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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개척자(開拓者) ◈
◇ 6 장 ◇
카탈로그   목차 (총 : 21권)     이전 6권 다음
1917년
이광수
목   차
[숨기기]
 

6장

 

6.1

 
3
가난한 살림이 싫다 하여 친정에 가 있던 성재의 부인도 머리를 풀고 울며 돌아오고, 성훈에게 쫓겨 갔던 그의 부인도 그 모양으로 돌아와서 소(素) 병풍을 두른다. 미망인을 중앙에 두고 두 며느리와 한 딸이 둘러 앉아서 치맛자락을 얼굴에 대고 우는 양을 문 밖에서 보는 성재도 새삼스럽게 슬픈 마음이 나서 한참이나 울었다. 문 밖에 모여 선 얼마 아니 되는 친척들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나 다 얼굴은 찌푸렸다.
 
4
방이라는 방에는 모두 불이 켜지고, 거기는 이삼 인씩, 혹 사오 인씩 모여 앉아서 장례지낼 일을 의논하는 이도 있고, 김참서의 일생을 말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방에서는 김참서의 별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세상 이야기를 하고는 웃는 소리가 안방에까지 들렸다.
 
5
부엌에도 행랑 여인들이 모여서 말 없이 혹은 솥에 물을 붇기도 하고, 혹은 불도 때고, 혹은 분주히 여러 사람들 사이로, 컴컴한 마당을 지나서 부엌과 고간 사이로 왕래도 한다.
 
6
성재의 실험실에는 청년 세 사람이 탁자를 새에 두고 둘러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그 청년에게 김참서 임종의 상태를 듣는다. 그 청년의 눈에는 아직도 아까 놀란 빛이 덜어지지 아니하여, 김참서의 누웠던 자리를 가리키며,
 
7
"바로 여기외다. 여기 이렇게 눕더니만 그만 숨이 끊기겠지요."
 
8
얼굴 좁고 평생 방긋방긋 웃어가지고 있는 전경(全敬)이가,
 
9
"어디가 아프단 말도 없이?"
 
10
"아프단 말을 할 새가 있어야지요. 마치 드는 칼로 생명줄을 싹 베는 모양으로 뚝 끊어지고 말아요.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쉽게 끊어진담─"
 
11
전경이가 더 빙긋거리며,
 
12
"왜 쉽게 끊어졌어요? 육십여 년이나 닳아지다 닳아지다 다 닳아져 끊어졌는데."
 
13
이 말에 세 사람은 일제히 웃었다.
 
14
"참, 사람의 생명이란 믿을 수가 없어."
 
15
하고 지금까지 잠자코 앉았던 변 영일(卞英一)이가 김참서의 눙서떤 자리라는 데를 슬쩍 보며 말한다.
 
16
"지금사 깨달았소? 철학자의 깨달음이 하기만야(何其晩也) 요.
 
17
함은 전경의 말.
 
18
"글쎄, 그 광경을 보고 나니깐 산 것 같지 않구려. 한참 인공 호흡을 시키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일어나서는 가만히 제 가슴에 손을 대어 보았지요─ 아직도 내 심장이 뛰는가 하고."
 
19
"응 아직도 뛰어요."
 
20
"그래서 안심이 되었소?"
 
21
"안심이 어찌 되어요? 이것이 언제까지나 뛰겠는고, 금시에 서지나 아니할까...... 마치 시계를 땅에 떨어뜨리면 그만 서는 모양으로, 그렇게 서면 어찌하나. 그 다음에는 어찌 되는고, 다른 세상이 또 있는지 아주 스로지고 마는지...... 그런 생각이 나요. 그리고는 몸에 땀이 쭉 흐르겠지요."
 
22
하고 소름이 끼치는 것같이 한번 몸을 흠칫해 보인다.
 
23
"글쎄. 사후에 또 생명이 있을까. 어지 철학자, 우리 범인에게 그 해결을 주소서."
 
