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고재완의 지식창고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2020년
2020년 11월
2020년 11월 30일
2020년 11월 9일
2020년 11월 4일
2020년 10월
2020년 10월 30일
2020년 10월 28일
2020년 10월 26일
2020년 10월 23일
2020년 10월 19일
2020년 10월 12일
2020년 8월
2020년 8월 24일
2020년 8월 18일
2020년 7월
2020년 7월 14일
2020년 7월 7일
2020년 7월 1일
2020년 6월
2020년 6월 23일
2020년 6월 15일
2020년 6월 8일
2020년 6월 1일
2020년 5월
2020년 5월 26일
세검정(洗劍亭)과 차일암(遮日岩)
2020년 5월 18일
2020년 5월 13일
2020년 5월 5일
2020년 4월
2020년 4월 14일
2020년 4월 7일
2020년 4월 1일
2020년 3월
2020년 3월 26일
2020년 3월 16일
2020년 3월 6일
2020년 3월 2일
2020년 2월
2020년 2월 27일
2020년 2월 24일
2020년 2월 20일
2020년 2월 17일
2020년 2월 13일
2020년 2월 10일
2020년 2월 6일
2020년 1월
2020년 1월 31일
2020년 1월 28일
2020년 1월 22일
2020년 1월 20일
2020년 1월 16일
2020년 1월 13일
2020년 1월 9일
about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누정(樓亭) 석파랑 세검정(洗劍亭) 종로구(鍾路區) # 차일암
【여행】
(2020.05.26. 10:26) 
◈ 세검정(洗劍亭)과 차일암(遮日岩)
세검정 삼거리의 석파랑(서예가 손재형 옛 가옥)에서 세검정로를 따라 올라가면 세검정(洗劍亭)이 나온다.
세검정 삼거리의 석파랑(서예가 손재형 옛 가옥)에서 세검정로를 따라 올라가면 세검정(洗劍亭)이 나온다.
원래 정자(亭子)는 산수나 풍광이 빼어난 곳에 휴식이나 놀기 위해 세웠다. 이곳 세검정(1944년 불타서 1977년 복원, 서울시 기념물 제4호)도 마찬가지로 사방이 트여 풍류객들이 좋아했던 장소로 겸재 정선의 그림과 많은 글(다산 정약용의 "세검정을 노닐며")이 남아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조(英祖)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불타버려 볼 수 없다. 길가에 담장 없이 복원된 지금의 세검정은 과거보다 초라하고 정자에 갈 수 없으며 흐르는 물도 적어 아쉽습니다.
세검정 밑의 너럭바위를 차일암(遮日岩)이라 말하는데 이곳에서 조선왕조 실록 편찬을 완료한 후 사초(史草)나 초고들을 물에 씻어 먹물 글씨를 지우고 귀한 종이를 씻어 다시 사용하고자 말리기 위해 넓은 바위에 천막을 치던 장소다. 과거에는 정자에서 직접 내려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접근하기 불편합니다.
 
 
세검정 하면 떠오른 것은 칼을 씻는 장소이며 조선왕조 실록 자료인 사초를 씻는 곳이라고 떠오른다. 세신(洗身)은 몸을 깨끗하게 씻는 것이고, 세검(洗劍)이란 칼을 씻는 것이며, 세초(洗草)는 조선왕조 실록의 사초를 물에 씻는 것으로 모두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세검정의 역사를 찾아보니 다양합니다.
◆ 세검정은 홍제천 냇가와 마주치는 곳에 T자 모양의 정자로 백색 화강암 위에 있다.
 
◆세검정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분명치 않고 여러 설(說)이 있다.
◎신라
태종 무열왕(654∼660)이 삼국 쟁패 과정에서 죽어간 수많은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현재 세검정 초등학교 부근에 사찰인 장의사(壯義寺)를 지었고 이때부터 절경인 이곳이 정자 터였을 것이다.
◎조선
①한양에 도읍을 정자 세검정 터는 풍류객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1506년(연산군 12) 사찰인 장의사를 철거하고 이 일대를 놀이터로 만들었다. 세검정 물길 바로 위에 이궁(離宮, 왕이 거동할 때 마무르는 별궁으로 행궁이라고도 함)을 짓고 석조(石槽)를 파 음란한 놀이를 한 곳이 탕춘대(蕩春臺,방탕할 탕, 봄 춘, 대대)다. 이 시기에 정자도 지어졌을 수 있을 것이다.
②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귀(李貴·1557∼1632) 등 반정군들은 홍제원(弘濟院)에 모여 세검입의(洗劍立義,칼을 씻어 정의를 세움)의 맹세를 하고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격, 반정을 성공시킨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검정을 세웠다는 것이다. -궁궐지 宮闕志-
▼창의문
 
