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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개척자(開拓者) ◈
◇ 18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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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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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18.1

 
3
민(閔)은 오후의 사양이 잘 비치는 자기의 화실에서 화포(畵布) 앞에 앉았다. 금강산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금강십이제(金剛十二題)'를 그리려고 착수함이다. 지금 대한 화포 위에는 '가을의 만폭동(萬瀑洞)'이 나오려 한다. 민은 한참 물끄러미 화포를 쳐다보고, 눈도 깜박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하다가는 붓에 회구(繪具)를 찍어 가로 세로 화포에 바른다. 왼손에는 육칠병(六七柄) 넓적한 화필이 선형으로 쥐어 있고, 오른편 무릎 밑에는 화구함에 각색 기름 물감(유화구)이 가로 세로 누워 있다.
 
4
화포 위에 있던 민의 눈은 왼손의 붓으로 옮아 붓을 고리고 다음에는 화구함으로 옮아 물감을 고리고 다음에는 화포 위로 옮는다. 미끄러리는 듯이 소리없이 화포 위를 달아나고 달아난 뒤로는 그 뒤에 선이 남고 점이 남아 새로운 물상을 이룬다. 화포의 좌단에는 기암이 올올(兀兀)한 절벽이 반쯤 이루어지고 그 우편에는 무엇이 될는지 모를 선과 점이 착잡하게 늘어 있다.
 
5
이 때에 대문에서 '우편이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첫번 소리는 듣지 못하고 둘쨋번 소리에 민은 화필을 든 채로 뛰어 나갔다.
 
6
푸른 봉투에 넣은 편지를 받아 든 민의 얼굴에는 기쁜 웃음이 떴다. 민은 얼른 방으로 돌아와 화필을 화구 상자에 비스듬히 누여 놓고, 석양이 비추인 창을 대하여 앉았다. 우선 민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생긴다. 기쁘면서도 걱정을 섞지 아니치 못할 소용돌이가.
 
7
민은 물끄러미 보다가 봉투를 떼었다.
 
8
이렇게 썼다.
 
9
'일전 드린 글을 보셨을 듯, 회답 못 받는 편지를 쓰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올시다. 그러면서도 또 씁니다. 아니 쓰지는 못하여서도 씁니다. 가슴에 끓어 오르는 무한한 생각을 ○○께 말씀 아니 하면 뉘게나 하오리까. 제 기쁨을 어찌 저 혼자 기뻐하며 제 슬픔을 어찌 저 혼자 슬퍼하오리까.
10
제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 일이 또 생겼읍니다. 오는 십오일에는 기필코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아무리 반대를 하고 애원을 하여도 하니 들으십니다. 아마 우리(저는 처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씁니다. 이제는 불가불 ○○와 저와를 이렇게 부르게 하여야 하겠는고로)의 관계를 상상하여 아는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하루 바삐 결혼식을 하려는 모양이올시다. 연동 가는 것도 집에서는 기뻐 아니 하시는 듯하오나 그것까지 금하지는 아니하십니다.
11
어찌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읍니다.
12
오늘 연동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겠읍니다. 자세한 말씀은 그때에 드리겠읍니다.
13
가족의 눈을 속여 편지를 쓰려니까 마음대로 아니 써집니다. 이 편지는 연동 가는 길에 부치렵니다. 이만.
 
14
이월 십일 성순'
 
 
15
민(閔)은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멀거니 벽을 바라보고 한숨을 쉬었다. 과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16
성순은 지금 진퇴유곡한 처지에 있어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한다. 이것을 구원할 자는 오직 민밖에 없다. 그러나, 민 자신도 여러 가지로 공상은 하여 보았으나 구체적 묘안은 발견치 못하였다.
 
17
'십 오일, 이제 닷새......'
 
18
하고 민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다, 오일 이내에 무슨 조치를 하여야 한다. 삼월까지는 연기하여도 상관 없다던 성재가 이처럼 급하게 하는 것을 보건대, 정녕 성순이가 자기를 찾아오는 기미를 아는 것이다. 네 시에는 다섯 시까지 곡 한 시간만 회견하기로 작정은 하였으나 그래도 그렇게 되지 못하여 수차, 혹은 삼십 분 혹은 한 시간 늦어진 적이 있었다.
 
19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20
"네, 가셔야지요, 어서 가십시오."
 
21
이 말을 하고 나서도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어느 덧 십 분 이십 분은 지나가고 또,
 
22
"이제는 참 가야겠읍니다."
 
23
"아차, 늦었읍니다. 자, 어서 가십시오."
 
24
하고 둘이 다 일어나 선 뒤에도 서로 마주보는 동안에 십 분 이십 분은 어느덧 지났다. 이리하여 다섯 시반까지는 꼭 집에 들어가야 할 성순이가, 혹은 여섯시도 되고 혹은 여섯시 반도 되었으니, 눈치 빠른 성재가 의심하지 아니할 리가 없다.
 
25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요."
 
26
"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십시오."
 
