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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형의 집을 나와서 ◈
◇ 13. 자유의 대상(代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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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5
채만식
1
人形[인형]의 집을 나와서
2
13. 자유의 代償[대상]
 
3
혜경이는 흥분된 끝에 한 말이나 대번에 뒤가 켕기는 말이다.
 
4
자기의 우정으로 한다면 결코 그리 못할 것이 아니지만, 그의 남편인 구가는 노라에게 대하여 결코 진심으로의 호감은 가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노라가 그렇게 하기를 승낙하고 같이 가서 있는다고 하더라도 오래지 못하여 부처간에 불화가 생길 것이요, 결과는 노라가 다시 나오는 수밖에 없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는 지금의 우정까지도 도리어 상하고 말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혜경이는 그런 것 저런 것 뒷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것이다. 정다운 ― 이 세상에 둘도 없이 정다운 동무가 타락의 구렁에 빠져있다는 그 위험을 우선 임시로 구해야 하겠다는 열정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5
노라가 아무 대답도 없이 묵묵히 있는 것을 보고 혜경이는 초조히 재촉을 한다.
 
6
"자, 잔말 말구 어서 짐을 꾸려요. 우리 집으루 가서 있게…… 그 리다 가어 데 마땅한 벌이자리가 생기면 달리 변통 허더래 두…… "노라는 고요히, 그러나 힘있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7
지금의 외롭고 막막한 품으로는 그러고 싶지 아니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혜경 이의 우정이 고마운 것이다.
 
8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하다하다 못해서 최후로 카페에까지 굴러 들어갔다가 다시 동무를 등대고 그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혜경이 그가 다정하고 고마운 동무인만큼 더구나 그리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9
그러니까 만일 어느 모르는 딴 사람이 그처럼 다정하고 고맙게 굴었다면 그는 섬뻑 받았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10
그러한 외에 또 한가지 노라는 모든 일에 절망이 되고 자포자기가 된 것이다.
 
11
혜경이를 따라가 그에게 의탁하고 있은들 무슨 그리 신통할 것이 있을 것이냐? 벌써 여급질을 해먹었으니 처음 생각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인제는 아무리 마음이 결백하여도 타락된 계집이란 낙인이 찍히지 아니하였느냐! 기왕 내친 걸음이니 가지는 데까지 가 보겠다.― 그 뒤에야 무엇이 오든지 상 관할 것이 없고.
 
12
그리하여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 것이다.
 
13
"왜?"
 
14
혜경이 다가 묻는다.
 
15
"그렇게까지 헐 필요가 없어."
 
16
"어째서 그럴 필요가 없단 말이야?"
 
17
"아직 아니 들어갔다면 모르지만 발써 한 달이나 가서 있었는데 지금 그만둔다구 그 허물이 씻어지나?"
 
18
"누가 지난 이야기를 허잔 말인가? 앞으루 말이지."
 
19
"괜찮어…… 카페에 가서 있는다구 저마다 다 타락헐래서야."
 
20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구, 자 일어나요."
 
21
혜경이는 일어서서 벽에 걸린 옷도 떼어놓고 이부자리도 만지면서 짐을 챙기려 한다.
 
22
그러나 노라는 종시 꼼짝도 아니하고 앉아 있을 뿐이다.
 
23
"정 이러구 앉었을 테야?"
 
24
혜경이는 짐 챙기던 손을 멈추고 돌아서서 따진다.
 
25
"혜경이 정만은 고맙소만 한동안 내대루 두어두어요."
 
26
"그래 다시 카페에를 나가겠단 말이지?"
 
27
"응."
 
28
"응이라께! 아니 그래 카페에 가서 한 달쯤 있더니 맘까지 변했수?"
 
29
"변했을지도 모르지."
 
 
30
이렇게 설익은 고기같이 설뚱거리며 고집을 쓰는 노라가 혜경이는 쥐어 뜯어 주고 싶게 미웠다. 그는 몇 번을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하다가 다시 한번 눅여서 달랜다.
 
31
"이거 보아요, 노라. 내 정을 보아서라두 그러지 말구 우리 집으로 가자구…… 글쎄 노라를 그렇게 두어두구 내가 맘이 아니 뇌여서 어떻게 살란 말이냐?"
 
32
"별루 걱정할 것 없어…… 내 좀더 있어 보다가 정 못견디겠으면 찾어가께."
 
33
"안 돼. 지금 곧 가요."
 
34
"지금은 안돼."
 
35
"엑 모르겠다."
 
36
혜경이는 손에 들었던 옷가지를 홱 내던지고 쿵쿵 마루로 걸어나간다.
 
37
"생전 서루 만나지 맙시다."
 
38
그는 이렇게 해던지고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39
노라에게서 한 가지가 또 없어졌다. 가장 정다운 동무 혜경이가 영영 가고만 것이다.
 
40
혜경이가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노라는 그만 터져나오는 눈물에 그대로 엎 드러져 울었다.
 
41
우노라니 다시 이 설울 저 설움이 복받쳐올라 때가 가는 줄도 모르고 울었다.
 
42
남수 어머니와 또 늦게 돌아온 남수는 드나들이로 들어와서 위로를 하여주나 본시 우는 사람의 속을 모르고 하는 위로니 위로될 수가 없는 것이다.
 
43
울다가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울고 아무리 하여도 눈으로 나오는 것은 눈물 뿐이요, 입으로는 한숨밖에 나오지 아니한다.
 
44
열시나 되어서 화장도 하지 아니한 채 옷을 걷어 입고 카페로 나왔다.
 
45
노라가 울어서 눈이 부은 것쯤은 웃는 얼굴보다 더 환히 보는 것이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한다.
 
46
누구 낯익은 손님이 왔으면 가 앉아서 술 ― 그동안 조금 맛을 들인 술이라도 얻어먹고 울분이나 풀려니 생각하고 위아래층을 둘러보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47
이층 층계에서 마침 에미꼬를 만났다.
 
48
"또 울었구려?"
 
49
"울 때는 울어야지…… 그런데 에미꼬, 누구 신문기자 아는 사람 있어?"
 
50
노라는 병택이가 언제 경성으로 압송이 되어 오는가 알아보고 싶었다.
 
 
51
"신문기자? 글쎄 더러 있지만…… 왜 그래?"
 
52
"물어볼 말이 있어서."
 
53
"흥, 설운 사정이나 신문에 내달랠 텐가?"
 
54
"미친 소리 말구 어서 누구 하나 대주어요."
 
55
"글쎄, 가만 있자."
 
56
에미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곧 도로 올라와서 노라의 손목을 잡아끈다.
 
57
끄는 대로 끌려가서 보니 젊은이 두 사람이 있는 데다가 붙잡아 앉힌다.
 
58
"자, 이 선생님 두 분은 ××일보사 기자시구, 이 사람은 카페 사탄의 꾸잉(女王[여왕]) 유리꼬상…… 소개합니다."
 
59
에미꼬가 이 연극 같은 소개를 하니까 두 사람은 역시 연극조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어민다.
 
60
"아, 사탄의 여왕."
 
61
"인도 여왕이라구두 허신다지요?"
 
62
"앉으시오."
 
63
"지금은 인도 미인 아니야."
 
64
에미꼬가 반박을 한다.
 
