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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척자(開拓者) ◈
◇ 8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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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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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8.1

 
3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같이 이 세상에는 괴로운, 슬픈 일이 꽤 많다. 청춘에 과부가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노년에 독자를 죽이는 것도 슬픈 일이지마는, 지금토록 부자로 있다가 갑자기 가난하게 되는 것도 꽤 슬픈 일이다. 많은 비복에게 옷과 음식을 주지 못하여 모두 내어 보내는 것도 슬픈 일이요, 손님을 환영하던 사랑문을 닫치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몇 달 전까지 제사 때나 잔치 때에 많이 모여들어 가장 친절한 체하던 친척과 오랜 친구가 차차 발을 끊는 것도 더욱 슬픈 일이요, 그러다가 명주옷을 입던 몸에 굵은 무명옷을 입게 되고, 반찬이 많아서 상이 좁은 것을 한탄하던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차차 줄어 들어 가는 것도 슬픈 일이요, 귀한 것 모르고 자라던 자녀들에게 결핍함을 깨닫게 하는 부모의 마음도 슬픈 일이며, 더구나 '내 집 보아라'하고 자랑하고 살던 큰 집을 남의 손에 내어주고 자그마한 집으로 옮겨 가지 아니치 못하는 것은 참말 슬픈 일이다.
 
4
이러한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 것은 가족 중에도 여자요, 여자 중에도 모친이요, 모친 중에도 자수 성가한 모친일 것이다.
 
5
성재의 모친은 과연 여장부였었다. 그 성격이 굳건하기로는 도리어 김참서 이상이었었다. 김참서가 무슨 일에 화를 내거나 실망한 때에는 부인이 도리어 참서를 위안하였고, 여간한 일에도 눈물을 내지 아니였다. 아마 성재의 강한 의지는 그의 모친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장부도 이번 사건 후에는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쾌활하던 용모에는 침울한 빛이 보이고, 얼굴에는 전보다 주름살이 더 잡힌 듯하였다. 별로 즐기지 아니하던 담배도 시작하고 가끔 정신없이 멀거니 앉았기도 하였다.
 
6
게다가 맏며느리는 성훈에게 소박을 받으며, 성순은 아무데나 좋은 서방을 얻어서 시집을 가면 그만이지마는, 성재는 이제는 실험도 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에 그의 심정이 아니 슬퍼질 수가 있으랴.
 
7
둘째 며느리도 이제는 나이 벌써 이십이니, 남편 그리운 생각도 있을 것이요, 어린아이를 안아 보고 싶은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데 약 이개 년간 성훈은 거의 한번도 그의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고, 혹 그의 모친의 책망에 못 이겨 그 아내의 방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사이에 뛰어나가고 말았다. 성훈이가 뛰어나가는 기색을 보고는 반드시 모친은 둘째 며느리 방에 가 보고, 가 보면 반드시 며느리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8
이 집으로 이사한 뒤에는 집이 작아서 서로 있게 되었으므로 더욱 자주 며느리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삼 일 전부터 성순이를 보내어 한자리에서 자며 서로 위로하여 주게 하였다.
 
9
일 주일 전에 성재의 재산은 온통 경매에 부함이 되어 사십 석과 한성 은행의 저금 이백 육십 원이 성재의 재산으로 남았다.
 
10
성재는 이전 행랑방이던 단간방을 치우고 거기다가 책자와 실험기구를 벌여 놓고, 그 팔각목종도 달아 놓았으나, 독서할 생각도 없고 실험할 생각도 없어서 어디로 갔는지 조반을 먹고 나서는 저녁때에 돌아왔다. 성훈도 이 집에 온 뒤로 이삼 차 들어왔으나 그 아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신도 벗지 아니하고 어디로 나가고 만다. 어디로 다니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디서 밥을 얻어 먹는지, 그것을 묻는 이도 없으매 아는 이도 없다. 그러나 의복을 갈아입을 때가 되면 하릴없이 들어와서 그의 아내가 지어서 다려서 개켜서 넣었다가 내어 주는 것을 입고 나간다.
 
11
이리하여 성재의 집에는 낮에도 모친과 며느리와 성순과 그 쾌활한 어멈이 있을 뿐이다. 그 어멈은 이 집에 있는지가 벌써 집여 년인데, 한 육칠 년 전에 중병이 난 것을 김참서가 약을 써 가며 치료하여 주었다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 때에 어멈은,
 
12
"저는 마님 모시고 있을 테야요, 마님께서 돌아가시면 마님의 묘 곁에 묻힐랍니다."
 
13
하였다. 이 밖에 작년 봄에 성순이가 어느 동무 집에서 얻어온 퍼피라는 얼룩 고양이가 있다. 그 때에 성순이가 영어를 배우다가 퍼피(강아지)라는 말을 고양이 새끼라고 잘못 기억하여서 이렇게 이름을 지엇던 것을 지금까지 그냥 부르는 것이다.
 