24
"전군은 잠시도 그 버릇을 못 떼겠소, 그렇게 사람을 조롱하는 버릇을."
 
25
"죽어야."
 
26
하고 그 청년 (그청년)이 웃는다.
 
27
"암, 그야말로 심장이 서야, 하하하."
 
28
"그러면 금시로 전군의 심장이 서기를 바라오. 인도를 위하여."
 
29
"그것은 심하구려."
 
30
하고 머리를 북북 긁으며,
 
31
"그런데, 김참서의 생명은 어디로 갔을까. 아직 이 방안에 있을까?"
 
32
"안반에 들어갔겠지."
 
33
"옳지 시체를 따라서."
 
34
"한번 싫어서 벗어 내버린 몸뚱이를 무엇하러 따라 다녀?
 
35
벌써 저 멀리로 갔을 것이요. 천당에 갔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옥에 갔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여행 중이거나."
 
36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행리(行李)를 수습하는 중이거나."
 
37
이 때에 안방에서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38
"쉬─"
 
39
하고 세 사람은 말을 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6.2

 
41
전경이가 눈이 둥글해지더니 사방을 살피며,
 
42
"지금 누가 이 방으로 들어왔소?"
 
43
두 사람도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44
"지금 저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 같은 것이 쑥 들어왔는데......"
 
45
하고 전경은 방안을 둘러본다.
 
46
"또 무슨 장난을 하노라고 그러오?"
 
47
하고 변이 주먹으로 전의 어깨를 때리며 웃는다."
 
48
"아니 아니─ 저것 보아. 저기 있네, 저기 있네."
 
49
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피하며 때리려는 사람을 막는 모양으로 두 손을 펴서 앞을 막으며,
 
50
"민군, 민군! 민군 뒤에, 민군 뒤에─"
 
51
민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52
"여보 전군─ 웬 일이요?"
 
53
"저것을 보시오. 김참서가 금방 민군 뒤에 섰는데, 민군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는데."
 
54
변도 일어섰다. 그러나, 실내에는 오촉 전등고 성재의 실험 기구 밖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아까 쏟아진 물만 장판 위에 여기저기 번쩍번쩍한다.
 
55
전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언해 헛소리를 하며 몸을 떤다.
 
56
변은 실내를 둘러보다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전의 어깨를 흔들며,
 
57
"여보, 정신을 차리시오. 글쎄 별안간에 웬 일이요?"
 
58
그러나, 전경의 눈은 마치 미친 사람의 눈 모양으로 성재의 실험 탁자 근방을 노려보먀, 점점 몸이 더 떨린다.
 
59
다른 두 사람도 머리카락이 온통 하늘로 올라 솟는 듯하여 부지불각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도 눈은 전경의 파래진 얼굴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변은 그것이 농담이 아닌 줄을 알고, 다시 전의 손을 잡으며,
 
60
"여보, 전군─ 내가 누군지 알겠소?"
 
61
"흥 흥. 네가 응. 네가, 알지 알지."
 
62
"아이고 저것이 웬 일이야!"
 
63
하고 민이 전의 어깨를 한번 더 때리며,
 
64
"여보, 내가 누군지 알겠소?"
 
65
"응. 다 알아."
 
66
"그러면 이름을 불러 보오."
 
67
"너는 항우(項羽)고 이 애는 장비(張飛)구, 허허허허. 내가 잘 알지?"
 
68
"무엇이요? 내가 누구요? 내 얼굴을 자세히 보고 말을 하시오─"
 
69
하며 민이 눈을 부릅뜬다.
 
70
"너는...... 옳지 너는...... 저것 보게, 네 그러지요. 옳지 알았읍니다. 잘 알았읍니다. 응응, 그렇구 말구. 네, 네, 네."
 
71
"여보 전군 누구더러 하는 말이요?"
 
72
"김참서더러! 저기 김참서께서 계시지 않니?"
 
73
"어디?"
 
74
"저기 저 탁자 위에."
 
