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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
2019년 6월
2019년 6월 4일
안민가(安民歌)
2019년 6월 2일
about 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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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5년 안민가(安民歌) 충담사(忠談師) 향가(鄕歌)
【학습】
(2019.06.04. 17:01) 
◈ 안민가(安民歌)
신라 경덕왕 24년(765년)에 충담사가 지은 10구체 향가
목   차
[숨기기]
임금(군)은 아버지요
신하(신)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민)은 어린(어리석은)아이로고
하실진댄 민이 사랑을 알리라.
대중을 살리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이를 먹여 다스릴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할진댄 나라 보전할 것을 알리라.
아아, 군답게 신답게 민답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을 지속하느리라.
 
(김완진 해독)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로고 하실지면
백성이 사랑을 알리이다.
구물거리며 살손 물생이
이를 먹여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될 줄 알지어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나이다
 
(양주동 해독)
 

 
 

1. 요점 정리

 
• 작자 : 충담사
• 갈래 : 10구체 향가
• 연대 : 신라 경덕왕 24년(765년)
• 성격 : 교훈적, 유교적, 잠요적(교훈과경계의 내용을 담은), 권계적[잘못함이없도록 타일러 주의시킴], 일부에서는 주술적, 불교적['안민가'의사상적 기반과 관련해서는 주술, 불교, 유교로 보는 견해가있습니다. 주술적이라는의미는 경덕왕이 전통적인 주력(呪力)관념을가지고 치국의 방법을 노래로 짓게 하였다는 것이고, 불교적이라는말은 경덕왕이 불교를 숭상하였고, 왕권 강화책으로서 화엄[만행(萬行)과만덕(萬德)을 닦아 덕과(德果)를 장엄하게 함]사상을 신봉하였다는점과 작가가 승려라는 것과 연관지어 볼 때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 작품의 내용 자체에 주목할 때 이 노래의 사상적기반에 가까운 것은 유교라고 보는 견해가 제일 타당하다고볼 수 있음.]으로봄
• 어조 : 논리적, 직설적 어조, 진지하고 간곡하게 충간하는 어조
• 구성 :
군, 신, 민의 관계(위정자의 善政) - 비유적, 애민사상
민본주의를실천하는 근본 원리 - 직설적, 민본사상
군, 신, 민의 바른 관계 - 다워야 함 - 직설적, 유교적 정명 사상
 
• 표현 : 수사법이 간결하고 소박하고, 친근한사실을 들어 비유하여 설득력과 교훈성을 얻고 있으며, 충간하는신하의 태도가 드러나고 있다.(은유법의 사용 - 군신민의 정치, 사회적 계층을 부모자로 이루어진 가정의 기본적인인륜 관계에 비유함. )
임금 / 아버지 / 나라를 이끌어갈 책임이 있음
신하 / 어머니 / 백성을 사랑으로다스려야 함
백성 / 어린 아이 / 임금과 신하를믿고 따라야 함
 
• 사상 : 민본주의 사상, 유교적 정명사상
• 주제 : 치국 안민(治國安民) 또는 국태 민안(國泰民安)의도(道)와 그 이상(理想) - 가족과 같은 사랑의 유대 강조 / 나라를 다스리는 올바른 자세
• 의의 : 현전하는 향가 중 유일한 민본적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목적성이 강한 작품임
 
 

2. 내용 연구

 
임금(군)은 아버지요
신하(신)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민)은 어린(어리석은)아이로고[가정법]
하실진댄 민이 사랑[백성을다스리는 방법의 핵심]을 알리라.
대중을 살리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이를 먹여 다스릴러라.[당면한사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백성들의말로 인용법]
할진댄 나라 보전할 것을 알리라.
아아, 군답게 신답게 민답게[계급별책임 완수와 화합의 중요성 강조]
한다면 나라가 태평[궁극적인지향점]을 지속하느리라.
 
