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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형의 집을 나와서 ◈
◇ 6. 새로운 첫걸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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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5
채만식
1
人形[인형]의 집을 나와서
2
6. 새로운 첫걸음
 
3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전과 달라 노라는 짐은 배달을 하여 달라고 하고 전차를 탈까 하는데 혜경이가 택시를 불렀다, 옥순이는 누구나 서울을 처음 오는 사람이 경성역에 내린 때처럼 정신이 휘황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맵시 다르게 차린 자기를 자꾸만 치어다보는 것 같아서 사방이 둘러보였다.
 
4
자동차 역시 생전에 처음 타보는 것이다.
 
5
혜경이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들 내외는 안국동 네거리에다 조그마한 잡화점 하나를 내었다.
 
6
첫시험인만큼 처음에 와락 크게 벌여놓지는 못하고 우선 조그맣게 차려놓았으나 앞으로 차차 확장을 할 계획이다.
 
7
가가 뒤로 딸린 집이 있어 그곳에서 살림을 하고 있다.
 
8
그리고 그동안 여러 군데 알아보던 끝에 필운동 어느 집에서 가정교사 하나를 구한다고 하여 노라를 천거하기로 하고 마침 편지를 하려던 차이었었다.
 
 
9
현의 집에는 그 뒤에 한번도 들르지도 아니하였고 길에서도 만나지 못 하였다. 그러나 현이 오래잖아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10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택시가 혜경네 전방 앞에 머물렀다.
 
11
구가가 전방에서 뛰어나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12
노라도 은근하게 인사를 하였다.
 
13
전방은 크지는 못하나마 아담하게 차려놓았다.
 
14
가가 뒤에 있는 살림집으로 들어가니 역시 조그맣고 낡은 집이나 깨끗하게 수리를 하여 놓았다.
 
15
모든 차림새가 재미있는 살림살이인 것을 말하는 것 같다.
 
16
안방으로 들어가서 쉬는 동안에 혜경이는 부엌에서 내려가 식모를 데리고 아침 준비를 하였다.
 
17
아침은 구가도 들어와서 넷이서 한방에서 먹었다. 노라는 구가에게 그동안 취직자리를 마련하느라고 애써준 치하를 하였다. 진심으로 감사하였던 것이다.
 
18
혜경이는 모든 것을 알뜰살뜰 준비하여 놓았다. 건넌방을 깨끗이 치우고노라 와 옥순이를 쉬게 하는 것이다.
 
19
노라와 옥순이는 푹신 잠을 자고 오후에 일어났다.
 
20
두 사람이 맨 처음 손을 댈 것은 셋방을 한간을 얻을 것이었었다.
 
21
혜경이는 기왕 건넌방이 비어 있으니 딴 데 구할 것이 없이 그대로 있으라고 하였다.
 
22
그러나 노라는 혜경이의 정은 고마우나 그렇게 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23
지금 돈이 옥순이와 두 사람 것을 합하면 일백삼십 원은 된다.
 
24
그러니까 만일 필운동의 가정교사 자리가 되기만 한다면 이 돈 가운데서 부엌 한간 방 한간짜리의 전세라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부터라도 복덕방을 뒤지려고 하였다.
 
25
그러나 노라에게는 그보다도 더 급한 일이 있었다.
 
26
세수를 다시 하고 잠깐 다녀올 곳이 있다고 집을 나섰다.
 
27
재동 네거리로 해서 ××유치원 앞에 이르렀다.
 
28
마리아가 금년 일 년 유치원에를 더 다닌단 말을 혜경이한테 들었던 것이다.
 
29
노라는 유치원 안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그대로 문앞에서 기다렸다,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면 곧 만날 수야 있겠지만 울음이 터져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러노라면 다른 아이들과 선생들이 수상하게 볼 것이니 차라리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웬만하면 먼빛으로 얼굴이나 보고 돌아갈 생각을 한 것 이다.
 
30
그리하여 다시 물러나와 멀찍이 서서 기다렸다.
 
