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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형의 집을 나와서 ◈
◇ 11. 전락의 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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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5
채만식
1
人形[인형]의 집을 나와서
2
11. 전락의 길로
 
3
앞 뒷문으로 마주치는 시원한 바람에 노라는 누운 채 잠이 들었다가 석양 때 에 깨어났다. 혜경이는 어느 겨를에 살며시 가버리고 없다.
 
4
여름날의 석양은 고요하다. 몇 집 건너서 값 헐한 레코드 소리가 새 졸음이 오게 감감히 들리어온다.
 
5
좁다란 뜰에 장독대가 있고 그 좁은 옆을 비집고 조그마한 화단이 있다.
 
6
화단에는 백일홍이 한창 어우러졌고, 도라지는 망울을 맺고 있다. 국화 화분이 두어 개나 장독대로 올려놓여 있다.
 
7
모든 것이 살림 차림새가 오밀조밀하여 이 집안 사람들의 마음의 여유를 보이는 것 같다.
 
8
남식 어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을 짓는지 가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9
조금 있다가 대문간에서 저벅저벅 사람 걸어 들어오는 소리와 동시에 "어머니."
 
10
하고 어리광 섞여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제본소에 다니는 남식 이의 동생 남수가 돌아온 것이다. 남수라는 이름까지도 노라는 안다.
 
11
"오냐, 인제 오니?"
 
12
어머니가 대답하는 소리다. 노라는 남의 인자스러운 어머니와 딸을 보니 갑자기 시골 어머니 생각이 불현듯이 난다.
 
13
"저녁 멀었수?"
 
14
"좀 멀었다."
 
15
"흐응, 배고파!"
 
16
"오냐, 배고프겠다. 조곰만 참어라."
 
17
"참 어머니, 저게 웬 구두야? 아! 저 언니가…… 온다든…… "그는 비로소 노라가 벗어놓은 구두를 발견한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컸다.
 
18
"쉬, 이년! 그렇게 떠들지 마라. 손님이 주무신다."
 
19
자박자박 소리가 나더니 그가 앞문 앞으로 와서 꺄웃이 굽어다보다가 일어나 앉은 노라와 마주쳤다.
 
20
무렴해서 혀를 날름하고 고개를 숙여버린다.
 
21
"들어오우."
 
22
노라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23
"네가 그예 손님 잠을 깨놓았구나!"
 
24
"아니예요. 발써 잠이 깨었읍니다…… 들어와요, 응."
 
25
"들어가서 인사나 여쭈어라."
 
26
남수는 들어와서 한편 구석에 어리고 앉는다. 모습은 남식이같이 어머니를 닮았으나 그들보다는 영악하게 생기었다. 그러나 안색은 좋지 아니하였다.
 
27
"편히 앉어요. 더웁지요?"
 
 
28
"갠찮아야요."
 
29
"멫시에 갔다 멫시에 돌아오우?"
 
30
"일곱시에 갔다가 다섯시에 파해요."
 
31
"아이구! 퍽 고단하겠수? 어느 인쇄손데?"
 
32
"고려인쇄소예요…… 관철동 있는."
 
33
"여자들도 많수?"
 
34
"그럼요. 사십 명이나 되는데."
 
35
"모다 처녀들인가?"
 
36
"아니요. 어머니 같은 이두 있는데."
 
37
"어떻게 해야 들어가나? 일이 까다럽소?"
 
38
"아니오. 퍽 쉬어요. 기계에서 박어 올려온 것을 접는데 아주 쉬어요."
 
39
"우리 같은 사람도 가서 허면 되나?"
 
40
"아이그 참."
 
41
남수는 노라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웃는다. 그러나 노라는 결코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다.
 
42
"나 거짓말 아니우. 정말이야…… 나도 좀 들어갔으면 좋겠어."
 
43
"정말 그러세요? 나 그럼 주임더러 이야기해 보아요?"
 
44
"정말…… 좀 해봐요."
 
45
"그렇지만 되야두 곧은 안될 거야요."
 
