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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
◇ 安...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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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6월~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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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순신
 
2
12. 安   싸움
 
 
 

1

 
4
견내도(見乃도)에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인 칠월 구일에, 가덕(加德)의 안골포(安骨浦)로 향하는 적선 사십여 척이 와 닿았다는 타망군의 보고가 있었다.
 
5
이 보고를 받고 순신은 곧 억기(億祺)와 균(均)을 불러 이 사십 척의 적선을 깨뜨릴 방책을 의논하였다.
 
6
그러나 이날은 벌써 날이 다 저물고 또 거슬러 오는 바람이 크게 불어 도저히 싸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거제 땅 온천도(溫川島)에서 밤을 지냈다.
 
7
이튿날 칠월 초십일 새벽에 온천도를 떠났다. 순신은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이 억기에게 이곳을 떠나지 말고 가덕(加德)쪽으로 진을 치고 기다리다가 접전이 되거든 숨어서 달려오라고 약속하고, 순신이 몸소 주사를 거느리고 학인진으로 안골포를 향하였다.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 운 균도 대소 수십 척의 배를 거느리고 순신의 뒤를 따랐다.
 
8
안골포에 다다라 바라보니 선창에는 적의 대선 이십일 척, 중선 오 척, 소선 육 척이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삼층 집을 지은 대선 한 척과 이층 집을 지은 대선 두 척이 있어 밖을 향하고 포구에 떠있고, 다른 배들은 비늘 달리듯 포구 안에서 있었다.
 
9
안골포는 지세가 협착하고 또 물이 얕고 조수가 빠지면 건둥이 되는 곳이어서 도저히 판옥 대선을 가지 고 자유로 출입할 수는 없을 곳이었다.
 
10
순신은 배를 보내어 적선을 난바다로 끌어내려고 재삼 유인하였으나 그저께 한산도 큰 싸움에 겁을 집어먹은 적의 수군은 포구 밖에 나오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아마도 불여의하면 육지에 내려 달아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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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신은 부득이 제장으로 하여금 번갈아 포구 안에 들어가 치고는 물러나고 치고는 물러나는 전술을 쓰기도 하였다.
 
12
혹은 다섯 척씩 혹은 열 척과 몸 가벼운 배와 거북선을 놓아 삼층선과 이층선을 엄습하여 천, 지, 현자 각양 총통과 장편전을 빗발같이 퍼부으니 삼층선과 이층선의 적병이 하나씩 둘씩 거의 다 죽어 없어질 만하면 적은 적선이 다른 적병을 실어다가 보충하고 시체는 싣고 나가고, 이러하기를 몇 차례를 하였다. 접전이 되는 것을 보고 이 억기의 함대가 약속대로 달려 와서 합세하여 싸움은 더욱 격렬하였다.
 
13
거북선이 좌충 우돌하는 바람에 적의 중선 소선은 부딪히기가 무섭게 부서지고 대선들도 감히 대들지를 못하였다. 오직 삼층선과 이층선은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어서 대항하는 모양이었다. 왜 그런고 하면, 몸이 무거워 육지 가까이 들어 갈 수는 없고 또 순신의 주사가 포구 입을 막았으니 바다 밖으로 도망해 나올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 삼층선 이층선은 심히 견고하여 여간 총통을 맞아도 까딱 없었다. 그래서 적은 이 세 층루선을 근거로 하여 순신군과 대항하려는 것이었고, 또 이편의 전술로 보더라도 누선을 깨뜨리는 것이 오늘 싸움의 중심이었다.
 
14
이렇게 싸우기를 날이 저물도록 계속하니 층각선 세 척에 사람을 갈아 실은 것이 몇 십 번인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 적의 대선, 중선, 소선이 혹은 거북선에 부딪히어 깨어지고 혹은 화전에 불이 타, 사십여 척 중에서 남은 것이 층각선 아울러 십 척이 되고 적군도 태반이나 죽고 말았다. 그래도 적군은 마지막 한사람까지도 죽고야 말려는 듯이 층각선에 갈아 들어 총과 활을 쏘았다.
 