(김완진 해독)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로고 하실지면
백성이 사랑을 알리이다.
구물거리며 살손 물생이
이를 먹여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될 줄 알지어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나이다
 
(양주동 해독)
 

 
임금은아버지요
신하는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어린아이라고 하실진대
백성이사랑받음을 알 것입니다.
구물거리며사는 백성
이를먹여 다스리어
이땅을 비리고 어디에 갈 것인가 할 때
나라안이 다스려질 것을 알 것입니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임금을 아버지, 신하를 어머니, 백성을어린 아이로 바꾸어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해서 백성을 자신의 자식을양육하는 것처럼 잘 보살펴야 백성들도 위정자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것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유교의 부자 자효 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국가적 의미의 충이 가정 내에서의 효로부터 확장된 것임을 암시하고있다. - 군신민 관계를 가족 관계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가족적인 사랑에 기반한 치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5행은 해독상 논란이 많은 부분으로교과서의 해석을 따를 때는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이란 모든 생물들을의미하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백성들을 의미하고 있다. 백성들은이식위천(以食爲天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음 - 먹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여긴다는 말)하므로 먹는 문제가 가장 절실하다는 것은 맹자의 말을빌리지 않더라도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일이다. 그래서 백성에게는 먹는문제가 제일 절실하다. 이렇게 백성의 기본적 의식주 문제를 우선적으로해결해 줄 때 백성들은 나라를 최고로 여기고, 버리지 않게 되므로 위정자들은정치를 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말은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말에서도 알 수 있다.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백성들 / 이들을 먹여 다스리어
- 백성들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약한 존재로 표현하였으며, 민본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백성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왕의 기본 소임을 말하고 있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한다면 / 나라 안이 유지될 것을 알 것입니다.
- 백성들이 '이 나라를 버리고 어디에 가겠는가?'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10구체 향가에서 9행, 10행은 낙구또는 격구라 하며 반드시 감탄사로 시작된다. 이 구절의 '군다이 신다이민다이'는 논어의 '君君臣臣父父子子(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의 구절을 원용한 것으로제각기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자기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때 나라가태평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임금이 임금다워야 한다고 말하는구절에는 충간의 의미가 내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명분과 실리가일치해야 한다는 유교적 정명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 군신민이 각자의 본분을 지킬 때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이 편안해 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3. 이해와 감상

안민가는 다른 향가와 달리 그 내용이 유교적이라는점이 특이하다. 다른 대부분의 작품들은 주로 불교적이었다는 점에서안민가가 유교적이라는 내용을 가지고 국태안민의 이념을 밝힌 것은특이하다. 개인적 서정보다는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고자 한 현실실용적인노래로, 유교사상과 불교의 정법 사상이 복합되어 있다. 아무래도 국가체제를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교적인 이념보다는 유교적 충효사상이 더 타당했다는점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경덕왕 때에는 사회적으로는 천재지변이잦아 농사가 어려웠고 정치적으로는 김양상의 도전에 의해왕권이 위협당하는 심각한 국가적 위기가 있었다. 이에굶주려 유민이 된 백성들이 신라를 떠나 일본으로 이주하는등 민심이 동요되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유교적 정치이념이 대안으로써 자리잡아 가던 시기였다.
 
감상2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에실려 전한다. 노래를 지은 유래는 다음과 같다. 경덕왕 23년(765) 3월 3일 왕이 귀정문(歸正門)에 올라 신하들에게 거리에 나가 훌륭한 스님을한 분 모셔 오라 하였다. 신하들이 한 명승(名僧)을 모셔왔으나, 왕은자기가 찾는 스님이 아니라 하여 돌려보내고 다시 모셔온 분이 바로충담사였다.
 
왕은 그가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지은 스님임을 알고 "안민가(安民歌)"를 지으라 하였다. 이에충담사가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이 기꺼이 여겨 왕사(王師)에 봉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고 한다. 이 때 그가 지은 향가 "안민가"는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각각 자기 본분을 지키면 나라가 태평하리라는소박한 내용으로, 유교 사상이 짙은 노래이다.
 