27
하기는 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28
무슨 할 말이 많아서 그러한 것도 아니언마는 다만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시간은 이를 시기하는 듯이 장달 음을 하여 달아나는 것이다.
 
29
'알았으면 알았지!' 하고 민은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갔다 한다.
 
 
 

18.2

 
31
성순이가 오기까지 화포를 대하여 하였으나, 심서(心緖)가 산란하여 아무리 하여도 붓이 돌지 아니하므로 민이 화를 내어 화필을 집어 던지고, 화포를 한편 구석에 밀어 놓고,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앉았다.
 
32
오일 이내에 어찌할 방침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시원치 아니하므로 어느덧 생각하기를 그치고 멀거니 있을 때, 지나간 일개월 간의 자기의 생활이 파노라마 모양으로 민의 눈 앞에 떠오른다. 민은 그것을 없이하려고도 아니 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다.
 
33
맨처음 성순이가 자기 집에 찾아오던 광경이 나온다. 성순이가 대문 밖에 와서 어떻게 찾을 줄을 모르고 어름어름할 때에, 행랑 어멈이 웃으면서 자기에게 고하던 일, 자기는 화필을 든 채로 뛰어나가서 러고 낯이 붉어지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오던 일, 들어와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한참이나 말없이 우두커니 섰던 일.
 
34
민이 겨우,
 
35
"여기 앉으시지요."
 
36
할 때에 성순이가."
 
37
"여기도 좋습니다."
 
38
하고 방 서편 구석에 가만히 앉던 일, 성순이가 한참만에야,
 
39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 옳지 아니합지요?"
 
40
할 때에 자기는 대답할 바를 모르던 일, 그 모양으로 얼마 있다가 겨우 정신이 침착하여 자기가 '금강 십이제(金剛十二題)'에 착수한 것과 이것이 마음대로 되면, 동경 문부성 전람회에 출품할 것과, 대전 영향으로 화구 값이 고등하여 곤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 때에야 성순이가 화포 곁에 와서 자세히 그림을 보며,
 
41
"무슨 냄새가 나요."
 
42
할 때에 민이,
 
43
"그것이 기름 냄새야요. 그 냄새를 일생 맡으셔야 하겠읍니다."
 
44
할 때에 성순이가 낯을 붉히던 일, 성순이가 조그마한 회중시계를 내어 보며,
 
45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46
하고 일어나 갈 때에 겨우 용기를 내어 잠간 악수하던 일.
 
47
또 그 후 한번은, 민이 해금강의 절경을 그리느라고 정신없이 화필을 두를 때에, 언제 왔던지 성순이가 민의 등 뒤에 선 것을 보고 민은 깜짝 놀라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성순의 두 손을 꼭 쥐 던 일, 그때에 성순이가 잠간 자기의 얼굴을 민의 가슴에 대었다가 얼른 물러서던 일, 또 성순이가,
 
48
"어디 그려 모세요. 저는 구경할께요."
 
49
하여 자기는 한참이나 기운을 내어서 그리다가,
 
50
"성순씨가 곁에 계시기만 하면 암만이라도 그러겠읍니다 - 그리고 잘 그릴 것 같아요."
 
51
할 때에 성순이가 방긋 웃으면서,
 
52
"그렇겠읍니까?"
 
53
하고 자기를 보던 일, 그리고 얼마 있다가 성순이가,
 
54
"저도 그림 공부를 좀 해야지요?"
 
55
"왜?"
 
56
"그래서 그리신 그림을 알아보아 드릴 만한 힘을 얻어야지요?"
 
57
"비평도 해 주시고?"
 
58
"비평은 못하더라도 알아는 보아야죠."
 
59
"어찌해서?"
 
60
"그래야 아니 되어요?"
 
61
"무엇이?"
 
62
성순은 한참이나 있다가 가만히,
 
63
"아내가!"
 
64
하고 얼굴을 붉히더니,
 
65
"그렇지도 못하면 모두 무의미가 아니겠읍니까."
 
66
"무엇이?"
 
67
성순은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얼마 있다가.
 
68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명령을 어기고 사회의 도덕을 깨드리고."
 
69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70
"제게 그만한 자격이 있겠읍니까. 이해하여 드릴 것을 이해하여 드리고, 위로하여 드릴 것을 위로하여 드리고......"
 
71
"............"
 
72
"없지요? 저로 만족하시지 못하시겠지요?"
 
73
민은 대답할 말를 몰랐다. 성순은 한번 더,
 
74
"그렇지요? 제가 그러한 능력이 없지요? 저는 그런 줄을 잘 압니다. 저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밖에."
 
75
"한가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76
"저를 온통 드리는 것밖에......"
 
77
이렇게 말하던 일, 이 말을 들을 때에 자기는 부지불각에 눈물을 떨구던 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 한참 생각하다가, 민은 번쩍 눈을 떳다.
 
78
일찍 성순이가 헌번씩 앉았던 자리, 섰던 자리, 걸어다니던 자리애는 분명히 성순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까, 오일 이내에 절박한 일을 어떻게 조치하면 좋을까?
 
