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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사람들 ◈
◇ 젊은 사람들 (8) ◇
카탈로그   목차 (총 : 20권)     이전 8권 다음
1952년 2월
이무영
1
젊은 사람들
 
2
8
 
 
3
"어디로 가는 거요?"
 
4
"어디루 가는 건 네가 알아서 뭣해!"
 
5
"그래두 가는 데나 알아야 할 것 아니오?"
 
6
"잔소리 말아, 이 자식아!"
 
7
하고 고함소리와 함께 몽둥이가 어깻죽지를 내려친다.
 
8
재덕은 또 입을 다물밖에 없었다.
 
9
갈수록에 산은 깊다. 새벽달이 있다고는 하지만 달빛도 샐 틈조차 없이 솔이 우거졌다. 그것도 아름드리 노송 같았으면 그래도 하늘이 보이련만, 이삼십 년의 어린 나무들이라 가지도 성하거니와 잎도 무성해서 아무리 가야 별도 보이지 않는다. 길이 있을 리 없다. 놈들은 자기네의 손·발이 자유로운 생각만 했지, 재덕이가 뒤로 결박을 당한 데다가 발도 겨우 한 발자국 푼수를 남기고 발목을 옭아맨 생각은 못하는 모양이다.
 
10
조금만 떨어져도 종아리고 어깨고를 마구 후려친다. 기를 쓰고 따라가느라고 어쩌다 한 발만 앞을 서면 이번에는 앞선다고 또 갈겨댄다.
 
11
아랫종아리를 어찌도 후려치는지 앞서잔 것이 아니라 비틀대려니까 뒤에서 결박 끈을 후려채 비알에서 나둥그러진 것이련만,
 
12
"이 자식이 어디를 달아나는 거야!"
 
13
하고 한 놈이 축구식으로 옆구리를 차자,
 
14
"쥑여라, 그놈에 새끼!"
 
15
하기가 무섭게 세 놈의 뭇 발길이 들어온다.
 
16
몸이 자유롭고 육신이 성해도 따라갈 수 없을 텐데, 이 지경이니 자꾸 떨어질밖에는 없다.
 
17
목적지도 모르고 방향도 모른다. 달을 보아 새벽도 멀지 않았거니 할 뿐, 시간도 알 길이 없다. 끌려가는 까닭 또한 알 리 없다.
 
18
"그런데 이 자식은 왜 귀찮게 끌구 가라는 거야? 그 자리서 모두 없애 버리지 않구!"
 
19
하는 것을 보면 놈들도 자기네 의사가 아닌 모양이다.
 
20
"뉘가 안다나. 분대장이 대대장한테까지 데려다 주라니 하는 노릇이지!"
 
21
"분대장은 어디로 간다노?"
 
22
"내일 밤 일이 있잖아?"
 
23
분대장이란 것이 아까 부단장을 잡던 놈인가보다. 이름은 모르나 재덕이도 분명히 어디서 여러 번 본 녀석이다.
 
24
"그러면 우리는 가는 길로 곧 되짚어 와야잖나?"
 
25
"그렇게 되겠지. 내일 밤 일이 있으니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동면까지 가야 하네. 동문 읍이지?"
 
26
"읍이야."
 
27
하고 결박 끈을 잡은 놈이 대답한다.
 
28
'이놈들이 아까부터 내일 밤 내일 밤 하니 내일 밤에 대체 무엇이 있다는말인가?’
 
29
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재덕이는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내일 밤에는 또 무슨 변괴가 있으려나보다.
 
30
"너, 이 속에 뭣이 들었냐?"
 
31
박 동무란 녀석이 묻는다. 재덕이한테서 뺏은 서류 봉투를 두고 하는 말이다.
 
32
"별것 없소."
 
33
"별것 없다?"
 
34
"보나 안 보나 우리들 죽일 살인명부겠지?"
 
35
재덕이가 하도 말 같지 않아서 대꾸도 않으려니까,
 
36
"안 그래?"
 
37
하고 재우친다.
 
