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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척자(開拓者) ◈
◇ 12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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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광수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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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12.1

 
3
그러나, 이삼 일을 지나서 성재의 병은 훨씬 덜했다. 오늘 아침에는 이불을 두르고 일어나 앉아서 자기의 손으로 고깃국에 만 밥을 두어 보시기 먹고 부인이 깍아 주는 능금도 한 개 먹었다. 살풍경이던 가정에는 일조의 기쁨이 흐르고, 평생 말이 없던 가족들 간에도 여러 가지 유쾌한 회화가 교환되었다. 하루 한두 번씩 온 가족이 성재의 주위를 둘러싸고 성재가 앓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옛말삼아 웃음 섞어 하게 되었다. 성재도 여윈 얼굴에 웃음을 띠어 가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묻기도 하며, 대답도 하였다. 성재의 집에는 마치 오랜 겨울이 지나가고 양춘(陽春)이 온 듯하였다.
 
4
그러나, 그 양춘 속에는 아직도 한 줄기 얼음이 있어서 까딱하면 양춘 전체를 굳은 얼음으로 화(化)할 듯 하다. 성재의 병이 완쾌하는 날에는 생활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시험관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성재의 부인의 불평도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앞에 오는 불평이야 있든지 없든지 죽어 가던 사람이 소생하여 온 기쁨이야 부정할 수가 있으랴.
 
5
이러한 기쁨 속에 더한 기쁨을 첨(添)할 양으로 변과 성순과의 약혼이 맺어졌다.
 
6
모친과 성재와 변과 삼인이 성재의 방에 모여 앉아서 약 한 시간 만에 결말이 났다. 성재는 성순의 의향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모친은 성순이가 결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추정적 보증에 병여(病餘)의 성재는 심하게 반대도 아니 하였다. 그리고 만일 성순이가 반대하거든 오빠인 자기의 권위로 족히 수무(綏撫)하리라고 생각하였다.
 
7
그날 저녁에 성재는 모친의 면전에서 성순을 불러 약혼이 되었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태도는 예기하였던 것보다는 강하였다.
 
8
"성순아!"
 
9
"네─"
 
10
할 때에는 성재는 물론이어니와 모친도 성순의 대답을 많이 염려하였고, 지금까지 성순은 자기의 소유물─ 적어도 자기네의 마음대로 순종하는 자로만 알았던 것이 '네'라는 성순의 대답이 분명하게 실내에 울릴 적에 성순도 역시 독립한 일 개인인 듯한 위엄을 느꼈다. 그래서 성재도 잠간 양미간을 찌푸리고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다시,
 
11
"성순아!"
 
12
하고 불렀다.
 
13
"네."
 
14
하는 성순도 성재의 안색을 주의하여 보게 되었다.
 
15
"오늘 약혹을 하였다. 먼저 네게 물어 보아야 옳을 것이지마는, 아마 네 뜻도 어머니와 내 뜻과 다름이 없을 줄 알고, 네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작정하였다. 물론 네게도 반대는 없을 터이지?"
 
16
(이 말은 용하게 성재의 사정을 발표한 것이였다. 그는 성순에게도 독립한 인격을 인정하여야 옳은 줄을 안다. 알뿐더러 남을 향하여 말까지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아니 되는 이 인권이라는 새 사상은 가장 진보하였다는 성재에게까지도 아직 실행할 힘을 줄이만큼 깊이 침투하지를 못하였다.) 성순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성재의 얼굴만 물끄러미 보았다.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은,
 
17
"반대가 무슨 반대냐? 하나나 부족한 것이 있어야지. 변서방으로 말하면 양반이것다, 부자것다, 사람이 잘났겄다, 그 뿐 아니라 여태까지 그의 신세를 우리가 얼마나 졌니?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부족한 데가 있어야지."
 
18
그러나, 모친이 완전한 요소로 꼽는 '양반' '부자' '여태까지 진 신세'는 성순에게는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였다. 그뿐더러 자기를 보은의 한 선물로 비기는 것이 도리어 불쾌하였다. 또 모친과 성재의 마음에 적당하니까 필연적으로 자기의 마음에도 적당하리라는 논리도 승인할 수가 없었다. 종로의 인경 소리를 듣고 난 성재보다는 시계의 치는 소리를 듣고 난 성순의 편이 얼마큼 더욱 신사상을 동화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경 소리의 여향(餘響)한 성순은 분명히 성재와 모친의 면전에서 자기의 사상을 발표할 용기도 없어서 다만,
 
19
"저는 아직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20
하였다.
 
