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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
◇ 釜山 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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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6월~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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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순신
 
2
13. 釜 山 싸 움
 
 
 

1

 
4
한산도(閑山島)와 안골포(安骨浦) 싸움에 적은 완전히 조선 제해권을 잡으려는 뜻을 버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도저히 이 순신의 수군과 겨눌 수는 없다고 단념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그 때문에 평양에 웅거한 소서 행장의 군사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되어, 이를테면 일본군은 반편이 된 셈이었다. 유 성룡의 말에, 만일 한산도의 승전이 없었던들 전라, 충청, 황해, 평안 여러 도까지 적군의 손에 들어가고, 그뿐더러 나아가서는 명나라의 천진까지도 위태하였으리라는 것은 옳은 말이었다.
 
5
육전에서 백전백승하여 소향에 무적하던 자기의 군사가 수전에서 아홉 번 싸워 아홉 번 패한 것을 들은 풍신수길의 노함은 여간이 아니었다. 그가 일본 수군이 패하는 이유를 알아 올리라는 엄명한 때에 그에게 달한 보고는,
 
6
『일본 수군은 배 수효는 많으나 배가 약하며, 이 순신의 거북선에 부딪히면 곧 부서지고, 또 이 순신이 지세와 조류를 잘 알아 그것을 이용하므로 객병으로는 그 모략을 대항할 수 없다. 』하는 것이었다.
 
7
이때 풍신수길은 조선에 건너 와 있는 수군에게 명하여 아무리 조선 사람이 싸움을 돋구더라도 결코 응전하지 말고 부산 근해에 모여 지키고만 있으라고 하고 한편으로 조선에 당쟁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이 순신을 모함하여 없이 할 도리를 할 것을 가등 청정(加藤淸正)에게 엄명하였다.
 
8
그러나 부산에 모여 있던 풍신수길의 수군은 가끔 가덕(加德), 거제(巨濟) 등지로 출몰하여 민가를 요란하기를 마지아니하였다.
 
9
이때에는 육지에 있던 일본 군대도 한산도 패전에 공포를 느끼어 대부분이 부산, 울진, 김해 등지로 모여 들기를 시작하여 성을 쌓고, 집을 짓고, 오래 둥거하여 때를 기다릴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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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보를 들을 때에 순신은 심히 분개하여 수륙으로 합공 못하는 것을 분하게 여겼다. 순신은 전라도 순찰사 이 광(李光)에게 말하였으나 이 광은 용인(龍仁)서 패한 이래로 겁을 집어먹어 싸울 뜻이 없고, 그뿐 아니라 용인에서 죽을 쑨 이 광을 군사와 백성이 다시 신임을 아니 하였다. 할 수 없이 조정에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명나라 구원병을 기다리는 것과 동인 서인의 당파싸움(불과 수십명 되는 무리가) 밖에 다른 생각이 없고, 또 설사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대군을 발하여 육상의 적을 칠 힘도 없었다.
 
11
이에 순신은 경상 우도 순찰사 김 수(金수)에게 청하여 수군은 순신 자기가 담당할 것이니 물에 있어서 적이 도망할 길을 막아 적병의 책원지인 부산을 무찌르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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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김 수는 지난 사월에 적병이 부산, 동래, 김해를 순식간에 함락시킬 때에 겁을 집어먹고 진주(晋州)성을 버리고 달아난 위인이었다. 순신의 이 청을 들으매 자신은 없으나 못한다 하기도 어려워 구월 초하루를 기약하여 부산의 적진을 수륙으로 협공하기를 약속하였다.
 
13
이에 순신은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이 억기(李漁期),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 원 균(元均)과 서로 약속하고 팔월 초하루에 전라 좌우도 전선 합하여 칠십 사 척과 협선 구십 이 척 도합 일백 육십 척(그동안에 순신은 오십여 척의 병선을 지은 것이었다)을 거느리고 전라 좌수여 앞에 결진하고 있었다. 이때에 경상 우도 순찰사 김 수(金수)로 부터 관문이 왔으니, 하였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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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2

 
17
김수의 관문의 뜻은,
 
18
『우대로 갔던 적의 무리가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걸어 양산과 김해강 등지에 연속하여 내려 오는데, 짐을 많이 실은 것을 보니 필시 도망하여 돌아 오는 모양이라.』
 
19
하는 것이었다.
 
