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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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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사([白馬寺]) 보경사(寶鏡寺) 성황당(-)
【역사】
(2019.12.19. 19:06) 
◈ 중국의 고도 낙양·서안서 5천년 전 성황당 원형 발견
[스카이데일리 연재]우리 선조들의 유적 찾아…중국인, 도교의 제사 정도로만 단정
중국의 고도 낙양·서안서 5천년 전 성황당 원형 발견
우리 선조들의 유적 찾아…중국인, 도교의 제사 정도로만 단정
 
 
숭산(嵩山)에서 내려 온 우리는 택시를 타고 낙양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바로 중국 최초의 절인 백마사(白馬寺)를 향했다. 가는 길에 초록색의 평원이 이어진 후에 백마사가 나타났다. 백마사는 평지에 만들어졌으며 민가들이 있는 도심에 만들어져 있어 산 깊은 조용한 곳에 자리 잡은 우리의 사찰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후한 때인 서기 67년에 인도의 승려 가섭마등과 축법란 등이 불상 경전을 백마에 싣고 들어오자, 당시 명제(明帝)는 불교를 신봉하고 8년 후에 이 절을 세우고 그들을 살게 하고 42장경 1권을 번역토록 했다. 지금은 매우 퇴락해 13층의 전탑이 남아있었다.
 
또한 백마사는 신라 지명법사의 영일 내연산의 보경사 창립 등의 연기(緣起)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 사찰이기도 하다(한국불교전설 99). 우리는 백마사 주지를 친견하기로 하고 주지를 30분 정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통역은 같이 간 김 군이 맡아 했다. 우리가 한국 서울에서 왔으며 중국 최초의 사찰에 오게 된 경위 등을 이야기하고 백마사의 유래를 물었다.
 
위진남북조의 분열된 중원을 통일한 자는 북위의 효문제였다. 그러나 북위는 장수왕의 사위국이 돼 친고구려 정책을 편 국가이기도 했다. 장수왕이 서거하자 북위왕은 흰옷을 입고 동교에 나가서 조의를 표했다.
 
우리는 간단히 저녁식사를 한 후 낙양목단대주점의 커피숍(咖啡廳)으로 향했다. 열차 안에서 만난 여행사 여직원이 낙양에 거주한다기에, 헤어질 때 김 군이 저녁에 같이 만나기로 약속을 한 모양이었다. 오후 7시 경에 만나서 맥주 등을 마시며 한담을 나누다가 오후 11시 22분 경 헤어지고 숙소로 왔다. 낙양의 바깥 기온이 너무나 덥고 습도가 높아서 냉방기를 켜놓고 잠을 청했다.
 
이튿날 아침은 가지고 간 컵 자장면으로 먹었다. 김 군과 나는 따로 낙양을 관광하기로 하고 저녁에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주공을 모신 사당을 찾아 사진을 찍고 바로 용문석굴로 향했다. 시의 남쪽 14km의 석회암산에 위치해 1352개의 동굴과 785개의 불감이 있다. 북위의 494년 낙양 천도 후 조성되었으며, 봉선사동의 비로자나 대불이 용문석굴의 중심이었다.
 
북위는 중국 3대 석굴 중 2개인 운강석굴을 대동에 5세기에 만들고, 낙양에 천도한 후 용문석굴을 만들었다. 낙양성은 북위 때 처음 지었지만, 수나라 때 서쪽 십리에 새로 지었다. 또한 낙양 부근에는 한(漢)과 위(魏)가 도읍했던 낙양(洛陽)고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낙양성은 동탁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용문석굴에서 불상과 더불어 석굴에 새겨진 글씨체가 역사적으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석굴에 새겨진 글씨체가 ‘육조체’라는 독특한 형태의 해서체이기 때문이다. 즉 ‘시평공조상기’와 ‘위령장조상기’ 등의 불상조상기의 서체가 빼어났다. 강을 따라 바위산에 조성된 크고 작은 수많은 석굴들이 1km 정도의 길이다. 북위는 선비족으로 석상에 나타난 모습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의 얼굴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나는 이곳에서 글씨 서첩과 탁본 5점을 구입했다. 귀국해 여초 김응현 스승님께 탁본의 진부(眞否)를 감정하니 2점만 진짜임을 밝혀주셨다. 이때 구입한 북위 왕족의 묘지명은 육조체로서 보기 드문 작품이었다. 그리고 고분벽화박물관으로 찾았다. 중국의 벽화는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도공들을 데리고 와서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도 그 수준이 고구려의 벽화보다도 훨씬 떨어졌다.
 
이번 정주, 낙양, 서안을 답사하기로 한 목적은 과연 이 지역이 동방문화의 시원지로서의 자연환경이 적합한지 확인하고 그 문화 수준을 직접 보기 위한 것이었다. 아직 서안지역을 보지는 못했지만 은나라의 정주 유적과 북위의 낙양 불교문화만 보아도 고대 이후의 한족(漢族)의 문화수준은 고구려보다 낮았다고 판단됐다. 너무나 무더운 중원지역의 환경이 문화 창조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았다.
 