향가를 지은 신라 사람들은 당시의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에는 불교가 귀족 불교로서각광을 받았고, 화랑도를 통한 심신 연마를 중요시했던 만큼, 향가를지은 사람들은 주로 불교의 승려와 화랑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향가작품이 불교를 배경 사상으로 삼은 데 비해, 이 작품만이 유일하게 민본주의(民本主義)라는유교적 통치 이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승려가 지었음에도불구하고, 그 내용이 유교적인 이상 정치에 대해 노래했다는 점이 독특하다고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쓰여질 당시에는 각종 천재지변이 민생(民生)을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신하의 도전으로 왕권이 위협받는 등 정치적으로도위기 상황이었다. 그래서 경덕왕은 충담사로 하여금 향가를 짓도록 하여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따라서 예술성보다는 교훈성이 강한 작품이되었다.
 
 

4. 심화 자료

• 안민가(安民歌)
 
신라 경덕왕 24년에 충담 ( 忠談 )이 지은향가. 10구체로 되어 있다. ≪ 삼국유사 ≫ 권2 〈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 表訓大德 〉 조에 작품의 유래에 관한 배경설화와 향찰로 표기된원문이 함께 전한다.
 
경덕왕이 3월 3일에 귀정문(歸正門) 다락 위에 올라 신하들에게 누가 영복승(榮服僧)을 데려 오겠느냐고두 의미(화려하게 옷을 입은 승려의 의미와 영화롭게 일을 해줄 승려의의미)를 가진 말을 하였다.
 
신하들은 영복승의 의미를화려하게 옷을 입은 승려의 의미로 보고, 마침 위풍이 있는 한 대덕이그 앞을 배회하자 그를 데려왔는데, 왕은 자기가 바라는 영승(榮僧)이아니라고 돌려보냈다. 이 과정에는 이미 왕과 신하들의 갈등이 내재해있다.
 
그 다음에 누더기옷을 입고앵통(櫻筒)을 진 다른 중이 남쪽으로부터 걸어오자, 왕이 그 중을 기뻐하며맞아, 이름을 물으니 충담이라고 하였다. 충담이 남산 삼화령(三花嶺)의미륵세존불상에게 차를 끓여 바치고 오는 길이라고 하므로 왕이 차를요청하였더니, 차의 맛이 이상하고 그릇에서 향내가 풍기었다.
 
왕이 충담의 〈 찬기파랑사뇌가 讚耆婆郎詞腦歌 〉 가 뜻이 매우 높다[其意甚高]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으므로, 이를 충담에게 물으니 과연 그렇다고 하였다.
 
이어서 왕이 백성을 다스려편안하게 할 노래[理安民歌]를 지어달라고 충담에게 요청하니, 충담은 ‘ 이안민가 ’ 를 짓지 않고 〈 안민가 〉 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여겨 왕사로 봉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이러한 유래담에서 〈 안민가 〉 는 경덕왕이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고자[理安民] 한 의도에 충담은백성을 편하게[安民] 하는 노래로 바꾸어 대답한 의도가 숨어 있음을알 수 있다. 기본 내용은 왕은 아버지요, 신하는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라고비유하고, 각기 자기 본분을 다하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향찰(鄕札)로 표기된 원가사, 그 해독 및 현대 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원문
君隱 父也/臣隱 愛賜尸 母史也/民焉狂尸恨 阿孩古/爲賜尸知 民是 愛尸 知古如/窟理叱 大 層 生以支 所音物生/此 層 麥 惡 荳 治良羅/此地 層 捨遣只 於冬是 去於丁/爲尸知 國惡支( ← 荳 ) 持以支 知古如/後句 君如 臣多 荳 ( ← 支) 民隱如/爲內尸等焉國惡 太平恨音叱如
 