38
벌써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너무도 끔찍한 꼴을 눈앞에서 본지라, 죽는 것은 겁날 것이 없었지만, 말을 않으면 또 팰 테니 걱정이었다.
 
39
"날이 밝거든 보면 알지 않겠소."
 
40
"글쎄, 그러니까 뭣이 들어 있느냐 말야?"
 
41
"회의록과 인쇄물이오."
 
42
"우리네 가족 죽이자는 회의록?"
 
43
"아니오."
 
44
"찢어 죽이겠느냐 발겨 죽이겠느냐 하는 걸 공론한 회의록이겠지?"
 
45
재덕은 대답을 않아 보리라고 못 들은 체해 보았다.
 
46
"네 이놈의 새끼들, 10월 보름날 우리네 가족들을 전부 몰살하기로 되어있다지?"
 
47
"오해요. 그럴 리가 있소."
 
48
"흥, 이놈의 새끼, 오해? 이놈의 새끼야, 우리는 귀 막고 사는 줄 아느냐? 네놈의 집에도 우리와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둬!"
 
49
"정말 하마터면 식구들 씨 지울 뻔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 대 천 지 원 수놈들아, 사상으로 싸우면 싸웠지, 어째서 가족까지 몰살을 하려 드는 거냐 말야? 네놈들보구 옷을 달라던? 밥을 달라던?"
 
50
"흥, 잘두 보름날 거사를 하겠다. 이놈아, 그전에 다 씨지는 줄이나 알아!"
 
51
재덕은 이제서야 이번 일의 윤곽을 짐작했다.
 
52
"당신네들이 언제 그런 소릴 들었는지는 모르겠소만 ─"
 
53
재덕은 이야기했자 소용이 없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이 무서운 오해만은 풀어주어야 한다고 입을 열었다.
 
54
"조금 있으면 날이 밝을 터이니 회의록을 보면 알겠지만 당신네 가족을 죽 이기는커녕 살인죄만 없는 사람이면 좌익두 전부 포섭하자는 결의를 했소. 어떤 철없는 구장과 반장이 좌익 가족한테는 요새 나온 쌀과 밀가루 배급을 주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해서 감찰로 하여금 조사케 한 기록도 있고, 그런 반장을 모두 파면하자는 결의문까지 있으니까 한두 시간 후면 알 것이 아니오. 죽기를 기약한 사람이 비겁하게 당신들 앞에 거짓말을 하겠소?"
 
55
이 말에는 놈들도 다소 의아한 듯이,
 
56
"어디 이따 밝거든 보자. 만약에 그런 결의문이 없는 날이면 너는 그 만이야. 아까두 봤지?"
 
57
"……"
 
58
"봤건 봤다구 그래!"
 
59
그러나 차마 대답이 나가지 않는다.
 
60
상당히 가파른 봉을 타고 올라가더니 놈들도 된지,
 
61
"좀 쉬어 가지."
 
62
하고서 털썩 주저앉으니까, 모두 따라 앉으며 아까 단장과 부단장의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들을 하나씩 피워문다. 성냥이 아니라 부싯돌이다.
 
63
재덕이도 한쪽에 쪼그리고 앉았다.
 
64
"북에서 며칠날 넘는다누?"
 
65
무슨 소리인지 하나가 이렇게 옆 친구를 보고 묻는다.
 
66
"여기가 내일로 되어 있으니까, 아마 어제쯤은 떠났을걸."
 
67
"어제 떠나서 되나? 38선 근방은 되지만 이 아래로는 내일 거사를 한다면 늦지. 뒤집어엎었다가 되뒤집히는 날이면 우리는 녹지 않나?"
 
68
"동무두, 아니 미리 들어와 있지 않아? 우리는 몰라두 읍내 변두리로는 벌써 수천 명 숨어 있을 거야. 말을 않지 대대장은 알구 있을걸."
 
69
"그래야지. 이북만 믿었다가 안 온다면 쪽박까지 깨어먹는 판이다. 젠장! 뭔고 대대장은 도지사가 되나."
 
70
"모르지."
 
71
"될 거야. 박 동무는 면장일 게구."
 
72
"기왕 할 바엔 서장을 주면 좋겠더라."
 