79
큰 비극의 장막이 열리려고 그 장막 끈이 움직일 듯 움직일 듯하는 것 같다.
 
80
아무려나 모든 일을 성순을 면대하여 토론하리라 하고 시계를 볼 때에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였다. 민은 일어났다.
 
 
 

18.3

 
82
양인은 한참이나 무언의 포옹 속에 있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아서 마주 앉을 때에는 양인의 눈에 눈물이 있었다.
 
83
민은 단도직입으로 성순에게 물었다.
 
84
"대관절 어찌 되었읍니까?"
 
85
"편지 보셨어요?"
 
86
"네!"
 
87
"놀라셨지요?"
 
88
"놀랐었지요."
 
89
"아마, 오빠가 제가 여기 오는 줄을 아는 게야요. 말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한 눈치가 보여요. 그래서 어저께는 저를 부르시더니 '오는 십 오일에 예식을 하리고 작정하였다. 이번에는 네가 아무러한 핑계를 하여도 아니 될 터이니 어서 시키는 대로 해라......' 그러셔요. 이제는 집에서 저를 몸쓸 계집애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요."
 
90
하고 눈물을 흘린다.
 
91
민은 무구(無垢)한 처녀가 자기를 위하여 고민하는 양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92
"성순씨!"
 
93
하고 불렀다. 성순은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놀래어서 고개를 들어,
 
94
"네, 용서합시오. 모두 제 죄외다."
 
95
"............"
 
96
"제가 성순씨를 사랑하여 드릴 권리가 없어요. 제가 사랑하는 것이 잘못이야요. 더구나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한 일이 잘못이야요. 그 때에 제가 그러한 말만 아니 하였더면 성순씨에게 이러한 슬픔이 있을 리가 없읍니다. 모두 다 제 책임이야요. 그러니까 용서하여 주십시오."
 
97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98
하는 성순의 눈은 여물었다.
 
99
"잊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지낸 일을 꿈으로 알아 주십시오."
 
100
"그러면?"
 
101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제 일은 조금도 염려 말으시고 그렇게 하십시오."
 
102
"그렇게 할 수가 있겠읍니까?"
 
103
하는 성순의 어조는 노기를 띤 듯하였다.
 
104
"부득이하니까."
 
105
"부득이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106
"그러면 달리 방침이 있읍니까?"
 
107
"지금토록 그렇게 생각하고 오셨읍니까?"
 
108
"지금토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지요. 그러나, 지금 생각하여 보니 그것이 잘못이야요."
 
109
"어찌해서요?"
 
110
"아니 그렇습니까? 위선 성순씨는 집을 배반하셔야지요?
 
111
어머님도 버리고 오라버님도 버리셔야지요? 그리고......"
 
112
"그것은 어느 어른이 시키는 것입니까, 또 그것은 벌써 결심한 것입니까. 애초부터 그러한 결심이 없었읍니까."
 
113
성순은 이제 울지도 아니하게 되고 정신이 주락(酒落)함을 깨달았다.
 
114
"그렇게 결심은 하였지요. 그러나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어요. 중요한 무엇을 등한히 한 것이 있어요. 실사회에 경험이 없으니까, 한갓 이상으로만 달아나고 실제를 잊어버렸어요."
 
115
"실제란 무엇입니까?"
 
116
"네, 말씀을 들읍시오...... 우리는 실제를 등한히 하였어요. 그것이 잘못이야요. 실제를......"
 
117
"글쎄, 실제가 무엇입니까?"
 
118
"글쎄, 말씀을 들읍시오. 가령 성순씨가 집을 배반한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119
하고 성순을 보았다. 성순은 숨결만 큰 따름이요 말이 없다.
 
120
민은 말을 이어,
 
121
"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122
"유(당신)을 따라가지요."
 
123
성순은 처음 민에게 대하여 이인칭의 대명사를 사용하였다.
 
124
"어디로?"
 
125
"아무데든지!"
 
126
"네, 그것이 이상뿐이란 말씀이외다. 첫째 사람은 경제를 떠나선 살 수 없지요."
 
127
"경제?"
 
128
"네, 경제! 사람은 경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이요."
 
129
"그런데?"
 
130
"그런데 우리가 만일...... 만일...... 이 상태로...... 만일 같이 된다 하면 사회는 우리를 버리겠지요. 성순씨의 집에서는 성순씨를 버릴 테요, 내 집에서는 나를 버리겠지요. 그리고 거의 모든 직업이 우리를 거절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지금 몇 학교에 다니는 것도 내어 놓아야겠지요...... 저는 실로 이러한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괴롭습니다마는 사실은 사실이지요. 엄연한 사실이야 어찌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무경험한 우리는 지금껏 이 사실, 무거운 사실을 잊었어요!"
 
131
양인은 침묵하였다.
 