20
팔월 이십 사일에 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 억기(李億期), 조방장 정 걸(丁傑)(얼마 아니하여 경기도 수군 절도사가 되어 행주(幸州) 싸움에 권율(權慄)을 도운 사람)과 함께 백 육십 육 척의 주사를 거느리고 전라도 좌수영을 떠나 제 사차 원정의 길을 나섰다.
 
21
그날은 남해 관음포(南海觀音浦)(이곳은 칠년 후에 순신이 죽은 곳이다)에서 밤을 지내고 이십 오일에 사량바다(  )에 이르러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 원 균(元均)과 서로 만났다.
 
22
원 균은 한산도에 상륙하여 굶어 죽게 된 사백명 적군을 놓아 버린 사람이다. 그가 한산도를 지키고 있을 때에 거제 바다에 적선이 보인다는 말을 듣고 무서워 달아났으므로 살아 남은 적병들은 나무를 찍어 떼를 모아 타고 거제도로 달아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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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신은 원 균을 만나 경상도 연해의 형세를 물었으나 그는 하나도 알지 못하였다. 혹시 아는 체하고 말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취신할 것이 없었다. 더구나 그가 배를 바다에 놓아 조선 어선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을 뿐 더러 혹시는 우리 사람의 목을 베어 상투를 풀어 일본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배코를 쳐서 적병을 잡은 듯이 수급을 모은다는 보고를 들은 순신은 더구나 원 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경상도 바다에서 싸우는 이상 원 균을 참여시키지 아니할 수도 없었다. 원 균은 전과 같이 뒤에 떨어져서 싸움 구경을 하다가 썰물에 떠내려 오는 적병의 시체(우리 군사의 시체까지도)를 잡아 목을 자르는 것으로 일을 삼을 줄 알면서도 아니 데리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24
이날은 지난 유월의 첫 번 승전한 전장인 당포(唐浦)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인 이십 육일에는 풍우가 대작하여 배질을 못하고 있다가 날이 저물게야, 웅천 제포(熊川濟浦)뒤 완포(浣浦)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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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팔일에 육지에 나갔던 염탐군이 돌아와 아뢰기를, 고성(固城), 진해(鎭海), 창원(昌源) 등지에 유둔하던 적병이 이순신의 함대 온다는 말을 듣고 이달 이십 사오일 야간에 죄다 도망하여 배 맨 곳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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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신은 이날 조조에 배를 떼어 바로 양산(梁山)·김해(金海) 양 강 어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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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대가 오는 것을 보고 백성들이 부모를 만난 듯이 기뻐하며 배를 타고 나와 만났다. 그들은 제각기 적병에게 시달리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중에 창원(昌原) 땅 구곡포(仇谷浦)서 전복잡이 한다는 정 말석(丁末石)이라는 사람은 김해강에서 사흘 동안 사로 잡혔다가 도망하여 나왔노라 하며, 이런 말을 보고하였다. - 김해강에 있던 적선이 이삼일 간에 떼를 지어 몰운대(沒雲臺) 밖으로 황급히 도망하여 나가더라고, 그 분망통에 자기는 밤을 타서 도망해 왔노라고,
 
 
 

3

 
29
이에 순신은 함대를 가덕도(加德島) 북편 서쪽 언덕에 숨기고 방답 첨사(防踏僉使) 이 순신(李純信),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 영담(魚泳潭)으로 하여금 가덕도 밖에 숨어서 양산(梁山) 강에 정박한 적선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30
신시 말이나 되어서 순신에게 보고가 오기를 종일 바라보고 있었으나 김해강과 양산강으로서 적의 소선 네 척이 나와서 몰운대(沒雲臺)로 간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31
이것으로 보아 양강에 있는 적선은 거의 다 부산으로 철귀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날 밤을 발선하여 평명에 양강앞 동래(東萊) 땅인 장림포(長林浦)에 다다랐다. 마침 삼십여 명 적병이 대선 네 척과 소선 두 척에 갈라 타고 양산으로서 나오다가 이편 함대를 보고 놀라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 도망하였다. 경상 우수사 원 균(元均)이 자기가 거느린 주사를 끌고 달려가 비인 배 오 척을 깨뜨리고 우후(우후) 이몽귀(李夢龜)가 대선 한 척을 깨뜨리고 머리 한 급을 베었다.
 
