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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조선의 국민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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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2.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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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십일], 조선의 국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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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조선이 나라를 세우매 태조(太祖) 三[삼]년 一[일]○월에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기고, 그 겨울로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一[일]년 만에 경복궁(景福宮)과 태묘(太廟)와 사직(社禝)과 성균관(成均館)을 이룩하고, 五[오] 년 봄에 八[팔]도 백성 二[이]○만을 풀어 성을 둘러쌓고, 그해 섣달까지 대모한 역사를 마치었으나 이탈저탈하여 한양과 송도로 오락가락하고, 태종(太宗) 五[오]년부터야 완고하게 한양을 서울로 하게 되었읍니다. 이 때까지의 추세(趨勢)로써 말하면, 송도보다 북녘으로 더 내켜야 할 도읍을 도리어 한양으로 뒷걸음시킨 것은 섭섭한 일이었으되, 반도 하나만으로 보면 사방의 거리가 매우 평균하고 또 큰 물이 둘러 있어 지방의 물자를 날라 들이는 데 크게 편리하여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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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太宗)·정종(定宗) 두 대 동안에는 집안 안의 자리다툼으로 뒤 숭숭하다가, 네째 임금 세종(世宗)이 섬에 미쳐 이씨조선의 창업(創業)한 의미를 보일 시운이 되었읍니다. 그것은 사회와 문화 각 방면에 걸쳐서의 모든 것 을 정돈하는 소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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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북방 국경의 정돈이니, 그전 고려에서 四[사]백여 년을 두고 북방으로의 확장을 힘썼으나, 갈마들어 대륙에 일어나는 세력 때문에 뜻과 같지못한 것을 애닯게 여겨서, 이씨조선에서는 위선 백두산 이남, 암 록· 두 만두 강 이쪽을 판도(版圖) 안에 거두기를 생각하였읍니다. 그래서 세종 초년에 여러 번 준비 공작을 한 다음, 그 六[육]년 이후에 압록강 상류 지역에여 연(閭延)·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麀芮) 등 四[사]군을 두고, 十六[십육] 년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두만강(豆滿江) 연변 (沿邊)에 종성(鐘城)· 회령(會寧)· 경원(慶源)· 경흥(慶興)· 온성(穩城)· 부령(富寧) 등 육진(六鎭)을 베풀어서 되(胡人[호인])를 제어하면서 우리 영토를 확보 하기로 하였읍니다. 이 뒤 오늘날까지 조선 반도를 보통 압록·두만 두 강 이 쪽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이때부터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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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남방 왜구 문제의 해결이니, 고려 말년에 화약을 쓰기 시작하고, 이씨 조선 태종 때에 거북선이라는 철갑 씌운 배를 만들고, 이밖에 여러 가지 필요한 설비를 하여, 그렇게 들싸던 왜구도 적이 고자 누룩 하여졌지마는, 왜구 란 것의 중에는 생활상 없어서는 아니되는 쌀·옷감 같은 것이 없어서 죽지 못하여 모질음을 쓰고 다니는 놈이 많은즉, 이런것은 위력으로 누르기만 하여서 문제가 끝날 것 아니매, 세종 워에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가서 쳐서 먼저 위엄을 보이고, 二五[이오]년에는 통신사 변중문(卞仲文)을 경도로 보내어서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동래(東萊)의 부산포(釜山浦), 울산(蔚山)의 염포(鹽浦) 세 포구를 일본 사람에게 개방 하여 그 네로 하여금 와서 살게 하고, 또 일본 남서 지방의 추장(酋長)들에게 一[일] 년에 배 몇 척씩 물건 싣고 와서 무역함을 허락하되, 그 소개하는 권리를 대마도에 줘서 이 무리 저 무리로 하여금 다 얻어먹고 살 길을 열어 주기로 하였읍니다. 이 평화적 정책이 목적을 달하여 왜구의 걱정이 차차 없어졌으며, 한옆으로 삼[三]포 바닥이 좁아서 넘쳐 나오는 왜인은 경상도 각 지방에 머슴살이·비부(婢夫)장이 또 노비로 팔려서 그 수가 四[사], 五[오] 천명을 세이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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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째는, 국내 사정의 똑바른 인식이니, 우리나라의 산천 형승과 풍토 물산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자세하고 분명한 자료가 없더니, 세종 六[육] 년· 七[칠] 년에 연거푸 지방 관리에 대하여 자연 현상·인문 사실 전반에 관한 온갖 조목을 낱낱이 조사 보고케 하여서, 윤회(尹淮)·신색(申穡) 등으로 하여금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여덟 권을 만들게 하였읍니다. 