75
"탁자 위에 어디?"
 
76
"저기 안 있어. 저 굴뚝 위에 말이어!"
 
77
"어디 굴뚝이 있어?"
 
78
"저기 저 유리 굴뚝 위에...... 네, 네, 그래요, 옳지요. 내일, 응 모레, 네 네 네."
 
79
"여보, 김참서가 무슨 말씀을 하시오."
 
80
하고 변(卞)이 엄격한 얼굴로 물르매,
 
81
"흥, 흥. 얘들아 저게 무슨 소리냐, 누가 우느냐. 소리를 하느냐."
 
82
하고 귀를 기울인다. 두 사람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침 이웃 기생집에서 장구 소리에 맞춰 여성(女聲) 육자배기가 들린다.
 
83
"저 기생집에서 기생이 소리를 하오."
 
84
"아니, 그 소리 말고."
 
85
"그것은 안에 조객이 왔나 보오."
 
86
"누가 죽었나?"
 
87
"김참서께서 아니 돌아가셨소."
 
88
"하하하하. 김참서께서 여기 계신데, 하하하."
 
89
"어디?"
 
90
"여기."
 
91
하고 탁자를 가리키더니 다시,
 
92
"여기─"
 
93
하고 자기의 가슴을 가리킨다.
 
94
민은 다리가 벌벌 떨리며, 변더러,
 
95
"여보, 어쩌면 좋소. 전군이 미쳤구려."
 
96
"글세, 미친 모양이로구려. 워낙 쇠양하였으니까."
 
97
"흥흥, 전군이 미쳤소?"
 
98
하고 전이 깔깔 웃더니 손뼉을 탁 치고,
 
99
"옳지, 내가 좀 가 볼 일이 있는 것을 잊었구나."
 
100
하고 문을 차고 밖으로 나아간다. 밤의 찬 공기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다. 전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어디로 달아난다. 두 사람은 문도 닫칠 생각 없이 우두커니─ 마주보고 섰다.
 
 
 

6.3

 
102
"민군, 여기 계셔요. 내 따라가 보고 오리다."
 
103
"그러면 나도 가 보지요."
 
104
"아니, 그러다가 김군이 나오면 어째요? 김군이 오늘 저녁에는 퍽 흥분한 모양인데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알겠소. 나 혼자 얼른 가 보고 올 것이니 여기 계시오."
 
105
하고 뒤에 나아간다. 민은 하릴없이 혼자 떨어져 탁자에 기대어 앉았다.
 
106
담배를 내어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바라보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그러할수록 아까 김참서가 거꾸러져 운명하던 자리가 보이고, 아직도 번쩍번쩍하는 물이 보이며 그리고는 그 자리에 김참서가 눈을 부릅뜨고 누운 양이 보이고, 자기가 그 시체에 올라앉아 시체의 좌우 옆구리를 비비던 양이 보인다. 민은 벌떡 일어나서 크게 기침을 한 뒤에 방향을 돌려 거기를 등지고 앉았다. 그러나 김참서는 여 전히 그 자리에 누워서,
 
107
"얘 민아, 내 옆구리를 주물러라─"
 
108
하는 것 같고 그가 벌떡 일어나 아까 전군이 말하던 모양으로 자기의 뒷통수를 꾹 내려누른 듯하여 민은 다시 벌떡 일어나 위엄을 갖추고 그 자리를 노려보았다.
 
109
생생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과, 갑자기 미치는 것을 본 민은 자기도 금시에 죽는 듯하고 금시에 미치는 듯하였다. 그래서 민은 무서운 생각을 이길 양으로 일어나 실내로 왔다갔다 하며 동경 유학시에 배운 속가(俗歌)도 중얼거려 보고, 찬미가도 읊어 보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마침내 안으로 통한 전령(電鈴)을 눌렀다.
 
