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쉽고 빠른 조선 역사 ◈
◇ 16. 일본과의 관계 ◇
카탈로그   목차 (총 : 18권)     이전 16권 다음
1946.12.
최남선
1
十六[십육], 일본과의 관계
 
 
2
조선이 국제 무대에 나선 뒤에 독립 자강(獨立自强)을 목표로 하고 나가는 청년 정치가들의 분투에는 볼 만한 것이 없지 아니하였지마는, 그 활동이 항상 조정을 범위로 함에 그쳐서 한 번 수구파(守舊派)의 반동을 만나면 그만 모가지를 움츠러뜨리고 말며, 또 항상 일본의 세력을 의뢰하려 하고 참으로 가주 독왕(自主獨往)하는 기개를 볼 수 없음이 지각 있는 이의 한가지 개탄하는 바이었읍니다.
 
3
이러한 벼슬아치의 행동에는 눈도 떠보지 않고 딴뺌이로 민중 스스로의 혁명을 준비하던 자가 동학당이러니, 이만하면 되겠지 하는 가늠으로 三一[삼일] 년 갑오 二[이]월에 전봉준(全琫準)을 지도자로 하여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행동을 개시하고 「제포 구민(除暴救民)」을 표방하니, 사방이 이에 향응하여 민중 운동 있어 온 뒤의 처음 보는 기세를 나타내었읍니다.
 
4
조정에서 즉시 군사를 내어 진압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패전하고, 전주가 동학의 손에 돌아가서 형세가 급해지매, 민씨네가 구원을 청국에 청하여 그 병력을 얻어서 겨우 전주를 회복하고 난을 평정하였읍니다. 한편에서 일본은 오랫동안 무비(武備)를 강화(强化)하여 가지고 청국과 부딪칠 기틀을 찾고 있었는데, 청국이 마음대로 출병한 것은 천진 조약에 위반함이라는 이유 로써 이것을 탄하여 말썽을 부리다가, 六[육]월에 드디어 전쟁을 개시 하고 인하여 조선에 있는 청국 세력을 부셔내었읍니다.
 
5
이러한 형세 아래 갑신 이후로 쭈크리고 들앉았던 개화당들이 나서서 임금으로 하여금 자주 독립을 종묘에 서고(誓告)케 하고, 그동안 정권을 농락하 언 민씨 일족을 물리치고 새 정치 제도를 세우기에 힘쓰니 이것이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는 것입니다.
 
6
우리 아산(牙山)에서 시작한 싸움이 평양으로 만주로 들어가면서 청국 이 패전하고, 이듬해 二[이]월에 마관(馬關)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하여, 그 첫 조목에 청국이 조선의 독립국임을 승인하고, 또 청국은 대만과 요동 반도를 일본에 베어 주기로 하였더니, 노(露)·독(獨)·불(佛) 三[삼]국이 나서서 일본이 요동 반도를 점령함은 동양 평화의 화근이라 하여 일본을 위협 하여 청국으로 돌려보내게 하였읍니다.
 
7
노국이 이렇게 일본을 내리누른 뒤에, 서울 있는 그 공사가 우리 조 정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한 틈을 타서 노국의 신뢰할 만함을 기회 있는대로 상하에 선전하고, 한편으로는 일본 때문에 세력을 잃은 민씨들이 여 기조력하여 궁정 안에 노국의 세력이 늘고, 그만큼 일본의 위신이 점점 떨어졌읍니다.
 
8
일본 공사 삼포오루(三浦梧樓) 이하가 이를 보고 분개하여 민간의 낭인(浪人) 패를 일으켜서 을미(乙未) 八[팔]월 二○[이십]일에 불평 중 지내는 대원군을 떠받들고 경복궁으로 돌입하여 임금을 강박하여 정부를 갈고, 일변 왕후 민씨를 살해하여 불사르니 이것이 을미 八[팔]월지변입니다. 이 정변 끝에 구력(舊曆)이 폐지되고 양력(陽曆)이 시행되며, 단발령(斷髮令)을 내려 이를 강행하며, 연호(年號)를 세워 건양(建陽)이라 하며, 신식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읍니다.
 
9
그러나 민후를 살해한 것이 임금 부자분에게 철천지한을 품겼음은 무론이요, 또 국민 일반에 절대한 분격을 사서 의병(義兵)이 사방에 일어나며, 일본으로 더불어 한 하늘을 같이 이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일반이 가지게 되었읍니다.
 
