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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세계로 끌려 나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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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2.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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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십오], 세계로 끌려 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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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내부에서 민중 스스로의 갱생 운동(更生運動)이 부걱부걱 괴어 올 때에, 그밖에서는 서양 여러 나라 제국주의(帝國主義)인 영국(英吉利)과 육지제국(大陸帝國)인 러시아(羅西亞)가 오래 계속해 오는 아시아 대륙에 있는 패권 다툼을 극동(極東) 지방으로 옮겨다가 새 씨름이 얼러붙는 판이었읍니다. 그리고 일본이 세계의 대세에 눈을 뜨고 발분 진작(發奮振作)하여 국가 유신 운동(國家維新運動)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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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서양과 조선이 처음 교섭을 가지게 된 것은 고려 시절에 원나라를 통 하여 약간 물건이 들어왔음에 비롯하며, 그 사람이 발길을 들여놓기는 선조 十五[십오] 년에 장사하는 배가 제주에 표풍해 와서 마리아(馬里伊)이하 몇 명이 상륙한 것을 시초로 하며, 그 다수한 인물이 우리나라에 머물러 살기는 효종 四[사]년에 흘란드(荷蘭陀)국 해상(海商) 「하멜」 이하 三八[삼팔] 인이 제주로부터 경성으로 와서 十四[십사]년 동안 군총 노릇하고 있었 음을 처음으로 하며, 한편으로 선조 三三[삼삼]년 경자, 임진 왜란 뒤 직재에 이탈리아국 선교사 리마두(利瑪竇 )가 북경에 와서 교당을 짓고 있은 뒤 로부터, 우리 오고 가는 사신 편에 예수교의 서적과 함께 서양 학술이 연방 조선으로 흘러 들어오다가, 효종 四[사]년에는 그 책력 만드는 법을 채용 하기에 이르렀으며, 예수교는 천주학(天主學) 혹 서학(西學)이라 하여 숙종 초년으로부터 행하고, 헌종 二[이]년에 비로소 불란서(佛蘭西)국 선교사 「 모방 」 이 만주 방면으로부터 가만히 입국하여 이로부터 그네의 발꿈치가 서로 잇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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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으로는 동방 해상 무역의 권리를 차차 제 한 손에 거둬 가진 영국이 우리순조 때에 더욱 세력을 펴고 일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국으로 수출하여 거리(巨利)를 탐하더니, 우리 헌종 五[오]년 기해, 백 년 조금 전에 그투나 청·영 양국 사이에 아편에 인한 전쟁이 일어나서 三[삼]년 이상 승강을 하다가, 마침내 청국이 굴욕적으로 강화하여 향항(香港)을 영국으로 내어주고, 광주(廣州)· 복주(福酒)· 영파(寧波)· 하문(厦門)· 상해(上海)의 다섯 항구를 개방하기로 하니, 이로부터 영국의 지나에 있는 특수한 지위가 결정 됨과 함께 그 야심은 그칠 바를 몰랐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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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편 전쟁의 一○[일십]년 전인 순조 三一[삼일]년 신묘에는 영국 군함 세 척이 충청도 홍주(洪州) 해상에 와서 통상을 청한 일이 있고, 六[육] 년뒤인 헌종 十一[십일]년 을사에는 영국 측량선이 우리 서남 해상으로 출몰 하면서 수심을 측량한 일이 있으며, 이 비슷한 일이 가끔 연해(沿海) 지방에 있었읍니다. 이와 동시에 안남(安南)국을 빼앗아 동양 무역의 근거지를 삼은 불란서 선척(船隻)의 우리 해상 왕래도 끊이지 않고, 영국 마찬가지로 혹 통상을 구하고, 혹 측량을 행하고 다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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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북방에서는 효종 때에 조선 총수에게 발끝을 다치고 잠시 움찔 하였던 러시아가 다시 나와서, 시베리아(西比利亞)를 다 집어먹고 이어 바다로 나가기 좋은 항구를 얻고자 하여, 남방으로 내려올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철종 十一[십일]년 경신에 청국이 영·불 연합군과 싸우고 화친하려는 틈에 들어서 심부름을 하고 그 보수로 우수리강(烏蘇里江) 동편, 곧 연해주(沿海州)를 얻으니, 그 끝이 두만강 어귀에 다다라서 우리와 러시아가 지경을 연 접하게 되었읍니다. 