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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내 정신을 차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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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2.
최남선
1
十四[십사], 내 정신을 차리다
 
 
2
선조 임진의 대란 뒤에 이어 북방이 수성수성하매, 조정에서 실력을 길러 다른 날을 준비하기에 주의하더니, 미처 수족을 놀릴 새 없이 四五[사오] 년만에 또 인조 병자의 큰 병난을 치르고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치· 경제· 군사 각 방면으로 크게 개혁을 더하여 나라의 원력을 떨쳐 일으키려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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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임금된 초년에 이미 민력 휴양과 재정 정리의 필요를 깊이 느껴서, 재성청(齋省廳)을 두고는 나라의 씀씀이를 줄이고, 대동법(大同法)을 마련 하여 서는 그전에 각가지 물건으로 번폐스럽게 공물(貢物) 바치는 것을 지세(地稅) 한 가지로 합하여 쌀 한 가지로 간차롭게 물게 하기로 하여, 말썽 많은 것을 무릅쓰고 인조·효종(孝宗)·현종(顯宗)·숙종(肅宗)에 걸쳐서 기어이 실행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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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려 이래로 여러 번 쇠붙이돈(鐵錢[철전])을 만들어 쓰려 하였으되 잘 실행 되지 않고, 백성이 여전히 무명을 돈으로 써서 불편함이 많더니, 인조 때 로부터 쇠돈 만들어 쓰기를 준비하여 효종·현종의 사이에 부분적으로 이 것을 시험하다가 숙종 四[사]년, 二七○[이칠십]년쯤 전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그란 돈을 많이 만들어 가지고 와짝 이것을 세상에 유통하게 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쇠돈을 영구히 쓰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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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쌀 농사하는 나라로서 논에 물을 대는 설비가 심히 중대하므로, 신라 옛날부터 곳곳에 큰 보를 만들어서 물 걱정을 덜게 하였는데, 이것이 차차 농지(農地)로 들어가서 가무는 때마다 물 소동이 크더니, 인조 이후에 묵은 보의 수축에 열심하다가 현종 三[삼]년에 새로 제언사(堤堰司)라는 마을을 두고, 관개(灌漑)에 관한 일을 전관하여 다시 그전 같은 폐가 없게 하였읍니다. 또 효종은 일찍 중국에 가서 수차(水車)의 편리함을 보고 온 일이 있어, 임금 된 뒤에 이것을 극중에 보급시키기에 크게 노력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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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경제력의 함양(涵養)에 힘쓰는 한편으로 병력의 충실에 대하여도 매우 유의하였읍니다. 인조 二[이]년에 종래의 군영(軍營) 박에 새로 어영청(御營廳)을 두고 특별히 총 놓는 재주의 교련에 전력하여 출색한 군대가 되었더니, 효종이 임금 되면서 청나라 들이칠 작정을 하고 이완(李浣)으로 하여금 어영대장을 삼아 더욱 규모를 늘이고 이것을 중심 부대로 하여 북벌(北伐)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읍니다. 불행히 효종이 얼른 돌아가서 그 계획을 실현하지 못하였지마는, 조선의 포수(砲手) 또 총수(銃手)라 이르는것의 이름은 진작 외국에까지 들렸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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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우리 효종 초년에 러시아(露西亞)의 시베리아(西比利亞) 침략 이 시작하여 청나라가 그 형세를 당치 못하매, 청에서 우리 총수의 구원을 청 하여 효종 五[오]년과 九[구]년의 두 차례에 우리 총수군(銃手軍)이 가서 흑룡강(黑龍江) 위에서 러시아의 원정대를 마사 버리고 한참 동안 그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니, 청나라 치려던 총군이 도리어 청나라를 위하여 그 대적을 물리쳐 준 것 같음은 운명의 한 장난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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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효종·현종 三[삼]대, 四[사],五○[오십]년 동안의 길러 쌓은 힘을 그대로 잘내어 써 보았더면 재미있는 일이 있었겠거늘, 숙종이 들어서서 五○[오십] 년 가까이 임금 노릇하는 동안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과의 당파 싸움이 줄곧 되풀이하여서 아무 다른 정신이 있을 수 없고, 모처럼 장만 하였던 여러 가지 실력까지를 삭혀 없애게 된 것은 차마 애다로운 일 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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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병자의 두 번 대란에 조정 위의 벼슬아치들이 어떻게 무능 무력한줄을 환하게 알고, 다시 숙종 일대의 꼴사나운 쌈박질에 아주 얼굴을 외오 두게 된 것이 일반 인민이었읍니다. 