65
"첨에는 볕에 글은 것이 아니 벗겨져서 그랬지만 지금은 얼굴이 저렇게 하얀데…… 그런데 선생님, 이 유리짱이 신문사 계신 이한테 여쭈어 볼 말씀이 있대요."
 
66
"응, 무어요?"
 
67
그 중 키 작은 사람이 선선하게 묻는다.
 
68
"저, 오병택이라는 사람이 신의주에서 잽혔다지요?"
 
69
노라는 좀 거북하나 이렇게 물었다.
 
70
"오병택이? 오병택이?"
 
71
이렇게 더듬으면서 그의 동행인 좀 뚱뚱한 사람을 건너다본다.
 
72
"오병택이가 누구야?"
 
73
"있어 있어. ×××재건사건으루 피해 가다가 신의주서 잽혔다구 우리 신문 에두 석간에 났지."
 
74
"응 응, 그래그래…… 그런데 왜?"
 
75
키 작은 사람은 다시 노라더러 묻는다.
 
76
"애인이요? 그렇다면 이거 켕 기 는걸…… ""아니여요. 한고향인데 잽혔다길래 정말인가 허구…… ""응, 그렇다면 모르거니와."
 
 
77
"서울로 압송헌다는데 언제 오나요?"
 
78
"글쎄 그건 사회부 기자의 영역이 돼서…… 정 알구 싶다면 지금이라 두 알어다 줄 것 이구…… ""미안합니다만 좀 알어보아 주세요."
 
79
"그러지."
 
80
그는 선선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81
"지금 사회부에 사람 있겠지?"
 
82
"있겠지."
 
83
이렇게 자기네끼리 문답을 하고는 한편 구석에 있는 전화실을 향하여 아장아장 걸어간다.
 
84
그런 지 한참 만에 키 작은 신문기자는 방글방글 웃으면서 전화실에서 돌아와 앉는다.
 
85
"한턱 해야겠는걸."
 
86
"왜요? 언제 온대요?"
 
87
"한턱 해야 해."
 
88
"허지요."
 
89
"그럼…… 내일 밤 아홉시 이십오분차로 경성역 도착."
 
90
노라는 반가운 것을 숨기고 천연스럽게 고마운 치사를 하였다.
 
91
"한턱 헌다는 것을 인제 해야지?"
 
92
키 작은 사람은 연해 샐샐거린다.
 
93
"허지요. 무얼 낼까요?"
 
94
"글쎄… 무엇이 좋을까?"
 
95
"술을 한턱 낼까요?"
 
96
"글쎄 술이야 우리가 사먹으러 왔으니까 그럴 것은 없구, 또 여왕에게 손해를 끼쳐 드려서는 미안헌 일이구 하니, 여보, 여왕님의 키스나 한턱, 응?"
 
97
"아이 망칙해라. 키스가 무슨 턱이 됩니까?"
 
98
"되건 아니 되건 내기만 했으면 됐지."
 
99
"몰라요."
 
100
"아니 이런 법이 있나? 턱을 내기로 해놓구 인제는 안 내겠대?"
 
101
"그러면 여보 유리꼬상."
 
102
뚱뚱한 신문기자가 중간을 타고 나선다.
 
103
"턱 대신 이야기나 좀 헙시다."
 
104
"네."
 
 
105
"오병택이 소식을 어찌 그렇게 자세허게 물으시우?"
 
106
키 작은 신문기자와는 달라 그 사람은 묵직하기에 말대꾸가 조심이 된다.
 
107
"한고향 사람이라 그래요."
 
108
"한고향이면 한고향이지 그렇게 압송되는 것까지 알려구 애쓰는 것이 좀 달러 보이는걸…… "그에게 속을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 노라는 얼굴이 붉어지려 한다.
 
109
"아니예요. 별일은 없구 그저 궁금해서…… ""궁금뿐이 아닌 모양인데…… 저거 봐, 얼굴이 저렇게 붉어지는걸…… "한참 시달림을 받는 판에 마침 번이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110
김이 와서 혼자 오꼼 앉아 있었다.
 
111
노라는 뜨윽하였다.
 
112
결혼하자고 조르는 것을 후려뗀 뒤에 몇 번 만나고는 그 뒤 십여 일 이나 만나지를 못하였다.
 
113
영 단념을 한 줄 알았더니 다시 찾아와서는 흘끔한 눈으로 치어다보고 앉았는 것이 또 한바탕 시달림을 받을 것만 같았다.
 
114
병택이의 압송되는 소식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나 김한테 시달림 받을 일을 생각하니 부질없이 나왔다 싶어 후회도 났다.
 
115
"잘 있었소?"
 
116
앞에 마주 앉는 노라를 보고 적의를 머금은 것도 아니요 노한 것도 아니건만 이상스럽게 평온치 못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117
"네. 안녕허셨어요? 한동안 못 뵈었습니다…… 웬일이세요?"
 
118
"웬일이라니? 내가 못 올 데를 왔단 말이요?"
 
119
"어쩌면! 왜 그렇게 트집을 잡으려 드서요…… 한동안 아니 오셨길래 왜 아니 오셨느냐는 말씀인데…… ""둘러댈 심은 용허우…… 그러나 염려 마시우. 보기 싫은 놈 꼴을 인제는 아니 보게 되었으니."
 
120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어데 가세요?"
 
121
그다지 놀라운 소식도 아니건만 말로라도 이렇게 인사를 아니할 수가 없다.
 
122
"네. 멀리 가우…… 억만 년 가기만 허구 오지는 아니하는 데로 가겠소."
 
123
"호호…… 그런 데가 어데 있어요?"
 
124
"있으니까 간다지…… 내가 거짓말인 줄 아우? 못 미덥거든 인제 보구 려…… 자, 인젠 작별이요. 그렇지만 내가 아모리 가는 마당에 당신을 원망 허지 아니하자면서두 아니헐 수가 없소. 나는 가서 당신을 저주허는 귀신이 되겠소."
 
125
노라는 몸서리가 치었다.
 
126
김의 그 무덤에서 도로 나온 것 같은 형용이며 방금 불길이 튀어나올 듯 한눈의 이상한 광채.―
 
127
전율을 느끼며 멍하니 앉았는데 어느 겨를에 김은 종이봉지에 싼 가루약을 따라놓은 맥주잔에 털어 부어가지고는 들이켜고 있다.
 
128
노라는 엉겁결에 김의 입에 닿은 유리잔을 손으로 쳤다.
 
129
잔이 탁자에 떨어지며 술이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김은 접치는 듯이 자리에 쓰러진다.
 
130
여급들이 와 몰려오고, 처음에는 술주정으로 알았던 손님과 카운터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131
남자들이 울력으로 김을 떠메어다가 죠뀨베야에 뉘는 한편 의사를 불러오고 김에게는 개숫물을 길어다가 먹이었다.
 
132
그러나 독은 조금 입에 대었을 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는 아니하였다. 약이 모르핀인 것은 나중에 알았다.
 
133
의사가 왔어도 별로 치료도 하지 아니하였다. 독을 먹을 뻔하였지 먹지는아니하였으니까.―
 
134
총망중에도 둘러보니 아까 아래층에서 만났던 신문기자라는 사람들도 축 에끼여 구경을 하고 있다.
 
135
파출소에서 순사가 달려왔다.
 
136
노라는 순사가 김과의 관계를 묻는 대로 그동안 사실을 숨기지 아니하고 전부 이야기하였다.
 
