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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다큐먼트소개 자료실
지식지도
작업내역
2021년 2월
2021년 2월 25일
숨겨진 허구의 기자조선, 평양비정의 실상
2021년 2월 16일
기자동래 및 기자조선의 실체는 무엇인가
2021년 2월 10일
홍산유적지 청동기 명문(銘文)의 실체를 분명히 밝힐 때다
2021년 1월
2021년 1월 26일
중국 8대 고도인 개봉 시내와 개봉박물관(開封博物館)을 가다
2021년 1월 20일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開封)시의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을 가다
2021년 1월 12일
태행산의 만선산(萬仙山)과 왕망령(王莽嶺)을 유람하다
2021년 1월 4일
태행산 대협곡 중 팔천협(八泉峽)을 유람하다
2020년 12월
2020년 12월 30일
중국의 아시아의 그랜드캐년인 태행산 여행을 떠나다
2020년 12월 20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이태준 기념공원을 방문하다
2020년 12월 13일
사슴돌 비석 삽화에서 몽골 ‘북두칠성’숭배신앙 발견하다
2020년 12월 12일
몽골 적석총의 구조 형식과 타리아트군(郡)의 적석총 사슴돌 비석을 탁본하다
2020년 11월
2020년 11월 29일
몽골 사슴돌 비석의 유형과 의미 및 타리아트군(郡) 적석총의 규모
2020년 11월 22일
가장 뛰어난 몽골의 적석총과 사슴돌 비석의 분포 현황
2020년 11월 17일
몽골의 신성스러운 다얀산에서 천제를 지내다
2020년 11월 9일
알타이 산에서 천제(天祭) 지내 조국부강 기원하다
2020년 11월 4일
알타이시를 향해 천리길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2020년 10월
2020년 10월 25일
삭막한 회색의 도시 비얀홍고르를 향해 승용차는 달렸다
2020년 10월 20일
몽골제국 초기 수도 ‘카라코룸’의 흔적을 찾아
2020년 10월 11일
민족의 뿌리 찾아 나선 몽골 알타이산맥 탐험
2020년 10월 4일
하바롭스크 행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다
2020년 9월
2020년 9월 27일
연해주 항일투쟁의 자취 따라 우수리스크를 답사하다
2020년 9월 20일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연방대학교’와 ‘바틀리나 곶’을 답사하다
2020년 9월 15일
블라디보스토크 역과 연해주 항일투쟁의 요람 신한촌 답사기
2020년 9월 6일
블라디보스톡 여행과 러시아의 연해주 획득과정
2020년 8월
2020년 8월 30일
대문구(大汶口) 박물관과 태산(泰山)을 다시 오르다
2020년 8월 23일
안양의 문자박물관과 곡부(曲阜)의 공묘(孔廟)를 관람하다
2020년 8월 16일
하남성 박물관·악비묘(岳飛廟) 및 은허박물관를 가다
2020년 8월 9일
낙양고묘박물관·중악묘·소림사·용문석굴을 방문하다
2020년 8월 2일
화산(華山)을 오르고 천하에 제일 험했다는 함곡관(函谷關)을 가다
2020년 7월
2020년 7월 26일
서안(西安)의 비림박물관과 섬서성박물관 및 반파유적지를 답사하다
2020년 7월 19일
중원지역의 서안(西安)을 답사하다
2020년 7월 12일
청도(靑島)시의 도교(道敎) 명승지인 노산(嶗山)을 오르다
2020년 7월 5일
태산(泰山)과 곡부의 공부(孔府)를 답사하다
2020년 6월
2020년 6월 28일
중국의 고대 역사유적지 안양(安陽)의 은허박물관을 답사하다
2020년 6월 23일
일제와 투쟁했던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여순 감옥으로 향하다
2020년 6월 15일
遼 태조릉과 제단 및 요상경(遼上京) 유지(遺址)를 답사하다
2020년 6월 10일
적봉(赤峰) 박물관과 옹우특기(翁牛特旗) 박물관을 견학하다
2020년 6월 2일
우하량 홍산 문명의 핵심과 요중경박물관 전시기록의 유감
2020년 5월
2020년 5월 26일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지와 적봉시의 홍산(紅山)으로 가다