32
이것으로 아직 양강 속에는 적선이 남아 있는 것을 들어가 소멸하려 하였으나 강이 좁고 물이 얕아서 판옥대선을 용납하여 싸울 수가 없으므로 초어스름에 가덕도 북편에 돌아와 밤을 지내면서 순신은 원 균(元均)과 이 억기(李億期)를 불러 밤이 깊도록 의논한 결과 양강에 비록 다소의 적선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꺼려할 것 없을 뿐더러 우리 주사를 보고 밤을 타서 필시 도망했을 듯하니 밝은 날에는 부산(釜山)의 적의 본거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33
이튿날인 오월 초하루 닭이 울때에 발선하여 일백 팔십여 척의 대 함대가 서로 꼬리를 물고 동으로 향하였다. 몰운대에 다다른 것이 진시, 몰운대를 지나자 갑자기 동풍이 세게 불어 물결이 산같이 일어났으나 그래도 배를 저어 동으로 동으로 부산을 향하였다. 화준(花樽)·구미(驅尾)에 이르러 적의 대선 오 척을 만나매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 운(鄭運)이 맞아 싸워 하나도 아니 남기고 다 깨뜨리고, 다대포(多大浦) 앞골에 다다라 적의 대선 팔 척을 만나 이번에는 광양 현감 어 영담(魚泳潭)이 맞아 싸워 하나도 아니 남기고 다 깨뜨리고, 서평포(西平浦) 앞골에서는 적의 대선 구 척을 만나 이번에는 방답첨사(防踏僉使) 이 순신(李純信)이 맞아 싸워 하나도 아니 남기고 다 깨뜨리고, 절영도(絶影島)에서는 적의 대선 네 척이 바닷가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을 조방장(助防將) 정 걸(丁傑)이 다 깨뜨렸다. 이리하여 몰운대에서 부터 절영도까지 오는 길에 적의 대선 이십 사 척을 깨뜨리니 이것을 본 뭍에 있던 적병들은 산으로 올라가 도망해 버리고 이편 군사들은 사기가 백배하여 그 어려운 배질에 피곤한 것도 잊어 버렸다.
 
34
절영도 앞에 함대를 머물러 섬에 남아 있는 적병을 모조리 잡은 후에 작은 배를 놓아 부산 선창의 동정을 보라하였다.
 
35
탐방선의 보고에 의하면 부산 선창의 적선이 오백여 척이나 동편 산기슭에 늘어섰다고 하며 이편의 탐망선이 온 것을 보고 대선 사 척이 따라 나오더라고 한다. 적선 오백 척이란 말은 원 균(원균)을 크게 놀래었고 이 억기도 이백 척 못되는 주사로 오백 척의 적선과 싸우는 것이 어려움을 말하고자 하였다.
 
36
순신은,
 
37
『우리 군사의 위엄을 가지고 이번에 만일 적의 소굴을 아니 치고 돌아간다 하면 적이 반드시 우리를 업수이 여길 것이니 그리하면 우리 일은 끝난 것이다. 이곳에서 싸워서 우리가 전멸을 할지언정 아니 싸우고 돌아서지는 못하리라.』
 
38
하여 영기(令旗)를 들어 부산 선창을 향하여 나아가 총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4