46
"응, 그래도 좋아…… 이야기해 봐요, 응."
 
47
남식 어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하고 와서 굽어다본다.
 
48
"원! 애들더러 해봐요가 무엇이유? 해라하지…… 저년은 그냥 듣고 있어!
 
49
너도 언니라고 그래, 응. 네 성도 언니라고 그러니."
 
50
"아이구! 안 그러면 어떤가요. 아무래도 좋지요."
 
51
노라는 사양은 하였으나 세세한 데까지 ── 더구나 오는 첫날부터 이렇게 알뜰히 맘 써주는 것이 기뻤다.
 
52
그리하여 목전에 크나큰 걱정이 닥쳐는 있으나 그새까지의 정원네와 지내던 서먹서먹하고 둥둥 뜬 생활보다는 안존하고 감칠성 있게 정이 끌리었다.
 
53
저녁 먹을 때에 남식이도 왔다. 그는 오늘이 번날이지만 노라가 처음 옮겨오고 해서 잠시 다니러 온 것이다.
 
54
넷이 둘러앉아 남식 어머니가 솜씨껏 장만한 저녁을 먹고 나서 남식 이 는바로 병원으로 돌아가고 노라는 남수를 데리고 근처 약국에 가서 지네 말린것을 사왔다.
 
55
병원에 있을 때에 같이 있던 신장염 앓는 부인도 그런 말을 했고, 구가도 그랬고, 오늘 남식 어머니도 역시 늑막염 ── 내종 ── 에는 닭에다가 지네를 넣어 삶아먹으면 씻은 듯이 낫는다고 하여 시험삼아 먹어보려고 한 것이다.
 
56
닭은 될 수 있는 대로 묵은닭이 좋대서 이튿날 남식 어머니가 일부러 장에까지 가서 닭을 사서는 아주 말쑥하게 잡아까지 가지고 왔다.
 
57
달여 가지고 먹으려니까 그 흉헙게 생긴 지네가 방금 입으로 기어 들어오는것같이 질리기는 하였으나 금계랍을 맨으로 먹는 셈 치고 벌컥벌컥 마셨다.
 
58
그 뒤로 사흘에 한 마리씩 지네를 넣어서 삶은 닭물을 계속하여 먹은지 보름이 되었다. 이 보름 후에 노라는 기적 같은 기쁨을 맛보았다.
 
59
그것은 병이 병원에 삼 주일이나 누워 있는 동안에 나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은 때문이다.
 
60
효과는 물론 그 약에 있다고 믿었다.
 
61
혜경이 같은 사람은 당초부터 그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노라가 그 처럼 병이 급속도로 회복되는 것을 보고는 두말 더 아니하고 기뻐만 하였다.
 
62
인제는 병중에 있던 증세가 거진 다 없어졌다. 퇴원할 때까지도 몸을 조금만 무리하거나 애를 쓰면 열이 오르고 옆구리가 결리고 하던 것이 아주 없은 듯이 개어버렸다. 구미도 훨씬 당기고 얼굴에 화색도 돌았다.
 
63
인제는 몸도 이만큼 성하게 되었으니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자리를 구해 야할 판이다.
 
64
더구나 그동안 절약해 쓰느라고 하기는 하였지만 이십 원 돈에서 십원을 우선 주인에게 주었고, 나머지가 십 원이었었는데 약을 먹느라고 반이 없어졌다.
 
65
오 원이 수중에 남아 있다. 이 오 원을 손에 들고 바라볼 때에 노라는 다뿍 배 주린 사람이 밑바닥에 한 숟갈쯤 남아 있는 밥그릇을 대한 때 같은 시장하고 한심함을 느꼈다.
 
66
시험삼아 남수더러 가끔 물어보기는 하나 그것을 믿고 천연세월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되기만 한다면 처음에라도 눈치 빠르게 잘만 서두르면 한 달에 이십 원은 받을 수 있다니까 일이 수나로운 깐으로 보아 우선 괜찮겠지만 미덥지 아니한 것을 믿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67
혜경이도 무한 애를 쓰는 눈치다.
 