137
무엇보다도 독을 먹으려다 말아 일이 무사하게 되었기 때문에 별로 말썽은 없이 되었다. 다만 김이 순사를 따라갔을 뿐이다.
 
138
"여왕님, 횡액을 당했구려?"
 
139
좀 정신을 가다듬느라고 한편 구석에 앉아 있노라니까 아까 그 신문기자두 사람이 앞에 가 버티고 섰다. 키 작은 사람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빈정거리는 말인지 장난하는 말인지 모르게 횡액을 당했다고 한다.
 
140
"횡액은 무슨 횡액이어요?"
 
141
"글쎄 횡액이 아니라면 되려 다행이겠지만…… 거 누구요?"
 
142
"저두 몰라요."
 
143
"몰라? 잡어떼지 말구려. 어느 미친 녀석이 모르는 여자 앞에서 자살을 허러 들지야 않을 텐데…… "그도 그럴 듯한 말은 말이다. 그러나 실상 노라는 김이 누구인 줄을 알지못한 다. 아는 것이 있다면 어느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는 것과 성 이김가라는 것밖에는 더 알지 못한다.
 
144
"응? 그렇잖어? 생판에 알지도 못허는 여자 앞에서 실연 자살을 허러 들지야 않겠지?"
 
145
키 작은 신문기자는 재우쳐 묻는다.
 
146
"그렇지만 저는 정말 모르는걸요."
 
147
"언제부터 알었소?"
 
148
"한 달 가랑 되었나 봐요."
 
149
"그새 매일 만났소?"
 
150
"아니요. 처음 메칠 동안 다니더니 ― 아까 순사더러 하든 이야기 다 들잖어셨어요? 생판에 결혼을 허자구 조릅디다그려! 그래 약혼한 사람이 있다구 잡어떼었더니 한 열흘 아니 오다가 오늘 저녁에 글쎄…… ""그래서…… ""자기는 영영 가기만 허구 오지는 아니허는 곳으로 갈 텐데 나를 원망 헌다구 그러더니 그랬어요."
 
151
"승겁다."
 
152
뚱뚱한 사람이 픽 웃고 돌아서 버린다.
 
153
"이름이 무엇인지는 몰르우?"
 
154
키 작은 사람이 그대로 서서 묻는다.
 
155
"몰라요."
 
156
"명함두 아니 받었나?"
 
157
"아니요."
 
158
"집은 어덴지?"
 
159
"그것두 몰라요."
 
160
"갑시다. 내일 경찰서 간 사람이 알어보겠지."
 
161
뚱뚱한 사람이 동무를 추겨 가지고 가버린다.
 
162
노라는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신수가 궁하면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저녁때 혜경이와 그렇게 갈린 끝에 또다시 연극 같은 시달림을 받고 나니 누구 한 사람 붙잡고 물어 주고 뜯어 주고 실컷 몸부림을 치고 해서 분풀이를 해주었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노라에게는 아무도 그런 만만한 사람이 없다.
 
163
차라리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집에 돌아가 잠이나 일찍 자려고 문간으로 나오는데 또 붙잡히고 말았다.
 
164
"어, 우리 유리꼬상 어데 가나?"
 
165
이주사가 팔을 벌리고 껴안을 듯이 길을 막는 것이다.
 
166
노라는 그만 아득하여 어쩔 줄을 모르면서 직업의식이라 할지 인사는 아니 할 수가 없다.
 
167
"그런데 어데 가나?"
 
168
"몸이 좀 고단해서 일쯕 돌아갑니다."
 
169
노라는 일부러 괴로운 듯이 이마를 찌푸려 보였다. 그러나 이주사는 그런 것은 상관치 아니하고 팔을 벌린 채 덤벼든다. 그것을 피하려고 노라는 할수 없이 문 안으로 뒷걸음질을 쳐서 물러 들어섰다.
 
170
"삼십 분만, 아니 이십분만, 응. 나 술 두 잔만 부어 주어요. 이십 분만 응, 이십 분만, 자."
 
171
"아이구 몸이 괴로워서 죽겠어요. 제발 내일 저녁에 오세요."
 
172
"어 안될 말…… 괜히 꾀병을 허느라구…… 응, 애인이 기다리지?"
 
173
"아니예요. 애인이 다 무업니까?"
 
174
"아니야. 애인은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슬뭇이 잠이 들었을 때 그 옆에 가서 살포시 앉어야 정말 응, 정이 진진헌 법이야…… 자, 자, 올라가…… 응, 이십 분만…… 술 두 잔만…… ""아니예요. 저 그러시면 다시 아니 뵙겠습니다."
 
175
"헹, 거 무슨 섭섭헌 소리! 그러지 말어. 내가 남의 사람을 방해허진 아니해…… 자, 그러지 말구 응, 유리꼬상, 우리 유리꼬상."
 
176
노라는 할 수 없이 이층으로 끌려 올라갔다.
 
177
이주사는 요새 몇 번은 최주사도 아니 데리고 혼자 다니었다. 이번에도 혼자다. 술은 그전대로 미리서 얼큰히 취하였다.
 
178
"유리꼬상, 응. 나는 유리꼬상이 좋아서 죽겠는데…… 이렇게 사랑을 하는데…… 유리꼬상은 왜 그렇게 쌀쌀해 응, 유리꼬상."
 
179
이주사는 자리에 앉아 자기 옆에 노라를 바싹 다가앉히고는 손을 주무른다.
 
180
"제가 어쩌길래 그리세요?"
 
181
"헹, 말로는…… 입으로는 아주 안 그런 체허면서 속은 속은 딴청을 대여!"
 
182
"그런 말씀 마시구 어서 술이나 잡수세요. 이십 분이 다 갑니다."
 
183
"어 참 그렇지…… 가쿠테루허구 페파민허구."
 
184
"저는 못 먹습니다."
 
 
185
노라는 술이라도 좀 집어먹었으면 하는 생각 ― 더구나 한 달 전에 먹어 본 페퍼민트에 대한 유혹을 느꼈으나 어쩐지 그 술이 마성을 가진 것 같아 와락 먹히지 아니하였다.
 
186
"못 먹을 게 어데 있어? 잔말 말구 가져와…… 애인을 만나자면 한잔 얼 큰 헌 게 더 좋단 말이야."
 
187
"괜히 애인 애인 그러세요!"
 
188
"허허허허…… 애인이 그러면 없나?"
 
189
"있을 게 어데 있어요!"
 
190
"그렇다면 되려 다행이지. 자, 위선 술 가져와, 아부상 가쿠테루허구 페 파민 허구."
 
191
노라는 시키는 대로 칵테일과 페퍼민트를 한잔씩 가지고 와서 앉았다.
 
192
"자, 감빠이."
 
193
이주사는 한 손으로는 노라의 손을 쥐고 한 손으로 칵테일잔을 높이 든다.
 
194
노라도 잔을 집어들었다. 하자는 대로 잔을 마주뜨린 후에, 에라 어떠랴 하는 생각으로 죽 들이켰다.
 
195
"어, 그래야지."
 
196
이주사는 빈잔을 내려놓으면서 싱그레 웃는다.
 
197
"그래야 해.― 그래야만 우리 유리꼬상이란 말이야."
 
198
"인제는 이십 분이 다 되었습니다."
 
