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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형의 집을 나와서 ◈
◇ 10. 또 한 가지 재앙 ◇
카탈로그   목차 (총 : 14권)     이전 10권 다음
1933.5
채만식
1
人形[인형]의 집을 나와서
2
10. 또 한 가지 재앙
 
3
노라는 슬그머니 겁이 나서 그가 권하는 대로 같이 대학병원으로 갔다.
 
4
"어데가 편찮으십니까?"
 
5
예진을 마치고 조금 기다리다가 다시 딴 방으로 불려 들어갔을 때에 간들간들 하게 생긴 의사가 노라를 앞에 걸터앉혀 놓고 묻는다.
 
6
노라는 그새 앓던 이야기를 자세히 하였다.
 
7
"음 음."
 
8
의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고 있고, 옆에 탁자에서는 학생이 필기하 듯이적고 있다.
 
9
별로 진찰 받아본 적이 없는 노라는 옷을 벗으려니 얼굴이 발개졌다.
 
10
의사는 노라의 앞가슴을 이리저리 타진을 한다.
 
11
그러고는 다시 청진기를 대고 들어 본다. 젖통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릴 때 간지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다.
 
 
12
의사는 진찰을 하면서 무어라고 알아듣지 못할 말로 중얼거린다. 옆에 앉은 학생은 자꾸만 받아쓴다.
 
13
의사는 노라를 돌려앉히고 앞을 보던 것과 같이 타진을 하고 청진기로 듣고 하다가 왼편 옆구리 결리는 데를 가지고 이윽히 진찰을 하였다.
 
14
숨을 들이쉬게 하고 두드려보고 내쉬게 하고 두드려보고 꼭 누르면서 아프냐고 묻고. ── 진찰이 끝이 난 뒤에 그는 친척인 줄 알았는지 혜경이를 보고 말을 한다.
 
15
"입원을 하시는 게 좋겠읍니다."
 
16
두 여자는 자지러지게 놀랐다.
 
17
이편이 놀라는 것과는 딴판으로 의사는 마치 밥을 먹고 나서 식은 숭늉이나 마시는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18
"늑막염인데요. 다니시면서 치료를 하셔도 괜찮겠지만 절대 안정이 필요하니까 입원을 하시면 더 도질 염려도 없고 또 시일도 빠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량해서 하십시요. 굳이 입원을 하시라고 권하지는 아니 합니다마는…… "의사는 할 말을 다 하였다는 듯이 옆에서 기다리던 다른 환자를 불러 앉힌다.
 
19
노라는 정신이 아득하였다. 늑막염이라니 웬말인가?
 
20
전에 중병을 알아보지 못한 노라에게는 그것이 마치 사형의 선고와도 같이 무섭게 들리었다.
 
21
혜경이도 벌써 다른 환자의 진찰을 하고 있는 의사와 문답을 하고 있다.
 
22
"입원을 하면 며칠이나 걸릴까요?"
 
23
"한 이 주일 ── 넉넉 잡고 삼 주일이면 됩니다. 지금 초기니까요."
 
24
"물을 뽑고 그러나요?"
 
25
"네. 아즉은 물을 아니 뽑아도 괜찮을 듯합니다. 초기는 물을 뽑느라면 되려 자극이 되어서 해로운 수가 있으니까요."
 
26
혜경이와 노라는 말이 없이 서로 바라보았다.
 
27
"입원을 하지…… 잘못하다가 더 도지기나 하면…… ""글쎄…… "노라는 입원을 하잔 말도 나지 아니하고 하지 아니하잔 말도 나지 아니하였다.
 
28
세상에 의지가지 없이 홀로 굴러다니는 몸이니 그럴수록 병을 속히 잡도리 하여야 할 것이요, 그러자면 입원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29
그러나 방금 수중에 돈 백 원이 있는 것을 가지고 입원을 해서 다 쓰고나 면 그 다음은 무얼 가지고 살아갈 도리가 없는 것이다. ── 그걸 가지고 입원 료가 자랄지도 모르지만.
 
30
"뒷일은 걱정 말구 입원을 해요. 병이 제절로 나아질 리 없구. 지금 서둘러야지."
 
31
혜경이는 뒤의 일은 담당할 것을 암시하면서 권고를 한다.
 
32
노라는 혜경이가 하는 말을 등댄 것은 아니나 어쨌건 병은 나아놓고 볼 일이라고 입원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33
혜경이는 노라의 쓰던 살림도 정리하고 또 입원중에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일단 돌아갔다.
 
34
노라는 의사가 적어 주는 쪽지를 가지고 회계로 서무로 찾아다니며 우선 보증금으로 돈 삼십 원을 내고 을등(乙等:입원료는 매일 삼 원씩)에 입원 수속을 마쳤다.
 
35
간호부를 따라 미궁 속 같은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 서이(西二)라는 채의 셋째 방으로 들어갔다.
 
36
노라는 내가 언제 이런 중병이 걸리어 생전에 구경도 하지 못하던 별천지에 들어와 있게 되었나 생각하니, 누가 실없은 거짓말을 한 것만 같았다.
 
37
방에는 침대가 여섯이 놓여 있다. 들어오는 문 좌우편으로 하나씩 놓이고네 개는 저편 뜰로 난 유리창 앞으로 놓여 있고.──
 
38
문 좌우편으로 있는 두 개는 비어 있고 저편에 있는 네 개도 환자는 셋밖에 없었다. 간호부가 갈려 들어와 맨 왼편으로 비어 있는 침대에 자리를 만들어놓고 노라더러 와서 누우라고 한다.
 
39
노라는 맘만은 싱싱한데 멀겋게 누워 있기가 멀쩡하여 침대 옆에 그냥 걸터 앉았다. 그러나 간호부는 기어코 뉘어놓고는 검온기를 겨드랑 밑에 넣어주고 맥을 보고 한다.
 
40
간호부는 한 스무 살이나 먹었을까 한데 코가 좀 낮은 게 흉이라 하겠지만 다른 데는 모두 예쁘장스럽고 상냥하게 생기었다.
 
41
"이 방 맡어보시지요?……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42
노라는 인사를 청하였다.
 
43
"아이구 별말씀을 다하세요. 제가끔 본분인데요."
 
44
말소리도 생긴 것과 같이 상냥하나 말이 좀 어눌하다.
 
45
"양친 다 계시우?"
 
46
"어머니만 계서요. 아래로 동생 하나 있고…."
 
47
"퍽 외롭겠구먼요. 누구시요?"
 
48
"심가여요. 심남식이라고 해요."
 
 
49
여자끼리는 친하기가 쉽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혜경이가 바스 켓 하나를 들고 왔다. 입원중에 소용되는 물건을 함께 자기 집 바스켓에 넣어가지고 온 것이다.
 
50
"어떻게 하려우?"
 
51
혜경이는 침대 옆 교의에 걸터앉자마자 불쑥 이렇게 묻는다. 노라는 무슨 말인지 뜻을 알지 못하였다.
 
52
"무얼?"
 