68
그는 어디 사립보통학교 교원 자리를 얻어보든지, 그렇잖으면 은행이나 가정교사 자리를 물색하는 모양이나 그런 것이 곧잘 걸리지 아니하였다.
 
69
그리고 가정교사는 노라가 지금보다도 더 궁하여지면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필운동의 일을 생각하여 그다지 내키지 아니하였다.
 
 
70
구월달로 들어서서도 열흘이 초조한 중에 지나갔다.
 
71
노라는 아침부터 침울하여 앉았는데 바스켓을 든 여인 하나가 "화장품 사시오."
 
72
하고 들어선다.
 
73
화장품이야 그런 사람의 것이 아니라도 사려면 상점에 좋은 것이 많지만 노라는 비누 한 개를 사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묻고 나서 그를 돌려 보낸 뒤에 이 날 온종일 궁리에 골몰하고 밤에도 편히 잠을 자지 못하였다.
 
74
이튿날 아침에는 일찌기 쓰던 손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75
서울거리에 화장품 행상하는 여자가 한 사람 더 늘었다.
 
76
얼굴이 갸름한 게 해맑아 신경적이고 날씬한 코가 준수한 게 여왕같이 노블한 때묻지 아니한 여인이다. 옷이 비록 값 헐한 감이요, 얼멍얼멍한 가제 양말에 운동화를 신었으나 어딘지 범키 어려운 용모이면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노라다.
 
77
돈 오 원을 가지고 어제 만난 그 여자에게 배운 대로 화장품 제조소에 가서 다 팔면 십 원어치의 정가가 붙은 물건을 산 것이다. 이것을 모조리 팔 기만 하면 동갑장사다.
 
78
노라는 손가방에 물건을 넣어가지고 도가집 문을 나설 때 발길이 저절로 멈추어졌다.
 
79
"직업은 신성하다."
 
80
발길을 멈추고 서서 차마 거리로 나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노라는 이렇게 격려하였다. 아니 격려라는 것보다 속이었다.
 
81
그는 부끄러웠다. 그리고 창피하였다.
 
82
다른 사정은 다 젖혀놓고 변호사 현석준의 안해요, 현재는 동양은행의 지배인 현석준의 역시 안해이었던 임노라가 화장품 장수로 나섰다는 것이 남이 부끄러웠다. 이 부끄러움을 속이려고 전에 누구에게선지 얻어 들은 "직업은 신성하다."
 
83
를 속으로 외친 것이다.
 
84
그러나 그는 어째서 직업이 신성한지 모른다. 생각에 먹기 위하여 직업을 가지는 것이 신성하고 아니하고가 없을 것 같았다.
 
85
그렇지만 남이 한 말이니 그대로 둘러대자는 것이다.
 
86
노라는 길로 나섰다. 앞에서 오는 사람, 뒤로부터 오는 사람, 모두가 아는 사람인 것만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급기야 대하고 보면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 사람들이 모두 "화장품 장수!"
 
 
87
하고 입을 삐죽거리는 것 같다.
 
88
어디 이마에다 화장품 장수라고 써붙인 바 아니요, 단지 손가방을 들고 체조 시간에 나선 시골 보통학교의 여훈도처럼 가제양말에 운동화를 신었을 뿐인데 그것을 사람들은 화장품 장수로 알아채는 것이 이상하였다.
 
89
그러나 노라는 그 사람들 중에 가령 노라를 화장품 장수로 알았다면 그것은 화장품 장수 치고는 드문 얼굴이라는 생각으로 치어다보는 줄은 알지 못 하였다.
 
90
노라는 혜경이를 찾아갈까말까 하고 망설였다.
 
91
설마 혜경이에게도 물건을 팔아 달라고 찾아간 것이 아닌 줄은 저편에서 알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다. 아주 영락이 된 것 같아서 부끄럽다. 더구나 혜경이는 전날에 도리어 이편에서 뒤를 거들어 주려던 사람이요, 구가는 어쨌거나 현의 수하로 있던 사람이다.
 
