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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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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陵碑) 장군총(將軍塚) # 고구려벽화 # 광개토호태왕릉비
【역사】
(2019.12.19. 19:08) 
◈ 광개토호태왕릉비와 장군총을 다시 찾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동양의 피라미드 ‘장군총’에서 발견되는 역사왜곡 흔적
광개토호태왕릉비와 장군총을 다시 찾다
동양의 피라미드 ‘장군총’에서 발견되는 역사왜곡 흔적
 
 
‘고구려 문화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했던 한국, 일본, 홍콩에서 왔던 학자들에겐 천오백년 전의 고구려벽화를 직접 답사해 볼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대부분 고구려벽화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들에게 고구려 고분벽화의 빼어난 예술적 아름다움과 구조를 실제 체험함으로써 고구려벽화의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우리 일행은 ‘오회분 4ㆍ5호’ 벽화를 보고 장군총으로 향했다. 앞 편에서 기술한 것처럼 두 해 전인 1991년 8월에 고구려의 벽화를 보기 위해 집안 일대를 혼자 답사할 때 장군총과 광개토호태왕릉비를 답사했다. 두 해 전에는 혼자 왔지만 이번에는 한국을 비롯한 일본, 홍콩 등의 학자들과 함께 온 점이 다를 뿐이다.
 
동방의 피라미드라 알려진 장군총은 장수왕 또는 광개토대왕설도 있지만 아래 마을 뒤에 태왕릉이라는 무덤이 이미 있어서 실제 주인공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운 부분이다. 또한 고구려의 장수왕이 천도한 후기 수도가 평양이 아닌 ‘요양설’과 ‘임분설’이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1925년 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왜곡시킨 것이 고구려의 후기 수도인 평양의 위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조에는 ‘십오년 이도평양(十五年 移都平壤)’ 단 한 줄뿐이다. 장수왕이 세웠다는 광개토호태왕릉비 입비 시기, 장소의 기사조차 없다. 삼국사기는 영양왕 때 시작한 수(隋)와의 전쟁과 이후 벌어진 당(唐)과의 전쟁은 모두 대동강의 평양이 그 배경이라는 점이다. 만일 평양이 고구려 수도가 아니라 실제 수도는 요양(遼陽)설이나 임분(臨汾)설이 맞는다면 삼국사기의 평양의 기사를 누가 조작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역시 조선사편수회의 ‘삼국사기’ 조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조선사편수회에 관여했던 이병도ㆍ신석호의 제자들인 강단사학자들이 70여 년 간 일제식민사학자처럼 고구려의 후기 수도를 평양이라고 우리 국민을 속였다. 이들은 고구려의 수도뿐만 아니라 요하를 서계(西界)로 하던 고려의 영토와 윤관의 동북 구성(九城)조차 함경도로 비정하는 등 우리의 영토를 압록강ㆍ두만강 이남으로 축소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설이라는 것조차 의아스럽다. 이 역시 왜곡된 흔적이 보이며, 광개토대왕릉비도 중국이나 일제에 의해 옮긴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다. 또한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역시 일제의 왜곡ㆍ조작설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해동의 최고 능비로 인정받은 이 광개토대왕릉비가 기단이 없이 땅위에 세웠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기단 없는 능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이전설에 대해서는 앞으로 깊이 연구해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 농부에 의해 처음 발견됐으며, 일본 밀정 酒勾景信이 집안에 잠입해 탁본을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1883년이었다. 이 탁본을 일본 참모본부가 한국침략의 근거로 삼기 위해 일본인 靑江秀, 橫井忠直 등이 연구한 해독본인 ‘會餘錄’을 1889에 발간했다. 석회로 왜곡시킨 이 탁본에 의거해 일본 참모본부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었다. 특히 ‘신묘년조’의 왜곡 문제로 인해 한·중·일 학자들 간에 수많은 학설이 제기됐지만 일본의 한국침략과 연관해 주장했던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부적당했다.
 