2020년 5월 17일
대련의 대흑산(大黑山)과 북진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오르다
2020년 5월 11일
미창구(米倉溝) 장군묘와 호산장성 대신에 봉황산에 들리다
2020년 5월 4일
환인지역의 흘승골성(訖升骨城)을 답사하다
2020년 4월
2020년 4월 27일
장군총과 환도산성 및 국내성을 답사하다
2020년 4월 18일
고구려 장천1호분과 국동대혈을 답사하다
2020년 4월 12일
제3차 고구려 역사유적 및 산성을 답사하다.
2020년 4월 5일
청조의 조종산인 장백산이 있는 나통산성(羅通山城)을 향하다
2020년 3월
2020년 3월 29일
고구려의 흔적 고구려산성을 답사하다
2020년 3월 22일
두만강가에서 꽃제비를 만나고 모아산(帽兒山)에 오르다
2020년 3월 15일
백두산 현명봉과 토문강, 두만강 원류를 답사하다
2020년 3월 8일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을 다시 오르다
2020년 3월 1일
간도개척과 항일투쟁의 중심지 용정을 가다
2020년 2월
2020년 2월 23일
봉오동 전투현장과 두만강가 ‘사이섬’으로 가다
2020년 2월 16일
KBS 역사스페셜 팀과 토문강·두만강 원류 탐사를 떠나다
2020년 2월 9일
발해만 지역의 고구려산성을 처음으로 답사하다
2020년 1월
2020년 1월 30일
태자하(太子河)에 접한 난공불락의 백암성(白巖城)을 답사하다
2020년 1월 19일
심양 고궁(古宮)과 요령성 박물관을 관람하다
2020년 1월 5일
연변대의 학술세미나 거부당하고 국동대혈을 답사하다
2019년 12월
2019년 12월 23일
모용황, 정말 미천왕릉을 도굴해 시신을 가져 갔을까
2019년 12월 17일
광개토호태왕릉비와 장군총을 다시 찾다
2019년 12월 9일
고구려 벽화의 상징적 사상과 미적 아름다움에 빠지다
2019년 12월 2일
세계의 문화유산인 아름다운 고구려 벽화를 보다
2019년 11월
2019년 11월 25일
집안에서 ‘고구려문화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다
2019년 11월 12일
중국의 고도 낙양·서안서 5천년 전 성황당 원형 발견
2019년 11월 4일
세칭 중원문화의 중심지 정주(鄭州)를 향하다
2019년 10월
2019년 10월 21일
동양평화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역에서
2019년 10월 14일
안중근의 기개 어린 송화강가의 하얼빈시를 가다
2019년 10월 8일
길림시의 고구려시기 용담산성에 오르다
2019년 10월 7일
제2차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에 참가하다
2019년 9월
2019년 9월 30일
다시 구름이 가득 낀 백두산을 오르다
2019년 9월 22일
웅장한 장군총과 꿈에 그리던 광개토대왕비를 만나다
2019년 9월 16일
수많은 고구려의 적석총을 만나고 환도산성에 오르다
2019년 9월 8일
집안의 고구려 벽화를 실제로 보기로 결심하다
2019년 9월 1일
북경의 만리장성에 오르고 유리창 거리를 거닐다
2019년 8월
2019년 8월 25일
연변 동포들의 문학과 예술의 수준은 어떠할까
2019년 8월 18일
남·북한·미국 및 연변대 동포학자들과 어울린 학술회의
2019년 8월 12일
연변대학의 조선학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다
2019년 8월 4일
꿈에 젖은 이별의 강, 두만강을 마주하다
2019년 7월
2019년 7월 28일
동간도지역 개척지의 첫 마을 용정을 가다
2019년 7월 21일
백두산에서 천제(天祭)를 지내며…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기원
2019년 7월 13일
백두산의 천지와 주변 봉우리 명칭은 누가 지었나
2019년 7월 6일
우리 민족의 성산…백두산의 천지를 오르다
2019년 6월
2019년 6월 29일
간도 첫 답사…‘요하문명’의 실체는 ‘홍산 문화 유적’
2019년 6월 22일
간도 대륙 역사를 시작하며…아직 살아있는 간도협약
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이일걸의 지식창고 2019.12.19. 19:02 (2019.12.19. 19:02)

