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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형의 집을 나와서 ◈
◇ 3. 옛 얼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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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5
채만식
1
人形[인형]의 집을 나와서
2
3. 옛 얼굴들
 
 
3
기차는 왕, 우악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슬며시 움직였다. 노라는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4
"잘 가요."
 
5
"안녕히 가세요."
 
6
"네. 두 분 안녕히 계서요. 남선생님도 안녕히 계세요."
 
7
남의사는 추렷이 한 걸음두 걸음 멀어가는 노라는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8
기차는 피피하며 속력을 낸다. 마치 플랫폼에 모여섰던 군더더기 사람들을 털어 버린 것이 시원스러운 듯이 !
 
9
노라는 아물아물한 친지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차차 더 멀어간다. 서울도 멀어 간다. 팔구 년 동안 한번도, 아버지가 돌아가서도 떠나지 아니한 서울이다.
 
10
이 기막힌 서울을 두고 어떻게 내가 떠나는가 싶었다.
 
11
그의 바라보고 가는 곳은 고향이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정든 ․ 고향을 버리고 어디 머나먼 낯선 땅을 찾아가는 듯이 마음이 호젓하였다.
 
12
겨울의 차창 밖은 단조하였고, 앞자리에는 시시덕거리는 젊은 사나이 들이있어 몹시 불쾌한 것을 노라는 옆에 어린아이 같아 철없어 보이는 시골 사람과 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겨우 무료함을 꺼오다가 대전서 호남선을 갈아탔다.
 
13
호남선서부터는 찻간이 성글성글하여 비좁지도 아니하고 편안히 놀 수 가있었다.
 
14
그러나 속력은 뜨고 몹시 까불었다.
 
15
이리(裡里)에서 다시 군산선을 갈아탈 때에는 해가 어슬어슬 저물었다.
 
16
이리는 어렸을 때 어머니와 전주 외가에를 가느라고 여러 번 거치어 다니던 곳이다. 그동안 많이 변하였으나 그래도 모든 것이 낯이 익었다.
 
17
정거장의 역부들도 전의 그 사람들인 것 같고, 차안으로 오르는 사람 가운데는 누구인지는 잊었으나 낯이 익은 듯한 사람이 더러 있다.
 
18
이러한 종류의 여자를 별로 구경하지 못하는 이 차의 사람들은 무슨 색 달리 고운 동물이나 보는 듯이 모두 한번씩 돌아다보고 지나간다.
 
19
××역에 내렸을 때에는 날이 벌써 침침하였다.
 
20
집까지는 험한 산길로 시오리나 가야 하니 탈것이 있어야 하겠는데 들 가운데 정거장이랍시고 바라크 두 채만 놓였을 뿐 무엇이고 있는 것 같지가 아니하였다.
 
21
노라는 어떻게 하나 싶어 망설이고 섰는데 "이게 웬일이십니까?"
 
22
하고 인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
 
23
심심하게 서서 있다가 생각지도 아니한 인사를 받으니 노라는 자지러지게 놀라 그 사람을 바라다보았다.
 
24
바라보노라니까 그 널찍한 이마며 벌씸한 코, 입은 꾹 다물고 눈만 웃는 입과 눈 커다란 얼굴, 커다란 몸과 키, 이런 것이 아닌게아니라 아는 사람, 알되 인상이 깊게 아는 사람인데 누군 것은 생각이 아니 난다.
 
25
"하하, 오래 돼서 잊으셨구만이요……나 병택입니다요, 병택이…… ""아 ! 오병택씨…… 어쩌면…… "하고 노라는 이름을 듣고 비로소 깨쳤다.
 
26
깜짝 반가웠다. 반가울 만한 사람을 이런 때에 만났으니 더 반가운 것이다.
 
27
"깜빡 잊었어요…… 알 듯 알 듯은 한데…… 생각이 아니 났어요."
 
28
"네. 잊으셨기도 쉽지요. 십여 년이나 되았으니…… 그런데 친정댁에 오시는 길이세요?"
 
29
"네."
 
30
"그러면 어서 가시지요. 마침 잘 뵈었습니다. 모시고 가지요."
 
31
노라는 걱정스럽던 마음이 턱 놓였다.
 
32
병택이라는 사람은 노라를 대합실에서 기다리게 하고 동리에 들어가서 짐꾼을 얻어다가 짐을 찾아 지워주었다.
 
33
그래저래 날이 깜빡 저문 뒤에 두 사람은 짐꾼을 뒤세우고 등불 하나로 눈 삼아 길을 나섰다.
 
34
병택이는 노라와 한 동리 사람이다. 보통학교는 병택이가 세년급인가 위 였으나 어쨌건 같이 다니었다.
 
35
장난꾼이요 망나니도 대장이었었다. 이년의 자식 저년의 가시내 하고 노라와 싸움도 더러 하였다.
 
36
서울서 중학교에 다닐 때에도 그들은 가까이 상종하였다. 나이 듦에 병택은 고향 사람의 정 이상의 마음으로 노라를 대하였다. 그러나 노라는 그것을 알고도 모르는 체하였다.
 
