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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형의 집을 나와서 ◈
◇ 9. 백색 노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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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5
채만식
1
人形[인형]의 집을 나와서
2
9. 백색 노예
 
3
시내로 들어와 형순이를 여관으로 보내고 노라와 혜경이는 집으로 올라왔다.
 
4
주검을 치운 집이다. 주검도 예사 주검이 아니요, 무참한 형상을 한 주검 이다.
 
5
노라는 내키지 아니하는 발길로 강잉하여 중문 안에 들어서니 방금 옥 순이가 나서서 맞이하는 성만 싶다.
 
6
"어떡허려우? 집을."
 
7
혜경이가 마루에 피곤하게 걸터앉으며 묻는다. 노라도 그 옆에 펄씬 걸터 앉았다.
 
8
"글쎄……"
 
9
"그럼 걷어치우고 필운동에 가서 있지."
 
10
"싫여…… 그 병신꼴을 더 볼테니 누가 그것을…… 참 이틀이나 아무 소리 없이 못가서 욕하겠다."
 
11
"내일은 가보구려."
 
12
"응."
 
13
"그러면 같이 있을 동무를 얻어 주까?"
 
14
"누군데?"
 
15
"내 조카뻘 되는 여잔데 ─ 일가래도 그런둥만둥하지만 ─ 저의 어머니하고 있는데 방이 몰린다고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어…… 여자실천상업을 마치고 지금 경성은행에 다니지…… ""사람들이 어쩐지 모르겠지만 그래 볼까…… ""그렇게 해요…… 사람은 괜찮어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지금 내려가서 저녁때 우리 집으로 오라고 전화를 걸어 두께. 이따가 들르구려."
 
16
이러한 상의를 하고 혜경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17
남편의 압제와 가정의 질곡에서 벗어져나와 독립생활을 하는 것이 여자의 자유요, 그것으로 부인은 해방이 되는 것이라는 노라의 신조에 대하여 이번의 비극은 크나큰 동요를 주었다.
 
18
"옥순이는 왜 자살을 하였는가?"
 
19
노라는 찬바람이 휙 돌고 음산하여 보이는 방이나마 들어가 옥순이의 입던 옷 쓰던 물건을 챙기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기었다.
 
20
화장터에서 형순이가 말한 것처럼 재환이와 옥순이와는 멀쩡한 남이다. 다만 재환이의 민적에 처(妻)라는 명목으로 옥순이의 성명 삼 자가 헛되이 씌어 있을 뿐이지 그들은 이미 안해가 아니요 남편이 아닌 것이다.
 
21
그러니까 옥순이는 결혼을 하지 아니한 여자라고도 할 수 있고 남편을 여읜 과부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22
이와같이 남편이 없는 사람이니 남편의 압제가 없을 것이요, 압제가 없는 것은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옥순이는 완전한 자유인일 것이다.
 
23
아무 거리낄 것도 없는 자유로운 몸이 무엇에 대끼어 자살을 할 것인가?
 
24
옥순이는 미상불 고독을 느끼었다. 그것은 노라도 동감이었었다. 둘이다 삼십을 바라보는 젊은 여자니 공규를 지키기가 외롭지 아니할 리가 없는 것이다.
 
25
그러나 그러한 고독쯤은 아직까지 노라에게는 찌개 없는 밥상 푼수밖에는 아니 되었다.
 
26
바글바글 끓는 찌개를 놓고 밥을 먹으면 물론 좋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고 밥을 못 먹을 것은 아니다.
 
27
이미 남이 된 남편이라는 사람이 공연히 머리채를 꺼들고 발길로 차고 욕을 하였다.
 
28
응당 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느 동리개나 짖느니라 치지도 외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편에서도 그만큼 해 갚으면 그만이다.
 
29
옥순이는 가끔 자식이라도 하나 있으면 그것에나 낙을 붙여 살 텐데…… 하였다.
 
30
그러나 노라의 처지로 본다면 그것은 도리어 고통이리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남편에게 소박을 맞고 외롭게 지내니 어린아이나 하나 있으면 위로가 되지 아니할 것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목매어 자살할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31
또 옥순이는 노상 살아갈 걱정을 하였다.
 
32
노라가 언제까지나 둘이 같이 서로 의지하고 지내자고 하였으며 은연중에 옥 순 이의 생활까지도 담당하겠다는 눈치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옥 순이에게는 그것이 미안하다는 것도 있고 또 미더워하지 못한 눈치였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장에 밥을 주릴 지경은 아니었었다.
 
33
인습…… 인습도 그렇다. 이미 한번 출가를 하였다가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여자에게 팔자 고치기를 허락은 아니할지언정 운명에 순종하여 그대로 수난의 여생을 보내는 데는 아무리 가혹한 인습이라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34
그런데 왜 자살을 하였을까. 해방된 몸이니 그 자유를 적극적으로 누릴 수도 있고 그렇잖더라고 운명에 순종하여 수난의 여생이나마 고요히 보낼 수가 있으면서, 그러나 자살을 한 옥순이의 일…… 여기서 무슨 결론이 생기어질 것같이 뱅뱅 돌면서, 그러나 역시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하였다.
 
35
노라는 옥순이의 짐을 다 챙겨놓고 안채로 좀 들어갈까 하는데 성희가 마침 어린아이를 안고 나왔다.
 
36
"동생을 잃어서 적적해 어떡허세요?…… 그리고 저녁이랑 퍽 거식 헐텐데…… " 그래도 차마 밤에 무서워 어떻게 하느냔 말은 못한다. 노라는 어린아이를 받아 안았다. 송이보다 좀 작고 안나보다는 좀 큰 계집아인데 볼 때마다 노라가 자기 어린아이들을 생각하여 귀애하므로 보면 곧잘 따르는 것이다.
 
37
심란한 중에 그 아이를 보니 아이들 생각에 더욱 심란스러워 말대꾸도 잘 하고 싶지 아니하였다.
 
38
"어쩔 수 있나요…… 저녁에 식모나 좀 내보내 주세요. 잠동무나 허게…… ""그렇게 하지요. 그거야…… 아이그 불쌍해! 얌전한 이가…… 어쩌면 글쎄 그렇게!"
 
39
"그러게 말이어요."
 
40
마침 학교에 갔다가 돌아온 성희의 아들 용석이가 안에서 어머니를 찾다가 달려와서 치마에 매어달린다. 노라는 마리아를 생각하고 넋이 나간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다가 뛰어나오듯이 집을 나왔다.
 
41
노라는 재동 네거리의 우체통 옆에 몸을 비껴서서 마리아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42
두시가 지났는데 벌써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행여나 하는 생각에 기다려 보았다.
 
43
한 삼십 분 지나서 낯이 익은 아이들이 한떼 몰려 올라오는 틈에 마리아가 끼여 오는 것이 먼빛으로 보인다.
 
44
와락 쫓아가서 그러안고 싶었으나 또 뿌리치고 돌아설 일이 아득하여 우체통에 몸을 숨겨가지고 바라보기만 하였다.
 
45
저희끼리 재재거리며 길 한가운데로 해서 계동 어귀로 행하고 가는 뒤를 노라의 시선을 연해 쫓았다.
 
46
버스가 퉁탕거리고 지나가고 자동차가 달려오고 자전거가 휙휙 지나가고하는데 아이들을 치지나 아니할까 하여 속이 죄었다.
 
47
노라는 마리아의 그림자가 재동 어귀 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아이들의 사진 일이 생각나서 교동으로 내려갔다.
 
48
그러나 사진집에서는 건판을 이내 찾지 못하였다 돈을 도로 내준다.
 
49
그렇게 부탁한 것을 지금 와서 없다고 하는 것이 화도 나고 섭섭도 하나 할 수 없는 일이다.
 
50
발길을 돌이켜 허덕허덕 혜경이 집에 당도하니 청했다던 손님이 벌써 와서 혜경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51
그는 눈이 번쩍 띄게 훤하였다.
 
52
얼굴이 두툼한 게 복성스럽고 턱과 입모습이 아주 귀염성 있게 생기었다.
 
 
53
저고리는 흰 생수깨끼저고리나 파르스름한 조세트의 프린트한 치마가 대 단 혼란 스럽다. 양말도 순견이다.
 
54
과히 숱이 지지 아니한 머리에 굵다랗게 눌린 웨이브가 얼굴과 잘 얼린다.
 
55
나이는 스물넷 아니면 셋쯤 되어 보이고. ─ 혜경 이의 소개로 인사를 하고 보니 김정원이라는 것이 그의 성명이다 말소리에는 평안도 사투리가 살폿 섞였다.
 
56
혜경이가 사이에 앉아 모든 분별을 정하였다.
 
57
집은 노라가 전세로 얻은 것이지만 그냥 같이 있기로 하고 비용은 삼분 을해서 정원이가 둘, 노라가 하나의 비례로 물기로 하고 살림은 정원이 어머니가 맡아보도록 하기로 하고 ─ 그러나 정원이 어머니에게 살림을 맡긴다는 것은 식모나 안잠자기의 일을 시킨다는 말을 체면 좋게 한 것뿐이다.
 
58
이사는 내일이라도 하기로 하였다.
 
59
"방은 간반이지만 세 식구에는 좀 궁색할 거야…… 정원이 짐이 많으니?"
 
60
끝풀이로 혜경이가 이렇게 묻는다.
 
61
"머 별로 없어요. 반닫이하구 고리 두어 개하구 이불, 책상 그 뿐이지 머."
 
62
"그러면 과히 좁지는 않겠구만…… 참 결혼식은 가을쯤 하게 되니?"
 
63
이 말에 정원이는 얼굴을 조금 붉히고 웃는다.
 
64
"결혼은 무슨 결혼?"
 
65
"약혼했다면서?"
 
66
"약혼? 누구래 약혼해요?"
 
67
"느이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68
"어머니가 괜히 망령이 나서 그래요."
 
69
"잘한다. 늙지도 아니하신 어머니더러 망령났다구 허구! 너무 고를라 말구 웬만한 데거든 결혼 해바리렴…… 잘못하다 노처녀 패차고 나선다."
 
70
"지금도 올드미스라구 허는데."
 
71
"멫 살인데? 스물넷?"
 
72
"셋."
 
73
"그럼 과히 늦지는 않다만."
 
74
"늦고 이르구 도제 결혼을 안하겠쉬다."
 
75
"왜? 실연했니?"
 
76
"피."
 
77
"그래두 염문이 더러 들리든 데…… " "좀 해보구퍼두 눈에 드는 게 없읍디다."
 
78
노라는 혜경이가 만류하는 바람에 저녁을 대접받고 집으로 올라오니 형 순이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79
잠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병택이의 소식을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것을 형순이가 이상하게 여길까봐 망설이다가 그래도 궁금하여 말운을 떠보았다.
 
80
"병택씨네 잘 있어요?"
 
81
말 치고는 모호한 말이었다.
 
82
노라가 시골 있을 때에 병택이와의 사이를 형순이도 의심한 사람이라면 노라의 묻는 말조가 속이 굽어다보이는 것일 것이다. 말을 물어놓고 노라는 저 편의 말대답보다 눈치를 더 여살폈다.
 
83
"네, 그저 여전히 그렇게 지내가지요."
 
84
형순이의 얼굴이 심상한 것을 보고 노라는 마음을 놓고 다시 물었다.
 
85
"그때 종적없이 나갔다든 병택씨는 그 뒤 소식이 있나요?"
 
86
"모르겠어요…… 잠깐 풍편에 들리기는 서울 와서 있다고 그러는데…… 이번 실상 병택이 백씨한테 가서 돈을 좀 취해가지고 왔는데, 서울 간다니까 혹 알 도리가 있거든 병택이 소식 좀 알어다 달라고 그러든데요."
 
87
노라는 병택이가 서울 있다는 말이 처음 솔깃이 반가왔으나 나중 말을 들으니 헛풍문이라 싶어 낙심이 되었다.
 
88
그러나 그러면서도 혹 병택이를 만날 수가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싶었다.
 
89
형순이는 옥순이의 짐 꾸려놓은 것을 짐꾼을 불러다 지워가지고 돌아갔다.
 
90
노라는 문 밖까지 나가 작별을 하고 안집 안잠자기를 청하여 막 이야기를 하노라니깐 재환이가 찾아왔다.
 
91
낮에 홍제원에서 기다려 세워두었던 자동차를 같이 타고 들어오자는 것을 노라는 대답도 아니하였다.
 
92
"날래 찾어가서 저저히 사과라도 하겠읍니다."
 
