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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왜란과 호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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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2.
최남선
1
十三[십삼], 왜란과 호란
 
 
2
국가의 내부 세력이 여럿으로 갈라졌을 때에 밖으로서 걱정이 들어옴은, 마치 몸이 쇠약했을 때에 감기 들기 쉬움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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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러한 때에 이웃 나라에 강포한 세력이 일어날진대 재없이 그 등쌀을 받고야 맑은, 마치 약한 몸이 돌림 고쁠이 다닐 때에 바람을 쐬는 것과 같습니다.
 
4
조선 안이 한참 여러 당파로 갈라지고 나라의 탕개가 늘어질 대로 늘어졌을 때에,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반대로 오랫동안 뿔뿔이 갈라져서 머리 가터 지게 쌈박질하던 판국이, 풍신수길(豊臣秀吉)이라는 장수의 손에 깨끗이 통일 되고, 또 풍신씨는 새로 시작된 남방 무역을 말미암아서 많은 재력을 모아 두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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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네의 군대는 서양 사람이 가져다가 전한 총이라는 새 병장 기를사 용하여, 미쳐 총을 모르는 군대에 비하면 크게 강함을 자랑할 만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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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길은 이러한 세력을 어디다가 부려 볼꼬 하고 이리저리 둘러볼 때에, 조선 안에 당파 싸움이 심하고 그전에 비하여 군비가 허소하기 짝 없음을 살피고, 오냐 내 야심을 여기 쓰지 않고 어디 쓰랴 하고 독한 어금니를 갈고 덤볐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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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신을 보내 와서 명나라를 치겠으니 길을 빌려 달라는 억탁을 하여, 우리가 그것을 물리치매 준비하였던 대군을 내어 억지로 싸움을 시작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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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二五[이오]년 임진(壬辰)에 수길이 二[이]○만 군을 움직여 구주(九州)로 나와 앉고 먼저 행장(行長)·청정(淸正) 등 장수로 하여금 오(五[오] 만 군으로써 침입하게 하여, 四[사]월 十四[십사]일에 그 선두가 부산에 이르 렀읍니다. 워낙 활과 총의 싸움으로써 서로 대적이 되지 아니하여, 어디 서고 우리가 이롭지 못하여 보름이 못되어서 서울이 위태롭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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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서울을 내어놓고 차츰차츰 뒤로 들어가는 것이, 마침내 압록강 가의 의주에까지 이르렀읍니다. 五[오]월 三[삼]일에는 적군이 서울로 들어오고, 六[육] 월 十三[십삼]일에는 평양이 행장의 손에 들어가고, 이동안에 청정은 함경도 깊은 데까지 들어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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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쯤 되매 나라 일의 창황함은 이를 것 없었읍니다. 그러나 하늘이 아직 조선을 버리시지 아니하여 온 조정이 다 하잘 것 없는 가운데, 다만 한 분 나라를 살릴 소임을 짊어진 이가 가장 요긴한 목장이에 지키고 있었읍니다. 이때 육상으로 말하면 거의 무인지경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더 할말 없되, 일본의 군략상 처지로 말하면 바다로 하여 많은 군사를 서쪽으로 날라가야만 깊이 들어간 행장을 돕기도 하고 또 그보다 앞으로 나갈 수 도 있겠거늘, 우리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 미리부터 필요한 준비를 갖추어 가지고, 반도 서남해의 목장이를 지키고 있어서, 왜선 한 척을 서해(西海)로 놓쳐 내어보내지 아니함을 어찌할 수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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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그전부터 있어 내려 오는 조선 독특의 거북선을 완전히 철갑선으로 하여 총포의 위력을 모르는 체하고 좌충 우돌하여 적선을 잡아 엎지름에는, 다만 기가 막혀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할 뿐이었읍니다. 특히 五[오]월 七[칠] 일에 노돌(露梁) 해상에서와 七[칠]월 八[팔]일의 한산섬(閑山島) 앞에서 대두리로 적선을 무찌른 뒤에는 적군이 다시 서으로 향할 뜻을 가지지못하였읍니다. 