92
그런데 지금 와서는 처지가 아주 바뀌었다. 그러니까 더구나 창피하다.
 
93
그러나 한 가지 혜경이에게 대한 우정 ── 미리서 상의도 아니하고 이런 일을 시작했다는 미안한 말도 하고, 또 이렇게 모든 것을 초탈하고 나설 수가 있다는 기운도 자랑할 겸 그의 발은 혜경이의 집으로 향하였다.
 
94
날은 따갑게 쬐고 몸에서는 땀이 사뭇 흐른다. 손에 든 것은 차츰차츰 무거워진다. 길바닥에서는 먼지가 부옇게 일어난다.
 
95
노라는 혜경이의 집에 가는 길에 우선 장사를 한번 해볼 생각이 났다. 그래서 물건 판 돈을 혜경이 앞에 내놓고 한바탕 웃을 양으로. ── 큰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주택이 들어선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96
성명 쓴 문패가 붙고 번지가 붙었다. 살림집이다.
 
97
노라는 대문 앞에 발길을 멈추었다. 들어갈까? 말까?
 
98
들어갔다가 아니 산다고나 하면 어떻게 하나? 더구나 연갑의 젊은 여자나 있으면 더욱 창피하지…… 그러나 어때? 직업은 신성한데…… 병신 글 가르쳐 주다가 창피본 것보다 낫지…… 형식만 남편이요 사랑 없는 동거를 하면서 산 인형 노릇을 하고 얻어먹는 것보다 낫지…… 노라는 이렇게 스스로 용기를 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침내 그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99
'요 다음 집으로나 가보지.’
 
100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고는 그 다음 집 문앞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역시 못 들어가고 다시 그 다음 집으로…… 노라는 미룸미룸 대여섯 집이나 미루어가다가 필경 한 집 문앞에 가서는 눈을 딱 감고 지친 대문을 밀었다.
 
101
중문 안으로 들어서니 얼굴이 확확 단다.
 
102
마루에 주인 같은 사나이가 앉았다가 이상한 듯이 눈으로 말을 묻는다. 손가방 이 랄지 차림새는 무슨 행상인데 얼굴이 그렇지 아니하다는 눈치다.
 
103
"화장품 사십시요."
 
104
노라는 모기만하게 겨우 소리를 내었다.
 
105
"안 사우."
 
106
그 사내는 흥 하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린다.
 
107
노라는 얼굴에 모닥불을 끼얹는 것같이 무렴해서 달아나듯이 그 집을 나왔다.
 
108
한숨이 후 내쉬어진다.
 
109
그는 더 다른 집에 들르기를 작파하고 바로 혜경이 집으로 갔다. 혜경이가 혹시 자기를 찾아가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전방에 있는 구가의 눈을 멀리 피하여 들어가니 마침 집에 있다.
 
110
"그게 무어유?"
 
111
혜경이는 노라의 가방을 보고 첫인사가 이 말이다.
 
112
"그러구 신발은 또 웬일이야? 옷이랑…… "노라는 웃으면서 마루에 펄씬 걸터앉았다. 혜경이도 노라의 가방을 빼앗듯 채어서 무게를 들어본다.
 
113
"여기 무엇 들었수?"
 
114
"알어내면 용하다지."
 
115
"무얼까?"
 
116
혜경이는 가방을 들어보고 흔들어서 다그락다그락하는 소리에 고개도 갸웃 거리고, 그러고 노라의 차림새를 마슬러보고 하다가 가방 뚜껑을 열어 젖힌다.
 
117
그는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듯이 싱그레 웃으며 가방 안에 가득 찬 크림, 분, 비누 등속과 노라의 얼굴을 번갈아 치어다본다.
 
118
"이게 무슨 것이유? 아직 채 몸두 성하지 못 하면서…… ""괜찮아…… 그것찜 가지고 돌아다니는데 어쩔라구?"
 
119
"괜찮언 게 무어야. 그러구 또 이게 셈이 닿나? 괜히 사람만 밑지지."
 
120
"이판에 사람 밑지고 아니하고가 어데 있수?"
 