 
 

8.2

 
15
반이(搬移)한 후 얼마 동안의 성재의 집은 아래와 같다 ─ 모친은 종일 자기의 방에 홀로 있어서 담배만 피우고 가끔 기침을 하였으며, 그 때에 가 보면 대개 눈물을 흘리고 앉았었다. 그러나, 딸이나 며느리가 들어오면 얼른 눈물을 감추고,
 
16
"빨래 다 하였느냐?"
 
17
하고 이러한 말을 물었다.
 
18
그런 줄을 아는 성순이와 성훈의 아내는 반드시 얼른 뛰어 나와서 눈물을 씻었다.
 
19
성순은 그 모친의 실신하여 함을 걱정하여 몇 번 위로하려 하였으나 정작 위로의 말을 하려면 성순의 눈에 눈물이 고여 도리어 그 모친의 위로를 받았다.
 
20
"사람이란 굶어 죽는 법은 없느니라, 염려 말아라."
 
21
모친은 창가(唱歌)의 후렴 모양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자기가 무일물한 적빈에서 일어나 그만한 부명을 듣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매, 미상불 자기의 능력에 무슨 자신이 있는 모양이나, 그러나 자기의 남편이 이미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자기의 연령이 이미 쇠한 것을 생각할 때에 실망함도 없지 아니하였다. 다만 육십 평생에 분투하여 오던 그 기개가 아직도 남아서 지금이라도 자기의 손으로 능히 가도를 부흥할 수 있다고 자신하려 할 뿐이다.
 
22
성재가 날마다 아침에 나아가서 저녁에야 들어오는 것과, 그의 얼굴에 항상 우수가 있는 것을 볼 때에, 또는 성훈이가 일주일이나 돌아오지 아니하여 그의 아내가 공규(空閨)에서 혼자 우는 소리를 들을 때에, 아무리 장부다운 모친도 단상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때에는 간다 온다 말없이 참서의 무덤을 찾아가서는 한바탕 실컷 울었다.
 
23
모친 자기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성훈의 아내도 할 일이 없었다. 큰 집을 쓰고 부유한 살림을 할 때에는 무슨 일이 그리 많은지, 바쁘기도 바이 없더니, 집이 작아지고 생활이 구차하게 되매 손에 잡을 일도 없고 머리에 생각할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가족들은 다만 과거 일을 회상하고 슬퍼하기만 위하여 사는 것 같았다. 그네는 형제에 시량(柴糧)이 없음을 알되, 또 그것을 걱정은 하되 어떻게 하여야 자기네를 현재의 궁핍에서 구제할는지는 생각도 하지 아니하였다.
 
24
성순은 슬퍼하는 어머니와 낙심하여 하는 오빠를 보고 더 할 수 없는 간절한 동정을 일으키지마는 다만 그 뿐이었고, 성훈의 아내는 다만 청춘의 공방이 슬펐을 뿐이요, 일가의 곤궁에는 별로 감각함이 없었다. 모친은 일가의 곤궁도 알고, 그 곤궁을 벗어나야 할 줄도 알고, 벗어나려면 벗어날 듯한 자심도 있는 듯하지마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책도 없고 정견도 없었다.
 
25
딸과 며느리가 자기의 운명을 보지 못하는 대신에 모친은 그것을 분명히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운명을 벗어나려는 지혜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다만 운명의 손에 자기를 내어 맡기고, 한숨 쉬고, 눈물 흘리는데 이르러서는 세 사람이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네는 다만 과거를 회상할 뿐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는데─ 할 줄은 아나 '어찌하면 한번 다시 그러한 미래를 현출하여 볼까?' 하는 생각은 하여 보지 못한다. 그뿐더러 그네에게는 그러한 생각을 할 자격이 없다. 대게 그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으니까.
 
26
오직 늙고 충실한 어멈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저녁에 늦게 자기까지 잠시도 쉴 큼 없이 은혜받은 주인의 집을 위하여 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힘은 유력하기에는 너무 약하였다. 찬물에 걸레를 빨고, 물독에 언제든지 물을 채워 두고, 마루를 닦고, 때를 찾아 장독 뚜껑을 열엇다 닫쳤다 하고 나무 값이 비싼 것을 생각하여 나무를 절용하고, 양식이 떨어져 가는 것을 근심하여 자기가 먹는 밥의 분량을 줄였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랴.
 
27
김참서는 자기가 무덤에 들어갈 때에 자기가 자기의 가정에 주었던 기쁨과 희망과 활기와 활동을 온통 거둬 가지고 갔다. 다행히 집의 위치가 높고 남향이므로 성재의 서재로 된 전 행랑방을 제한 외에는 연일 호천기의 따뜻한 일광이 종일 비추었다. 그러나 그 일광을 향락할 만한 정신의 여유를 가진 자는 오직 퍼피라는 고양이 뿐이였다. 퍼피는 날마다 마루에 누워 편안히 자다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8.3

 
29
날마다 그 오빠의 동무가 되던 성순은 근일에 그 오빠가 집에 붙어 있지 아니하므로 큰 적막을 깨달았다. 그뿐더러 전과 같이 정다운 말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무슨 말을 물어도 대답도 잘 하지 안했다.
 
