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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
◇ 南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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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6월~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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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순신
 
2
16. 南原(    )
 
 
 

1

 
4
일본군 선봉대가 온 것을 보고 양원(楊元)과 그 부하 명병들은 모두 무서운 생각이 났다. 그들은 남원에 들어온 후도 전라도 각지에서 소와 돼지를 가져다가 날마다 배껏 먹고 취하고 또 양가 여자들을 붙들어다가 진중에두고 희롱하였다. 아무리 미미한 졸병이라도 조선 여자를 한둘씩 희롱하지 아니한 자는 없었다. 남원 부내에는 조선 백성들은 다 그 처 가족을 산을 피난 보내고 늙은 부녀들만 남아 있었다. 술 취한 명병은 주야를 불문하고 문을 차고 민가에 들어 와서는 손으로 음란한 시늉을 하면서 여자를 내어 놓으라고 주인을 때렸다. 어린 아이, 젊은 남자까지도 옷을 벗기고 음란한 짓을 하였다. 그래도 백성들은 감히 반항을 못하였다.
 
5
이렇게 행악을 하고 향락에만 빠졌던 명병들은 일본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다들 겁을 집어 먹었다. 남원 성주에 있는 조선 장수로는 전라 병사(全羅兵使)이 복남(李福男), 조방장(助防將) 김 경로(金敬老), 광양 현감(光陽縣監) 이 춘원(李春元) 등이 있었다. 병사 이 복남이 양 원의 부름을 받고도 오기를 싫어하다가 하도 여러 번 부르매 부득이하여 수백의 군사를 끌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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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남이가 오기를 싫어한 것은 싸움을 무서워함보다도 명병을 싫어한 까닭이었다. 임진 이래로 전라도 백성들은 조정에 있능 대관들과 명병에 대하여 심각하게 불신임하는 감정을 가졌었다. 거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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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순변사 이 일(李鎰) 같은 자격 없는 장수에게 군사를 주어 상중의 대패를 하여 첫 번 큰 수치를 주었다는 것, 둘째는, 서울을 지키지 나이하고 조정이 의주로 달아났다는 것, 셋째는 조정에 있는 대관이란 작자들이 모두 당파 싸움만 하고 하나도 사람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 넷째는 행주 싸움에 이긴 것이 전라도 군사연마는 논공 행상할 때에는 뒷줄에 숨어서 목숨을 아끼던 경관에게만 중하고 승장 처영(處英) 이하로 시골 장졸에게는 박하였을 뿐 아니라 거의 무시하였다는 것, 마지막으로 국가의 간성이요 전라도의 부모라고 할 만한 이 순신을 모함하였다는 것 등이었다. 이것으로 전라도 백성의 조정 대관들에게 대한 원망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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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망은 마침내 충청, 전라, 양도의 혁명 운동으로 화하여 폭발하였다. 이제 그 대강을 들면,
 