21
"아직이라니? 계집애가 이십 살이 가까워 가는데 아직이 다 무엇이냐? 남 같으면 벌써 자식을 둘이나 낳았겠다......"
 
22
하는 모친의 말에,
 
 
 

12.2

 
24
"글쎄, 어린애가 시집이 무슨 시집이야요. 좀더 공부할랍니다."
 
25
"공부는 무슨 공부를 더 한단 말이냐? 고등 보통학교나 졸업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공부를 더 하면 무엇을 하니?
 
26
사내들 같으면 몰라도...... 나, 저, 커다란 계집애들이 공부합네 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정보기 싫더라. 우리는 보통 학교 구경도 못했지마는......"
 
27
"그 때와 지금과 같읍니까?"
 
28
하고 성순은 좀 흥분하였다.
 
29
"같지 않구! 지금이라도 계집애가 사내는 못되지"
 
30
"미련하던 것이 지혜롭게는 됩지요."
 
31
"응, 그래서 나는 미련하고 너는 지혜롭구나."
 
32
"옛날은─ 어머니의 시대에는 어머니도 지혜로왔지요."
 
33
"지금은 너만 지혜롭고?"
 
34
"어머니보다는 지혜롭지마는 남들보다는 미련하지요. 그러니까 더 공부를 해야 된단 말이올시다."
 
35
"그게 어미에게 하는 말버릇이냐? 그게 학교에서 배운 말버릇이냐?"
 
36
하면서도 모친은 성은 내지 아니한다.
 
37
모친은 성순의 이론의 정부(正否)를 판단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성순이가 자기를 항거하려 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이론으로 성순을 당하지 못할 줄을 알 때에 친권이라는 성루(城壘)에 거(據)하여 위협을 함이다. 성순은 최후의 피난처에 도입(導入)한 모친을 더 추구함이 무용한 줄을 알므로 잠잠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성순의 침묵을 승(乘)하여 다시 기운을 얻어 공세를 취한다.
 
38
"그런 철없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어서 내나 네 오라비 하나는 대로 해라. 네게 해롭게 하랴?"
 
39
이때까지 모년의 문답을 우두커니 듣고 앉았던 성재는 성순이가 결코 경적(輕敵)이 아닌 줄을 깨달았다. 성순은 벌써 어린애가 아니다. 간단한 명령이나, 감언이나, 위협이 그 효(?)를 주(奏)치 못할 줄을 알았다. 이지가 눈을 뜨려는 사람에게는 이지 이외에 그를 설복시킬 것도 없음을 안다. 그래서,
 
40
"공부하는 것이 좋지마는 우리 가세가 허(許)하느냐? 변군도 해상(解喪)하기까지 동경에 유학을 시켜도 좋다 하니 그렇게 되면 작히나 좋으나."
 
41
그러나, 이것은 궤변이다. 성순이가 '공부하겠어요'하고 핑계로 한 말은 그가 약혼을 거절하는 유일한 이유로 여기고 반박하려는 논리적 유희에 불과하다. 성순은 이 말에는 대답지 아니하고 잠자코 치마고름만 씹었다. 약 오분간 세 사람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가만히 앉았었다. 성재는 불가불 본 문제를 끌어내게 되었다.
 
42
"성순아!"
 
43
"네!"
 
44
"나는 네가 애 이 약혼을 싫어하는지를 안다. 너는 내가 모르거니 하지마는 나는 벌써 다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아직도 경험이 없어서 잘못 생각한 것이니까, 어서 단념하고 내 말대로 하여라."
 
45
하고 빙그레 웃는 성재의 얼굴을 슬쩍 보고 성순은 얼굴을 붉혔다. 모친은 웬 까닭인지를 모르고 눈이 둥그래졌다. 성순은 오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대강 알아 차렸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잠잠할 수는 없었다.
 
46
"무엇을 알으셔요?"
 
47
"내가 모르는 줄 아니?"
 
48
"무엇 말씀이야요?"
 
49
"네가 네 일기를 다 보았다...... 그만하면 알지."
 
50
"............"
 
51
"그러나, 그것은 되지 못할 일이다. 오늘 급히 약혼을 한 것도 그것이 한 원인이다. 하니까 이제부터는 너도 변군의 아내인 줄로 알고 민군과 가까이 교제도 말아라."
 
52
모친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53
"무어 어째! 날마다 민이 놀러 오는 것 같더니, 어찌 되었어? 응, 이 철없는 계집애야. 글쎄, 그런 한푼 없는 사람한테 시집을 가면 무엇을 먹고 살 양으로, 아니, 철없는 계집애!"
 
54
성순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또 반감도 생겨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55
"누가 그이에게로 시집을 간답니까?"
 
