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이일걸의 지식창고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2019년
2019년 12월
2019년 12월 23일
2019년 12월 17일
2019년 12월 9일
2019년 12월 2일
2019년 11월
2019년 11월 25일
2019년 11월 12일
2019년 11월 4일
2019년 10월
2019년 10월 21일
2019년 10월 14일
2019년 10월 8일
2019년 10월 7일
2019년 9월
2019년 9월 30일
2019년 9월 22일
웅장한 장군총과 꿈에 그리던 광개토대왕비를 만나다
2019년 9월 16일
2019년 9월 8일
2019년 9월 1일
2019년 8월
2019년 8월 25일
2019년 8월 18일
2019년 8월 12일
2019년 8월 4일
2019년 7월
2019년 7월 28일
2019년 7월 21일
2019년 7월 13일
2019년 7월 6일
2019년 6월
2019년 6월 29일
2019년 6월 22일
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내서재
추천 : 0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陵碑) 국내성(國內城) 장군총(將軍塚) 퉁화 시(通化市)
【역사】
(2019.12.19. 19:02) 
◈ 웅장한 장군총과 꿈에 그리던 광개토대왕비를 만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해동 최고의 보물’로 칭송 받는 광개토대왕비…비문 해석 논쟁 지속
웅장한 장군총과 꿈에 그리던 광개토대왕비를 만나다
‘해동 최고의 보물’로 칭송 받는 광개토대왕비…비문 해석 논쟁 지속
 
(전편에 이어)
 
우리가 숙박한 통화빈관은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해 통화시를 조망하기에 좋았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혼강의 물줄기도 제법 큰 편이었다. 우리는 일찍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김정남 기자와 함께 택시로 타고 집안으로 향했다. 다섯 시간이 소요 된다하니 매우 긴 여정이다. 혼강의 지류를 따라가기도 하고 호젓한 숲속의 산길을 내닫다가는 수차례 고개를 넘어가니 높은 산들이 즐비하게 마중한다.
 
산이 높고 깊은 지역이다. 김정남 기자는 이곳에서 지난해 사냥꾼들이 곰을 십 여 마리 잡았다고 알려준다. 지나치는 도로변에 일제강점기 시기에 의병들의 전투 현장이 나타나곤 하는데 김정남 기자가 그때마다 설명을 해준다. 좌우 산 중턱과 기슭에 군데군데 인삼밭이 보였다.
 
우리가 지나는 도로는 황토를 깔아 만든 길이다. 아스팔트 포장길보다 감촉은 못하지만 달릴만했다. 오고 가는 차량도 매우 드문 편이다. 간혹 일본제 자가용이나 관용차가 지나친다. 도로변 계곡에는 신축된 2,3층의 건물이 보이는데 이는 최근 중국에서 증가하고 있는 유흥주점이라고 한다. 이젠 중국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틀과 문화를 배워가고 있는 현실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차를 타고 내려온 도로는 고구려시기에 국내성을 통하는 북로인 셈이다. 이윽고 북로의 관문인 관마산성이 나타났다. 우리는 국내성의 주산인 우산(禹山)의 중턱마루에 이르러 집안시내를 조망했다. 동쪽에는 용산(龍山), 서쪽에는 환도산과 칠성산으로 에워싸고 있으며, 앞에는 압록강이 흐르고 그 건너 수많은 필봉들이 멀리 나타난다. 다소 국면이 좁은 이곳이 고구려가 4백여 년간 수도를 삼았던 국내성이다.
 
먼저 우리는 오회분 4호묘의 벽화를 먼저 보기로 했다. 이번 국내성 답사의 가장 큰 목적은 고구려 문화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퉁구고분군 중에서 유일하게 개방한 4호묘는 둥근 흙이 덮인 봉토석실로 구성되었으며 1미터 가량 아래 계단을 따라 입구에 들어서니 벽화가 나타났다.
 
천장고임 아래층부터 4면과 천장에 그려진 고분벽화는 나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비록 석실 내외의 기온 차이로 물방울이 낀 상태이지만 벽면에는 인동초 무늬와 교룡문과 연꽃 무늬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황룡이 있으며, 세발달린 까마귀(三足烏)가 새겨진 해를 들고 있는 해신과 두꺼비를 새긴 달을 들고 있는 달신의 벽화에 압도됐다.
 
휘황찬란한 고구려의 벽화를 처음 보는 나는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더구나 두 신은 반인반용(半人半龍) 형상으로 날개가 달려 있으며, 벽화는 붉은 색, 노란색, 흰색, 회색 및 옅은 검정색 계통의 색으로 은은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해 신비스러움을 더하게 했다.
 