② 해독
님검은 아비야/알바단 鎧 오실 어시야/일거언 얼 梨 아 羸 고/ 悧 실디 일건이 鎧 올 알고다/窟理(구리, 理窟) ○ 한흘 살이기 숌 物生(갓살, 生物이)/이흘 자압 다 基 아라/이다흘 槨 리곡 어 槪 이 니거-뎌/ 浬 디 나라아기 디니이기 알고다/後句(아야, 後句) 님검답 알바단답 일건답/ 悧 堪 愷 언 나라악 太平 梨 음 女 (양희철해독)
 
③ 현대어 풀이
임금은 아버지야!/신하는사랑하실 어머니야!/백성은 경망한 아이고(?)/하실지? 백성이 사랑할것을 알고다!/주린 배(/理窟)의 큰 것을 살리기에 있음의(/을) 물건을(/生物이)/이를먹어 다스리도다(다스려지도다)!/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져?!/할지? 나라가 디니이기 알고다!/아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현재 할것이면(현재 할 것인가는?) 나라 太平함니다! (양희철 역)
 
위 해독을 양주동 ( 梁柱東 )이나 김완진(金完鎭)의 해독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점이 드러난다. 그중의 상당수는 당시의 언어체계로 표기할 때와 당시의 우리말로 해독하느냐한자로 해독하느냐에서 나타나는 차이이다.
 
이런 것들은 그 의미 면에서는세 해독의 의미가 거의 같으나, 이 해독은 시어의 특성인 많은 중의법들을계산한 것이 차이이다.
 
그러나 중의법을 제외하고도의미와 표기가 다른 것을 보면, 위의 ‘ 窟理(구리, 理窟) ○ 한흘 ’ 은 ‘ 구릿 悧 堪 ’ 과 ‘ 구믈 ㅅ 다히 ’ 로, ‘ 살이기 숌 物生(갓살, 生物이) ’ 은 ‘ 살이기 바라 耿 菱 ’ 과 ‘ 살손 物生 ’ 으로, ‘ 자압 ’ 은 ‘ 치악 ’ 과 ‘ 머기 ’ 로, ‘ 다 基 아라 ’ 는 ‘ 다 嗜 릴러라 ’ 와 ‘ 다 嗜 라 ’ 로 해독되기도 하였다.
 
동시에 작품의 분구(分句)에서도 ‘ 悧 실디 ’ , ‘ 浬 디 ’ , ‘ 悧 堪 慨 ’ 등은 앞의 구에 혹은해당 구에 붙는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한 것으로보인다.
 
이 경우에 ‘ 悧 실디 ’ , ‘ 浬 디 ’ , ‘ 悧 堪 慨 ’ 등을 앞의 구에 붙이면, ‘ 왕이 가정혈연적인 군 ○ 신 ○ 민의 관계를 말하여 서로가 상호 사랑과 그 인식의바탕 위에서, 군 ○ 신 ○ 민 각자가 각자다우면 나라가 지켜지고 태평하다는교훈적 권고 ’ 의 의미를 갖는다.
 
동시에 ‘ 悧 실디 ’ , ‘ 浬 디 ’ , ‘ 悧 堪 慨 ’ 등을 각각 제4 ○ 8 ○ 10구에 소속시키면, 해당 행은 각각 도치구문이 되면서, ‘ 군 ○ 신 ○ 민 각자가 각자답지못하여, 군 ○ 신 ○ 민이 상호간의 사랑과 그 인식을 모르고, 악정에의해 백성이 나라를 떠나려 하고, 나라가 태평하지 못함을 책문(責問)하고그 반대의 정치를 권고하는 책난(責難)의 의미 ’ 를 가진다.
 
개인적 서정보다는 백성을다스려 편안하게 하고자 한 현실 효용적인 노래로, 유교와 불교의 애타사상(愛他思想) · 민본사상 ( 民本思想 ) · 정법사상(正法思想) · 정명론(正名論) 등이 복합되어 있다.
 