【역사】웅장한 장군총과 꿈에 그리던 광개토대왕비를 만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해동 최고의 보물’로 칭송 받는 광개토대왕비…비문 해석 논쟁 지속
웅장한 장군총과 꿈에 그리던 광개토대왕비를 만나다
‘해동 최고의 보물’로 칭송 받는 광개토대왕비…비문 해석 논쟁 지속
 
(전편에 이어)
 
우리가 숙박한 통화빈관은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해 통화시를 조망하기에 좋았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혼강의 물줄기도 제법 큰 편이었다. 우리는 일찍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김정남 기자와 함께 택시로 타고 집안으로 향했다. 다섯 시간이 소요 된다하니 매우 긴 여정이다. 혼강의 지류를 따라가기도 하고 호젓한 숲속의 산길을 내닫다가는 수차례 고개를 넘어가니 높은 산들이 즐비하게 마중한다.
 
산이 높고 깊은 지역이다. 김정남 기자는 이곳에서 지난해 사냥꾼들이 곰을 십 여 마리 잡았다고 알려준다. 지나치는 도로변에 일제강점기 시기에 의병들의 전투 현장이 나타나곤 하는데 김정남 기자가 그때마다 설명을 해준다. 좌우 산 중턱과 기슭에 군데군데 인삼밭이 보였다.
 
우리가 지나는 도로는 황토를 깔아 만든 길이다. 아스팔트 포장길보다 감촉은 못하지만 달릴만했다. 오고 가는 차량도 매우 드문 편이다. 간혹 일본제 자가용이나 관용차가 지나친다. 도로변 계곡에는 신축된 2,3층의 건물이 보이는데 이는 최근 중국에서 증가하고 있는 유흥주점이라고 한다. 이젠 중국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틀과 문화를 배워가고 있는 현실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차를 타고 내려온 도로는 고구려시기에 국내성을 통하는 북로인 셈이다. 이윽고 북로의 관문인 관마산성이 나타났다. 우리는 국내성의 주산인 우산(禹山)의 중턱마루에 이르러 집안시내를 조망했다. 동쪽에는 용산(龍山), 서쪽에는 환도산과 칠성산으로 에워싸고 있으며, 앞에는 압록강이 흐르고 그 건너 수많은 필봉들이 멀리 나타난다. 다소 국면이 좁은 이곳이 고구려가 4백여 년간 수도를 삼았던 국내성이다.
 
먼저 우리는 오회분 4호묘의 벽화를 먼저 보기로 했다. 이번 국내성 답사의 가장 큰 목적은 고구려 문화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퉁구고분군 중에서 유일하게 개방한 4호묘는 둥근 흙이 덮인 봉토석실로 구성되었으며 1미터 가량 아래 계단을 따라 입구에 들어서니 벽화가 나타났다.
 
천장고임 아래층부터 4면과 천장에 그려진 고분벽화는 나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비록 석실 내외의 기온 차이로 물방울이 낀 상태이지만 벽면에는 인동초 무늬와 교룡문과 연꽃 무늬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황룡이 있으며, 세발달린 까마귀(三足烏)가 새겨진 해를 들고 있는 해신과 두꺼비를 새긴 달을 들고 있는 달신의 벽화에 압도됐다.
 
휘황찬란한 고구려의 벽화를 처음 보는 나는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더구나 두 신은 반인반용(半人半龍) 형상으로 날개가 달려 있으며, 벽화는 붉은 색, 노란색, 흰색, 회색 및 옅은 검정색 계통의 색으로 은은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해 신비스러움을 더하게 했다.
 