그래서 조정을 미디 않고 인민 스스로 좋은 새 세상을 맞이하여야 하겠다는 기미가 나타나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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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나는 지식 계급에서 학문하는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그전에는 학문이라 하면, 학문을 골똘하게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나 살아 먹는것이 그 전부로서, 눈에 보이고 머리에 든 것이 지나 학문의 찌꺼기 밖에 아무 것도 없더니, 숙종 때로부터 민간에 있는 지각 있는 학자들이 차차 눈을 고쳐 뜨고, 조선 일을 알아야 하겠다. 조선의 실제에 기초를 둔 경제 정책을 연구해야 하겠다 하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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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잡이 된 이가 효종·현종간의 유형원(柳馨遠), 숙종·영조 간의 이익(李瀷) 이요, 영조 이후에는 역사·지리·언어·제도 등 각 방면에 걸치는 큰 학자가 쏟아져 나오는 중, 정조 때의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정약용(丁若鏞) 등은 진보적 사상가로 특히 유명하였읍니다. 이동안 영조· 정도 두 임금은 다 학문을 좋아하고 또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학자들을 데리고  <문헌비고(文獻備考)><동문휘고(同文彙考)> 이하 유명한 책을 많이 만들어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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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실지를 연구한 결과로 우리의 구차하고 약함을 변통하려 하면, 먼저 외국의 진보한 기술과 생활 양식을 배워 와야 할 것을 깨달았읍니다. 그래서 위선 지나를 배워야 한다는 이는 북학론(北學論)을 창도하고, 더 내 켜서 서양의 학술을 들여와야 할 것을 안 이는 용감하게 모을 서학(西學)에 던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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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이란 것은 서양 계통의 모든 사상과 학술을 포괄하여 말하는 것 이지마는, 한 겹 더 깊이 들어간 이는 서양 제국의 부강한 근본 원인은 천주교의 정신에 있는 것인즉, 모름지기 그것을 들여다가 우리의 사그라지고 탑 작지근 한 풍기를 밑바닥으로부터 고쳐야 한다고 하여,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펴기에 힘쓰니, 유명한 정약용의 형제 숙질이 다 그 가운데 유력한 지도자요, 정약종(丁若鍾)의 아들 하상(夏祥)은 순조 十六[십육] 년으로부터 서양의 신부(神父)를 맞아 들이기 위하여, 해마다 북경 가는 사신의 행중에 말 구종으로 끼어서 무릇 아홉 번 왕래를 하고, 그 지성이 마침내 로마법왕(羅馬法王)을 움직여 현종 二[이]년에 그 신부의 입국(入國)을 보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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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교리는 무엇보다도 조상의 제사를 폐하라는 점이 그전부터의 유교 윤리에 크게 어그러짐으로써 구사상과 충돌하고, 또 다른 정치적 이유도 있어서 나라에서 이것을 금단하여, 일향 신앙을 고치지 않는 자는 극형으로써 임하였읍니다. 그러나 여러 번의 핍박을 다만 뜨거운 순교자(殉敎者)의 아름다운 행적을 더 많이 만들 뿐이요, 그 신앙을 없애는 데는 아무 힘이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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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예수교의 전도가 생긴 뒤에 어디서든지 교중에서 먼저 들어가서 교를 폄이 상례로서, 조선과 같이 그 인민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신앙을 구한 전례는 세계에 없는 바이며, 또 오랫동안 다수한 순교자의 열렬·숭고함이 한판에 박은 듯함도 