 
 

18.4

 
133
경제! 이것은 진실로 성순에게는 의외의 문제였었다. 그러나, 성순도 이 간단한 경제라는 말의 무거운 압박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사상의 힘을 누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134
민은 성순의 말 없음을 보고,
 
135
"우리는 이 큰 사실을 등한히 하였읍니다. 등한이 할 수 없는 것을 등한히 하였어요."
 
136
"그러면 어떻게 하신단 말씀이에요?"
 
137
하고 성순은 민을 보았다. 민은 고민할 때에 으레히 그러하는 버릇대로 두 손을 두 무릎 위에 놓고 눈만으로 천정을 바로보다가,
 
138
"그러니까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오는 십 오일에."
 
139
"제가 아직도 처녀겠읍니까, 다시 시집갈 수 있겠읍니다."
 
140
"네? 그럼 처녀가 아니구?"
 
141
하고 민은 놀라는 듯이 성순을 보는 눈을 컸다.
 
142
"제가 처녀일까요?"
 
143
"아무렴, 처녀지요."
 
144
"어떤 정도까지를 처녀라고 합니까?"
 
145
민은 갑자기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유심하게 성순의 눈을 보았다. 성순의 눈에서는 일종 처창(悽槍)한 빛을 발하는 듯하다. 성순은 다시,
 
146
"네, 어떠한 정도까지가 처녀오니까?"
 
147
"한번도 남자를 접하지 아니한 여자를 처녀라고 하지 않아요."
 
148
"남자를 접하다 하면 어떤 정도까지?"
 
149
"한자리에서 잔다는 뜻이겠지요...... 성교를 한다는 뜻이겠지요."
 
150
"그렇겠읍니까, 그뿐이겠읍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해요. 저는 한번 마음을 어떤 남자에게 허하면 벌써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고 해요. 육으로 허하는 것은 다만 그 종속물에 지나지 못한다고 해요. 마음으로 허한 뒤에는 이미 육으로 허한 것이 아니야요?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올시다. 저는 벌써 시집간 여자예요. 그러니까 이제 다른 데 시집을 간다면 간음이 아니면 재가예요. 제가 이제 변씨에게 시집을 간다 하면 저는 이 고기 덩어리를 따로 떼어서 변씨에게 드리는 것이외다. 한번 (당신께) 드린 마음을 다시 찾을 수가 있겠읍니까."
 
151
하고 성순은 힐문하는 태도로 민을 보았다. 민은 성순의 정조관을 박박할 만한 논거를 얼른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린애 같던 성순이가 어느 틈에 이러한 조직적 의견을 얻게 되었는가 하였다. 성순은 얼굴이 붉게 되도록 흥분하여,
 
152
"좋습니다. 만일 저를 사랑하여 주시는 것이 불편하시거든, 불만족하시거든 만족하실 길을 찾으십시오. 제가 일생에 나아갈 길은 환합니다. 벌써 의심없이 확정이 되었읍니다. 저는 조금도 실망도 아니하고 ...... 네, 굳세게 살지요. 저는 저대로 살지요!"
 
153
하고 흑흑 느끼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성순의 머리에 꽂힌 얼레빗 등이 희박한 석양빛에 번쩍번쩍한다. 민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면서 성순의 하얀 목과 등을 보았다.
 
154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
 
155
민은 새로운 결심을 한 듯이,
 
156
"여봅시오-"
 
157
하고 불렀다. 그러나 무답.
 
158
"성순씨!"
 
159
"............"
 
160
"울음을 그리고, 말을 해야지요."
 
161
"............"
 
162
"자 고개를 듭시오."
 
163
하고 성순의 등을 흔들었다.
 
164
"말씀하세요."
 
165
"자, 바로 앉으세요."
 
166
"말씀하세요! 이러고도 듣습니다."
 
167
하고 성순은 민의 '머리를 들으세요' 하는 말이 어머니가 귀해하는 아기의 어리광을 듣는 듯하여 가만히 소리를 내어 웃었다. 민도 그 웃음 소리를 듣고 웃엇다. 둘이 외교적 단판을 하는 듯하던 기분이 없어지고 양인은 동시에 충풍같은 애정의 순미(醇味)를 깨달았다. 민은 감격에 못 이기어 일어나서 성순을 안았다. 성순도 돌아앉으며 민을 안았다.
 
168
성순의 민의 가슴에 안긴 귀는 민의 항진(亢進)한 심장의 고동을 들었다.
 
169
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170
"성순씨-"
 
171
"네!"
 
172
그리고 한참 침묵하였다. 그 이상의 더 말할 것도 없고 필요도 없었다.
 
 
 

18.5

 
174
"성순씨-"
 
175
하고 또 한번 불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하여 불러 놓고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성순도 처음에는 '네' 하고 말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이제는 그것을 기다리지도 아니한다. 다만 민은 '성순씨' 하고 부르면 그만이요, 성순은 '네!' 하고 대답하면 그만이였다.
 
176
그러한 간단한 문답이 넉넉히 양인의 무한한 의사를 소통한다.
 
