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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
2019년 6월
2019년 6월 4일
풍요(風謠)
2019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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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風謠) 향가(鄕歌)
【학습】
(2019.06.04. 19:28) 
◈ 풍요(風謠)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지은 작자 미상의 4구체(四句體) 향가(鄕歌). 《양지사석가(良志使錫歌)》라고도 한다.
목   차
[숨기기]
來如來如來如 (래여래여래여)
來如哀反多羅 (래여애반다라)
哀反多矣徒良 (애반다의도량)
功德修叱如良來如 (공덕수질여량내여)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다여
서럽다우리들이여
功德 닦으러 오다
(양주동역)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서러운 이 많아라.
서러운 중생의 무리여
공덕 닦으러 온다
(김완진역)
 

 
 

1. 요점 정리

• 지은이 : 미상
• 연대 : 선덕여왕(632~647)
• 형식 : 4구체
• 주제 : 노동하면서 부르는 불교적인 노래
 
 

2. 내용 연구

• 공덕
① 착한 일을 하여쌓은 업적과 어진 덕.공덕을 쌓다/공덕이 높다/공덕을 칭송하다. ② 불교에서는 좋은 일을 행한 덕으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능력. 종교적으로 순수한 것을 진실(眞實) 공덕이라 이르고, 세속적인 것을부실(不實) 공덕이라 한다.
 
 

3. 이해와 감상

신라시대 작자 미상의 4구체 향가. ≪삼국유사≫ 권4 ‘양지사석(良志使錫)’에 실려 있다. 영묘사(靈廟寺)의 불상을 만들 때 그 일을 도와주려고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지어주고 일을 하면서 부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오구라(小倉進平)는 이 노래를 ≪삼국유사≫의 조목대로 〈양지사석〉이라 하였고, 양주동(梁柱東)은 〈풍요〉라 하였다. 김선기(金善琪)는 〈바람결노래〉라 불렀고, 그 밖에도 홍기문(洪起文)는 〈오라가〉, 김사엽(金思燁)은 〈오라노래〉라 하였다.
≪삼국유사≫에 사용된 ‘풍요’라는 명칭은 노래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민요라는 노래성격으로 지칭한 것이다. 〈풍요〉란 민요라는 뜻으로, 성중의 남녀들이 불렀던 민요가 바로 이 노래이다. 이 노래와 관련되는 연기설화는 다음과 같다.
 
〔연기설화〕
석 양지(良志)의 조상이나 고향은 알 수 없고, 오직 그 행적이 선덕왕 때에 있었다. 석장(錫杖) 끝에 베 주머니를 걸어 놓으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가 보시하는 집에 가서 흔들어 소리를 내며, 그 집에서 알고 공양미를 넣어서 자루가 차면 석장이 날아서 절로 돌아왔으므로 석장사(錫杖寺)라 하였다 한다. 신기함이 대개 이와 같이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재주가 있었다.
또한 문장이 능숙하여 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들 때 장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무엇을 다지거나 하는 일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니 이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원문 및 해석〕
 
향찰로 표기된 원가사와 그 해독 및 현대어 풀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원문 :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② 해독 : 오다 오다 오다/오다, 서럽더라/서럽다, 우리들이여/공덕 닦으러 오다(양주동 해독)
③ 현대어 풀이 : 오다 오다 오다/오다 서럽더라/서럽더라 우리들이여/공덕 닦으러 오다(최철 풀이)
 
이 작품의 해독에서 가장 큰 특징은 정열모의 것이다. 여래(如來)의 해독을 양주동, 홍기문, 김완진 등은 모두 오다, 오나, 오라 등으로 하여 비슷한 뜻으로 풀고 있는데, 정열모는 오료로 해독했다. 그리고 ‘哀反多羅(애반다라)’에서는 ‘애돌 하나’로 읽어서 서러움이 많다로 해독했다. 의미상으로는 다른 이들의 해독과 비슷하지만 해독하는 방법이 특이하다. ‘哀反多矣(애반다의)’ 역시 ‘애돌 하이’로 읽어서 문장의 끊음과 해독상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徒良(도양)’의 해석은 양주동, 홍기문, 오꾸리 등은 ‘矣徒良(이도양)’을 하나로 보아 ‘의내여’로 풀이한 반면, 김완진은 多矣(다의)와 徒良(도양)을 끊어서 중생의 무리로 해석한 점이 특이하다.
 