이와 같은 해와 달신의 벽화 그림은 중국의 어떤 지역에서도 출토하지 않았다. 천장 2층 고임에는 한 손에 벼이삭을 들고 질주하는 소머리의 반인반수(半人半獸)l의 농사의 신, 수레바퀴를 만드는 제륜신(製輪神), 쇠를 두들기고 있는 야철신(冶鐵神), 붉은 나무와 불의 신(神)을 그렸으며, 3층에는 봉황을 타고 생황을 연주하는 여인의 “비천주악도(飛天奏樂圖), 해와 달, 별자리와 흐르는 구름을 그렸다. 별자리에 박혔던 야광주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무덤 석실이 더욱 아름다웠으리라.
 
대략 7세기 경에 그려진 오회분 4호묘는 다른 고구려 고분보다도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고분으로 우리 민족 고대의 신화를 회화적으로 형상화시킨 벽화다. 특히 해와 달의 신과 불의 신, 농사의 신 등으로 표현한 벽화는 우리 고대 민족의 천지창조의 설화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의 신들을 그린 벽화가 돈황이나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고구려의 벽화가 고구려의 독창적인 문화의 창조일 뿐만 아니라 베일에 가린 고조선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 동안 왜곡돼 왔던 고대 동북아문화의 일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 벽화에 나타난 신(神)의 등장을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은 중국 중원신화의 수용의 결과로 해석하였지만(경철화), 정재서는 동이계 신화의 재정리의 결과로 봤으며, 전호태는 중국의 신화나 전설과 연결시키기 어려우며, 고구려의 독자성을 뚜럿이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물론 해의 신과 달의 신 등에 표현된 기법은 더욱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오회분 4호묘 이외의 고분에도 나타나는 고구려 벽화의 우수성은 오히려 주변국가에 영향을 주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2년 후인 1993년 고구려국제학술회의가 집안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때 무용총, 각저총, 삼실총, 장천1호분 벽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들 고분벽화를 통해 당시 고구려는 국력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동북아국가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선진한 문화를 소유한 민족임을 재확인했다. 고구려 벽화의 우수성과 중국 벽화의 비교는 2년 뒤 답사한 정주 · 낙양 · 서안 답사기에 논하기로 한다.
 
우리 일행은 고분을 나와 광개토대왕능비를 보기위해 차를 타고 이동했다. 낡은 가옥으로 가득 찬 마을 중앙으로 난 도로를 지나서 길가에 우뚝 선 능비각을 발견했다. 백평 정도의 면적에 보호대를 설치한 능비는 1500여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외롭게 서있었다. 당시 4세기 경 동북아국제사회에서 최강대국으로 군림해 패자(覇者)였던 광개토대왕의 모습을 보는 것같아 감개가 무량했다. 주변 서쪽은 민가들이 밀집해 있었으며 능비에서 서편 언덕에 광개토대왕릉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태왕릉과 장군총의 실제 묻힌 인물에 대해선 장군총이 광개토대왕릉이라는 설과 장수왕릉이라는 설 등 여러 학설이 존재하고 있다.
 
나는 능비각 안에 들어가 돌을 만져보고 사면의 비문을 모두 사진으로 찍고 문제된 1면의 신묘년 기사부분을 확대해 찍었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은 4면에 1800여 자가 기록돼 있으며,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을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광개토대왕이 신라의 원군 요청에 의해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왜구를 물리친 내용과 북쪽으로 동부여를,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을 차지하였으며, 남으로는 한강선까지 영토를 확장한 내용을 새겨 놓았다.
 
일제는 이 광개토대왕능비의 신묘년 기사와 칠지도(七支刀)에 새겨진 명문을 가지고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 경 처음 발견한 한인(漢人)과 밀파된 일제의 육군참모본부의 밀정에 의해 고구려의 중원지역 점령기사와 신묘년 기사부분이 삭제되거나 석회로 왜곡되기도 했다.
 