37
병택은 중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가고, 노라는 재학 중도에 결혼을 하였다.
 
38
그 뒤로는 서로 만나지도 못하였거니와 서로 기억을 뒤질 일도 없었던 것이다.
 
 
39
다만 병택이만이 고향에 있고, 또 노라의 어머니를 종종 찾아다니었으므로 그간의 소식을 듣곤 하였던 것이다.
 
40
"동경서 언제 나오셨어요?"
 
41
하고 노라가 병택이의 그 뒷소식을 듣고자 하였다.
 
42
"한 삼 년 있었지요. 더 있을래야 밑천이 자라나요."
 
43
"그러고 늘 시골 계셨어요?"
 
44
"웬걸요. 돌아다녔지요. 별데를 다 가고 별세상 다 구경했습니다."
 
45
노라는 길을 걸어가기가 퍽 괴로왔다. 볼 좁고 뒷굽 높은 구두가 더구나 희미하게 등불에 비치는 길바닥의 우툴두툴한 것을 골라 디딜 수가 없었다.
 
46
몇 번 넘어지는 것을 병택의 팔을 잡고 겨우 바로 서곤 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큰 정자나무에 몸을 기대는 것같이 흐뭇하였다.
 
47
그러나 몇 번을 그렇게 회똑거리고 나니 발목이 시고 아파서 걸음을 걸을수가 없다.
 
48
"여기 탈것 없어요?"
 
49
하고 노라는 물었다. 좀 괴로와도 그대로 가는 게 유쾌는 하겠는데 더 견딜수가 없었다.
 
50
"없어요."
 
51
하고 병택은 입맛을 쩝쩝쩍 다시었다.
 
52
"그러실 줄 알었드면 담 차를 기달려 ××으로 가서 인력거라도 타실 것을…… 좀 늦더래도 그렇게 타시까요?"
 
53
하고 물었다.
 
54
"담 차가 멫시에 있는데요?"
 
55
하고 노라는 솔깃하여 물었다.
 
56
"아마 열시나 되어야 있을걸요."
 
57
노라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 열시까지 어떻게 기다려? 그러고 그렇게 한다면 병택이는 가버릴 텐데…… 그는 병택이가 그 실한 등으로 업어다 주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58
병택이도 업고라도 가고 싶었다. 노라가 청을 한다면 얼른 업고 나설 것이다.
 
59
이 귀찮지 아니한 귀찮은 짐을 어떻게 하나…… 하고 병택이는 궁리를 하였다.
 
60
병택이는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노라와 짐꾼을 기다리라고 하고 오던 길로 동리를 향하여 뛰어갔다.
 
61
가더니 소식이 없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한 삼십 분은 기다렸을 때에 겨우 헐헐 하고 뛰어오더니 신문지에 조그맣게 싼 것을 불쑥 내밀며 "이 걸 신으십시오."
 
62
한다. 노라가 받아 펴보니 운동화다. 퍽 반가왔다.
 
63
"아이구 아슴찮애라. 어쩌면…… ""하하. 전라도에 오시더니 대번 사투리가 나옵니다그려. 멫 군데 찾어다니다가 그거 달랑 하나 남은 것을 가져왔는데 맞으실난지 모르겠읍니다."
 
64
노라는 구두를 벗고 운동화를 갈아 신었다. 좀 커서 맞지 아니하였지만 구두에서 깔창을 빼어 깔고 끈을 바짝 졸라매니까 그대로 견딜 만하였다.
 
65
다시 길을 걸으니 발이 가볍고 시원한 것이 날아갈 듯하였다. 그는 병택이를 만난 것이 새삼스럽게 고마왔다.
 
66
그는 길도 서툴렀다. 이 정거장이 개설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가느라고 한번 차를 타러 나온 뒤로는 와본 적이 없었다.
 
67
큰일날 뻔싶었다. 더구나 연전에 우편배달부를 강도가 죽였다는 ×× 재를 어떻게 넘어갔을까 생각하니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성큼하였다.
 
68
날은 그새 며칠 몹시 춥더니 오늘부터 풀리어 푸근하다. 하늘에는 눈 구름이 덮였는지 별이 보이지 아니한다.
 
69
뒤에서는 짐꾼 아이가 끙끙하며 힘들게 따라온다.
 
70
남산재를 후유후유 넘어 쇠무릎 고비를 돌아 재실골에 당도하니 겨울 밤이 초저녁을 지난 듯하였다.
 
71
노라의 친정집은 읍에서 몇 마정 떨어져 있는 이 재실골에 있었다.
 
72
노라는 급한 마음으로 지쳐 둔 사립문을 밀어 젖히고 "어머니 !"
 
73
하고 부르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방들은 깜깜하고 아무 대답이 없다.
 
74
노라 어머니는 잠이 들었었다. 두 번 세번째 불렀을 때에 잠이 깨었다.
 