53
"현하고 화해 하구려…… "혜경이는 옆에서 아니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54
"나는 무슨 소리라고!…… 그건 왜 새삼스럽게?"
 
55
"약혼을 했는데…… "노라는 성미 급하게 혜경이 말을 막았다.
 
56
"나도 그건 알었어…… 그때 혜경이가 이야기하잖앴수!"
 
57
글쎄 그런데 말이야…… 오래잖아서 결혼식을 하게 된대요."
 
58
"하거나말거나……"
 
59
"글쎄 그러니 말이야…… 지금 오는 길에 바스켓을 가질러 집에 들렀다 가구한테 들었는데 현의 친구를 만나서 들으니까 이 가을 전에 결혼식을 하게 된다더라 구 그래…… 그러니 아무리 약혼은 했다지만 지금이라도 화해를 하면 늦진 않을 거야."
 
60
노라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61
그러나 그의 속은 결코 편안치 못하였다. 질투라고 이름지을 것까지는 없으나 필경 현이 다른 여자와 부부를 맺게 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섭섭하였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대번 가슴에 울리는 것은 어린아이들이다.
 
62
"계모! 계모!"
 
63
보통 여자의 머릿속에는 일종의 악(惡)의 화신(化神)으로 인상되어 있는것이 계모다.
 
64
"여자는 누구랍디까?"
 
65
자기의 귀여운 어린아이들의 계모가 될 여자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66
"모르겠어 그건…… ""학교 출신일 테지."
 
67
"그거야 그렇겠지…… ""서울 여잔가?"
 
68
"글쎄 통히 모르겠어…… ""어떻게 좀 알어보았으면 좋겠구먼."
 
 
69
"그거야 구더러 알어달라면 알어주겠지만 그건 알어서 무얼 해?"
 
70
"그냥 좀 알구 싶어서…… 애들 좀 보았으면 좋겠어."
 
71
노라는 갑자기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72
이렇게 병들어 누웠으되 친한 혜경이 이외에는 어머니는 시골에 있어 만나지 못하고 이 서울바닥에는 돌에도 나무에도 붙일 데가 없는 몸이다.
 
73
다만 있다면 아직 어리기는 하나 영원히 맺히어서 죽는 날까지 끊어지지아니하는 것은 아이들뿐이다.
 
74
"그거야 병중이고 하니까 내가 현더러 잘 이야기를 해서 데려다 만나게해 주리다마는…… 어떻게 할 테요? 현하구 화해합시다. 내 중매 서께. 호호!"
 
75
"누가 시집가나?"
 
76
"대관절 집에서 나와가지구 한 게 무어유?"
 
77
"세상도 알고 자유롭게 살기도 허구…… ""무척 자유롭게 사는구먼! 그래 필운동서 당하든 일을 못 생각해? 세상에 그런 것이 자유라면 나는 제발 그런 자유는 싫어…… 글쎄 저렇게 병까지 얻어놓았으니 어떻게 할 테란 말이야? 응? 직업 직업 하지만 직업이 얻어질 세 말이지…… 성희 되는 꼴 못 보았어? 돈 백 원 있는 것 병원에다 다 바치고 나면 그 담에는 무얼 먹구 살 테야? 겁이 나잖어? 아득허잖어?…… 아모리 사랑이나 이해가 없다더래두 이름을 부부라고 지어놓구 지내든 일 하고 그동안 세상에 나와 고생하든 일을 비교를 해봐요…… 내가 보기에는 집에서 보담 더한 창피, 더한 구속을 받는 것 같든데…… "노라는 대답할 말이 없다. 노라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 혜경이는 바싹 더 조르기 시작한다. ──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78
"자, 그렇게 고집을 쓰지 말구 현허구 화해를 해요. 인제 화해를 하면 현도 전 같지는 아니할 것이구…… 응, 노라."
 
79
혜경이는 말을 마치고 노라의 대답을 기다린다.
 
80
노라는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을 하여 보았다.
 
81
혜경이가 하는 말은 모두 절절히 옳은 말이다.
 
82
뜻은 크게 먹었다. 그러나 집을 버리고 나온 뒤에 지지리 고생을 한 것(노라는 그동안의 생활을 큰 고생으로 여겼다.)밖에는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다.
 
83
앞으로도 고생은 더 계속될 것이다.
 
84
그뿐이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그대로 참을 수가 있지만, 어린 아이들에게로 하루하루 더 끌리는 정과 어린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걱정과, 그리고 자식을 버리고 나왔다는 양심의 질책…… 이 세 가지 것은 아무리 스스로 맘을 돌려먹거나 행동을 변명하려고 해도 되어지지 아니하였다.
 
85
"어찌하면 좋을꼬?"
 
86
노라는 혜경이더러나 종시 현에게로 돌아가지는 아니한다고 고개를 흔들었어도 혼자 속으로 결정을 못한 채 망설이는 것은 이것이다.
 
87
혜경이가 돌아간 뒤에 노라는 생각하지 아니하려고 해도 자꾸만 염두에 떠오르는 현의 결혼 일건을 잊어버릴 양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한 방에 있는 환자들을 살펴보았다.
 
88
노라의 바로 옆에 누워 있는 환자는 머리 맵시가 일본 여자인 듯한데 한 사십 살 나보인다.
 
89
얼굴이 샛노란 게 무슨 병인지 모르나 몹시 중한 모양이다. 잠도 자지 아니하는데 눈을 딱 감고 누워서 숨만 가볍게 쉬고 있다.
 
90
그 다음이 절구통같이 몸이 크고 나이는 역시 한 사십 되어보이는 조선 여자다. 병은 그다지 중하지 아니한 모양으로 딸인지 동생인지 열 사오 세나 먹은 소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다.
 
91
그 다음으로 맨 끝에 있는 이십 세쯤 되어보이는 일본 색시는 안색은 매우 수척하였으나 그래도 일어나서 밖에도 들락거리고 옆에 있는 조선 부인네를 찾아온 소녀와 이야기를 하며 명랑하게 웃기도 한다.
 
92
노라는 도로 누워서 있노라니 이건 정말로 중병환자가 된 것 같아서 아예 맘이 좋지 아니하였다.
 
93
그리하여 그는 다시 일어나서 낯알음이나 해둘 겸 저편 환자들 있는 데로 갔다.
 
94
"어데가 편찮으시우?"
 
95
조선 부인이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한다.
 
96
"네…… 늑막염이래요…… 댁에서는 얼마 아니 되셨구만요…… 이이는 따님 이세요?"
 
97
"네."
 
98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걱정되겠군요…… 어느 학교?"
 
99
"정인학교 다녀요."
 
100
소녀는 퍽 수줍어한다. 노라는 마리아도 이만만 하였으면 이렇게 와서 병시 중도 들어주련만 하고 생각하니 그들이 더욱 보고 싶었다.
 
101
옆에 있던 일본 색시가 늑막염이란 말을 알아들었는지 먼저 인사를 한다.
 
102
"〈아나따 로꾸마꾸데스데네?〉 (늑막염 알으신다지요?)"
 
103
"〈하.〉(네.)"
 