15
마침내 삼층집 지은 배가 화전에 맞아 불이 댕기고 이어 이층선도 불이 붙었다. 탄환에 벌의 집 모양으로 수없이 구멍이 뚫리고 또 싸움이 격멸하고 사람은 부족하여 미처 바닷물로 배를 적시지 못하여서 마침내 달은 자작 모양으로 불이 타오르는 것이었다.
 
 
 

2

 
17
큰 배 세 척이 타는 불길은 석양의 하늘을 더욱 붉게 하였다. 이 모양을 본 적병은 울고 소리를 지르고 급히 배를 저어 뭍으로 오르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썰물이 되어서 물살은 빠르고 또 풀이 드러나 배질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이편에서 쏘는 살에 많이 맞아 죽고 혹은 쑥쑥 들어가는 개흙판에 허리까지 빠져서 뭉개는 이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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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신은 쇠를 울려 싸움을 거두고 물이 다 빠지기 전에 함대를 깊은 곬으로 옮기기를 명하였다.
 
19
썰물을 따라 피와 기름과 적병의 시체와 깨어진 뱃조각이 수없이 떠내려 왔다. 원 균은 처음부터 끝까지 뒤를 막는다 자칭하고 싸움에는 참여하지 아니하고 멀리 뒤에 서 바라보고 있다가 썰물에 떠내려 오는 적병의 시체를 잡아 머리를 베이기로 일삼았다. 싸움이 다 끝나고야 순신과 억기(億祺)의 군사들이 원 균의 군사가 하는 양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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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들은 가만히 굿만 보고 있다가 떡만 먹으려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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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분개하였다. 순신은,
 
22
『싸우는 것이 우리 일이 아니냐. 싸워서 적병을 죽이고 싸움에 이기는 것이 우리 일이 아니냐. 목을 베어서 공을 자랑하는 것이 우리 일이 아니다. 너희들의 공은 내가 다 보아서 아니 수급을 자랑할 것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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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무마하였다. 순신이 함대를 끌고 포구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원 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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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적병을 마저 없애지 아니하고 퇴각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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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순신에게 항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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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병이 육지에 올랐으니 물러갈 길을 끊으면 육지에 있는 백성들이 해를 당할 것이니까 길을 열어 주는 것이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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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포구를 지키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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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원 균은 자기에게 달린 배를 거느리고 포구에 떨어져 있으려 하였다. 그는 시체의 목을 더 베이고 또 패잔한 적군이 나오는 것을 지켜 최후의 승리를 얻으려 함이었다. 그러나 순신은 단연히 허락지 아니하였다. 원 균은 부득이 그 아까운 적병의 시체들을 돌아보면서 순신의 절제에 복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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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신의 함대는 포구에서 일리쯤 나서 그날 밤을 지냈다. 이튿날 새병에 다시 포구를 에워 싸고 적의 종적을 찾았으나 남았던 사오 척 배는 밤 동안에 닻줄을 끊고 달아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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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이곳 백성이 부대낄 염려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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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순신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배를 바꾸어 타고 어제 싸우던 터를 돌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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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는 적병이 시체를 열 두 무더기에 모아 불사른 양하여 아직도 불이 남아서 살과 뼈가 타는 냄새가 나고 한편에는 불이 붙는 뼈와 팔과 다리와 머리 닽은 것이 낭자하게 늘어 있고 안끌포 성안 성밖에는 피가 흘러 우묵어리에 고이고 길바닥에도 역저기 붉게 물이 들었다. 적병이 얼마나 죽었는지 헤아릴 수 없으나 열 두 무더기에 탄 재와 타다가 남은 뼈다귀들을 보면 천명은 넘을 것 같았다. 순신은 함대를 끌고 그날 사시에 양산강(梁山江)의 김해(金海)로 나오는 포구 앞 감동포(甘同浦)를 수탐하였으나 적의 그림자도 없으므로 가덕(加德) 밖 동래 땅 물운대(沒雲臺) 앞에 배를 벌여 진을 쳐 군의 위엄을 보이고 사방에 탐망선을 보내어 적의 종적을 탐보케 하였다. 가덕 매봉(加德매봉)이며, 김해 금단고지(금단고지)연대에도 후망군을 보내어 적정을 탐보케 하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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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술시에 금잔고지 망군 경상 우수영 수군(慶尙右水營水軍) 허 수광(許水光)이 들어와 고하는 말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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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금단고지 연대에 망을 보러 올라 가는 길에 봉밑에 작은 암자에 사는 늙은 중을 데리고 올라 갔다. 연대(연기를 피워서 군호하는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김해로 빠지는 두 강 깊은 목에 여기저기 정박한 적선이 백여 척이나 되는데, 노승의 말을 듣건댄 근래 매일 한 오십여 척씩이나 적선이 몰려 오기를 연해 열 하루 동안이나 하였는데 어제 안골포에서 접전하는 포성을 듣고는 간밤에 거의 다 도망하여 달아나고 백여 척만 남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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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 제장은 강에 정박한 적선을 소탕하기를 주장하였으나 순신은 강 속에 숨은 적을 토벌하기는 불가능 하다고 하여 천성보(天城堡)로 불러 왔다가 그 밤으로 회군하겨 십 이일 사이에 한산도(閑山島)로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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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의 팔일 싸움에 배를 버리고 상륙하였던 적병들이 여러 날 굶은 끝에 몸을 기동할 수가 없어서 강변에서 조는 이도 있었다. 나머지 사백여 적병도 농중에 든 새라 도망할 길이 없을 것이라 하여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 원 균(元均)으로 하여금 한산도르 지켜 적이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순신은 전라 우도 수군절도사와 함께 군사를 끌고 본영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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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양산(梁山)과 부산(釜山)의 적을 그냥 두고 회군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한산도와 안골포 싸움에 예기를 질리운 적의 수군의 협력이 없이 수군만 가지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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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많은 군사가 여러 날 싸움에 군량이 진하여 전라도에 들어가기 전에는 모두 무인지경인 경상도 연해에서 군량을 얻을 길이 없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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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금산(錦山)을 점령한 적세가 치장하여 전주(全州)를 범하였다는 경보가 왔으니 잘못하면 전라도 전토가 적의 손에 들어가 그야말로 조선군이 근거를 잃어버릴 근시이 있음이었다. 만일 전라도마저 적의 손에 들어가면 순신의 수군까지도 양식을 얻을 발을 붙일 근거를 잃어 버려 조선은 영영 회복할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이었다.
 