 
40
순신의 손에 들린 기가 부산을 가리킬 때에 우부장 녹도 만호(右部將鹿島萬戶) 정 운(鄭運), 거북선 돌격장(       ) 이 언량(李彦良), 전부장 방답 첨사(前部將防踏 僉使) 이 순신(李純信), 중위장 순천 부사(中衛將順天付使) 권 준(權俊), 좌부장 낙안 군수(左部將樂安郡守) 신 호(申浩) 등이 배를 몰아 나아가 적의 선봉 대선 사 척을 순식간에 때려 부수고 불을 가르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로 오르고 살아 남은 적병들은 헤엄을 쳐 육지로 도망하였다. 이것을 보고 전군 일백 육십 육 척이 기세를 얻어 북을 울리고 기를 두르며 장사진을 지어 바로 부산을 향하고 급히 노를 저었다. 오직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慶尙 右道 水軍 節度使) 원 균(元均)이 따라 오는 듯 슬며시 뒤에 떨어져 싸움이 이길 듯하면 참여하고 질 듯하면 달아날 차비를 하고 적병의 시체가 떠나오거든 목을 잘라 공을 세울 결심을 하였다.
 
41
함대가 부산 포구에 들어서니 부산진(釜山鎭)성 동쪽 오리 허에 물가에 연하여 세 군대로 갈라 둔박한 적선이 사백 칠십여 척이나 되지마는 이편의 위엄에 눌려 감히 마주 나와 싸우지 못하였다. 순신 제장을 명하여 바로 나아가 적선을 치라고 명하니 우부장 녹도 만호 정 운이 선봉이 되어 적의 배들이 모여 선 곳으로 달려갔다. 적병은 수전으로 이기지 못할 줄을 알고 많이 배를 버리고 성안으로 도망하고 산으로도 기어 올라 거기서 총과 활을 쏘았다. 적병은 모두 산에서 여섯 군데 모여서 땅을 파고 숨어 싸우고 배도 큰 배에서는 방패 속에 숨어서 총과 활을 빗발같이 우박같이 이편 배를 향하여 내려 쏘았다.
 
42
적병은 총과 활을 쏠 뿐만 아니라 혹은 무과 덩어리와 같은 큰 철환을 쏘고 혹은 물을 내어 뿜고 혹은 밥주발만큼씩 큰 돌멩이를 내려 던졌다.
 
43
물가에 매인 적선에서는 여기저기 불이 일기 시작하여 경각간에 백여 척에 불이 당기어 백여 개 불기둥과 연기 등이 하늘로 오르고 물로 기어 어떤 곳은 지척을 분변할 수가 없고 바닷물도 끓어 오르는 듯하여 갑자기 더위가 심하였다.
 
44
이편 장졸에도 적의 철환과 화살에 맞아 붉은 피를 뿜고 죽는 자, 넘어지는 자 수효를 몰랐다.
 
45
순신은 시석을 무릅쓰고 손수 북을 울리고 기를 둘러 싸움을 재촉하였다. 순신이 탄 배에도 가끔 철환과 살이 날아 왔으나 순신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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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신이 치는 북 소리(그것은 다른 북보다 컸다)가 들릴 때마다, 연기와 불길 속으로 순신의 손에 들린 깃발이 격렬하게 움직임을 볼 때마다 제장과 군졸들은 죽기를 무릅쓰고 배를 저어 앞을 다투어 적진을 찔렀다.
 
47
천지자 장군전(天地字將軍箭)·피령전(皮翎箭)·철환을 빗발같이 적병이 웅거한 성 내와 산 위로 올려 쏘았다.
 
48
적병은 토굴 속에 숨어서 머리와 가슴을 내어 밀고는 총과 활을 쏘고는 또 숨었다. 그러다가 이편의 살에 맞아 언덕에 굴러 떨어지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아니하고 땅에 엎더지는 자는 다른 군사가 나와 토굴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러는 동안에 여섯 군데 토굴의 흙이 피로 젖고 이편 배에도 피로 젖지 아니한 배가 없었다.
 