10
또 임금 부자분은 다시 무슨 변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의구심(疑懼心)에 강박(强迫) 되어서, 건양 원년 二[이]월 十一[십일]일(구력 을미 十二[십이] 월 二八[이팔] 일)에 처소를 노국 공사관 안으로 옮겼다가 一[일]년 만에 경운궁(慶運宮)을 수리하여 새 대궐을 만들고 이리로 돌아오셨읍니다.
 
11
그리고 이해 八[팔]월에 그동안 겨를하지 못한 바를 결행하여 황제 위에 오르시고,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이라 하고, 연호를 고쳐 광무(光武)라 하고 대한국제(大韓國制) 九[구]조를 반포하였읍니다.
 
12
그러나 국민은 조정 일이 청 아니면 일본, 일본 아니면 러시아에 기대려하여 자주의 실력이 없음을 분개하더니, 건양 원년 가을에 갑신년의 망명자로 미국에 가서 있던 서재필(徐載弼)이 돌아와서 독립 협회를 설립하고, 인민의 힘으로써 내정 개혁(內政改革)과 국권 응호에 당하려는 의기를 보이니 한 때의 인심이 이리로 쏠렸읍니다.
 
13
그러나 민중의 사이에 뿌리를 박지 못한 운동이라 一[일], 二[이]년 지내는 동안에 정부와 싸우는 기백을 잃고 이럭저럭 되며, 나라를 제국의 문패 아래서 의연히 그런 도깨비 장난을 되풀이하였읍니다.
 
14
이 사이에 일본과 러시아는 가만한 가운데 조선 문제를 가지고 임자 제 쳐놓고의 공론을 하여, 누구나 조선을 혼자 먹지 못할 바에 차라리 두 동강을 내 어서 북쪽을 러시아, 남쪽은 일본의 세력 범위로 하자는 이야기가 진행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이 공론을 하는 한쪽으로 핑계 있는 족족 만주를 요모조모 제 손아귀에 넣다가, 청국 의화단(義和團) 난리 끝에 만 주 전부를 사실상으로 점령하고, 이어 조선에까지 손을 뻗어 나왔읍니다.
 
15
일본에서는 일영 동맹(日英同盟)을 맺어 이를 저항하려 하였으되, 노국에서는 노불 동맹(露佛同盟)으로써 이를 되받았읍니다. 암만해도 타협할 여지가 없어지매, 광무 八[팔]년 二[이]월에 마침내 일본의 승전으로 끝나고, 九[구] 년 九[구]월에 미국의 중개로 「포오츠머드」에서 강화 조약이 성립 되니, 그 가운데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경제·군사로 특수한 이익을 누림을 노국이 승인하다는 조문이 있었읍니다.
 
16
일찍 일청 전쟁의 끝에 청국을 몰아내고, 이제 또 일로 전쟁으로써 노국을 걷어차 버려서, 일본이 조선에서 판막음 승전을 하니, 조선만에 대하여 는아 무도 흥야항야할 이가 없으며, 더욱 영국과는 동맹 관계로 있고 미국은 이번 강화 조약의 중신된 책임이 있는지라 일본이 조선을 가지고 무슨 짓을하든지 참견할 까닭이 없었읍니다.
 
17
또 일본 자신의 병자 수호 조규 이래로 너무 조선 독립의 버팀목으로 자처 하여 온 것이 이제 와서는 도리어 거북하게 되었지마는, 일본의 이말은 실상 조선을 남에게는 내어줄 수 없다는 의미쯤으로 외치던 것이매, 이러한말한 것을 어렵게 알 양심은 본디부터 그네에게 있지 아니하였읍니다. 다만 문제는 어떻게 하여 남의 볼썽 사납지 않게 조선을 집어삼키겠느냐 하는 것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18
그래서 몇낱 층계를 만들어서 저희 체면을 꾸며 보려 하기에 여러 해 세월이 걸렸읍니다. 광무 八[팔]년의 첫번 늑약(勒約)으로써 재정과 외교를 저희 천거하는 고문관(顧問官)의 감독 아래 넣고, 외국과의 조약은 저희 정부와 상의한 뒤에 체결하게 만들었는데, 실제에 있어서는 재정·외교뿐 아니라 교육·경찰까지도 죄다 저희 손에 넣어 버리니, 이는 고문 정치라는 한층계요, 이듬 九[구]년 十一[십일]월에는 둘 째번 늑약(勒約) 七[칠] 조 로써 외교권을 송두리째 일본에게 내어 맡기고 일본에서 통감(統監)이란 것이 우리 서울에 와 있어서 외교 사무를 보기로 하니, 이것도 말만 외교지 사실은 온갖 정무를 저희가 감독하는 것으로서 이는 보호 정치(保護政治)라는 한층계 입니다.
 