≪ 참고문헌 ≫ 三國遺事, 朝鮮古歌硏究(梁柱東, 博文書館, 1942), 鄕歌解釋法硏究(金完鎭, 서울大學校出版部, 1980), 삼국유사 향가연구(楊熙喆, 太學社, 1997), 安民歌의 理解(尹榮玉, 語文學 32, 1975). 安民歌硏究(朴魯 褻 , 新羅歌謠硏究, 正音社, 1979), 安民歌(卞鍾鉉, 鄕歌文學硏究, 一志社, 1993). - 옛글자는 깨어지는 현상이 나타남.(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君君臣臣父父子子
 
논어의 안연편에 나오는 말로 제나라 경공이공자에게 정치를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 '君君臣臣父父子子(임금은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라고하니, 경공이 말하기를 '훌륭하구나! 만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신하답지 못하고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다면비록 곡식이 있다 한들 내가 그것을 얻어 먹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 배경 설화
경덕왕이 3월 3일에 귀정문(歸正門) 다락 위에 올라 신하들에게 누가 영복승(榮服僧)을 데려 오겠느냐고 두 의미(화려하게 옷을 입은 승려의 의미와 영화롭게 일을 해줄 승려의 의미)를 가진 말을 하였다.
신하들은 영복승의 의미를 화려하게 옷을 입은 승려의 의미로 보고, 마침 위풍이 있는 한 대덕이 그 앞을 배회하자 그를 데려왔는데, 왕은 자기가 바라는 영승(榮僧)이 아니라고 돌려보냈다. 이 과정에는 이미 왕과 신하들의 갈등이 내재해 있다.
그 다음에 누더기옷을 입고 앵통(櫻筒)을 진 다른 중이 남쪽으로부터 걸어오자, 왕이 그 중을 기뻐하며 맞아, 이름을 물으니 충담이라고 하였다. 충담이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불상에게 차를 끓여 바치고 오는 길이라고 하므로 왕이 차를 요청하였더니, 차의 맛이 이상하고 그릇에서 향내가 풍기었다.
왕이 충담의 〈찬기파랑사뇌가 讚耆婆郎詞腦歌〉가 뜻이 매우 높다[其意甚高]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으므로, 이를 충담에게 물으니 과연 그렇다고 하였다.
이어서 왕이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할 노래[理安民歌]를 지어달라고 충담에게 요청하니, 충담은 ‘이안민가’를 짓지 않고 〈안민가〉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로 봉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이러한 유래담에서 〈안민가〉는 경덕왕이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고자[理安民] 한 의도에 충담은 백성을 편하게[安民] 하는 노래로 바꾸어 대답한 의도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 내용은 왕은 아버지요, 신하는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비유하고, 각기 자기 본분을 다하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 민본사상(民本思想)
민심(民心)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사상.
 
