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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가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2019.06.04. 19:43 (2019.06.04. 16:44)

【학습】서동요(薯童謠)

백제의 서동(薯童 :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한국 최초의 4구체(四句體) 향가(鄕歌)로, 민요 형식의 이 노래는 이두(吏讀)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그 설화(說話)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무왕조(武王條)에 실려 전한다.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薯童房乙(서동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야의묘을포견거여)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맛동(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1. 요점 정리

• 작자 : 백제 제 30대 무왕, 서동(薯童)/ 양주동 해독
• 연대 : 신라 진평왕 때(599년 이전)
• 갈래 : 4구체 향가
• 구성 : 1-2행 시상의 발단/원인, 3-4행 서동과의밀애/결과
• 성격 : 참요[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민요. 신라의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암시한 〈계림요〉,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목자요(木子謠)〉, 미나리와 장다리로 인현 왕후와 장 희빈을 관련지어 노래한 〈미나리요〉 따위가 여기에 속한다.예언, 암시하는 노래], 동요
• 표현 : 풍자적, 직설적
• 제재 : 선화 공주와의 사랑
• 주제 : 선화공주의 은밀한 사랑, 선화공주에 대한연모의 정
• 의의 : 현전(現傳)하는 가장 오랜 향가, 4구체 향가가민요나 동요로 정착한 유일한 노래
• 기타 : 이 노래의 배경 설화로 서동 설화가 있고, 백제의 익산 미륵사의 연기설화에도 서동 설화와 비슷한것이 있다.
• 출전 : 삼국유사(三國遺事)
 

2. 내용 연구

1-2행 : 시상의 발단/ 원인
선화공주님은/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3-4행 : 서동과의 밀애/ 결과
맛동(서동) 도련님을/밤에 몰래 안고 간다.
 
• 선화공주(善化公主)니믄 : 선화공주님은. 선화공주는신라 제 26대 진평왕의 셋째 공주
• 嫁良[얼어] : 정을 통하여. '얼다'는 '시집가다, 혼인하다, 정을 통하다'의 뜻
• 맛둥바 : 맛둥 도련님을. 서동이를. 서동(薯童)을맛둥으로 읽었다. 서(薯)란 마를 말하는 것으로 서동을마 파는 소년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 夜矣 : 밤에, 밤(명사)+에(처소부사격조사)
• 卯乙[몰] : 몰래(부사)
 

3. 이해와 감상

백제의 서동(薯童 :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한국 최초의 4구체(四句體) 향가(鄕歌)로, 민요 형식의 이 노래는 이두(吏讀)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그 설화(說話)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무왕조(武王條)에 실려 전한다. 정교한 10구체 향가와는 달리, 4구체의 민요 형식에 의한 직설적인 표현으로초보적인 표현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 노래는 선화 공주의 비행을 발설하여왕궁에서 쫓겨나게 함으로써 마침내 자기의 아내로 맞을 수 있게 한일종의 참요(讖謠 : 시대적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민요.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건국을 암시한 〈계림요〉,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목자요(木子謠)〉, 미나리와 장다리로 인현 왕후와 장 희빈을 관련지어 노래한 〈미나리요〉 따위가 여기에 속한다.)이다. 내용적으로는 자신의 잠재적갈망(渴望)과 욕구를 상대방의 것으로 전도(거꾸로되거나 거꾸로 함)시켜 진솔한 감정을 표출하고있어서 '남몰래 얼어 두고'란 표현도 진부하거나 천박해 보이지 않는다.
 
이 노래의 표기 체계는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기록하던 향찰(鄕札) 표기이므로 정확한 해독은 어렵다. 우리는 이 노래가안고 있는 동요적(童謠的)인 단순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이 노래는 설화 그대로 어떤 재기 발랄하고 야심 많은 한 젊은이가 몽환적(夢幻的)인사랑을 재치와 기지로서 현실로 실현시키는, 한 영웅의 일대기 가운데에서차지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도 있다.
 
내용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찾아간다는 것이었는데, 이 노래가 대궐 안에까지 퍼지자 왕은 마침내공주를 귀양보내게 되었다. 이에 서동이 길목에 나와 기다리다가 함께백제로 돌아가서 그는 임금이 되고 선화는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 ·백제 두 나라의관계로 보아 이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부정하는 설이 있다. 가장타당한 설은 익산(益山) 미륵사(彌勒寺)의 연기(緣起) 설화로서, 백제의멸망 후 미륵사 승려들이 절을 구하고자 신라와 미륵사가 관련이 있는것처럼 지어낸 설화라는 것이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해석을 하면 서동의 잠재적갈망을 선화 공주란 상대편에 전가시킨 것이다. 따라서, 주객을 전도시킨데 수사적인 특징이 있다. 한편으로는 국경을 뛰어넘고 신분의 귀천을초월한 낭만적인 한 소년의 사랑이 이 노래에 응집되어 있으며, 그 꿈이극단적인 장애없이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어느정도 짐작할 수도 있으나, 이 노래에서는 동요적인 단순성은 발견해도어떤 깊은 문학적 배경은 의식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설화의내용에서처럼 한 영웅의 일대기가 차지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 있다는해석이 있으며, 서동이 고난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다는 영웅 설화의공식적인 과정을 밟는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서 영웅의 일생은 결혼에의해서 성공의 실마리가 풀린다.
 