 
104
"〈난데모 사라시가따와 와다시모 로꾸마꾸데스노〉 (그런 성싶어요. 저도 늑막염이에요.)"
 
105
노라는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왔다.
 
106
노라는 지요상 ── 그 일본 색시 ── 한테 늑막염에 대하여 의사와 간호 부가 설명해 주고 주의시켜 준 이외의 여러 가지 지식을 얻었다.
 
107
폐병으로 늑막염이 생기는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늑막염으로 폐병이 생기는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단순히 타박상이나 또는 심신의 격동과 피로에서 오는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치료는 극히 초기일 것 같으면 싯프를 하고 해열제를 먹으면서 안정만 하면 쉽게 나을 수가 있으나 치료의 시기를 놓치면 병의 뿌리가 깊이 들어가고 여러 가지 여병이 병발되어 생명을 잃게 된다는 것.
 
108
그리고 또 늑막염이라는 병은 본시 고약해서 한번 걸리면 치료로 나았다가도 조금 부주의하면 재발이 된다는 것. ── 노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부리나케 자기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지 요 상이 절대 안정이란 말을 여러 번 힘있게 말한 때문이다.
 
109
노라는 자기가 생각하여도 폐가 약한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또 근자에 타박상을 받은 일도 전연 없다. 그러면 필경 병은 집을 나온 뒤로 몸이 고달프고 정신상으로 여러 가지 격동을 받은 때문이다.
 
110
어쨌거나 기왕 병이 든 것은 불행이지만 그런 중에도 초기에 치료를 시작한 것이 천행이요, 또 이미 입원까지 한 터이니 잘 주의를 하여 하루바삐성한 몸이 되어 나가야 하겠다고 깊이 유념을 하였다.
 
111
병원에서 주는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 밤이 되기는 지리하였다.
 
112
잘 먹고 맘을 편안히 가지고 잠을 잘 자고 이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침대의 모기장을 내리고 누워서 잠을 청하였다.
 
113
그러나 잠은 곧잘 오지 아니하였다.
 
114
옆의 환자들한테는 끊이지 아니하고 가족과 친척이 드나든다. 그러나 노라는 혜경이가 돌아간 뒤에는 누구 한 사람 굽어다보는 이도 없다.
 
115
있으려야 있을 수도 없는 것이지만 이것이 병으로 입원을 한 첫날인가 생각 하니 외로움이 저으기 가슴에 사무쳤다. 남의사의 생각이 난다. 그가 만일 죽지 아니하였으면 이렇게 외롭게 병원에 두지 아니하고 자기가 병원에 데려다가 알뜰히 나아 줄 것이다.
 
116
병택이는 어디 가 있는지…… 알았다면 와서 위로라도 해줄 것이다.
 
117
옆의 침대에서 괴로운 신음 소리가 자주 들린다. 가족인 듯한 일본 여인과 쓰 끼소 이하는(시중 드는) 여자가 근심스럽게 시중을 들고 있다.
 
 
118
저 모양으로 병은 중하여지고 돈은 다 없어지도록 낫지 아니하면…… 그러고 필경 죽게 되면 혜경이나 옆에 앉아 지켜 줄 터이지…… 어린 아이들을 안아 보지도 못하고. ── 여기까지 생각하니 눈가가 매워 오고 세 아이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119
이튿날 아침에 구가가 과일과 강장음료를 사가지고 와서 여러 가지로 위로를 해주고 돌아갔다.
 
120
혜경이는 오후에 들렀다. (그는 노라가 입원하여 있는 동안 하루도 빼지아니하고 매일 한 번씩 들르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121
돌아가기 미안해하며 돌아가는 혜경이를 보고 노라는 어린아이들을 보게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122
나흘째 되는 날 저녁.
 
123
오후에 혜경이가 다녀가면서 내일 올 때에는 어린아이들을 꼭 데리고 온다고 한 날이다.
 
124
어서 밤이 깊고 다시 이 밤이 밝아 어린아이들을 만났으면 하고 생각 하니 초조하게 기다리느니보다 잊어버리고 잠이나 들었다가 해뜨는 반가운 아침을 맞이하였으면 좋겠는데 점점 눈이 맑아만 가고 잠은 오지 아니하였다.
 
125
어린아이들이 오면……셋이 다 오겠지……안나는 유모가 업고 송이는 혜경이가 손을 붙잡고 마리아는 걸어서……이렇게 셋이 들어오면 누구를 먼저 안아 줄까?……마리아가 크니까 먼저 뛰어오겠지…… 송이가 ' 엄마’ 부르고 달려들겠지…… 안나가 벙실벙실 웃으면서 두 손을 그 어여쁜 손을 내밀겠지…… 어느 놈을 먼저 안을까?…… 셋 다, 셋 다 한꺼번에 안지 멀…… 안나, 송이, 마리아…… 이 때 갑자기 간호부 남식이가 침대 모기장을 들치고 눈이 휘둥그래서 노라를 굽어다본다.
 
126
왜 저렇게 당황한가 하고 노라도 놀랐다.
 
127
"왜 그러세요?"
 
128
"왜 그러시요?"
 
129
"아니 지금 무어라고 혼자 이야기를…… "남 식이가 놀란 것은 다른 게 아니다. 본시 열이 있는 환자가 혼자 누워서 무어라고 사람의 이름 같은 것을 부르며 중얼거리니까 갑자기 열이 더 높아서 그런 줄로만 안 것이다.
 
130
노라는 너무 생각이 골똘하여서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그것을 비로소 깨닫고 그는 빙그레 웃었다.
 
 
131
이 웃는 것이 남식이에게는 더구나 놀랍던지 그의 눈은 더 휘둥그래졌다.
 
132
그러나 이어서 노라가 하는 말을 듣고 겨우 안심을 하였다.
 
133
"내가 헷소리하는 줄 알고 갑자기 열이 더하나 해서 놀랐수?…… 아니야, 우리 어린아이들 이름을 불러 보았어…… ""네."
 
134
남식이는 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135
"아이구! 나는 어떻게 놀랐는지!…… 저기서 맥을 보는데 혼자 무어라고 중얼중얼 하시는 게 꼭…… "두 여자는 서로 웃었다. 남식이는 저편으로 다시 가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모기장을 걷어올리고 침대 옆 걸상에 걸터앉았다.
 
136
"오늘 저녁에 번이요?"
 
137
"네."
 
138
"고단하겠수?"
 
139
"갠찮아요. 나레루 해서…… 잠이 아니 오세요."
 
140
"……아이들 생각이 나서…… ""애기 멫이나 되세요?"
 
141
"셋."
 
142
이렇게 대답을 하다가 노라는 지금까지 아이들 이야기를 한 것을 후회를 하였다.
 
143
입원을 한 뒤로 혜경이와 구가밖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데, 어린아이가있다면서 남편이 있을 텐데 남편도 어린아이도 통히 온 일이 없으니 응당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144
"왜 진작 좀 데려다 보시지."
 
145
"내일 데려온다니까…… 어머니 금년에 어떻게 되셨수?"
 