110
(하하, 우습다. 내가 왜 이러나.) 하고 다시 위의를 갖추고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앉았을 때에 문이 열리며 쾌활한 어멈이 고개를 디밀어 보더니,
 
111
"청주서방님 혼자 계셔요?"
 
112
"그림자까지 들이 있네."
 
113
"두 분은 어디 가셨어요?"
 
114
"한 사람은 미쳐 나가고, 한 사람은 미친 사람 잡으러 나가고......"
 
115
"전서방님이 미쳤다네."
 
116
"에그머니."
 
117
하고 문에서 물러선다.
 
118
"여보게, 안에 손님 많이 계신가?"
 
119
"몇 분 안 계셔요. 그런데 전서방님이 어떻게 되었어요?""
 
120
미쳤어...... 그렇거든 서방님 좀 나오시라게."
 
121
"상주님이 어디를 나와요? 전서방님이 미치셨어요?"
 
122
"그래, 미쳤다네...... 급한 일이 있다고 얼른 나오시라고 그러게."
 
123
"무슨 급한 일이야요?"
 
124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얼른 좀."
 
125
어멈은 화를 내는 듯이 문을 와락 닫고 들어간다.
 
126
이윽고 성재가 기운 없는 얼굴로 들어온다. 민은 다만 성재의 얼굴만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성재는 들어와서 탁자 앞에 놓인 자기의 의자에 앉더니,
 
127
"다들 어디 갔소?"
 
128
"전군이 미쳤어요."
 
129
"전군이?"
 
130
"그저 갑자기 미쳐요. 나하고 변군하고 셋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고 몸을 떨지요. 한참이나 그렇더니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면서 어디로 달아나고 말았어요."
 
131
"그래. 변군은 전군 따라갔구려?"
 
132
"네. 내 그런 변은 처음 보았소."
 
133
"전군도 그만 미치고 말았구려."
 
134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135
"전군의 집에 그러한 유전이 있어요. 아마 그 조부가 미쳐서 한강에 빠져 죽었지요. 그리고 그 고모도 한분 미쳤읍니다. 지금은 벌써 죽었지마는 우리도 그가 머리를 풀고 울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는 것요. 참 불쌍한 사람이지."
 
136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나요?"
 
137
"옛날은 꽤 넉넉하게 지냈다는데 그 조부가 미치기에 아주 망한 심이지요. 그리구 그 부친은 조사(早死)하고 어머니는 어디로 갔읍니다. 그래서 한참은 어머니 찾으러 간다고 야단을 했지요. 하더니 그만미쳤구려."
 
138
하고 매우 애석하는 빛을 보인다. 민도 더욱 애석하게 여겨 그가 미쳐 나가던 문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것은 성재의 너무 침착한 태도였다.
 
 
 

6.4

 
140
성재는 전경이가 미쳤다는 말을 듣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더니,
 
141
"전군도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십 칠팔 세 적부터 그래도 무슨 일을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하나도 성공한 것은 없이 고생만 하였지요."
 
142
"북간도도 갔다 왔다지요?"
 