31
올망졸망한 아기들이 몰려나온다.
 
32
재재거리며 장난을 하며 나오는 그애들이 모두 마리아인 것 같았다.
 
33
그러나 마리아는 보이지 아니한다.
 
34
인제 나오겠지 생각하고 서서 기다렸다. 한떼가 나간 뒤에는 그쳐 버리고 나오지 아니한다. 유치원 안에는 아직 아이들이 남아 있어 재잘거리는 소리가 요란히 들린다.
 
35
또 한패가 몰리어나왔다. 그러나 종시 마리아는 보이지 아니한다. 노라는 애가 쓰였다.
 
36
일찍 돌아갔나? 혹시 병이 들어 요즈음 유치원에 오지를 못하나?
 
37
그러한 생각을 하니 맥이 풀리어 우두커니 섰는데 맨 나중에 뒤처져서 혼자 나오는 게 마리아다.
 
38
노라는 와락 몸이 솟치어 가려는 것을 겨우 억제하였다.
 
39
그렇다. 마리아다. 머리를 동그랗게 자르고 남색 양복치마 위에 하얀 에프런을 입고 가방을 메고 무엇에 정신이 팔렸는지 땅을 굽어다보면 나오는 것이다.
 
40
노라가 서서 바라보는데 마리아는 땅을 내려다보고 나오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41
어머니 ── 라느니보다 어머니인 듯한 이가 섰는 것을 보고 어린 깐에도 의심이 나서 걸음을 멈추고 잠깐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어머니!"
 
42
외치고 두 팔을 벌리고 달음질을 쳐서 달려든다.
 
43
노라는 처음 피하려 하였으나 어찌 피할 것이냐. 마주 팔을 벌리고 달려가서 덥석 끌어안았다.
 
44
"어머니!"
 
45
"마리아!"
 
46
할말이 더는 없었다.
 
47
어머니와 딸은 이렇게 끌어안고 길 한가운데서 언제까지나 말없이 앉아 있다.
 
48
노라는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억지로 참았다.
 
49
실컷 있다가 마리아가 어머니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만지며 굽어다본다.
 
50
"어머니, 어데 갔다 왔수?"
 
51
노라는 할말이 없다.
 
 
52
"응. 저 먼데 갔다 왔어…… ""먼데 어데?"
 
53
"저 먼데야. 너는 몰라…… ""어머니, 인젠 안 가지?"
 
54
또 대답할 말이 없다.
 
55
"송이 안어주었수? 송이가 자꾸만 엄마 부르구 울었다우."
 
56
노라는 어쩔 줄을 몰랐다. 마리아가 지금 어머니가 먼데 갔다 와서 집에 다녀온 줄로만 여기는 것이다.
 
57
노라는 비로소 길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을 깨닫고 마리아의 손목을 이끌고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58
"어머니, 어디루 가우? 응, 집에 가야지…… ""집에?"
 
59
"응. 집에…… "노라는 기가 탁탁 막혔다. 그러나 속여 둘 수는 없는 것이다.
 
60
"마리아, 엄마는 집에 아니 간다."
 
61
노라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는 없다. 마리아는 눈이 둥그랬다가 나중에는 응석을 부린다.
 
62
"흥 흥. 나는 싫여…… 왜 왜 집에 아니 가? 송이가 엄마 부르구 우는데…… ""송이가 날마다 우니?"
 
63
"그럼."
 
64
"아버지가 안어 주시니?"
 
65
"응…… 그래도 운다나."
 
66
"마리아는?"
 
67
"울지 않었어…… ""마리아는 어머니 보구 싶잖었어?"
 
68
"왜 왜 자꾸만 보구 싶었는데…… ""안나는?"
 
69
"젖어머니허구 논다나."
 
70
"울지 않구?"
 
71
"응."
 
72
"마리아 누구허구 잤지?"
 
73
"아부지허구."
 
74
"송이는?"
 
 
75
"송이두."
 
76
"안나는 젖어머니허구 자구?"
 