121
이 소리가 혜경이에게는 처량한 비명으로 들리었다.
 
122
그다지도 교기가 많고 결벽이 많던 노라가 지금 와서는 화장품 행상이 되어가지고 사람 밑지고 아니 밑지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게 된 것이 혜경이 에게는 동무 하나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같이 서운하였다.
 
123
그는 노라가 병원에서 나올 때에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오려다가 못하고 달리 무슨 도리를 차리어 주리라고 생각한 것은 첫째 될 수 있으면 하루바삐 일자리를 얻어 주려고 한 것이다.
 
124
그리하여 남편과 한가지로 애를 애를 쓰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까마 아득하다.
 
125
그리고 또 한 가지, 남식 어머니를 조용히 만나 노라가 그렇지 아니한 집안의 부인인데 잠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되었으나 결코 맥맥한 사람이 아니니 병조리 같은 것도 잘 보아주고 만일 밥값이 밀리거나 하면 그것을 자기가 부담을 하겠노라고 당부를 하여 두었다.
 
126
그러나 그것도 마음과 말뿐이지 다달이 용처를 남편에게서 정해놓고 타서 쓰는 터이니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127
그런 때문에 화장품 가방을 들고 거리로 나선 노라의 그림자가 눈에 걸리고 안타까왔으나 덮어놓고 말리지도 못하는 것이다.
 
128
노라는 아까 무렴 보던 것은 속에서 사라지고 오늘이 개시니 어떻게 해서든지 한 가지 팔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국동으로 돌리어 학생 하숙인 듯한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129
먼저 단련을 받은 덕인지 주저하지 아니하고 쑥 들어섰다. 마당에는 학교에 갔다 온 중학생이 두어 사람 시꺼먼 웃통을 벗어젖히고 등멱들을 한다.
 
130
"화장품 사십시오."
 
131
노라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었다. 가슴이 공연히 두근거린다.
 
132
"화장품 사서 바르면 연애하나요?"
 
133
중학생 하나가 빈들빈들 웃으면서 조롱을 건넨다. 그러자 건넌방에 있던 전문학교 학생인 듯싶은 젊은이가 노라를 유심히 바라다보고 있는 것을 노라는 비로소 알았다.
 
134
"네? 화장품을 사서 바르면 연애해요?"
 
135
그 중학생은 정말 조롱거리가 생긴 줄 알고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섰는 노라를 조른다.
 
136
"야 이 자식아, 같잖게 네 따우가 연애는 무슨 연애야?"
 
137
다른 한 중학생이 농삼아 욕을 한다.
 
138
"가만 있거라 이 자식아…… 연애한다면 내 크림 한 병 사겠다."
 
139
"이 자식아, 호떡도 못 사먹어서 절쩔매는 자식이 무슨 돈으로 크림을 사니?"
 
140
"외상으로 사지…… 네, 외상도 주지요?"
 
 
141
노라는 괜히 서서 희학질만 받기가 창피하여 도로 나오고는 싶었으나 장사를 하는 터에 속이 옹졸한 것 같아서 얼굴만 붉히고 그대로 참았다.
 
142
"거 멀 그렇게 농담을 해? 남의 점잖언 이를 데리고…… "이 때까지 노라를 뚫어져라고 보고 있던 전문학교 학생이 아주 점잖게 나무란다.
 
143
"향수 있읍니까?"
 
144
보매 그다지 상냥한 얼굴도 아닌데 상냥한 소리로 묻는다.
 
145
향수는 없었다.
 
146
"없읍니다."
 
147
"네…… 그러면 후께도리는 있읍니까?"
 
148
"네."
 
149
이만큼 되었으니 항용 장사 같으면 벌써 그의 앞에 달려가서 물건을 내어놓고 한바탕 선전문구를 늘어놓았을 텐데 노라는 그것을 못하고 말뚝같이 서서 있기만 한다. 저편에서는 그것이 더욱 뜻에 드는 모양이다.
 
150
"좀 보여주시까요?"
 
151
"네."
 
