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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그리운 옛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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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2.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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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십팔], 그리운 옛땅
 
 
2
조선 민족은 원래 아시아 동방에 두루두루 퍼져 살더니, 다른데서는 차차 남의 종족들과 어울려 버리고, 시방 만주에 뿌리박은 떼가 근본이 되어서다시 반도로 발전하고 이렇게 한옆으로 몰리는 대로 그 덩어리가 단단해졌읍니다. 고구려·백제·신라 三[삼]국의 세력을 다툼은 실로 조선 민족과 및 그 사회의 마지막 덩어리지기를 만드는 운동이러니,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서 통일의 공을 이루고, 당이 그 값으로 대동강 이북을 차지한 까닭에, 덩어리의 한쪽, 곧 고구려의 부분이 따로 떨어져 나가서 덩어리는 되었으되 한쪽이 일그러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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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피와 피가 서로 부르는 지극한 정도 있고, 또 반도만으로는 우리의 생활을 만족하게 건설하기 어려운 핑계도 있어, 조선 민족은 스스로 알 기도하고 모르기도 한 가운데, 북방을 그리고 찾고 또 잡아당기면서 一[일] 천 수백 년의 머리맡 솟음을 계속하여 나옵니다. 여기 잃어버렸던 옛땅을 찾는 동시에 불어가는 내일을 준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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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당나라를 치받아서 대동강까지를 거둬 가지고, 태봉은 그 뒤를 이어 청천강까지를 찾고, 고려는 건국과 함께 발해 사람을 안아들여서 먼저 고구려의 옛 백성을 덩어리 속에 넣기에 성공하고, 다음 계단과 승전하여 압록강 하류까지 진출함을 얻고, 다음 여진과 겯고틀어서 함흥 평야를 판도에 집어넣고, 또 금(金)나라에서는 요(遼)가 쥐고 있던 의주(義州) 일대를 접수하고, 또 나라는 이미 기울어져 가되 북쪽 지역은 도리어 늘여서 민왕(愍王) 이후에 서에서는 압록강 중류 지역과, 동에서는 시방 함경남도를 원나라 로부터 앗아 오고, 이씨조선은 창업하자마자 북방의 여진을 압박 하여 태조는 두만강까지를 집어들이고, 태종은 압록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여, 세종조에는 육진 개척(六鎭開拓)과 사군 설치(四郡設置)로써 백두산 이남, 두만· 압록 두 강 이쪽이 완전히 우리의 영토를 짓고, 그리해서 시방까지의 조선 지도에 나타나는 경계선이 이때에 성립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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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선 영토의 북쪽 지경이 아직 앞다리 한 단락을 지었지마는, 조선 민족의 북방으로 진출하는 힘은 무론 여기 그칠 것 아닙니다. 고구려의 옛 땅을 찾기만 하자 해도 앞이 아직 까맣거니와, 민족으로의 발전 본능이 백두산 남쪽에서 편안할 리도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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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조선의 초기는 내부 정돈 시기에 속하였건마는, 북방 문제가 항상 큰 관심사로 되어 있었으며, 연산군 이후로 국내 분열이 심한 한편에 여진족의 세력은 그대로 강하였건만도, 국토의 한 조각이 일찍 그네에게 돌아가지 아니하였으니, 이 형세에서 이만큼 지킨 것은 다른 때의 무척 얻어 들임에 승함이 있으며, 이어 선조조에 왜란 있는 틈을 타서 건주(建州)의 여진이 일어나서 마침내 천하를 뒤집어엎었으되, 조선에 대한 영향을 보면 함경도· 평안도 내지에 남아 있던 여진 족속이 거의 말끔하게 지경 밖으로 거둬 가고, 오랫동안 들숭날숭하여 뉘 것인지를 모르던 압록강 상류의 이른바 폐사군(廢四郡) 지방이 여진 종족 가장 강성할 때에 분명 확실하게 조선 판도로 들어온 결과를 보았읍니다. 조선 사람의 북쪽으로 나가는 강한 힘은 바로 큰 지킴에 끌려 있는 것 같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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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주(建州)가 여진족을 몰아가지고 지나 중원으로 들어가서 청나라 천자(天子)가 되매, 그 고향인 만주를 봉금(封禁)하여 다른 종족의 들어오는 것을 막으니, 대개 옛땅을 보전하여 남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동시에, 만주 지방의 경제적 자원인 인삼과 돈피(貂皮)의 이(利)를 독점하여 두려하는 필요에 말미암은 것이었읍니다. 