56
하였다. 성재는, (저 계집애가 얼마나한 결심이 있는가.) 하였다.
 
57
그러나,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지금토록 상상하던 바와 같은 '어린애'는 아니었다.
 
 
 

12.3

 
59
성재는 더욱 위엄있는 목소리로,
 
60
"민군과는 혼인할 수 없다.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만, 첫째 민군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
 
61
"응, 아내까지 있는 것이 남의 딸을......"
 
62
"벌써 이혼한다고 아니 돌아본 지가 한 오륙 년 되지마는 아직도 그 아내되는 사람은 아니 간다고 그런다더라...... 그런데 너는 그러한 사람의 첩으로 갈래?"
 
63
성순은 이 말을 들을 때 놀랐다. 민이 아내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었다. 자기는 아직도 민과 혼인하리라 하여 본 적도 없지마는, 그래도 아내 있는 사람이란 말에는 얼마큼 경악하고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성재의 '못한다'하는 말이 유리하게도 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시에 민을 밉게 볼 수도 없고 또 오빠의 말대로 변에게 시집가기를 허락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잠잠하였다. 성재는 이 눈치를 채고 얼런,
 
64
"그러니까 민과 가까이할 생각은 아예 생념도 말고 어서 변군과 약혼을 해서 동경 유학이나 가게 하여라. 어서 그렇게 작정해라."
 
65
"글쎄, 이 철없는 계집애야, 어떻허자고 그러한 사내와 친한단 말이냐. 이제는 민인지 무엇인지 한 사람은 당초에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런 괘씸한 자식이 어디 있단 말이냐?"
 
66
웬 일인지 모르지만, 성순은 그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자리 속에서 울었다.
 
67
이로부터 성순은 꿈같이 지내었다. 민은 한번도 오지 아니하였다. 변만 격일하여 놀러 왔으나 성순은 될 수 있는 대로 그와 상대하기를 피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약혼에 대한 반대도 하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결정된 줄로만 믿고 혼인할 절차를 의논하였다. 성재는 해상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정월이 되거든 곧 혼례를 행하여도 좋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에 물론 변은 대찬성이다. 변은 결코 진정으로 성순의 유학을 바라지 아니한다. 변은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68
변의 부부관은 이러하다.
 
69
처(妻)란 용모가 미려하고 행지(行止)가 단아하며 성질이 온순하여 부(夫)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며, 부를 위하여서만 의의가 있는 것이니 부에게서 떼어 놓으면 존재의 의의를 잃어 버리는 줄 안다. 변은 아마 한번도 여성을 독립한 존재로 생각하여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기실 변은 이렇게 명확한 부부관을 가진 것도 아니라, 그의 의식 중에 희미하게 있는 생각을 글로 써 놓으면 이러하단 말이다.
 
70
그러므로 변과 민과의 부부관에는 현수(懸殊)한 차이가 있다. 민은 어디까지든지 여성의 인경의 권위와 자유를 인정하여, 부부를 완전하 양개체(兩個體)의 완전한 결합으로 생각하므로, 부부 관계는 완전한 대등의 관계요, 독립국과 독립국 간의 관계로되, 변은 처를 부(夫)의 여러 가지 소유물(재산, 명예, 지식, 양복, 시계 등) 중의 중요한 하나로 생각하므로, 부부의 관계는 주정의 관계요, 종주극과 속국과의 관계라. 그러므로 변은 모친과 성재의 허락을 존중하되 민은 도리어 그것을 안중에 두지 아니하고 오직 성순의 허락을 중히 여긴다. 이제 만일 모친과 성재는 성순을 변에게 허락하고, 성순은 자기를 민에게 허락하였다 하면, 이에 성순의 소유권 문제에 관하여 대소송이 일어날 것이다. 성순은 모친과 오빠의 것이냐, 또는 성순 자신의 것이냐 하는 것이 그 쟁점이 될지니, 법정의 좌우에 늘어 앉은 변호사 제씨와 방청인 제씨는 응당 각각 자기의 의견을 따라서, 흑 좌, 흑 우 할 것이다. 다만 흥미를 감쇄하는 것은 이 사건의 원피(原皮) 양방이 각각 자기 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음이니, 성재도 성순은 확실히 장형(長兄)되고 호주되는 자기의 소유물이라 하는 판단이 있는 것이 아니요, 성순도 나는 오직 내 소유물이다 하는 판단이 분명치 못한 것이다. 그러 므로 이 사건은 분명치 못한 쟁점을 가지고 감정가 인습과 방편과 고집과 임시 임시의 단편적 생각을 가지고 진행할 것이다.
【원문】1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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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李光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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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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