152
노라는 비로소 마당을 가로질러 건넌방 마루 앞으로 갔다. 가방을 열려니까 손이 떨린다. 겨우 후께도리 한 병만을 꺼내놓았다.
 
153
그 학생은 집어들고 레테르를 읽어보고 흔들어보고 비춰보고 한다.
 
154
"근화(槿花)화장품회사 것이군요? 이거 신용할 수가 있어야지…… 잘 듣나요?"
 
155
"네. 그러고말고요. 참 좋습니다."
 
156
이렇게 침이 마르도록 물건을 자랑해야 할 것이나 노라는 그 말이 나오지를 아니한다.
 
157
"네."
 
158
그저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159
"얼마예요?"
 
160
"오십 전입니다."
 
161
그는 두말 아니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오십 전 은전 한푼을 꺼내다 주 면서하는 말이다.
 
162
"이담에도 또 오십시오. 좋은 향수 있거든 가지고 오세요 ""네."
 
163
고맙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노라는 그 집을 나섰다. 덥기도 하려니와 날이 더운 분수 이상으로 땀이 흘렀다.
 
 
164
손에 쥐인 오십전짜리 은전의 촉감이 가슴에까지 울리어 온다. 그는 바스라져라 하고 꽉 쥐어보았다.
 
165
한번 팔아보니 맛이 들어서 노라는 몇 집을 더 들러보았다.
 
166
그러나 모조리 거절을 당하였다.
 
167
노라는 집으로 돌아가서 마루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남식 어머니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 위에다 지금까지 손에 쥐고 다니던 오십 전 은전을 올려놓았다.
 
168
"아주머니, 나 돈 벌었어요."
 
169
"더운데 어데를 갔다 오우?…… 돈을 벌다니?"
 
170
그는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가방 위에 놓인 돈과 노라를 번갈아 본다.
 
171
"돈 벌었어요, 오십 전…… 장사했어요."
 
172
"장사?…… 그새 나가서 무슨 장사를 허우?"
 
173
노라는 가방을 열어 보였다. 남식 어머니는 놀라 입을 벌린 채 노라를 바라다본다. 혜경이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174
"원! 어쩌면…… ""왜 어때서요?"
 
175
"아니 글쎄…… 몸이 채 성하지 못 한데…… "남식 어머니는 이렇게 말을 돌리어 버렸다.
 
176
그날 저녁에 남식이가 집에 왔다가 노라가 화장품 행상을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깡종 뛰었다.
 
177
저녁에 노라는 자리에 누워서 큰 공상을 그리어 보았다.
 
178
일 원어치를 팔면 오십 전이 남는다. 그러니까 잘만 재빨리 서둘러서 매 일오 원어치씩만 판다면 하루의 이익이 이 원 오십 전, 한 달이면 칠십오 원이다. 그 중에서 이십오 원만 쓸 요량을 하고 오십 원씩 저금을 한다면 일 년이면 육백 원이다.
 
179
삼 년만 하면 이천 원은 된다. 이천 원, 이천 원…… 이천 원이면 시골서 어머니를 모셔다가 혜경이네처럼 조그마한 잡화점이라도 내고 편안히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있다.
 
180
금세 삼 년 세월이 지나가고 이천 원을 수중에 쥐고 선 자기의 환영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181
옳다 되었다! 현이 아무리 버티더라도 칼이라도 품고 가서 아이들을 데려오고 ── 셋을 다 못 데려오면 둘만이라도 데려다가 기르고 공부를 시키고.
 
182
그렇게 하면 그동안 아이들을 내버리고 나온 어미의 죄도 속량할 수가 있 고,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눈앞에 어린것들을 두고 같이 지내니 좋고.
 
183
어머니도 처음은 현과의 파탈을 알면 노여워하시겠지만 필경 외손자들 과같이 살게 되면 마음이 풀려서 좋아할 것이고.
 
184
그러고 다시 장사가 잘되어서 돈을 더 많이 모으게 되면 현이 보아란 듯이 큰 집을 지어놓고 거드럭거리고 살고.
 