75
"아이구 야야, 이게 웬일이냐 !"
 
76
노라 어머니는 문을 차고 뛰어나왔다.
 
77
어둔 속에서 모녀는 그러안았다. 노라는 "어머니 !"
 
78
한번 다시 부르고 울었다. 어머니도 따라 울었다.
 
79
병택이는 짐을 받아 마루에 올려놓아 주고 짐꾼 삯을 치러 보내주었다.
 
80
그는 간다는 인사나 하고 가고 싶은데 모녀가 붙잡고 울므로 어쩌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있었다.
 
81
한참 만에 어머니가 먼저 정신을 차리었다.
 
 
82
"그만 그쳐라. 방으로 들어가자……저건 누구냐?"
 
83
"저올시다, 병택이여요."
 
84
하고 병택이가 나서서 인사를 하였다.
 
85
"아이구, 나는 누구라구 ! 좀 올라오소."
 
86
"네. 바로 갈랍니다.…… 정거장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래서 같이 왔지요."
 
87
"저런, 아슴찬해라……자네 아니었으면 그것이 밤중에 혼자 고생헐 뻔히였네."
 
88
노라는 눈물을 거두고 병택이더러 잠깐 올라오라고 권하였다.
 
89
그러나 그는 굳이 사양하고 돌아갔다. ── 가지고 오던 등불만 빌어가지고. 그리고 내일 또 오겠다고 하고.
 
90
모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방으로 들어갔다.
 
91
어머니가 더듬더듬 성냥을 찾아 불을 켰다.
 
92
먼지 앉은 사기등잔 끝에 가느다란 불이 졸 듯 까막인다.
 
93
희미하나마 어머니의 많이 변한 얼굴이 완연히 보인다.
 
94
"어머니, 왜 저렇게 늙었수?"
 
95
어머니는 정말 늙었다.
 
96
칠 년 전 혼인을 보러 서울 왔을 때에는 마흔다섯이라지만 아직도 중년 여인의 모습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주름이 오글오글 잡히고 머리가 다 세고 앞니도 두 개나 빠지고 아주 알아보게 노인꼴이 박혔다.
 
97
지팡이같이 서로 의지하던 남편을 여의고 다만 한톨 애지중지 기르던 딸은 출가를 하여 제멋대로 가서 살며 길이 멀어 만나지도 못하고 외로이 고생스런 생애를 보내느라고 저렇게 어머니가 늙었느니라 생각하니 노라는 회심의 눈물이 새롭게 솟아났다.
 
98
그는 어머니를 찾아온 것이 잘되었다 싶었다. 다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머니를 이렇게 홀로 두지 아니하리라고 마음에 맹세를 하였다.
 
99
어머니는 딸이 이렇게 갑자기 내려와, 그리고 오던 길로 자꾸만 우는 것이 필시 무슨 곡절이 있었느니라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00
"글씨 야야, 온다는 기별이나 허지……그렇게 원 뜻밖으 혼자 이러구 온단 말이냐?"
 
101
하고 어머니는 눈치를 살필 양으로 에둘러 물었다.
 
102
"어머니가 보고 싶어 그랬어……불현듯이 보구 싶어서."
 
103
하고 노라는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 눈으로 웃어보였다.
 
104
"그렇다구 어린것들이랑 애비(네 남편)랑은 어쩌라구 너 혼자만 이러구 오느냐?"
 
105
하고 나무라는 말이나 결코 나무라는 마음으로는 아니다.
 
106
노라는 집안 이야기가 날 것이 겁이 났다. 아무 때 이야기를 하여도 하기는 해야 하겠지만 이야기할 일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하였다.
 
107
그는 어떻게든지 말할 기회가 올 때까지 어머니의 입에서 묻는 말이 나오지 아니하게 하려고 하였다.
 
108
"어머니, 찬반 있수?"
 
109
하고 노라는 시장기도 들고 하는지라 이렇게 말머리를 돌렸다.
 
110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111
"아이구 야야, 내가 잊었구나 ! 저녁을 안 먹었을 틴디…… 나 나가서 밥 히 여 갖구 오마."
 
112
하고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노라는 황망히 말리었다.
 
113
"아니야, 찬밥이 있으면 좀 먹구, 그렇잖어면 그만둘 테야."
 
114
"먹든 밥이 좀 있기는 하다만…… 차서 못 먹는다."
 
115
"괜찮어."
 
116
"그럼 물이라도 데어갖구 오마."
 
117
하고 어머니는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한마디 "기왕이 거든 어린것들이나 하나 데리고 오지."
 
118
하는 소리가 새삼스레 섭섭하여하는 눈치다.
 
119
노라는 차라리 다 이야기해버릴까 하고 어머니를 치어다보았다.
 