73
듣자하니 모두가 꿈속 같은 이야기다. 재덕은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판 무식꾼들은 아닌 모양인데 이렇게도 어리석은가 ─ 재덕이는 그냥 울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74
"민주주의는 문화 민족에게나 적용되는 거야. 우리는 계몽할 시대지 정치 할 시대가 아니네. 요새 보면 청년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알고, 또 그렇게 만들려고 하지만, 그건 잘못이야 ─"
 
75
하던 박건의 말이 생각난다. 이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는 것일까?
 
76
'…이것이 우리 나라를 세울 청년들인가? 일개 면장과 구장이 되기 위해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한테 우리 배달 민족은 운명을 맡겨야 한단 말인가? 지금 공산주의 나라와 민주주의 나라들이 두 패로 갈려서 단병접전을 하는 오늘날, 구장과 면장과 경찰서장 몇만 죽이면 바로 이 세상은 자기네 세상이 되느니라고 생각하도록 단순한 사람들이 이 나라를 세워야 하고 다스리고 삼천만 민족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오늘날 우리 나라를 두 쪽으로 나누고 있는 38선은 미국과 영국, 불란서, 모든 서쪽 구라파의 민주주의 국가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국가가 서로 의논하고 만든 38 선인데, 이 것을 몇 사람의 힘으로 끊어버리고 혁명을 한다는 것인가? 김일성이 하나가 마음대로 이 천지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어리석은 백성들한테, 정말 우리 삼천만 민족은 나라를 내어맡겨야 옳다는 말인가?…’
 
77
재덕이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고 싶었다. 아니, 이 어리석은 백성들은 내일 밤에 무슨 거사를 하면 이북의 공산당이 와서 모두 면장도 시켜주고 구장도 시켜주고 경찰서장도 시켜줄 줄만 믿고 있는 것이다.
 
78
'거미줄에 비행기가 걸려 떨어진다고 믿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
 
79
이렇게 생각하고 세 녀석의 얼굴을 쳐다본 재덕이는, 이번에는 땅을 치면서 앙천대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80
불쌍한 민족이었다.
 
81
깊은 산속에도 먼동이 터오는지 동쪽 하늘이 뿌옇게 걷혀온다.
 
82
"그만 가지. 나는 육십리 길을 되짚어 가얄 사람인데 ─" "육십 리? 말이 육십리지 산골짝만 더듬어 가는 데두 육십리여? 백리 길이 실해, 이 동무야."
 
83
"그렇다면 더군다나!"
 
84
하고 박 동무란 궐자가 일어서자 모두 따라서 일어난다.
 
85
재덕이도 죽기보다도 더 싫었지만 아픈 몸을 일으켰다.
 
86
날이 밝아오자, 그들은 더 깊은 골짜기로만 끌고 간다.
 
87
이제는 날이 아주 활짝 밝아오고, 골짜기에 차 있던 깊은 안개도 걷히기 시작 했다. 천이야 만이야 한 높은 산중이건만 어디서인지 물소리가 요란하다.
 
88
놈들은 주머니에서 인절미 같은 것을 제각기 꺼내어 먹는다.
 
89
재덕이도 몹시 시장했다. 그러나 그는 떡이 먹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떡은 그만두고 물이나 한 모금 먹었으면 할 뿐이었다.
 
90
재덕이가 목적지인 듯싶은 어떤 깊은 골짜기에 이른 것은 열한시나 가까이 되어서였을 것이다. 어느 놈 하나 일러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말투로 보아 거의 온 모양이다.
 
91
재덕은 어떤 큰 바위산 밑을 돌아서 반 평이나 됨직한 바위로 앞을 가린 석 굴까지 끌려왔다.
 
92
"여기 섰어!"
 
93
하고 한 놈이 들어가더니만, 얼마 있다가 도로 나와서,
 
94
"들어와!"
 
95
한다.
 
96
재덕이는 굴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반은 기다시피 하여 굴속에 들어가서 허리를 편 재덕이의 앞을 턱 가로막는 사나이가 있다.
 
97
"왔네나그려!"
 