93
한 소리가 무렴 끝에 한 말인 줄 알았더니 정말 ─ 더구나 오늘밤으로 찾아온 것이다.
 
94
그는 주인이 들어오라는 말도 하기 전에 방으로 덥석 들어앉았다. 하기 야노라는 될 수만 있으면 마루에 선 채 배송을 하고 싶었으니 들어오란 말은 나올 리가 없었던 것이다.
 
95
요전 일이 잘못되었다고 중언부언 늘어놓고 또 옥순이에게 죄를 깊이 졌노라고 그럴 듯하게 참회를 하던 끝에 궁벽스럽게도 야릇한 제안을 하나 내놓 는 것이다.
 
96
"그래서 머 재라도 좀 올려주고 싶어서…… 그걸 상의도 해볼 겸…… "노라는 침이라도 탁 뱉어주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97
"그거야 자량해서 하시지요. 저야 멀 압니까."
 
98
"아니, 그래도 그렇게 같이 다정하게 지내시든 터이니까…… ""그건 염려 마세요. 맘에 섭섭하면 저는 저대로 할 도리가 있으니까요."
 
99
"그러니까 말씀입니다. 기왕 무얼 하신다면 ─ 그래도 재를 올려주는 게 제일 좋을 듯한데 ─ 저도 같이 좀 할까 해서…… 저는 재를 어떻게 올리는것인지 말만 들었지 통히 구경도 못해서요."
 
100
"저도 모릅니다."
 
101
"재라께 별것이나요."
 
102
긴치 아니하게 안잠자기가 한몫 끼고 나선다.
 
103
재환이는 그나마 되었다 싶어 안잠자기를 데리고 한 시간 이상이나 재 올리는 문답을 하다가 차마 아니 떨어지는 것을 억지로 일어섰다.
 
104
"내일 형순이 떠나는데 정거장에 나가십니까?"
 
105
"네."
 
106
"멫시찬가요?"
 
107
"그건 내일 알어보아야 하겠어요."
 
108
노라는 알면서도 짐짓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109
안잠자기는 재환이를 따라나가 중문을 걸고 들어와서 그의 송덕을 늘어놓는다.
 
110
"그이가 요전에 보니깐 그렇게 불량허구 깍정이 같더니 맘은 그렇잖 언 가버요."
 
111
"왜?"
 
112
"돌아가신 이 재를 다 올려줄려구 애를 쓰고 다니잖어요?"
 
113
노라는 웃고 대꾸도 아니하였다.
 
114
주인네 집 이야기를 밖에 나와 털어놓는 것은 ─ 만일 주인집에 불평이 있으면 험까지 첨부해서 ─ 안잠자기네의 없지 못할 소일거리다.
 
115
자리에 누우니 이야기가 벌어져 나온다.
 
116
"안채에서는 건넌방 학생들을 내일 아침에 다 내보낸대요."
 
117
"응…… 왜?"
 
118
"친정어머니는 시골 있는 아들한테로 내려가구."
 
119
"그러고 어쩔 양으루?"
 
120
"시집간대유."
 
 
121
안잠자기는 귀속말을 하듯이 가만히 소곤거린다.
 
122
"응? 시집?"
 
123
노라는 역시 작은 소리로 가만히 물었다. 호기심도 나려니와 또 같이 있을 사람까지 청한 터인데 집일이 걱정이 되는 것이다.
 
124
"가진 않는대유 온대유."
 
125
"거 무슨 소리요? 시집을 가는데 가진 않다니? 오는 건 또 무어구?"
 
126
"그이가 온대유."
 
127
"그이라께?"
 
128
"저, 통안서 전당국하는 인데 아주 퍽 부자래유."
 
129
"그런데 왜 친정어머니는 시골로 내려가시는고?"
 
130
"몰라유…… 단촐하게 지낼려구 그러는 거지요…… 다달이 돈을 보내주기로 한다는데유…… 그렇지만 그 양반이 여기 와서 노 있지는 않는대유. 가끔 다니지."
 
131
그렇다면 소실인 것이다. 노라는 노라이니만큼 생활은 어렵고 짐은 무거운 젊은 과부 하나가 전당국 영업을 하는 사람의 첩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심상 히 들리지 아니하였다.
 
132
그는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묻고 싶었으나 안잠자기는 그밖에 더 아는것이 없어 두고 보리라고 속치부를 하였다.
 
133
이튿날 필운동에서 오정때쯤 나와 정거장에 나가서 누이의 백골을 안고 돌아가는 형순이를 혜경이와 같이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혜경이도 같이.
 
134
 
135
이사해 온 짐이 마루로 대뜰로 그득히 놓여 있고, 정원이 어머니(인듯 싶은이) 가 마룻전에 걸터앉아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다.
 
136
언뜻 보기에도 얼굴이 어제 보던 정원이의 모습과 방사하다.
 
137
나이는 오십이 되었다고 어제 혜경이 집에서 들었는데 머리털 하나 희지아니하고 얼굴에 주름살도 별로 잡히지 아니한 것이 아직도 기운이 정정 하여 보인다.
 
138
"아이구 형님, 벌써 오셨네!"
 
139
"아이구 동생이로구려! 이렇게 찾어와 주느라 구…… ""이 어른이 정원의 어머니야…… 형님, 이 사람이 같이 있을 이예요."
 
140
혜경이가 번갈아 소개를 한다.
 
141
"예 그렇수…… 내가 정원이 에미외다. 성씨가 뉘시유?"
 
142
"임갑니다."
 
143
"예, 님씨요…… 혼자 되었다디요?"
 
 
144
"네."
 
145
노라는 속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어제 혜경이가 정원이와 먼저 만나 역시과 부로 소개하였다더니 정원이는 그 어머니한테 그대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생각 하였다.
 
146
"원 저런! 딱한 일도 다 있지! 젊은이가…… 하기야 나두 서른넷에 혼자 되야서 이내 살어왔지만."
 
147
"아니, 이 집은 과부 도가청인가! 하하하하."
 
148
혜경이가 소리를 내어 웃는다. 노라도 생각하니 우스웠다.
 
149
노인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따라 웃으며 묻는다.
 
150
"어데 또 과부가 있나?"
 
151
"이 안집에 둘이 있고 또 이 방에 하나가 있었드랍니다."
 
152
혜경이는 옥순이가 자살을 하였다는 말은 아니하였다.
 
153
노라는 혜경이를 대접하는 요량으로 중국 음식을 시켜다가 성희까지 청 하여 점심을 먹었다.
 
154
노라는 성희가 다시금 치어다보였다.
 
155
한편 생각하면 사람이 비루한 것도 같으나 한편 생각하면 불쌍도 하였다.
 
156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아서 그런지 그는 어깨가 처지고 낯꽃이 심란 스럽고 침울하였다.
 
157
그는 평소에는 결코 침울한 여인은 아니었었다. 훤하게 틘 얼굴이 위엄도 있거니와 그만큼 언행이 점잖았지만 어느 편이냐 하면 명랑한 성격이 있었다. 모습은 전에 미인의 호를 듣던만큼 비록 때아닌 서리에 시들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뚜렷이 고운 자취가 남아 있다. 따라서 중년에 들어선 남자의 마음을 끌기에 알맞다고 할 수가 있었다.
 
158
점심을 먹고 이사짐을 대강 치워놓고 있노라니까 다섯시가 지나서 정원이가 돌아왔다. 오되 혼자 오지 아니하고 뒤에는 따라온 사람이 있다.
 
159
"좀 일찍 오디 않구. 이사하는 줄 알믄서 이렇게 늦게 오니."
 
160
마나님은 이렇게 딸에게 허물없는 푸념을 내놓다가 딸의 뒤에 따라 들어서는 사람을 보고는 말을 뚝 그치고 반겨 웃으며 인사를 한다.
 
161
"아구 니선생님 오시누만…… 어서 올라오시요."
 
162
"네, 안녕하십니까? 이사를 하신다고 해서 짐이나 좀 날러 드릴까 했더니."
 
163
이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집과 방안을 둘러보고 마루에 걸터앉으면서 노라를 힐끔 곁눈질로 본다.
 
164
몸과 키가 그리 크지 못하여 정원이와 앞서고 뒤서고 들어올 때에 정원이 의 큰 체격에 비하여 매우 빈약하여 보였다.
 
165
양복도 그저 수수하고 얼굴은 검은데다가 표정이 분명치가 아니하였다.
 
166
게다가 말소리가 뜸직뜸직한 것이 사람이 내숭스러워 보였다. 이 사람이 혹 어제 혜경이가 말하던 정원이의 약혼자라면 그다지 어울리지 아니하는 배필이라고 노라는 생각하였다.
 
167
정원이는 방으로 들어와 이사짐 늘어놓은 것을 이리저리 살펴본 뒤에 문을 닫고 옷을 갈아 입기 시작한다. 반닫이 속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입었다 벗었다 하다가 그 중에 하늘한 보일 치마에 하얀 단속곳을 받쳐 입고 적삼은 어제 입었던 생수깨끼저고리를 횃대에서 내려 입는다. 마루에서는 이야기 를하고 있다.
 
168
"방으로 들어가실 걸…… ""여기도 좋습니다. 곧 갈 테니까…… ""선생님두 원! 이사짐을 날러 주실 테면 좀 진즉 오시지 이제 오시요."
 
169
"허허…… 이담 이사하실 때는 일쯕 오지요, 허허."
 
170
"누구래 밤낮 이사만 하구 다니나요."
 
171
"이담에 큰 집으로 이사를 아니하시럅니까?"
 
172
"큰 집이 있어야지요! 니선생님이 하나 사주실래요?"
 
173
"사 드리지요, 허허."
 
174
"어머니!"
 
175
정원이가 소리를 버럭 지른다. 짜증이 난 것이다.
 
176
노라가 보기에도 꽤 수다스런 마나님이다.
 
177
"와 그르니?"
 
178
"괜히 그런 소리를…… ""하믄 어떻니! 웃느라구 그러는데…… "정원이는 문을 열어놓고 마루로 나섰다.
 
179
"나는 이사가 바쁜 줄 알구 부리나케 쫓아왔지…… 어머니 나 어데 갔다와 요."
 
180
"또 빼빼공 치러 가니?"
 
181
"호호호호."
 
182
"하하하하."
 
183
정원이와 이선생이라는 사람은 같이 소리를 내어 웃는다.
 
184
"빼빼공이 무어유? 빼비 골푸라고 실컷 가르켜 드려두…… ""나는 그런 신식말은 모른다…… 일쯕 와서 저녁 먹어."
 
185
"가봐야 알지요…… 잠깐 다녀오겠읍니다."
 
 
186
정원이는 노라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간다.
 
187
"가겠읍니다. 안녕히 계서요."
 
188
"네, 평안히 가시요. 또 오시요."
 
189
마나님은 손님을 은근히 배웅하고 벙글벙글 웃으면서 곰방대에 담배를 붙여 문다.
 
190
"우리 정원이하고 약혼한 이야요."
 
191
"네……"
 
192
노라는 그 말이 미덥지가 아니하였다. 어제 정원이가 한 말도 있거니와 그의 손가락에는 약혼반지도 끼여 있지 아니하였었다.
 
193
"일본 가서 대학교 졸업을 하구 미국 가서도 대학교 졸업을 하구, 참 도 저 한 이디요. 얌전도 하구…… 재산은 별로 없이요. 한 삼백 석은 하디만…… 재산이야 없으면 멀 하나요. 사람이 잘나야디…… "묻지도 아니하는데 이런 말 저런 말 늘어놓다가 부엌으로 내려갔다.
 
194
정원이는 밤늦게야 돌아왔다. 저녁 밥상을 그대로 묵히고 자리에 누워 부인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모녀가 다같이 잠이 들어버렸다.
 
195
노라는 여러 날 피곤한 끝이건만 잠이 잘 오지 아니하였다.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데 안채 건넌방에서 듣지 못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다른 때 같으면 남의 이야기 소리를 들으려 할 리가 없겠지만 혹 그 전 당국 주인이 벌써 왔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196
"그러면 반대하신단 말씀이지요?"
 
197
이것은 성희의 목소리다. 그 말을 받아 걸걸한 남자의 대답이 들린다.
 
198
"반대 여부가 없지…… 없지만 뒷일이 맘이 아니 뇌인단 말이지."
 
199
"어째서?…… 오라버니가 보시기에는 내가 그렇게 철이 없어 보이우?"
 
200
노라는 비로소 시골 있다던 성희의 친정오라버니가 올라온 줄을 알았다.
 