이 책이 나서 비로소 조선 안의 온갖 사정이 손바닥을 보는 것같이 환하여지고 뒤에 이것을 더 늘여서 <동국여지승람> 같은 책이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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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째, 우리 말을 우리 스스로의 글로써 기록하는 법을 마련함이니, 우리나라에는 한문을 빌어서 구차스럽게 우리 말을 적는 이두(吏讀)라는것이 신라 때 로부터 있어 올 뿐이요, 이때까지 우리 말소리를 그대로 나타내는 자연 한 글자가 없더니, 세종께서는 이를 옳지 않다 하사 二五[이오]년에 일대의 학자들로 더불어 독특한 새 글씨 二八[이팔]을 만들어서, 다만 우리 말뿐 아니라 무릇 천지간의 소리라는 소리를 죄다 그대로 그려낼 수 있게 하고, 이 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 이라 하여 세상에 반포하시고, 곧 이 글씨로써 한문의 자음(字音)을 바로자아 정하시고, 국가의 영광을 찬양하는 노래 책도 만드시고, 불교·유교 등의 경전(經典)도 번역하는 등 각 방면으로 활용 하는 실례를 보이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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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도 그 형상이 간단하고 조직이 학리적(學理的)임으로써 세계 어느 글씨보다도 정묘하며, 또 그것을 만든 동기가 임금이 백성으로 하여금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하게 하려 함에 있는 점이 다른 아무 나라의 글씨 내력에서도 볼 수 없는 바라 하여 크게 세계의 찬탄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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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학술 장려에 대한 지극한 뜻이니, 세종은 천자가 총명하신 데 다가 공부하기를 즐기사 손에서 책을 놓으시는 일이 없으며, 그래도 나빠하사 대궐 안에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한세상에 대표될 만한 학문가들을 모 아들여서 두터운 대우 아래 학문 연구에 종사하게 하고, 그 결과를 거둬서 나라 다스리고 백성 편안하게 하는 데 응용하시며, 일변 각 지방관에게 필요 한일 있는 족족 연구 자료의 제출과 실지 시험의 분담을 명하사 온 나라와 조정이 한 큰 학술 세계와도 비슷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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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업적은 경학·문학의 밖에 수학·천문학·의학·농학 등 온갖 방면에 걸쳐서 크게 찬란한 것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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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는 과학 정신을 한고작으로 높임이니, 동양에서 옛날에 학문이라 하는 것은 보통으로 문학을 의미하고, 학문 좋아하는 임금이란 이가 대개 글을 잘하고 선비를 사랑하였다하는 범위를 벗지 못하거늘, 세종대왕께서는 학문에도 범연치 아니하시거니와 더욱 과학, 그 가운데도 책력 바로 만들고, 병 잘 고치고, 농사 소출 많게 하는 후생 관계(厚生關係)의 과학에 심력을 기울이시고, 이 모든 것을 재료 수집과 그 실험적 연구와 또 그 결과의 실지 응용 등 계단으로 처리하셔서, 말하자면 인생이 곧 학문이요 정치가 곧 과학이라는 태도를 가지고 계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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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의 몇 가지를 들건대, 책력의 기초인 천문 현상을 바로 관측 하기 위하여 대궐 안에 간의대(簡儀臺)를 지으시고, 그때 천문학의 최고 수준에 다다른 가지가지의 관측 기계를 설비하시고, 주야 없이 실측에 종사케 하신것과, 온 나라 안의 비 오는 분량을 정확하게 알아서 농사 형편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을 판단하실 양으로 二四[이사]년(서력 一四四二[일사사이]), 약 五[오]백년 전에 일정한 표준에 말미암는 측우기(測雨器)를 八[팔] 도에 나눠 주시고, 비오는 대로 그 분량을 보고케 하신 것이, 한편으로 조선뿐 아니라 전세계에 있는 우량 관측의 시초가 된 것과, 여러 해의 노력으로써 동양 고금의 의약 지식(醫藥知識)을 죄다 모아서 그때 세계에 짝이 없는 의학 백과 사전인 <의방유취(醫方類聚)> 二六六[이육육]권을 편찬하신 것과, 그 전 농업 지식이 대개 지나의 책을 표준으로 하더니, 풍토가 다르면 농사 하는 이치가 같을리 있느냐 하고 각 지방에서 실험 농리를 수집하여 들이라 하여 <농사직설(農事直設)>이라는 책을 만들어서 국내의 반포하신 것 등은, 진실로 정신과 업적 두 가지로 다 못내 탄앙할 만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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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예(禮)와 악(樂)을 바로 잡음이니, 동양 옛날에 일국 문화의 정도를 나타내는 표준이 예와 악인데, 고려 이래로 여러 번 우리나라의 독특한 예와 악을 마련한다고 한 일이 있었으되, 아직 시원치 못하더니, 세종 때 에이 방면의 전문가를 얻어서 비로소 조선 문화의 고상함을 표시할만한 예와 악의 전범(典範)을 만들어 내고, 더욱 악으로 말하면 박연(朴堧)이라 하는 악학 대가(樂學大家)의 실험으로써 지나 옛날 이래의 그릇된 것을 낱낱 히바로 잡게 되었음은 크게 후세에 자랑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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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대왕 재위 三二[삼이]년 동안의 정치·문화·사회·민족 각 방면에 걸쳐서의 공덕은 자세히 말씀할 겨를이 없읍니다. 도틀어 말하여 세종대왕은 조선 문화의 금자탑을 싸항 놓으신 위인이요, 또 동서 고금 역사상에 있는 가장 총명 예지하신 성군(聖君)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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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뒤에 아드님 문종(文宗)과 손자 단종(端宗)이 잠깐씩 임금 노릇 하시고 거기 이어 세종의 다른 아드님 세조(世祖)가 위에 오르셨는데, 그 자격이 아버님께 내리지 않고, 잘난 신하들이 조정에 그득하여, 안으로 문화상 건설과 밖으로 군사적 활동과 당신 스스로 학리와 기계를 발명 창조 하시는 등으로 다 허다한 업적을 남기셔서, 조선의 국민 문화가 이두 대의 동안에 거의 완성하였다 할 만합니다.
【원문】11. 조선의 국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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