이 봉금 정책(封禁政策)이 남방에서 지 나인을 막고 서방에서 몽고인을 막기에는 얼마만큼 유효하였지마는, 동방에서 조선 사람을 막음에는 신통한 성적을 내지 못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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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냐 하면, 마상이라는 작은 배 하나를 가지면 마음대로 드나드는 길을 이루 막는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나라가 얼르고 달래다가못하여 두만·압록 두 강의 밖에 가깝게는 변장(邊牆)을 둘러쌓고, 그 밖에 또 사람 살리지 않는 공광지대(空曠地帶)를 만들어서 기어이 조선 사람의 발길을 들이지 아니하려 하였지마는, 조선인의 만주 침입만은 마침내 어찌 하지 못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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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임시로 삼이나 캐러 드나드는 것 이외에, 강변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 하여 논밭을 풀고 곡식을 심어다가 먹는 일이 생기며, 그 으슥한 곳에는 아주 집을 짓고 붙박이로 들어가 사는 이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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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아도 만주에는 고구려 끼친 백성의 씨가 있으며, 요(遼)와 금(金)과 원(元)의 대에 이럭저럭하여 새로 들어간 이가 많아서, 원나라 시절에는 만주 방면에 있는 행정 장관은 고려 사람을 임용하여 우리 계통 백성을 다스리기에 편의하게 하기를 생각하였으며, 이 뒤 명나라·청나라로 내려 오면서 이런 사단 저런 사단으로 만주의 구석구석이 우리 백성의 들어가 박힌 수효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하니, 시방 만주는 무론이요, 멀리는 북경 근처와, 깊이는 몽고 지방에까지 간 데마다 발견하는 「가오리청(高麗城[고려성]) 」「가오리잉(高麗營[고려영]) 」「가오리툰(高麗屯[고려둔]) 」「가오리팡즈(高麗房子[고려방자]) 」라는 지방은 대개 조선 계통 백성의 둔 취하여 살던 곳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말하자면 뙈기 뙈 기 분산적으로 우리 옛땅을 찾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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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이씨조선 여러 백 년 동안에 명나라가 어찌든지 청나라가 무 어라하든지 조선 민족의 북방 진출은 가장 기척 없이 그러나 가장 쉼없이 줄곧 계속하여 나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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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고종 六[육]·七[칠]년 기사·경오에 함경도 지방이 큰 흉년을 만나서 백성이 사는 수 없으매, 남부여대하고 강 건너의 옥토를 찾아 들어가는 무리가 길을 덮어서 얼마 아닌 동안에 시방 간도 지방에 차고, 한편으로 노령 연해주로 번져서, 간도는 만주 전체로, 연해주는 시베리아 지방에까지 퍼지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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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에서도 옛날의 봉금령이 세월과 함께 늘어지고, 산동 방면의 구차한 백성들이 알게 모르게 만주로 밀려 들어와서 다시 억제할 수 없으매, 우리 고종 十二[십이], 三[삼]년쯤 곧 광서(光緖) 초년에는 정부로부터 이민· 개간 사업을 경영하기 위하여 동부 만주에 관원을 보낸즉 그 지방이 이미 조선 사람으로써 차고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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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청국에서는 이 백성을 걷어 가라 하고, 우리는 할 수 없다고 하여 이른바 간도 문제(間島問題)란 것이 일어났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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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우리 숙종 三八[삼팔]년, 청나라 강희(康熙) 五○[오십]년에, 청나라에서 와서 우리 관원과 회동하여 백두산 위에 두 나라의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는데, 거기 기록하여 가로되, 이 비의 동녘은 토문강(土門江)이요, 서녘은 압록강 이라고 한 구절이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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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토문강이 시방 간도 밖으로 흐르는 송화강의 한 상류이니까, 간도는 당연히 우리 영토라고 주장함에 대하여, 청에서는 토문강은 곧 두만강으로서 두만강 밖은 저희 땅일 것이라고 반박하여 서로 다투고 양보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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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문제는 어른 나라라는 청을 대수로 하는 싸움이니까 보통으로 생각 하면 이쪽이 양보하고 말았을는지 모르지마는, 여기 수십만 명 백성의 죽느냐 사느냐 가 달려 있고, 또 민족 발전의 역사적 약속이 뒤를 미를 까닭에, 조선에서 항상 강경한 태도로써 다투고, 어떤 때에는 감계사(勘界使)를 보내서 그 형지를 살피고, 어떤 때에는 서북경략사를 보내어서 백성의 편의를 돕는 등 할 수 있는 성의를 보여서, 한국 말년에 이르는 四○[사십]년 동안 한결같이 세게 나왔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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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넘겨 가고, 일등 강국임을 자랑 하는주 제로서, 융희 연간에 안동현으로부터 봉천으로 이르는 철도를 고쳐 놓으려 하되, 청국이 듣지 아니하여 애를 먹다가, 三[삼]년 九[구]월에 이르러 간도를 청국의 소속으로 인정함을 팔아서 철도 고치는 허락을 사니, 이는실로 일본 외교의 일대 수치인 동시에 조선 민족의 원통한 