이와 같은 해와 달신의 벽화 그림은 중국의 어떤 지역에서도 출토하지 않았다. 천장 2층 고임에는 한 손에 벼이삭을 들고 질주하는 소머리의 반인반수(半人半獸)l의 농사의 신, 수레바퀴를 만드는 제륜신(製輪神), 쇠를 두들기고 있는 야철신(冶鐵神), 붉은 나무와 불의 신(神)을 그렸으며, 3층에는 봉황을 타고 생황을 연주하는 여인의 “비천주악도(飛天奏樂圖), 해와 달, 별자리와 흐르는 구름을 그렸다. 별자리에 박혔던 야광주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무덤 석실이 더욱 아름다웠으리라.
 
대략 7세기 경에 그려진 오회분 4호묘는 다른 고구려 고분보다도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고분으로 우리 민족 고대의 신화를 회화적으로 형상화시킨 벽화다. 특히 해와 달의 신과 불의 신, 농사의 신 등으로 표현한 벽화는 우리 고대 민족의 천지창조의 설화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의 신들을 그린 벽화가 돈황이나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고구려의 벽화가 고구려의 독창적인 문화의 창조일 뿐만 아니라 베일에 가린 고조선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 동안 왜곡돼 왔던 고대 동북아문화의 일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 벽화에 나타난 신(神)의 등장을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은 중국 중원신화의 수용의 결과로 해석하였지만(경철화), 정재서는 동이계 신화의 재정리의 결과로 봤으며, 전호태는 중국의 신화나 전설과 연결시키기 어려우며, 고구려의 독자성을 뚜럿이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물론 해의 신과 달의 신 등에 표현된 기법은 더욱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오회분 4호묘 이외의 고분에도 나타나는 고구려 벽화의 우수성은 오히려 주변국가에 영향을 주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2년 후인 1993년 고구려국제학술회의가 집안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때 무용총, 각저총, 삼실총, 장천1호분 벽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들 고분벽화를 통해 당시 고구려는 국력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동북아국가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선진한 문화를 소유한 민족임을 재확인했다. 고구려 벽화의 우수성과 중국 벽화의 비교는 2년 뒤 답사한 정주 · 낙양 · 서안 답사기에 논하기로 한다.
 
우리 일행은 고분을 나와 광개토대왕능비를 보기위해 차를 타고 이동했다. 낡은 가옥으로 가득 찬 마을 중앙으로 난 도로를 지나서 길가에 우뚝 선 능비각을 발견했다. 백평 정도의 면적에 보호대를 설치한 능비는 1500여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외롭게 서있었다. 당시 4세기 경 동북아국제사회에서 최강대국으로 군림해 패자(覇者)였던 광개토대왕의 모습을 보는 것같아 감개가 무량했다. 주변 서쪽은 민가들이 밀집해 있었으며 능비에서 서편 언덕에 광개토대왕릉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태왕릉과 장군총의 실제 묻힌 인물에 대해선 장군총이 광개토대왕릉이라는 설과 장수왕릉이라는 설 등 여러 학설이 존재하고 있다.
 
나는 능비각 안에 들어가 돌을 만져보고 사면의 비문을 모두 사진으로 찍고 문제된 1면의 신묘년 기사부분을 확대해 찍었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은 4면에 1800여 자가 기록돼 있으며,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을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광개토대왕이 신라의 원군 요청에 의해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왜구를 물리친 내용과 북쪽으로 동부여를,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을 차지하였으며, 남으로는 한강선까지 영토를 확장한 내용을 새겨 놓았다.
 
일제는 이 광개토대왕능비의 신묘년 기사와 칠지도(七支刀)에 새겨진 명문을 가지고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 경 처음 발견한 한인(漢人)과 밀파된 일제의 육군참모본부의 밀정에 의해 고구려의 중원지역 점령기사와 신묘년 기사부분이 삭제되거나 석회로 왜곡되기도 했다.
 