177
민이 '성순씨!' 하고 뒷말이 아니 나오는 것은 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도저히 자기의 언어로 발표할 수 없음을 깨달음이다. 인류가 의사를 상통하기에 쓰는 유일한 방편인 언어는 극히 불완전하다. 일상의 평범한 사상과 감정은 십분 발표할 수가 있다. 하더라도 일보 심령적 경역에 들어서면 우리의 언어는 벌서 아무 능력도 없어지고 만다. 이 경우에 민은 가슴에 차는 생각을 통할 길이 없어서 다만 '성순씨!' 하고 부를 뿐이다. 민은 한번 다시,
 
178
"성순씨-"
 
179
하고 불렀다.
 
180
"네."
 
181
"확실히 성순씨가 여기 계시지요. 이것이(하고 한번 몸을 흔들며) 확실히 성순씨지요?"
 
182
"네."
 
183
"네, 성순씨지요?"
 
184
"네."
 
185
"어찌해서?"
 
186
"몰라요!"
 
187
"모르셔요?"
 
188
"몰라요!"
 
189
양인은 웃었다.
 
190
"성순씨-"
 
191
"네."
 
192
"왜 저를 사랑하세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취해서 사랑하세요?"
 
193
"............"
 
194
"네, 제게서 무엇을 취하십니까. 저는 재산도 없고, 명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게다가 용기도 없고, 아무 경륜도 없고 한데...... 암만해도 성순씨가 저를 잘못 보셨지요.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195
"몰라요!"
 
196
"몰라?"
 
197
"몰라요!"
 
198
"그러면 왜 사랑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사랑을 하세요? 이유도 모르고 일생을 허하셨지요?"
 
199
"제가 바가(馬痂)인가 보지요?"
 
200
"왜?"
 
201
"그 이유도 모르니까."
 
202
"............"
 
203
"정말 모르겠어요. 처음에 뵈올 때에는 좋은 어름이다 하는 생각은 있었겠지마는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저는 요구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하는 이유도 없고, 이러저러하다가 사랑하겠다 하는 조건도 없고...... 도무지 웬 까닭인지를 모르겟어요...... 그러니까 제가 바가지요!"
 
204
민은 아무 이유도 없고 요구도 없는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이 찔렸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하였다.
 
205
"그래도 무슨 요구가 있겠지요. 비록 이유는 없다 하더라도?"
 
206
"글쎄요...... 만일 무슨 요구가 있다 하면 그것은 어찌하면 (당신께) 기쁨을 드릴까, 용기를 드릴까 하는 것일까요?"
 
207
"뉘게? 뉘게 기쁨을 주세요?"
 
208
성순은 말없이 웃었다. 민도 웃었다.
 
209
"그러한 사랑을 변군에게 드릴 수는 없읍니까? 변군에게 드리시면 변군이 얼마나 기뻐할까."
 
210
"저도 그렇게 생각해 봤어요. 더구나-"
 
211
하고 (성순은 민이 기혼한 남자라는 말을 성재에게 들었단 말을 하려다가 그치고),
 
212
"그렇게 약혼을 한 뒤에는 그렇게 할 양으로 힘도 써 보았어요. 그러나 아니 되었어요. 힘을 쓰면 쓸수록 아니 되어요. 제 가슴에는 오직 한 분밖에 용납할 수가 없어요...... 한 분으로 꽉 찼어요. 암만 때려도 매일 수가 없고 잊으려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213
"글쎄.......... 그럴까."
 
214
"그렇게 생각 아니 하세요?"
 
215
"글쎄......"
 
216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이제 만일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 하면 간음이지요?"
 
217
"글쎄......"
 
218
"왜, 글쎄 글쎄 하기만 하세요? 그렇다 하십시오."
 
219
하고 성순은 고개를 들어 민을 본다. 민을 경정치 못한 듯이 눈을 감고 있다.
 
 
 

18.6

 
221
"아니야요! 확실히 저는 처녀가 아니에요! 저는 벌써 a girl 이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그렇지요? 그렇다 하십시오!"
 
222
"............"
 
223
"그렇다 아니 하십니까?"
 
224
민은 성순의 얼굴만 내려다본다. 민의 눈에는 고민의 빛이 있다. 성순은 물끄러미 민의 눈을 보다가,
 
225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대답하시거나 말거나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226
"만일 내가 성순씨와 혼인할 수가 없다 하면 어떻게 하셔요?"
 
227
"그러면 혼자 있지요."
 
228
"혼자 있어요?"
 
229
"예."
 
230
"언제까지나?"
 
231
"혼인할 수 있기까지!"
 
232
"영원히 없다 하면?"
 
233
"죽기까지!"
 
234
하고 성순은 좀 슬픈 빛을 보인다.
 
235
"죽기까지 혼자 있어요?"
 
236
"네."
 
237
"그리고 행복되겠읍니까? 그러한 비참한 일이 어디 또 있겠읍니까."
 