손실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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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사람의 거주 권리는 전과 같고 다치지 아니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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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이외의 만주 다른 지방에는, 처음에 회초(會哨)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우리의 자유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었지마는, 실지에는 그리 위력이 있지 아니하여 범월(犯越)하는 이가 갈수록 늘었으며, 전쟁 뒤 안봉선(安奉線)이 개통함에 미쳐 남만주 철조(南滿洲鐵道)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연선지방(沿線地方)을 향하여 이주하는 무리가 부쩍부쩍 많아 가고, 병진·정사 양년의 남도 지방 대흉을 인하여, 특히 경상도 농호들이 쏠려 들어감으로부터 그 형세가 더욱 북진 서출(北進西出)하여, 몽고의 깊은 곳까지 우리 손에 개간 된 논이 늘비함을 보며, 이른바 만주국이란 것이 생긴 뒤에는, 그 국민의 일부로서 자유로운 발전이 허락되어서, 만주·몽고의 구석구석이 조선인의 부락을 보지 않은 데가 없게 되며, 지나 사변의 뒤에는 북지(北至)와 몽강(夢彊)까지 다수한 이주민이 들어가서, 만몽 지방에 있는 조선인이 대강 二[이] 백만을 계산하기에 이르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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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들어간 발자국을 볼진대, 처음에는 빈몸과 맨손으로 들어가서 기막히는 박해와 싸우면서 겨우 자리를 잡았으며, 중간에는 독립군의 지공에 피땀을 바치면서 어려움을 견디었으며, 나중에는 강도의 뒤를 따라가면서 내어던지는 것을 주워 먹는 서러운 처지이었지마는, 좋은 때는 언짢은 때고, 진일이고 궂은일이고, 이 모든 것을 죄다 가져다가 우리 북방 발전의 기회· 연분을 만들기에 아무 선택이 없어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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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우리의 손에 병기를 쥔 것 아니며, 나라의 힘이 든든히 뒷배를 본것 아니며, 주위의 정세가 우리에게 결코 순편한 것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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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바람과 차가운 비가 十[십]자의 핍박을 퍼부어 오는 가운데서 우리 북방으로의 행진이 계속되어서, 세계 역사상에 보기 드문 민족 발전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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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 다음도 역시 우리는 영토적 야심을 채우려 하 거나, 침략적 행동을 발뵈려 하거나, 지도의 빛깔을 본국과 한가지로 하려 하는 욕망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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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잃어버렸던 북방의 반쪽을 인민 실지(實地)의 진출로써 회복하여서, 一[일] 천 년 동안 일그러진 채로 있는 역사적 사명을 둥그렇게 완성 하려는 노력은, 이 뒤에 늘 계속하여 나갈 것입니다. 근본을 그리고, 하나 되기를 찾는 우리의 양심적 요구를 막는 힘이 무엇이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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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이]천만에서 三[삼]천만으로, 다시 一[일]억·二[이]억까지도 늘고 붇는 단군의 자손이 반만 년 전부터 마련된 단군의 땅에 생명선을 펴겠다 하는데, 이것을 그르다고 할 이가 누구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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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은 이번 지나 사변과 태평양 전쟁이 말미암아서, 그 눈과 발의 미칠 범위가 크게 넓어졌읍니다. 지나의 샅샅과 일본의 구석구석과 태평 양위의 좁쌀알 같은 모든 섬에 죄다 우리의 기름땀이 스며들어갔으며, 멀리 인도양의 뜨거운 바닷물까지도 우리 젊은이의 고개가 들락날락하였읍니다. 이 경력을 살리고 늘여서, 세계의 일곱 바다와 여섯 대륙을 다 잡아당겨서 우리 조선 사람의 웅대한 기백을 나타냄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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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민족의 오늘 의무요 내일 희망은, 아직 동안 조선을 북으로 연장하는 일입니다. 조선 역사의 지표(指標)는 의연히 북을 가리키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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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四六年[일구사육년] 十一月[십일월] 東明社[동명사] 發行[발생]>
【원문】18. 그리운 옛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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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4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