77
"응."
 
78
"옷은 누가 입혀주나?"
 
79
"아부지가……"
 
80
노라는 마리아를 다시 그러안고 볼을 비비었다.
 
81
"어서 집에 가."
 
82
하고 마리아가 조른다.
 
83
"응, 마리아, 어머니 말 잘 들어, 응. 어머니는 집에 아니 가…… 그러니까 혼자 가거라. 그래야 착하지."
 
84
"어머니 집에 오면 아버지가 욕허우?"
 
85
"응…… 아니."
 
86
"그럼 집에 가."
 
87
"그래도 어머니는 지금 집에 못 가."
 
88
노라는 현이 오래잖아서 결혼한다는 말을 아침에 혜경이에게서 들은 것을 생각 하였다. 어떠한 여자일지 모르겠으나 이 아이들의 계모다.
 
89
"계모…… 계모…… "하고 그는 속말로 중얼거렸다.
 
90
마리아는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고 큰길로 나섰다.
 
91
노라는 아무 생각 없이 마치 쇠가 지남철에 끌리는 것처럼 마리아가 끄는대로 발길을 옮기어 놓았다.
 
92
무심중에 마리아에게 손을 끌리어 재동 파출소 앞에 이르렀을 때에 앞에서 "마리아."
 
93
하는 부르는 소리, 그 소리가 노라의 귀로 들어오며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것 같았다.
 
94
현이다. 만일 이곳에서 이렇게 현을 만나지 아니했으면 노라는 마리아에게 끌리어 집으로 갔을 것이다.
 
95
우뚝 섰는 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쳤다.
 
96
현의 얼굴은 성이 났는지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분간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찢어질 듯이 긴장이 되었다.
 
97
노라는 고개를 숙였다. 일순간의 일이다.
 
98
마리아는 좋아하면서 "아버지! 어머니 왔수."
 
99
하고 잡았던 어머니의 손을 끌고 아버지에게로 가려고 한다.
 
 
100
혹시 이것이 파탈이 생기던 그 이튿날만 같았서도 노라는 제이차의 파탈을 각오하고라도 집으로 갔을 것이다.
 
101
그러나 틈은 너무 크게 벌어지고 일은 너무 공교스러웠다. 노라는 속으로 "내가 죽일 년이다."
 
102
하고 나무라면서도 마리아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고 안국동 편을 향하여 걸음을 빨리 옮기었다.
 
103
혜경의 집에 돌아온 노라는 혜경이와 옥순이를 붙잡고 울었다.
 
104
아까 참았던 울음까지 한데 터져나오는 것이다.
 
105
실컷 울고 났을 때에 혜경이가 묻는 대로 노라는 오늘 당한 이야기를 하였다. 혜경이와 옥순이는 아무 말이 없이 잠잠히 듣기만 하였다.
 
106
셋방은 내일 둘러보기로 하고 저녁 전에 혜경이와 같이 노라는 필운동 가정교사 구한다는 집을 찾아갔다.
 
107
사직공원을 끼고 있는 한 이십간짜리 기와집인데 문패에는 김 소사(金召史)라고 써 붙이었다.
 
108
안으로 들어가니 안주인인 듯싶은 하얗게 머리가 세고 깨끗하게 생긴 노인이 흔연하게 두 사람을 맞아준다. 노라에게는 첫인상이 매우 좋았다.
 
109
노인의 말을 들으면 아들과 며느리가 다 일찍 죽고, 영감도 삼 년 전에 마저 죽고 몸이 성하지 못한 스물한 살 된 손자와 다리가 병신인 열두 살 먹은 손녀를 데리고 하인들과 살아가는데 손녀가 자꾸만 학교에 가겠다고 조르나 병신을 남의 앞에 내어놓기가 창피하여 가정교사를 구해 두고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110
그러니까 그애 ── 이름은 효정이라고 부른다 ── 를 데리고 보통학교에서 하듯이 매일 여러 가지 과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111
안노인인 깐으로는 말하는 것이 매우 시속에 밝았다.
 