문정창은 ‘임나일본부설’의 맹점을 ‘임나’와 ‘가야’는 엄연히 다른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동일시하고 있는 학자들의 무지로 보았다. 문정창은 ‘임나’를 대마도 지역으로 비정했다. 최근에는 임나의 영역을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의 남부지역까지 확대ㆍ조작한 일제 식민학자의 이론을 대변하고 있는 김현구의 ‘임나일본부설’이 문제가 됐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 부근에 위치했던 ‘태왕릉’조차 신뢰가 가지 않았다. 만약 광개토대왕릉비가 옮겨온 것이라면 장군총과 태왕릉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일 것이다. 항일시기에 일제가 도굴해 가져간 이 일대의 고구려 무덤의 유물을 공개하지도 않고 은폐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역사학계이다. 우리의 고대사를 일본과 중국이 제멋대로 왜곡·조작했던 이들의 속셈은 무엇일까.
 
우리 일행은 ‘광개토대왕릉비’ 앞에서 이형구 교수가 이번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신묘년조의 왜(倭)자 석회왜곡설을 설명했다. 그리고 뒷마을 위에 있는 태왕릉을 답사하기 위해 능위로 올랐다. 매우 파괴되어 낮은 돌무지무덤이 된 상태였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장천1호분을 답사하기 위해 이동했다.
 
장천 1호분은 5세기 중·후반의 고분으로 벽화가 모든 벽면에 그려진 것이 특징으로 보였다. 무덤 입구에는 전통적인 고구려 의상인 점무늬 옷을 입고 모자를 쓴 고구려인 두 사람이 두 손을 모은 채 좌우에 서 있었다. 고분 내부의 벽화는 연꽃장식과 고구려인의 생활상, 수렵도, 비천과 보살상, 사신도, 불상예배도 등이 그려져 있었다.
 
앞 방 천장 고임 모서리에는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역사의 모습도 보였으며, 또한 연꽃 속에서 태어나는 ‘연화화생’의 벽화도 천장 고임 모서리에 있었다. 전실 동쪽 벽의 천정의 중앙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있는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을 향해 허리를 굽혀 예불을 올리는 주인공 부부도 보인다. 왼편에는 시종이 산개(傘蓋)를 들고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좌우 벽의 천정에는 네 명의 보살이 그려져 있다. 그 주위에는 연화문과 비천들로 장식되어 주인공 부부가 동경하는 평화로운 불국토의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고구려 고분 벽화 중 유일한 예불도이다.(김리나)
 
전실 북쪽 벽에는 여러 가지 고구려의 풍속화를 그렸다. 큰 나무 밑동 동굴에는 곰 형상의 동물도 보이며, 왼편 위에는 거문고를 타며 춤을 추는 장면이 두 곳에서 나타나며, 두 사내의 씨름하는 장면도 있다. 활 맞은 멧돼지, 쫒는 사냥개, 호랑이, 사슴에 활을 쏘는 사냥하는 모습이 아래 부분을 대부분 장식했다. 매로 사냥하는 모습도 있으며, 공 던지기 곡예 장면도 보인다.
 
전실인 널방의 천정에는 해와 달 및 북두칠성을 그려 넣었다. 고구려 벽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별 그림은 ‘북두칠성’의 그림이다. 아마 우리 민족은 북두칠성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민족인가 보다. 지난 해 6월 몽골의 알타이지역 답사에서 우연히 지름이 50여 미터 되는 적석총 앞에 세워진 ‘사슴돌’ 석비에서도 28수의 별 그림과 석비 위 머리에 새겨진 북두칠성을 발견했다. 물론 우리나라 고인돌에서도 북두칠성의 흔적인 둥근 구멍이 자주 발견되기도 했다. 이 몽골 적석총은 적어도 B. C 30세기 전에 건립된 것으로 볼 때 북두칠성 신앙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련의 고구려 박물관의 홍산 유적에서도 북두칠성이 새겨진 유물들을 보았다.
 
우리 일행은 휴식을 취한 후 고구려문화국제학술회의 폐회식에 참석했으며, 집안시장이 송별연회를 열어주었다. 학술회의 4일째 되는 내일은 국내성과 환도산성 답사가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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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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