 
182
온 방안의 사랑과 동정은 성순에게로 보였다. 이제야 누가 성순을 미워하랴. 같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서 죽자고 하던 모친까지도 아무리 하여서라도 성순의 생명을 일 분이라도 늘이고자 한다.
 
183
아아, 죽음이라는 큰 사실이 여러 사람의 불화를 풀고 따뜻한 사랑의 융합 속에 그들을 뭉쳤다. 미움과 질욕 속에 살아가야 할 성순의 일생을 따뜻한 사랑 속에서 죽게 되었다. 성순도 아마 만족하였겠지. 모친과 성재와의 사랑을 회복하고 민의 품에 안겨서 '너는 내 아내'라는 말을 듣고 괴로운 세상을 떠나려 하는 성순의 가슴에는 아마 기쁨도 있었겠지. 그러나, 양양한 장래를 가진 꽃봉오리가 실컷 피어 보지도 못하고 때 아닌 광풍에 날려 버리는 것을 무심하게 보내는 사람도 눈물이 지려던 하물며 떨어지는 자기에게야 왜 통곡한 생각이 없으랴.
 
184
그 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남겨 두고 저만 혼자 어딘지 알지 못하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도 못하는, 정답던 모양을 다시 차려서 사랑하는 눈에 다시 보일 수도 없고, 그리운 언어를 다시 발하여 사랑하는 귀에 다시 들릴 수도 없는 그러한 나라로 떠나가는 정이 얼마나 하랴.
 
185
옛말이 옳다 하면 지금 성순의 곁에는 염라국의 사자가 지켜서서, 어서 행장을 수습하여 길 떠나기를 대촉할 것이다.
 
186
그가 아니 가려고 해도 아니 가지 못하고 분포를 지체하려고 하여도 지체할 수도 없다.
 
187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의 몸을 안고 그의 손발을 꼭 쥐고 아니 놓으라 하되 어느덧 그의 영은 소리도 없이 무궁한 먼 나라로 달아나고 싸늘하게 식은 껍데기가 남을 뿐이다.
 
188
그렇게 깨끗하고 사랑스럽던 영을 담았던 몸뚱이도 그로 부터는 아니 썩을 수가 없고, 땅에 아니 묻을 수가 없고, 그렇게 미묘하고 미려하던 신체의 조직이 컴컴한 보기 싫은 빛이 되어 구린내를 아니 발할 수가 없고, 마침내 풀뿌리를 배 불리는 흙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자가 아무리 그의 무덤을 꽃과 대리석으로 꾸민다 한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며, 아무리 그를 애석하는 혈루로 그의 무덤을 적신다 한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그래도 미련한 사람들은 무덤에 놓아 주기를 위하여 향기로운 꽃가지를 생전에 아끼고, 관 위에 뿌려 주기 위하여 동정의 눈물을 생전에 아낀다.
 
189
성순의 사지는 차차 식어 올라온다. 성순의 호흡이 차차 단촉하여 간다. 그러하면서도 성순의 의식은 아직도 명료하다. 그는 그의 사지가 식어 올라오는 줄을 알고 그의 지금 명료하던, 의식하던 의식이 차차 몽롱하여질 것을 안다. 그는 자기의 손이 민의 손을 잡은 줄을 알고 자기의 얼마 아니 남은 체온이 여러 겹의 장애를 관철하여 민의 슬퍼하는 체온과 서로 화하는 줄을 안다. 그러하는 동시에 그는 얼마 아니해서 자기의 이식이 몽롱하여지면 자기의 손이 민의 손 속에 있는 줄도 모를 것이요, 자기의 아직 뛰는 가슴이 민의 가슴에 안긴 줄도 모를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성순은 몇 분인지 몇 초인지를 알 수 없는 자기의 생병의 따뜻함이 있는 동안에 느낄 수 있는 대로 인생의 맛을 느끼려 한다.
 
190
너희는 민의 손을 잡은 성순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느냐. 그것은 남은 힘을 다하여 한번 더 힘껏 쥐어 보려 함이다. 너희는 기운없이 내려 감긴 성순의 눈꺼풀이 움직움직하는 것을 보느냐. 그것은 눈의 동자가 물건을 비칠 수 있는 동안에 한번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함이다.
 