112
"학교에서는 교사 하나에 한 사십 원씩 준다구? 나도 그만큼 드리잖 얼수야 있소. 박한 돈에 괴롭겠지만 그런 대로 좀 보아주시우."
 
113
하고 노인은 승낙하는 뜻으로 청을 하였다.
 
114
노라는 의외로 대우가 좋은 것 같아서 단번에 승낙을 하였다.
 
115
"그런데 바깥양반이 계시우?"
 
116
하고 이야기가 결정된 뒤에 노인이 묻는다. 노라가 대답을 못하는 것을 혜경이가 얼핏 "혼자 되었답니다."
 
117
하고 둘러대었다.
 
118
"어! 거 안되었군! 젊은이가……저렇게 얌전헌데……그러면 숙식은 어떻 게 허시려?"
 
119
"아직 이 동무 집에 있는데 시골서 온 동무가 또 하나 있고 해서 방을 한간 얻어야겠읍니다."
 
120
하고 노라가 대답하였다.
 
121
"웬만허거든 우리 집에 와서 아주 숙식을 하고 계시구려…… 저 건넌 방을 그애 공부하는 방으로 쓸 테니깐 그 방에서 거처를 허시구…… "노라도 그랬으면 좋겠으나 옥순이를 데리고 올 수는 없고, 그렇다고 혼자 두어 둘 수도 없는 일이라 당분간 옥순이 문제가 귀정되기까지는 셋방을 빌어가지고 있겠다고 하였다.
 
122
"아기는 어데 갔읍니까?"
 
123
하고 입때까지 그애가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124
"응……오늘 마침 제 외가에 가고 없어서…… "노인이 막 대답을 하는데 방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웬 사람(같은 것) 하나가 들어선다. 노라는 하마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125
그것은 사람 같은 것이라고 하였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사람과 같지 아니하였다.
 
126
얼굴은 뜨는 메주같이 검누렇고, 쇠터럭인가 싶은 머리털은 세어보고 싶을만큼 엉성하게 성글다.
 
127
눈은 경풍난 아이같이 핼끔하고, 왼편으로 틀어진 채 헤벌린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른다. 전신에 비하여 머리가 놀랍게 큰 중에도 귀 ── 바른 편귀는 엄청나게 크다. 몸은 왼편팔 왼편다리가 다 말을 듣지 아니하여 팔은 제멋대로 흔들리고 다리는 질질 끌린다.
 
128
이 모양을 하고 문을 슬며시 밀고 들어서면서 제딴에는 웃는 모양이나 어쩐지 웃는다는 것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129
노라는 놀랄 것을 주인에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겨우겨우 안색을 가다듬었다.
 
130
"너는 사랑에 있지 무엇허러 들어와?"
 
131
노인이 나무라듯 타이른다. 그러나 그는 문지방을 잡고 서서 나가려고는 아니하고 도리어 재주를 피운다.
 
132
"헤, 색지 색지 고아."
 
133
하고 노라와 혜경이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다. 역시 왼편 하악골이 말을 듣지 아니하여 쉴새없이 침이 흐른다.
 
134
노라와 혜경이는 끔찍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오면서 사흘 후부터 오겠다고 말은 하여두었다.
 
 
135
두 여자는 그 집을 멀리 떨어져서야 한숨을 약속한 것처럼 후 내쉬었다.
 
136
혜경이는 구가의 친구 부인의 소개로 노라를 천거란 것이지 그 집의 내용은 몰랐던 것이다.
 
137
"그게 무어냐."
 
138
"글쎄 그게 무어야!"
 
139
둘이서 이렇게 서로 물었다.
 
140
"나는 그만 둘까버."
 
141
노라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142
"그만둘 거야 없잖어…… 그 사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니까."
 
143
"그래두……"
 
144
"글쎄 께름하긴 하겠지만 그만큼 조건이 좋은 데가 어데 쉽사리 있수
 
145
?…… 그런 대루 그저 한동안 질끔 참구려. 그러다가 딴 데 존 자리가 있으면 구해가기로 허구…… "혜경이는 사리를 타서 권고를 하였다.
 