146
노라는 이렇게 화제를 돌리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내일 어린아이들을 반가이 만나기는 하겠지만, 그 대신 주위 사람들이 이상히 생각할 것이 걱정스러웠다.
 
147
"마흔여덟이세요."
 
148
"아직 과히 늙지는 아니하셨구만…… 동생은 무얼 허우? 학교?"
 
149
"다니다가 그만두었어요. 뒤를 댈 수가 있어야지요. 집에서 놀다가 요새는 인쇄소에 들어갔대요."
 
150
"인쇄소? 여자도 인쇄소에 다니나?"
 
151
"제본부래요. 책 접는 데…… ""응…… 멫 살인데?"
 
 
152
"열일곱 살이여요…… 키만 엄부렁하게 크고 철이 아니 나서…… "노라는 낮에 혜경이가 사다 놓은 참외를 내어놓고 벗겨 먹으면서 이야기를 더 계속하였다. 남식이는 처음에는 굳이 사양을 하다가 제가 노라도 벗겨주고 벗겨 먹고 한다.
 
153
"그러면 살림은 여기서 받는 것으로 해가겠구먼?"
 
154
"네…… 손님을 하나 치지만 남는 게 있어야지요."
 
155
"손님이 있수?"
 
156
"네…… 건넌방에…… 여학생인데 독방 값을 낸다지만 하나 두니까 두 나마나 해요."
 
157
노라는 그 말에 자기도 퇴원을 하면 거처할 데가 걱정스러웠다.
 
158
"나두 여기서 나가면 기식할 방을 구 해야겠는데…… "이렇게 혼잣말같이 하노라니까 남식이가 이상스러워하는 눈치가 완연히 보인다.
 
159
"어데 한 군데 조용한 집으로 알어보아 주."
 
160
기왕 내친 걸음이라 노라는 아주 내놓고 부탁을 하였다. 이렇게 우연히 이야기가 나온 것이 나중에 노라와 남식이가 주객이 되는 인연이 되게 된 것이다.
 
161
노라는 겨우겨우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는 여느때보다 일찍이 잠이 깨었다.
 
162
간호부 ── 그는 또 한 사람이 이곳을 맡았는데 나이 많아 보이고 ' 긴 상’ 이라고 들 불렀다 ── 그에게 부탁하여 아이들이 오면 주려고 과자와 과실을 사다 놓았다.
 
163
시간이 되레 뒷걸음질이나 하는 듯이 더디다.
 
164
오전에 오려나? 오후에 오려나?
 
165
아홉시 열시 열한시, 일 초 일 초를 헤듯이 기다려 오정이 쳐도 오지 아니하였다.
 
166
아침 열시쯤…… 혜경이가 동양은행에 현석준에게 전화를 걸고 만나러 가겠다고 하니까 오정 후에 자기 집에 나가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167
혜경이는 노라가 이른 아침부터 기다릴 줄은 아나 할 수 없이 오정 치기를 기다려 가지고 계동으로 갔다.
 
168
집 문앞이 마차바퀴로 어지럽게 패고 담 한 귀퉁이가 헐린 안으로 돌 다듬는 중국 사람들이 폭양에 낮잠을 자고 있다. 무슨 공사를 시작한 모양이다.
 
169
현은 볼 적마다 몸이 더 부대하여지는 것 같았다.
 
170
그는 누가 그렇게 알뜰하게 손질을 하여 주는지 ── 침모가 있으니까 불 편이야 없겠지만 ── 하얗게 빨아 다린 모시 고의적삼을 입고 마루에 놓인 등 의자에 누워 선풍기를 틀어놓고 송이를 데리고 이야기 동무를 하고 있다.
 
171
송이가 혜경이를 보고 기뻐 내달아온다. 그 아이는 언제나 혜경이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키는지 퍽 반가와한다.
 
172
"아주머니 온다."
 
173
"어이구 송인가? 그새 잘 놀았니?"
 
174
현도 일어나서 인사를 한다. 송이는 혜경이에게 안기었다.
 
175
"가역을 시작하셨어요?"
 
176
"네. 옆에 빈터에다 양관을 하나 짓느라고…… "주객은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걸터앉았다. 현은 혜경이에게 선풍기를 돌려놓아 준다.
 
177
"더웁습니다. 송이 내려앉어라, 아주머니 더 우신데…… ""두어 두세 요, 갠찮습니다…… 더운 때에 공사를 시작하셨어요?"
 
178
"허허 더우면 내가 더운가요?…… 좀 급해서…… "혜경이는 그 말의 뜻을 알아채었다.
 
179
약혼한 새 안해에게 선물로 양관을 짓는 것이다. 노라가 그렇게 방정을 떨지 아니하였으면 더욱더욱 좋게 살아갈 터인데 하고 생각하니 현의 아직 보지도 못한 새 부인에게 영락한 동무 노라를 위하여 가벼운 질투를 느끼었다.
 
180
"아이들이 보채잖어요?"
 
181
혜경이는 이렇게 말을 꺼내었다.
 
182
"네…… 그렇지만 별로…… "' 네’라고 해놓고 주저하다가 그렇잖다고 하는 것이 역시 그 사람다운 승벽이 보인다.
 
183
"실상 오늘 찾어와 뵈려고 한 것은 현선생님 혼자서 세 아이나 데리고 계 시기가 괴로우실 것 같어서 ── 허기야 댁에 유모랑 있으니까 범 연하 시기야 않겠지만 ── 저는 아직 어린것도 없고 해서 적적하니까 송이나 마리아나 하나 데려다가 당분간 보아 드릴까 하고…… "혜경이는 말을 하면서 현의 눈치를 보았다.
 
184
현은 벌써 알아채었다는 듯이 싱긋이 웃는다.
 
185
"네,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참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렇게 괴롬을 끼칠 수야 있습니까?…… 달리 도리를 채려 놓았으니까 일간 곧…… ""네? 어떻게?"
 
 
186
"시골로 내려보내겠읍니다."
 
187
"왜요?"
 
188
혜경이는 놀랐다. 자기가 놀란 것보다 노라를 위하여 놀랐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어린아이들이 멀리 시골에 가서 있는 것이 노라로도 가까이 두고못 만나서 애쓰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189
"왜라니, 아시다시피 홀애비가 자식을 셋이나 어떻게 기릅니까? 그렇잖아요?"
 
190
"어느 시골이여요?"
 
191
"그건 비밀입니다…… 팔락팔락 다니면서 만나게요?"
 
192
현은 통쾌하다는 듯이 다문 입으로 미소가 흘러나온다.
 
193
"아이구! 선생님조차 그러시면 어떻게 하세요? 두 분 중에 한 분이 좀 지셔야지요…… 선생님은 속이 넓은 남자가 아니세요?"
 
194
"글쎄 속이 넓기 아니라 태평양 같애도 어떻게 합니까? 나는 잘못한 게 없어요."
 
195
"글쎄 그러신 줄 알어요.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야속하게 굴지 마세요…… 실상 지금 늑막염으로 입원을 했어요."
 