98
그 사나이는 재덕이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이다.
 
99
"아!"
 
100
뜻밖이었다.
 
101
재덕이로서는 정말 뜻밖이었다.
 
102
"잘 왔네. 혹 실패하지나 않았나 해서, 퍽 걱정이 되었었네."
 
103
"옳지, 그러면 나를 납치시킨 것이 자네였네나그려?"
 
104
재덕이는 적의를 감출 도리가 없었다.
 
105
"그렇게 됐네. 그러나 그건 우리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저리로 가세."
 
106
하고는 부하를 보고서 명령한다.
 
107
"이 동무의 결박을 끌러!"
 
108
"옛!"
 
109
"그리구 동무들은 나가 있어도 좋아."
 
110
"옛!"
 
111
사나이 ─ 송종호는 재덕이의 결박을 끌러놓고 부하가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려,
 
112
"놀랐나?"
 
113
재덕은 아무 말도 않았다.
 
114
"놀랐겠지. 자, 이리로 걸치게."
 
115
하고 생솔나무에 거적으로 만든 들것 같은 침대를 가리킨다.
 
116
"진숙 씨도 안녕하신가?"
 
117
재덕은 고개만 끄덕이었다.
 
118
"할아버지께서두? 어머니두, 부인두, 금녀두?"
 
119
이렇게 온 집안 식구의 안부를 묻고는,
 
120
"모두들 몹시 걱정할 게라!"
 
121
"자네 거 어떻게 아는가?"
 
122
자기를 잡아온 상대가 송종호라고 알고 나니 재덕이의 심사는 빗나가기 시작 했다.
 
123
"뭣을 말인가?
 
124
"내 집 식구가 걱정하는 걸 어떻게 아는가 말일세?"
 
125
"하하하하, 자네 몹시 노한 모양일세나그려. 왜 좋지 않은가. 그 개돼지 만두 못한 것들하구 날마다 싸우다가, 이렇게 공기두 좋구 전망두 좋은 고요한 산에 올라보는 재미두 나쁘지는 않지 뭔가. 자, 담배나 한 대 피우게. 참, 아침두 못 먹었을 테지. 이것두 좀 들구 ─"
 
126
하면서 신문지로 덮었던 양재기 둘을 내놓는다. 백설기와 돼지고기였다.
 
127
"여기 물이 있네. 우리는 식사 시간이 일정해서 따로이 차리지는 못 하네 마는 좀 들게나."
 
128
"싫네, 난 자네한테 이런 것을 얻어먹으러 온 것은 아닐세. 이런 것은 자네들 부하나 두었다 주고 대관절 나를 잡아온 이유나 듣세."
 
129
"잡아왔다? 허 이 사람, 뭔 소릴 그렇게 하나?"
 
130
"잡아왔다는 말이 귀에 거슬리면 납치라구 하지."
 
131
"허, 그래두 그러거든."
 
132
"똑떨어지게 말해 두네. 난 자네하구 그런 농담을 하러 여기까지 끌려 온것은 아닐세. 자네 요구를 단적으로 말하게. 나의 눈깔인가, 귄가, 모가 진가? 내장 육분가?"
 
133
"허, 동무!"
 
134
"동무? 내가 자네게 동무가 될 것이 뭔가? 자네게는 나란 인간은 반 동 분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세."
 
135
"그럼 취소하지, 신 군, 재덕이!"
 
136
"반동이라구 불러라."
 
137
"그러면 반동!"
 
138
"말하게."
 
139
"자넨 날 오해하구 있네. 오해를 ─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 자네와 나는 ─"
 
140
"서로 적이다. 원수다!"
 
141
이렇게 감정이 엇나가가지고는 통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 달았는지, 송종호가 멀거니 재덕이를 쳐다만 보고 있더니,
 
142
"동무, 좀 쉬게. 요기두 좀 하구. 그리구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이야기 하기 루 하세나."
 
143
하고 일어서 밖으로 나간다.
 
144
얼마를 기다려도 종호는 들어오지 않는다. 재덕은 침대에 번듯이 누워 버렸다.
 
