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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갈 때 세검정 근처에 있는 큰 대문이 보이는데 홍지문(弘智門, 漢北門)이다. 조선 숙종 때 지어진 홍지문은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성문이다. 일제 강점기 홍수로 유실된 것을 1977년 복원할 때 인왕산 쪽이 잘려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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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춘대(蕩春臺)"란 이름은 연산군이 사찰인 장의사(莊義寺)를 놀이터로 만들어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계곡 옆에서 따뜻한 봄날을 쓸어내릴 듯 놀겠다는 뜻으로 적군을 막기위한 성곽이름에는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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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조 때 탕춘대를 연융대(鍊戎臺)로 변경 확대해 총융청(總戎廳,경기지역 관할하는 군영, 원래 총융청은 1624년에 사직동 북쪽에 설치되었으나, 헌종 10년에 삼청동으로 청사를 이전시켰다가 영조 때에 신영동으로 다시 이전함)을 옮겼고(신영동 이름의 유래) 군량미를 보관하던 곳이 평창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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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춘대성은 한양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도 한다.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은 1715년(오간수문도 함께 만듬)에 한양 도성의 인왕산(仁王山) 서북쪽과 북한산성의 비봉(碑峰)을 연결해 적군을 막기 위해 홍제천변에 만들었다. 이 성문은 조선의 옛 수도인 한양의 북쪽에 위치하고 북을 방위한다고 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렀고 숙종의 친필로 "홍지문"이라고 편액을 썼지만 지금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홍지문"이라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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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춘대성(인왕산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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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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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지문(弘智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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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산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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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유형 문화재 33호로 탕춘대성(약 4km)의 성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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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4대문(동대문: 흥인지문, 서대문: 돈의문, 남대문: 숭례문, 북대문: 숙정문)의 북대문으로 오해하기 쉽다. 內四山인 북악산, 인왕산, 남산 그리고 낙산을 연결한 한양도성은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청문의 사대문(四大門)을 두고, 그 사이에 홍화문(동소문), 소덕문(서소문), 광희문(수구문), 창의문(북소문)의 사소문(四小門)을 두어 도성의 안팎을 연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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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을 많이 쌓은 숙종 때 인왕산의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홍지문과 오간수문(五間水門, 五間水口라고도 함)이 축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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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에 홍수로 홍지문과 오간수문은 유실되고 한양 4대문에 비해 관심을 끌지 못했다. ☞ 겸재 정선의 홍지문- 수문천석(水門川石) 등 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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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지역 개발과 도로 확장에 따라 원래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4m 벗어났고 인왕산 쪽의 연결 부분은 절단 형식으로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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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지문은 홍예(무지개다리) 형태의 위에 정면 3칸(9.4m), 측면 2칸(4m)의 우진각 지붕(숭례문도 우진각)을 한 문루가 있고 문루의 좌우에는 협문을 만들고 전돌로 담장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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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현판은 숙종 임금이 쓴 것이나 지금 홍지문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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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지문 문루나 오간수문은 출입 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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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홍제천 하류에서 상류 방향) :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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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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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에 취두(용마루에 있는 새 모양의 조각), 석누조(石漏漕,물 홈돌),홍예 받침돌,계단은 우측(상류에서 하류 방향)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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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방향의 홍지문은 4차선 도로로 좌우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협문만 보이며 절단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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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간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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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천의 오간수문 (상류에서 하류 방향)의 좌측은 홍지문, 우측은 비봉 쪽 탕춘대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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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 아래로 홍제천 길이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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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들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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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홍수로 유실되기 전의 사진으로 홍지문이 탕춘대성을 연결하고 성문으로 통행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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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전후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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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과 연결부분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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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간수문과 연결된 담장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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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에 총구멍인 근총안(近銃眼)의 위치가 아래쪽에 있는데 복원된 것에는 원총안(遠銃眼)과 같은 높이로 보이고, 오간수문의 수문 반경이 줄어들어 홍수 때 상류지역이 침수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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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문과 오간수문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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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섭(1671~1759, 삼청동 출생 화가)의 홍지문 수문루(水門樓),1753년,문수봉(文殊峰)과 한북문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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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1676~1759, 청운동 출생 화가)의 홍지문- 수문천석 그림으로 탕춘대성은 인왕산과 비봉을 연결하고 홍제천변에 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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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 여도(東國與圖, 1800년대 초반)에 표시된 한북문(홍지문), 오간수구(五間水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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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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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 주변은 풍류객들이 선호하던 곳으로 지역개발과 도로 신설로 많은 문화재들이 사라지거나 제대로 복원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다. 먹고사는 게 우선인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문화재는 나중의 문제였다. 지금부터 후손을 위해 관리를 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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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터에서 하류로 가는 홍제천변은 걸으려면 다리 밑은 사람 키보다 낮은 곳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양재천처럼 제대로 걸을 수 있고 홍수에 대비해 홍제천 정비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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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족문화대백과, 구글, 네이버, 국사편찬위원회,규장각,명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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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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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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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jawkoh.blog.me/221955739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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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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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jawkoh.blog.me/221963453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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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암 마애석불(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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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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