4. 심화 자료

• 서동요(薯童謠)
 
신라 진평왕 때 백제 무왕이지었다는 향가. 4구체. 향찰 ( 鄕札 )로 표기된 민요로 보는 견해도있다. 이 노래는 ≪ 삼국유사 ≫ 기이(紀異) 제2 무왕(武王)조에 수록되어있는 서동설화(薯童說話)에 끼어 전한다. 이 설화에 의하면, 이 노래는백제 무왕이 소년시절에 서동으로서 신라 서울에 들어가 선화공주를얻으려고 지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서동설화를 여러모로분석 · 검토한 결과 그 설화의 역사적 주인공은 무왕이 아니라백제 동성왕이라는 주장이 나왔는가 하면, 또한 동성왕도 아니고 신라의원효 ( 元曉 )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최근에는 이 서동설화를익산미륵사연기전설(益山彌勒寺緣起傳說)로 취급하면서 그 역사적 주인공은백제의 무령왕이지만, 그 설화상의 민담적 주인공은 서동(薯童)이라는주장도 나왔다.
 
사실, 이 설화는 서동과선화공주의 애정담을 핵심으로 하는 민담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 허구적 주인공 서동이 백제 동성왕이나 무령왕, 혹은 신라 원효 등이지닌 소년시절의 모습이나 이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들 역사적 인물중 어느 누구도 이 노래의 작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 서동 ’ 은 서예(薯 岳 , 마)를 비롯한 산약과 산나물을 캐어 생활을 이어가던 소년의 무리를지칭하던 보통명사로서 초동(樵童) · 목동(牧童) 등과 같은 종류의집합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 서동요 〉 는 서동들에얽힌 이야기,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노래로 전승된 것이라 하겠다.
 
즉, 〈 서동요 〉 는 서동들의노래로서 구체적인 작자를 찾을 수 없는 공동으로 제작되어 전승된 민요적성격을 띠고 있다. 이 노래의 해독은 다음과 같다.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남몰래 사귀어 두고(他密只嫁良置古)
서동 방을(薯童房乙)
밤에뭘 안고 가다(夜矣 瑩 (卯)乙抱遣去如)
 
그동안 이 노래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이제 올바른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이 노래는 직설적으로 표현되었다지만, 그 표현수법에 있어서 특유한비법을 활용하였다. 〈 서동요 〉 는 무엇인가 감추는 표현으로 일관되어, 이른바 감추는 묘법, ‘ 감춤의 미학 ’ 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 은 눈부신 존재로 절대적 주인공의 위치에서 군림하고 있다. 그러한공주가 ‘ 남몰래 얼러(他密只 嫁良) ’ 바로 몰래 간통하는 사건을일으킨다. 여기서 그녀는 절대적인 요정으로부터 사랑의 화신으로 변모되면서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조용히 감출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공주는 그 상대를감추어 ‘ 두고(置古) ’ 내어 놓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오롯하게 확보하고 있는 안정감을 드러낸다. 그런 가운데에 ‘ 서동방(薯童房 : 서동의 방) ’ 이 갑자기 등장하여, 그 공주의 상대가 겨우 서동이요그들의 야합처가 바로 그의 방인 것을 확인시킨다.
 
공주는 금지옥엽의 몸으로미천한 서동과 결합하여 파격적인 충격을 주면서, 그가 숨어 있는 밀실로찾아간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과 만남의 현장을 감추기 위하여. ‘ 밤에(夜矣) ’ 비로소 행동을 개시한다.
 
이 밤에 공주는 ‘ 무엇을(卯乙) ’ 가지고 갔는가. 이것은 이 노래의 큰 관심거리로서 그 ‘ 무엇 ’ 의 실상을 끝까지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다. 이 노래의 함축미와 신비성이그 ‘ 무엇 ’ 에 매여 있다.
 
이 공주는 그 ‘ 무엇 ’ 을 ‘ 안고(抱遣) ’ 가는 것이다. 이 ‘ 안고 ’ 는 그 대상을 가장소중히 여기고 직접 교감하면서 가슴 속 깊이 감추고 있음을 명시한다. 드디어 공주의 ‘ 가다(去如) ’ 로 이 노래는 끝난다.
 
그것은 공주가 ‘ 간다 ’ 는 긍정적 종결이 아니고, ‘ 가는가 ’ 라는 의문형 종결이다. 이 노래에일관되는 감춤의 문맥으로 보아서 감탄성 의문형이라야 맞는다. 마지막어미를 이런 의문형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노래는 긴 여운을 남기며끝까지 감춤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 사랑의 주사 ’ 로 승화된 것이다.
 