196
현은 약간 안색이 변하다가 도로 냉랭하여진다.
 
197
"그것이 천벌이라는 것입니다…… 받어 싸지요…… 그러나 내가 줄랴 는 벌보 담은 늑막염쯤 앓는 것은 약과지요. 인제 보십시요마는 내가 프로그램을 정해논 것은 보기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질걸요."
 
198
"아이구 무서워라! 대체 그 프로그램 좀 구경하까요?"
 
199
혜경이는 짐짓 이렇게 농담하듯 하면서 웃기는 하여도 속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200
"그러십시요그려…… 첫째, 어린것들을 절대로 못 만나게 합니다. 그러자니까 아무도 몰래 시골로 보냅니다. 실상 그것들을 시골로 보내는 데는 다른 이유가 또 한 가지 있기는 하지요…… 여자가 아모리 착해도 계모 노릇을 하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또 어린것들한테도 재미가 없고요."
 
201
계모 밑에다가 두지 아니한다는 것이 노라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혜경이는 생각했지만 지금 현의 눈치가 벌써 오늘 청하러 온 것도 들어 줄 것 같지 않아 그는 애가 쓰였다.
 
202
"그 다음?"
 
203
"그 다음은 내가 결혼을 해서 제가 후회를 하고 도루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게 합니다."
 
204
"또 그 다음은?"
 
 
205
"이게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이혼을 해주지 아니해요, 이혼을…… 왜 그러느냐 하면, 이번에 내가 하는 결혼을 완전한 결혼으로 하자면 위선 이혼 수속을 마친 뒤에 해야 하겠지만 그러지를 아니한단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번 사람더러는 잘 알어듣도록 일러 두었으니까 문제가 없고…… 그러니까 나는 결혼을 해도 임노라라고 하는 계집은 죽는 날까지 현석준이의 법률상의 안해로 있어야 합니다."
 
206
"되려 좋답니다."
 
207
"흥! 좋을지 나쁠지 두고 보라십시오. 지금 법률이 남의 남편이 다른 여자를 얻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남의 안해로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거나 그런 짓은 못합니다. 했다가는 싫여도 형무소에를 가야지요. 형무소에 갔다가 나와서도 남편이 이혼을 아니하면 여전히 그 사람의 안 해로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앞으로 임노라라는 계집이 사내를 얻는다는 것은 형무소를 현주소로 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몇 번이고 그렇게 해서 감옥살이를 시키고래야 말 테니까요."
 
208
"아이구 그런 걱정은 마세요. 노라가 언제 그런 부정한 짓을 한 대나요?"
 
209
혜경이는 결이 나서 이렇게 대들었다. 그러나 현은 자신있게 코를 벌씸거 린다.
 
210
"염려 말라고요? 멋 염려는 아니합니다. 허허…… 그렇지만 인제 두고 보십시오. 저도 청춘인 바에야 무슨 수녀(修女)가 아닌 이상 배겨내는 장수 없 읍니다…… 거저 걸려만 드는 날이면 털끝만큼도 용서를 아니 할 테니까 그리 알고 있으라십시요."
 
211
"그런 일이 앞으로 있고 없고간에 그건 현선생께서 너무 맘을 모지게 잡수십니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다는데…… ""나더러 모지다고요? 글쎄 남들은 그렇게 비방하기도 쉽지요. 또 야비하다고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생각을 해보십시요. 그 철없이 울고 매달리는 자식들을 떼쳐바리고 나가서 아니 돌아오는 에미는 누구며 내 가슴에다가 불을 묻어준 건 누굽니까? 내가 어린것들 셋을 안고 앉어 얼마나 한숨을 쉬었는지 아십니까? 유모요? 다 소용없읍니다."
 
212
말 끝에 길게 한숨을 내어쉬는 현의 얼굴은 비창하였다. 혜경이는 현의 그 쯤 핍절한 말을 듣고 나매 새삼스럽게 노라가 잘못이니라 생각되고 현을 나무라고 싶지 아니하였다. 혜경이는 한동안 할 말이 막혀 잠잠히 있다가 온 일을 생각하고 겨우 입을 열었다.
 
213
"글쎄 그러니까 제가 지금 두 분의 잘잘못을 가릴려는 것은 아니예요…… 다만 병중에 어린것들이 그리워서 보고 싶어하니까 제가 옆에서 보기도 애 차라와 서 잠깐 데리고 갔다가 올려고 온 거랍니다. 그러니 너그럽게 생각 하시고 두어 시간 동안만 아이들을…… ""안됩니다."
 
214
현은 혜경이가 미처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딱 잡아뗀다.
 
215
"그건 절대로 안됩니다."
 
216
"글쎄 그러지 마세요! 그러시면 현선생님도 꼭같이 옹색하신 게 아니예요?"
 
217
"그래도 안됩니다."
 
218
"그 사람을 생각 마시고 제 얼굴을 보아서 이번만 승낙해 주세요…… 자, 송이 나허구 엄마한테 가자 응? 누나는 어데 갔지?"
 
219
그동안 저편 축음기 옆에 가서 혼자 놀고 있던 송이가 그 말을 듣고 달려와 서는 혜경이에게 착 안긴다.
 
220
"이것 보세요. 이렇게 에미를 기려서 이러잖어요?"
 
221
하는 혜경이의 말을 듣는지 못 듣는지 현은 송이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222
현의 눈에는 약간 이슬이 괴었다. 혜경이는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내리 졸랐다.
 
223
"네 선생님, 미운 사람보다도 이 어린애들을 생각하셔야지요…… 인제 시골로 보내면 어머니 얼굴을 영영 못 볼지도 모르는데 저이도 자라서 그것이 한 이 되잖겠읍니까? 좀 보세요, 오죽 가고 싶어합니까? 좀더 큰 아이면 제발 로라도 찾어갈 텐데 이렇게 어린것이 어데 엄마가 있는지도 모르고 가고만 싶어서……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혜경이는 목이 메어버렸다.
 
224
현은 말이 없이 돌아섰다.
 
225
한참이나 있다가 하인을 불러 유모더러 안나를 데리고 나오라고 하고, 또 동리 집으로 놀러간 마리아를 불러오게 하였다.
 
226
그러고 나서 자동차부에 전화를 걸고는 혜경이더러 다진다.
 
227
"꼭 이번 한번입니다. 제 소위를 생각하면 천하에 없어도 안 될 말이지만 실상 혜경씨가 말씀한 대로 영영 못 보게 될 텐데 어린것들이 일후에 한 이 되겠길래 보내는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데리고 가셨다가 한 시간 안에 혜경씨가 데려다 주십시오. 꼭…… 자동차는 그냥 세워두었다가 도루 타고 오시고."
 
228
"네. 참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지금이라도 노라가 와서 잘 못 했다고 빌면 용서하시지요?"
 
 
229
"그거야 글쎄…… 그건 그때 보아야 알지요."
 