〔연 원〕 민본이라는 말은 ≪서경≫ 하서(夏書)에 있는 ‘민유방본(民惟邦本)’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앞뒤의 문맥에서 보면, 그 내용은 “백성은 가까이 친애할 것이나 하대해서는 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안녕하다. ”는 것이다. 이는 우왕(禹王)의 훈계로서 그의 다섯 손자들이 나라를 잃고 한탄하며 부른 노래 속에 담겨 있다.
여기에 우왕의 나라에 대한 우환의식(憂患意識)과 백성에 대한 경외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는데, 우국경민(憂國敬民)의 정신이 ‘민본’의 직접적인 계기로서 촉발된 것이라 하겠다. 유교 경전 속에 나타난 민본의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이 나타난다.
첫째,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본이다. 이는 ≪서경≫의 주서(周書)에서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백성이 보고 듣는 그 자체이다.”라는 말과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는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는 말에 의거한다.
이는 천(天)과 민(民)의 일치를 의미하는데, 오히려 백성의 판단과 의사가 하늘의 판단과 의사에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맹자(孟子)는 천자의 자리가 “하늘이 준 것이요, 백성이 준 것이다.”고 함으로써 백성이 모든 정치 행위의 주체임을 나타내었다.
둘째, 정치적 객체로서의 민본이다. 이는 백성을 정치적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서, 하늘이 백성을 낳고 왕을 세워 그로 하여금 통치를 대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정(仁政)·덕치(德治)·왕도(王道) 등의 용어에서 파악되는 위민사상(爲民思想)은 모두 백성을 정치적 대상으로 객체화한 내용들이다.
셋째, 국가 구성 요소로서의 민본이다. 맹자는 국가의 요소를 토지·인민·정사(政事)라 했고, 또한 백성과 국가와 군주 가운데 백성을 가장 존귀한 존재로 인식하고 군주를 가장 가볍게 평가하였다. 백성 없이 국가가 없고 정치적 목적 또한 실현되지 않는다.
이는 백성이 국가 구성의 기반이요 목적이며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맹자의 민귀군경설(民貴君輕說)은 민본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 성〕 민본사상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하면, 결국 민심(民心)을 근본으로 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에게는 ‘민심이 천심’이라는 의식이 잠재해 왔다. 그러므로 민심과 천심이 일치할 때 민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유교의 정치사상에서 핵심이며 본질이 된다. 민본사상은 어디까지나 백성과 더불어 함께 하며(天人相與), 이념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선(善)에 이르도록 지향하고, 조직적으로는 천하를 통일된 대일가(大一家)로 체계화하려는 데 목적을 가진다.
이 때 하늘과 그 상대자인 백성의 화합, 즉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을 백성이 보고 듣는 것’으로 삼아, 결국 상하가 통달되는 천민합일의 새로운 매개자가 요구된다. 여기서 군주라는 새로운 개념이 도입된다. “군주는 하늘이 주는 자리요, 동시에 백성이 주는 자리이다.”고 맹자가 언명한 바와 같이, 하늘과 백성이 화합해 양자의 중간자로서 설정된 것이다.
이 군주에게 하늘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리도록 천명이 내려지고, 그로 하여금 백성의 부모가 되게 하여 만민을 통치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늘·군주·백성은 통일된 한 집〔家〕의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른 바 ‘천하국가’이다. 이 양상은 원래 가정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천하국가로 발전되는데, 이 때는 온 누리가 크게 통합되어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이러한 세계의 이상적 모습이 평천하(平天下)의 세계이다.
그러나 만약 중간자인 군주가 민심과 천심을 거역하고 학정을 한다면, 하늘과 백성은 다시 화합, 그 자리(王位)를 빼앗고 다른 유덕자(有德者)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는 곧 민본사상에 입각한 혁명사상이다.
이와 같이, 민본사상은 그 정치적 행사가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는 사상이므로, 학문과 교육을 중시하는 교학정치(敎學政治)와 근본을 지키고 백성과 더불어 즐기려는 예악정치(禮樂政治)를 내포하는데, 이것은 왕도(王道)의 내용이기도 하다.
 