〔평 가〕
 
이 노래는 영묘사의 장륙존상을 만들 때 성중의 남녀들이 부른 노래로, 내용은 공덕을 닦으러 오는 선남선녀의 행렬을 통해 한없는 열(列)을 상상할 수 있는 훌륭한 비유이다. ‘온다’는 말의 연속적인 반복은 끝에 공덕을 닦으러 온다는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런 형태는 민요의 원형으로서 후대에 이와 같은 민요형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송영적(頌詠的) 성격을 지녀 음악성을 느끼게 한다.
노래 가운데 ‘서럽더라’는 믿음이 없는 현세의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노래는 현존 향가의 민요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 형태의 노래 〈서동요〉나 〈헌화가〉와 같이 신라의 향가가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려졌고 또한 그 속에는 불교의 포교적인 교리가 은연중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참고문헌≫ 朝鮮古歌硏究(梁柱東, 博文書館, 1943), 鄕歌解釋(洪起文, 평양조선국 과학원, 1956), 鄕歌硏究(鄭烈橫, 1965), 鄕歌及び吏讀の硏究(小倉進平, 192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이해와 감상1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지은 작자 미상의 4구체(四句體) 향가(鄕歌). 《양지사석가(良志使錫歌)》라고도 한다. 즉, 선덕여왕 때의 명승(名僧) 양지(良志)는 석장(錫杖:승려들의 지팡이) 머리에 포대를 걸어두면 저절로 시주(施主)의 집으로 날아가 포대가 차면 다시 날아 돌아오는 등 신이(神異)함이 많았는데,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지을 때 성 안의 남녀가 진흙을 나르는 역사(役事)를 하면서 불렀다는 일종의 불교가요이다. 이 노래를 노동요(勞動謠)로 보는 의견도 있으나, 부처의 본을 뜨기 위하여 진흙을 나르는 일을 노동이라 보기 어렵고, 한줌의 흙이라도 이토시주(泥土施主)가 되겠다는 기원에서 나온 노래라 하겠다.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풍요를 해석하고 있다.
 
영묘사 불상을 만들 때 그일을 도와주려고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지어 주어 일을 하면서부르도록 하였다 한다. 오구라(小倉進平)는 이 노래를 <삼국유사>의 조목대로 <양지사석>이라 하였고 양주동은 <풍요>라하였다. 김선기는 <바람결노래>라 불렀고 그 외에도 홍모(紅某)는 <오라가>, 김사엽은 <오라노래>라 하였다. <삼국유사>에사용된 '풍요'라는 명칭은 노래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민요라는노래 성격으로 지칭한 것이다. <풍요>란 민요란 뜻으로 성중의남녀들이 불렀던 민요가 바로 이 노래이다. 이 노래와 관련되는 연기설화는다음과 같다.
 
釋 양지(良志)의 조상이나고향은 알 수 없고 오직 그 행적이 선덕왕 때 있었다. 석장(錫杖) 끝에 베주머니를 걸어 놓으면 그 석장이 날아 절로 돌아왔으므로 석장사(錫杖寺)라하였다 한다. 신기함이 대개 이와 같이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밖에도 여러 가지 재주가 있었다. 또한 문장이 능숙하여 영묘사장륙존상을 만들 때 장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하면서 이 노래를불렀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무엇을 다지거나하는 일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니 이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양주동의해독을 보면 "오다 오다 오다 / 오다 서럽다여 / 서럽다우리들이여 / 功德 닦으러 오다"이다.
 