9
갑오년에 홍산(鴻山)사람 송 유진(宋儒眞)이, 「                」라는 격문을 돌려 혁명당을 모의하였다. 그들의 뜻은 「왕이 악함을 고치지 아니하고, 집권 계급이 당파 싸움만 하여 백성만 못 살게 부려 먹고 관리들이 비록 백이 숙제의 뜻에 부끄럽다 하더라도 탕과 무왕 모양으로 이 악한 왕도 그 밑에 있는 대관놈들을 응징하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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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운동은 실패하여 수령 송 유진과 그 동지 오 윤종(吳允宗), 김 천수(金千壽), 이 춘복(李春福), 김언상(金彦祥), 송 만복(宋萬福), 이 추(李秋), 김 영(김영)은 다 잡혀서 목을 잘리고, 나주에 전주에 잡혀간 이 산겸(李山謙)도 사형을 당하고, 송 유진의 심복이요 도지로 있다가 관에 밀고한 홍 우(洪瑀), 홍 각(洪慤) 두사람은 다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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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에 남원에는 김 희(金希), 고 파(高波) 등이 동지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도원수 권 율이 그때 전라병사로 있던 김 응서(金應瑞)로 하여금 치게 하였으나 혁명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다음에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으로 하여금 고 파의 군사를 치게 하였으나 도리어 관군이 혁명군에 가담하여 또 참패를 당하였다. 이리해서 남원 운봉을 중심으로 한 칠팔읍은 전혀 혁명군 손에 들어 갔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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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이 몽학(李夢鶴)의 난이 있어서 크게 떠들었으나 그것은 충청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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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양으로 중앙 정부에 대해서 민심이 이반하는 중에도 전라도는 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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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명병에 대해서는 당시 명병을 친히 본 지방에서는 다 지긋지긋하게 생각하였다. 명병이라면 소졸까지도 오단 무례하고 행학이 막심하여 적군이나 다름이 없는 데다가 일본과 싸워서 이겨 본 것은 평양 싸움 하나뿐이요, 평양 싸움에서도 앞장을 서서 큰 공을 이룬 것은 조선 군사였다. 이 여송(李如松)은 벽제관 한 싸움에 꽁무니를 빼어 달아났고, 유 정(劉挺) 같은 자는 싸움은커녕 도리어 적에게 배수되어서 이 순신의 행동을 방해나 놓을 뿐이었다. 그렇거늘 조정에서 적군이 거의 다 물러간 때에는 주둥이로 주전론을 주장하여 이 순신의 싸우지 아니함을 공격하든 무리가 한번 일본군이 다시 건너오매 한 놈도 몸소 나아가 싸울 용기가 없고 오직 게 모가지와 처첩의 무리를 안보하기에만 급급하여 명나라에 애걸하여 또 청병을 하여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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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싸우기 전에 먼저 조정에 앉은 가특한 놈을 죽여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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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외친 것은 이 몽학(李夢鶴) 뿐 아니라 모든 혁명군의 표어였고 전국 백성의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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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과 전주에 명병이 와서 백성들은 지긋지긋이만 생각하고 응하는 빛이 없음이 이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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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십 사일에 일본군이 삼면으로 남원성을 에워 싸고 성하에 이르러 싸우기를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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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총병 양 원(陽元)은 남문 밖의 민가를 온통 불살라 버겼다. 그것은 성밖에 나아가 적군을 맞아 싸울 용기는 없고, 오직 적군이 숨어서 싸울 자리를 없이 하기 위함이니, 겁 많은 장수가 잘하는 방법이었다. 싸움도 못 이기고 백성들의 집만 살라 버린다고 백성들은 울고 원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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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오일 밤에 적군은 풀을 베어 단을 만들고 성밖에 파놓고 해재를 메웠다. 적군이 밤새도록 이 큰 역사를 하는 것을 모르고 명병은 중추라 하여 술과 떡을 먹고 탕질하게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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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새벽에 적군은 사면으로 부터 성으로 기어 올랐다. 이에 놀란 명 총병 양 원(陽元) 이하 장졸은 성주에 있던 재물을 약탈하여 몸에 지니고 말을 타고 북문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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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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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Z하고 북문을 지키던 조방잔 김 경로(김경로)가 양 원의 말을 붙들고 눈을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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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아니하고 어디를 가오? 대인은 황의 명을 받아 가지고 이 남원에 싸우려 오지 아니하고 놀러 왔었소? 양가 여자를 함부로 희롱하고 민가의재물을 모두 약탈해 가지고 어디로 간단 말이요? 이 문은 열수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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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딱 버티었다. 김 경로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양 원은 처음에는 무례하다 하여 위협하려 하였으나 조선 군사의 형세가 자못 불온한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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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에 가서 청병해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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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 경로에게 문 열기를 간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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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오, 남원성에서 같이 죽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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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김 경로는 듣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양 원은 전라 병사 이 복남(李福男)에게 문 열기를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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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남은 김 경로가 명장에게 거역하는 것을 보고 죄가 자기에게 올까 두려워하여 김 경로에게 문 열기를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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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는 대장의 명을 어길수 없어 문을 열었다. 양 원 이하로 명병들은 앞을 다투어 북문으로 내달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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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원 이하 명병이 북문으로 다 나간 뒤에 전라 병사 이 복남도 따라 나가려 하였다. 김 경록는 칼을 들어 복남의 탄 말의 목을 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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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케놈들은 다 달아났거든 조선의 국록을 먹는 병사가 어디를 간단말이요? 이 성에서 싸워 죽읍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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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현감 이 춘원(李春元)도 복남의 뒤를 따라 도망하려다가 경로가 복남의 탄 말을 베는 것을 복고 피하지 못할 줄을 알고 부하의 군사를 독려하며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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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로는 북문을 닫아 걸고 병사를 앞세우고 싸우기를 재촉하였다. 병사는 경로가 무서워 조선 군사들에게 싸우기를 명하였다. 군사들은 소원을 이룬 듯이 소리를 지르고 남문을 향하여 돌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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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는 벌써 성중에 불이 일어 연기와 불기둥이 사방으로서 올랐다. 조방장 김 경로(金敬老)는 칼을 두르며 군사를 독려하여 싸웠으나 불과 수천의 군사로 도저히 사오만의 적병을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전군이 전멸을 당하고 경로와 병사 이 복남(李福男)과 광양 현감 이 춘원(李春元)은 다 용감하게 싸워 죽었다. 이날 싸움에 조선군사로서 살아 남은 것은 오직 김 효의(金孝義)라는 모양으로 가만히 자빠져 있다가 적군이 없는 틈을 타서 일어나 전주로 달아나 이날 싸움의 결과를 자세히 말하였다. 북문으로 빠져 달아난 명장 양 원(양원)은 겨우 가정 수인을 데리고 전주로 도망하여서 말하기를, 일본군과 격전하여 군사를 다 잃고 왔노라고 싸움한 수고를 자랑하였으나 김 효의가 살아 왔기 때문에 양 원의 거짓말이 탄로가 되었다. 사일인즉, 양 원이 삼천 병마를 거느리고 북문을 나서자 일본군을 미리 이러할 줄을 알고 북병하고 있다가 명병을 엄습하였다. 명병은 일본군의 긴 칼에 겁을 내어 칼을 피하느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우고 고개를 숙이면 일본군의 칼은 바로 그 내어민 목에 떨어져서 마치 파리 머리를 자르는 것 같았다. 이 모양으로 명병 삼천은 한번 싸워 자르는 것 같았다. 이 모양으로 명병 삼천은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다 죽었다. 어떤 군사는 몸에 지녔던 보물(민가에서 약탈한 것)을 내어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일본 군사에게 받들어 드리고 「살려 줍소사」고 빌었다. 총병 양 원도 말에서 내려 찼던 칼과 부절(符節)과 몸에 지녔던 은, 금을 넣은 전대를 끌어 두 손으로 받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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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 총병, 나는 양 총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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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살려 주기를 빌었다. 일본 군사 중에 장수 되는 사람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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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은 대장이니 살려 보내어라. 살려 보내어서 일본군사가 어떻게 무서운지 명나라에 알리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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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발길로 등덜미를 차서 쫓아 버렸다.
 