201
이렇게 남이 남매간에 모여앉아 일을 서로 상의하는 것을 보니 노라는 자기도 오라버니나 하나 있었더라면 오죽 좋았으랴 싶어 부러운 생각이 절로 들었다.
 
202
"여자란 백 살을 먹어도 철이 없기로 들면 없는 법이니까."
 
203
성희의 오라버니는 그저 존존하게 이렇게 대답을 하고 성희 역시 일 신의 대수롭잖은 일을 상의하는 자리건만 마치 지날 말 삼아 말을 하듯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한다.
 
204
"늙어가시면서 히니꾸는 여전하시군! …… 아뭏든 그건 그렇다구…… 그러니까 오라버니한테 상의를 할 요량으루 이렇게 올라오시게 한 게 아니예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205
"일은 발써 열에 여덟이나 다 진행시켜 놓고 나서 날더러 상의야?"
 
206
"노상히 그렇지도 않어요."
 
207
"큰마누라는 지금 어데 있다든?"
 
208
"같이 있지요."
 
209
"기생첩을 얻어서 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210
"자식까지 하나 있는데 갈렸다고 그립디다."
 
211
"누가 그래? 서씨 당자가?"
 
212
"네."
 
213
"그거야 종잡을 수 있나! …… 또 위인이 하두 호색한이 되어서…… "이야기 소리는 잠깐 끊기고 잠잠하더니 다시 성희 오라버니의 약간 목 가다듬은 말소리가 들린다.
 
214
"내 생각 같애서는 이렇다…… 십 년 전에 그 사람이 그만큼 네한테 열중이 되었었는데 너는 그때는 '흥! 그 따위 군청 서무주임!’하고 편지 답장한 번인들 해 주었니…… ""그거야 그 사람의 지위를 보고 그랬나요? 그저 사람이 싫으니까 그랬지?"
 
215
"글쎄…… 그렇지만 그사람은 그렇게 생각을 아니했드란다…… 그래 어쨌거나 그 사람은 군수깨나 지내먹고 또 돈도 좀 모았고, 그래 이를테면 성공을 하잖었니?…… 그런데 그 사람을 마다고 다른 데로 갔든 너는 자, 남편을 잃고 혼자 되었지…… 자식이 둘이나 달렸는데 살기가 이렇게 어렵지…… 이찜 처지가 서로 뒤바뀌었다고 볼 수가 있는데, 그 사람이 지금 와서 자기는 십 년 전 그대로 사랑을 하니 같이 살자고 한다고 그래 섬뻑 승낙을 하고 싶은 생각이 났드란 말이냐?"
 
216
성희의 대답은 없어 잠시 잠잠하고, 그의 오라버니가 다시 말을 한다.
 
217
"머 이것은 내가 너를 나무래는 것이 아니다. 나무래는 것이 아니고 말 하자면 그것이 네한테 퍽 불리한 조건이 될 것 같어서 하는 말이고…… 그래 너는 가난에 좀 시달렸다고 그대도록 자존심이 꺾였단 말이냐? 한심하다!"
 
218
"자존심으로 배가 부른가요?"
 
219
"허허, 옳은 말이다. 그것도 일면의 진리는 된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그래 지금 네가 그렇게 배가 고프냐?"
 
220
어떻게 들으면 좀 꼬집어서 말을 하는 듯도 하나 대체로 말하는 목소리며 조백이 있는 사리가 퍽 침착하고 둥근 맛이 있어 어느 구석인지 인정이 있이 노라에게는 상상이 되었다. 동시에 그러한 점이 병택이의 일면과 흡사한듯 하여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고? 하는 궁금중도 났다.
 
 
221
"이 몇해지간이야 그런 대로 지내갈 수 없는 것은 아니예요. 또 이 집을 팔면 일천 한 오백원을 받어요. 그놈에서 금융조합의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하다못해 반찬가게라도 내었으면 목구멍이야 얻어먹고 살 테지요."
 
222
"그랬으면 좋겠구나?…… 금융조합 빚은 얼만데?"
 
223
"육백 원하고 조꼼 더 되는지?"
 
224
"잘하면 천 원은 남겠구나…… 그러면 그 계획이 좋은데 왜 그러니?"
 
225
"그래도 싫여요."
 
226
"왜?"
 
227
"그저……"
 
228
"허허허허. 나도 안다. 네가 아직 젊은 줄을 나도 안다. 그러니까 시집을 다시 가고 싶기도 하겠지."
 
229
"오라버니는 자꾸만 실없은 소리를 하시느라고…… ""사실인걸 무얼 인제 새삼스럽게 부끄럼을 타니?…… 그러니 그건 그렇고…… 그밖에 또 무슨 이유가 있니? 혹시 너 서씨한테 다소간이라도 정이 가는 것이나 아닐거나?"
 
230
"아니,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어요…… 없고…… ""없고…… 그러면?"
 
231
"싫여요. 가난이 싫여요."
 
232
무슨 대답이 들려오나 하고 있던 노라는 부지중에 혀를 끌끌 찼다.
 
233
"가난이 그렇게 싫으냐?"
 
234
"싫다는 것보다 견델 수가 없어요. 오라버니도 아시다시피 제가 몸이 허약해서 고된 일은 못하지요. 자식들은 자라나는데 멕이고 입히고 공부도 시켜야지요. 무얼 가지고 어떻게 해요? 혹 어려부터 고생에 찌들었다면 모르지만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살 때는 언제 손끝에 물이나 묻혀 보았어요? 그러다가 저애 애비하고 결혼해서 고생을 시작하다가 혼자 된 요 멫 해는 참 죽을 고생 다 했답니다. 더는 못 견데겠어요…… 죽은 사람한테 의리를 지킬 게 어데 있어요? 첩이면 어때요 과부의 수절이니 정조니 하는 그런 낡은 도덕의 노예가 될 게 무어예요?…… 글쎄 오라버니, 이걸 보세요. 우리 사랑 채에 전세로 들은 여자가 하나 있는데 시골서 의동생이라는지 하는 소박데기 하나를 데리고 왔어요. 그런데 그저껜가 그 색시 남편이 오고 또 새로 결혼한 여편네가 와서 야료를 놓고 갔는데…… ""왜 야료를 놓아?"
 
235
"그 사내가 큰 여편네한테 다닌다고 작은여편네가 강짜가 나서 달려와가 지구는 큰여편네를 물어뜯고 욕을 했어요. 그러니까 사내는 되려 승겁게 큰 여편네 머리채를 잡어 내동댕이치면서 욕을 하겠지요. 그랬는데 그날 저녁에 부엌 들보에다 목을 매고 죽었어요…… 에구 끔찍해!…… 글쎄 그런 못 생긴 것이 어데 있어요? 왜 죽어요? 그까진 사내녀석 보아란듯이 이혼을 해주고 딴 사람을 얻어서 버젓하게 살잖구!…… 거 묵은 도덕의 노예가 아니 유?"
 
236
노라는 슬며시 결이 난다. 옥순이는 가령 묵은 도덕의 노예라고 한다치더라도 그것을 비방하고 있는 사람은 돈에 팔리어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무얼 남더러 못생겼니 어리석으니 할 게 없지 아니한가!
 
237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계속이 되었다.
 
238
"그래 묵은 도덕에 얽매어 그것이 시키는 대로 생사를 끝내는 사람은 봉건 도덕의 노예라고 볼 수가 있고, 또 돈에 얽매어 돈이 시키는 대로 몸을 굴리는 사람은 상품경제 시대의 노예라고 볼 수가 있고…… "노라는 이 말이 고소하였다.
 
239
"그렇지만 나는 내 자유로 하는 건데…… ""그거야 자유겠지…… 그렇지만 그건 노예가 되는 자유야…… ""자유면 자유고 노예면 노예지 노예가 되는 자유 ─ 난 그런 어려운 말은 몰라요."
 
240
이 말은 노라에게 역시 어려운 말이다. 그는 "노예가 되는 자유…… 노예가 되는 자유 "하고 속으로 되풀이하여 보았다. 알 듯싶고 또 성희의 처지를 설명하는 적절한 말인 것 같은데, 그러나 막연하여 그 참뜻은 해득이 아니 되었다.
 
241
"그런데 말이야, 그런 것 저런 것을 돌아보잖고 서씨한테로 간다고 그 리자…… 그러면 지금 네가 생각하는 것같이 그렇게 여의하게 살어가게 될 줄아니?"
 
242
"아니 될 건 무엇 있어요? 그 사람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잖고 나를 사랑한다니까 사랑받고 잘 살고 좋잖아요?"
 
243
"글쎄 그렇게 잘될 것만 생각을 하지 말고 잘못될 것도 생각을 해봐야지…… 자, 생각을 해보란 말이야. 네가 지금 이 궁경에 빠져가지고 그 사람에게로 갔다가 다행히 오래도록 잘 살면이거니와 그렇잖고 얼마 지내다가 저편에서 탁 차버리면 어쩔 테냐? 그렇게 되고 나면 돈을 바라고 군수 퇴 물전 당국쟁이의 세째첩으로 갔든 너를 누가 거들떠보기나 하겠니?"
 
244
"그렇게 되어도 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꼭 되란 법은 어데 있나요? 팔자에 맡기지요."
 
245
한참 만에 성희의 대답이 들리어 왔다.
 
 
246
"그렇다면 나도 더 할 말이 없다. 나도 네가 고생이나 덜 하고 후분이나 좋았으면 퍽 안심이 되겠다."
 
247
그 담에는 문 여닫는 소리가 두어 번 들리더니 아주 잠잠하다.
 
248
사흘이 지났다. 노라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 세수를 하노라니까 안채 노인이 새 옷을 갈아 입고 나와 작별인사를 한다.
 
249
"안녕히 계시우. 나는 시골로 가우."
 
250
노라는 속으로 빨리는 서둔다 싶었다.
 
251
"어찌 그렇게 갑작히 내려가세요?"
 
252
"네, 그저…… 가까우니까 종종 오지요."
 
253
이렇게 심상히 말은 하나 섭섭해하는 눈치가 완연히 보인다.
 
254
"저 새로 오신 이랑 노인이랑 안녕히 계시우. 오시자마자 내가 이렇게 떠나서 섭섭허우."
 
255
"네. 안녕히 가십시요."
 
256
"안녕히 가시우."
 
257
노라가 보니 중문 밖에는 용식이와 성희가 나서서 있고, 오라버닌 듯 싶은 헙 수룩한 양복 입은 사람이 돌아서서 있다. 먼빛으로 보아도 성희의 눈에는 충혈이 되고 눈가가 부싯부싯하다.
 
258
노라는 가서 붙들고 위로를 하여 주고 싶기도 하고, 야지 없이 나무라 주기도 하고 싶었다.
 
259
이튿날 ─ 일요일이다.
 
260
세 식구가 앉아서 조반을 먹노라니까 속달우편 하나가 정원이게로 왔다.
 
261
정원이는 밥숟갈을 놓고 편지를 뜯어보다가 골을 내어 홱 내던진다.
 
262
"니선생님한테서 왔지?"
 
263
마나님은 편지를 집어 알기나 하는 듯이 겉봉을 이리저리 뒤져보며 묻는다.
 
264
"그렇다우."
 
265
"메랬니?"
 
266
"오늘 인천 가자구 약속을 해놓고 ─ 인제 와서 못 간다구 그래! 룸펜이 돌발 사건은 무슨 놈의 돌발 사건이야."
 
267
옆에 있는 노라가 미안할 만큼 골이 나가지고 두덜거린다.
 
268
"일이 있으니까니 그렇지. 오늘 못 가면 담에 가렴…… 어서 밥이나 먹어라."
 
269
"싫어요…… 어머니, 참 혜경 아주머니더러 나 약혼했다구 그랬수?"
 
270
"응."
 
 
271
"응이 머야! 누구하구?"
 
272
"니선생하구……"
 
273
"참! 난 어머니 따문에 죽겠어! 글쎄 어쩌자구."
 
274
정원이는 금방 울 듯하다. 그는 밥상에서 아주 물러앉아 속달편지를 박박 찢는다.
 
275
"그랬으면 멜 하니?…… 약혼한 거나 일반인데…… ""머가 약혼한 거나 일반이야! 누가 그따우 룸펜에 바보하구 약혼을 해?"
 
276
인제는 마나님도 마주 성이 났다.
 
277
"뎨놈의 에미나이 하는 소리 바라. 누구서 그렇게 버릇없이 말한다든?"
 