120
저 어머니가 그 말을 들으면 얼마나 놀라고 기막혀할까 생각하니 노라는 차마 말이 입밖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121
어머니는 부엌으로 나가더니 한참 만에 김치 한통을 대접에 담고 새우젓을 곁들인 고추장 접시와 동치미 보시기와 숟갈을 놓은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122
노라는 웃목에 놓아두었던 놋바리를 갖다놓고 열어보니 반이 더 섞인 조 밥이다.
 
123
"야야, 참 조밥이다. 새로 한술 헐걸 그랬어…… "하고 어머니는 손으로 김치를 뜯으면서 걱정을 한다.
 
124
"조밥이면 어떤가?"
 
125
하고 노라는 먹기 시작하였다.
 
126
겨울밤에 손으로 뜯은 통김치를 싸서 찬밥을 먹는 것이 남방 이등지의 유일한 밤참이다.
 
127
이렇게 밤참을 먹노라니 옛 처녀 적이 생각키웠다.
 
128
아버지도 계셨고 어머니도 이렇게 늙지 아니하였고, 또 지금같이 이렇게 조 밥을 먹는 고생도 없었고…… "어머니, 늘 이렇게 조팝 잡수?"
 
129
하고 노라는 물었다.
 
130
"야야, 원 ! 시방 조팝 안 먹는 사람이 있는 줄 아냐? 헌다는 부자 집도다 조팝이란다."
 
131
하고 일어서서 부엌으로 나가 불을 때어두었던 김이 설설 오르는 숭늉을 떠가지고 들어왔다.
 
132
노라가 비로소 어머니의 옷을 보니 치마와 저고리가 모두 수먹빛이다.
 
133
그는 그것이 우스웠다.
 
134
"어머니, 치마 저고리가 그게 무어유? 노인이…… "어머니도 웃었다.
 
135
"이렇게 입어야 헌단다."
 
136
"왜? 누가 그래?"
 
137
"순사청에서랑 멘역소서랑."
 
138
노라는 서울서 신문에서 보던 색복 장려라는 것을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 거 렸다.
 
139
"보기는 싫어두 빨래 자주 안허닝개 좋더라."
 
140
"그렇지만 저게 무어야? 중처럼 숭업게 !"
 
141
"늙은 사람이 아무러면 어떠냐?"
 
142
"그래두……"
 
143
"하두 와서들 졸르길래 말맥이로 이렇게 한 벌 히여 입었지, 누가 이 숭헌 것을 입구 당긴다너냐 ! 빌어먹을 놈들이 허다허다 못허닝개 옷 입는 것까지 참견을 허는구나…… "어머니는 노라의 하는 양을 보려고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였지만 실상은 대단한 불평객이다.
 
144
"옷뿐이냐, 고무신을 못 신게 허는구나 ! 짚신을 삼어 신으라구…… 그러니 못 삼어 신는 사람은 사 신을라니깨 돈이 더 들지…… 저이는 양복이야 구두야 빼띄리고 대가리질허구 댕기 면서…… "노라는 있던 밥을 다 먹고 수저를 놓았다.
 
145
어머니는 상을 부엌에 내어다 두고 들어와서 반닫이 위에 싸둔 이불과 요를 내려다가 딸의 자리를 폈다.
 
146
밥이 내릴 동안 노라는 어머니의 그동안 지내온 이야기를 들었다.
 
147
영감이 죽고 나매 남은 것이라고는 갚을 수 없는 큰 빚과 이 집 한 채 뿐이었었다. 빚 준 사람들은 무엇 남은 재산이 있는가 하고 처음에는 덤벼 들었 으나 백 원짜리도 못되는 초가집 한 채밖에 없는 줄을 알자 모두들 단념하고 물러갔다.
 
148
최씨 ── 노라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망지소지하였다. 어쩔 줄을 몰라 딸에게라도 가서 여생을 의탁할까 생각도 하여보았으나 딸이(라느니보다는 사위가) 청하지도 아니하는 것을 머리를 두르고 찾아가기는 싫었다.
 
149
그는 이리저리 생각하던 끝에 동리의 지주를 찾아가 일곱 마지기 되는 논을 얻었다(소작으로).
 
150
그리고 영감의 장례비용으로 쓰고 남은 것을 농사 밑천 삼아 그해부터 그렁 저렁 고생스러우나마 살아온 것이다.
 
151
노라는 어머니가 고생스럽게 살아온 이야기를 밥 깊도록 듣다가 어느 결에 잠이 들어버렸다.
 
152
새벽에 잠이 어렴풋이 깨었는데 어머니는 없고 동리에서 여러 사람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153
마치 서울서 듣던 얼싸둥둥 소리 같았다. 이게 꿈인가 싶어 노라는 귀를 기울였다.
 
154
노라는 머리맡에 풀어놓았던 팔걸이시계를 집어보았다. 여덟시다. 서 울 서 의 습관으로 꼭 여덟시에 잠이 깬 것이다.
 
155
한데 저게 대체 무슨 소린가 하고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도무지 없던 소리다.
 
156
마침 어머니가 "발 써 깼느냐?"
 
157
하고 들어온다.
 
158
"어머니, 저게 무슨 소리요."
 
