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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척자(開拓者) ◈
◇ 3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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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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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기]
 

3장

 

3.1

 
3
성순은 우산을 받고 한성 은행에 갔다. 남은 돈 백육십 원을 찾아서 대판으로 약을 청구하려 함이다. 통장을 내어서 예금계에 내어 대었더니 젊은 사무원이 그 통장을 들고 두어 탁자 지나가서 큰 탁자에 앉은 수염난 사람한테 가서 두어 마디 문답을 하고 돌아와서 통장을 도로 내어 주며,
 
4
"미안합니다마는, 돈을 못 내드리겠읍니다."
 
5
"왜 그래요, 본인이 와야 되겠읍니까?"
 
6
"아니올시다. 채권자가 가차압 청원을 하여서 아까 재판소에서 지불하지 말라는 명령이 왔으니까 본인이 오시더라도 못 내드리겠읍니다."
 
7
이 말을 듣고 성순을 실망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실망보다도 이 말을 들었을 때에 할 그 오빠의 실망이 더 무서웠다.
 
8
"그 채권자가 누구오니까?"
 
9
"저는 모릅니다."
 
10
하는 것을 곁에 앉았던 어떤 사무원 하나이 성순을 보면서,
 
11
"함사과(咸司果)라는 자인가 봅니다."
 
12
한다.
 
13
'함사과─' 하고 성순은 더욱 놀랐다.
 
14
아버지 말씀에 설마 함사과야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고 또 언젠가, '함사과가 포목전에 큰 실패를 하여 진퇴 유곡하였을 적에, 자기가 돈 만냥을 주어 전당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는 말을 부친의 술푀단 중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함사과가 불과 삼천여 원 돈에 가차압을 하였다는 말을 듣고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15
성순은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얼른 통장을 책보에 싸 들고 은행 문을 나섰다. 은행에 일보러 오는 사람들과 시가로 걸어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보고 조롱하는 듯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에 들어서니 부친은 담뱃대를 물고 마당에 놓인 화분에 낙엽을 소제하였다. 성순의 눈에 초췌한 듯하다. 만일 우리 가대가 가차압을 당한 줄 알면 얼마나 놀라며 얼마나 비분할까 하고 생각하며 성순을 가슴이 뻐근함을 깨달았다. 성순은 그 걸음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다. 실내에는 어제와 같은 악취가 가득하고 성재는 정신없이 시험관만 돌리고 앉았다. 유리창 열어 놓은 것을 잊고 닫지 아니하여 양장관 한편 구석에는 가는 비가 뿌려 이슬이 맺혔다.
 
16
성순은 사뿐사뿐 걸어가서 가만히 유리창을 닫고 돌아설 적에 창 닫는 소리를 들었는지 성재가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면서 기쁜 듯이,
 
17
"오늘은 성적이 매우 좋아. 무슨 새 광명이 생길 모양이다."
 
18
하다가 성순의 불편한 안색을 보고 자기도 낯빛을 변하면서,
 
19
"돈 부치고 왔니?"
 
20
"네"
 
21
성순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획 몸을 돌리어 쏟아지는 눈물을 얼른 손으로 받았다. 차마 그의 실망하는 꼴을 못 보아 함이다. 성재는 시험관을 든 채로 벌떡 일어 나면서 황망하게,
 
22
"왜, 왜, 응?"
 
23
하였다.
 
24
우리 재산이 가차압을 당했대요."
 
25
"가차압!"
 
26
"네. 그래서 한성 은행에서도 돈을 못 내어 주겠다고 거절합디다."
 
27
"그러면 한성 은행에서 가차압했단 말이냐?"
 
28
"함사과가 가차압 청원을 했다구요."
 
29
"함사과가? 저 함명은(咸明殷)이가? 으음."
 
30
하고 성재는 시험관을 깨어져라고 탁자 위에 세워 놓고 실내로 왔다갔다하기를 시작한다. 성순은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오빠의 안색만 주의해 본다.
 
31
탁자 위에 주정등은 혼자 뻘건 불길을 굽실굽실 내면서 탄다.
 
32
이 때에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나더니,
 
33
"얘, 성재야, 이리 좀 나오너라."
 
34
하는 부친의 황망한 소리가 들린다. 웬일인가 하고 성재는 실험복을 입은 대로 뛰어 나가고 성순은 가만히 유리창으로 내다보았다. 모자에 금줄 두른 배달리가 와서 노인에게 가내의 가차압된 이유를 전하고 간다. 일가족은 다만 서로 쳐다볼 따름이요, 아무 말이 없었다. 토지 문권을 잡힌 채무의 기함도 멀지 아니하였으니 양식의 원천이 되는 전답까지도 불원에 강제 집행을 당하여 성재의 집은 아주 파산의 비경에 빠질 것 같다.
 
 
 

3.2

 
36
성재는 '어디로 가셔요?'하는 성순의 말도 들은체 만체 실험복을 벗어 버리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아가 천변으로 한참 올라가다가 좌편 골목으로 서너 집을 지나가서 어떤 솟을대문 앞에 우뚝 선다.
 