〔전 개〕 민본에 대한 우리 민족의 잠재 의식은 통치에서 민심이 주체로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로부터 이제까지 대부분의 치자(治者)가 백성을 경외하며 민의를 수렴, 민생을 위해 각고(刻苦)한 것도 따지고 보면 백성이 근본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민심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민본적 토양은 고조선의 ‘홍익인간’의 이념과 ‘제세이화(濟世理化)’라는 단군왕검의 기본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엿보인다.
말하자면, 만민을 널리 유익하게 하며, 합리적 교화로 세상을 구제하려는 것으로, 여기에 위민 의식이 깃들어 있다고 하겠다. 이는 우리 민족의 근원적 국가 이념이기도 하였다.
≪조선사략 朝鮮史略≫ 단조기(檀朝紀)에는 “나랏 사람들이 신인(神人)을 왕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단(檀)이라 정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나랏 사람들이 왕을 추대했다는 표현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본보기요 선구적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민본사상의 근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고대 부족국가로부터 차차 국가형태가 확대, 발전되면서 신라가 민주적 화백제도(和白制度)를 운영하거나, 고구려가 태학(太學)을 세우고 국가의 인재들을 양성하며 유학을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근본 원리로 수용한 것도 민본사상의 기틀을 다진 것이라 할 것이다.
물론, 그 뒤 최고 학부로서 통일신라의 국학(國學), 고려의 국자감(國子監), 조선의 성균관(成均館) 등의 국립대학을 통해 문화를 체계화, 이론화하며 백성을 교화한 것도 모두 국가 발전과 중민(重民)·애민 의식에 입각한 국책이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의 세종은 예악 정치를 실현하고자 〈여민락 與民樂〉이라는 노래를 제작,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기고자 했으며, 훈민정음을 반포해 백성들을 일깨우고자 했다는 점에서 위민 의식이 충만한 민본사상의 실천자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역사 속에는 민본사상에 의한 정치적 이론과 실천이 그 축을 이루며 면면히 이어와 민족적 기반이 되었다. 그것은 민생에 관한 논의요, 민심에 따른 논리이며, 위민의 정치 행사인 것이었다.
유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에서, 그 정명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민본사상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민본사상에 입각하여 통치한 시대는 평화가, 민본사상을 잊고 힘으로 지배한 시대는 혼란이 있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학자 이황(李滉)·이이(李珥)·조헌(趙憲)·정약용(丁若鏞)의 민본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황 이황의 정치사상은 주로 왕도정치에 기반을 둔 성학(聖學)과 제왕지학(帝王之學)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황의 민본사상도 성학에 근거해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에 나타난 천민합일사상으로 천인의 향합(響合)이 왕의 대통(大統)을 계승하는 근거임을 밝힌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학십도 聖學十圖≫의 서문에서 강조한 경민사상(敬民思想)으로서, 경을 마음의 주재자로 보고 성학이 시종일관 이루어질 수 있는 까닭임을 설명한 것이다.
양자는 모두 성학을 돈독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우려는 이황의 이상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지만, 이는 유교에 나타난 이제삼왕(二帝三王)의 방법을 모범으로 삼으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천인향합(天人響合)으로 하늘과 백성이 일치된 상태를 가지고 왕에 대한 신임을 내림으로써 하늘·왕·백성의 삼자가 합일된다는 민본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우왕의 우국경민(憂國敬民)의 정신과 같이 왕의 경(敬)이 성학·제왕지학의 시종일관한 요체가 된다고 함으로써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중민·애민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 이이 이이는 〈옥당진시폐소 玉堂陳時弊疏〉에서 ≪서경≫의 민유방본을 인용해 “옛날 성왕은 반드시 백성들의 귀와 눈을 자신의 귀와 눈으로 삼아 민의를 모두 파악하였다. 그리고 신하는 그 직책에 따라 옳고 바른 것을 진술하게 하고, 상인들까지 시장이나 노상에서 비판하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간관(諫官)이었다.”고 하여 민본사상을 표출하였다.
그의 민본사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면 공론(公論)과 양민(養民)과 혁구경신(革舊更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에게 공론은 나라의 원기(元氣)였다. 그리고 그 소재는 국시(國是)에 있으며, 발하는 모든 것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공론은 막을 수 없고, 다만 일반적 정세에 따라 국시, 즉 국가 이념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론이 막혀 민심이 흉흉해 뒤끓는 듯하다면 곧 붕괴될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이이에 의하면, 공론은 민심에 의해 백성이 모두 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함이요, 다툴 필요없이 백성이 모두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함이니 곧 국시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공론이 조정에 모아질 때 나라는 잘 다스려지지만, 만약 항간에 흩어져 있다면 나라는 어지러워질 것이며, 양쪽에도 없다면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로(言路)가 열리고 닫힘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좌우된다고 했으니 역시 민본사상의 핵심을 설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양민 즉 민생에 관한 문제이다. 이이는 정치적 질서의 확립은 양민한 연후라야 가르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그의 정치적 사고가 정치현실의 구체적 상황을 문제시하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상황 인식(양병설 등)을 기초로 하여 구축한 하나의 정치원리인 것이다.
이는 공자(孔子)의 이른바 “넉넉히 하면서 가르친다.”는 말이나, 맹자의 항심(恒心)에 앞서 항산(恒産)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 민생 문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셋째는, ‘혁구경신’이다. 이는 모든 제도에서 옳고 그름과 이로움과 해로움을 헤아려 개혁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이는 여기서 시비와 이해의 기준은 백성의 안정이 있을 따름이라 함으로써 민본사상에 입각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이의 입장과 태도는 오로지 민생안정과 민의창달에 역점을 둔 것이며, 이러한 사상이야말로 민본사상의 본질적 내용이 아닐 수 없다.
 