159
"누가 안다냐. 그 미친 놈들 새벽이면 그러구 댕긴단다."
 
160
하고 어머니는 웃는다.
 
161
"괜히 저러구 다녀?"
 
162
"엇둘엇둘 체조라던가 무어라던가 헌다고 활갯짓을 허구 빗 자락(빗자루)을 들구 나와서 질바닥 쓸구 그러지 멀."
 
163
노라는 비로소 조기회라는 것인 줄 알았다.
 
164
"시방 우리 꼬마동이도 게 가서 안 오너만! 식전이먼 그 웬수것 때미 일을 시킬 수가 있어야지."
 
165
"보내지 말지?"
 
166
"하루만 안 가봐라, 생베락이 내리지."
 
167
그동안에 조기회는 해산이 되었는지 조용하다.
 
 
168
"어서 더 푹신 자거라."
 
169
하고 어머니는 부엌으로 내려갔다.
 
170
노라는 오늘 할 일의 프로그램을 작정하였다.
 
171
혜경이와 남선생에게 잘 왔다는 편지를 하고, 신문을 청구하고, 쌀과 나무를 좀 사들이고, 방, 건넌방까지 도배를 하고, 램프도 두 개만 사오고, 남은 돈은 저금을 하여 두고…… 이렇게 작정을 하고 나서 어머니 혼자 부엌에 내보낸 것이 미안스러워 옷을 갈아 입고 이불을 걷어올린 뒤에 밖으로 나왔다.
 
172
십 년 옛날에 보던 고향의 아침이다.
 
173
맨처음 눈에 띄는 것은 장수평의 버드나무가 다 없어진 것이다. 길 옆으로 죽 늘어섰던 버드나무는 모조리 등걸만 남고 자취가 없다. 훨씬 아래로 내려가서 팽나무와 그 아래로 몇 주가 남았을 뿐 그거나마 가지가 앙상하다.
 
174
동리를 좌우로 뚫고 새 길이 동서로 났다.
 
175
동리 앞 한가운데로 있던 사정(射亭)이 간 곳이 없다.
 
176
"어머니, 사정이 어데로 갔어?"
 
177
하고 노라가 외쳤다. 그에게는 밤새에 누가 집어간 것만 같았다.
 
178
"불탔단다."
 
179
어머니는 부엌에서 쌀을 이는 모양이다. 노라도 부엌으로 들어갔다.
 
180
"멋허러 내려오느냐! 방으로 들어가거라."
 
181
"어머니, 쌀 내가 일으께."
 
182
"야는 별소리를 다 한다."
 
183
"어머니, 고기 좀 사옵시다."
 
184
"그렇잖이두 꼬마동이가 오먼 사러 보낼라넌디……글씨 사정이 불타 버려서 이 고을이 더 쉽게 망헌단다."
 
185
"어머니는 별소리를 다 허우. 그렇지만 보기는 싫여. 앞니 빠진 것 같어서."
 
186
열 팔구 세쯤 되어 보이는 테머리한 총각아이가 부엌을 기웃이 굽어다 본다. 어머니가 말하던 꼬마동이다.
 
187
그는 전에 못 보던 젋은 신식 부인네가 밤 사이에 어디서 생겼나 부엌에 들어 있는 것이 깜짝 놀라운 모양이다.
 
188
"서울아씨란다. 인사하여라."
 
189
하고 어머니가 소개를 하는 것이다.
 
190
"예. 알량(안녕)허셨어유."
 
191
하고 그는 테머리한 수건을 벗는다.
 
 
192
"응. 잘 있었더냐? 노인 모시고 지내느라고 애쓴다."
 
193
하고 노라도 대답을 하여주었다.
 
194
"너 고기 좀 사갖구 오나라."
 
195
하고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노라가 들어가서 돈지갑을 가지고 나왔다.
 
196
"얼마치나 사오랄까?"
 
197
"두 냥만 주어 보내라."
 
198
사십 전이란 말이다. 노라는 오십전짜리를 꺼내주었다.
 
199
"오늘이 장은 장이지만 고깃짐이 들왔넌지 모르겄구만이라우."
 
200
꼬마동이는 돈을 받아가지고 싸리문 밖으로 나간다. 아이가 그다지 영리 해보이지는 아니하나 시키는 대로 일은 곧잘 하게 생겼다.
 
201
장꾼들인지 가마니를 진 사람, 빈 지게를 진 사람, 멱서리를 걸멘 사람들이 다문다문 동리로 들어간다. 동리에서는 아직도 조반 짓는 연기가 솟아오른다.
 
202
다 낡은 포드 자동차가 털털거리고 호기 있게 비틀거리며 동리로 향해 들어온다. 전에는 이곳에서 못 보던 신풍경이다.
 
203
노라는 건넌방 문을 열어보았다.
 
204
아버지가 거처하던 때의 그림자는 하나도 없고 머슴방으로 썼는지 벽은 시커멓고 방바닥은 다 낡은 갈자리다. 아버지의 거처하던 방을 보니 자취는 없을망정 방금 그의 환영이 보이는 듯하였다.
 