이 노래는 영묘사의장륙존상을 만들 때 성중의 남녀 등이 부른 노래로 내용은 공덕을닦으러 오는 선남선녀의 행렬을 통해 한없는 열(列)을 상상할수 있는 훌륭한 비유다. '온다'는 말의 연속적인 반복은 꿈에공덕을 닦으러 온다는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런 형태는 민요의 원형으로서후대에 이와 같은 민요형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송영적(頌詠的) 성격을 지녀 음악성을 느끼게 한다. 노래 가운데 '서럽더러'는믿음이 없는 현세에서의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노래는 현존 향가의 민요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 형태의 노래(서동요)나 (헌화가)와 같이 신라의 향가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려졌고 또한 그속에는 불교의 포교적인 교리가 은연중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특징이다.
 
 

5. 심화 자료

• 배경 설화
 
이 노래는 유사 권 4 民志使錫조에 다음과같이 실려 있다.
 
釋良志는 조상이며 향읍은 미상하나 선덕왕때의 사람이다. 그가 錫杖머리에 포대를 걸어 놓으면 석장이 혼자 날아가신도의 집에 이르러 흔들려 소리를 낸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알고 齊費를가득히 포대에 담아 주면 석장은 다시 날아서 돌아온다. 그래서 그의거주하는 절을 釋杖寺라 한다. 그의 신기 헤아릴 수 없음이 대개 이러하였다. 그는 잡술에도 정통하였고 문장과 필법에도 능하였다. 靈廟寺丈六三尊과찬왕상과 아울러 전탑의 기와며, 천왕사탑아래의 팔부신장과 법립사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등이 모두 그의 만들은 바요, 영묘사, 법림사두 절의 額도 그가 쓴 바이다. 또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을 만들고, 그 안에 삼천불을 만들어 안봉하여 절안에 두고 致敬하였다. 靈廟寺丈六을만든 뒤에 입정하였는데 그 때 성내의 土女가 다투어 흙을 날랐었다. 그때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다.
 
• 양지 良志 [?~?]
 
신라 선덕여왕 때의 승려 ·서예가 ·조각가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적 인물로, 기적을 많이 행하였는데 석장(錫杖)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서 시주(施主)할집에 찾아가 흔들면서 소리를 내었고, 그 집에서는 이를 알고 재(齋)에쓸 비용을 여기에 넣었으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또 “온갖 기예에 통달하여 그 신묘함이 비길 데가없었다. 전탑(塼塔)과 기와를 만들고, 벽돌에 3천불을 새겨 절 안에봉안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조소(彫塑)였다”고 쓰고 있다. 그의 작품은 흥륭사(興隆寺)·법림사(法林寺)의 사액(寺額)과사천왕사(四天王寺)의 신장상(神將像)이 전해지고 있는데도 전설적인인물로만 다루어졌다.
 
그러나 1986년 동국대학 박물관팀은 그가 창건했다는 석장사터를발굴하여, 그가 돌에 새겨넣은 연기법송(緣起法頌)의 글씨와 불탑 ·불상이새겨진 전탑 벽돌 190여 점을 출토하였다. (동아대백과사전)
 
• 노동요
 
노동을 하면서 부르는 민요. 일의 지루함을 잊고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 부르는데, ‘작업요’라고도 한다. 노동을 하면서 무슨 노래든지 부를 수 있겠으나, 민요로서 오랫동안 집단적으로 전승되어 온 노래만 노동요라고 하는 것이 관례이다.
노동요는 의식요나 유희요와 함께 일정한 생활상의 기능을 가진 기능요에 속하며, 기능요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민요는 원래 노동요에서 시작된 다음 다른 기능요로 전용되고, 일정한 생활상의 기능을 가지지 않은 비기능요로 바뀌기도 했다는 것이 유력한 견해이다.
노동요는 노동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므로 노동에서의 기능, 노동의 형태에 따른 가창 방식, 노동의 종류에 따른 구분 등의 측면에서 주로 고찰된다. 노동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민속적 관점, 음악적 관점, 문학적 관점이 아울러 요청된다.
 