(3) 조헌 조헌은 이이의 혁구경신의 정신을 계승한 개혁주의자였으며, 애국사상을 이어 끝내 순국한 애국주의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1573년(선조 6)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중국의 문화를 본받아 국가의 발전을 위해 〈동환봉사 東還封事〉를 썼는데, 이이와 같이 민생의 구제를 급선무로 인식하였다.
〈동환봉사〉에서는 자신의 실학적 성격의 개혁주의와 민생구제를 위한 민본사상을 확연히 드러내었다. 이 글의 내용은 시폐(時弊)를 없애고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과, 군왕의 사사로운 욕심을 막는 성의(誠意)를 전제한 것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 두 전제는 모두 유가의 민본사상에 근거함은 물론이다.
조헌은 당시의 습속이 오로지 향락에만 빠져, 위에 있는 자들은 백성들의 헐벗고 굶주림을 구제하기는커녕 낭비를 일삼아 나라의 근본을 한없이 위태롭게 한다고 하여, 관리의 부패와 태만을 비판하였다.
조헌은 이 모든 것이 민폐의 원인임을 지적하고 이를 제거하려는 개혁의지를 드러내었다. 또한 이러한 나라의 병폐가 제거되고 민폐가 없어져 백성들이 다시 소생하도록 하기 위해 임금의 사사로운 뜻을 막아 공의(公義)로써 바로잡는 ‘축군지욕(畜君之欲)’의 성의를 강조하였다.
임진왜란 때 장렬히 전사한 조헌은 그 자체가 곧 공의의 실천이었다. 주로 이이의 사상을 이어받은 그가 민생 문제를 심각한 관심으로 민폐제거를 위해 쏟은 개혁주의와 공의·공리겸합(公利兼合)의 민본사상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4) 정약용 우리 민족에서 근대 민본사상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학자는 정약용일 것이다. 대부분의 유학자들의 정치이론이 위민적 경향에 기울어져 있는 데 반해, 정약용은 백성을 적극적인 정치적 주체로 파악한 특징적 인물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민관념(民觀念)의 획기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통치자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 백성이 통치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태초에는 백성뿐이었으나 백성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통치자를 추존(推尊)한 것이라고 역설해 백성의 본래성과 근원성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서, 통치자는 본래 백성으로부터 추대된 존재라는 민본 논리를 개진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옛날에는 정치가 아래(民)에서 위(治者)로 향했으나 당시는 위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정치란 올바른 것’이라는 공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을 계승, 우리 백성들을 조화롭게 할 것(均吾民)을 되뇌면서, 부·토지·혜택 등의 분배에서 백성에 대한 평등성과 배분적 정의를 논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정치가 퇴폐하면 백성은 곤궁해지고 나라 또한 가난해지며 세금이 가혹해져, 결국 민심은 이탈하고 천명(天命)이 떠나버린다면서 정치의 급선무가 민본에 있음을 적극적인 원리로써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大學, 退溪集, 栗谷集, 重峯集, 茶山集, 儒敎의 民本思想에 관한 硏究(安炳周, 成均館大學校出版部, 1987). 崔秉喆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765년 안민가(安民歌) 충담사(忠談師) 향가(鄕歌)
【학습】 향가
• 우적가(遇賊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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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요(薯童謠)
【작성】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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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