146
집에 돌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옥순이는 이마를 찌푸리며 작 파하라고, 구가는 그대로 한동안 있는 것이 좋겠다 한다.
 
147
노라는 역시 조건이 좋은 데 끌리어 그렇게 하려고 마음에 작정을 하였다.
 
148
이튿날은 옥순이를 지리도 구경시킬 겸 세 사람이 셋방을 구하러 일 찌기 나섰다.
 
149
계동과 원동 재동은 노라가 발길도 아니 들여놓고 안국동 송현동으로 부터 복덕방을 기웃거리며 뒤져 올라가다가 소격동 깊숙한 복판에서 썩 맘에 드는 놈을 찾아내었다.
 
150
대문을 들어서면 안대문이 있고, 왼편으로 안채와 등을 지고 앉은 사랑 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바로 널찍한 툇마루가 딸린 간반 방이 있고, 그 담으로 반간 부엌이 붙어 있다.
 
151
앞이 막히어 여름에는 좀 덥겠고, 또 초가집이라 우중중하기는 하나 변소까지 따로 있어 이만한 것을 다시 구하기는 썩 어려울 만하다.
 
152
삭월세로 팔 원, 전세로 일백이십 원을 내라고 한다.
 
153
세 사람은 곧 내려가서 구가를 돈을 얼마간 주어 올려보냈다.
 
154
그가 올라가더니 전세로 백 원에 작정하고 우선 계약금 십 원을 준 계약서와 영수증을 받아가지고 왔다. 이튿날은 구가가 올라가서 손댈 데 손도 대고 도배까지 말쑥하게 하여놓았다. 그 뒤의 수속도 물론 그가 다 맡아서 하여 주었다.
 
155
노라는 그처럼 입안의 혀같이 알뜰히 일을 보아주는 구가가 고마왔다.
 
 
156
조그마한 솥 남비 그릇 같은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쌀도 몇 말 사오고, 그리하여 사흘 되던 날 집을 들었다. 혜경이는 장과 반찬거리를 식모 시켜서 날라다 주었다.
 
157
이렇게 하여 자리를 잡고 들어앉으니 노라는 겨우 숨이 도는 것 같았다.
 
158
그러나 수중에 남은 돈이라고 몇 원이 못되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159
나흘째 되는 날은 아침 일찌기 필운동을 갔다.
 
160
"가갸."
 
161
"가갸."
 
162
"거겨."
 
163
"거겨."
 
164
노라가 효정이를 가르치러 다니기 시작한 지 나흘째 되었다.
 
165
나흘 동안에 언문 '가’자 한 줄을 가지고 사제간에 진땀을 뽑고 있는 것이다.
 
166
아이는 나이에 비교하여 발육이 더디었다. 다리는 물론 보기 전에 그 할머니가 말한 대로 병신이다. 병신이라는 것보다도 왼편다리는 전체가 모체에서 나오던 때 그대로 통히 발육이 되지 아니하였다.
 
167
몸통이나 얼굴은 한 일곱 살쯤 먹은 아이라고 하면 꼭 알맞을 만하였다.
 
168
아홉 살 난 마리아를 생각하고 효정이를 보면 아주 어른과 아기를 비교 하는것 같았다.
 
169
신체는 그렇거니와 지능은 그보다도 더 저능하였다. 겨우 네 살 난 송이만도 못하다고 노라는 생각하였다.
 
170
그러하리라는 선입감이 들어서 그런지 이상스럽게 큰 눈이라든지, 맺힌 데가 없어 보이는 표정이 생긴 것부터 저능아의 타입으로 되기는 하였다.
 
171
그러면서도 무엇이나 제 호기심을 끄는 것이 대한 천착성은 무섭게 억세었다.
 
172
"이게 무어유?"
 