49
이렇게 종일을 싸울 때에 저녁때가 되어서는 부산 선창이 온통 불과 연기요, 이따금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 속으로 순신이 뱃머리에 서서 손수 북을 울리고 깃발을 두르는 것이 번뜻번뜻 보인 뿐이었다. 바닷물에도 기름이 섞인 붉은 피가 여러 가지 무늬를 지어 물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5

 
51
부산진 성중과 여섯 군데 적병의 참호에서는 점점 총과 활 쏘는 것이 줄어들어 해가 서산에 걸린 때에는 다섯 군데 참호는 완전히 침묵하고 부산진 성도 문을 굳이 닫고 고요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52
우부장 녹도 만호 정 운(鄭運)은 마지막 적병의 둔처를 깨뜨리려고 홀로 배를 저어 적선이 수풀같이 들어 선틈을 뚫고 들어가며 분전하다가 적의 탄환이 오늘편 가슴을 뚫었다. 정 운은 칼 든 손으로 누르고 갑판 위에 쓰러졌다. 배를 젓던 군사들이 놀래어 배 젓기를 쉬일 때나 칼을 두르며 피를 뿜는 입으로,
 
53
『어서 저어라!』
 
54
하고 싸움을 재촉하였다.
 
55
이때에 또 탄환 한 개가 정운의 왼편 가슴을 맞혀 등을 뚫고 나와 정 운의 오륙보 되는 곳에 떨어졌다.
 
56
정운은 그만 갑판 위에 쓰러졌다. 사졸들이 그를 안아 일으킨 때에는 그는 벌써 숨이 끊어졌다. 정 운은 이 날 싸움에 처음부터 끝까지 앞장을 서서 싸우고 그의 손으로 깨뜨린 적선만이 삼십 척이나 되었다.
 
57
정 운의 배가 홀로 적의 진중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순신은 구선장 돌격장 이 언량(李彦良)을 시켜 그를 구원하려 하였으나 구선이 갔을 때에 정 운은 벌써 죽었고 정 운의 배에 탔던 사졸들도 개미떼같이 달려드는 적병과 단병전을 하여 이삼인을 남기고는 다 죽어 버렸다.
 
58
이 언량은 좌우에 모여 있는 적선을 거북선으로 좌충 우돌하여 막 부수어 버리고 정 운의 배를 끌고 나왔다.
 
59
정 운의 시체를 실은 배가 순신 탄 장선 곁에 와 닿았을 때에는 당진에서는 사실상 휴전 상태가 되었다.
 
60
해도 인제는 산을 넘었고 오직 싸움에 지친 이편의 함대에만 남은 놀이 벌겋게 비치었을 뿐이었다.
 
61
적진에서는 이편의 큰 장수, 그날 종일 가장 무섭던 장수가 죽은 것을 보고 또 어두움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보고 기세를 얻어 이편의 살이 및지 아니할 만한 곳에 수천외 장졸이 말을 타고 칼을 번쩍거리고 시위를 하였다. 그것은 마치 이편 군사를 뭍으로 끌어 올리려는 꾀인 듯싶었다.
 
62
이편 진중에서는 곧 상륙하여 적과 최후의 결전을 할 것을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육지로 와서 같이 싸운다는 경상 우도 순찰사 김 수의 군사는 해가 다 지도록 오는 빛이 없고, 또 말도 없고 긴 칼도 없고 육전에 경험도 없는 수군을 가지고 오랫동안 준비하여 놓은 적진 중에, 그도 밤에, 달도 없는 초하룻날 밤에 들어가는 것은 백 번 패할 수만 있고 한번 이길 수는 없는 모험이었다.
 
63
부산에는 각지에 흩어졌던 적병들이 모여 들어 부산진 성내에 있던 관사를 헐어다가 성동문 밖에 백여 호나 소굴을 지었고, 또 동서 산기슭에도 적병들니 기거하기 위하여 즐비하게 지어 놓은 집이 삼백여 호나 되었다. 그 중에는 이층 집도 있고 벽에는 분을 발라 절인 듯한 집도 있었다.
 
64
순신은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이 소굴을 단번에 무찌르지 못하는 것을 한하였으나 이제 육상에 응원이 없이 피곤하고 굶주린 군사를 끌고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순신은 군사를 거두어 역풍과 파도를 무릅쓰고 밤 삼경에 가덕도(加德島)에 돌아 왔다. 배가 절영도를 지날 때에야 그는 섰던 자리를 떠나 정 운의 시체 실은 배에 올라 그 상한 곳을 만지며 통곡하였다.
【원문】釜山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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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李光洙) [저자]
 
  동아 일보(東亞日報)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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