[기 능]
 
노동요는 우선 노동의 효과적인 진행을 위하여 필요하다. 행동 통일을 하면서 일제히 움직여야 하는 노동을 하는 경우에는, 목도메기·보리타작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일정한 율동을 말로 되풀이해야 손발이 맞을 수 있다.
되풀이하는 말이 ‘영차 영차’, ‘에호 에호’라고 하듯이 뜻을 지니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것마저도 노동요에 포함된다. 노동요는 처음에 그런 형태로 시작된 다음 차차 사설이 붙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노동이 워낙 급박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숨 돌릴 틈이 없는 경우에는 사설이 생겨날 여지가 없다.
물레질이나 절구질을 할 때처럼 노동을 혼자서 하더라도 일정한 동작을 계속 되풀이해야 하는 경우에는 손놀림에 맞추어서 노래를 부른다. 이 때는 여음은 없고, 노래의 가락이 되풀이되며, 사설은 일하는 사람의 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노동요는 노동의 율동과 노래의 율동이 일치하지 않거나 일치할 수 없는 경우에도 필요하다. 가령 모내기·논매기·삼삼기 등의 노동은 여러 사람이 함께 하지만 각자 자기대로 손을 놀릴 따름이지 일제히 움직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노동을 할 때면 대체로 노동 진행 속도에 맞추어서 노래의 율동을 관습적으로 정해 놓고서,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노래 사설로 삼는다. 노동이 오랫동안 지루하게 계속되어도 노래를 함께 부르면 지루함을 잊을 수 있고, 육체적인 협동이기만 한 공동 노동을 정신적인 협동으로 고양하게 된다.
이처럼 노동요는 노동의 능률을 높이고, 함께 사는 즐거움을 나누는 데 있어서도 긴요한 구실을 한다. 공동 노동의 조직을 흔히 ‘두레’라고 하는데, 두레는 노래를 함께 부르는 조직이기도 하다. 길쌈은 공동으로 하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여럿이 한자리에 모여 ‘두레삼’을 삼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즐기는 것이 오랜 관습이다.
노동요는 그뿐만 아니라,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나타내 주는 구실을 한다. 매일, 농사·고기잡이·길쌈 등을 하는 데 몰두하며 조용히 앉아서 자기 생활을 되돌아볼 겨를이 없으며, 글로써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노동요를 부르는 것 자체가 예술 창작 행위로, 이미 전해지고 있는 사설에 견주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간직한 사연을 새롭게 나타내기도 한다.
노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일을 익히고, 일을 잘 할 수 있는 방도를 차리는 데 우선 관심을 모으면서 노동 행위와 자기의 의식을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하겠는데, 이렇게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보람, 또는 괴로움과 시련을 나타내는 데 노동요는 필수적인 구실을 한다.
이와 함께, 노동 행위와는 직접 관련되지 않은 것이라도 살아가는 데서 문제가 되는 경험을 하소연할 수 있게 한다. 길쌈을 하면서 시집살이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노동 형태와 노동요]
 