173
글을 배우기 시작한 이튿날 그는 노라의 핸드백을 가리키며 물었다. 첫날도 그의 온 정신은 거기에 팔려 있었다.
 
174
"핸드백이라는 거야…… 너도 인제 자라면 사가지지."
 
175
노라는 속을 열어보이며 설명을 하여주었다.
 
176
"어데서 났수?"
 
177
"샀지."
 
178
"어데서 샀수?"
 
179
"상점에서."
 
 
180
"상점이 어데유?"
 
181
"종로."
 
182
"종로가 어데유?"
 
183
"저기…… 예서 멀어 …… 너 종로 아니 가봤니?"
 
184
효정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나 눈은 멍하니 앉았더니 공부하던 것을 집어치우고 저의 할머니를 졸라 기어이 그 당장에 하인을 시켜 핸드백 ── 그것도 노라가 가진 것과 꼭 같은 놈 ── 을 사가지어서야만 직성이 겨우 풀리었다.
 
185
이렇게 아이가 저능하고 게다가 성질이 유난스럽지만 노라는 벌이도 벌이려니와 자기의 아들딸에게 못 붙이는 정이나마 붙이고 지내려고 처음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186
핸드백을 사서 가진 이틀 동안은 익히든 못 익히든간에 시키는 대로는 곧잘 공부를 하더니 오늘은 또 무슨 변덕이 났는지 비실비실한다.
 
187
"가갸"하고 읽어주면 마지 못하여 따라 읽기는 하나 입에다 손가락을 물고 한눈을 판다.
 
188
"가갸."
 
189
"가갸."
 
190
"거겨."
 
191
"거겨."
 
192
"고교."
 
193
"고교."
 
194
"인제는 너 혼자 읽어봐."
 
195
"………"
 
196
"잊어바렸어?"
 
197
"………"
 
198
"자, 읽어봐."
 
199
그래도 대답을 아니하고 멍하니 앉아만 있다.
 
200
"그러면 아이우에오 배울까? 응?"
 
201
"………"
 
202
"그러면 글 배우기 싫으냐?"
 
203
그래도 대답을 아니한다. 노라는 갑갑증이 나서 저 하는 대로 내버려 두 고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204
효정이는 한참이나 그렇게 앉았더니 발딱 사이에 있는 책상을 짚고 일어서서 마루로 난 샛문을 홱 열고 콩콩콩 외다리로 뛰어 안방으로 가버린다.
 
 
205
노라는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우두커니 앉았노라니까 안방에서 무어라고 말소리가 나더니 왕 하고 울음이 터져 나온다.
 
206
"아가, 왜 우니? 응?"
 
207
할머니의 곰살갑게 달래는 소리가 들린다.
 
208
"왜 울어? 응? 말을 해라."
 
209
노라는 혹 자기가 잘못하여 아이의 노여움을 산가 싶어 불안하였다.
 
210
"왜 우냐? 공부하기 싫으냐? 글 배우기 싫여?"
 
211
할머니가 연해 달래나 종시 듣지 아니하고 울기만 한다.
 
212
노라는 안방으로 건너가서 달래어보려고 일어서는데 노인이 손녀를 업고 건너온다.
 
213
울음은 겨우 그쳤으나 말은 하지 아니한다.
 
214
노라가 노인의 안색을 살펴보니 약간 불쾌한 빛이 보이는 것이 역시 추측한 대로 자기가 잘못하여 어린아이의 노여움을 산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215
노라는 그것이 아니꼬왔으나 꿀꺽 참았다.
 
216
"응, 효정이 왜 울었니? 말을 해봐."
 
217
"그래라. 선생님한테 말해라. 인젠 공부하기 시작했으니깐 그렇게 엉 석을 부리면 못써…… 그러다가 선생님이 가구 아니 오시면 너 공부도 못하지."
 
218
선생님이 가고 아니 온다는 할머니의 말에는 좀 겁이 났던지 식식하던 고집이 풀어지는 듯하였다. 노라는 좋은 위협거리가 생긴 것이 속으로 기뻤다.
 