191
사람들아 울지만 말고 무엇이나 기쁜 말을, 위로도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여 주어라. 그의 귀가 아직 성음을 분별할 능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 정다운 말소리를 실컷 듣게 하여라.
 
192
성순의 몸에는 또 경련이 일어난다. 일제히 놀람으로 둥그래지던 눈들에는 새로운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방안은 고요하다. 그네는 소리를 내어서 울기를 그쳤다. 소리를 내어 울기에는 너무 슬픈 일인 것 같다. 그네는 몸으로 울기를 그만두고 마음으로 영으로 울기 시작하였다. 몇 십층 더 아픈 울음을 몇 십층 더 뜨거운 눈물을 시작하였다.
 
193
단촉(短促)하지마는 부드럽게 들리는 성순의 숨소리는 일동의 아픔을 깊은 애수에 침정(沈靜)하게 하였다. 가만히 만일 귀를 기울이면 벽의 흙과 서까래의 나무의 분자 분자가 운동하는 소리조차 들릴 것 같이 그렇게 일동의 마음은 침정하였다. 그 숨결은 마치 장마 뒤의 서풍과 같이 일동의 마음 하늘에 덮였던 건은 구름, 잿빛 구름을 말끔 몰아내었다. 그리하고 이 방 속에 이 집이 지어진 이후로 아마 한번도 있어 본 적례가 없는 참사람의 일단이 되게 하였다.
 
 
 

21.7

 
195
성순은 전의 어느 것보다도 더 심한 경련을 한다.
 
196
그리고 눈을 번쩍 뜨며 몸을 한번 흔들고 민의 손을 힘껏 쥔다. 일동의 전신에 얼음 같은 전율이 번개같이 지나가고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정신을 그러쥔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일제히.
 
197
"성순아, 정신차려라."
 
198
하였다.
 
199
성순은 다시 눈을 스르르 감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헛소리 모양으로 '죽음! 죽음!' 하였다. 일동은 아까보다 더한 전율과 공푸를 깨달았다. 민은 한 손으로 성순의 턱을 받쳐서 그의 고개를 들며,
 
200
"성순씨! 성순씨!"
 
201
하고 두 번 불렀다.
 
202
"네."
 
203
하는 대답은 입술 안에 방황하는 듯.
 
204
"정신차립시오!"
 
205
하고 한번 몸을 흔들 때 성순은 잠이 들었다가 깨는 듯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쳐들어 한번 모친부터 성훈 부인, 어멈, 성재, 민을 둘러보더니,
 
206
"저는 가요."
 
207
하고 방그레 웃는다.
 
208
"얘, 성순아! 정신차려라."
 
209
하는 모친의 말도 들은 듯 만 듯,
 
210
"어머니, 저는 먼저 가요. 아버지 계신 데로......"
 
211
"가기는 어디를 가!"
 
212
"하느님께로!"
 
213
성재는 눈물을 흘리면서,
 
214
"오냐, 기쁘게 가거라. 하느님께로 가거라...... 짧은 일생을 우리가 들러붙어서 때리고 차고 못 견디게 굴었고나...... 기쁘게 자유로운 나라로 가거라!"
 
215
"가다니, 어디로 가? 나를 두고 어디를 가?"
 
216
하고 모친이 성순의 손을 잡아 당긴다. 그러나 성순의 호흡은 점점 더 단축하여지고 두 번에 한 번씩 혹은 세 번에 한 번씩 끊어지기도 한다.
 
217
성순은 자기의 이식이 차차 희미하여짐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그는 살고 싶었다. 죽기는 너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버리고 어딘지 모르는 데로 가는 것이 슬프기도 무섭기도 하였다. 그래서 성순은 최후의 힘을 다하여 민의 손을 꽉 쥐며 억지로 눈을 떴다. 한 손은 민이 한 손은 모친이, 한 다리를 성훈 부인이, 또 한 다리를 어멈이, 머리와 가슴을 민이 꼭 잡았다. 아무리 힘센 죽음의 신이 오더라도 아니 놓치려는 듯이 꼭 잡았다. 성순도 발을 뻗칠 대로 뻗치고 악을 쓸 대로 써 보았다.
 