199
실상 그다지 일어서고 싶지는 아니하나 뭉개뭉개 뭉개고 앉았다가 또 무슨 단련 이나 받을까봐 그냥 떼쳐버리려는 것이다.
 
200
그러나 이주사는 잡은 손을 끌어앉힌다.
 
201
"그러지 말어…… 애인두 없다면서 무얼 그래…… 내 오늘 저녁에 긴히 헐 이야기가 있어서 벼르구 온 거야…… "긴한 이야기라니 알조다.
 
202
"아니예요. 놓아주세요."
 
203
노라는 사정을 하였다.
 
204
"정 가야 하겠나! 그럼 가야지."
 
205
그러나 껴안은 허리는 놓아 주려고도 아니한다.
 
206
"정말 어데가 아픈가?"
 
207
"네."
 
208
"허, 그렇다면 안됐는걸!"
 
209
노라는 뿌리치려고 하지만 이주사는 되레 허리를 끌어안고 덤빈다.
 
210
"어데가? 머리가 아퍼?"
 
 
211
"네."
 
212
"그렇다면 내가 짚어 주지."
 
213
이주사는 껴안은 허리를 놓고 머리를 만져본다.
 
214
"멀 그래! 괜찮구만…… 자, 술이나 한잔 더…… 가쿠테루에 페파민."
 
215
"아이 저는 더는 못 먹어요."
 
216
"괜찮어, 두 잔까지는…… 자, 어서어서 가져와."
 
217
칵테일과 페퍼민트를 또 한잔씩 마시었다.
 
218
술이 술을 청한단 말은 옳은 말이다.
 
219
노라는 석 잔째의 페퍼민트를 마시었다.
 
220
알콜 기운으로 취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에 섞여 있는 딴 성분으로 해서 정신은 마비가 되고, 한편으로 야릇하게 흥분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221
하물며 난숙한 삼십대의 건강한 여자임에랴.
 
222
"유리꼬상."
 
223
이주사는 수염 까슬거리는 턱을 노라의 볼에 비비면서 허리를 어루만진다.
 
224
"네?"
 
225
술(?)에 취한 여자는 양과 같이 유순하다.
 
226
"애인이 있어?"
 
227
"애인은 무슨 애인!"
 
228
"정말?"
 
229
"응."
 
230
"집에 누구누구 있지?"
 
231
"어머니허구"
 
232
"또?"
 
233
"여동생 둘허구."
 
234
"여동생들은 무얼 허나?"
 
235
"학교에 다니지요."
 
236
"살림은 유리꼬상이 버는 것으루 해나가구?"
 
237
"그렇지요."
 
238
"어, 참 기특허다…… 그래서 카페에를 나왔구려?"
 
239
"어쨌거나 벌어먹구 살려니까…… ""돈만 있으면 이런 데 와서 있지 않지?"
 
240
"돈을 두구 어느 미친 년이 이런 데를 와요."
 
241
이주사의 손이 어름어름하고 가슴 근처를 만지려고 한다.
 
242
노라는 놀라 몸을 빼쳤다.
 
 
243
그것은 정숙하던 인처(人妻)다운 본능도 본능이려니와 그곳은 한번 만져 봄으로써 지금까지 노라가 나이와 소성을 숨기던 것이 그만 탄로가 되는 위험 구역이다.
 
244
처녀요 ― 법률상의 것이라고만 여기겠지만 ― 나이 스물을 갓 넘었다는것이 그래도 노라의 인기의 밑천이다. 그런데 아이를 셋이나 기른 가슴 양편의 부분이 드러나고 보면 그건 망신이다.
 
245
노라가 놀라 빼쳐나가는 것을 보고 속을 모르는 이주사는 그것이 숫 색시의 본능인가 싶어 더욱 황홀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본다.
 
246
"그래, 아니 만질 테니 와서 앉어…… 술이나 더 가져오구."
 
247
"많이 취허셨는데?…… 저두 취했어요…… 아이 내가 미쳤나! 왜 이렇게 술을 먹으까! 참."
 
248
이렇게 말하면서 노라는 페퍼민트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249
또 한잔, 또 한잔. 그리하여 도통 여섯 잔이나 먹고 난 노라는 정신이 아주 몽롱하여졌다.
 
250
더구나 나중의 석 잔에는 이주사가 자기의 잔에서 그 독한 위스키를 첨 작까지 시켰었다.
 
251
노라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사탄에 온 뒤 처음으로 노래 ― 유행가를 불렀다. 동무 여급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노라가 정말 여급이 된 것을 환영 하였다.
 
252
이주사가 노라의 뒤를 부축하듯이 따라섰다.
 
253
이것을 본 여급들은 다시 한번 박수로 환호를 불렀다.
 
254
"유리꼬상, 어데를 이러구 가는 거야?"
 
255
이주사는 연해 싱글벙글 웃으며 노라를 부축한다.
 
256
"집에 집에 집 에 가 야 지."
 
257
노라는 혀가 잔뜩 꼬부라졌다.
 
258
"집에? 그러면 내가 바라다 주지."
 
259
택시를 불러 노라를 태우고 그 옆에 앉는 이주사는 운전수의 귀에 대고 "남산장."
 
260
이라고 속삭인다.
 
261
새벽에 정신을 잃은 채 자동차 운전수에게 안기어 들어와 이내 혼혼히 잠을 자고 있던 노라는 오정이 지나서야 다시 정신이 들었다.
 
262
눈을 떠보니, 남수 어머니가 근심스럽게 옆에 가 쪼글뜨리고 앉아 있다.
 
263
노라는 목이 타는 것 같이 말랐다.
 
264
"나 물."
 
 
265
남수 어머니는 재치있게 옆에 준비해 놓은 밀수 그릇을 들어 대어 준다.
 
266
노라는 몸을 반쯤 모로 일으키어 소가 냇물을 들이켜듯이 한 대접의 밀수를 벌컥벌컥 다 마시어 버린다.
 
267
"인제 정신이 좀 드나?"
 
268
남수 어머니는 맘 놓이는 한숨을 호 내쉰다.
 
269
잠을 잤고 또 찬 밀수를 들이켜고 나니 비로소 정신이 또렷이 든다.
 
270
정신이 들매 희미한 어젯밤의 낯모를 그곳 그 일이 눈앞에 선연히 떠 오른다.
 
271
"으응."
 
272
소리를 치고 보지 아니하려는 듯이 노라는 눈을 감는다.
 
273
노라에게 남기어진 마지막 것 하나마저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것을 가져간 사람은 어젯밤에 노라에게 페퍼민트라는 야릇한 술을 권하던 이주사다.
 
274
남수 어머니는 또 야단이 나나 하고 허둥댄다.
 
275
"정신 차려, 정신 차려."
 
276
노라는 다시 눈을 떴다.
 
277
"괜찮아요…… 어머니, 이렇게 걱정시켜서 미안헙니다."
 
278
"원 별소리를 다 허네…… 이렇게 정신을 차렸으니 그것만 다행이지…… 약국에 가서 병론허구 약이라두 한 첩 지어 오께?"
 
279
"약이요?"
 
280
노라는 쓸쓸하게 웃었다.
 
281
"그만두세요. 약 먹을 병이 아니랍니다."
 
282
"그래두 오늘 아침에는 여간 놀랜 게 아니라네…… 사람이 다 죽어서 안기어 들어왔으니!"
 