238
하고 한참 있다가,
 
239
"아무러한 불행도 아무러한 비참도 사랑을 버리는 불행과 비참에 비기면 그것이 무엇이겠어요? 저는 아직까지 결코 순순히 행복된 혼인 생활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여 본 적은 없어요. 저는 일생에 가정 생활의 맛을 못 볼 줄을 잘 알아요. 저는......"
 
240
"어찌해서?"
 
241
"부인이 계시니까."
 
242
하고 성순은 고개를 숙였다.
 
243
"만일 완전히 이혼이 된다 하여도?"
 
244
"이혼은 못하십니다. 그런 생각은 말으세요!"
 
245
"왜?"
 
246
"못하세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저는 사랑하여 드리지 못해요?"
 
247
"그것은 무슨 이유로!"
 
248
"무슨 이유로든지 못하세요!"
 
249
"어찌해서?"
 
250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제가 괴로워서 살지를 못합니다."
 
251
"그게 무슨 논리야요. 그런 논리가 어디 있읍니까."
 
252
"논리! 논리가 그렇게 중합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슨 논리인데요?"
 
253
"............"
 
254
"생각해 보세요. 이혼을 하시면 부인께서는 단정코 피눈물을 흘리실테지요. 혹 돌아가실는지도 모르지요. 한 사람의 피눈물로 자기의 기쁜 눈물을 사! 아이고 무서워 - 못합니다, 못합니다!"
 
255
하고 성순은 진저리를 친다.
 
256
"그러나 이혼 아니 하는 것이 나는 물론, 그 사람에게 행복 되겠읍니까?"
 
257
"그것은 모르지요?"
 
258
"내가 일생에 그를 돌아보지 아니한다 하면 민적상 나의 아내로 있다고 그가 행복되겠읍니까?"
 
259
"그것은 모르지요. 그 어른은 이혼되지 것보다 차라리 민적상으로 만이라도 민씨의 아내로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는지 알겠어요? 만일 그렇다 하면, 그를 이혼하는 것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못하셔요!"
 
260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그에게 줄 것이 둘 중에 하나인데, 즉 사랑을 주거나 자유를 주거나, 그런데 나는 사랑을 못 주니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가 새로 행복된 경우를 찾을 수 있는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261
"그러면 왜 지금까지 단행하는지를 못하였읍니까?"
 
262
"첫째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둘째는 그러할 용기가 없어서, 말하자면 세상이 무서워서, 또 셋째는 그가 말을 듣지 아니 듣는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네, 무슨 까닭이야요?"
 
263
"습관에 매여서 그렇겠지요. 자기인들 이렇게 무정하게 하는나를 사랑할 리야 있겠어요. 다만 이혼이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재혼이랑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나는 아니 들어야 된다. 이것이겠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도 될 수만 있으면 차라리 새로 행복된 경우를 찾고 싶어하리라고. 그도 청춘이야요, 지금 이십 삼세이야요. 왜 혼자 늙기를 좋아하겠읍니까. 다만 구습의 힘에 매여서 그러지요...... 오직 그뿐이야요.
 
264
성순은 다만 고개를 도리도리하였다.
 
 
 

18.7

 
266
"그것이 습관이거나 무엇이거나 그가 원통해 하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혼을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저는 다시 뵙지 않도록 하겠읍니다."
 
267
하고 성순은 길게 한숨을 쉬며 민에게서 돌려 앉는다. 민도 제자리에 돌아와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한 팔로 턱을 버티고 책상에 기대어서 연필로 붓장난을 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 붉게 창을 비치고 저편 구석에 놓인 만폭동 화폭(萬瀑洞畵幅)이 차차 거뭇거뭇하여진다.
 
268
"그러면 어찌 하실랍니까."
 
269
하고 장난하던 연필을 책상 위에 던지고 성순을 향하여 돌려앉았다. 성순은 화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다가,
 
270
"네?"
 
271
하도 다시 물었다.
 
272
"만일 성순씨께서 그러한 의견을 가지셨다 가면 장차 어찌 하시겠는가 말씀이야요."
 
273
"무슨 일이나 일합지요!"
 
274
"어떻게?"
 
275
"제 힘이 미치는 대로, 소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지. 그도 못하면 간호부가 되든지...... 일 없어서 못하겠읍니까?"
 
276
하는 성순의 구조는 마치 아무 근심없는 사람의 것 같았다.
 
277
"일생을?"
 
278
"그것이 운명이라면 일생이라도 합지요."
 
279
"운명!"
 
280
"참 운명이라는 말씀을 싫어하시지요?"
 
281
"우리에게는 운명이 없어요! 오직 우리의 힘에 달렸지요.
 
282
우리의 힘이 즉 운명이지요."
 
283
"그러면, 우리의 힘이 그렇다 하면 일생이라도."
 
284
하고 성순은 경련하는 듯이 픽 웃는다.
 
285
"그리고 저는 어찌하구요?"
 
286
"역시 일하시지요!"
 
287
"어떻게?"
 
288
"지금까지보다 더 힘 있게!"
 
289
하고 괴로워하는 민을 위로하는 듯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290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서로 힘껏 일하는 것이. 네, 그렇지요?"
 