230
유모는 안나를 업고, 하인 하나가 송이를 업고, 혜경이는 마리아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231
불덩이같이 내리쬐는 폭양에서 중국 노동자들의 돌 다듬는 소리가 졸리게 들린다. 보니 새까맣게 그은 윗몸뚱이를 그 따가운 햇볕에다 그냥 내놓고 쇠 마치 질을 하고 있다.
 
232
"누구는 저 집을 지어 주기 위해서 돈 몇십 전에 팔리어 더운 폭양에 저 고 된 일을 하는데, 그걸 마다고 딴 데 나가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게 대체 무슨 심사람!"
 
233
혜경이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234
가회동서 기다리는 자동차에 태워놓으니 마리아와 송이는 서로 좋아하면서 참새처럼 재잘거린다. ── 엄마한테 간다고.
 
235
병실문이 열리며 두 아이를 혜경이가 앞세우고 들어서자 노라는 침대에서 그냥 뛰어내려와 둘을 한데 그러안고 주저앉는다.
 
236
"아가! 송아! 마리아!"
 
237
"엄마!"
 
238
"어머니!"
 
239
말은 그뿐이다.
 
240
그러자 뒤이어 유모가 안나를 안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노라는 너무 기뻐서도 그렇거니와 안은 아이들을 놓지도 못하고 안나를 아니 받지도 못 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241
혜경이가 안나를 받아주니 그제야 두 아이를 떼어놓고 가슴에다 담쏙 안는다.
 
242
"안나."
 
243
노라는 부르면서 굽어다본다. 두 아이는 그동안 한두 번 보았지만 안나는 처음이다.
 
244
안나는 처음은 어리뚱하다가 깟깟이 어머니를 치어다보더니 비로소 알아보고는 어눌하게 "엄마."
 
245
소리가 나온다. 노라는 바스라지게 안으면서 입을 쪽쪽 맞춘다.
 
246
큰아이 둘은 양편으로 어머니의 허리를 껴안고 돈다.
 
247
"송이 인제는 아니 아프지?"
 
248
"응."
 
249
"마리아 유치원 방학했지?"
 
 
250
"응."
 
251
"송이 그새 울었나?"
 
252
"응…… 어마 힝…… "송이는 응석을 부린다. 저를 두고 어디로 가버린 노여움이다.
 
253
노라는 송이의 볼에 입을 맞추어 준다. 그러고는 한 팔로 등을 도닥 거리고 머리를 만지고 한다.
 
254
혜경이는 간호부에게 부탁하여 사진사를 하나 불러 달라고 하였다.
 
255
"사진사?…… 응. 이애들 사진 찍히게?"
 
256
노라는 대번 찬성이다. 그는 그냥 그저 찍히는 것으로 알았지 마지막 기념인 줄은 생각도 아니한 것이다.
 
257
사진을 박이고 돌아와서 노라는 몸이 피곤하여 안나를 안고 침대에 누웠다.
 
258
송이가 샘을 내어 저도 기어올라와서 드러눕는다.
 
259
현이 허락해 준 한 시간이 지난 지는 오래다.
 
260
혜경이는 현과 약속한 것을 그다지 구애하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이 것이 영영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봉별을 될 수만 있으면 시간을 늘려 주고싶었다.
 
261
'이 애들이 어디 시골로 가 있다면 서울 있어 가지고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덜 안타깝겠지?’
 
262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모든 근심을 다 잊고 그 어린아이들같이 사심없이 놀고 있는 노라를 물끄러미 보고 앉았던 혜경이는 이렇게 물어본다.
 
263
"요것들을, 요것들을, 아 요것들을."
 
264
노라는 안나의 볼도 빨아보고 송이의 머리도 쓰다듬고 또 머리맡에 서서있는 마리아의 손도 만져보고 하면서 말을 한다.
 
265
"……못 보다니, 못 보구 어떻게 살어! 응, 요것들을…… 내 강아지 내 새끼…… ""그래두 글쎄 서울 있어서 못 보는 것보다는 멀리 있어 못 보는 게 맘 성이 낫지 아니해?…… 단념이 되야서."
 
266
"그거야 그렇지만…… 왜? 시골루 보낸답디까?"
 
267
"응."
 
268
"왜?"
 
269
지금까지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이 놀고 있던 순간의 안온과 즐거움은 깨어졌다. 누가 빼앗아나 가는 듯이 안나를 바싹 그러안는 노라의 얼굴은 없는 핏기가 더욱 없어졌다.
 
 
270
혜경이는 그대로 속일 수 있는 때까지 속여둘 걸 공연히 말을 내었구나 하고 후회를 하였다.
 
271
"어린아이들이 계모 밑에 있으면 피차에 자미가 없을 것 같애서 제 철이 들 때까지는 시골에다 두겠답디다."
 
272
혜경이는 현이 말하던 다른 이야기는 쑥 빼고 이렇게만 대답을 하여 주었다.
 
273
"흥. 후취 얻어가지구 전실자식 미워하는 애비가 있단 말은 들었어도 후취 계집 얻기도 전에 전처 자식을 쫓아내는 데는 고금에 첨 듣는 말이다…… 잘 허는구먼…… ""아니야, 그건 노라가…… ""아니긴 무얼 아니야…… 속이 빤히 들여다뵈지."
 
274
혜경이는 현과 만나 하던 이야기를 전부 해버리고 또 한번 허실삼아 돌아가기를 권고할까 하다가 되레 노라의 반감만 더 살 것 같아서 말머리를 돌리려고 하였다.
 
275
"옆에 빈터에다 양관을 짓더구먼…… ""짓고 잘 살래지…… 자식 쫓아내고 새 집 짓고…… 시골은 어느 시골이 랍디 까?"
 
276
"모르겠어 그건. 물어보잖 앴으니까…… "혜경이는 거짓말로 둘러대었다.
 
277
"차라리 모르면 내 맘 편허구 좋지…… 할 대로 하라지…… 그런다면 내가 겁이 나서 엉엉 울까버? 나도 이를 갈아 붙이면 그만이야. 한번 다 내던지고 나온 바에야…… 참으면 그만이지."
 
278
"그렇게 맘대루 참나 볼까?"
 
279
"그걸 못 참어? …… 이를 부득 갈구 참지."
 
280
그러나 저녁때가 되어도 노라는 아이들을 차마 떼어놓지 못하였다. 아이들도 떨어지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281
안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유모에게 안기고 마리아는 그래도 철이 났대서 시키는 대로 추렷이 나섰으나 송이는 종시 매어달리고 떨어지지 아니 하였다.
 
282
"나 송이는 데리구 있을 테야."
 
283
노라는 매어달리는 송이나 진배없이 응석을 부린다.
 
284
"송이는 엄마허구 살지?"
 
285
"응."
 
286
송이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287
"그러지 말구 아이들하고 지금 같이 가구려. 집에 가서 있는다면 되려 병 원보 담 병 치료하기가 낫을 테니."
 
288
혜경이는 짐짓 한마디 비쳐 보았다. 그러자 노라가 무슨 말대답을 하려고하는데 간호부가 김혜경이라고 있느냐고 전화가 왔다 한다.
 