광개토대왕비는 왕이 서거한 후 2년 뒤 414년에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의 공적을 새겨넣은 6미터가 넘는 거대한 비석이다. 중국 학자들도 ‘해동 최고의 보물’로 칭송했다(葉昌熾). 그러나 수많은 학자들이 이 비문에 나타난 광개토대왕의 대외정복 기사에 대한 비문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더구나 이 능비는 우리 고대사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대외관계 및 강역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며, 당시 고구려 문화의 상징인 고분벽화와 더불어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과 뛰어난 문화수준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고구려의 건국년대를 비문의 내용인 “광개토대왕은 추모왕의 17대손”이라는 기록에 근거해 고구려의 건국은 B.C 277년을 주장하기도 한다(손영종).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광개토대왕은 동명왕의 12대손”이라 기록해 5세대의 왕이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서체에 대한 논쟁도 일어나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6조위비(六朝魏碑)의 영향을 받았으며(榮禧), 한의 팔분예서(八分隸書)체의 성행에 비해 고구려는 변방 소수민족의 낙후된 문자서체를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叢文俊).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 서체는 중국의 어떠한 금석문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 서체다.
 
광개토대왕비 서체를 연구해 최초로 유행시킨 여초 김응현 선생님은 대학시절 필자와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은 분으로 벌써 타계하신지 열 두해가 됐다. 가끔 나에게 써주신 작품을 볼 때마다 선생님의 깊은 은혜에 가슴이 뜨거워지곤 한다. 여초 선생은 “광개토대왕비”의 웅혼한 서체를 가장 빼어나게 휘호하셨던 분이었다.
 
선생님은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에 대해, “이 서체는 예서에 근간을 두고, 전서. 해서, 행서, 초서를 새롭게 혼합한 창조적 종합서체로서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동방서법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천 여 년 후에 만든 훈민정음의 자체와 필법이 일치하고 있으며, 우리의 고유서법이 중국의 서법과 다른 실증의 표본으로 광개토대왕릉비서체라고 주장했다”(書通47호).
 
광개토대왕릉비를 자세히 보고나서 서편에 있는 테왕릉을 답사하기로 했다. 마을 골목길을 돌아가니 태왕향 조선족 소학교가 나타났다. 태왕릉은 네모난 적석총으로 길이가 66미터로 8층의 규모가 가장 큰 적석총이라고 하였으며, “태왕릉”이라는 명문이 들어간 벽돌이 발견됨으로써 명칭이 그렇게 불리워진 것이다. 우리는 닫혀진 태황릉의 문을 비집고 부서진 돌조각과 강돌이 즐비한 무덤 위로 올라가니 무덤방의 관대를 놓는 전실을 막아놓은 판자 틈새로 볼 수 있었다. 또한 지대가 높아 집안의 남동쪽을 조망하기가 쉬웠다. 이 태왕릉이 고국원왕릉이라는 설도 있지만 너무 파괴된 태왕릉애 대해선 못난 후손의 자괴감이 밀려왔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장군총으로 향했다.
 
동방의 피라미드라 알려진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광개토대왕설도 있다. 평양으로 이미 천도를 단행했던 장수왕이 이곳에 무덤을 마련한 것도 의아스럽다. 천 여 개의 돌을 깎고 다듬어 만든 정방형의 적석총으로 한 면이 약 30미터가 넘는 길이로 7층 계단이다. 무덤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전면에 세 개의 돌을, 후면에 2개의 거대한 돌을 받혀 놓았는데, 후면에 있던 돌이 하나가 없어져 균형이 맞지 않은 상태였다. 장래 보전 상태가 매우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나의 이와 같은 불안감은 15년 뒤 다시 찾은 장군총의 상태를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받침돌 두 개뿐인 후면의 돌들이 무게와 빗물에 의해 균형이 파괴돼 들쑥날쑥하게 구멍이 나있어 장군총의 보전에 중국 당국도 최선을 다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철제 계단을 따라 무덤 위로 올라가서 무덤방의 전실에 놓인 두 개의 관대를 본 후 꼭대기에 올라갔다. 서쪽의 집안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장군총의 맨 위에는 건물의 흔적이 있었다.
 
이와 같은 장군총의 적석총 형식은 석촌동의 백제고분에서도 3기나 발견할 수 있다. 백제고분의 적석총은 장군총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고구려식 적석총 형식을 하고 있다. 여하튼 천 오백년의 세월 속에서도 고구려의 굳센 기상과 위용을 자랑하며 고구려 고토를 굳굳하게 지키고 있는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가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陵碑) 국내성(國內城) 장군총(將軍塚) 퉁화 시(通化市)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다시 구름이 가득 낀 백두산을 오르다
• 웅장한 장군총과 꿈에 그리던 광개토대왕비를 만나다
• 수많은 고구려의 적석총을 만나고 환도산성에 오르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0
▣ 정보 :
역사 (보통)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참조정보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