임진 왜란에 나라가 거의 위태하다가 겨우 부지한 것은 오로지 순신의 바다 지킨 공을 힘입은 것이라 하여도 지나치는 말이 아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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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陸上)에서는 생각다 못하여 구원병을 명에 청하여 四[사]만 명 명군이 왔었지마는, 변변히 싸워 이긴 일이 없고, 도리어 그네의 지공을 하기에 가뜩한 중 큰 괴로움을 치를 뿐이며, 그래도 우리 군사가 차차 기력을 회복하고 또 총을 만들어 씀에 미쳐 가끔 버젓한 승전을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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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가운데 있어서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義兵)이 쉴 새 없는 「 게릴라 」 전을 행하여 적군의 기운과 아울러 정신을 뺀 것은 대국(大局)을 유지 하는 위에 적지 아니한 공헌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 조정은 암약(暗弱)할 망정 인민은 만만치 아니한 것을 나타내기에 충분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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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구러 적군이 평양 이북을 나가는 수 없고, 조선과 명에서도 적극적으로 적군을 물리치는 수 없어서, 이듬 계사(癸巳) 봄에 화친할 이야기가 진행 되고, 이것을 기회로 하여 적군이 남방 해변으로 물러 내려와서 오래 머무를 계교를 하니, 싸움이 드디어 하는 셈인지 아니하는 셈인지를 모르는 상태로 들어갔읍니다. 계사 一○[일십]월에 임금이 의주로부터 서울로 돌아오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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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두고 옥신각신하다가 화친 이야기가 마침내 깨어지고, 정유년 정월에 싸움이 다시 벌어졌는데, 이번에는 일본이 이순신 없애기를 첫째 일로 하여 교묘한 이간질을 하고, 어림없는 조정이 이 꾀에 빠져서 그동안 삼도수군통제사 되었던 이순신이 한때 파면되고 전국(戰局)이 하마 뒤집힐 뻔하더니, 다행히 조정에서 속은 줄을 깨닫고 얼른 다시 이순신을 일으켜서 해상 방비를 정돈케 하여, 八[팔]월 十九[십구]일의 울두목(鳴梁項[명량항]) 해전에서 적선 五[오], 六[육[백 척을 섬멸하여 일본이 다시 숨을 쉬지 못하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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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의 침입도 아무 결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내 다시 지구전(持久戰)에 빠졌던, 三一[삼일]년 무술(戊戌)에 수길이 죽을새 유언으로써 군사를 철퇴 하게하여 적군이 창황히 돌아가는 것을, 이순신이 노돌에서 가로막고서 그 대부분을 섬멸하고, 싸움 중간에 불행히 이순신이 총알에 맞아 죽으니, 이 사 품에 그 五○[오십]여 척이 겨우 빠져 달아났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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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앞뒤 七[칠]년에 걸친 지리한 싸움이 흐리마리 끝나고, 이듬 기해 가을까지 명나라 구원병도 다 거둬 가서 반도의 산하가 오래간만에 깨끗하여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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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 이래 八[팔]년 동안의 풍진은 진실로 민족 생활상의 큰 시련이요, 고려에서 몽고에게 四○[사십]년 부대끼던 일에 다음가는 지리한 병 난이로되, 조선 민족이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 아래 있으면서도 능히 견디고 능히 싸워서, 그 사나운 기세를 꺾고 만 것은 진실로 민족적 반발력이 큼을 나타내는 것인 동시에, 또 일본에게는 지지 않는다는 옛부터의 앙심이 굳세었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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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싸움의 승패는 결국 분명하지 아니하였다 하겠지마는, 일본이 이번 싸움에 조선으로부터 기술 있는 사람을 많이 데려다가 사기(砂器) 굽는 것, 돌로 성 쌓는 것, 두부(豆腐) 만드는 것, 기타 여러 가지 재주를 배우고, 또 활자를 얻어다가 편리하게 책 박는 법을 알고, 다수한 서적을 가져다가 유학(儒學)· 문학(文學)· 수학(數學) 각 방면으로 큰 은덕을 받았으며, 조선에서는 이 사움 가운데 총 쓰고 만들 줄을 알고, 담배와 고추와 호박(南瓜[남과])을 얻고, 예수교를 구경한 것 등은 문화 유통상으로 크게 의의 있는 일이었읍니다. 그중에도 일본의 배워간 것이 많음으로써, 그 어느 역사 가는 말하기를, 임진년 출병은 무력을 가지고 조선에 유학하러 갔던 것 이니라고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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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임진 이래의 오랜 병난이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는 큰일인만큼, 우리 국민 상하의 노력한 결과가 각 방면으로 끔찍하거니와, 더욱 새 병기에 나타난 발명 창작의 힘에 놀랄 것이 많았읍니다. 