289
한참 만에 돌아온 혜경이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가 되고 코를 벌씸거린다.
 
290
현은 집에서 기다리다가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혜경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니까 필경 홧증이 나서 혜경이를 전화로 불러내었다. 그는 화가 난 김에 체모를 잊고 혜경이를 닦아세웠다. 그리고 당장 아이들을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자기가 병원으로 쫓아가겠다고 하였다.
 
291
혜경이는 억울했으나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화 풀이를 노라한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혼자만 속이 복작복작 괴었다.
 
292
"현이 아이들을 곧 보내지 아니하면 자기가 쫓아오겠다는구려…… 어떻게 할 테요?"
 
293
혜경이는 아직도 질린 기색으로 이렇게 불쑥 두런거렸다. 그러고 나서 노라가 무슨 속인지를 몰라하니까 전화로 나무람 듣던 이야기를 하였다. 노라는 현이 쫓아오거나 말거나, 아니 되레 그렇게라도 해서 틀개를 좀 틀고도 싶었으나 혜경이가 입장이 곤란하다고 말리는 바람에 그냥 지고 말았다.
 
294
다음날부터 노라는 궁금하여도 혜경이한테 어린아이들을 데려다 달란 말을하지 아니하고 소식도 묻지 아니하였다. 물론 시골로 내려보내는 것이 사실인지, 또 언제쯤 내려보내는지, 내려보내기 전에 한번 더 만나 보고 싶지아니한 것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혜경이가 웬만하면 눈치를 보아 이러고 저러고 해주려니 기다릴 뿐이지, 그의 사폐를 생각해서 자기가 말을 내지는 아니하였다. 그 대신 그날 박은 사진을 한 장은 크게 늘려서 틀에 넣어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또 한 장은 패스 집에 넣어서 품 속에, 이렇게 두어 두고 시시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295
일 주일…… 열흘…… 이 주일…… 이렇게 날은 지나갔다. 노라의 병은 의사가 처음 이야기한 대로 차차 차도가 있어 갔다. 옆구리가 결리던 것도 완구 히 희미해지고 식욕도 많이 돋아났다. 그래서 의사는 오늘 회진하러 왔던 길에 이대로 한 일 주일만 지내고 퇴원을 해서 집에 돌아가 정양을 해도 좋겠다고 말을 하였다.
 
296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 정원 어머니가 성희를 따라 문병을 왔다. 성희는 그동안 두 번이나 문병을 와주었었지만 정원 어머니는 처음이다. 성희는 보는 족족 얼굴이 더 수척하여졌다. 요전번에 노라의 문병을 왔던 길에 진찰을 해보니까 왼편 폐가 좀 나빠졌다고 하더라면서 몹시 낙심하였다. 그러고 의사는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편히 먹고 공기 좋은 데로 전지를 가서 자양 분 있는 음식을 가려 먹으라고 권고를 하더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297
"나는 내가 내 살을 한 점씩 한 점씩 저며 먹는 셈이야!"
 
298
성희는 비웃는 소리로 이렇게 쓸쓸하게 자탄을 하였다. 노라가 보기에는 성 희의 말씨와 얼굴이며 태도에는 폐병 든 여자가 괴로운 생활에 시달려 점점 탄력이 누그러지는 피로와 자기 자신에 대한 조소밖에는 아무런 기쁨이나 삶의 명랑성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299
"정원이 왔어요?"
 
300
노라는 침울한 화제를 돌리느라고 정원이 어머니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301
"예, 왔다가 바루 동경 갔어요…… 비행기 타구 갔디요."
 
302
정원 어머니는 그 말을 물어주기 기다리던 듯이 흠선히, 게다가 비행기 로간 것까지 덤쳐서 대답을 한다. 그러고는 이어 푸짐하게 말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온다.
 
303
"먼점 결혼식을 할래댔디요. 그런데 재환이가 이혼이 되디 않어서요, 그래 위선 비행기를 타고 동경으로 가서 한 삼 년 공부를 하다가 또 세 양국으로 간대요. 그렇게 몇 해 돌아다니고 와서 결혼식을 하갔대요…… 그리 고참 앓는 데 못 보고 간다고…… 바뻐서…… 안부나 해달랩디다."
 
304
"네, 잘되었군요."
 
305
노라가 마지못해 치하를 하니까 정원 어머니는 더욱 신이 나서 이실고실 이야기를 있는 대로 다 털어놓으려 든다.
 
306
"그리구 나는 집을 한 채 샀디요. 재환이가 사주었어요. 삼천 원 짜 리래 요. 그리구 시골세 다 서울로 이사를 했어요. 우리 아들아이는 금광을 하나 사서 그걸 하는데, 금이 수태 나온대요."
 
307
이야기를 하게 두어두면 도무지 한정이 없을 것 같아 노라는 짐짓 성 희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308
그렁저렁 일 주일이 다시 지나고 퇴원할 날이 박두하였다. 이 퇴원을 기회 삼아 노라는 몸을 고쳐 가져야 할 중대한 계제를 당하였다.
 
309
노라는 현에게서 떨어져나온 것, 그것만 가지고는 조금도 후회하는 생각이 들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을 생각하면 그것은 하늘과 땅에 용 납치 못할 큰 죄를 지은 듯이 진심이 아팠다. 그렇게 마음이 아플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기리어하는 정도 도저히 참기가 어려웠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 하는 길로 바로 옛집으로…… 염치도 자존심도 다 집어 내던지고 현이 도도하게 이죽거리는 것도 꿀꺽 참고…… 옛집으로 귀엽고 그리운 어린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하여 보았다. 실로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꿀안 같았다.
 
310
그러나 그렇게 하는 날이면 그때에는 현에게서 전과 같은 '인형’의 대접보다도 더 못한 '노예’의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이니, 그 일이 또한 차마 못 할 노릇이었었다.
 
311
'어떻게 하나?’
 
312
연일 노라는 이 생각으로 잠도 변변히 자지 못하였다.
 
313
더구나 인제 퇴원을 하면 당장 살아갈 걱정이 눈앞에 닥쳐 있는데, 그것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큰일이다.
 
314
이렇게 도리는 없고 두루두루 일이 막막하매 그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좋을 성싶었다. 따라서 죽은 옥순이의 마음과 처지가 어느 한구석은 짐작이 되는 것도 같았다.
 
315
마침내 퇴원하는 날이 왔다. 그는 역시 현에게로 돌아갈 것은 단념하고 기회를 보아 어떻게 악다구니를 해서든지 ─ 가령 그의 앞에 나앉아 칼을 가슴에 맞겨누고 들이대어서라도 ─ 어린아이들을 빼앗아 올 결심을 먹었다.
 
316
그것은 물론 오늘 내일로 될 일이 아니다. 또 어린아이들을 데려오면 길러 나갈 만한 준비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선 퇴원을 하는 대로 생활 방도를 무엇이 되었든지 차려놓고 나서 서서히 일을 시작할 요량을 하였다.
 