그런데 영국과 러시아는 그전부터 여기저기서 권력을 다투고 있는 사이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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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세 가운데 조선에서는 철종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한 아드님을 모셔다가 그 뒤를 이었는데, 나이 겨우 十二[십이] 세이므로 대원군이 나라 일을 대신 처리하게 되었읍니다. 이 임금 이 뒤에 고종(高宗)이라는 어른입니다. 대원군은 사람됨이 호매과단(豪邁果斷) 하여, 먼저 안동 김씨 세도 시절의 여러 가지 그릇된 일을 바로잡고 그 전부터 고쳐야 할 줄을 알고도 고치지 못하던 여러 가지 폐단을 덜고, 또 임진 왜란에 불탄 채로 쑥밭 되어 있던 경복궁을 고쳐 이룩하는 등 거창 한일을 많이 결행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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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종 三[삼]년 병인에는 국내 사상을 단일하게 하기 위하여 천주교도를 탄압하여, 신앙을 버리지 않는 자는 불국의 선교사와 아울러 죄다 죽이고, 이 기별을 들은 불국 군함 여러 척이 두 번이나 강화를 와서 침범 하는 것을 그때 족족 싸워서 물리치고(이것을 병인 양요라 이른다), 五[오] 년 신미에는 미국 배 한 척이 대동강으로 하여 평양에 이르러 작폐하는 것을 백성들이 불질러서, 이 기별을 듣고 미국 함대 다섯 척이 와서 강화 해협으로 하여 경성으로 향하려 하는 것을 광성(廣城)에서 맞아 싸워 그 세력을 꺾어 물리치니(이것을 신미 양요라 이른다), 이에 대원군은 호기가 나서 서양 제국도 별수 없다 하고 양이 배척(洋夷排斥)을 국시(國是)로 하는 비(碑)를 서울 이하 대도회에 세우고 한번 세계를 흘겨보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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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五[오]년 무진은 일본의 명치(明治) 임금 원년으로서, 三[삼]백 년 동안 덕천(德川) 장군에게 아엿던 정권이 왕실로 돌아오고, 내치와 외교의 모든 제도를 고쳐서 이른바 왕정유신(王政維新)을 실현하는 동시에, 그 전에 대마도를 사이에 넣고 동래부윤(東來府尹)을 대수(對手)로 하여 행해 오던 양국 교제를 그만두고 보통의 국제 관례(國際慣例)에 의하는 새 외교 관계를 맺자는 청구를 우리에게 요구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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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별안간 양복을 입고 서투른 말을 쓰는 것이 수상 스러울 뿐 아니라, 그 태도에 의심스러운 것이 많아서 그 요구를 응치 아니하니, 이를 인하여 일본 안에 조선을 무력으로 치자 하는 의논이 일어났다는 기별이 들리고, 또 한편으로는 멀쩡한 한 나라이던 유구(琉球)를 합병 한다, 번 연히 청국 땅인 대만을 침략하는 등 괴상한 거조가 많음으로써, 대원군은 일본을 경계하여 더욱 통상 조약 맺기를 금지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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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대원군의 쇄국 배외 정책(鎖國排外政策)에는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없는 것 아니로되, 그것이 세계의 대세에 어그러지는 일인만큼 오래 고집 할수는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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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一○[일십]년 계유에 고종이 친정(親政)하시고 대원군이 물러나매, 조정의 의논이 차차 돌리고 이어 이듬 이듬 올해에 일본 군함 운양호(雲揚號)가 강화 앞에 와서 머무는 것을 우리 포대에서 포격한 일이 있어, 일본이 이 일을 탈잡아서 그 대신 조약을 맺자고 떼쓰매, 드디어 묘의(廟議)를 결정하여, 이듬 병자 二[이]월에 두 나라 전권(全權)이 강화에 모여서 수호조규(修好條規) 十一[십일]조를 체결하니, 이로써 一○[일십]년 가까이 갈등을 거듭하던 조선 일본의 외교 관계가 정돈되고, 또 조선이 처음 외국으로 더불어 정식의 통상 조약을 맺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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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과로 부산·원산·인천 세 항구가 차례로 개방되어서 세계의 손이 언제든지 와서 우리를 건드리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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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외교의 길이 열림으로부터 새 세계의 풍조가 밀려 들어와서 청년의 지기를 고동하니, 그중에 총명하고 감각 빠른 이가 일본을 모범으로 하여 개화 진취(開化進取)하기를 꾀하고, 먼저 신식 군대를 만들기 위하여 일 본 장교를 데려다가 그 교련을 맡겼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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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원군은 