185
이러한 장래 일을 공상하면서 노라는 빙그레 웃는 채 고단한 잠이 들었다.
 
186
꿈에 그는 생시에 공상하던 대로 잘되어 잘 살아보았다.
 
187
이튿날은 기운을 떨쳐 아침 일찌기 가방을 들고 나섰다. 삼 년 동안에 이천 원을 벌겠다는 욕심이 그로 하여금 용기를 내게 하고 넉살을 부리게 하는 것이다.
 
188
그러나 사람들은 노라의 이천 원짜리 꿈을 짓밟는다. 스무 집 서른 집을 들러야 크림 한 병 비누 한 개 팔기가 어렵다. 그중에는 물건을 실컷 흥정을 해놓고 외상을 놓고 가라다가 도로 내놓는 사람 ── 아낙네들 ── 이 많다.
 
189
하루 종일 점심도 굶고 돌아다닌 것이 비누 세 개와 크림 두 병이다.
 
190
도통 이익을 따지어 보니 삼십오 전이다.
 
191
노라는 이천 원에 대한 환멸의 비애를 느끼면서 허덕허덕 집으로 돌아왔다.
 
192
사흘째 되는 날이다. 오늘은 설마 좀더 팔리겠지 ── 아니 어제 못 판 것까지 보충해서 더 많이 팔 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집을 나섰다.
 
193
그러나 성적은 역시 일반이다. 오후 네시까지 헤매었으나 팔리어 수중에 들어온 돈은 도통 일 원 이삼십 전밖에는 아니 된다.
 
194
시장도 하고 다리도 아프다. 집으로 그냥 돌아오려고 관철동 뒷골목을 지나다가 웬 혼란스럽게 차린 단발한 여자 하나가 들어가는 집을 뒤따라 들어갔다. 아무리 해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흘 동안의 경험만 가지고도 환히 알고 있는 것이다.
 
195
그 여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그 집안식구는 아니고 손님인 듯한데 건넌방으로 들어가서 다짜고짜로 옷을 활활 벗어 내던지고 벌거숭이 됨직한 몸뚱이를 방바닥에다 내던진다. 그가 카페의 여급인 것은 노라는 나중에야 알았다.
 
196
"화장품 사십시요."
 
197
노라는 건넌방 문 앞으로 가서 이렇게 외었다. 인제는 기계적으로 외어진다.
 
 
198
"안 사요 "그는 누운 채 노라를 유심히 바라다본다.
 
199
노라는 다리가 아파 마루에 잠깐 걸터앉았다.
 
200
"어찌 화장품 장사를 하시요?"
 
201
심상찮게 바라보고 있던 그 여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노라에게로 가까이 와서 묻는다.
 
202
"왜? 하면 못쓰나요?"
 
203
"아니, 못쓴다는 게 아니라 이런 장사를 하실 인 것 같지 아니해서 말이여요."
 
204
노라는 웃고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205
"나 있는 데로 와보시겠어요?"
 
206
"어덴 데요?"
 
207
"카페예요."
 
208
"네!"
 
209
"호호호호…… 왜 그렇게 놀래세요? 괜히 남들은 웨이트레스를 임 바이나 화냥년으로 알구 그리지만 실상은 저만 싯까리하면 아모 일도 없답니다…… 수입이야 화장품 팔러 다니는 것 같을 거예요!…… 당신 같은 이가 오 기만하면 아주 썩 벌이가 졸 건데…… 타락하고 아니하기야 제게 달린 걸…… "카페라는 것이 남자들의 환락경이요, 그곳에 있는 웨이트레스들이 타락 된 여자들이라는 것을 노라는 막연하게 알고 있을 따름이었었다. 마치 그것은 노라에게 딴 세상과 같이 인연이 멀었다. 따라서 그곳이 어떠한 곳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보거나 알아볼 일도 없었던 것이다.
 
210
"월급을 주나요?"
 
211
노라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 여자가 권하는 대로 카페에를 가겠다는 생각은 아니나 알고는 싶었다.
 