145
어느 땐지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잠이 깨었다. 정말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나는 길로 머리맡의 물을 한사발 다 들이켜고 나니 정신 이 홱 돌아선다.
 
146
"푹 잤는가?"
 
147
담배를 피우고 앉았던 종호가 묻는다.
 
148
"여보게, 대장님!"
 
149
정신이 돌고 나니 또 본감정이 돌아온다.
 
150
"대관절 자넨 날 어쩔 작정으로 여기까지 잡아온 것인가? 단장, 부단장과 함께 깨끗이 죽여주지를 않고 어째서 여기까지 끌어오느라고 죽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고생을 시키는지 알 수가 없네. 자네 생각엔 혹 이렇게 나의 생명을 늘려주는 것이 내게 대한 호의로 해석하는지도 모르겠네만, 그야말로 무서운 오해일세. 나의 소원은 이런 방법으로 목숨을 늘리는 것보다도, 저 단장처럼 대매에 때려죽이든가 부단장처럼 지지고 찢고 눈깔을 빼고 해서라도 빨리 죽여주는 것이 내게 대한 호의일 것일세. 자, 말해주게. 내게다 이 이상 더 굴욕을 강제할 작정인가?"
 
151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미리 앞질러놓으니 종호는 말문이 탁 막히는 눈치다.
 
152
"자, 어서 날 끌어내다가 도끼로나 단근질로 죽여주게. 나는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네."
 
153
"재덕 군! 좀더 진정하게. 자넨 흥분했어."
 
154
종호는 재덕의 손을 잡고 애원하듯 말한다.
 
155
"그런 건 자네가 알은 체할 바 아니야. 난 죽여줄 그 순간까지 다시는 자네와 이야기할 흥미가 없네. 자, 더 지체치 말고 죽여다오! 이제 내 입에서는 죽을 때의 마지막 비명 이외에는 절대로 나올 말은 없을 것이다!"
 
156
재덕이는 이렇게 선언을 하더니 정말 종호가 뭐라고 해도 일체 입을 열지 않는다.
 
157
"재덕이!"
 
158
"……"
 
159
"자네는 날 오해하고 있네. 나의 본의는 자넬 해치자 함도 아니요, 자네게 모욕을 주자는 것도 아니었네. 그야 자네를 납치시킨 것은 날세.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네. 허지만 나의 본의는 자네에게 괴롬을 준다든가 자네를 해치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것만은 믿어주게. 자네를 해치기는커녕 이렇게 하는 것이 자네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괴로웠을 줄 알지마는 이렇게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일세."
 
160
재덕은 듣는지 안 듣는지, 여전히 바위처럼 앉았을 따름이다. 그렇건만 종 호의 이야기는 그대로 계속이 되고 있다.
 
161
"자네두 내일만 지나면 내 본의를 알아주겠지만, 자네가 오늘 밤 집에 있었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을 했을 것일세. 자네는 모르고 있겠지만, 내 일이 무슨 날인 줄 아는가? 내일이 바로 이남의 미군정을 우리 손으로 뒤집는 날 일세. 내일을 전후해서 남조선 전체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는 날이란 말야.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목표 등 큰 도시는 물론, 충청남북의 방방곡곡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날이야. 물론 자네네 읍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조 그만 동리까지도 일제히 일어날 것일세. 그러면 경찰대와도 충돌이 있겠지. 그러나 그까짓 경찰은 문제도 되지 않지. 경찰 속에도 모두 우리 프락치가 들어가 있고, 내일을 전후해서 이북에서 우리의 붉은 군대가 사태처럼 내리 밀릴것이네. 38선에서 부산까지 사흘이면 다 될 것일세. 이런 때 자네가 집에 있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거든!"
 
162
그래도 재덕이는 죽은 듯이 앉아 있기만 했다.
 
163
이것을 종호는 달리 해석했다. 이제야 재덕이도 자기의 뜻을 이해하고 고맙게 생각하는가보다 ─ 이렇게 자기대로 생각을 하고 용기를 얻은 것이다.
 