거의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바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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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워낙 국가의 압박이 심하였기 때문에 천주교의 신앙은 숨어서 보존 되었지마는, 애다로울손 천주교를 통해서 들어오기를 기다하였던 새 문화는 흘러 들어올 여지가 거의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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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지식 계급의 팔짱 끼고 앉아서 지저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민중의 맨 밑층에서 떠받들고 올라오는 힘이 자기네의 주먹으로써 세상을 뒤집어 엎으려 하는 움직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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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조선에는 벌써부터 당장은 암만 괴로와도 우리 앞에는 남조선(南朝鮮)이라는 광명 세계가 있어서, 그때가 되면 없는 것 없이 다같이 잘살게 된다는 민족신념(民族信念)이 있어 오던, 차차 이러한 세상은 민중 스스로의 손으로 건설하는 곳에 비로소 실현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나서, 마침내 사회의 허소한 틈을 비집고서 그 실제 행동이 가끔 고개를 쳐들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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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잡이는 순조 때에 외척인 안동 김씨네가 세도를 잡고, 정치가 부패하여 백성의 원망이 높음을 타서, 그 十一[십일]년 신미, 일삼 ○[일삼십] 여 년전 겨울에 이씨조선 四[사]백 년 동안 짓눌려 오던 평안도 백성이 홍경래(洪景來)의 지도 아래 정주성(定州城)을 웅거하여 혁명 운동을 일으킨 것 입니다. 처음에는 형세가 꽤 장하였지마는, 그 근본에 지방적 감정이 있기 때문에 한 세상의 향응을 얻지 못하고 다섯 다 만에 관군에게 패도 하였지마는, 순한 듯하고 무서운 것이 민중임을 벼슬아치에게 알린 공이 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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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뒤, 현종·철종의 대에는 안에 천주교 소요가 있고, 밖에 서양 군함의 오락가락함이 있어서 백성도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철종 말년에 이르러는 그전보다 활발한 발동을 보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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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물어 오는 지세(地稅)와 병역세(兵役稅) (군적(軍籍))와 양곡조합비(糧穀組合費)(환곡(還穀)) 세 가지 부과가 불법한 관리의 중간 협잡으로 하여 폐단이 많더니, 철종 十三[십삼]년 임술, 팔○[팔십]여 년 전 二[이] 월에 경상도 진주(晋州)에서 민란이 일어나서 탐관 오리(貪官汚吏)와 및 거기 결탁하여 지내는 양반 계급(兩班階級)을 응징하니, 이 바람이 금세 三[삼] 남 지방을 휩쓸고, 멀리 함경도 함흥에까지 미쳐서 한참 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읍니다. 그러나 본디 조직이 있는 일 아니매 얼마 만에 진정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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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부분적 또 돌발적 운동의 밖에, 조선 민족의 깊은 천성으로부터 우러나와서, 한편으로는 특권 계급의 횡포로부터 백성을 건져내고, 한편으로는 외래 사상의 침점(浸漸)을 되받아서 고유 정신을 발휘하여 써 하느님과 사람이 하나 되는 새 천지를 개벽하겠다는 운동이 경주(慶州)의 최제우(崔濟愚)를 스승으로 하여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으로써 철종 十一[십일] 년 경신(庚申)으로부터 은근히 남도에 선포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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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이렇게 사상적 근저(根柢) 있는 혁명 운동을 오래 갈망하던 터이라, 사회의 밑바닥으로 스며 나가는 형세가 금세 대단하더니, 일이 드러나매 철종 끝해에 제우가 관가로 잡혀서 마침내 사형을 당하고, 그 신앙만은 시대 인심에 합하여 그대로 부쩍부쩍 온 나라 안으로 퍼져 나갔읍니다.
【원문】14. 내 정신을 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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