291
민의 얼굴은 더욱 불편하게 된다. 성순은 슬쩍슬쩍 그 불편하여 가는 양을 본다.
 
292
"따로따로 떨어져서?"
 
293
"네. 그러나 정신으로만 합하여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294
저는 그것을 생각하고 기뻐해요."
 
295
하고 또 위로하는 듯이 웃는다.
 
296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297
하는 민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다.
 
298
"진정입지요!"
 
299
"성순씨는 아직 처녀십니다. 다 갈 알으시지마는 모르시는 것도 있읍니다."
 
300
"에그, 제가 무엇을 알아요?"
 
301
"옳습니다. 아직 성순씨는 처녀시니까."
 
302
성순은 자기가 처녀라고 부르는 것을 더 반대하려고도 아니 하고 다만 속으로만, (너는 무엇이라고 하든지, 천하 사람들이 다 무엇이라고 하든지 나는 이미 처녀가 아니요, woman이다. 민의 처다.) 하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든든하였다.
 
303
민은 성순이가 아직 육적(肉的) 요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재미롭게 여겼다.
 
304
"정신으로만 서로 합하면 만족입니까?"
 
305
성순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306
"정신으로 서로 합하는 이외에 이상에 또 합할 것이 있는 줄을 모르십니까."
 
307
"............"
 
308
"그것은 우정이야요. 정신으로만 합하는 것은."
 
309
"그러면 육으로까지 합해야 됩니까?"
 
310
"그렇지요. 거기 연예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완전한 결합이 끝나는 것이지요."
 
311
"육으로 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312
"중요하지요. 옛날은 육으로 합하는 것만을 전체로 알아 왔읍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다수한 사람들은."
 
313
"그럴까요? 저는 육이란 생각을 하고 싶지 아니해요. 그러한 생각을 하면 어째 신성하던 것이 더러워 지는 것 같아요."
 
314
"육이란 그렇게 더러운 것일까요?"
 
315
"어째 더러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316
"성순씬 그 몸을 더럽게 생각하십니까?"
 
317
"몸이야 더러울 것이 없지마는......"
 
318
"그러면 무엇이 더러워요?"
 
319
"사랑에 육이란 관념을 섞는 것이 더러운 것 같아요."
 
320
"그것이 일종 미신이야요. 공연히 육을 천히 여기는 것이.
 
321
우리의 정신이 신성한 것이라 하면 육체도 신성한 것이지요. 육만을 생각하는 것이 수적(數的)이라 하면 영만을 생각하는 것은 신적이야요."
 
322
"신적인 것이 아니 좋습니까?"
 
323
"아니, 우리는 사람이니까 인적이라야 하지요. 완전한 영육의 합치- 이것이 우리의 이상이지요."
 
 
 

18.8

 
325
성순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육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 죽을 알 수가 없었다. 사랑에 육이라는 관념이 아니 섞이지 못하는 것을 도리어 염오하게 생각되었다. 자기에게는 진실로 조금도 육에 대한 친구가 없고 다만 정신적으로 서로 사랑할 수만 있었으면 그것으로써 만족하리라 하였다. 물론 성순은 일생 민과 함께 거주하기를 바라지마는 그것은 육의 요구를 채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늘 마주볼 수 있으려고 함이다. 늘 보고 싶고 늘 그리운 육과 떨어져 있기는 참 고통이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잘 때나 깰 때나 늘 같이 있기만 하였으면 만족이요, 아무러한 다른 요구도 없다. 성순도 육교(肉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요, 육교의 쾌미라는 말을 아니 들음도 아니요, 자녀를 생산 하는 것이 육교의 결과라는 줄도 대강은 추측하여 안다. 그러나 그는 육교란 어떠한 것인가? 그 쾌미란 어떠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은 있으되 자기가 몸소 그것을 알아보리라 하는 요구는 그리 강하지 아니하고, 그러할 뿐더러 될 수만 있으면 그런 불결한 것은 일생에 보지 말고 지내기를 바란다.
 
326
더구나 자녀를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은 성순에게는 우스운 일이다.
 
327
그는 아직 오빠에게 대한 사랑의 범위 내에 있다. 그는 형매(兄姉)의 사랑을 불만족해 하면서도, 그래서 민이라는 다른 이성을 사랑하면서도 아직 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한다.
 
328
하물며 모(母)의 사랑은 상상도 못한다. 지금 성순이 품은 사랑은 마치 움과 같다. 아직 간(幹), 지(枝)의 분호가 없는 움과 같이 오직 그렇게 분화할 소질만 가진 것이다. 거기서 처의 사랑, 모의 사랑이 분화하여 나올 것인 줄은 성순 자기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 성순에게 육으로 합한다는 뜻을 알기를 바랄 수 없다.
 
329
양인은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였던지를 잊어버리고 묵묵히 앉았었다. 민은 자기의 앞에 앉았는 성순에게 대하여 불쌍한 생각이 났다. 꽃 같은 청춘, 무한히 행복되어야 할 첫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첫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경우를 불쌍히 여겼다.
 
