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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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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신채호(申采浩) # 연변대학 # 조선학 국제학술회의
【역사】
(2019.12.19. 19:00) 
◈ 남·북한·미국 및 연변대 동포학자들과 어울린 학술회의
[스카이데일리 연재] 조선학 국제학술회의에서의 토론…우리민족, 분단 이후 이질화가 심화
남·북한·미국 및 연변대 동포학자들과 어울린 학술회의
조선학 국제학술회의에서의 토론…우리민족, 분단 이후 이질화가 심화
 
 
조선학 국제학술회의의 첫날인 12일은 3.1 항일투쟁의 성격에 대해 남·북한 학자 간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으며, 이튿날 13일은 고구려의 기원에 대해 기존의 B. C 1세기 설에서 벗어나 B. C 4세기 이전 기원설이 제기됐다. 이 설을 제기한 나와 연변대의 강맹산 교수, 북한의 박진욱 교수 역시 B. C 4세기 이전 기원설에 동의했다. 우리 역사계가 고수해온 김부식의 B. C 37년 설이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30년 전 만나 의기투합했던 강맹산, 박진욱 두 교수는 이미 10여 년 전 유명을 달리했다. 인생은 짧고 진실된 학문만이 후세에 남는 것일까. 두 분의 인자했던 모습이 떠올라 새삼 인생의 무상을 느낀다.
 
국제학술회의 3일째 마지막 날인 8월 14일 역사분과의 발표는 연변대학 박진석, 방학봉 교수, 흑룡강 사회과학원의 리동원 연구원, 미국의 이채진 교수, 연변대학 김구춘 교수가 20분씩 발표했다. 박진석 교수는 ‘조선반도 내의 왜지설’, 방학봉 교수는 ‘동여진과 고려 간의 무역발전 관계’, 리동원은 ‘조선종이의 국제적 유통’, 이채진 교수는 ‘미국의 대 조선정책’, 김구춘 교수는 ‘운양호 사건의 역사적 고찰’을 발표했다.
 
연변대학의 박진석, 김구춘, 방학봉, 리동원 교수 등은 이때부터 친교를 맺어, 서울을 방문했던 박진석, 방학봉 교수와 재회해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채진 교수는 대구출신으로 나와 같은 학성 이가로 내가 아저씨뻘이다. 현재까지 미국에서 저명한 원로 동포교수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이번 연변 방문은 두 번째로 알고 있다. 연변의 조선족 관련 저술도 있다. 이채진 교수의 발표 내용은 광복 후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을 국제정치적 시각에서 독립과정, 분단과정, 6.25 전쟁 과정 등을 설명했다.
 
북한의 최고의 고고학자로 알려진 박진욱 교수는 ‘동해안 일대에서 발굴된 발해유적들과 그 성격에 대해’를 발표했다. 박진욱 교수는 함경남도의 발해유적인 무덤, 적석총, 온돌의 형태, 기와 막새, 와당 등에 나타난 발해 문화는 고구려를 계승한 문화이며,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의 문화가 우리 민족의 원류임을 주장했다. 특히 김부식의 신라삼국통일론이 가장 큰 죄악으로 유감천만임을 밝혔다. 이와 같이 박진욱 교수 발표의 의도는 당시 북한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려는 북한 정책의 맥과 상통한 면도 있었지만, 일찌기 신채호가 갈파한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발해, 신라 - 고려 왕조로 이어져 오는 우리 민족의 흐름을 북한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의 역사연구 동향’을 발표했다. 대략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은 분단 이후 각 분야에 있어서 남북 간의 이질화가 심화됐다. 특히 역사분야는 남북한 학자들 간에 교류가 없어 학문적 발전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한국의 연구동향의 소개를 통해 남북학자의 학문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다.
 
1980년대에 상고사의 관심이 고조돼 종전에 한반도 내로 규정했던 고조선의 영역이 난하 이동의 만주지역이었음이 밝혀졌으며, 한사군의 위치도 대릉하 상류설을 윤내현 교수가 제기됐다. 이미 고조선의 실체를 밝힌 학자는 신채호, 문정창, 최동이다. 문정창은 ‘단군조선사기연구’, ‘고조선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 ‘백제사’, ‘가야사’ 등을 저술했으며, 조선족의 갈래인 오환, 선비, 거란, 여진을 한국사에 포함시켰으며, 중국의 왜곡된 사료를 비판했다.
 