283
"누가 안어 들여왔어요?"
 
284
"자동차 허는 사람이."
 
285
"딴 사람은?"
 
286
"없어."
 
287
노라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잠잠하였다.
 
288
"미음 쑤어놓았으니 좀 먹지?"
 
289
"생각 없어요."
 
290
"그래두 좀 먹어야지 어떡허나!"
 
291
"인제 차차 먹지요."
 
292
"그러면 어서 잠이나 더 푹신 자게…… 아이구 원 하두 놀래서."
 
293
남수 어머니는 처네를 다독거려 덮어주고 안방으로 건너간다.
 
 
294
노라는 눈을 딱 감고 누워서 작년 섣달 그믐날 집을 나오던 일로부터 죽돌이 켜 생각을 하여보았다.
 
295
자꾸만 생각이 흐트러지는 것을 애써 줄거리를 추리면서.―
 
296
그리하여 어제 저녁의 일까지에 미쳤을 때에 한 가지 결심이 떠올랐다.
 
297
그는 덮은 처네를 걷어차고 일어나 만년필과 편지지를 찾아가지고 다시 요 위에 엎디어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298
"혜경이.
 
299
어제 저녁때의 일은 퍽 섭섭하게 되었소.
 
300
그러나 혜경이가 그렇게 노하여 가지고 돌아간 것이 결코 정말로 노하거나 정말로 내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닌 줄은 나도 잘 아오.
 
301
나도 혜경이의 우정을 ― 내게 대한 혜경이의 우정! ― 을 뿌리치느라고만 그리한 것은 아니오.
 
302
내가 지금 혜경이에게 전과 다름없는 정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혜경이도 역시 그러한 마음으로, 그리고 어젯일이 께름하여 불안중에 있을 줄을 알고 있소. 그런 줄 알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혜경이에게 부치려 하는 것이오. 그러니까 만일 혜경이가 아직도 나에게 대한 노염이 풀리지 아니하였거든 이 편지는 고이 두었다가 그 노염이 풀리는 때에 읽어 주오. 그리고 영영 노염이 풀리지 아니하겠거든 차라리 다 찢어 없애어 버리고.―"
 
303
노라는 잠깐 붓을 멈추었다. 서두는 이렇게 내놓았거니와 인제 요건을 어떻게 졸가리 잡아 쓸까 하는 것이다.
 
304
"혜경이."
 
305
노라는 다시 이렇게 쓰기 시작하였다.
 
306
"나는 지나간 일 년 가까운 동안에 내가 한 일, 내가 당한 일을 두루 두루 생각하고 그것을 비판하여 한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되었소.
 
307
그것은 이러하오.
 
308
나는 안해를 인형으로 여기고 여자를 노예로 생각하는 남편으로부터 노예가 아니요 한 자유의 인간이 되기 위하여 가정을 나왔소. 이것은 혜경이도 잘 알고 있지요?
 
309
그리하여 나는 자유를 얻기는 하였소. 임노라라고 하는 여자는 아무 것 도거리 낌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의 인간이 되었었소. 그러나 이 자유를 얻은 대신 나는 어떠한 대상(代償)을 치르었소?
 
310
얻은 첫날부터 오늘날 이 시간까지 다만 몸뚱이 하나를 거두어가기 위하 여서만 급급하였었소.
 
 
311
나에게 만일 충분한 재산이 있었더라면 나는 이미 얻은 자유를 마음껏 즐길 수가 있었겠소.
 
312
그러나 먹고 살기에 여념이 없어 얻은 자유를 자유답게 할 수가 없었소.
 
313
이와 같이 말로는 자유를 얻었지만 먹고 살 힘이 없는 몸이니 나는 할 수없이 불구자요 저능아에게 가갸거겨를 가르치러 다닌 것이오. 그러다가 필경은 그 창피를 보았으니 이러고도 내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소?
 
314
그 다음 나는 화장품 장사를 시작하였지요.
 
315
역시 먹고 살려는 것이었지 별게 없었소.
 
316
자유로운 몸이라면서 어찌 그다지도 구구하게 화장품 담은 가방을 들고 문전 문전 굽실거리며 하나 팔아 달라는 애원을 하게 되었단 말이요!
 
317
그러나 그걸로도 목구멍에 풀칠을 하지 못하게 되어 필경은 매춘부의 무리가 시끌버끌한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한가지로 얼굴과 웃음을 팔게 되었소.
 
318
웃음과 아양을 팔 수 있는 자유!"
 
319
후 하고 한숨을 내어쉬며 노라는 붓을 멈추었다. 그 다음의 말을 쓸 까말까 망설이는 것이다.
 
320
잠시 생각하던 끝에 그는 입술을 다물고 다시 쓰기 시작한다.
 
321
"혜경이.
 
322
나는 어젯밤에 아무것도 없이 다 없어진 내 몸뚱이에 최후로 남은 한 가지것 ― 정조를 마지막으로 빼앗기고 말았소. 어느 남자가 나에게 그것을 팔 기를 간청하였소. 만일 내가 앞으로 생활이 더 궁하여 간다면 나는 나의 정조를 자진하여 팔았겠지요. 사실에 있어서 시간 문제이지 나는 오래지 아니하여 최후의 한 가지인 정조를 팔아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 빤히내어다 보이는 사실이었소.
 
323
그런데 그 남자는 성급히 구느라고 시기를 기다리지 못하여 나에게 술과 흥분제를 먹여 반강제로 내 정조를 빼앗았소. 그러나 결국은 일반이겠지요.
 
324
이리하여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어진 것이 없소. 사랑하는 자식을!(아! 혜경이! 나는 어린아이들을 생각하면 천지에 용납지 못할 죄를 지었소.) 남편과 가정을 내버리고, 명예와 자존심은 여지없이 짓밟혔고, 가장 정답 던 동무는 절교를 선언하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조를 빼앗겨 버렸고…… 자, 그러니 허울 좋은 자유 ― 자유롭게 행사할 수 없는 헛자유를 얻기 위 하여 나는 너무도 크나큰 대상을 치르지 아니하였소?
 
325
배고픈 자유, 외로운 자유, 먹기 위하여 노예가 될 자유, 먹기 위하여 웃 음과 아양과 정조를 파는 자유! 그리고 천륜(天倫)을 짓밟는 자유!
 
326
혜경이, 이것이 과연 자유일까?…… 천만에!
 
327
지금 나에게 남기어진 한 가지 수단은 웃음과 아양과 정조를 팔아서 그것으로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것밖에는 없소.
 
328
이렇게 살아가고도 과연 인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329
노예가 되는 자유, 웃음과 아양과 정조를 파는 자유, 그렇지 아니하면 굶어 죽는 자유, 또 그렇지 아니하면 자살을 해버리는 자유!
 
330
이 가운데서 나는 자살을 하는 자유를 택하였소.
 
331
왜 자살을 하느냐고?
 
332
그러나 무엇하러 살아 있겠소? 내게 무엇이 남은 것이 있길래 살아 있을 애착을 가지겠소?
 
333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 이상으로 더 나아가서 이 문제를 생각할 수가 없소.
 
334
조그마하나마 생활의 보장이 있고,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당당히 행세 할 존엄과 자존심이 있고, 여자로서 순결성이 있는 데서만 인생으로서의 생 의의의(意義) 가 있지 아니하겠소?
 