278
"하믄 어때? 그따우 바보…… 〈안나오도꼬와 온 나노 데 끼소 꼬 나이다 〉(그런 사내는 계집애가 되려다 사내로 된걸.)"
 
279
이렇게 해놓고는 저도 서글퍼서 하하 웃어버린다.
 
280
노라도 어이가 없어서 따라 웃었다.
 
281
"뎨년이 미쳤어!"
 
282
"어머니는 망령나구 호호…… 그러니까 시집을 진즉 보내지!"
 
283
"그러니까니 니선생하고 결혼하란밖에."
 
284
"좀더 두고 봐서."
 
285
"보기는 무얼 보아…… 나이 스물다섯이나 먹어가지구."
 
286
"스물다섯인가! 셋이지."
 
287
"그러지 말구 올갈에 성례를 하려마…… 사람 잘나고 학문 있고 무에 부족해서 그래?"
 
288
"돈이 있으면 멫푼이나 있어요. 그까짓 벼 한 삼백 석 하는 것? 일 년에 시세가 좋아야 삼천 원."
 
289
"삼천 원이 적은 돈이가? 저는 삼백 원도 없으면서…… ""그래두 인제 봐요."
 
290
"인제 보다니 네가 무슨 수가 있느냐?"
 
291
이렇게 마나님이 묻기를 기다렸으나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그 말 대답을 정원이가 어떻게 하나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292
정원이는 도로 밥상으로 다가앉아 먹던 밥을 꺽꺽 판다.
 
293
"선생님, 오늘 창경원 갑시다."
 
294
선생님이란 노라더러 하는 말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 아마 달리 무어라고 물을 말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 정원이는 선생이라고 불러 버릇 하였다. 노라는 듣기가 어색하였으나 그것도 귀에 익으니 그만하였다. 그러고 노라는 정원이더러 그냥 정원씨라고 부르고, 마나님더러는 어머니라 고…… 마나님을 불렀다. 마나님은 처음 오던 날 밤에 고향을 묻다가 전라도라고 하니까 '그러면 호남이구려’하더니, 그 이튿날부터는 호남 댁으로 지정을 한 것이다.
 
295
노라고 실상 오늘은 혜경이나 청하여 가지고 교외 어디로 나아가 바람도 쐬고 그동안 어수선하여진 머리도 가다듬고 할 생각이었으나 창경원은 그다지 내키지 아니하였다.
 
296
"글쎄 어쩔까…… 문밖이 좋잖어우?"
 
297
"창경원이 좋아요. 지금 작약이 한참이라는데."
 
298
"작약? 작약 같으면 한번 볼 만은 하지…… 그럼 창경원을 다녀서 어디로 가까?"
 
299
"그래도 좋지요…… 그런데 참 오늘 오재환 씨가 마작 가지고 와서 배워준다고 한 걸…… ""글쎄…… ""그이가 무엇하는 이요?"
 
300
마나님이 내달아 묻는다.
 
301
재환이는 정원네가 이사해 오던 이튿날 저녁때에 찾아와서 옥순이의 재를 올리라고 돈 오십 원을 주어 절에다가 부탁했다고 보고를 하였다.
 
302
정원이와는 그 자리에서 인사를 저희끼리 어떻게 어물어물하다가 하였다.
 
303
마작 이야기가 우연히 났었는데 정원이가 퍽 재미있다더라고 하며 배우고싶어하는 눈치를 본 그는 그러면 오는 일요일에 가지고 와서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304
마작은 노라도 심심풀이로 배우고는 싶었으나, 그렇게 되면 아주 재환이가 아주 제 집 드나들 듯할 테니 그것이 뜨악하여 찬성도 못하고 반대도 아니하였었다.
 
305
마나님이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데 노라는 대답할 말이 없다. 실상 무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전에 옥순이더러 물었으면 알았겠지만 그것은 묻지도 아니하였고 옥순이가 이야기도 아니하였던 것이다.
 
306
"글쎄요. 자세 모르겠는데요."
 
307
"한 고향이 아니요?"
 
308
"한 고향은 아니여요. 이번에 그이 부인이 죽었는데 나하고 퍽 가까워서 알게 되었어요."
 
309
"예…… 부자로 잘살디요?"
 
310
"네. 한 칠천 석 한다지요."
 
311
"참 숱한 부자다!"
 
 
312
마나님의 입에서는 저절로 감탄하는 말이 흘러져나왔다.
 
313
"나이 멫이래요?"
 
314
"스물다섯이라든지요."
 
315
"한참때로구려! 이번 상처한 뒤에 아직 장가 아니 들었겠지요?"
 
316
이것은 속히 빤히 굽어다보이는 말이다. 노라는 밉광스러운 생각이 나서지 금 고르는 중이라고 하려다가 그래도 죄스러운 것 같아서 인제 정실로 들어 앉을 여자가 있었다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317
혜경이가 올라왔다. 노라를 놀러가자고 청하러 온 것이다.
 
318
정원이는 재환이가 오거든 같이 가자거니, 노라와 혜경이는 그가 싫단 말은 표면으로 하지 못하고 그저 그냥 가자거니 서로 우기면서 준비를 하고있는데 안채 마당에서 캑캑하고 남자의 담 뱉는 소리가 들린다.
 
319
용식의 외삼촌은 어제 아침에 내려갔으니 없을 테고, 그러면 분명코 전 당국 한다는 서(徐)가이거니 생각하고 노라는 뚫어진 들창문으로 안채를 내어다 보다가 움칫 놀라며 혜경이더러 오라고 손짓을 한다.
 
320
혜경이는 노라가 비켜주는 데 서서 문구멍으로 안채를 내어다보았다. 이편으로 향하여 안마루에 웬 사십이 좀 넘어 보이는 사나이가 앉았는데 어디 선지 한번 본 듯한 얼굴이다. 그러나 확실한 기억은 나지 아니한다.
 
321
혜경이는 돌아서서 노라의 약간 놀란 얼굴을 이상히 여기면서 물었다.
 
322
"누구야? 영감 얻었나?"
 
323
"응."
 
324
"언제?"
 
325
"첨 봤어…… 그런데 저게 올 정월 초하룻날 황산여관에서 매맞든 사람이야!"
 
326
"엉?"
 
327
혜경이는 놀라 다시 문구멍으로 내어다보았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분명 그 사람이다.
 
328
가냘픈 몸에 특징있게 되똥 나온 이마와 광채가 심상치 아니한 작은 두 눈, 그리고 좌우로 뾰족하게 벌어진 자가사리수염 ─ 그때에 언뜻 보았지만 사단이 요란했던만큼 인상은 깊이 남아 있었다.
 
329
"정말 그렇구려!"
 
330
"옳지?"
 
331
"그래. 그 쑥이야…… 그런데 어떻게 돼서?…… 시골 군수라구 하잖앴수?"
 
332
"지금은 통안서 전당국을 한 대…… 군수는 그만둔 게지."
 
 
333
"어떻게 그렇게 자세 아우?"
 
334
노라는 지나간 사흘 전 밤에 듣던 이야기를 대강 들리어 주었다.
 
335
혜경이는 흥미있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시 한번 들창구멍으로 내어다 보았다. 사내는 보이지 아니하고 건넌방에서 작은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리자 안방에서 푸시시 흐트러진 성희가 문을 열고 건너간다. 아이들은 안 잠자기와 같이 건넌방에 재우는 모양이다.
 
336
"잘되었구먼…… 나허구 처지가 같애서 동정도 하고 싶고 또 불쌍도 한 걸…… "혜경이가 돌아서서 웃는다.
 
337
"같은 게 무어야, 아주 반대지…… 세째첩이래요. 그러고 혜경이는 그때 둘이서 서로 다 사랑하잖앴수? 그러다가 돈 때문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지?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런 게 아니래요…… 성희는 아주 첨부터 저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아니했대요.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사랑이 없어서 헤어졌다가 돈 때문에 다시 만난 것이고, 혜경이는 돈이 없어서 헤어졌다가 사랑 때문에 다시 만나게 된 게 아니요?…… 그러고 하나는 세째첩인데 하나는 정실 이구."
 
338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정원이가 쫓아와서 들창구멍으로 내어다보다가 사내를 발견하고는 허겁스럽게 목안엣 소리로 묻는다.
 
339
"과부라더니 없든 사내가 동저고리 바람으로…… 저게 무어야?"
 
340
노라와 혜경이는 손님이겠지야고 웃어버렸다.
 
341
세 사람이 준비를 하여가지고 막 밖으로 나서는데 재환이가 허덕거리면서 들이 닿는다.
 
342
"어데를 가세요?"
 
343
그는 세 여자를 번갈아보면서 묻는다. 노라는 눈치가 어떠한가 하고 보니전 같으면 모인 중에 자기에게로 제일 시선이 자주 왔겠지만 인제는 그것 이정원이 게로 옮아버렸다.
 
344
그는 속으로 잘되었다 싶어 숨이 내쉬어지기는 하나 섭섭하기도 하였다.
 
345
아무도 대답이 없는 것을 상관치 아니하고 재환이는 제 말을 늘어놓는다.
 
346
"마작을 가지고 올랴다가 날고 좋고 하길래 여러분 모시고 교외나 나갈 양으로 그만두었지요…… 어데 놀러들 가세요?"
 
347
그는 이번에는 정원이를 보고 묻는다. 남자가 있는 곳에서는 정원이의 태도는 딴 사람이 된다. 그는 마지못하여 겨우 대답을 한다.
 
348
"네."
 
349
"어데로 가세요? 제가 타고 온 택시가 있으니까 같이 타고 가시지요?"
 
 
350
아무도 대답을 아니하고 서로 얼굴만 치어다본다.
 
351
"펑."
 
352
도이멘에 앉은 성희가 홍중을 타패한 것을 정원이가 펑을 하고 집어온다.
 
353
정원이의 윗손인 혜경이가 쓰모를 하려다가 움칫한다. 정원이의 등 뒤에서 패를 굽어다보고 있던 재환이가 발광을 한다.
 
354
"부 ― 펑 부 ― 펑…… 거 왜 펑하십니까? 패가 좋은데…… 옥당을 꾸미세요. 부 ― 펑 부 ― 펑."
 
355
그는 자기 손으로 홍중쪽을 도로 판에 내어놓는다.
 
356
"한번 뒤집잖애요?"
 
357
정원이는 아까운 듯이 펑하였던 홍중 두 쪽을 도로 일으켜 세운다.
 
358
혜경이가 쓰모를 하여다가 넣고 구통을 던지니까 정원이가 "이 것 먹어야지요?"
 
359
하고 재환이더러 묻는다.
 
360
"그건 왜! 쓰모 쓰모…… 옳지. 마작이 서고 홍중 내버리시요."
 
361
노라가 쓰모를 하여다 끼고 더듬더듬하다가 타패를 한다.
 
362
재환이를 선생으로 모시고 노라, 정원이, 성희, 혜경이 이렇게 네 사람이 마작을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온다.
 
363
마작은 처음은 재환이가 쓰던 것을 가지고 하였으나 며칠 후에 새로 만든 탁자와 한가지로 재환이는 새 마작 한 벌을 선사하였다.
 
364
혜경이는 살림을 하는 때문에 매일 오지는 못하였으나 전에 조금 익힌 적이 있어 그다지 축에 빠지지는 아니한다.
 
365
그중에 제일 빠지는 것은 성희다.
 
366
약혼을 하였다고도 하고 아니하였다고도 하는 이선생이라는 사람은 베이비 골프와 한가지로 정원이에게서 멀어졌다. 그 대신 마작과 한가지로 이 선생이 정원이에서 멀어진 그 거리만큼 재환이와는 가까와졌다.
 
367
정원이는 은행에서 일이 끝이 나면 두눈도 팔지 아니하고 집으로 달려온다.
 
368
그러면 대개는 재환이가 와서 앉아 있기, 그렇잖으면 정원이가 돌아와서 옷을 갈아 입는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으례 오곤 한다.
 
369
그것은 비바람과 더위를 초월한 엄중한 매일 행사다.
 
370
혜경이가 참례하는 날이면 재환이는 코치로 물러앉는다. 말은 이 사람 저 사람 돌아가면서 보아 준다는 것이나 대개는 정원이의 뒤에 붙어앉아 있다.
 
371
혜경이가 아니 오는 날은 재환이도 한 축에 끼인다.
 
 
372
네시 반에 판을 벌이고 앉으면 초대들이 되어서 저녁먹기가 저문다.
 