최동은 조선민족의 조상 유래는 송화강 연안 중심설과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높게 평가했으며, 발해, 신라 남북국시기를 주장했다. 이우성 교수도 남북국시대는 신라와 발해가 남북으로 대치한 시대임을 주장했다. 더불어 현 남북분단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단시대’로 규정해 각 분야의 연구가 전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강만길). 또한 식민지학자와 일인학자들이 주장한 함흥 일대로 추정한 윤관의 9성이 두만강 일대와 공험진의 두만강북 7백리설이 제기됐다.
 
중원고구려비와 신라비가 발견됐으며, 이진희의 광개토대왕비 연구서가 발간됐다. 또한 광개토대왕비서체가 여초 김응현에 의해 재현돼 한글의 판본체와 함께 우리 고유의 글씨체임을 입증했다. 최재석의 ‘고대사회사론’과 ‘고대사회사방법론’이 출간돼 단군신화를 부정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논문을 비판하고, 일제사관에 물들은 현존 사학자 17인을 밝혔다. 양태진의 ‘한국변경사연구’가 발간돼 고토와 빼앗긴 간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한민족의 원류를 찾는 작업도 고고학, 사회학, 민속학 전공의 학자들에 의해 시도됐다.
 
결론에서 남북한 및 연변 학자들의 합동 유적답사를 통한 연구의 필요성과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아야 할 사명감이 있다고 주장했다.
 
오후의 최종 토론회에서 사회를 보는 등 이번 국제학슬회의를 주관하셨던 강맹산 교수가 폐막식에서 한국을 대표해 나에게 간단한 연설을 요청했다. 나보다 저명한 분들이 많았지만 연변 일대 유적지 답사 때문에 불참하는 관계로 인해 나에게 차례가 온 모양이었다. 이에 200여 명의 학자들 앞에서 “여기에 참석하시는 모든 학자와 지식인들은 조국의 분단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지혜를 모아 통일의 비전을 제시해야 할 임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을 대표해서는 최영식 교수가 이번 학술회의의 성과에 대해 간단히 연설을 했다. 3일간 진행된 학술회의는 나에게 정말 뜻있는 기회였다. 북한 학자들의 학문적 시각을 접할 수 있었으며, 연변대학, 길림대학, 남개대학, 북경대학 등 중국의 전 지역에서 참석한 동포 학자들과 친교를 통한 연변의 생활상과 학문적 풍토를 알 수 있었다.
 
최종 토론회 후 나는 연변대학 도서관을 구경하고 싶다고 해 혼자 도서관을 방문했다. 우리는 방학 중이라 잠긴 도서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매우 초라한 광경이 시야에 전개됐다. 매우 빛이 바랜 책들이 여기저기 쌓여있었고 신간 서적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낡은 책걸상도 사용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인 상태로 봐서 경제적 지원이 부족한 탓으로 보였다. 마치 70년대의 우리나라 중학교 수준의 도서관 모습이었다. 그리고 보니 학술회의 첫 날 슬라이드 상영 중 처음 5회 만에 슬라이드 기계가 고장이 나서 그걸 고치지도 못하고, 슬라이드 없이 발표를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안내하는 교수가 설명하기를 문화혁명시기에 중국의 모든 분여가 10여 년 퇴보했음을 말했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연변대학 김성호 교수와 함께 점심을 먹은 후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집은 낡은 아파트인데 5평정도의 방이 2개로 여닫이문으로 중간에 갈라놓은 형태였다. 부인과 어린 아들 및 어머니와 같이 생활한다고 했다. 김성호교수는 전임강사 정도의 봉급을 받는 것으로 보였다. 당시 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이 70위안인데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만4000원 정도였다. 당시 연변대학 총장이 250원 정도 받는다고 했으니 매우 낮은 편이었다.
 