③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군대의 연회 장소로 세검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④영조는 인조반정 120년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743년 5월 7일 창의문에 친림하여 감구시(感舊詩·옛 일을 생각하고 감회를 읊는 시)를 지으며 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써 문루에 걸게 했다. 1747년(영조 23) 5월 6일에는 총융청(摠戎廳·경기지역을 관할한 군영)을 탕춘대로 옮기고 북한산성까지 수비하게 한 뒤 총융청(1884년 폐지) 장졸들의 휴식 및 연회 장소로 세검정을 짓게 했다. -김상채(金尙彩)의 창암집 蒼巖集-
아래 그림은 겸재 정선(1676~1759, 청운동 출생)의 "선면 세검정도"
▼같은 겸재 정선의 그림이지만 위 그림과 정자의 크기(위는 1칸, 여기는 2칸)가 다르는데 왜?
▼권섭(1671~1759, 삼청동 출생)의 세검정
▶정조의 시
연융대(鍊戎臺)는 서울시 종로구 신영동(新營洞)에 있던 돈대의 이름이다. 1790년(정조 14) 9월 19일 정조가 연융대로 나가 서총대(瑞蔥臺)에서 무장과 군사들을 대상으로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돌아오던 길에 세검정에 들러 그곳에 걸려 있는 영조의 어제시에 차운(次韻, 다른 사람의 시운을 써서 시를 지음)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사 훈련 마치고 이 정자 다다르니 詰戎餘意此臨亭
북한산 하늘 높고 나팔 소리 맑구나 漢北天高畫角淸
좋은지고 세차게 요동치는 저 원천 可愛源泉深有力
청량한 한 줄기가 온 산을 울리누나 泠然一道萬山聲
▶다산 정약용의 유세검정기(遊洗劍亭記 : 세검정에서 노닐며, 1791년, 정조 15) 일부
세검정에 올라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난간 앞 수목은 이미 미친 듯 흔들리고 한기가 뼈 속을 파고들었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더니 산골짜기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은 메워지고, 요란하게 물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모래가 흘러내리고 돌이 굴러 물속에 마구 쏟아져 내리면서, 사납게 굽이치는 물살이 세검정 주춧돌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 물살의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가 맹렬해 정자의 서까래와 난간이 진동하자, 모두 오들오들 떨며 불안해했다.
내가 "어떠하냐?"고 묻자, 모두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구나!"라고 대답했다. 술과 안주를 가져와 익살 섞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놀았다. 시간이 지나자 소낙비도 그치고 구름도 걷히면서 계곡물 역시 점차 잔잔해졌다. 저녁나절이 되자 지는 해가 나무에 걸려서 붉으락푸르락 천만 가지 형상을 띠었다. 서로 팔을 베고 누워서 시를 읊조렸다.
▼유숙(1827~1873)의 세검정도는 장마 때 풍경인데 정자 형태가 T자형이 아니라 앞부분이 없는 팔작지붕이다.
▼1883년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1855~1916)이 찍은 세검정 사진을 오른쪽 먼 기슭에 한지가 널려 있는 것이 보인다. 근처에 조지서((造紙署, 종이를 만드는 관청)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T자형 정자에 뒤로 담장이 보인다. 학생들 소풍 장소이기도 했는데 불행하게도 1944년 2월 25일 이웃의 유지 공장(油紙工場) 화재로 세검정은 전소(全燒) 되었다. -매일신보-
☞ 종로구청의 안내문에는 세검정이 1941년 화재로 없어졌다는데 확인하여 바로잡았으면 한다.
▼정자 앞문에서 내려가는 계단도 보인다.
▼정면은 3칸인데 후면은 2칸의 丁(T)자형 팔작지붕 정자로 앞문, 옆문, 뒷문이 보인다.
▼자료로 본 세검정 비교
 

18세기

19세기

현재

지붕 꼭대기 절병통

있음

없음

없음

담장, 문 유무

있음(앞, 옆, 뒷문)

있음

없음

주춧돌 위치, 개수

9개

주춧돌을 앞으로 당기고 10개

 
◈ 세초(洗草)와 차일암(遮日岩, 햇빛 가리는 천막을 치는 바위)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洗草)하였고,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 구경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攷-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하였다 -한경지략 漢京識略-
세검정 밑에 있는 너럭바위를 차일암이라 일컫는다. 이곳은 조선 시대 실록 편찬을 완료한 후 초본(草本)을 잘게 찢고 물에 담가 먹물을 빼서 이렇게 씻은 종이는 인근의 조지서(造紙署)로 보내어 제지 원료로 재활용하도록 하던 세초를 하던 장소다.
세초는 사초의 유출을 막아 시비의 소지를 예방하기 위해 시행된 제도로 차일암에서 세초가 끝나면 세초연(洗草宴)이 베풀어졌다고 한다.
 
▼바위에 천막을 치기 위한 흔적 구멍이 보인다.
 
마무리하면서
세검정은 홍제천변에 접해 경관이 빼어난 정자가 있던 곳이다. 영조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이 있었고 정조도 들린 곳이니 정자를 대충 지었을 리 없으며 담장까지 있었으니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없었겠다.
1921년 대홍수로 1719년(숙종 15)에 지어진 홍지문(한북문)이 유실될 정도였으니 세검정도 폭우에 휩쓸리고 부서지고 다시 짓길 반복했으니 언제 시작됐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고 형태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종이를 말리던 차일암은 그대로인데 새로운 도로가 생기면서 복원한 세검정은 주변을 빼앗기고 그저 조그마한 정자터로 남았다.
아! 옛날이여..
출처: 최완수, 민족문화 대백과, 구글, 네이버, 서울시,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왕조실록, 유홍준 문화유산 답사기, 한국콘텐츠진흥원,한국고전종합
▣주변 볼거리
★석파랑(서예가 손재형 옛집)
 
★홍지문(한북문 : 漢北門, 한양 성곽과 북한산성을 연결해 만든 탕춘대성의 문루)과 오간수문
 
★옥천암 마애보살 좌상(보도 각 백불)
 
 
★ 정자의 형태
https://jawkoh.blog.me/220347331434
 

 
※ 원문보기
누정(樓亭) 석파랑 세검정(洗劍亭) 종로구(鍾路區) # 차일암
【여행】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 절단 복원된 홍지문(弘智門)
• 세검정(洗劍亭)과 차일암(遮日岩)
• 석파랑(石坡廊) 둘러보았어요!
추천 : 0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1
▣ 정보 :
여행 (보통)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참조정보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