330
"성순씨-"
 
331
"네."
 
332
"지금 행복되다고 생각하십니까?"
 
333
"행복됩지요."
 
334
"어째서?"
 
335
"그러면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
 
336
"불행하시지요."
 
337
"어째서요?"
 
338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셔서."
 
339
"............"
 
340
"전도에 이 보담 더한 불행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집에서도 버리고 세상에서도 버리고...... 버릴 뿐이면 좋지마는 온갖 치욕을 다 주고......"
 
341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342
"그러려니 오죽 괴롭겠어요?"
 
343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한 분만 아니 버리신다면 저는 행복되지요."
 
344
"그렇겠읍니까?"
 
345
"그래요."
 
346
"과연 그러실까요?"
 
347
"아니 그렇겠읍니까?"
 
348
"글쎄......"
 
349
"아마 저 때문에 괴로우시겠지요. 저는 행복되지만."
 
350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351
"아마 그러시겠지요, 저 때문에 세상에서 비난을 받으시고...... 저만 없으면 아무 비난도 아니 받으실텐데......"
 
352
"아니오......"
 
353
"그러면 저는 어찌하나?"
 
354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요."
 
355
"그래요, 그래요! 저 때문에 성공하실 것을 성공도 못하신다면 그런 죄가 어디 있읍니까.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356
하고 무릎 위에 낯을 대고 운다. 민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357
"여보시오!"
 
358
"그래요, 그래요......"
 
359
"말을 들으셔야지."
 
360
"그래요, 그래요......"
 
361
하고 몸을 흔든다.
 
362
"글쎄, 내 말을 들읍시오, 자 머리를 들고......"
 
363
"............"
 
364
"이제 우리가...... 내 말을 들으십니까."
 
365
"저는 단념합지요."
 
366
"글쎄, 내 말을 듣고...... 이제 우리가 잘 힘을 써서, 들으시지요?...... 그래서 큰 사업을 이루어요, 네. 무슨 좋은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게 전해주어요. 그네가 오래오래...... 가도록 이익을 얻고 행복을 얻고 자랑으로 알고 보배로 알 만한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네, 우리 둘 사이에 난 정신적 자녀를......"
 
367
"............"
 
 
 

18.9

 
369
"알아 들으셨지요. 우리가 그냥 아무 것도 아니 되고 말면 무의미하지마는, 그러한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 거기 모든 의미가 있지 아니합니까."
 
370
성순은 울음을 그치고 그냥 엎던 대로,
 
371
"그렇게 되었으면 좋지마는 그렇게 될까요?"
 
372
"되지요!"
 
373
양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여러 가지로 장래를 상상하여 보았다. 그 중에는 슬픈 장래도 있고 기쁜 장래도 있고 그것을 절충한 장래도 있었다.
 
374
성순은 시계를 내어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375
"벌써 여섯 점이올시다."
 
376
과연 실내가 어두워졌다. 성순은 벌떡 일어나면서,
 
377
"에그, 어쩌나. 또 한 시간이나 늦었네."
 
378
민은 아무 말 없이 성순만 본다. 가지 말랄 수도 없고 가라기도 싫다.
 
379
"가야겠지요?"
 
380
"가시지요."
 
381
"어째, 가야만 될까."
 
382
하고 성순은 웃는다.
 
383
"가셔야 되지요."
 
384
"가기는 싫은데...... 그래도 가야만 되지요."
 
385
"............"
 
386
"가야만 되어요...... 가겠읍니다."
 
387
하고 성순은 민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에 섰다.
 
388
"가시지요."
 
389
"네, 가겠읍니다."
 
390
하고 또 한번 인사를 하고 두어 걸음 문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또 섰다. 민은 그냥 앉은 대로,
 
391
"가시기 싫어요?"
 
392
"네."
 
393
"웬 일일까."
 
394
"몰라요!"
 
395
하고 양인은 웃었다.
 
396
"그래도 가야지요."
 
397
하고 성순도 또 한 걸음 문을 향하여 나가다가 또 한번 돌아선다.
 
398
"그런데 오래 이야기는 하였어도 아무것도 해결은 아니 되었읍니다그려."
 
399
"해결되었어요."
 
400
"예?"
 
401
"다 해결되었어요."
 
402
"어떻게?"
 
403
"어떻게 할 것을 전 다 작정하였어요."
 
404
"언제?"
 
405
"지금."
 
406
"여기서?"
 
407
"네."
 
408
"어떻게 하시려고."
 
409
"그것은 알으셔셔 무엇합니까...... 가겠읍니다."
 
410
하고 문고리에 손을 댄다.
 
411
"어떻게 하기로 작정하셨어요?"
 
412
하고 민도 일어선다.
 
413
"다 작정하였어요...... 갑시다."
 
414
하고 얼른 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민도 따라나갔다.
 
415
그러나 성순은 뒤로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문을 나서서 컴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있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416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417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원문】1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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