대학교수와 의사들의 봉급이 낮은 반면 오히려 택시 기사들이 고소득을 올리는 직업이었다. 한번 이용한 젊은 택시 기사에게 수입을 물어보니 월 500원 이상을 벌고 2층집에서 동생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1992년 중국과 수교 이후 김성호교수 부인도 서울역 지하철에서 중국 약을 팔아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당시 연변대학 교수들도 경제적으로 발전이 더딘 중국의 현실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여하튼 수교 당시 연변사회에서는 한국이 잘 산다고 소문이 나서 코리안 드림이 유행했다.
 
이 때 인연으로 김성호교수는 매우 친해졌으며, 김성호교수가 인하대학에 유학 오는 바람에 더욱 가까워졌다. 인하대학에서 90년대 말에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연변대학 조선문제연구소 소장을 맡는 등 연변대학을 이끌어가는 중요 인물이 됐다. 훗날 한중국경 문제와 간도문제를 함께 연구하자는 제의까지 받았지만 여건상 이를 수락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도한 박사생의 논문을 나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물론 이 논문은 중국 측 입장에서 분석한 연구 논문에 지나지 않았다.
 
오후 6시에 학술회의 참가한 학자들의 만찬이 이루어졌다. 주최 측의 인사말이 끝난 후 우리 테이블은 주홍성교수, 김대식선생 등과 여럿이 앉아 식사를 했다. 그리고 북한 학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서 서로 소개하면서 술잔을 오고 가고 했다. 이어 노래가 이어졌고 나는 선구자를 불러 흥을 돋우었다. 남과 북의 학자들만 함께 ‘우리의 소원’과 ‘고향의 봄’을 불렀다.
 
그리고 남북 학자와 연변 동포 학자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며 식장을 돌면서 춤을 추었다. 박진욱교수의 춤추는 모습도 그 때가 이승에서 본 마지막이었음을 몰랐다. 당시 나에게 밝힌 박진욱 교수의 간절한 소원은 “서울대 김원용 교수와 고고학적인 학문 토론을 몹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민족의 분단 상황이 학문적 분단으로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때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60대 노구의 최영식 교수, 박진욱 교수, 50대의 김영황, 류민, 김춘택교수의 손을 잡고 우리는 한민족의 학자임을 확인했다. 서로 간에 최초의 만남이라 남북학자뿐만 아니라 연변의 동포학자들도 몹시 기뻐했으며, 모두들 얼큰하게 취한 채 만찬을 끝냈다.
 
다음날 8월 15일은 광복절인데 연변에선 ‘노인절’이라 하면서 각 지역의 노인들이 마을 단위로 춤추기 경연대회를 열었다. 이를 위해 한 달 씩 연습을 하는 모양이다. 용정에선 이 분들이 연습 후 귀가할 때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연변 전체 체육대회도 열린다고 했다. 나는 김대식 선생과 함께 연길 시내에 있는 공원에 도착해 할머니들이 하는 공연을 봤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춤추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간도 전 지역에서 한복을 입고 몰려든 남녀노소 동포들로 인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전통 무예인 씨름을 비롯해 그네타기, 축구, 전통무용인 단체 춤의 경연이 지역별로 벌어지고 있었다. 점심 무렵 우리는 정문으로 나오려다 연변작가회의 주석과 한복을 곱게 입은 그 어머니를 만나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육순이 넘어 보이는 동포들이 자신들의 일가를 찾아달라고 하소연하기에 4명의 동포 주소를 적었다. 그 중 할머니는 칠순이 넘은 나이었다. 서울에 와서 할머니의 친척 한 분에게 전화를 했지만 반겨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 날 저녁은 김영만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의 집으로 초대를 받아 식사를 했다. 식사 후 모두들 아리랑을 부르며 한바탕 춤을 추면서 이별을 아쉬워했다. 연변지역 동포들과 함께한 9일 간의 생활도 내일이면 끝내고 북경으로 떠날 예정이다.
고구려(高句麗) 신채호(申采浩) # 연변대학 # 조선학 국제학술회의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연변 동포들의 문학과 예술의 수준은 어떠할까
• 남·북한·미국 및 연변대 동포학자들과 어울린 학술회의
• 연변대학의 조선학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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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