41
『(        )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다)』는 것은 순신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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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순신은 전군을 끌고 한산도를 떠나 본영인 전라도 좌수영으로 향하였다. 돌아 오는 길에 순신은 이번 싸움에 사로잡은 우리 사람 몇을 심문하였다.
 
43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 운(鄭運)이 사로잡은 거제도 오양개(巨濟島烏陽개) 포작 최 필(崔弼)을 불러 그는 말하되, 적병에게 잡힌 지도 얼마 안되고 또 말도 몰라서 적병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노라 하며, 다만 전라도로 간다는 말만 알아 들었는데 그 눈치를 보면 전라도로 간다는 말만 알아 들었는데 그 눈치를 보면 전라도로 가려고 견내도에 머물렀다가 페한 모양이라고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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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부사(順天府使) 권 준(權俊)이 사로잡은 사람은 서울 중접보인(中接保人) 김덕종(金德宗)이라고 하는데, 그는 말하기를, 유월 산에 서울에 웅거하던 적병의 수효는 알 수 없으나 네 패에 나뉘어서 내려 올 때에 자기도 가족을 데리고 끌려 왔다고 하며, 서울서 내려 온네 패 중에 두 패는 부산 해변에 진을 치고, 한 패는 양산강에 진을 치고 또 한패는 전라도로 간 줄은 아나 말을 몰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하며, 또 한 패는 서울에 유진하고 사방에 방을 붙여 피난한 백성을 불러 들여 지금은 하나 남기고 다 들어 왔다 하며, 자기를 데리고 서울서 내려 온 장수는 이번 싸움에 죽었다고 하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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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령장(五領將) 최 도전(崔道傳)이가 사로잡은 서울중접 사노 중남(私奴中男),사도 용이(私奴龍伊), 경상도 비안접 사노 영락(慶尙道比安接私奴永樂) 등은 말하되, 서울로 부터 적병이 내려 오는 길에 용인(龍仁)에서 우리 군사 여러 만명을 만나 오는 길에 용인(龍仁)에서 우기 군사 여러 만명을 만나 접전하다가 우리 군사가 물러간 뒤에 김해(金海)로 내려 와서 대장이 글을 가지고 각진에 통문하는데 그 모양이 우리 나라 장수가 약속하는 것과 같았고, 그 글을 보고는 적장등이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키며 그러할 때마다「전라도」라고 하며 혹은 칼을 빼어 무엇을 치는 형상을 하는 것이 마치 사람을 죽이는 모양을 하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용인서 우리 군사를 만났다는 것은 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 광(李光)을 머리로 하는 전라, 충청, 경상, 삼 순찰사 연합군을 가리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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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현감(光陽縣監) 어 영담(魚泳潭)이 사로 잡은 경상도 인동현(慶尙道仁同縣)에 사는 우 근신(寓謹身) 이라는 어린 사람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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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은 누이동생을 데리고 피난하러 산에 들어가 있다가 누이동생과 함께 적병에게 붙들려서 서울로 올라가서누이는 적장에게 겁탈을 당하였소. 어느 날인지 날짜는 분명치 아니하나 그 적장에게 끌려 다시 내려 올 때 우리나라 군사와 서로 만나 접전을 져서 퇴병하고 셋째 날은 우리 나라 군사가 다 물러가서 줄곧 김해강을 내려 왔소. 김해강에서는 배를 탔는데 그 배들은 어디서온 배인지 알 수 없었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다는 말들을 수가 없으나 다만 손으로 서쪽으을 가리키니 필시 전라도로 가자는 말인 듯하였소.』
 