37
행랑은 낡은 건축인데 대문만 새로운 것을 보니 본래 평대문 집이던 것을 솟을대문으로 고친 것이 분명하다. 자기 문패에는 해자(楷字)로 '함명은'이라고 쓰고 그 곁에는 그 보다 좁은 작은 문패에 함 영민(咸永敏)이라고 썻다. 영민은 성재와 함게 잠간 동경에 유학하던 사람이나, 명치대학 법과 일년급에 삼 년이나 있다가 중도에 돌아온 후로는 성재와 아직까지 상봉한 적이 없다.
 
38
대문 밖에는 인력거 세 대가 놓였고 안으로 여러 사람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성재는 함사과의 생일이 이때이던 것을 기억하였다. 전일 같으면 자기의 부친되는 김참서(金參書)는 으레히 제일로 초대를 받을 손님이언마는 금년에는 자기의 천(賤)한 채무자라 하여 초대도 아니한 모양이다. 성재는 잠간 주저하다가,
 
39
"이리 오너라."
 
40
하고는 여러 사람을 웃겼다. 성재도 주의상 여자 교육을 중히 여기며, 성순을 사랑하며, 또 성순의 재질을 믿는 고로 기어이 동경 유학을 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삼사 년 전부터 혹 부모를 대하여 성순의 유학에 관한 의논도 하였고, 성순도 졸업하기 전전해부터 부모께 졸랐다. 그러나, 부모는 여자가 글을 그리 많이 배우면 무엇하느냐 하는 것과, 성재도 모처럼 유학을 시켰더니 그다지 시원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과, 또 성재가 졸업 귀국한 후로 무엇인지 모르는 사업에 재산의 대부분을 없이한 것을 생각하여 농담 겸,
 
41
함사과가 젊어서 빈한한 사람으로서 이처럼 귀하게 된 것은 함사과의 수완이 비범함이라고 칭찬하는 자도 있고, 아니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함사과는 천복지인(天福之人)이라 부자만 될 뿐더러 체력이 장(壯)하고 자녀가 많다 하여 천복설에 찬성하는 자도 있고, 함사과는 나이 육십에 가까이 돼도 아직도 첩이 삼인을 능히 거느릴 뿐더러 간간 기생 오입도 할 수 있으니, 과연 천복지인이라 하여 무한히 찬송하는 수척한 노인도 있고, 아니라 모두 다 그 부여조(父與祖)가 적선 적덕(積善積德)한 인과라고 단언하는 자도 있다.
 
42
객들이 하는 말을 종합하건대, 함사과는 적선 적덕한 부조의 자손으로서 자수로 능히 가도를 융성케 하여 많은 자녀를 두고 육십이 되도록 밤마다 젊은 첩을 거느릴 수 있으니 천복지인이로다 함이 그 결론이였다.
 
43
성재는 연전 자기의 생신에도 여기 모인 이 객들이 와서 여기서 지껄이는 이 소리를 지껄이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 때 그네들은 자기를 보고 자기의 부친을 향하여 '성재는 참 기특한 사람이지, 함사과의 아들은 돈만 쓴다는데 이 사람은 공부를 어떻게 잘 하는지 일본서도 제일등 가는 사람이라는데, 참 김참서는 천복지인이요'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44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마당에 들어와도 모두 다 못본 체하고 올라오라는 사람조차 없다. 성재는 성큼성큼 당에 올라 함사과에게 인사를 하였다.
 
45
사과는 잠간 몸을 들며,
 
46
"응, 자네 어째 왔나?"
 
47
"좀,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읍니다."
 
48
"응, 무슨 말, 후에 오게. 오늘은 손님이 많으니 말들을 새 없네."
 
49
하고 일동을 향하여,
 
50
"자, 이제는 기생 소리나 들읍시다. 얘 기생들아, 이리 나와 소리나 하여라. 이 동백(李東伯)이 아직도 아니 왔느냐?"
 
51
"응, 기생들아! 소리나 하여라."
 
52
하고 객들이 응한다. 객들은 대개 함사과의 젊었을 적 친구이므로 아직도 빈궁한 자가 많다.
 
53
그에는 함사과와 김참서의 생일을 자기에의 큰 명절로 알다가 지금 와서는 김참서는 윤락하고 오직 함사고가 남았을 뿐이다. 기생들은, 혹은 장구(長驅)를 들고, 혹은 가야금을 들고 한데 모여 앉는다. 장구 둥둥하는 소리, 가야금 줄 고르는 소리가 나자 객들의 눈은 기생에게로 몰린다. 성재의 존재는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다.
 
54
성재는,
 
55
"급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잠깐만......"
 
56
"응 자네 아직도 거기 섰네 그려. 저편 소년들 모인데 가서 놀게."
 
57
"놀 새가 없읍니다."
 
58
"그러면 가게 그려."
 