373
한짱이 끝이 나면 혜경이는 부랴부랴 내려가기도 하고 같이 저녁을 먹고 계속하 기도 한다. 재환이도 같이 밥을 먹는다. 그는 그것이 미안하다고 쌀한 가마를 들여다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귀여운 마작 제자들을 위하여 사흘에 한 번쯤은 런치나 대관원의 북경요리를 불러온다. 어느 때는 올 때에 미리 시켜놓고 여덟시고 일곱시 반에고 가져오라고 한다.
 
374
재환이가 이와 같이 자유로운 향락의 사도가 되기에는 한편 그만한 대가(代價) 를 치르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는 문제의 히스테리 여인을 결혼 신고를 하여 민적에 올려주고는 산삭이 가까와오는 것을 구실삼아 친가로 내려 보내었다. 정원이에게 정신이 쏠리기 전의 일이다.
 
375
저편에서 생각하면 서울 같은 곳에 남편을 혼자 두어두는 것이 위험은 하나 민적 수속이 되었겠다 다소 방탕하더라도 무기는 이편에 있는지라 안심을 한 것이다.
 
376
정원이는 ─ 이라느니보다 등 뒤 에서 코치를 하고 있는 재환이가 ─ 애가 쓰였다.
 
377
넉 자중에 한 자만 쓰모하면 옥당방이 달리는 것이다. 다른 데는 보니 그렁 저렁 방이 달린 눈치다.
 
378
그러자 정원이는 남풍쓰거화를 떠다 놓고 영상에서 쓰모를 하니 팔만이다.
 
379
육칠만과 삼사통이 있었으니 인제는 양오통방이다. 정원이도 비로소 다뿍 긴장이 되어가지고 타패하는 것만 똑바로 보고 있는데 중문 밖에서 "정원씨!"
 
380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381
이선생이라는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382
정원이는 맛있게 먹던 밥에 돌이나 씹은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마나님을 돌아본다.
 
383
마나님은 이것이 한 달 전이라면 두말없이 뛰어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딸의 심정의 변화를 청우계보다도 더 잘 짐작한다.
 
384
"정원이 없시요."
 
385
내어다보지도 아니하고 이렇게 대답을 한다.
 
386
노라와 혜경이는 무심결에 서로 치어다보았다.
 
387
방문이 환히 열리었으니 중문간에서 조금만 고개를 들이밀어도 방 안이 굽어다 보인다. 대뜰에는 정원이의 구두가 또렷이 놓여 있다. 입때까지 지껄이던 목소리가 밖에까지 응당 들렸을 것이다. 노라는 자기 얼굴이 화끈 다는 것 같아 정원이를 바로 보지 못하고 외면을 하였다.
 
388
"아니 왔어요?"
 
389
한 달 전에 큰 집을 사 달라는 말에 사 드리지요 하고 친숙하게 대답 하던 그 말씨 그 음조 그대로다.
 
390
"아니 왔어요."
 
391
이 대답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그대로다.
 
392
밖에서는 한참 있다가 뚜벅뚜벅 발자죽소리가 멀어진다.
 
393
노라는 재환이가 어떠한가 하고 돌려다보니 기쁨을 감추다 못하여 남은 미소가 입 가장자리로 흥건히 흘러져나오고 있다.
 
394
그러자 혜경이가 양통을 쓰모하여 가지고 만지작거리다가 내놓자 패가 손에서 떨어지기가 바쁘게 정원이와 재환 이의 "훌라."
 
395
하는 음양 쌍주곡이 요란히 울린다. 얼결에 혜경이는 "아이구머니!"
 
396
소리를 치고 던진 패를 도로 집어가려다 만다.
 
397
정원이가 양통을 집어다가 딱 맞추어 놓는다.
 
398
"구백서른 일천팔백 예순…… "재환이는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한다.
 
399
"아즈머니가 짱이지? 아직 바가지가 남었수?"
 
400
정원이가 혜경이를 놀린다.
 
401
"걱정 마라…… 재환씨는 가만 좀 계시우! 둘이 하는 걸 당할 수가 있어야지."
 
402
"허허…… 미안합니다. 그러면 김선생 코취를 해드리지요."
 
403
"제발 싫여요…… 가만히 앉어나 계서요."
 
404
"돈 닷돈 내놓고 저차저차한다는데 속이 쑤셔서 가만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405
그러나 무렴을 당한 재환이는 뒤로 물러앉았다. 네시 반에 시작한 마작인데 서풍초에 여섯시가 거의 되었다. 마나님은 피우던 담뱃대를 재떨이에 털고 일어섰다.
 
406
"저녁밥이나 짓자…… 해가 좀 짧어졌는지…… "재환이는 노인이 일어서서도 주춤주춤하고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는 눈치를 잘 안다.
 
407
"저녁밥 짓지 마시지요. 마작이 끝나면 진고개나 같이 가서 저녁들 잡숫게…… " "그래서 쓰나요…… 늘 그렇게 용처를 쓰시게 해서…… ""천만에요…… 그만두고 앉어서 구경이나 하세요…… 나는 나가서 자동차 부에 전화나 걸고 오지요."
 
408
"나가신 길에 선생님 심부림 좀 해주세요."
 
409
정원이가 패를 굽어다보고 앉아서 정말 심부름시키듯이 청을 한다.
 
410
"네."
 
411
"아이스크림 좀 시켜 주세요…… 아이스크림이 없으면 밀크세키."
 
412
사실 마작에 열중되어 덥다고 하는 사람은 없어도 모두들 땀을 퍼 흘리고있다.
 
413
음식 같은 것을 불러오면 그것이 재환이가 자발적으로 한 것이면 말할 것도 없지만 정원이가 시켜오는 것도 으례 재환이가 선뜻 나서서 치러준다.
 
414
정원이는 형식으로 돈지갑을 꺼내들기만 한다.
 
415
그런 속을 잘 아는 혜경이는 조롱하기를 잊어버리지 아니한다.
 
416
"이기고도 한턱 내니?"
 
417
"그럼…… 이긴 턱으로…… 그 대신 이따가 아주머니는 진 턱을 내시요 ""나는 구서방이 구두쇠가 되야서."
 
418
이 말에 다른 사람은 웃는데 정원이는 새촘하였다.
 
419
마작을 마치고 정원이, 노라, 성희, 재환이 해서 네 사람은 불러놓은 택시를 탔다. 혜경이는 집안일을 생각하고 돌아갔고, 마나님은 전에 하듯이 따 로이 깃을 보내 주기를 기다리며 집을 지키고 있고.─
 
420
청목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정원이는 날름날름 맥주를 두 곱뿌나 들이켜더니 얼굴이 홍당무같이 새빨개가지고 쌕쌕 가쁜 숨을 쉰다.
 
421
회계를 하는데 성희가 자꾸만 자기가 내겠다고 하는 것을 재환이가 겨우 만류 하였다.
 
422
나무 양식 대어주고 시골 어머니한테 삼십 원씩 보내주는 것까지 합 해서한 달에 백 원씩 대어준다는 말을 노라는 안잠자기에서 잠깐 들은 적이 있다.
 
423
미상불 요즘은 마작판에서 청요리도 더러 청해 오고 옷 입는 것도 훤 치르르 하게 그럴 성싶었다.
 
424
그러고 보니 노라는 자기 혼자만이 어깨통이 점점 좁아드는 것 같았다.
 
425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죽은 옥순이를 생각해서든지 재환이에게 대한 자기의 감정 상태를 생각해서든지 이러한 경우를 피해야 할 것인 줄은 알면서도 그래도 반은 권면에 반은 마작으로 인해서 질질 끌리어가게 되는 것이다.
 
426
저녁을 먹고 나서 진고개로 들어서 정원이는 오래간만에 베이비 골프를 쳤 다.
 
427
노라와 성희는 자꾸만 치자고 하는 것을 마다고 구경만 하고 재환이와 정원이만 쳤다.
 
428
오락이라고는 손을 아니 댄 것이 없는 재환이도 오래 다녀 손속이 난 정원이에게 여지없이 지고 나섰다.
 
429
그곳에서 나와 악기점에 들렀다.
 
430
아무 때라도 정원이와 있으면 유쾌하여하는 재환이지만 오늘은 더욱 좋아서 못견디어한다.
 
431
"하나 사까요?"
 
432
축음기를 하나 사잔 말이다. 그가 정원이더러 하는 그 말씨는 갈데없는 부부와 같다.
 
433
"댁에 있잖아요?"
 
434
"우리 집에는 있어요…… 하나 사서 마작회에다 선사를 하지요."
 
435
그는 차마 정원이를 사주겠다고는 아니하였다.
 
436
"아이구 천만에! 그건 무얼 그러세요."
 
437
"멀요! 네? 아즈머니, 하나 사 가지고 가지요?"
 
438
"저는 모르겠읍니다만 글쎄올시다."
 
439
노라는 그러라고도 할 수 없고 정원이 때문에는 반대를 할 수도 없다.
 
440
구십오 원짜리 콜롬비아 한 대를 흥정하고 레코드를 골랐다. 정원이는 대개 양곡이요 재환이는 남도 소리다.
 
441
노라와 성희더러도 좋은 놈으로 고르라는 것을 그냥 옆에서 구경하였다.
 
442
내일 배달을 하여 달라고 하여도 좋을 것을 정원이가 우기어 그 자리에서 배달을 시키고 네 사람은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443
누구보다도 기뻐하는 것은 마나님이다.
 
444
재환이에게 치하와 축음기의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엮음과 수심 가가 한 장도 없는 것이 유감이라고 한다.
 
445
한참 레코드를 걸어놓고 앉아 노는데 안에서 안잠자기가 나왔다.
 
446
"아씨, 나리님 오셨어유."
 
447
성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448
"오셨으니 어떻단 말이야! 그만두구 들어가요."
 
449
쫓겨 들어갔던 안잠자기는 되짚어 도로 나왔다.
 
450
"나리님이 걱정하세유."
 
451
"머라고 걱정을 하셔!"
 
452
그러자 안에서는 취한 중에 성이 나서 하는 긴기침 소리가 들리어나왔다.
 
 
453
한 달 전 그날 아침에 노라와 혜경이가 문틈으로 성희의 영감 ─ 서가를 발견한 뒤로 그는 하루 건너 한 번, 혹은 이틀 건너 한 번 오곤 하였다. 대개는 밤이 늦어서 오고, 간혹 초저녁에도 왔다.
 
454
정원이와 마나님도 안잠자기의 방송으로 소식은 다 알았다.
 
455
성희는 번번이 마작을 중판메고 나가서 영감을 맞아 같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456
밤을 지내고 나면 이튿날은 오정이 되어야 안잠자기를 시켜 인력거를 불러다 타고 돌아가곤 하였다.
 
457
이날 밤은 성희가 나갔다가 노라네 방으로 바로 들어와서 있었기 때문에 대문이 잠기지 아니하여 그가 오는 것을 성희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458
성희는 여러 사람에게 무안한 듯이 작별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어선 길에 재환이도 돌아갔다.
 
459
나머지 식구는 축음기를 치워버리고 잠자리를 보느라고 전등불을 마루로 내어 걸고 모기장을 치고 하는데 안채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들리어왔다.
 
460
"머 어째?"
 
461
이것은 무슨 말 끝엔지 서가가 버럭 내지르는 소리다.
 
462
세 사람은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바로 이어서 성희의 쌀쌀하게 쏘는 소리가 들린다.
 
463
"아니, 왜 괜히 역정을 내고 이러시우!"
 
464
노라와 정원이는 살그머니 들창문으로 다가섰다. 마침 전등불을 마루로 내 걸었기 때문에 안에서는 이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하게 되었다.
 
465
안에는 안방 전등이 마루로 환히 내어걸리어 있고 서가가 마룻전에 걸터 앉아 부채질을 활활 하는 것이 보인다.
 
466
성희는 왼편으로 있는 건넌방 툇마루 앞에 돌아서서 있다. 문이 열린 안방과 건넌방에는 모기장이 치어 있다. 그 안방 중의의 것은 멀리 보아도 생초다.
 
467
아이들은 둘 다 잠이 들었는지 보이지 아니하고, 안잠자기는 조심스럽게 한편 구석에 조그맣게 비껴섰다.
 
468
성희의 말대답에 버럭 성이 난 서가는 야윈 바탕에 땀과 술기운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얼굴에 핏대를 세워 가지고 다시 소리를 친다.
 
469
"내가 괜히 역정이야?"
 