219
"그래, 네가 정 그러면 난 가고 아니 온다…… 자, 이리 와요…… 왜 그러니? 공부하기 싫어서?"
 
220
노라는 주인의 자기에게 대한 혐의를 벗을 생각으로 기어이 효정이가 그렇게 고집을 쓰고 우는 이유를 캐러들었다.
 
221
"그애가 무엇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러는데…… 너 무엇 사가지고싶으냐?"
 
222
할머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223
"응"
 
224
"무엇?"
 
225
얼핏 노라가 물어보았다.
 
226
"창가 배우는 것…… ""창가 배우는 것이 무얼까?"
 
227
"이렇게 이렇게 하면 소리 나는 것 말이야."
 
228
효정이는 손과 외다리로 시늉을 내는데 풍금이란 말이다.
 
 
229
그는 요전 외가에 갔을 때에 풍금을 새로 사다놓고 제 외사촌들이 창가를 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때 할머니를 바로 졸랐으련만 선생이 온다 글을 배운다 하여 그것을 잊었다가 오늘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230
노라의 설명을 듣고 노인은 두말 아니하고 돈 오십 원을 안방에 가서 꺼내다 주며 풍금을 사다 달라고 한다.
 
231
노라는 돈을 그대로 두어두고 본정 악기점에 가서 조그만 것으로 하나 골라 배달을 시켰다.
 
232
풍금을 가져다 놓고 소리를 내니까 효정이는 처음 보게 좋아하였으나 노라에게는 괴로운 일이 한가지 생기었다.
 
233
노라는 우선 유행하는 동요를 한 곡조 거푸 들리어 주었다.
 
234
효정이는 풍금 옆에 바싹 다붙어서서 노라의 키 위에서 오고가는 손을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려고 주의를 하고 있다.
 
235
침모 식모 안잠자기 행랑어멈 모두 앞문 앞으로 마루로 모여서서 신기한 기계 속에서 울어나오는 묘한 소리에 감탄을 하고 있다.
 
236
그들은 모조리 늙은이들이다.
 
237
하얗게 머리가 센 주인마나님을 비롯하여 누구나 다 오십이 넘은 늙은이들이다. 여자 쳐놓고는 젊은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가 없다. 노라는 처음은 그다지 이상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나 나중에야 비로소 그것을 알고 과연 그러이 여겼다.
 
238
이렇게 모두 늙은이들인데다가 풍금이라고는 처음 구경인 듯하다.
 
239
"조화속이야."
 
240
"사람이 들어앉었겠지 멀."
 
241
"귀신을 잡아넜어."
 
242
"아이구 끔찍해라."
 
243
"귀신이면 여편네 귀신이 겠지…… ""멀, 사내 소리도 나는구먼."
 
244
"사내 귀신 여편네 귀신 둘을 잡어넌 게지."
 
245
"아무려나 귀신을 부리니 재주다."
 
246
"젊은 아낙네가…… "이런 소리를 귀결에 들으면서 노라는 이어 두어 곡 짚노라니까 구경꾼들 이모두 헤어졌는지 등 뒤가 갑자기 조용하여졌다.
 
247
그리하여 무심코 걸상에서 일어서서 효정이를 그 자리에 앉혀 주려고 몸을 돌리다가 "으악!"
 
 
248
하고 소리를 쳤다.
 
249
처음 왔을 때 보던 반신불수가 헤 하고 서서 있는 것이다.
 
250
그는 요란하게 몸짓을 하며 노라에게로 가까이 덤벼들었다.
 
251
제깐에는 듣지 못하던 이상한 소리를 좇아 들어온 것인데 전날에 보던 그 ' 고운 색시’가 조화를 부리고 있는 것이 더욱 재미가 있어서 기어 들어온것이다. 구경꾼들은 그 서슬에 모두 달아나 버렸다.……
 
252
그는 손으로 풍금을 가리키며 헤헤 하고 웃는다.
 