218
그러나,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번쩍 보인 뒤에는 그 얼굴들을 궤뚫을 수 없는 어둠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고, 광명한 새 세계가 눈앞에 번떡할 때에 정다운 소리들이 차차 멀어감을 깨달았다. 성순은 어느덧 그의 영은 세상의 고민과, 비방과, 나중에는 독한 유산으로 타 버린 낡은 집을 떠나 무궁한 자유와 사랑의 세계에 두둥실 떴다. 아마도 그가 구름을 지나고 별들을 지날 때에 반드시 정든 지구를 다시금 돌아보고 '저는 가요'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붙들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의 모양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의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고, 다만 조는 듯한 해쓱한 육체가 남아 있을 뿐이다.
 
219
반쯤 뜬 그의 눈은 지금도 등불을 반사하여 진주와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이 꼭 박혀서 영원히 남아 있을 듯 하였다.
 
220
민은 얼마큼 피곤과 고민의 빛을 띤 성순(이제도 성순이라고 할는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전후를 불구하고 자기의 뺨을 성순의 뺨에 비비며 그 창백한 입술에 자기의 입을 꼭 대었다. 거기는 아직도 온기가 있었다. 성재는 벌떡 일어서면서,
 
221
"어머니, 사랑으로 나가십시오."
 
222
하고 어멈에게 눈짓을 하였다. 모친은 두어 번 반항하고, 성순의 시체(이제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에 매어달리려 하다가는 마침내 어멈의 어깨에 달려 사랑으로 나아갔다.
 
223
"자, 이제 내려 누입시다."
 
224
하는 성재의 말에 민은.
 
225
"아니요, 잠간만. 아직 체온이 남아 있어요. 아주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나마 이렇게 안고 있게 하여 주십시오."
 
226
하였다.
 
227
성순의 눈은 여전히 반쯤 뜬 대로 어딘지 모르는 먼 곳을 보고 있다. 그의 싸늘한 손을 아직도 민의 손을 감아쥠 대로 있다. 그러나 그의 코로서는 다시 숨이 나오지 아니하고 그의 가슴이 영원히 잠잠하였다. 차차 더욱 창백하여 가는 입술 틈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빨간 피가 흘러 내린다.
 
228
밤은 어느새 깊었던지 이 서울 장안에 어느 집 닭이 소리를 높여 운다.
 
 
 

21.8

 
230
성순의 얼굴은 덮지도 아니한 대로 가만히 베게 위에 놓였다. 곁에 앉았는 민과 성재의 눈으로서는 끝없이 눈물이 흐른다. 성순의 생전의 일과 죽을 때의 모양을 생각하고는 울고 울다가는 조는 듯한 성재의 얼굴을 보고, 보고는 또 울었다. 어멈과 모친은 사랑에 나아가고 없고 웃방에서 외로운 성훈 부인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이 가까워 실내에는 음냉한 기운이 돌고, 양등의 기름도 거의 다 졸아서 불이 거물거물하건마는 아무도 그것을 깨닫는 이가 없다.
 
231
성재는 일어나서 이불로 시체를 덮고 병풍을 두르러 하였다. 그러나 민은,
 
232
"잠깐 참읍시다. 아직 그 얼굴을 가리우지 말으셔요."
 
233
하였다.
 
234
아직 그를 시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의 얼굴을 죽은 자의 얼굴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 코에서 숨이 달아나고, 두 뺨에서 붉은 빛이 달아나고, 몸에서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달아났다. 그렇게 따뜻한 기름 모양으로 미끄럽게 흘러 다니던 피는 멎었다. 그러나 아직도 죽었다고 보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235
그 얼굴은 이제 덮이면 영원이 덮이면 영원히 덮이는 것이다. 평생 부드러운 사랑으로 빛나던 그 눈은 비록 감았다 하더라도 깨끗한 눈물에 여러번 젖었던 눈썹은 아직 남아 있지 아니하냐. 설혹 그것이 이미 시체라 하자. 생병이 빠져 나간 빈 집이라 하자. 그래도 근 이십 년간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 살던 집이라 하면 얼마나 정다우랴.
 