143
"북간도뿐인가요. 북간도, 서간도, 해삼위(海蔘威)...... 아마 상해 등지에도 갔었지요. 무슨 시원한 일이나 있을까 하고 돌아다니나 무슨 시원한 일이 있겠소. 공연히 고생만 했지요. 북간도에 가서는 일변(一邊) 학교에 교사도 되고, 일변 민단을 조직하여 굉장히 활동을 하였답니다. 물론 자기가 중심이 된 것은 아니지마는 이모, 김모의 휘하에서 아마 제갈량(諸葛亮)이가 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서북파(西北派)니 기호파(畿湖派)니 하는 싸움에 경영하던 일은 모두 수포에 돌아가고, 전군은 반대파에게 붙들려서 죽도록 매를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하다가 어떤 청인의 집에서 두 달이나 치료를 하였더랍니다. 그러구는 다른 데로 가려니 노수(路需)가 있나요. 그래서 거기서 해삼위까지 그 추운 겨울에 걸어갔더랍니다. 그 때에 전군의 발가락 두 개나 빠졌지요...... 오른발이던가...... 옳지, 왼발이지. 그리구는 해삼위에 들어가서 또 얼마 동안 되지도 않는 일에 애를 쓰다 또 육혈포변(六穴砲變) 통에 거기도 못 있게 되고 그리고는 아마 일정한 처소도 없이 표류를 하였나 봅디다. 자기의 말을 들으면 장관이 많지요. 아마 직업도 아니 하여 본 것도 없지요. 담배말이, 고기잡이...... 그러니까 웬걸, 옷이나 변변히 입고 음식인들 잘 먹었겠소. 재작년에 온 것을 보니까 몸에는 살 한점 없이 뼈만 남았읍디다. 그러다가 얼마안 있어 ○○음모 사건의 연루자(連累者)로 붙들려서 일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나니까 사람 같지 않읍디다. 옥에서 나오니 있을 데가 있소. 그래서 아마 총감부(總監部)에서 내 이름을 불렀던지 내가 호출이 났읍디다그려. 그래서 가서 데려왔지요. 그후에 일 년이나 우리 집에 있다가 마침 ○○ 소학교에서 한문 교사를 구하기에 거기 주선을 하여서 지금까지 지내왔지요."
 
144
"본래 어느 학교 출신인가요?"
 
145
"이전에 일진회(一進會)에서 세운 광무 학교(光武學校)라는 학교가 있었읍니다. 어떻게 되어서 들어갔떤지 일진회원이 되어 가지고는 그 학교에 다녔지요. 전군이야말로 참 늙은 개화꾼이지요."
 
146
"그러면 나이 많게?"
 
147
"지금 서른 하나인가 그렇지요."
 
148
"그런데 아직 혼인도 아니 하고?"
 
149
"혼인할 새가 있나요. 불사가인생업(不事家人生業)하고 지사(志士)랍시고 돌아다니면서......"
 
150
"아, 교사된 뒤에도 혼인을 아니 해요?"
 
151
"한 달에 십 오 원 받아 가지고 혼인을 어떻게 하오? 그 뿐더러 선생은 자기의 복적한 일을 성공하기까지는 집도 아니 이루고 혼인도 아니 한다고 그러지요."
 
152
"그 목적이란 무엇이야요?"
 
153
"무엇인지도 모르지. 그래도 무슨 목적이 있노라고 그러지요. 무엇이 목적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 목적을 이루는 날까지 말하는 못할 것이라고. 그러면 언제나 성공할 듯하오? 하고 물으면 성공할 날은 모르지요. 아마 성공할 날이었겠지요, 하고 대답하지요. 성공할 날은 없겠지마는 목적을 버릴 수는 없다고 그러지요."
 
154
"아따, 그게 무슨 목적이야요."
 
155
하고 민은 이상한 듯이 웃는다.
 
156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읍니다."
 
157
하고 선배가 후배를 내려다보는 듯하는 눈으로 민을 보면서,
 
158
"아무려나, 전군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평생시에는 마치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 모양으로 쓸데 없는 농담이나 하고 빙긋빙긋 웃기만 하는 것 같지마는 속에는 딴 세계를 배포(配布)한 사람이지요. 다만 십 년 전 사람이지요. 십 년 전에는 가장 새롭던 사람이지마는 시대는 추이(推移)하고 자기는 자기의 사상(思想)을 묵수(墨守)하니까 전군과 이 시대와는 아 무 상관이 없지요. 전군은 자기의 이상대로 세상을 개조하 려 하였으나 세상이 전군을 발길로 차던지고 저 갈 길을 간 게지요. 전군은 자기를 차던지고 혼자 달아나는 세상을 따 라가려고도 아니하고 자기의 속에만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자기의 목적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목적을 달할 날이 없단 말이지요."
 