19
어느 조약이고 저희 만들어 오는 조건에 억지로 도장을 찍어 가는 것 이지마는, 더욱 보호 조약은 황제는 무론이요 그때의 참정대신(參政大臣)도 끝까지 반대하고 만 것을 얼쭘얼쭘 발포한 것이매, 국민 상하의 분개가 자심 하여 조약 폐기의 운동이 맹렬히 일어나며, 지방 각처의 의병은 벌떼같이 야단하여 걷잡을 수 없으며,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송병선(宋秉璿) 등 중신(重臣)의 목숨으로 이 조약을 반대하는 이가 뒤를 대었읍니다.
 
20
광무 황제께서는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서 十一[십일]년 一[일]월에 보호 조약을 승인하신 일 없노라는 친서를 영국인 발행의 <대한매일신보>에 발표 하시고, 또 그해 六[육]월에 홀란드(和蘭) 헤이그(海牙)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매, 거기 사신을 보내서 만국의 공론이 어째 없느냐는 항의를 제출 케 하였읍니다. 이에 일본이 놀라고 걱정하여서 그 외무대신이 건너와서 통감과 함게 우리를 협박하여, 광무 황제를 퇴위시키고 아드님 융희(隆熙) 황제를 세워 창덕궁으로 이어케 하고, 본디 대궐을 덕수궁(德壽宮)이라 하여 구황제를 유폐적(幽廢的)으로 독처(獨處)하시게 하였읍니다.
 
21
여기 이어 세 째번 늑약 七[칠]조로써 모든 행정에 다 통감의 지도를 받고, 법령(法令) 제정에도 통감의 승인을 얻고, 일본인을 필요한 관리로 채용 할 일을 정하여, 이 결과로써 먼저 군대를 해산하여 버리고, 각 행정기관의 둘째 자리를 일본인이 차지하여 대소 사무를 지휘 감독하게 되니, 이는 차관 정치(次官政治)라는 또 한 층계이었읍니다.
 
22
그리고 한옆으로 동양 척식 회사를 만들어서 국유 전답(國有田畓) 으로써 일본인의 이민(移民)을 강행하고, 한국은 행을 만들어서 화폐와 금융의 권리를 휘잡고, 행정 기관의 중에서도 사법권·경찰 사무를 먼저 떼어 가서 한국의 나라 되는 실지는 이미 없어졌읍니다.
 
23
그 꼴을 보고 민간에서 정치·사회·교육·산업 각 방면에 걸치는 자강운동(自强運動)이 열심으로 진행되고, 지방에 있는 의병의 활동이 또한 활발을 극하였지마는, 기울어진 시세를 이것만으로 붙잡을 수 없었읍니다. 그럴진대 국민의 의분을 나타낼 길이 또 하나 있다 하여 직접 행동(直接行動)이 뻔찔나게 유행하니, 융희 二[이]년 三[삼]월에 외교 고문 미국인 「 스티븐스 」 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 애국단원에게 죽고, 三[삼]년 一○[일십] 월에 그전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하르빈(哈爾濱)에서 안중근(安重根)에게 죽고, 그해 十二[십이]월에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이 서울 천주당 앞에서 이재명(李在明)에게 칼을 맞아 죽을 뻔한 일 등이 연방 일어났읍니다.
 
24
일본은 이러한 일 생기는 것을 해롭지 않게 여기다가, 저희 준비가 끝나매 치안 유지상으로 한국을 그냥 둘 수 없다 하여, 세 째번 통감으로 그 육군대신 사내정의(寺內正毅)가 와서 총리 이완용을 데려다 놓고 가만히 조건을 정하고, 四[사]년 八[팔]월 二二[이이]일에 병합 조약(倂合條約)이란 것을 만들어서 二九[이구]일에 이를 발표하였읍니다. 이렇게 하여 이씨조선의 二七[이칠] 대, 五一九[오일구]년 만에 끝나는 동시에, 단군 이래 四二四三[사이사삼] 년의 면면히 끊임 없던 전통이 보기 싫은 한 매듭을 맺게 되었읍니다.
 
25
그런데 이는 실로 일본이 천 년 이래의 불측한 흉계를 성취하고 四○[사십] 년래 의 엉거능칙한 허위의 탈을 벗은 것이요, 또 하늘이 조선 백성에게 한 번 민족적 반성과 국민적 분발을 재촉하시는 큰 시련이었읍니다.
【원문】16. 일본과의 관계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한국역사〕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46
- 전체 순위 : 1200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72 위 / 182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1) 따라지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최남선(崔南善) [저자]
 
  1946년 [발표]
 
  # 한국역사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목차 (총 : 18권)     이전 16권 다음 한글 
◈ 쉽고 빠른 조선 역사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4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