다만 두 줄기 하천 낙하(洛河)와 이하(伊河)가 낙양으로 흘러들어 북쪽의 황하로 들어가는 점이 주목됐다. 낙양고성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향했다. 서안 역시 중국의 고도(古都)였고 장안(長安)으로도 불렸다. 서안의 호텔에 짐을 풀고 식사하기 위해 밖에 나오니 호텔 앞 보도에 수십명의 새까만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해 잠을 자려고 모여 있었다. 이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집이 없어서 길 보도에서 밤을 새운다고 했다. 이튿날 새벽에 해자로 둘러싸인 서안성곽에 올라가보니 규모가 제법 웅장했다. 성곽 아래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아침 운동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현종과 양귀비의 여름 별장이었던 화청지(華淸池)를 찾았다. 이곳은 1936년 장학량이 장개석을 가두고 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서안사변을 일으킨 현장이었다. 온천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어 비림박물관을 관람하였는데 이곳에서 고조선 시기의 글씨인 창힐(蒼頡)의 글씨를 발견했다. 창힐은 황제의 사관으로서 새 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낙빈기는 이를 부정하고 신농계의 일파가 만들었는데 황제계인 주(周)나라, 한(漢)나라가 이를 왜곡시켰다고 주장했다. 또한 각자가 쓰는 발음이 다르기 때문인데, 즉 신농계는 정음(표준말)을, 황제계는 변음(사투리)을 쓰기 때문에 신농계가 동방문자를 만들었다고 단정했다(금문신고).
 
섬서성 박물관을 찾았는데 청동기 유물이 많이 보였다. 두 해전 다시 비림박물관을 찾았을 때는 이 창힐의 글씨 비문은 찾을 수 없었다. 중국 정부가 이 비를 어디엔가 숨겼음이 분명했다. 중국은 2002년 동북공정을 공식화한 이후 이 지역에 있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섬서성박물관 앞의 매운 사천식 중국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매우 맛이 있다고 하니 50대인 여주인과 종업원들이 너무나 좋아했다. 다음에 중국 오면 꼭 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서안에는 문왕과 무왕의 무덤이 있다고 들었으며, 전남대 교수가 찾아보고 갔다는 소문을 듣고 나도 한번 찾아보리라 하고 택시기사에게 부탁해 2시간을 찾았지만 허탕만 쳤다, 문왕 묘를 찾는다고 헤매다가 주(周)의 도읍지인 경양(涇陽)에서 성황당(城隍堂)을 발견했다.
 
제법 큰 규모의 기와집 정전 안에 성황과 성황부인, 4방의 신인 천왕과 곡식 신, 부엌 신 등이 있지 않은가. 마치 시골 동네마다 마을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큰 느티나무나 팽나무 옆에 있는 성황당의 원형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곳의 성황당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전통 풍속의 원형인 셈이다.
 
더구나 놀라운 점은 성황당의 정문의 형태가 아름답기가 그지 없었다. 정문 상단에는 좌에서 우로 “명령만우(明靈萬佑)”라는 ‘밝은 신령이 만인을 도와준다’는 편액이 걸려있다. 뒤의 정전 건물 상단에는 역시 좌에서 우로 “성황전(城隍殿)”의 편액이 걸려있다.
 
아름다운 정문은 3칸 2층의 형식인데 7층의 겹처마에 지붕 위의 토우 등이 아름답고 1. 2층이 팔작지붕으로 웅장해 보인다. 일직선의 1, 2층의 용마루는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했다. 용마루를 이렇게 장식한 건물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용마루 끝에는 용머리 모양의 취두가 위엄을 더했다.
 
그리고 정전 안에는 동서남북의 신(神)인 동방의 지국(持國)천왕, 서방의 광목(廣目)천왕, 남방의 증장(增長)천왕, 북방의 다문(多聞)천왕에 대한 소개 글이 있었다. 이 방위 신들은 강태공이 봉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각 방위의 바람과 비가 순조롭게 불고 내리기를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여하튼 나는 경양의 성황전과 정주 고성 터에 남아 있는 성황당의 유적이 50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신성시 여긴 유적임을 알 수 있었다. 정주에 도읍한 은(殷)의 성황당 제례(祭禮)가 경양에 도읍한 주(周)가 계승해 성황전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성황전은 나라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도교의 제사를 받드는 곳’으로 단정해, 삼국시대인 서기 239년에 성황신을 처음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서기 934년에 성황왕으로 봉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도교는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는 것으로 후한의 장도릉이 세웠다. 옥황상제 등 잡다한 신들이 있으며 종교로서의 체계를 갖춘 시기는 서기 3 ~4세기 이후이다. 따라서 현재 중국 학계가 보는 정주 고성의 성황당 유적과 경양의 성황전의 건립 역사는 전적으로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주(周)나라 건국의 혼란시기에 정치를 현명하게 처리해 존경받았던 문왕의 묘를 찾다가 우리 민족 성황당의 5000년 전에 남긴 경양의 성황전 발견은 중원 답사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내주 8월 10일에 있을 집안의 ‘고구려문화국제학술회의’ 에 참가하기 위해 오후 늦게 서안 공항의 북경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바이마사([白馬寺]) 보경사(寶鏡寺) 성황당(-)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집안에서 ‘고구려문화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다
• 중국의 고도 낙양·서안서 5천년 전 성황당 원형 발견
• 세칭 중원문화의 중심지 정주(鄭州)를 향하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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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