205
노라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닭이 댓 머리나 모이를 찾고 있다. 마당 귀퉁이의 돼지우리는 텅 비었다.
 
206
아침밥을 먹고 나서 노라는 편지를 썼다. 혜경이와 남의사에게 별 말 없고 그저 무사히 도착되었다는 뜻만 썼다.
 
207
그러고 나서 복동이(그 아이의 이름이다)가 나무하러 가겠다는 것을 데리고 저자로 내려갔다.
 
208
장은 그래도 음력 섣달 대목이 가까와서 그런지 제법 크게 섰다.
 
209
노라가 장에 들어서니 온 장판의 눈들이 모조리 쏠리나 누구 한 사람 노라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210
이곳에 트레머리하고 뾰족한 구두를 신은 신여성이라고는 보통학교의 여선생 하나밖에는 없다.
 
211
그런데다가 장으로 흥정을 하러 온 신여성은 보기는커녕 이야기도 듣지 못 하였던 것이다.
 
212
그들에게는 신여성이라는 것은 저 서울이나 적어도 도회지에서 돈 있고 학 문 있고 지위 있는 사람을 남편으로 두고 놀고 팔자 좋게 사는 한딴 부류의 여자요, 이렇게 시골 장거리로 램프를 사고 생선을 사러 온다는 것은 생각 지도 못한 일이었었다. ── 마치 궁녀가 바구니를 끼고 구멍가게로 움파한 단을 사러 나온 것처럼.
 
213
노라는 이렇게 시선의 과녁이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쪽도 조선쪽으로 짓고 신발도 어머니 버선을 빌어 고무신을 신고 나올 것을 잘못하였다고 뉘우쳤다.
 
214
더구나 매초롬한 읍사람들이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자기를 치어다보며, 또몇이 모여서서는 무어라고 수군거리는 것이 어쩌면 자기의 이번 내력을 알았는가도 싶었다.
 
215
노라가 한짐 가득 장을 보아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겉으로 걱정은 하나 모처럼 딸의 덕을 입는 것 같아서 내심에 기뻐하였다.
 
216
건넌방을 수리하려고 장판지와 도배지를 많이 사온 것을 어머니는 속을 알수가 없었다.
 
217
제 말대로 어미가 보고 싶어서 잠깐 다니러 왔으면 무엇 때문에 건넌방을 수리를 하려 하는고?
 
218
막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병택이가 찾아왔다.
 
219
"어머니, 그 홍어회도 치고 속으로 국도 끓이고 그러지?"
 
220
"오냐. 나 샘에 가서 시쳐갖고 오마."
 
221
어머니는 부엌으로 내려갔다.
 
222
"한동안 계시겠읍니까?"
 
223
하고 병택이가 묻는다.
 
224
노라는 병택이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225
노라는 병택이에게 대하여 아는 것이 적었다. 어렸을 때에는 심술궂은 쌈 대장이요, 중학에 다닐 때에는 그저 근실히 공부하는 한편 장난 괴수 였다는것, 그리고 그 뒤의 십 년간 그가 어떠한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고 지내 왔는 것 등 전연 모른다.
 
226
그러나 그 실팍한 체격과 명랑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로 바위같이 무게가 있어 보이는 그의 언행이 어딘지 믿음직하여 보였다. 이 사람이면 자기의 이번 사단도 이해를 해주고 앞으로 나아갈 길도 바로 가르쳐 줄 달견이 있으려니 생각이 되었다.
 
227
"아마 한동안 여기 있게 될까봐요."
 
228
"시댁은 어떻게 하시고."
 
229
하고 묻기는 하나 그다지 의아하는 눈치는 없다. 노라는 말을 꺼내었다. 현 석준과 결혼하던 것으로부터 이번 사단까지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230
병택이는 지금까지 노라에게 대하던 그러한 평범한 친절과는 좀 다르나 역시 그다지 신통한 소식을 들은 것 같지도 아니한 기색이다.
 
231
노라는 자기 일신상의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믿고 상의 겸 이야기한, 저편이 흥이 나지 아니하는 것을 보매 섭섭도 하거니와 자기의 경망한것도 후회를 하였다.
 
232
혹시 이 사람이 머리와 생각이 범속하여 그러한 문제에 이해와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하였다.
 
233
"어떻게 생각하세요, 병택씨는?"
 
234
하고 노라는 무렴 끝에 장난엣 말같이 물어보았다.
 
235
"글쎄요……"
 
236
하고 병택이는 씩 웃었다. 그 웃는 꼴이 어찌 보면 바보 같기도 하여 노라는 짜증이 났다.
 
237
그는 만일 이 위인이 정말 그렇게 속된 인간이라면 공연히 소문이나 퍼뜨리고 다닐 터이니 어찌하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238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사람이 노상 그렇게 농판스러운 것도 같지 아니하여 도무지 그의 인물을 종잡을 수가 없다.
 