이 노래는 서동설화의 내용을절묘하게 집약하였으며, 산문전승의 존재와 전개를 좌우하는 ‘ 사랑의정화 ’ 로서 문학성과 주술성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그것 자체만을 분리시켜 별도로 고찰하기보다는 그 산문전승의 문맥위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鄕歌麗謠新釋(池憲英, 正音社, 1946), 增訂古歌硏究(梁柱東, 一潮閣, 1965), 鄕歌의 文學的硏究(金烈圭, 西江大學校人文科學硏究所, 1972), 薯童說話에 對한 新考察(李丙燾, 歷史學報 1, 1953), 쑈뚱노래(金善祺, 現代文學 151, 1967), 薯童謠考(金炳旭, 百濟硏究 7,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76), 薯童謠硏究(金鍾雨, 三國遺事와 文藝的價値解明, 새문사, 1982), 薯童謠硏究(黃浿江, 新羅文化 3 ·4,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87), 薯童謠의 文學的 實相(史在東, 韓國文學流通史의 硏究 Ⅰ , 中央人文社, 1999).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배경 설화
 
제 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곳의용과 교통(交通)하여 아들을 낳았다.
 
미륵사지탑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국인(國人)이 이에 의하여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갔다. 동네 아이들에게마를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여러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얼어 두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라 하였다. 동요가 극간(極諫)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장차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처로가는데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며 시위(侍衛)하여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지는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여 그를 따르게되었다.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맞는 것을 알았다.
 
백제로 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공주가 "이것은 황금이나 가히 백 년의 부를 이룰 것이다."하니, 서동은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곳에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 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니 지금그 소재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 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여 금을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용화산 사자사(獅子寺)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옮길 방책이니 금을가져오라."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중하며 항상 편지를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 서동 (薯童)
 
?∼641(무왕 42). 백제 제30대 왕. 재위 600∼641. 이름은 장(璋) 또는 무강(武康)·헌병(獻丙)·일기사덕(一耆篩德).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간에 내분이 일어났으며 왕실 권위가 약화되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들이 무왕의 즉위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던 것 같다. 41년간에 달하는 무왕의 재위 기간에 왕권이 안정되었는데, 이는 무왕 재위 기간 동안 집요하게 추진해 온 신라 침공과 같은 정복 전쟁에서의 승리에 힘입은 것이다.
무왕은 신라 서쪽 변방을 빈번하게 침공함으로써 백제군이 낙동강 방면으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 결과적으로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적인 유착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나,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정복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무왕 대의 백제는 국제 문제에서도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무왕은 어느 한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취하려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강화된 왕권의 표징으로, 또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궁(泗歷宮)을 중수했으며,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 호수와 그 안에 인공 섬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같은 해 그 무렵 백제의 중심적인 사원으로서 웅장하고 화려했다는 왕흥사(王興寺)도 완성되었다. 이 절은 600년 법왕이 착공한 뒤에 죽자, 아들인 무왕이 30여 년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왕흥사는 절 이름에서 암시하듯이, 왕이 건립을 주도했고 몸소 불공을 드린 곳으로서 왕실의 원찰(願刹) 또는 왕과 특별히 밀착된 사원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역사는 왕권의 안정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므로 귀족 내부의 분쟁 요인 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되는 것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음을 뜻한다. 대왕포(大王浦 : 충청남도 부여 백마강에 지금도 그 지명이 전함)라는 지명과 함께 전하는, 무왕과 신하들이 그 곳에서 흥겹게 어우러져 즐겼다는 고사는 표면적으로는 태평한 백제 지배층의 상황을 보여준다.
무왕은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재위 후반기에는 익산 지역을 중시해 이 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궁성이 될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이 곳에 축조하는 동시에, 흔히 궁성 안에 있어서 내불당의 성격을 띠는 제석사(帝釋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또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동방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 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했던 것이다. 비록 익산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옥천회전(沃川會戰)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이 무왕 때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전제 왕권을 구축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무왕 때의 백제는 정복 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사비궁의 중수나 왕흥사·미륵사의 창건 같은 대규모 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비시대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위치에 있는 무왕은 흔히들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 설화 속의 무강왕과 관련 짓고 있다. 그런데 서동 설화는 여러 시대의 전승들이 복합,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커서 단순한 일원적 해석은 위험하다.
예컨대 동성왕과 관련된 혼인 설화와 무왕 대의 미륵사 창건 연기 설화 외에 무령왕이 즉위 전 익산 지역의 담로장(首魯長)으로서 이 지역을 다스린 데서 생겨난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라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무왕의 능은 익산시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려시대에 이미 도굴된 적이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 능산리 고분의 묘제와 일치함이 밝혀졌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大東地志, 觀世音應驗記, 日本書紀, 王宮坪城에 대한 硏究(宋祥圭, 百濟硏究 7, 1976), 薯童說話에 관한 新考察(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泗歷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盧重國, 韓薄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扶餘陵山里傳百濟王陵·益山雙陵(有光敎一, 艮原考古學硏究所論集 4, 197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서동요’에 이한 이설
 
이 노래의 사연으로 보아 이는 무왕의 시대의것은 아니고 薯童(맛동)-동성왕시대의 것이라는 설(이병도)과 백제가망할 무렵에 신라 군졸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하여 퍼뜨린 연기설화라는설(황수영)
【작성】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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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서동요(薯童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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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