 
 

3.3

 
60
성재는 발길을 들어 함사과의 복장(服裝)을 차 주고 싶었다. 그러나, 꿀떡 참고 소리를 가다듬어,
 
61
"제 집을 가차압하시니 그런 법이 있읍니까."
 
62
"나는 몰라, 나는 모르네. 모든 채권은 다 변호사에게 위임하였으니까."
 
63
"그러면 제 집을 가차압하도록 한 것이 영감은 아니십니다 그려."
 
64
"응, 채권은 다 변호사에 위임하였으니까...... 그러나 나도 자네 어른과의 친분을 생각하고 잔 세간을랑 빼어 놓으라고 그랬네."
 
65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읍니까?"
 
66
"나는 몰라, 변호사가 알지. 이변호사가 알어."
 
67
"좀 연기하도록 영감께서......"
 
68
"모른다는데 그러네, 몰라, 몰라."
 
69
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끄러워하는 양으로 보인다.
 
70
여러 객들 중에는 이 회화를 알아들은 사람은, 혹 성재에게 동정하는 이도 있지마는 모르는 체하고 아무 말도 아니 한다. 성재는 암만 말해도 쓸 데 없을 줄을 알고 좌중(座中)에 일례(一禮)한 후에 뛰어 나왔다.
 
71
성재가 나온 뒤에도 함사과의 얼굴에는 불평한 빛이 사라지기 아니하여, 기생들에게 소리하라는 말도 아니한다. 객들도 모두 다 깨어져서 다른 데만 바라보고 가끔 함사과의 얼굴을 도적하여 본다. 이 좋은 판에 성재 때문에 흥이 식을 것을 밉게 여기는 빛도 보이고 종일 잘 놀려던 것이 주인의 불평으로 중도에 그치지 아니할까 하고 근심하는 빛도 보인다. 기생들도 웃기를 그만 두고 공연히 장구며 가야금을 어루만지며 서로 머리와 웃소매를 만지기도 한다. 그 중에 뚱뚱한 기생 하나이,
 
72
"얘, 그게 누구냐?"
 
73
하고 곁에 앉은 키 작고 이빨이 좀 뻐드러진 기생에게 묻는다.
 
74
"그게, 저, 김참서 아들이야. 그런데 무엇을 하느라고 그러는지, 종일 방안에 들어앉아서 무슨 유리통을 불에다 쬐고 있어. 나도 심심하면 몰래 가서 참 틈으로 디밀어 보지."
 
75
"유리통은 불에 쬐어서 무엇하누?"
 
76
"내가 아니? 꼭 손가락 같이 생긴 것이더라. 그것을 이렇게 불에다 대고는 우두커니 앉았겠지. 저 간호부 복장같은 흰 복장을 입고서 내 무엇을 하는지 당초에 알 수가 없더라."
 
77
이것은 성재의 집 바로 곁에 사는 수향(水香)이라는 기생인데, 어떻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객들도 차차 수향에게로 고래를 돌려 성재의 말을 듣는다. 종일 유리통을 불에 다 쬐고 앉았더라는 말과, 무엇을 하는지 모르겟다는 말은 아마 좌중의 성재의 사업에 대한 비평을 대표한 것이겠다.
 
78
함사과를 천복지인이라고 칭찬하던 노인이 수향더러,
 
79
"그래, 날마다 그러구 앉았어?"
 
80
"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고 모양으로 앉았어요. 내가 요렇게 창에 붙어 보는 것이, 혹 그의 눈에 띄든지 하더라도 슬쩍 볼 뿐이지 당초에 무슨 말이 없지. 내 이상한 사람 다 보지."
 
81
"너 어디 그 양반을 한번 놀려 먹어 보렴!"
 
82
하고 그 노인이 웃는다.
 
83
"아이구, 놀려 먹는 것이 무엇이야요. 돌부천데요. 돌부처야요."
 
84
하고 깔깔 웃는다.
 
85
"네가 좀 수단을 부려 보았니?"
 
86
"호...... 아니야요. 그런 것은 아니 하지마는......"
 
87
"그러면 어떻게 돌부천지 아니?"
 
88
"보니까 그렇단 말이지요. 밤낮 우두커니 앉았기만 하니까요, 돌부처가 아니고 무엇이야요."
 
89
하고 또 호호 하고 웃는다.
 
90
부슬부슬 떨어지던 가을비가 개고 구름으로 추워 보이는 일광이 한성 은행 벽돌 벽을 스쳐서 함사과 집 사랑 대청에 들이쓰인다. 이윽고 장구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나고, 기생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며 간간히 '좋다' '좋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91
매우 불평하던 주인의 안색에도 화기가 돌고 그것을 따라 객들도 즐겁게 놀기를 시작한다. 기생들도 흥을 내어 좋아 소리를 연발하며 가끔 남녀성이 합한 웃음소리가 대문으로 나온다. 문 밖에는 이웃 행랑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서 새어 나오는 풍류를 얻어 듣고 섰다. 그것이 마치 강아지나 고양이가 주인의 밥상 밑에 앉아서 뼈다귀 던지기를 바라는 양과 같다.
【원문】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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