335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하나도 없이 다 빼앗긴 나는 그곳에서 더 나간 딴 세상의 딴 인생과 딴 생활이 있으리라고 믿어지지 아니하오. 그래도 그냥 목숨을 연장시켜 나간다면 그것은 산송장이 아니면 금수겠지요.
 
336
혜경이.
 
337
혜경이는 인제 비로소 후회를 하느냐고 할 테지? 그러나 천만에!
 
338
나는 결코 후회를 하지 아니하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339
사람이 부자유로운 가운데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겠소?
 
340
그러나 결과는 도리어 더한 부자유 가운데서 필경 내 일신을 망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잘못이라고 나는 생각지 아니하오.
 
341
그렇다고 누구의 잘못인지도 나는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였소마는.―
 
342
혜경이.
 
343
내가 이렇게 자결해 버리는 것을 애석히 여겨 서러워하지는 마오. 나는 결코 울면서 죽지 아니하겠소.
 
344
끝으로 몇 마디 부탁이 있소.
 
345
다음날 우리 어머니가 울며 쫓아올라올 테니 잘 위로나 해주시오.
 
346
그리고 남수네 집에 별로 밥값으로 밀린 것은 없으나 카페에서 빚진 것이 있으니 내가 가진 세간 나부랭이를 전부 팔아 그것을 갚고, 장례는 요전 옥 순이 때처럼 화장으로 간단히 해주시오.
 
347
그리고 그 다음 어린것들인데, 인제는 이 모양이 된 어미로서 자식들을 이름조차 부르기도 부끄럽소. 아무것도 뉘우치지 아니하고, 이러면서도 나는 어린것 들을 생각하면 이것이고 저것이고 도무지 입을 열어 말할 염치조차 없소. 내가 죽일 년이오.
 
348
죽는 나의 마지막 소원이니 일후에 어린것들이 자라거든 어미는 일찌기 병들어 죽은 양으로 말하라고 하고, 그리고 나와의 지나간 일은 일장 꿈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라고나 부탁하시오.
 
349
그러면 이만 그치니 부디부디 두 분 의좋게 오래오래 잘 살다가 쉬이 아기나 낳고 재미보아요.
 
350
노라."
 
351
노라는 혜경이한테 쓰는 편지를 마치고 붓을 놓았다. 다음은 어머니한테 해야 할 판이다.
 
352
노라는 남편과의 파탈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어머니에게 숨기어 왔다.
 
353
어머니가 놀라와할 것이 걱정스러워 미룸미룸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354
그는 내심에 생활의 안정이나 얻고 하면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고, 그때에 서서히 이야기를 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서신 왕래는 종종 있었어도 다만 서로 안부와 문안에 그치었고 그러한 이야기는 싹도 비치지 아니하였다.
 
355
그런 때문에 그는 '어머님전 상사리’라고 써만 놓고는 언제까지나 우두커니 앉아서 자주 한숨을 쉰다.
 
356
편지가 가면 어머니가 보고 날뛰며 울고 애통할 정경이 눈앞에 어리어 차마 편지를 쓰지 못하는 것이다.
 
357
노라는 어떻게 하여서든지 이번 일에 어머니가 놀라지 아니하도록 꾸며놓고 싶었으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별 도리가 없다.
 
358
편지를 아니하고 혜경이와 짜고 병으로 죽은 양으로 하였으면 좀 덜 놀라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현과의 파탄을 알린 뒤에의 일이겠으니 역시 난처하다.
 
359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할 수 없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편지를 썼다.
 
360
"어머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361
늙게 홀로 남아 계신 어머니께 이러한 불초의 짓이 다시 있으리까마는 그저 팔자로 여기시고 너무 서러워 마십시오.
 
362
모든 사연은 혜경이에게서 자세히 들으시면 아실 것입니다.
 
 
363
화장을 한 뒤에 백골은 가지고 내려가서 공동묘지 한구석에 묻어 주 십 시오.
 
364
어머니, 내내 몸 편히 오래 살아 계시고 얌전한 일가 사람으로 양자나 하나 들여서 돌아가신 뒤에 제향이나 모시도록 하십시오."
 
365
울지 아니하려고 하면서도 어머니께 편지를 쓰면서도 ― 더구나 애처로운 마음을 억제하고 흔연한 듯이 쓰노라니까 ― 눈물이 복받쳐올랐다.
 
366
두 장의 편지를 다 써서 각기 봉투에 넣고 우표까지 붙였다.
 
367
편지 쓰는 동안이 꽤 시간이 걸리었던지 벌서 땅거미가 지고 전등이 켜진다.
 
368
병택이가 도착된다는 아홉시 이십오분차를 보자면 그래도 두 시간이 넘어 남았다.
 
369
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대강 빗어올리고 수수한 옷을 찾아 입고 마루로 나섰다.
 
370
마루에 언제 가져왔는지 석간신문이 놓여 있다.
 
371
병택이에 관한 무슨 기사나 났나 하고 들치어 보니까 그런 것은 없고 어제 저녁에 김이 소동 일으키던 것이 조그맣게 났다.
 
372
노라는 경황이 없는 중에도 그래도 자기에게 좋잖은 소식이나 나지 아니하였는지, 또 자기의 본성이 드러나지나 아니하였는지 궁금하여 기사를 읽어 보았다.
 
373
"카페에서
 
374
음독소동
 
375
십구일 밤 열한시경에 시내 종로 ×정목에 있는 카페 사탄에서는 그 곳의 여왕이라고 일컫는 여급 '스미레’(가명) 앞에서 음독을 하려다가 실패한 청년의 용감(?)한 희극이 생기었다.
 
376
그 청년은 방금 시내 모 전문학교에 재학중인 김성택(가명)으로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에 전기 스미레라는 여급에게 짝사랑을 하며 결혼을 하자고 조르다가 실패를 하였다. 그는 그 뒤 절망과 우울 속에서 지나오다가 드디어 결심을 하고 전기와 같이 스미레 앞에서 맥주잔에 다량의 모르핀을 타서 마시려는 순간에 스미레가 제지하여 독은 마시지도 못하고 일장의 웃음 거리를 연출한 것이다."
 
377
노라는 안심을 하고 신문을 도로 놓았다.
 
378
"어데 가나?"
 
379
남수 어머니가 노라의 차리고 나오는 것을 보고 걱정스럽게 묻는다. 종일 들어 앉아서 울고 편지를 쓰고 하더니 전보다 차림새를 달리하고 나가는 것 이 불안하였던 것이다.
 
380
"잠깐 다녀와요."
 
381
이렇게 천연스럽게 대답은 하나 무의식중에 자기의 거처하던 방안이 한번 돌려다 보인다.
 
382
"시장헐 텐데…… 그렇게 먹질 아니해서 어떡허나!"
 
383
"괜찮어요."
 
384
그 길로 노라의 발길은 계동을 향하였다.
 
385
노라는 마지막으로 어린아이들을 만나볼까 하고 계동 옛집으로 갔다. 내심에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니 한번 먼빛으로라도 바라보고 싶었다.
 
386
그뿐 아니라, 주저하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387
어린아이들을 시골로 보내겠다고 한다는 말은 진즉 병원에 있을 때에 들었으니 그동안에 내려보냈기가 십상일 것이다.
 
388
또 현이 집에 있기가 쉬운데 지금 와서는 더구나 마주치기가 거북하였다.
 