239
점심 준비가 되어 복동이가 상을 나르고 어머니도 뒤따라 들어왔다.
 
240
"어머니를 이렇게 괴럽게 해서 내가 죄받겠수?"
 
241
하고 노라는 소녀답게 어리광을 부렸다.
 
242
"염려 마라. 내가 너를 부려먹겄냐."
 
243
하는 어머니의 대답은 역시 품안엣 딸에 대하는 것 같은 말씨다.
 
244
병택이 상에는 알뜰하게 술까지 있었다.
 
245
밥을 먹는 동안에 병택이의 하는 이야기는 아까 바보로 보이던 것과는 딴 판이요, 어제같이 여전히 슬기롭고 명랑하였다.
 
246
서울서는 별로 먹어보지 못하는 홍어회와 국이 퍽 맛이 있었다. 노라는 아주 감식을 하였다.
 
247
병택이는 보니 그 역시 술도 다 먹고 밥도 국도 회도 다 먹는다.
 
248
어머니가 설겆이를 하러 나간 사이에 노라는 다시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제는 그의 의견을 듣자는 것보다는 위인을 시험해보자는 생각이다.
 
249
"글쎄올시다."
 
250
하고 그는 얼큰한 김인지 말이 터져나온다.
 
251
"세상일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252
하고 병택이는 화두를 내었다.
 
 
253
"가령 이걸 보십시요……중국 어느 지방 사람은 부모가 죽으면 시체를 짐생한테 먹인답니다그려. 그것을 조선 사람이 생각할 때 그런 불효가 어디 있 읍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조선 사람이 부모의 시체를 땅에다 꽁꽁 파묻는다는 말을 들으면 아주 불효라고 할 것입니다. 또 이런 것도 있잖습니까? 우리가 멫십 년 전 해도 이 머리 깎는 것을 아주 나쁘다고 생각 했는데 지 금은 누가 머리 깎는다고 나무라는 사람은 없지요? 또 이런 것도 있지요.
 
254
지금도 완고한 집안에서는 그 딸이 가령 어느 도령하고 눈이 맞어서 어쩌고저쩌고 한다면 허 ! 이거 집안 망했다고 야단이 나는데, 어느 집에서는 딸이 자유연애를 해가지고 버젓하게 결혼식을 하되 누구 하나 그르다고 합니까? 그와 마찬가지고."
 
255
하고 병택이는 목을 가다듬어 말을 계속한다.
 
256
"현석준씨가 보기에는 노라씨가 아주 나쁘겠지요. 안해라는 것은 한 사람이 기보 담 남편과 자식의 종속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노라씨는 안해라는 것은 그런 것보담도 위선 한 독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니까 그런 불합리한 생활에서 벗어져 나오신 것이 조금도 잘못될 것이 없지요…… 지금 노라씨는 잘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57
"아아니요."
 
258
하고 노라는 고개를 흔들어 힘있게 대답하였다.
 
259
"그렇지만 한 가지 일이 옳으면 모다 옳고, 그르면 모다 그른 법인데,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니 거 모르겠는데요."
 
260
하고 노라는 혼잣말같이 반문하였다.
 
261
"옳은 것은 어데까지 옳고, 그른 것은 어데까지든지 그르다는 그 원리부터가 옳은 때도 있고 그른 때도 있으니까요."
 
262
이 말은 막연하여서 노라는 알아듣지를 못하였다.
 
263
"하나에다 하나를 가하면 둘이 된다고 보통학교 선생님이 가르켜 주었지요?"
 
264
"네."
 
265
"그런데 하나에다 하나를 보태면 그대로 하나가 되는 수도 있거든요."
 
266
"어떻게?"
 
267
"물 한 방울에다 또 한 방울을 보태면 물 멫 방울입니까?"
 
268
"두 방울…… 아니 한 방울."
 
269
"거 보십시요."
 
270
노라는 이야기가 흥미는 있는데 시원스럽게 알 수가 없어 답답하였다.
 
271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어서 모르겠어요."
 
 
272
"인제 차차 아시지요."
 
273
노라는 그보다도 병택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고 싶었다.
 
274
"그러면 병택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275
하고 물어보았다.
 
276
"지금까지의 것으로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앞으로가 문제는 정말 있으니까요."
 
277
"앞으로 문제는 무슨 문제여요?"
 
278
"노라씨는 인제는 문제가 다 해결된 줄 아시지요?"
 
279
"그렇잖구?"
 
280
"남편의 전제에서 벗어났으니까?"
 
281
"네."
 
282
"과부들은?"
 
283
노라는 이 말에는 대답이 막혀버렸다.
 
284
노라의 생각 같아서는 과부들은 제물로 인간을 완성한 자유로운 사람 들이었겠는데 과부의 생애가 도리어 더 참담하였던 것이 무슨 일이었던지를 알수가 없다.
 