이순신의 거북선 철장갑(鐵漿甲)이 이미 그 하나이어니와, 이장손(李長孫)의 만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신식 공성포(攻城砲)와, 변이중(邊以中)이 만든 화차(火車) 시방 전차(戰車)에 당하는 것 등이 다 실제에 큰 위력을 나타내었으며, 영남(嶺南)의 어느 싸움에는 성이 에워싸이매 비차(飛車), 곧 항공기(航空機)를 만들어 외간과의 연락을 취하였다는 말도 있읍니다. 조선 사람이 이러한 큰 싸움을 허무 맹랑하게 치른 것 아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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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 八[팔]년의 싸움에 조선·명·일본 세 나라가 다 지친 틈을 타서 시방 만주 지방에 사는 여진 민족이 고개를 쳐들고 일어났읍니다. 이 네들은 예 로부터 한편은 명나라, 한편은 조선 나라에 양추거리로 붙어 살더니, 우리 선조 말년에 그 건주부(建州部)에서 누루하치(弩爾哈赤)란 자 나서 차차 만주 지방을 거두어 가지고 광해군 八[팔]년, 三三○[삼삼십]년 전에 시방 흥경(興京)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라서 나라를 금(金)이라 이름하고 연방 명나라의 변방 고을을 집적거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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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광해군은 임진 왜란 가운데 선조 대신 나라 일을 맡아 가지고, 군사와 외교에 다 많은 경험을 가진지라, 천하의 형세가 장차 크게 변할 것을 얼른 살피고서 조선으로서 취할 태도를 익히 생각하고, 아무쪼록 금나라로 더불어 화친을 잃지 않기를 꾀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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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세 모르는 조정의 신하들은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를 살피지 못하고, 당파 싸움의 희생으로 이 임금을 몰아내고 인조(仁祖)라는 이를 올려 세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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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조가 임금 됨에는 여러 가지 억지가 있었음으로써 조정이 편안치못하고, 신흥한 금의 누르는 힘은 날로 굳세어지는데 빈소리로 그를 배척 하다가 마침내 五[오]년 정묘(丁卯)에 그 군사의 칩임을 받고 형제국으로 좋게 지내자는 약조를 맺어 주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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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점점 시세를 잘못 보아서, 十三[십삼] 년에 누루하치의 아들 홍다시(곧 태종)가 몽고를 아우른 기회에 심양(瀋陽)(시방 봉천)에서 황제 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고 고쳤을 때에, 조선 혼자 이를 승인하지 아니하고 크게 그 사신을 모욕하니, 十四[십사] 년 병자(丙子) 十二[십이]월에 홍다시가 스스로 만주·몽고·한군(漢軍) 一○[일십]만을 거느리고 풍우같이 달려들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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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옴나위할 새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가, 청군의 포위를 받은지 달반 만에 마침내 성을 열고 굴복하여, 이로부터 청을 어른의 나라로 섬기게 되니, 이는 실로 실력을 기르지 않고 허튼소리만 한 허물에 대한 하늘의 꾸지람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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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년 병란은 일이 워낙 창졸한데다가 인조 덕망이 대단하지 못하여, 관군은 무론이요 민간의 의병에도 보잘 것이 없었으되, 조정에서 장만한 치욕이 큰만큼 국민의 분개는 더욱 심강하여 이 뒤 청(淸)에 대한 적개심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고, 조정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일반 국민은 언제든지 그 를 오랑캐로 보아서 장기의 저항을 계속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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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에서도 조선의 인심이 이러함을 모르지 아니하였으되, 예로부터의 특별한 관계를 돌아보고 또 우리 문화를 존중하여,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두터운 대접을 하며, 아무쪼록 우리 자존심을 손상하지 않으려 하였읍니다.
【원문】13. 왜란과 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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