광개토대왕비는 왕이 서거한 후 2년 뒤 414년에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의 공적을 새겨넣은 6미터가 넘는 거대한 비석이다. 중국 학자들도 ‘해동 최고의 보물’로 칭송했다(葉昌熾). 그러나 수많은 학자들이 이 비문에 나타난 광개토대왕의 대외정복 기사에 대한 비문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더구나 이 능비는 우리 고대사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대외관계 및 강역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며, 당시 고구려 문화의 상징인 고분벽화와 더불어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과 뛰어난 문화수준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고구려의 건국년대를 비문의 내용인 “광개토대왕은 추모왕의 17대손”이라는 기록에 근거해 고구려의 건국은 B.C 277년을 주장하기도 한다(손영종).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광개토대왕은 동명왕의 12대손”이라 기록해 5세대의 왕이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서체에 대한 논쟁도 일어나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6조위비(六朝魏碑)의 영향을 받았으며(榮禧), 한의 팔분예서(八分隸書)체의 성행에 비해 고구려는 변방 소수민족의 낙후된 문자서체를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叢文俊).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 서체는 중국의 어떠한 금석문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 서체다.
 
광개토대왕비 서체를 연구해 최초로 유행시킨 여초 김응현 선생님은 대학시절 필자와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은 분으로 벌써 타계하신지 열 두해가 됐다. 가끔 나에게 써주신 작품을 볼 때마다 선생님의 깊은 은혜에 가슴이 뜨거워지곤 한다. 여초 선생은 “광개토대왕비”의 웅혼한 서체를 가장 빼어나게 휘호하셨던 분이었다.
 
선생님은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에 대해, “이 서체는 예서에 근간을 두고, 전서. 해서, 행서, 초서를 새롭게 혼합한 창조적 종합서체로서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동방서법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천 여 년 후에 만든 훈민정음의 자체와 필법이 일치하고 있으며, 우리의 고유서법이 중국의 서법과 다른 실증의 표본으로 광개토대왕릉비서체라고 주장했다”(書通47호).
 
광개토대왕릉비를 자세히 보고나서 서편에 있는 테왕릉을 답사하기로 했다. 마을 골목길을 돌아가니 태왕향 조선족 소학교가 나타났다. 태왕릉은 네모난 적석총으로 길이가 66미터로 8층의 규모가 가장 큰 적석총이라고 하였으며, “태왕릉”이라는 명문이 들어간 벽돌이 발견됨으로써 명칭이 그렇게 불리워진 것이다. 우리는 닫혀진 태황릉의 문을 비집고 부서진 돌조각과 강돌이 즐비한 무덤 위로 올라가니 무덤방의 관대를 놓는 전실을 막아놓은 판자 틈새로 볼 수 있었다. 또한 지대가 높아 집안의 남동쪽을 조망하기가 쉬웠다. 이 태왕릉이 고국원왕릉이라는 설도 있지만 너무 파괴된 태왕릉애 대해선 못난 후손의 자괴감이 밀려왔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장군총으로 향했다.
 
동방의 피라미드라 알려진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광개토대왕설도 있다. 평양으로 이미 천도를 단행했던 장수왕이 이곳에 무덤을 마련한 것도 의아스럽다. 천 여 개의 돌을 깎고 다듬어 만든 정방형의 적석총으로 한 면이 약 30미터가 넘는 길이로 7층 계단이다. 무덤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전면에 세 개의 돌을, 후면에 2개의 거대한 돌을 받혀 놓았는데, 후면에 있던 돌이 하나가 없어져 균형이 맞지 않은 상태였다. 장래 보전 상태가 매우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나의 이와 같은 불안감은 15년 뒤 다시 찾은 장군총의 상태를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받침돌 두 개뿐인 후면의 돌들이 무게와 빗물에 의해 균형이 파괴돼 들쑥날쑥하게 구멍이 나있어 장군총의 보전에 중국 당국도 최선을 다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철제 계단을 따라 무덤 위로 올라가서 무덤방의 전실에 놓인 두 개의 관대를 본 후 꼭대기에 올라갔다. 서쪽의 집안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장군총의 맨 위에는 건물의 흔적이 있었다.
 
이와 같은 장군총의 적석총 형식은 석촌동의 백제고분에서도 3기나 발견할 수 있다. 백제고분의 적석총은 장군총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고구려식 적석총 형식을 하고 있다. 여하튼 천 오백년의 세월 속에서도 고구려의 굳센 기상과 위용을 자랑하며 고구려 고토를 굳굳하게 지키고 있는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가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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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