253
그런 소리를 더 내어보라는 청인 듯싶다. 그러나 노라는 몸이 떨리고 정신이 없다.
 
254
그러자 이 침입자에게는 노상 적의를 가졌던지 효정이가 그를 떼밀듯이 벼르면서 외친다.
 
255
"할머니!"
 
256
"왜 그러느냐."
 
257
누워서 하는 대답소리다.
 
258
"오빠 좀 보우."
 
259
"원 저놈이 또 들어왔구나."
 
260
노인이 쿵쿵 건너왔다. 노라는 그대도록 무서워하는 것이 미안하여 안색을 바로잡으려고 애를 썼다.
 
261
"이놈, 무얼 하러 들어왔느냐! 나가거라 나가."
 
262
그러나 노인의 소리는 결코 노하지 아니하였다.
 
263
"힝, 저거 저 거…… "병신은 풍금을 연해 가리킨다.
 
264
"선생님, 거 소리 좀 한마디 내어 들려주시오…… 병신이라도 이상스런 건 좋아서."
 
265
노인은 노라에 긴하게 청을 한다.
 
266
노라는 뜨윽하였으나 마지 못하여 아무렇게나 키를 눌러 소리를 내었다.
 
267
마침 사랑에서 그의 시중을 들어주는 듯한 젊은 하인이 들어와서 침입자를 둘러 업었다.
 
268
아니 업혀가려고 힝힝 울며 하인의 머리끄덩이를 쥐어 흔든다.
 
269
노인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안방으로 건너가 버린다.
 
270
노라는 앞으로 그 병신이 아무리 하여도 말썽을 부릴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자리를 잡았다.
 
271
이날은 아무것도 내키지 아니하여 웬만큼 학과를 마치고 오정때에 그 집을 나왔다.
 
 
272
시각이 바쁘게 봄은 명랑하여 간다.
 
273
말쑥하게 봄옷으로 차린 어린 처녀들이 볼에 홍조를 띠고 재재거리며 웃고 지나간다.
 
274
활활 열어젖힌 전차창으로도 봄이 굽어다보이는 듯하다. 수양버들이 한창 제철이다.
 
275
위아래를 하얗게 차린 염집 젊은 아낙네가 흰 파라솔을 가볍게 들고 지나가는 것이 신선 같아 보인다.
 
276
모든 것이 명랑하고 양기롭건만 노라의 기분만은 아예 침울하여 이 맛 살이 펴지지를 아니하였다.
 
277
그것은 아까 그 병신 때문에 놀라고 노인의 태도가 불쾌하였기 때문이라고 노라는 스스로 해석하나 어쩐지 그런 해석만으로는 마음이 흡족치가 아니하였다.
 
278
아까 그 일을 당하는 때와는 딴이로 마음은 마치 손아귀에 꽉 쥐인 세사(細砂) 가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가듯이 진정할 수가 없이 여러 갈래로 헤어졌다.
 
279
그놈을 ── 그렇게 헤어지는 마음을 ── 두꺼운 헝겊에다 꼭꼭 싸서 어느 구석에나 넣어두었으면 싶었다.
 
280
노라는 동십자각 앞에서 집으로 올라갈까 하고 주저하다가 음침한 방안 이맘에 내키지 아니하여 그대로 혜경이를 찾아갔다.
 
281
이사하던 날 갈리고는 처음이다.
 
282
"지금 필운동서 오우?"
 
283
혜경이는 노라와 같이 볕 들여쬐는 마룻전에 걸치어앉으면서 묻는다.
 
284
"응."
 
285
"어찌 이렇게 시름이 없어? 응? 아이들이 또 보구 싶어서?"
 
286
노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287
"그런데 참…… 내가 그렇잖애두 오늘 저녁쯤 좀 갈려구 했는데."
 
288
"왜?"
 
289
노라의 가슴은 성큼하였다. 아이들 이야기가 난 끝에 혜경이의 말하는 양이 아무리 하여도 심상치 아니한 때문이다.
【원문】6. 새로운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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