노동의 형태는 노동요를 부르는 사람들의 조직, 노래를 부르는 가창방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에 따라서 노동요를 구분해서 살필 수 있다.
노동의 형태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같은 동작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동작은 각기 자기대로 해도 좋은가, 일을 지휘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들이 구분되는가 아니면 누구나 같은 자격으로 일을 하는가, 공동 노동인가 아니면 개인노동인가에 따라서 나눌 수 있으며, 이러한 기준을 적용시켜 보면 몇 가지 경우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일제히 같은 동작을 하며, 누구나 같은 자격으로 일하는 공동 노동, 예컨대 목도메기 같은 것을 하면서 부르는 노동요는 사설은 없고 여음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예사이다.
여음은 오랜 관습에 따라 고정되어 있으며, 노동에 참가하면 힘들이지 않고 바로 익힐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노동요 중 가장 단순한 형태이며, 음악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자세하게 고찰할만한 내용을 갖추지 않았다.
일제히 같은 동작을 하며, 지휘자가 있어서 노동과 노래를 함께 이끌어나가는 공동 노동, 예컨대 보리타작이나 상여메기 같은 것을 하면서 부르는 노동요는 사설과 여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휘자가 선창자 노릇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후창자 노릇을 하면서 부르는 선후창의 민요이다. 선창자는 앞소리꾼 또는 소리 ‘메기는’ 사람이라하고, 후창자는 뒷소리꾼 또는 ‘받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선창자는 사설을 노래하면서 일을 지휘하는 한편 일하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하고, 후창자는 여음만 되풀이하면서 일에 열중한다.
그러면서, 보리타작을 할 때에는 선창자인 ‘목도리깨꾼’이 자기자신도 도리깨질을 하면서 모든 일을 주선하고 후창자인 ‘종도리깨꾼’은 그 지휘대로만 하지만, 상여메기를 할 때에는 선창자는 상여 위에 오르거나 앞에 서서 노래 사설로 흥을 돕기만 한다.
각기 자기대로 일을 하되, 지휘자가 있어서 노동과 노래를 함께 이끌어나가는 공동 노동, 예컨대 논매기 같은 것을 하면서 부르는 노동요 또한 사설과 여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창자는 사설을, 후창자들은 여음을 노래하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차이점은 선창자의 사설이 노동의 동작 자체를 지휘하는 것은 아니므로 노동과 관련이 없는 내용으로도 자유롭게 구성될 수 있다는 데서 발견된다. 논매기노래의 선창자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아도 그만이며, 일하는 사람들 앞에 서서 춤이라도 추면서 목청 좋은 소리로 노래사설을 잘 엮어낼 수 있으면 훌륭한 자격을 가진다.
각기 자기대로 일을 하며, 누구나 같은 자격으로 일하는 공동 노동, 예컨대 모내기 같은 것을 하면서 부르는 노동요는 사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구든지 어떤 사설을 노래 부르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부른다. 사설은 노동 행위와 직접 관련된 것이 아닐 수도 있으나, 오래 전승되어 널리 알려진 것이라야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노래 부르는 사람들이 두 패로 나누어져서 노래를 한 줄씩 주고받으면서 부르는 교환창의 형태를 택하기도 한다. 교환창으로 부르는 노래는 주고받으면 노래 한편이 끝나도록 되어 있는 짧은 형식이다.
각기 자기대로 일을 하며, 개인 노동일 수도 있는 노동, 예컨대 삼삼기 같은 것을 하면서 부르는 노동요 또한 사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개인 노동일 수 있는 것도 필요에 따라서는 함께 모여 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노래의 형태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개인 노동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부르는 사람이 듣는 사람이므로 노동의 동작에 맞추어서 가락은 고정되어 있는 편이나 사설은 자유롭게 택할 수 있다. 여럿이 한자리에서 노동을 하는 경우에는 듣는 사람들의 요구나 관심에 따라서 사설을 택하고, 제창을 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지적해야 할 사실은 노동이 격렬한 동작을 요구하면 노래는 간단한 것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고, 노동이 완만한 동작으로 이루어지면 노래는 복잡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문학적 형식을 구분하는 음보를 들어서 이 점을 설명하면, 간단한 노래가 1음보 또는 2음보로 이루어져 있다면, 복잡한 노래는 3음보 또는 4음보로 이루어져 있다.
1음보 또는 2음보로 이루어진 노래는 형식의 변이가 허용되지 않고 정해진 음보를 반드시 되풀이해야 하지만, 3음보 또는 4음보로 이루어진 노래는 더러 음보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형식이 다소 자유로운 편이다.
노동과 관련되어 이렇게 정해진 형식은 시가 율격 전반의 공통적인 기반으로 작용한다. 다같이 4음보인 노래도 모내기노래, 해녀노래처럼 두 줄 형식으로 짧게 끝나는 것도 있고 길쌈노래처럼 길게 이어진 것도 있는데, 앞의 것은 시조 형식과 대응되고, 뒤의 것은 가사 형식과 대응된다.
노동요를 문학 장르의 개념에 따라 구분해 본다면, 교술민요·서정민요·서사민요가 두루 발견된다 할 수 있다. 노동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필요한 내용을 서술하는 것은 교술민요라 할 수 있고, 일하는 사람의 느낌을 나타내는 데 관심을 가진 민요는 서정민요라 불러도 좋다.
그런가 하면, 서사민요는 완만한 동작으로 길게 이어지는 노동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에서 발견되는데, 길쌈노래가 그 예이다.
 