164
"물론 자네네도 정보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대강은 짐작을 했겠지마는 ─"
 
165
종호는 슬쩍 재덕이의 낯빛을 훔쳐보고, 자기의 추측대로 재덕이가 훨씬 풀이 꺾였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166
"내일이 지나면 모레부터는 자네네 집에도 인민공화국의 국기가 꽂힐 것 일세. 지금쯤은 자네네 읍 주위는 물론 읍내 속에까지 우리네 붉은 군대 가에 워 싸고 있을 것일세. 유격대가 거사를 하면 바로 정치공작대가 들어와서 정치를 맡고, 그 뒤를 이어 붉은 군대가 치안을 맡을 것일세. 이렇게 해서 11월 7일까지에는 총선거를 실시하게 될 것이야. 이런 것을 모르고 있는 자네를 나로서 어떻게 ─"고개를 푹 숙이고 듣고만 있는 것은 이제서야 자기의 우정을 이해하는 것이라 했다. 잽싸게 훔쳐본 재덕이의 얼굴에는 자기의 우정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있는 표정이 나타나 보였다고 송종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167
그러나 이것은 종호의 오해였다.
 
168
이 이상은 절대로 입을 열지 않겠다던 재덕이는 그 약속을 깨뜨렸다. 그는 자기 로서도 무슨 뜻이었던지를 이해치 못했을, 마치 성성이가 불시에 적을 발견 했을 때와 비슷한 외마디소리를 치기가 무섭게 ─ 아니 그 외마디소리와 함께 재덕이는 실로 날쌘 동작을 했던 것이다.
 
169
"쩔꺽!"
 
170
재덕이의 그 민활한 동작은 이런 음향을 내었다. 종호의 육신은 이 괴상한 음향에 맞추듯 호들갑스럽게 동작을 했다. 뒤로 벌렁 나자빠지면서 침대에서 떼그르 굴러떨어졌던 것이다.
 
171
"이 지지리 못난 것!"
 
172
깨진 북소리 같으나 그래도 뜻만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재덕이가 고함을 친다. 그리고 벌떡 일어선다.
 
173
"좋다! 인민공화국 기가 꽂히는 역사적인 장면을 못 보고 죽어서야 되겠느냐. 난 간다!"
 
174
그러나 그때는 벌써 굴 안에 다섯 명의 무장병이 쫙 들어와 차 있었다. 바지 저고리에 칼빈이 하나, 국방복 바지에 한복 저고리를 입고 M원을 멘 친구가 하나, 나머지 셋은 곤봉과 일본군도를 차고 있다.
 
175
그때까지도 채 일어나지 못했던 송종호가 벌떡 일어난다.
 
176
"쏘리까, 대대장님?"
 
177
"나가라!"
 
178
대대장은 발을 굴렀다.
 
179
"아, 썩들 못 나가느냐?"
 
180
그제서야 무장병들은 자기들을 보고 하는 말인 줄 안 모양이었다. 무장 병들이 물러 나갔다.
 
181
"잘 알았네!"
 
182
하고 송종호가 입을 연다.
 
183
"나도 더 말은 않겠네. 모두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니까. 그러나 자네가이 산에서 내려가겠다는 것만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네. 그것만은 각오 해주어야겠네. 그렇다고 긴 시간 자넬 여기에 감금해둘 의사는 없네. 모레 아침 ─ 늦어서 글피 아침이면 자네두 여기서 다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일세. 우리 그때까지는 여기서 같이 지내기로 하지.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네. 밖에도 나다니게. 눕고 싶건 눕고, 먹구 싶건 먹구, 이야기하고 싶으면 하구, 또 싫거든 언제까지나 입을 봉하구 있어두 좋네. 나두 자네가 청하지 않는 한 자네게 말을 거는 일두 없을 것이네. 자, 그럼 좀더 쉬게!"
 
184
송종호는 이렇게 늘어놓고서 천천히 굴 밖으로 나가버린다.
 
185
재덕이는 또 번듯이 누워버렸다.
 
186
정말 피곤했다.
【원문】젊은 사람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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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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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사람들 [제목]
 
  이무영(李無影) [저자]
 
  1952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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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5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