285
"주제넘은 말씀 같지만, 지금 노라씨 머리에는 뻣뻣한 공식을 설명 해드려야 들어가질 아니할 것입니다. 그보담은 노라씨가 노라씨 자신을 실험대에 올려놓고 연구를 해보십시요. 그러면 자연 알어지는 게 있을 테니요."
 
286
하고 병택이는 일어서서 나가다가 도로 돌아서서 묻는다.
 
287
"그런데 여기 오래 계시느라면 소문이 재미없게 날 것이 아닙니까?"
 
288
노라도 이것은 퍽 걱정이 되었다.
 
289
그렇다고 사실대로 남에게 이야기를 하면 욕이 빗발치듯 할 것이고…… 노라는 욕을 먹을 것쯤이야 각오를 한 터이지만, 그러나 될 수만 있으면 그것을 피하고 싶었다. 더구나 고향 ── 친정에 와 서는…… "얼마 동안이나 계시겠어요."
 
290
하고 병택이가 물었다.
 
291
"아직 작정은 없지만 겨울은 나야 할까버요."
 
292
"그러면 피접오셨다고 하십시요그려…… 시집간 여인들이 흔히 친정으로 피접 온다고 하잖습니까?"
 
293
하고 병택이는 웃었다.
 
294
노라는 듣고 보니 그럴 듯하였다.
 
295
"그럴까요……"
 
296
"그렇게 하세요…… 갑니다…… 내일 와서 도배나 해드리지요."
 
 
297
하고 병택이는 돌아갔다.
 
298
노라는 방으로 들어가서 짐을 풀어 우선 신변에 필요한 것만 내어놓고는 외투와 구두까지도 다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오늘 장에 가서 여러 사람의 구경거리가 된 것을 생각하고 이곳에서는 다시는 그렇게 차리고 다니지 아니할 작정을 하였다.
 
299
노라는 아까 병택이가 한 말을 그대로 하여 어머니도 당분간 속 여 두기로 하였다. 아무때 알리어도 알릴 것이지만 당장 그 말을 하면 어머니는 실망이 여간 아닐 것이다. 혹 옛날의 부덕(婦德)에 전 어머니인지라 나무라고 도로 쫓아보낼지도 모르는 것이다.
 
300
책망이 그다지 두려운 것이 아니요, 어머니에게 쫓기어 서울로 간다더라 도현에게로 돌아가기야 아니하겠지만 밀어나가려면 밀어나갈 수가 없지 아니한 풍파를 노라는 미리 다가오고 싶지 아니하였다.
 
301
이튿날 아침때가 겨워 병택이가 와서 도배를 시작하였다.
 
302
점심 후에는 안방을 도배하려고 짐을 꺼내놓고 법석을 하는데 우편 배달 부가 편지 두 장과 신문을 가져왔다.
 
303
노라는 편지가 온 것이 반가왔으나 부탁하고 온 어린아이들의 사진이 아니 온 것이 섭섭하였다.
 
304
노라는 남의사의 편지를 먼저 뜯어 읽었다.
 
305
별말이 없이 편지 받아보았다는 것, 현 집에는 역시 매일 들르는데 송이와 마리아가 어머니를 찾는다는 것, 그리고 끝으로 자기가 죽기 전에 노라를 한 번만 더 보았으면 임종에 눈을 감겠다는 것 등이었었다. 그리고 이신으로는 자기는 편지를 매일이라도 하고 싶지만 남보기에 혐의쩍어 폐가 될 테니 특별한 일이 있기 전에는 자진하여 편지를 쓰지는 아니하겠다고 하였다.
 
306
노라는 멍하니 편지를 들고 앉아 어린아이들을 생각하였다.
 
307
안타까와서 실컷 울기라도 하였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어머니가 어찌 알까봐 울 수도 없다. 혜경이의 편지도 사연이 간단하였다.
 
308
편지는 받았고, 자기네도 잘 있다는 말과 지금 구가와 둘이서 어디 노라의 있음 직한 곳을 알아보는 중이니 되거든 곧 기별을 하마고 하고, 그리고 조그마한 잡화점을 내려고 장소를 구하는 중이라는 것 들이었었다.
 
309
노라는 편지를 걷어치우고 심산하여 일이 아니 잡히건만 강잉하여 도배 하는 서두리를 하여주고 있는데 웬 낯선 부인 하나가 찾아왔다.
 
310
누구인 줄은 모르겠으나 조선쪽을 지은데다가 통치마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것이 경향간에 공통인 전도부인이 분명하였다.
 
311
어머니와는 잘 아는지 흠선하게 서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312
어머니는 노라에게 소개를 시키며 누구의 무엇이요 어디 사는 누구라고 파계를 대어주나 알 수가 없어 그냥 안녕하시냐는 인사만 그럴 듯이 하였다.
 
313
인사가 끝나고 몇마디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꼭 청할 것이 있어 왔는데…… "하고 전도부인은 노라의 기색을 살펴본다. 반씩 섞인 서울말이 몹시 어울리지 아니한다.
【원문】3. 옛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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