470
"괜한 역정이 아니고 무어여요? 그새는 아무 말두 아니하다가 왜 오늘 저녁에 이렇게 기승을 부려요? 내가 무슨 뉘 주정받인 줄 아시우?"
 
 
471
"내가 몰라서…… 그것이 장한 짓이래서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있었는 줄 알었던가? 본체만체하고 참어 온 줄은 모르고…… ""아니 글쎄, 참고 아니 참을 게 어데 있소? 마작을 했으니 그것이 무슨 죄며, 다른 사람하고 같이 좀 놀았으면 그것이 하상 큰 죄란 말이요? 내가 딴 사내하고 행실 궂은 짓을 했소?"
 
472
엿을 보고 있던 노라와 정원이는 비로소 싸움의 원인을 알았다. 정원이는 노라에게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인다. 마나님은 모기장 속에 편안히 드러누워 졸음 청하는 담배를 피운다.
 
473
"그러면 그게 잘한 것이야? 어느 때고 내가 와 보아서 집에 붙어 있는 때가 있었나? 노는 것도 분수가 있지…… 밤이고 낮이고 집구석은 비어놓고 마작만 하고 앉었기 아니면 젊은 사내놈 따러서 빙빙 쏘다니기…… 무얼 잘한 게 있어?"
 
474
"내가 젊은 사내하고 다녔으면 화냥질을 했어? 화냥질을 했어? 눈으로 보았어? 눈으로 보았어?"
 
475
성희는 악을 올려가지고 서가에게로 다가서며 들이댄다.
 
476
건넌방에서는 자던 아이들이 요란한 소리에 잠이 깨어 큰아이는 모기장을 떠들고 휘휘 둘러보고, 작은아이는 모기장 속에서 엄마를 부르고 소리쳐 운다. 안잠자기가 방으로 모기장을 걷고 들어간다.
 
477
이쪽에서는 마나님도 싸움이 크게 벌어지는 줄을 알고 일어나서 내어다 보며 중얼중얼 무어라고 중얼거린다.
 
478
서가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어 걸음 성희의 옆으로 다가서서 "그래두 잘했다고 요렇게 앙탈이냐? 이년!"
 
479
무슨 거조를 낼 듯이 딱 얼러멘다.
 
480
"이년?"
 
481
소리를 되받아 외치면서 성희는 와락 서가에게로 덤벼 그 앞에 바싹 마주 선다.
 
482
"이년이라니? 이놈, 누구더러 이년이냐?"
 
483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서가의 손이 번쩍 들리며 '딱’ 소리와 동시에 성 희가 왼편 볼을 우디더니 이어 남녀의 몸뚱이는 한데 어우러진다.
 
484
성희의 비단을 찢는 듯한 악쓰는 소리와 그의 몸에 서가의 주먹과 발길이다 들리는 퍽퍽 소리.─
 
485
용식이는 뛰어나와 와들와들 떨며 울고, 불에 덴 듯이 우는 작은아이를 안은 안잠자기는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맨다.
 
486
와 몰려나온 노라와 정원이와 마나님도 덤벼들어 성희의 머리채를 움켜쥔 서 가의 손과 서가의 멱살을 움켜쥔 성희의 손을 떼느라고 모두 한 데 어우러졌다.
 
487
노라는 주저하는 생각이 언뜻 나기도 하였으나 목전의 광경이 너무도 급하여 덮어놓고 뛰어나온 것이다.
 
488
한참 동안 부스대다가 겨우 떼어 말려가지고 마나님이 서가를 데려다가 마루에 앉히었다.
 
489
"참으시요, 참으시요. 너그런 바깥양반이 참어야디요. 참으시요."
 
490
"네네. 이거 참 미안합니다. 부끄러워 뵐 낯이 없읍니다."
 
491
서가는 곧잘 마나님의 달래는 말을 듣고 순순히 되레 사과를 한다.
 
492
성희는 노라와 정원이에게 끌리어 이편 건넌방 마루로 와 앉아서 색색분 한숨을 쉰다.
 
493
마나님은 서가와 같이 마루에 걸터앉아 성희의 변명 ─ 다시 말하면 자기네의 변명을 내어놓는다.
 
494
"그건 게 아니예요…… 저 농식 어머니를 나두 잘 알디만 그런 이가 아니예요. 그저 심심하면 나와서 놀고 했디요. 그러고 우리 집에 오는 이는 우리 딸하고 약혼을 한 사람이예요…… 머…… "노라는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하고, 정원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495
"네네, 알겠읍니다. 머 별로 머…… 그저 화가 나길래 좀 나무라느라고 했는데 저 못된 년이…… ""머 어째 이놈아…… 네가 나무라느라고 그랬어? 네가 나를 얕보구 그랬지…… "성 희가 발악을 하고 일어나는 것을 노라와 정원이가 주저앉혔다.
 
496
"흥! 네가 무어길레? 네까짓 년을 얕잡어 보았으면 어때?"
 
497
"너는 무어야 이놈! 관변으로 아첨하면서 군수깨나 살어먹다가 전당국 해먹 는 더러운 고리대금업하는 놈이!"
 
498
서가는 그 말을 물끄러미 듣고 있다가 도리어 유쾌한 듯이 한바탕 웃는다.
 
499
그러나 유쾌한 듯한 그 너털웃음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품기었다.
 
500
"너 말 잘했다. 참 잘했다 그래. 그렇다. 나는 벼슬아치를 살어먹고 지금은 전당국쟁이다…… 그래, 그렇지만 네년은 십 년 전에는 개새끼만치도 못 보고 네 존 데로 갔다가 죽게 된 오늘날 네가 더럽다고 침이라도 뱉을려던 군수 퇴물 전당국 고리대금업하는 그놈한테로 한 달에 돈 백 원씩에 팔려 왔으니…… "그러나 서가의 말이 끝나기 전에 "헉!"
 
 
501
소리를 내고 성희는 노라의 무릎에 엎드려 울었다. 서가는 통괘한 듯이 말을 계속한다.
 
502
"흥! 분하냐? 서러우냐? 인제 생각하면 분하기도 할 것이다. 섧기도 할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보담 멫 곱절이나 분했고 설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이야기고 어찌 되었든간에 너하고 나하고 다시 만난 이상 너는 내게 계집답게 해야 옳을 일인데, 지금 와서는 개값에도 못가게 명색이 없어진 계집이 잔뜩 거만스런 생각만 배지 속에 가득차 가지고는 나를 사람 답 잖게 보고…… 이년아, 너는 말하자면 내개 팔린 계집이야! 팔려왔으면 팔려 온 값을 해야지?…… 네게 무엇이 남은 것이 있어서 도도한 체하니? 하기를…… 세상에 돈을 내면 계집이 썩고 남는데 내가 너더러 그따우 버릇을 하라고 가만 있을 줄 알었드냐?"
 
503
노라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때처럼 구 가가 있어서 또 한번 코피를 터뜨려 주었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504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정원이는 버쩍 일어서서 서가의 앞으로 갔다.
 
505
"아니 여보시요, 그건 어떻게 하시는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506
그는 서가를 똑바로 내려보면서 입술을 바르르 떤다. 담배를 붙여 물려던서 가는 잠시 정원이를 뻔히 치어다본다. 보다가 가볍게 실소를 한다.
 
507
"네. 무엇 말씀입니까?"
 
508
"당신이 한 말을 모르세요? 여기 적어도 여자가 멫이 있읍니까? 어쩌니돈을 내면 계집이 썩고 남도록 있단 말씀이여요? 여기 있는 여자들을 모조리 쓸어넣고 모욕하는게 아닙니까?"
 
509
마나님이 일어서서 딸을 나무라나 듣지 아니한다.
 
510
"말씀을 하세요. 대답을 하세요."
 
511
"대관절 당신이 누구길래 남이 여편네를 데리고 쌈을 하건 죽이건 두어 두잖고 쫓아와서 시비를 하시요? 나는 그 말 먼점 듣고 싶소이다."
 
512
"그렇지만 당신은 여성 전체를 모욕하지 않었읍니까?"
 
513
마나님은 욕을 하며 정원이를 잡아끄나 그는 듣지 아니하고 어머니를 뿌리치며 승벽을 부린다.
 
514
지금까지 노라의 무릎에 엎디어 울고 있던 성희가 갑자기 고개를 쳐 들고 일어섰다.
 
515
"가, 이놈아! 가 가 가, 당장에 나가!"
 
516
그는 열병 앓는 사람같이 목을 높여 악을 쓴다.
 
517
서가는 마루에서 일어섰다.
 
518
"오냐 간다. 네가 제발 있으라고 떡을 해놓고 비선을 하면 내가 있을 줄 아느냐?"
 
519
서가는 성희에게 뜯긴 조끼와 적삼을 잘 여미고 마루 구석으로 밀려간 두루마기를 집어 입고 모자를 쓰고 유유하게 밖으로 나가버린다.
 
520
정원이는 그의 하는 양을 노리고 서서 보다가 바깥채로 통통 걸어나갔다.
 
521
노라는 다시 엎드려 우는 성희를 부축하여 방에 데려다 뉘어 주었다. 무어라고 위로라도 하여 주고 싶으나 어떻게 말을 해야 그것이 성희에게 위로가 될지 몰랐던 것이다.
 
522
작은아이는 안잠자기에게 안기어 자고 있고, 용식이는 그대로 마루에 앉아있다.
 
523
노라는 어린아이들이 불쌍하였다. 그는 용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524
"용식아."
 
525
"내?"
 
526
속 모를 풍파를 만난 어린아이는 아직도 겁이 가라앉지 아니하였는지 비실 비실한 다.
 
527
"어서 들어가 자거라."
 
528
"내."
 
529
"어머니 옆에 가서 자…… 내가 데려다 주까?"
 
530
용식이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531
"왜? 어서 자야지…… 응, 어서 가서 자자, 응?"
 
532
용식이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다가 발딱 일어나더니 그의 어머니가 누워 있는 안방을 연해 돌려다보면서 건넌방으로 들어가 모기장을 떠들고 제자리에 눕는다.
 
533
노라는 침묵의 비극을 보는 것 같아서 눈가가 더워 왔다.
 
534
용식이는 의붓아비를 맞이한 뒤에부터는 안방 ─ 어머니의 옆에 가서 아니 될 곳인 줄을 안 것이다.
 
535
철없는 용식이지만 이다지도 어린 마음의 델리키트한 상처를 보니 노라는 그것이 결코 남의 일이니라 싶지 아니하였다.
 
536
의붓아비나 의붓어미나 일반이다. 현이 오래잖아 결혼을 한다는 말을 혜경이한테 들었다.
 
537
다행히 마음 착한 여자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아니하다가는 마리아나 송이 안나가 모두 저렇게 가엾이 자랄 것이다.
 
538
그렇다면 자유를 부르짖고 나선 노라 자신이나 자유로운 몸으로써 돈에 몸을 판 성희나 자식에게 대하여 죄를 짓기는 일반이다.
 
539
노라는 옥순이 때의 일을 생각하고 안잠자기더러 깊은 잠을 자지 말라는 주의를 시킨 뒤에 바깥채로 나왔다.
 
540
이튿날부터 마작판이 쓸쓸해졌다.
 
541
성희는 그 일이 있으면서부터 일체 얼굴을 내어보이지 아니하였다. 성 희가아니 나오는 때문도 있지만 그러나 실상은 재환이가 오지 아니하는 것이다.
 
542
그는 안집에 파란이 있던 이튿날 왔다가 정원이와 밖에 나가 놀면서부터는 아주 발걸음이 떠졌다. 급한 일이 있으면 속달우편으로 정원이에게 편지를 하든지, 어찌하다가 찾아와도 마루에 앉아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는 정원이를 데리고 나가곤 하였다.
 
543
정원이는 아침에 나가면 자정 전에 집에 돌아오는 적이 별로 없었다.
 
544
대개는 열두시가 지나서, 그렇잖으면 한시 두시에 돌아오기가 예사였었다.
 
545
일요일에도 늦잠을 자고는 오정이 되면 나가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재환이가 와서 같이 나가든지 하였다.
 
546
재환이가 잘 오지 아니하는 것과 딸이 육장 늦게 돌아오는 것을 마나님 이 다른 때 같으면 근심도 하고 딸을 나무라기도 하였겠지만, 그러나 그러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노상 싱글벙글 웃고 지내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속이있는 줄은 노라도 진즉 짐작을 하였다.
 
547
노라가 효정이를 가르치기는 소를 가르치기보다 더 힘이 드는 일이었었다.
 