49
하고 접전하던 당일의 일에 관하여 근신은 이렇게 말하였다.
 
50
『그날 소인을 데리고 온 장수가 우리나라 군사를 많이 죽였소. 그러나 다른 장수들은 우리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칼을 두르고 날뛰다가 우리 군사가 이기게 되어 활을 쏘며 돌격을 하면 다들 겁을 내어 머뭇거리고 뒷걸음을 쳤소. 소인을 데리고 온 장수가 아무리 호령을 엄히 하여도 다들 무서워서 나서지를 못합데다.』하였다.
 
51
『그러면 너를 데리고 온 장수는 어찌되었어?』
 
52
하고 묻는 말에 우 근신은,
 
53
『화살에 맞아 죽었소.』 하였고,
 
54
『적장과 함께 살던 네 누이는 어찌되었어?』
 
55
할 때에 근신은 눈물을 흘리며,
 
56
『우리 나라 군사가 돌격해 오는 것을 보고 암만 해도 견디지 못할 줄로 알고는 그 장수가 허리에 찬 작은 칼을 빼어 주며 소인의 누이더러 배를 갈라 죽으라고 명하였소. 소인의 누이는 벌써 잉태 중이었는데 적장이 주는 칼을 받아서 배는 가르지 아니하고 목을 찔러서 먼저 죽었소.』하였다.
 
57
다음에 웅천 현감(熊川縣監) 허 일(許일)의 소솔 동현 기관(記官) 주 귀생(朱貴生)은 말하되, 김해 부내(金海府內)에 사는 내수 사노(內需司奴) 이 수금(李水今)이 칠월 이일에 응천현에 있는 그 부모를 보러 웅천현에 와서 말하기를, 김해부 부처바위 선창에 와 있는 적의 수군들도 전라도 군사와 접전한다는 말을 논하더라 하며, 배마다 배방패 밖에다가 단단한 홰나무 쪽을 셋씩 덧붙여 견고하게 만들고 수군을 세 패에 갈라서 김해성 내외에 둔박케 하였다 하며, 하룻밤에는 바다에 뜬 고기잡이 불을 보고 전라도 수군이 온다고 하여 크게 놀래어 떠돌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동분서주하다가 얼마 후에야 진정하였다고 하였다.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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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초를 다 믿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종합해 보면 적이 수군을 세 패(三패)에 나누어 전라도를 침범하려 하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과, 그 제 일운 칠십 삼 척이 한산도에서 부서지고 제 이운 사십 이 척이 안골포에서 부서진 것은 상상할 수가 있었다.
【원문】安...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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