389
그러나 그러한 것쯤이야 당하더라도 요행히 아이들이 그대로 있어서 만나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하였다. 계동 어귀에 들어서니 길이 새삼스럽게 낯이 익다.
 
390
길바닥의 어디가 높고 어디가 얕았던 것까지 다 발에 익은 듯싶다.
 
391
전에 우중충하던 위생소 자리는 말끔하게 헐어버리고 헌칠하게 집터를 닦아놓았다. 길 좌우 옆으로 늘어선 가가 사람들이 모두 낯이 익고 방금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 같다.
 
392
집 문앞에 당도하니 우선 혜경이한테 들은 양관이 벌써 준공이 되어 크림 빛 사기벽돌로 화장을 하고 어둠침침한 속에 뚜렷이 서서 있다.
 
393
그것을 보니 말할 수 없는 시기가 가슴을 치받친다.
 
394
대문은 전처럼 닫기어 있다.
 
395
노라는 몇 번이나 문앞에서 망설이다가 기운을 내어 대문을 밀치고 다시 중문을 거치어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396
집안이 빈집같이 고요하다. 노라는 우선 낙망을 하였다.― 어린 아이들이 없는 것이라고.
 
397
대문 소리를 듣고 하인들이 거처하는 뜰아랫 방문이 열리며 낯선 여편네가 고개를 내민다.
 
398
"누구요?"
 
399
그는 노라를 보고 이렇게 묻는다.
 
400
노라는 집안이 전부 어디로 이사를 해가지나 아니했나 의심하였다.
 
 
401
노라가 말이 없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그 여편네는 ― 그는 어멈인 듯 하였다.― 툇마루로 나선다.
 
402
"누구세요?"
 
403
"이게 현변호사댁이지?"
 
404
노라는 좀 쑥스럽기는 하나 이렇게 물어보았다.
 
405
"네."
 
406
그러면 딴 집이 되지는 아니한 것이다. 또 이만큼 소리를 내는데 현의 기척이 없는 것을 보니 그가 집에 없는 것이 분명하다. 양관에는 불이 아니 켜졌으니까 아직 쓰지 아니하는 것이니 그곳에도 있을 리 없고, 그러면 아이들이 있기만 하다면 맘놓고 만나고 갈 수가 잇다.
 
407
"나리 어데 가셨어?"
 
408
노라는 다지느라고 물어보았다.
 
409
"출입허셨어요."
 
410
"언제?"
 
411
"저녁진지 잡숫고 나가셨어요."
 
412
아주 안심이다.
 
413
"애기들은?"
 
414
"애기……들이요?"
 
415
"응."
 
416
"애기는 하나두 없어요."
 
417
아뿔싸! 그러면 전부 시골로 내려보낸 것이다.
 
418
이렇게 생각하니 그만 주저앉을 듯이 낙망이 된다.
 
419
"이 댁에 언제부터 와서 있었어?"
 
420
"메칠 아니 되야요."
 
421
"그전 있든 사람은?…… 하나두 없나?"
 
422
"침모는 그전 있든 인가분데 지금 말 갔어요."
 
423
노라는 그래도 불러다가 아이들의 소식을 물어볼까 하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424
"누구세요?"
 
425
그 어멈이 등 뒤에 대고 묻는 것이다.
 
426
"응. 인제 차차 알지."
 
427
노라는 왔다가 기왕 목적을 이루지 못한 바에야 굳이 이편이 왔다 간 것을 알리고 싶지 아니한 것이다.
 
428
어멈이 한 말을 듣고 그렇게 짐작하면 하고 말면 말고 ―.
 
 
429
밖으로 나와서 시간을 보려고 팔을 드니 아무것도 없다.
 
430
혜경이의 편지에 쓴 대로 팔아서 빚을 갚도록 시계조차 떼어놓고 나온 것이다.
 
431
노라는 정거장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몰라 종종걸음으로 내려오다가 우체통에 편지를 집어넣었다.
 
432
어린아이들이 그리워 이 골목을 찾아올라오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 이니라 생각하니 자꾸만 뒤가 돌려다보인다.
 
433
허둥지둥 정거장에 당도하니 아직도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아 있다.
 
434
누구 카페에서 낯익은 사람이나 만나면 창피할 것 같아 대합실을 나와 광장 한편 구석에 비껴서서 시간을 기다렸다.
 
435
사람들은 제가끔 제 일에 분주하여 정신없이 정거장으로 모이고 흩어지고 한다.
 
436
자동차가 두 눈을 부라리며 끊이지 않고 들이닿는다. 전차가 으르렁 거리며 달린다.
 
437
정신이 아득하게 혼란한 가운데 죽음을 한두 시간만 앞에 둔 노라는 다시 지나간 일을 되풀이하여 생각한다.
 
438
아무런 미련도 없다. 애끊는 애착도 없다. 조용히 웃으면서 죽을 것이다.
 
439
즉 생각해오던 끝에는 이렇게 침착하게 마음을 먹으나 그래도 실패한 것이 안타깝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재미있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440
노라는 문득 옥순이의 일이 생각되었다.
 
441
그렇다. 남자의 기반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는 옥순이나 자기나 다 같이 자유로운 몸이었었다.
 
442
그러나 옥순이의 자유도 역시 이 자살을 하는 자유밖에는 아니었었다.
 
443
성희도 자유로운 사람이었었다. 그러나 그의 자유는 밥 대신 정조를 양식 삼는 자유였었다.
 
444
정원이는 결혼도 아니한, 더구나 자유로운 몸이나 역시 돈에 몸을 파는 자유밖에는 가지지 못하였다.
 
445
노라는 그들을 웃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라 자신이 그들의 밟은 자국을 밟고 있을 뿐이다.
 
446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447
겨우 시간이 되자 노라는 입장권을 사가지고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448
차가 식식거리며 세차게 들어서자 사람의 뭉치가 토해 내놓은 것같이 왈칵 쏟아져 나온다.
 
449
노라는 분주히 내리고 하는 사람들을 물색하면서 '묶여오는 사람’을 찾 아 앞으로 나아갔다.
 
450
그러나 사람의 뭉치가 너무 많고 혼잡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앞칸까지 가서도 필경 '묶이어 오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도로 돌아서려는데 쾅 하고 요란스런 총소리가 나며 불이 번쩍한다.
 
451
이어서 쾅쾅 소리가 연해 나며, 그럴 때마다 불이 번쩍거린다.
 
452
노라는 혼이 뜨게 놀라 어리둥절하다가 그것이 자기 앞에 섰는 사람에게 대고 사진을 찍느라고 마그네슘을 터뜨리는 것인 줄을 겨우 알았다.
 
453
노라의 몇 걸음 앞에는 웬 중국 사람이 순사와 양복 입은 사람의 호위를 받고 섰는 것이다. 그가 병택이인 것은 얼굴로 보아가지고는 도저히 알지못하였을 것이다.
 
454
자세히 보노라니까 그의 뒤에 섰는 순사가 포승줄을 잡고 있다. 또 더 자세히 보니까 겨우 병택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455
그러나 그의 얼굴은 너무도 참혹하게 변하고 수척하였다. 의복은 보기 흉 허운 중국 사람의 그것이요, 가시같이 야윈 얼굴에는 굵다란 수염이 시커멓게 자랐다.
 