30
성재는 마치 성난 사람 모양으로 항상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번은 늦게 돌아온 성재에게 저녁 상을 내다 주며 (성재는 별로 안방에를 들어가지 아니하고 집에 오면 행랑방에 있었다),
 
31
"오늘은 어디 갔다 오셨어요?"
 
32
할 때,
 
33
"아무데도 간 데 없다!"
 
34
하며 밥을 두어 숟가락 뜨고는 왈칵 밥상을 떠밀었다. 그 때에 성순은 밥상을 들고 나오면서 울었다. 그 후에도 한번 성재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확실히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면서도 대답이 없었고, 또 한번은 '시끄럽다, 들어가거라!'하고 문고리를 건 적도 있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순은 혼자 울 뿐이다.
 
35
성재의 기분이 이러하게 되었으므로 모친도 다만 슬쩍 볼 뿐이요 성재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성재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그 오빠를 불쌍히 여김보다도 자기를 불쌍히 여겨야 하였었다.
 
36
이리하여 오빠가 있을 때에는 오빠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오빠가 나간 뒤에는 얼른 오빠의 방에 뛰어 들어가서 오빠의 의자에 앉아 오빠의 책상에 얼굴을 대고 엉엉 울었다. 성순의 생각에 오빠에게 버림이 되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할 때에는 흔히 민(閔)이 찾아왔다. 그러나 성순은 과도한 자기의 설움에 민이 오는 것도 그리 큰 사건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친절히 하여 주는 민의 위로를 받을 때에는 얼마큼 기쁘지 아니치도 않아서 가끔 자기의 슬픔을 잊고 두 세 시간이나 담화에 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여 덟 시경에 오빠가 나가고 자기가 오빠의 방을 치우고 한참 앉았다가 팔각목종의 시침이 아홉을 가리킬 때가 되면 민이 기다려지게 되고, 오후 한 시나 두 시쯤 하여 문에서 민을 전송하고 나면 서운한 듯한, 적막한 듯한 생각도 나게 된다.
 
37
그래서 방에 들어와 앉았다가 다시 들창 밖으로 민의 돌아간 방향을 바라보기도 하고, 혹은 민의 하던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도 하여 보고, 또는 그 이야기 중에 재미있던 구절을 혼자서 반복도 하여 보게 되었다.
 
38
그래서 민이 왔다가 가면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는 민의 자리에 가만히 손도 대어 보고, 살짝 올라 앉아 보기도 하였다. 일찍이 아니 그러던 것이 근래에는 혹 꿈에 민이 보이는 수도 있고, 그러할 때마다 반갑게 민과 악수를 하면서 평상시보다 자유롭게 민과 여러 가지 회화도 하였다.
 
39
이러하게 되니 성순은 오빠의 냉담함이 그다지 슬프지도 아니하고, 자기 가정의 현재의 비운은 결코 자기의 비운이 아니오, 자기에게는 특별히 광명 있는 희망의 전도가 있는 듯하였다. 그는 일기에 이러한 말을 쓰게 되었다 ─ '...... 오늘 M이 오셨다. 전보다는 이십 분이나 늦게 오셨다.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웃는 낯이 어떻게나 좋은 지,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전(全)씨가 함사과의 고소로 옥에 들어갔다가 정신병자인 것이 관명되어 일주일 만에 방면되었다는 말을 하시고 진정으로 동정하는 빛을 보이셨다.
 
40
그러나, 다만 제군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라, 반드시 무슨 소리가 들릴 것이니. 제군이여, 그 소리가 즉 새 생명의 심장의 고동이다. 그 소리가 비록 극히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무한히 커지려는 '힘'이 사무친 것을 아는 자는 알 것이다. 그 소리가 지금 비록 음부(音符)의 한 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차차 일절이 되고 이절이 되고 삼절이 되어, 마침내 일대 음보(音譜)를 성립하고야 말 것이다. 피아노의 제일 좌편의 첫 번 건(鍵)을 울릴 때에 그것은 극히 단조한 저음에 불과하지마는 다음 건, 다음 건, 연해서 울려 가는 동안에는 점점 제음이 되어, 마침내 우편 최종 건의, 백(帛)을 열(裂)하는 듯하는 최고 음에 달하고야 만다. 그러나, 한 건씩 한건씩 누를 때에는 아직도 단조에 불과하지마는, 양수의 십지(十指)가 눈에 보일 새 없이, 이리 치고 저리 치고 할 때에 오인(吾人)은 황홀한 대음악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군은 대 생명의 소리가 너무 미미하고 단조한 것을 한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미 소리 들렸으면 그것은 피아노의 제일 건인 줄을 알아야 한다.
【원문】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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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신보(每日申報) [출처]
 
  1917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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