[노동의 종류와 노동요]
 
오래 전승되어 온 노동마다 거의 예외가 없이 노동요가 있었겠으나, 생활이 달라지면서 노동의 종류나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 노동요를 조사하고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도 있다.
노동의 종류나 방식이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데,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한 다음 그 성과를 비교하여 고찰한 업적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조건에 따른 한계는 있으나, 노동의 종류에 따른 노동요의 종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농사일을 하면서 부르는 농업노동요는 밭농사에 관한 것과 논농사에 관한 것으로 또한 심기·매기·거두기에 각기 관련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나눈 농업노동요의 종류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밭농사에 관한 노래는 강원도나 제주도 같은 밭농사 위주의 지역에서 널리 부르고 있으며, 그 밖의 지역에서는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심기노래는 밭농사의 경우에 밭갈이를 할 때 부르는 것이고, 논농사의 경우에는 못자리에서 모를 뽑아내면서 부르는 〈모찌기노래〉와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모내기노래〉이어서 대조적이다.
〈모찌기노래〉는 가지 수도 한정되어 있고 널리 부르지 않으나, 그냥 ‘모노래’라고도 하는 〈모내기노래〉는 논농사를 하는 고장이면 어디서나 아주 다채롭고도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다. 거두기노래는 밭농사 쪽의 〈보리타작노래〉만, 〈밭갈이노래〉나 〈밭매기노래〉가 없는 고장에서도 널리 전승되고 있고, 논농사 쪽의 것은 발견되지 않는데 원래부터 그랬던가는 의문이다.
어업노동요는 농업노동요만큼 풍부하지 않다. 〈배젓기노래〉·〈고기후리기노래〉·〈그물당기기노래〉 같은 것이 그 예이며, 〈그물당기기노래〉는 그물을 손으로 당기면서 부르는 것과 기계로 당기면서 부르는 것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주도의 〈해녀노래〉도
어업노동요의 한 갈래라고 보아야 하겠으나, 노동을 하면서 부르는 것은 아니고 노동을 하는 사이에 부른다는 점이 특이하다. 주로 남자들이 하는 그 밖의 여러 형태의 노동은 합쳐서 잡역이라고 부를 수 있고, 이에 따라서 잡역노동요라는 커다란 항목을 설정해도 좋다. 가마·목도·상여 등을 메고 가면서 부르는 운반노동요, 땅을 다지고, 말뚝을 박고, 달구질을 하면서 부르는 토목노동요,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꼴을 베면서 부르는 채취노동요 같은 것들이 이에 속한다.
〈상여소리〉와 〈달구질소리〉는 장례 절차에 따라서 부르는 것으로서 노동요이자 의식요인데, 다른 어느 것들보다도 오늘날까지 잘 전해지고 있다. 땅을 다지면서 부르는 노래는 그 땅이 집터인 경우에는 지신밟기를 겸할 수 있다.
말뚝을 박으면서 부르는 노래는 흔히 ‘망께소리’라고 한다. ‘망께’라는 이름의 커다란 쇳덩이에 줄을 달아서 여럿이 함께 끌어당기면서 부르는 것이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지방에 따라서 ‘어사용’이라고 한다. 태백 산맥 지역에서 들을 수 있는 이 노래는 혼자서 신세타령을 하는 구슬픈 가락과 사설로 이루어져 있다.
여성의 노동요로서는 길쌈노래가 대표적이다. 길쌈을 하는 과정에서 실을 뽑으면서 부르는 〈삼삼기노래〉와 〈물레노래〉가 있고, 베를 짜면서 부르는 〈베틀노래〉가 있다. 어느 것이나 노동요 중에서 사설이 특히 풍부하며 여성 생활의 여러 가지 사연을 잘 나타내고 있어서 널리 주목된다.
내용을 보아서 시집살이노래라고 하는 것도 대부분 길쌈노동요이다. 〈베틀노래〉는 베를 짜면서 부르는 것이기도 하고, 베를 짜는 과정을 노래로 엮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뒤의 것은 노동요에서 파생되어 이미 노동요가 아닌 비기능요의 한 예가 된다.
여성이 하는 노동에는 이 밖에 방아를 찧고, 맷돌질이나 절구질을 하면서 부르는 것도 비교적 널리 분포되어 있는 편이다. 〈방아타령〉은 원래 이러한 노동요였는데, 일찍부터 비기능요로 분화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맷돌노래〉와 〈방아노래〉는 같은 것을 양쪽에서 다 부르기도 한다. 제주도 같은 데서는 〈맷돌방아노래〉도 흔하지만, 여자들이 갓 제조에 필요한 양태를 만들면서 부르는 〈양태노래〉를 풍부하게 전승하기도 한다.
여성 노동요로서 〈자장가〉와 〈빨래노래〉도 있다. 〈자장가〉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노래이지만 노동요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래를 모두 합쳐서 여성의 잡역노동요라고 부를 수 있다.
 