548
언문 다섯 줄을 가르치기에 오월 유월 두 달이 걸리었다.
 
549
그러나 그것도 완전히 깨우치지는 못하였다.
 
550
가갸 거겨를 가지고 며칠 승강이를 하다가 겨우 외우고 쓰고 하게 해놓고 고교 구규를 가르치노라면 앞서 배운 가갸 거겨는 벌써 잊어버린다.
 
551
그러면 또다시 가갸 거겨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
 
552
그러한데다가 아이가 변덕이 어떻게 많던지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은 으례 껏 공연한 생트집을 잡아 가지고 이짐을 부리다가는 울곤 한다.
 
553
처음은 그래도 낯이 어려워서 선생님인 노라에게 직접 그러지는 아니하던것이 차차 얼굴이 익어가니까 걸핏만 하면 말도 듣지 아니하고 글도 읽지아니하고 끄윽 앉았다가는 안방으로 건너가서 왕하고 울곤 하였다.
 
554
그러면 주인마나님은 그걸 등에 걸터업고 건너와서 좋게 말은 하나 노라가 그 애의 비위를 거슬러 준 것으로 허물을 돌려보내는 것이다.
 
555
그러할 때마다 노라는 그만두라고 털고 일어서고 싶었으나 번번이 참아 왔던 것이다.
 
556
그러나 그러한 것보다도 좀 더한 이러한 일도 있었다.
 
557
성희 집에 풍파가 생긴 지 이삼 일이 지난 뒤니까 바로 칠월 초생이다.
 
 
558
효정이는 언문은 읽으려고도 아니하고 아침부터 풍금만 짚어 달라고 졸랐다.
 
559
노라는 할 수 없이 걸상에 앉아 동요를 한 곡조 짚노라니까 안방에서 주인 마나님이 건너왔다.
 
560
"이년! 공부는 아니하고 그 소리만 듣고 있어?…… 썩 이리 와서 글 읽어!"
 
561
주인마나님이 손녀를 이렇게 나무라는 것은 노라가 보기에는 처음이다.
 
562
그는 결코 손녀를 그렇게 엄한 말과 얼굴로 나무랄 사람이 아니다.
 
563
그것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왜 공부는 시키지 아니하고 풍금만 짚느냐?"
 
564
하고 노라를 책하는 소리다.
 
565
이러한 노골적 질책은 역시 처음 당하는 일이다.
 
566
노라는 잘못한 것도 없이 이런 일을 당하기가 억울하였으나 좋은 낯으로 걸상에서 일어섰다.
 
567
"거봐라, 할머니가 걱정을 하시잖니?…… 인젠 그만 하고 공부하자."
 
568
노라는 변명삼아 이렇게 말을 하고, 그러나 또 그 애가 고집을 쓸까 봐서 좋은 말로 달래었다.
 
569
"그 애가 그렇게 아니할랴구 하더래도 선생님이 알어서 잘 공부를 시키 서야지! 어린것들이야 놀 양으로만 하지 멀 아우?"
 
570
아이가 어떻게 되었든지 그것은 아랑곳이 아니요 전책임을 결국은 선생인 노라에게 지우자는 것이다.
 
571
좀더 자기네의 어린아이가 얼마나 속이 안 되었으며 얼마나 저능한가를 알았으면 그런 무리한 요구는 아니하련만, 생각하니 사십 원의 돈에 매여 그러한 어거지를 받는 것이 분하였다.
 
572
"이년, 책 내놓고 읽어봐."
 
573
주인마나님은 오르간을 잡고 섰는 효정이를 붙잡아 옆에 앉히었다.
 
574
그는 이상스럽게 울음이 나오지 아니하고 다만 골난 볼때기만 처뜨리고 앉아 있다.
 
575
노라는 효정이 앞에 책을 펴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읽으려고 아니한다.
 
576
"어디까지나 배웠수?"
 
577
마나님은 노라더러 묻는다. 노라는 그것이 아무리 자기의 허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두 달 동안에 겨우 언문 두 줄을 가지고 허덕거렸다고 하기는 얼굴이 따가왔다.
 
578
그러나 여차직하면 그만 내던져 버릴 결심을 한 터라 사실대로 말을 하였 다.
 
579
"언문 두 줄밖에 못 배웠답니다."
 
580
진보가 더딘 줄은 알았지만 그러나 너무 의외였던 것이다.
 
581
"무어요? 언문 두 줄이요?"
 
582
"네…… 아무리 알켜 주어도 밤을 지내고 와서 보면 잊어바리고 잊어 바리고 해서…… "주인 마나님은 손녀딸을 흘겨보았다.
 
583
"네라끼년! 돈 팔십 원을 들여서 국문 두 줄을 배웠단 말이냐?"
 
584
주인마나님은 여지없이 손녀를 나무랐다.
 
585
"이년, 아모리 둔하기로니 그래 두 달 동안에 겨우 언문 두 줄을 배우고말어?…… 그럴 테면 왜 공부를 시키라고 안달을 해?…… 남이 시킨 것도 아니고 제가 한다고 한다고 졸라서 시작한 것이니 좀 정신을 차려야지…… 나이 열두 살이나 먹은 년이!"
 
586
통히 그러한 나무람을 듣지 아니하던 효정이가 처음은 실상 그것이 나무람 인지도 잘 몰랐다가 필경 울음이 터졌다.
 
587
노라가 달래려고 하나 아무 때라고 할머니가 굽히기를 기다리고 그치지 아니 한다.
 
588
생각하면 무리가 아닌 말이다. 두 달 동안에 돈 팔십 원을 들이어 언문 두 줄 ─ 스무 자를 배웠으니 그거나마 똑똑히 익히지도 못하였지만 사흘에 한자씩 이요, 한 자에 사 원씩이 먹힌 셈이다.
 
589
노라는 이렇게 따지어 보고 무안한 생각이 드는 중에도 그러나 돈을 팔십원이나 들여서 언문 두 줄을 겨우 배웠느냐는 주인마나님의 말이 눈치 밥을 먹는 것같이 목에 걸리었다.
 
590
노라는 비로소 남에게 돈을 받고 부리우는 사람의 처지가 어려운 것을 깨 달았다.
 
591
그는 돌아오는 길에 혜경이 집에 들러 그런 이야기를 하고 어디 딴데 직업을 구할 상의를 하였다.
 
592
그러나 지금 당장에 그만두면 우선 막막할 뿐만 아니라 또 어느 때나 직업이 구해질지 모르는 것이니 그대로 계속하여 다니기로 하였다.
 
593
칠월 중순.
 
594
비로소 참더위에 들어서는 때다. 수은주는 나날이 높아가고 서울 장안의 모든 사람은 헉헉하고 허덕거린다.
 
595
사오 일이나 지독한 더위가 계속이 되던 끝인데 오정이 지나자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리기 시작하더니 소낙비가 퍼붓는 듯이 쏟아진다.
 
 
596
노라는 효정이의 학과를 마치고 막 돌아오려고 하다가 비에 막혀 주저 앉았다.
 
597
창자 속까지 시원한 바람이 활활 불면서 댓줄기 같은 하얀 빗발이 퍼붓는것이 시원한 것도 시원한 것이거니와 보기에도 통쾌하였다.
 
598
노라는 시달리던 더위 끝에 비내리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몸이 노곤 하여지며 조속조속 잠이 오기 시작하였다.
 
599
사실 그는 요즈음 잠이 부족하였다.
 
600
좀 돌이켜서는 옥순이의 죽은 일, 그러고 나서 마작, 그리고 나서는 무서운 방과 빈대에 보채어 밤이면 변변히 잠을 자지 못하였다.
 
601
더구나 빈대는 그에게 대적이다.
 
602
원체 물것을 몹시 타서 벼룩 한 마리 빈대 한 마리만 생기어도 잠을 자지 못 한다. 그런데 집이 낡은 집이라 빈대가 유난스럽게 많다.
 
603
옆에서 정원이와 마나님이 뱃심 좋게 식식하고 잠을 자는 것을 보면 부럽 기도 하고 짜증도 났었다.
 
604
비는 소낙비로 시작하였으나 곧잘 멈추려고 아니한다.
 
605
마침 잠도 오고 비도 오고 해서 노라는 방문을 열어놓은 채 팔을 꼬부려 베고 드러누웠다.
 
606
안심하고 한잠 잘 수가 있다.
 
607
방은 새하얗게 도배를 해놓았는데 빈대 한 마리 눌러 죽인 흔적도 없다.
 
608
방바닥은 비워 두는 방이지만 누지면 못 쓴다고 가끔 불을 넣기 때문에 차기는 차면서도 눅눅하지는 않다.
 
609
차라리 옥순이도 없고 하니 이 집에 와서 아주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서노라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610
효정이의 순서없이 짚는 오르간의 소리가 멀리멀리 가는 듯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낮잠은 조금 자도 오래 잔 것 같다.
 
611
노라는 얼마 동안 자다가 숨이 갑갑하여 어렴풋이 잠이 깨었다.
 
612
그러나 잠이 아직 완전히 깨지는 아니하고 그대로 좀더 잤으면 좋겠는데 덥고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다.
 
613
그는 집에서 흔히 정원이가 잠결에 다리를 들어 얹는 것만 여겨 손으로 몸에 눌리는 것을 치우려고 하는데 곧잘 떨어지지를 아니하여 눈을 떠보았다.
 
614
"으악."
 
615
너무나 놀란 노라는 겨우 이 한 마디를 지르고 숨이 탁 막혔다.
 
616
노라의 누워 있는 위에 덮어 누르고 있는 것은 말썽짜리 반신불수 이었었다.
 
 
617
흉허운 중에도 가뜩이나 큰 얼굴은 무슨 탈바가지 같은 것으로 노라의 얼굴을 가린 것 같았다.
 
618
헤 하고 벌린 입에서 흘러내린 침이 노라의 볼에 흥건히 묻었다.
 
619
노라는 숨이 탁 막히고 정신이 아찔하는 것을 이래서는 아니 되겠다고 기운을 가다듬어 두 손으로 그의 아래턱을 힘껏 떼밀치고 벌떡 일어섰다.
 
620
쿵 하고 그는 저편 풍금 걸상에 머리를 부딪치고 뒤로 쓰러졌다. 그러나 그 의 바른손아귀에는 노라의 치맛자락이 단단히 움겨쥐인 채 그대로 있다.
 
621
처음에 노라가 으악 하고 외치는 소리에 안방에서 주인마나님이 뛰어 나오고 효정이도 외다리로 따라나왔다. 주인마나님도 축축히 내리는 비에 아랫목에 누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622
노라는 붙잡힌 치맛자락을 홱 잡아당겼으나 그 병신이 어디 그러한 손 아귀 힘이 있는지 팽팽하게 당기기만 하고 놓지 아니한다. 놓지 아니하고 도리어 기어 덤벼들었다.
 
623
주인마나님은 방으로 들어와 말리려고는 아니하고 문턱에 걸쳐서서 나무라기만 한다.
 
624
"아 이놈아, 저게 무슨 짓이냐! 놓아라."
 
625
그것이 노라에게는 홧증이 났다. 그는 치맛자락을 잡은 채 기어드는 병신의 앞가슴을 죽어라 하고 발길로 내질렀다.
 
626
캑 소리와 함께 그는 잡았던 치맛자락을 놓치고 굴러 떨어진다. 그러자마자 등 뒤에서 누가 노라를 홱 옆으로 떠밀고 고함을 치며 나선다. 주인 마나님이 상을 무섭게 하고 노라를 노려보다가 덥석 병신을 안고 다독거리듯 어루만져 준다.
 
627
"이게 무슨 짓이요! 병신을 그렇게 함부루…… 엥!"
 
628
노라는 이것저것 돌아볼 것도 없고 더 참을 수가 없이 되었다.
 
629
"무엇이 어째요?"
 
630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631
"무얼 무엇이 어때? 당신은 아무리 여인네라도 성한 사람이 아니요? 그런데 이건 한쪽을 통히 쓰지 못하는 병신 아니요? 그래 병신이 설사 좀 잘 못 된 일이 있기로니!…… 좋게 놓아달라고 달랠 것이지 그렇게 사정없이 걷어찬단 말이요? 그러다가 죽으면 어쩔 테요? "노라는 너무도 분하여 와들와들 떨리고 눈에서 불이 튀어나올 것 같다.
 
632
"죽어도 좋아요."
 
633
노라는 대고 내쏘았다.
 
634
"무어 어째? 죽어도 좋아?"
 