456
그러나 한 가지 쇠하지 아니한 그의 두 눈은 잔뜩 적의를 머금고 노라가 서서 있는 등 뒤편을 쏘아보고 있다. 그는 미처 노라를 보지 못하였다.
 
457
노라가 등 뒤를 돌려다보니 신문기자인 듯한 사람의 한떼가 우글우글 모 여서서 무어라고 수군거린다.
 
458
그중에도 특히 노라의 주의를 끌기는 어젯밤 사탄에서 만나던 키 작은 신문기자가 동관인 듯한 사람과 또 하나 사진기계를 든 사람과 서서 노라를 연해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것이다.
 
459
'너희가 아무려면 어쩔 테냐.’
 
460
이러한 생각으로 노라는 다시 고개를 돌이켰다.
 
461
"어!"
 
462
그때에 바로 노라의 앞에까지 이른 병택이는 이렇게 놀라운 소리를 가볍게 지르고 발길을 멈추어 선다. 비로소 노라를 발견한 모양이다.
 
463
병택이가 그와 같이 놀라 발을 멈춘 것은 극히 일순간이다. 그래서 그 의뒤에서 호송하는 순사나 형사들도 그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464
병택이는 얼핏 눈을 끔쩍하고는 시치미를 떼고 씽씽 걸어가 버렸다.
 
465
그것이 알은 체를 하지 말라는 것인 줄을 노라도 잘 알았다. 그리하여 딴사람을 찾는 체 두리번두리번하다가 슬쩍 돌아섰다.
 
466
막 돌아서자 웬게 또 마그네슘이 탕하고 터지며 눈이 부시게 불이 일어난다.
 
 
467
"미안합니다.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468
연기가 사라진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키 작은 신문기자와 그의 동관이 싱글싱글 웃고 서서 있는 것이다.
 
469
노라는 성이 슬그머니 난다.
 
470
"왜 사진을 찍으세요?"
 
471
"괜찮아요, 괜찮아요. 자, 우리 저 식당에 가서 차나 한잔 마십시다…… 인제 참고가 될 때가 있을 것 같어서 사진을 한 장 백였으니 너무 노여 말구, 자 갑시다."
 
472
그는 연해 샐샐거리며 발라맞히려 든다.
 
473
노라는 창피한 생각에 누가 보지나 아니하나 하고 둘러보았으나 그들 세 사람과 늦게 내려서 총망히 지나가는 승객 몇 사람의 뒷그림자밖에는 없다.
 
474
"저 볼일 있어 그럴 시간이 없어요."
 
475
노라는 이렇게 해던지고 비껴서서 가버리려 하는데, 또 한 사람이 공순 하게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힌다.
 
476
"승낙 없이 사진을 찍어서 미안합니다."
 
477
그러나 그 은근한 게 노라에게는 더구나 얄미웠다.
 
478
"괜찮습니다."
 
479
"그런데 좀 물어볼 말씀이 있는데요."
 
480
"지금 바뻐요."
 
481
"바쁘시더래두 잠깐만…… ""여보 유리꼬상."
 
482
키 작은 사람이 다시 나서서 다정한 체하고 유리꼬상을 부른다.
 
483
"그럴 것 멋 있소? 정 그리 바쁘면 멫 마디 대답만 해주구려."
 
484
"무슨 말씀인지 저는 별로 신문사 양반한테 할 말이 없을 것 같어요."
 
485
"오병택씨허구 같은 고향이라지요?"
 
486
다른 한 사람이 다시 나서서 이렇게 묻는다.
 
487
"네."
 
488
"최근에 언제 만났어요?"
 
489
"올 봄에 고향에서 만났구는 통히 못 만났어요."
 
490
"그럴 리가 있나요. 오씨도 서울 있었구 당신도 서울 있었는데…… ""그래두 못 만났으니 못 만났다지요."
 
491
"사탄에 가기 전에는 어데 계셨소?"
 
492
"병원에 있었어요."
 
493
"병원? 간호부루?"
 
 
494
"입원했었어요."
 
495
"어느 병원에?"
 
496
노라는 이렇게 묻는 대로 대답을 하다가는 필경 본성을 조사할 거리를 장만 하여 주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497
"그러면 입원하기 전에는?"
 
498
"그것두 말씀할 수 없어요."
 
499
그들은 번갈아가며 여러 가지로 꾐수를 써서 노라의 입을 열려고 하였으나 필경 아무것도 더 얻어듣지 못하였다.
 
500
정거장 밖으로 나와서 둘러보았으나 병택이는 이미 갈 데로 실리어 가고 보이지 아니한다.
 
501
인제는 할 일도 다 해놓았으니 마지막의 남은 일을 결행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강 가는 전차를 잡아탔다.
 
502
밤이 깊었으면 젊은 여자가 단신으로 철교를 향하는 게 수상 스러웠겠으나 아직 열시밖에 아니 되었고, 또 철교 난간에 서 있는 사람도 더러 있어 노라는 무난히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503
달도 없는 그믐밤이다.
 
504
어둠 속에서 강물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505
멀리 철교 아래에서 고기잡이배인지 불 하나가 반짝이다가 그나마 사라져 버린다.
 
506
노라는 지나가는 사람이 수상히 여기지 아니하도록 천연덕스럽게 난간에 기대어 서서 마음으로 세상에 작별을 고하였다.
 
507
그러고 나서 사람의 통행이 드문 틈을 얻어 난간을 넘으면서 그대로 아래를 향하여 거꾸로 떨어져 버렸다.
 
508
용산 철도병원 입원실의 한 방…… 사방 벽이 하얗고 덮개도 하얀 침대에 혼곤히 잠이 들어 있는 것이 노라요, 그 옆 걸상에 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노라의 야윈 얼굴을 굽어다보고 있는 것이 혜경이다.
 
509
노라가 철교에서 몸을 던지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기적도 우연도 아니다.
 
510
한강 건너서 보트 영업을 하고 사는 한 가족이 있다. 그들은 편의대로 오서방네라고 하여 두자.
 
511
그들은 그새 몇 해 동안 철교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사람을 많이 구하였다.
 
512
친히 아는 손님이 가면 경기도에서 내린 표상장을 내어놓고 자랑을 한다.
 
 
513
이러한 명예(?)가 돌아오는 외에 사람 하나를 구하면 돈도 오 원이 생긴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건지는 것이 그들에게는 일종의 부업이 되었다.
 
514
어젯밤에도 금년 여름 세나게 해먹은 보트 세놓이의 한산한 가을 몫이나마 보느라고 그들 일가족 ― 오서방의 큰아들, 작은이, 세째, 네째 모두 보트장에 나와 있었다.
 
515
수십 척이나 되는 철교에서 사람의 몸이 물로 떨어지는 소리는 결코 심 상치 아니하다. 고기 뛰는 소리가 그만큼 요란스럽게 나자면 고래새끼나 올라오지 아니한 이상 결코 나지 아니할 소리다.
 
516
"철부덕…… 촤르르."
 
517
노라가 물에 빠지면서 이렇게 물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다리 위에 있던 사람이 우선 아우성을 쳤다.
 
518
오서방네 큰이와 둘때는 손재게 보트를 저어 다리 밑에 다다랐다. 그것 이삼 분도 다 걸리지 아니한다. 큰이는 벌써 잠수질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원문】13. 자유의 대상(代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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