43
이렇게 간신히 목숨을 보전해 가지고 달아난 양 원은 전주성에 들어 서면서 진 우충(陳愚衷)이라는 명장을 마나서는 싸우고 왔노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 효의의 공술도 있고, 또 양 원의 부하 중에 살아 남은 군사 몇 사람도 양 원이 어떻게 비겁하게 칼과 부절을 일본 장수에게 바치고 살려 주기를 빈 것을 발설하여 양원은 북경(北京)에서 사형을 당하고 그 모가지는 조선으로 돌려 보내어 각지에 돌리게 하였다. 양원이 조선 백성에게 명나라의 위신을 잃게 하였다는 까닭으로였다.
 
44
남원이 함락되매 일본 군사는 무인 지경같이 동복(同福), 광주(光州), 나주(羅州), 능주(綾州), 영암(靈岩), 해남(海南), 광양(光陽), 순천(順川), 보성(寶城), 장흥(長興)은 물론이요, 익산(益山), 김제(金提), 김구(金溝), 고부(古阜), 정읍(井邑)까지도 수일간에 점령해 버리고, 전라도에서 남은 것은 여수(濾水), 흥양(興陽), 완도(莞島), 진도(珍島), 무안(務安), 장성(長城), 무장(茂長), 고창(高敞) 등 몇 고을 뿐이나, 이것도 다른 일만 아니 생겼다 하면 며칠 안에다 점령도 되었을 것이었다.
【원문】南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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