 
635
"죽어도 좋아요…… 병신이라면서 그래 남의 젊은 여자가 누 는데 와서 덮어 눌러? 그게 잘한 거요?
 
636
주인마나님은 실상 그것은 몰랐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편이 성을 낸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도 할 수가 있지만 지금은 화가 난 판이라 굽은 것도 바르다고 우길 판이다.
 
637
"무척 장한 년의 몸뚱인가부다! 좀 그랬으면 어때? 오직 여편네가 칠 칠 찮으면 대낮에 남의 집에 와서 퍼버리고 낮잠을 자? 그런 여편네가 무엇이 그리 장하다고 그래…… "노라는 그렇게 듣고 생각하니 방심을 하고 잠을 잔 것이 잘못인 것도 같아 후회가 났다. 그러나 역시 지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638
"원 별 빌어먹을 꼴을 다 보겠네…… 아모리 제 자식새끼가 귀엽기로 니 그래 저 병신을 놓고 남을 나무래요? 좀 생각을 해봐요…… 고 모양 다리를 해가지고 남의 젊은 여자를 벌건 대낮에 흉칙스럽게…… ""병신이라도 병신 아닌 늬들하고 바꾸러 가질 않는다. 염려 마라…… 아모리 병신이요 못났어도 양반의 씨다."
 
639
"흥! 양반! 참 양반 구경답다. 저 꼴을 해가지고 양반의 씨야? 양반이니 어떻단 말이야? 골백 번 양반이라도 내야말로 바꾸러 오잖겠다."
 
640
"큰소리는 잘한다! 돈 사십 원씩 받고 병신 글 가르치느라고 쫓어 다닌건 누군데?
 
641
그것이 노라에게는 뼈끝까지 울리게 아픈 말이다.
 
642
그는 직업을 얻되 이따위 직업을 얻었던가 이것이 안타까와 가슴을 쾅쾅 찧고 싶었다.
 
643
분이 나는 대로 하자면 달려들어 늙은이의 흰머리를 오독오독 뜯어 주어도 오히려 속이 풀릴 것 같지 아니하였다.
 
644
"아이구? 더럽고 아니꺼워! 내가 이만 멀쩡한 년이 어데 가면 그 벌이 못 할까?"
 
645
노라는 마지막 이렇게 해대고 뛰어나섰다.
 
646
비가 그대로 오고 흰 구두가 진흙에 철벅거리고 아까 훑어 잡혔던 치마가 꼴이 아니다.
 
647
노라는 아랫마을까지 내려와서야 비로소 인력거를 잡아 타고 혜경이 집으로 몰아세웠다.
 
648
혜경이는 미친 여편네같이 모양새를 해가지고 들이닿는 노라를 보고 필시 무슨 일이 있었느니라 하여 그다지 놀라지도 아니하였다.
 
649
"웬일이야?"…… 비를 이렇게 맞고…… 저 구두가 저게 머야."
 
 
650
노라는 새삼스레 분한 생각이 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651
혜경이는 노라에게 오늘 당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나서 노라가 생각 하는 것과는 달리 도리어 싱글벙글 웃었다.
 
652
"남은 분해 죽겠는데 웃고 있어요!"
 
653
그는 뾰롱해서 벌떡 일어선다. 혜경이는 여전히 웃으면서 붙잡아 앉히었다.
 
654
"거봐요, 글쎄…… 왜 남편 마다고 자식 버리고 뛰어나와서 그런 일을 당해요?…… 누가 시켰수?"
 
655
"시켰다나? 누가…… 그 늙은 년을 왜 내가 그냥 두어 두고 왔어! 흰 터럭을 아득아득 뜯어 줄걸…… ""세상이 그런 법이야…… 남편 없고 돈 없으면 아모리 날고 뛰는 재조가 있어도 별수가 없어…… 덮어놓고 만만하게 보는걸…… ""왜 만만하게 보아? 남편 없고 돈 없으면 사람이 아니든가?"
 
656
"글쎄 그거야 이녁 생각이고 세상이 그렇게 되어먹은 걸 어떻게 해?"
 
657
"그러니까 그런 세상하고 싸워볼 테란 말이야."
 
658
"그렇거든 울지를 말어요."
 
659
"울지 않어…… 아니 울어."
 
660
노라는 눈에 눈물이 괸 채 웃었다.
 
661
"결심만은 좋소마는…… 살어갈 일이 걱정이 아니요? 그거나마 벌이를 놓쳤으니 인젠 어떻게 해?"
 
662
혜경이는 정말 걱정스러웠다. 도리어 세상을 아는 만큼 당자인 노라보다도 더 근심이 되는 것이다.
 
663
혜경이도 발 넓이 알아보고 남편더러도 알아보아 어디 직업자리를 얻어 보려고 속으로 작정은 하였으나 그것이 한 달이 걸릴지 두 달이 걸릴지, 또는 일 년이 걸릴지 모르는 것이다.
 
664
더구나 노라는 취직전선에 나서기에 퍽 불리한 조건이 있다.
 
665
인물이 잘나서 화장을 잘하고 나서면 스물여섯이라지만 네 살은 어리어 보인다.
 
666
그러나 아무래도 중년을 바라보는 여자로, 따라서 백화점의 여점원이라 든가는 도저히 바랄 수가 없는 것이다.
 
667
그밖에 은행이나 회사 같은 데는 전문의 지식이 없으니 길이 트일 수 가 없다. 훨씬 방향을 돌리어 버스걸이나 제제직공이 되자 해도 ─ 아직까지 노라에게 그러한 생각은 없었지만 ─ 역시 연령 관계로 자격 상실이다.
 
668
할 수 없이 지금 당장은 노라가 현재 전세 들어 있는 집을 처치하고 그 돈 백 원을 가지고 우선 취직할 동안 살아갈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669
그런데 성희가 갑자기 더구나 얻었던 영감까지 놓치었는데 그렇게 돈이 도로 빠져나올지가 걱정이 되었다.
 
670
성희가 돈을 내지 못한다면 누구 딴 사람에게 넘기었으면 좋겠지만 마침 그러한 자리가 있을지도 또한 모르는 일이고. ─ 이러한 상의와 걱정을 하면서 둘이서 같이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다.
 
671
비는 개고 햇볕이 쨍쨍하여 눈이 부시다. 혜경이는 노라의 반 달치 월급을 찾으러 간다고 필운동으로 갔다. 노라가 창피하니 그만두라는 것을 듣지 아니하였다.
 
672
노라는 마나님도 청하여 한 자리에 앉아서 필운동 가정교수 자리를 작 파 한 이야기를 대강 하고, 앞으로 직업을 얻기까지 집 전세 얻은 것을 찾아서 생활을 해가야 할 터인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상의하듯이 말을 하였다.
 
673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나님은 무엇을 까막까막 생각하다가 묻는다.
 
674
"백 원이지요?"
 
675
"네."
 
676
"그거 내가 맡지요."
 
677
이것은 노라에게나 성희에게나 생각도 못하던 것이다.
 
678
노라가 마나님까지 청해 앉히고 그 이야기를 한 것은 그에게서 돈이 나오리라 싶어 그리한 것이 아니라 어쨌건 같이 있는 터인데 알리지도 아니하 고집을 처리하기가 무엇해서 그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생각지도 아니한데 서 성큼 나서니 반갑기도 하였거니와 의아롭기도 하였다.
 
679
"우리 정원이하구 상의해서 어떻게 해보지요. 그렇잖애두 어데 방을 하나 얻으려 구 했드랬으니까요."
 
680
"그러면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읍니다. 나도 갑자기 어데서 돈이 날 데가 없고 걱정이 되얐는데…… "성 희는 매우 다행히 여기었다.
 
681
마나님이 재환이를 등을 대고 하는 말인 것은 깊이 생각지 아니하여도 노라나 성희나 다같이 짐작은 하였다.
 
682
성희가 들어간 뒤에 노라는 어쩐지 몸이 찌뿌드하고 오한이 나는 것 같아서 베개를 내려 베고 드러누웠다. 아마 낮잠을 자다가 학질을 붙들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별로 대끼지 아니하였다.
 
683
혜경이가 필운동서 돌아왔다. 그는 돈을 이십 원하고 또 몇 원 찾아가지고 왔다.
 
684
"옜수…… 이걸 괜히 내버려? …… 손복할 일이지."
 
 
685
노라는 그 돈이 끔찍이 더럽기도 하고 한편 소중하기도 하였다.
 
686
"이 집은 어머니가 돈을 내고 맡기로 했수."
 
687
"응…… 잘했구먼…… 형님 부자 되었읍니다그려? 정원이가 저금해 둔 돈 이지요?"
 
688
혜경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 하는 소리나 옆에서 듣고 있는 노라가 되레 미안하였다.
 
689
그러나 마나님은 아주 심상하다.
 
690
"응…… 돈 백 원이나 뎌금한 게 있어서…… "혜경이는 입가에 웃음을 띠고 아무 말도 더 하지 아니하였다.
 
691
이날 정원이가 돌아오는 것을 마나님이 밖에 나가 한참 소곤거리더니 사오일 후에 돈이 되겠다고 아주 확정해서 대답을 해주었다.
 
692
밤새도록 노라는 열이 오르고 사족이 아팠다. 그리고 왼편 옆구리도 따끔따끔 결리었다.
 
693
이튿날 아침에는 열이 조금 내리더니 저녁때는 다시 오르고 옆구리도 더 결리었다.
 
694
이튿날 노라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어 근처 한약국에 가 약을 두 첩 지어 왔다.
 
695
병세를 이야기하니까 학질인가 보다고 하고 임신 여부를 물은 뒤에 약 을지어 주었다.
 
696
약을 달여서 바로 한 첩 먹고 또 저녁에 한 첩 먹으니까 조금 차도가 있는것 같아서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몸이 아주 가벼워진 것은 아니다.
 
697
그는 약간 몸이 편치 아니한 것보다는 더 애가 쓰이는 데가 있었다. 달랑 남은 돈 백 원이 없어지기 전에 취직이 되어야 하겠다는 ─ 그보다도 하루바삐 취직이 되어서 백 원은 그대로 아껴 두고 싶다 하는 초조한 생각으로.
 
698
 
699
취직을 하자면 여기저기 알아보고 돌아다니고 해야 할 터인데…… 노라에게는 그러한 반연이 없었다. 전에 사귀던 사람을 찾는다면 반 연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사람들은 모두 현과 가까운 때문에 찾아가기가 창피하였다.
 
700
그리하여 막연하나마 혜경이 내외가 어떻게 주선을 하여주기를 기다리는것밖에는 딴 도리가 나서지 아니하였다.
 
701
몸은 종시 쾌하지가 아니하였다. 심하지는 아니하여도 저녁때면 으례 오한이 나고 왼편 옆구리는 점점 더 결리었다.
 
702
그리고 몸이 나른하여 양말꿈치 하나를 꿰매재도 바늘이 손에 잡히지를 아 니 하였다.
 
703
입맛도 떨어졌다. 밥을 먹지 못하니 더구나 몸이 날로 쇠하여 가는 것 같았다.
 
704
그렁저렁 칠월도 거의 다 지나간 그믐께 어느 날이다.
 
705
정원이는 사오 일 전부터 은행에도 가지 아니하고 밤 늦게 돌아와 늦잠을 자고는 오정때에 나가고 하더니 석왕사로 피서를 간다고 떠났다.
 
706
전세돈 백 원도 이날 마나님에게서 받았다.
 
707
노라는 이튿날 아침 일찍 혜경이 집으로 내려갔다.
 
708
그냥 마나님과 같이 있으면 비용도 절약되고 하겠으나 이왕 돈을 다 찾은 터인데, 그때까지는 저편에서 집세를 부담하지 아니한 대신으로 마나님 이 식모 노릇을 은연중에 하여 왔지만 인제는 도리어 처지가 바뀌어 적어도 같이 밥도 해먹고 해야 할 터인데 몸이 성하지 못한 노라는 용기가 나지를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혜경이더러 어디 기식히고 있을 방을 구하여 달라고 하려 한 것이다.
 
709
그러나 혜경이는 방보다 여러 날 못 본 동안에 노라의 얼굴이 더욱 알아보게 수척한 것을 보고 놀랐다. 아직 아침 나절이라 그다지 덥지도 아니하건만 노라는 소격동서 안국동까지 내려오는 동안에 땀이 후줄근하게 배고 몸이 솜같이 피곤하였다.
 
710
혜경이는 여간 놀라와하지 아니하였다.
【원문】9. 백색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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