236
아아, 어떻게 차마 그 얼굴을 가리우고 그 몸을 관에 넣고 그 관을 차디찬 흙 속에 묻으랴. 옛날 애급 사람들보고 모양으로 시체에 약을 발라 영원히 썩지 않는 '미이라'는 만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237
민은 마치 자기를 잃어 버린 사람 모양으로 망연히 성순의 얼굴만 보고 앉았다. 자기의 장부(臟腑)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잃어 버린 것같이 갑자기 공허함을 깨달았다. 천평(天枰)의 한 곳에 달렸던 추가 갑자기 없어진 때에 그것이 평형을 잃어 되는 대로 상하하는 모양으로, 민의 영은 안정을 읽고 구만 리 장공에 떴다 잠겼다 하며 현훈(眩暈)이 생긴 듯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꽃 피고 새 울고 일광이 조휘(照輝)하던 세계가 갑자기 잿빛 같은 광선으로 덮이고 불타고 번번한 지구 위에는 자기만 혼자 올연(兀然)히 서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듯하였다.
 
238
모든 희망은 양인의 것이었고, 모든 계획은 양인의 것이었으며, 모든 기쁨, 모든 가치는 다 양인의 것이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한편이 없어지니 그것들도 그를 따라서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무슨 일에나 무슨 경영에나 '우리 둘'을 주격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영원히 없다. '우리'는 깨어져서 '내'가 되고 말았다. 다만 양인의 살과 살이 유합(癒合)하였다가 떨어진 자리가 일생을 두고 쓰라릴 뿐일 것이다.
 
239
성순을 매장하고 돌아와서 민이 지은 제물을 쓰고 이 슬픈 이야기를 그치자-
 
240
성아, 너는 갔고나, 마치
241
농(籠)에 갇혔던 새가 놓여
242
'자유 자유' 하면서 외쳐
243
구름 속으로 높이 높이
244
올라가듯이, 너는 갔다.
245
서리 내리기 전날, 피는
246
국화아 같이, 아리따운
247
꽃이 피듯 말 듯 졌다.
248
쓸쓸한 하늘 길을 홀로
249
가는 네 신세가 쓸쓸한
250
세상의 사막에 고적한
251
짝 잃고 헤매는 몸으로
252
가는 내 정경! 아아 성아!
253
어이 갔느냐 아니 가던
254
못하겠더냐. 가랴거던
255
함께 가던 못 하겠더냐.
256
내가 만일 네 뒤를 따라
257
하늘 위에나 땅속에서
258
정녕 네 나라를 찾아서
259
찾기만 한다면 아아
260
당장 가겠다마는, 저리
261
수없는 별들 중에 뉘라
262
너 있는 별을 가르치랴.
263
빛 없는 땅에서 외로이,
264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265
남에서 북, 등에서 서로
266
십 이 성좌의 별을 모두
267
세며 부르고 세며 불러!
268
성아 듣거든 한 마디나
269
'여기다!' 하여 다오. 만일
270
영의 날의 있었떤 매일
271
꿈의 수레를 타고 오라!
272
성아! 모든 희망과 기쁨
273
내게 있는 온갖 말아
274
네 관에 넣고 오직 하나
275
가슴에 남은 것, 이 슬픔!
276
아아! 귀한 슬픔! 오직
277
이것이 나의 재산이다!
278
세상의 끝까지 품에다
279
품을 기념이 이것! 오직!
280
사람이 죽을까. 죽르러
281
생명이 났을까. 생명은
282
죽는다 하여도 사랑은
283
사는 것 아닐까 오히려!
 
 
284
<끝>
【원문】21 장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180
- 전체 순위 : 384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56 위 / 879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5)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개척자 [제목]
 
  이광수(李光洙) [저자]
 
  매일 신보(每日申報) [출처]
 
  1917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21권)     이전 21권 ▶마지막 한글 
◈ 개척자(開拓者)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4년 04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