 
 

6.5

 
160
이러한 말을 들으니 민에게는 전을 동정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여진다. 일변 전에게 관한 말도 더 듣고 일변 이러한 말로 성재의 슬픔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새로 궐련을 피워 물며,
 
161
"그러나 마침애 미쳤구려. 미친 것이 도리어 행복일는지 모르지요. 상시에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 광중(狂中)에야 자유로 아니 되겠어요?"
 
162
하고 웃었다.
 
163
성재도 빙그레 웃는다. 민은 성재의 웃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민은 성재의 이 기쁨을 아무쪼록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164
그래서,
 
165
"그러면 오랫동안 고생과 실망이 모이고 모여서 미치는 원인이 되었나 보지요."
 
166
그러나 성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민의 말은 들은 체 만 체하고 우두커니 팔각목종을 쳐다보고 있더니 또 빙긋이 웃으면서,
 
167
"나도 전군과 같이 미치지 아니할는지요. 어째 미칠 것만 같소. 칠년 동안이나 실패만 하고 가산은 온통 집핼을 당하고, 종일 돈 변통하러 다니다가 늙으신 부친께서는 불시에 돌아가시고...... 아니 부친께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내 손으로 부친을 죽인 심이지요. 노친을 편안하시게 보양도 못하고 도리어 밤낮 걱정만 하시게 하다가 마침내 내 손으로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168
하고 푹 고개를 숙인다.
 
169
안에서는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170
육십이나 넘도록 해로하다가 그 지아비가 죽었다고 무엇이 그리 슬프리오마는 성재의 모친의 생각에는 김참서가 죽는 날이면 온통 살림을 할 수 없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재산이 패하여도 참서만 생존하면 마음이 든든하겠지마는 참서까지 죽으면 다시 아무 희망도 없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병풍을 볼 수록에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그러나 며느리들과 딸을 보아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흑흑 느끼는 그네를 도리어 위로하였다. 이웃에서 조상 왔던 손들도 다 돌아가고 이제는 친척 이삼 인이 대청에 앉아서 담배를 피울 뿐 널따란 집 조객들을 공궤(供饋)하지요. 그리하면 조객들도 오래 유하련마는 그것조차 못하는 것이 어떻게 서러운지 몰랐다.
 
171
삼년 전 성훈의 혼례 적에 성대하던 연락(宴樂)이 있던 것을 생각하고, 금일의 적막을 생각할 때에 마치 천지가 바뀌는 듯하였다.
 
172
그래도 김참서는 자기가 일생에 애써서 얻어 높은 큰 집 아랫목에 누울 수 있었다. 만일 사오 일만 지체하여 죽었던들 이 집 아랫목에도 누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 해도 행복일는지 모른다.
 
173
성재는 극히 친군 한 사람 이외에는 부고도 하지 아니하고 극히 간단하게 질소(質素)하게 그 부친도 장례를 지냈다. 장례를 지낸 지 삼일 만에 성재는 퇴거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그 집안을 떠나서 변군(卞君)의 주선으로 얻은 계동(桂洞) 막바지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이사하였고, 자기가 처분할 수 없는 세간 중에도 여간한 것은 다 팔아서 양식을 장만하고 실험 기구만 전부를 옮겨 갔다. 그 때에 성재는 함사과에게 이러한 편지를 하였다.
 
174
'여(余) 귀하에게 대한 채무를 변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귀하가 퇴거를 명하기 전에 미리 퇴거하나이다. 황금 밖에 의리를 모르는 귀하의 복력(福力)이 만년 천년 하기를 바라나이다.
 
175
실로 계동으로 반이(搬移)한 날의 광경은 참으로 비참하였다. 늙은 성재의 모친은 눈물을 머금고 그래도 성재를 보아서 웃는 낯을 지었으나, 철없는 성재의 아내는 마치 어린아이 모양으로 소리를 내 울며,
 
176
"나는 아무데도 안 갈 테야요. 계동은 안 갈테야요."
 
177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 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다.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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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원문】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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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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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신보(每日申報) [출처]
 
  1917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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