[의 의]
 
노동요는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노동 그 자체를 하면서 창조해 온 음악이고 문학이라는 점에서 문화 창조의 양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음악이나 문학이 그만큼 필수적인 것임을 입증해 준다.
사회가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분화된 다음에는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의 자기표현 방식이라는 점에서 노동요는 기층문화로서 작용해 왔으며, 민요의 여러 다른 형태는 물론 상층의 시가를 산출하는 모체 구실을 한 점 또한 주목된다.
사회가 근대화되면서 지난 시기의 노동요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으나, 그 유산은 오늘날의 예술로 풍부하게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朝鮮民謠硏究(高晶玉, 首善社, 1948), 韓國民謠集(任東權, 東國文化社, 1961), 濟州島民謠硏究 上(金榮敦, 一潮閣, 1965), 敍事民謠硏究(趙東一, 啓明大學出版部, 1970), 口碑文學槪說(張德順 外, 一潮閣, 1971), 慶北民謠(趙東一, 螢雪出版社, 197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석장사지
1986년 동국대학교 경주분교 박물관팀의 발굴에 의하여 190여 점의 불상과 탑을 조각한 벽돌이 발굴되었다. 이 벽돌에 돋을새김한 불상과 탑들은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양지의 작품으로 알려진 녹유사천왕상전(綠釉四天王像塼)의 신불상 표현기법과 그 양식이 같은 점으로 미루어 양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또 이 벽돌에는 양지의 글씨로 '제법종연기여래설시인 피법인연진 시대사문설(諸法從緣起如來說是認彼法因緣盡是大沙門說)'이라는 연기법송(緣起法頌) 20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석장사 창건 당시 당(唐)나라의 고승 의정(義靜)이 인도를 여행하고 쓴 기행문인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이 절터에서는 금동불상 5점, 불교미술 작품이 새겨져 있는 조소 파편 20점, 금강역사상 5점이 발굴되었으며, 석장사임을 밝혀 주는 '錫杖(석장)'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조선시대 자기(瓷器)가 발견됨으로써 석장사가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풍요(風謠) 향가(鄕歌)
【학습】 향가
• 헌화가(獻花歌)
• 풍요(風謠)
•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
【작성】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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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