317
입원료로 도통 육십 원이 들었다. 그 밖에 입원하여 있는 동안에 돈이 한 십 원이나 달아나고 또 간호부들한테 치하로 몇 원씩 썼다. 남식이는 그것을 받지 아니하였다. 그는 그동안 노라와 자별히 친숙하여졌을 뿐 아니라 마침 자기 집 건넌방에 기식하고 있던 손님이 나가고 없어 노라가 그 방으로 가서 있게 말이 되었고 한 때문에 더욱이 노라가 퇴원하면서 치하로 주는 돈은 받기를 미안히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노라는 할 수 없이 옷감을 대신 끊어 주었다.
 
318
혜경이는 노라더러 퇴원하는 길로 자기 집으로 가서 있자고 청을 하였다.
 
319
그러나 노라는 혜경이의 남편 구재홍이가 겉으로는 흔연하면서 속으로는 좋지 않게 여기는 눈치를 알 뿐 아니라, 또 노라 자신도 구가를 끝끝내 허허 단심으로 대해지지는 아니하는 터인데 그의 신세를 진다는 것이 창피해서 혜경이의 권념을 물리치고 말았다.
 
320
노라는 보기에도 시장스러운 달랑 남은 돈 이십 원을 품에 품고 인력거를 탔다.
 
321
오래간만에 보는 바깥세상이다. 팔월 스무날께라지만 아직도 내리쏘는 햇볕이 아삭아삭한 모래 깔린 길바닥을 달구어 더운 기운이 후끈후끈 치달아 올랐다. 인력거 채장을 누르고 겅중겅중 뛰는 차부는 목덜미와 등허리에 땀이 샘솟듯 배어오른다. 노라는 그것이 보기에 민망해서 탄 것이 불안했다.
 
322
그러나 차부의 그다지도 땀을 흘리며 뛰는 거동이 무한히 세차고 건강하여 보여 그것이 퍽 부러웠다.
 
323
종묘 뒷길을 지날 때에 고궁 안으로 맘껏 우거진 녹음이 싱싱한 햇볕에 드리워 있는 것이 또한 건강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병원에 달포 가까이 누워 앓느라고 더위도 잊고 우거지는 녹음도 변변히 보지 못하던 노라는 불이 일 듯한 햇볕이며 세찬 녹음이 그와 같이 무긋한 힘의 약동을 묵시하는 성 싶어 자기 자신이 또한 그에 휩쓸려 오래 까라졌던 기운이 금시로 소생하는 것 같았다.
 
324
남식이가 가르쳐 준 대로 돈화문 앞에서 남쪽으로 동관을 내려가다가 중간쯤에서 서편으로 싸전가게가 있는 골목으로 한참 들어가노라니까 다시 바른 편으로 골목이 잇고, 그 골목 안에 깊지 않게 찾는 번지와 남식이의 문패 붙은 집이 나왔다.
 
325
남식이와 모습이 흡사한 중년 여인 ── 남식 어머니가 알은 체를 하면서 무척 반가이 맞아주었다. 남식이가 그 안날 기별도 했고 또 전에도 집안 식구 끼리 노라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남식 어머니도 미리 알고 있었다.
 
326
노라는 남식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우선 마음을 놓았다. 얼굴이 나이보다는 더 늙어 보이나 퍽 인자스럽고 그악스럽지 아니하였다.
 
327
집은 동향집이나 바로 앞에가 크고 드높은 집이 앞을 딱 가리어 좀 답답하였다. 집 안은 주인처럼 얌전스럽게 소쇄를 해서 정갈하고, 노라가 거처 할 건넌방은 들여다보니까 도배가 좀 낡기는 하였어도 그다지 누추하지는 아니하고 또 문이 앞뒤로 나서 퍽 시원해 보였다.
 
328
"오래 고생하셨다구요!"
 
329
남식 어머니는 노라를 건넌방으로 인도하면서 이렇게 상냥하게 위로를 해준다. 그도 첫눈에 노라가 귀엽게 보였던 것이다.
 
330
"네. 그렇지만 별로 고생은 아니했어요."
 
331
"아이 그래두 퍽 고생하셨겠어요, 이 더운데…… 그러나저러나 중병을 앓든 이가 이런 집에 오셔서 거처도 마땅찮고 음식도 변변찮을 텐데 어떻게 지내시나!"
 
332
"원 별말씀을 다 하세요! 제가 되려 폐를 끼치려 왔는데…… 참 한 집안 식구같이 여겨 주세요. 저는 외롭고 하니까 그렇게 허물없이 해주셔야 맘 이 뇌고…… ""그거야 그러다뿐이겠어요! 우리 큰애한테도 자세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 뭏든 이것도 다 인연인가바요!"
 
333
병원에서 한걸음 앞서 자기 집으로 갔던 혜경이가 그새 맡아 두었던 노라의 짐을 짐꾼 아이한테 지워 가지고 찾아왔다. 그래서 둘이 짐을 이리저리 별 러 놓고 나니까 노라는 갑자기 몸을 써서 그런지 노곤한 게 절로 드러누워졌다. 누워 보니 몸은 편안하나 마음은 불안하였다.
 
334
수중에 남은 이십 원! 돈이라야 겨우 이것인데 방값도 처음이니 미리 주어야 할 터, 약도 먹어야 할 터, 그러니 늘잡고 한 달은 지낸다지만 그 다음은?
 
335
뿐만 아니라 하루바삐 생활할 도리를 얻어놓고 현과 마주 붙어 싸워가면서 아이들을 데려와야 할 터인데……이렇게 생각하매 마음이 조급하기까지 하였다.
 
336
"아이들 시골로 보냈답디까?"
 
337
노라는 같이 나란히 누운 혜경이더러 물어보았다.
 
338
"아니, 몰라……혹시."
 
339
"내가 가서 뺏어와야겠어."
 
340
노라가 한참 있다가 불쑥 이런 말을 하니까 혜경이는 무슨 뜻인지 몰라 치어다 보기만 한다.
 
341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뺏어올 테야."
 
342
"무척 현이 내주겠구려…… 재판을 해도 질 것을 더구나 말로 해서?"
 
343
"재판은 할 힘도 없고 해야 질 테니까 아니해요. 그렇지만 내게는 법 보다도 더 무서운 게 있는 걸…… ""무엇인지 몰라도 나는 시언찮어!"
 
344
"여편네 악지가 어떤지 좀 보래지, 재갸도 내한테 복수한다면서? 그렇지만 나는 복수니 그따우 수작은 아니할 테야. 자식만 뺏어올 테야. 영 아니 내주면 피라도 흘리고 목숨을 내놓고라도 겨룰걸."
 
345
노라의 병으로 창백해진 얼굴에는 살기가 떠올랐다. 혜경이는 그것이 몸에 해로울까 염려되어 흥분하지 말고 우선 몸이나 충실한 뒤에 차차 어떻게 하든지 하고 다독거렸다. 노라도 저으기 수그러는 지나 "그러 자니 무슨 짓이라도 해서 먹고 살 도리를 마련해야겠어."
 
346
이 말을 다부지게 하였다.
【원문】10. 또 한 가지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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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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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7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