212
"아니요. 손님이 짓뿌를 주어요…… 잘허면 하룻밤에두 멫십 원씩 생기는 때가 있는데요…… 그런 건 예외라구 허더라두 인물만 좋구 서비스가 우바이 해서 인기만 있으면 하룻밤에 평균 십 원은 돼요. 그것두 요새같이 후게 이끼 허니까 십 원이지 세월이 좋으면 이십 원 평균은 되는걸…… "이 말에는 노라도 구미가 당기었다.
 
213
"들어가자면 시험을 보나요?"
 
214
그 여자는 하하 하고 웃었다. 노라는 무렴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215
"시험이 다 무어유! 그저 아무라두 되는데…… ""가서 하기는 무얼 하나요?"
 
 
216
"손님허구 이야기허구 술 따러 주구 그것뿐이지요."
 
217
그것쯤이면 아무것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타락 여부가 없을것이다. 세상에 그렇게 좋은 벌이가 있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카페가 나쁘고 여급이 나쁘다고 하는가?
 
218
전수히 나쁘지 아니한 것을 터무니없이 나쁘다고 할 리는 없는 것이고, 어쨌거나 여급인 당자 말만 신용할 수가 없으니 딴데 알아보리라고 생각 하고 그 집을 나왔다. ── 날새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219
그 뒤 노라의 머리는 여전히 매일 오륙십 전의 이익 외에는 더 올라가지아니하였다.
 
220
육십 전이면 한 달 평균 십팔 원이다.
 
221
십팔 원이면 밥값 십오 원을 제하고 삼 원이 남는다.
 
222
삼 원을 가지고 옷을 해 입어야 하고 신발을 사 신어야 하고, 그리고 약도 먹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도저히 아니 될 말이다. 이천 원의 꿈은커녕 당장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223
더구나 또 한가지 어려운 것은 남수가 여러 번째나 월급을 받아오지 못 한것이다.
 
224
전에는 인쇄소에서 그믐날과 보름날 ── 한 달에 두 번씩 회계를 해주었는데, 지난 유월부터 통히 월급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노라는 요새 와 서야 비로소 알았다.
 
225
남수의 말을 들으면 인쇄소가 경영이 곤란하여 어느 은행에 빚을 많이 지고 어쩌면 파산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226
주인집이 넉넉하고 아니하고 간에 다달이 밥값은 또박또박 내야 할 것이지만, 그래도 주인과 손님이 둘 다 군색해서는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다. 혹시 밥값이나 밀려서는 큰일이다. ── 이런 불안이 늘 머리를 눌렀다. 동시에 노라가 자기 자신도 모르게 남수를 통하여 인쇄소에 들어가겠다는 희망을 크게 가졌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따라서 적지 아니하게 절망이 되었다.
 
227
생활의 위협이 시시각각으로 커가는 반면 하루 평균 십 원을 번다는 카페여 급에 대한 유혹이 차차 머리를 들게 되었다.
 
228
노라는 며칠 전 관철동에서 그 여자를 만나 카페와 여급에 대하여 약간 이야기를 듣기는 하였으나 그것쯤의 지식은 백지에 가까운 것이다.
 
229
그러니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가 있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날로 더하여 갔다.
 
230
구월도 보름이 넘었건만 아직도 남은 더위는 싱싱하다.
 
 
231
기계적으로 온종일 화장품 가방을 들고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가 지친 노라는 따가운 노양을 등지고 광화문 네거리에 서서 망설이었다.
 
232
혜경이를 찾아가서 상의도 하여 보고, 또 구가더러 카페에 대한 것을 물어도 보고 하고 싶은 것이다.
 
233
그러나 만일 그러한 말을 낸다면 혜경이가 덮어놓고 말릴 것이요, 없는 말을 만들어서라도 카페나 여급을 나쁘게 말을 할 것이다.
 
234
"에라!"
 
235
이러한 단념도 아니요 결심도 아닌 생각으로 노라는 관철동으로 방향을 정하고 발길을 옮기었다.
【원문】11. 전락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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