일본의 믿기 어려움을 생각하고 은근히 걱정하는 바가 있더니, 十九[십구]년 임오에 구식 군인들이 요(料)를 잘 타지 못함에 분개하여 난을 일으키거늘, 슬그머니 이 무리를 부추겨서 일본 교사를 죽이고 그 공 사관을 불지르고, 인하여 친정 이래로 조정을 탁란하게 하는 왕후 민씨의 일 족을 집어치우는 데까지 일을 발전시켰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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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세가 이 때문에 꺾였지마는, 쫓겨갔던 일본 공사가 군함의 보호 아래 고대 돌아와서 사건의 책임을 묻고, 일본 군대를 서울에 주둔 시키는 허락을 받고서 이른바 수비대(守備隊)를 데려다 두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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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청에서도 이것을 모르는 체할 수 없어서, 수천 명 군사를 데려다가 서울에 주둔하는 밖에, 일본의 야심을 억제함에는 조선을 여러 나라의 균세(均勢) 아래 둠이 좋다는 뜻을 우리에게 권고하여, 임오 이후 몇해 동안에 우리가 미(米)·영(英)·덕(德)·노(露)·의(義)·불(佛) 여러 나라로 더불어 차례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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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선이 국제 무대의 정면에 나서는 동시에 세계의 모든 풍파가 영향을 전해 음은 무론이요, 더욱 청·일·노·영 네 나라의 씨름하는 불똥은 가장 예민하게 우리를 자극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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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나는 갑신 一○[일십]월지변이란 것이니, 일본이 아시아에서 고개를 쳐 들자면 청국을 눌러야 하고, 그러함에는 청국의 세력을 조선으로부터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함이 필요함으로써, 임오 이후로 우리 청년 정치가들이 청과의 옛 관계를 끊어 버리려 하는 것을 이용하여, 그 뒷배를 보다가 二一[이일] 년 갑신에 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 등이 청에 붙좇는 패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매, 일본이 자진하여 병력과 재력으로써 후원할 것을 언약하고, 및 一○[일십]월에 거사하매 서울 있는 일 본 병이 청병과 충돌하는 밧세 다른 언약한 바를 배반하여, 박영효 등의 계획이 용두 사미로 되고 관계자가 일본 또 구미(歐米)로 망명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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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 뒤에 일본과 청의 대표가 천진(天津)에 모여서 의논하여 일·청 두 나라가 다 조선으로부터 철병할 일, 장래에 일이 있어 한 나라가 조선에 출병 하게 되는 때에는 반드시 다른 한 나라에 통기할 일 등을 정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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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영국과 노국이 중앙 아시아에서 경계 다툼을 하여 거진 싸움을하게 되매, 二二[이이]년 을유에 영국이 작전상 필요로 돌연히 함대를 보내어 우리 남해 위의 거문도를 점령하여 조(朝)·청(淸)·영(英)·노(露) 네나라 사이의 말썽이 되다가, 영국이 노국으로부터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二四[이사]년 정해에 겨우 철퇴한 일이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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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안 러시아의 공사 「웨베르」는 일본을 싫어하는 우리 궁정의 비위를 맞추어서 차차 신뢰를 두텁게 하다가, 조선·러시아의 접경인 두만강 좌우에 백 리 되는 땅을 떼어서 두 나라 사람만이 자유로 무역할 수 있는 이른바 육로 통상 조약(陸路通商條約)의 체결을 우리에게 짓궂게 청구 하다가, 거문도 문제의 승강 통에 한때 무춤하고, 이것이 해결된 이듬해 二五[이오] 년 무자에 그 조건을 완화하여 경흥(慶興) 한 곳을 개시장(開市場)으로 하는 변계 통상 조약(邊界通商條約)을 체결하기에 성공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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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이 장래의 두 나라 관계를 어디로 끌고 가게 될는지, 러시아의 뱃속을 짐작하는 이는 심히 우려하기를 마지 못하였읍니다.
【원문】15. 세계로 끌려 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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