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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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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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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 장성(萬里長城) 유리창(琉璃廠)
【역사】
(2019.12.19. 19:01) 
◈ 북경의 만리장성에 오르고 유리창 거리를 거닐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만리장성은 우리 선조들도 쌓은 성곽…만리장성 연장론 모두 허구
북경의 만리장성에 오르고 유리창 거리를 거닐다
만리장성은 우리 선조들도 쌓은 성곽…만리장성 연장론 모두 허구
 
(전편에 이어)
 
우리 일행을 실은 프로펠러 비행기는 심양공항에서 1시간의 주유를 한 후 모두 거의 3시간의 비행 끝에 북경 공향에 도착했다. 첫 눈에 화려하지 않은 낡은 건물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북경공항 건물에 비하면 초가집 수준이었다.
 
북경지역은 오래 전 고조선 시기에는 9주 중의 유주로 불리는 곳이다. 이 지역은 번조선의 땅으로 조양 - 산래관 서쪽 - 북경 지방은 애초부터 조선족들이 살았다. 그러나 진개의 속임수에 속아 번조선이 멸망해 근거지를 잃게 됐다. 진시황이 천하통일 후 36군으로 나누었는데 북경지역은 어양궁, 우븍평군, 상곡군, 광양군 네 군에 걸쳐있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 벽화에는 유주자사 진(鎭)이 13개 군의 태수로부터 인사를 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의 주인공인 진(鎭)은 77세로 죽은 후 영락 18년에 무덤을 완성해서 영구(靈柩)를 옮겼다고 하였는데, 그의 고향이 하북면 안평의 신도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벽화에 그려진 태수 중에 북평태수가 요서, 창려, 요동, 현도, 낙랑, 범양, 상곡, 광령, 연군, 어양 태수와 함께 있는 것을 볼 때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 북경지역을 점령·통치했던 것이다.
 
이 북평이 바로 북경지역을 가리키며, 창려, 현도, 상곡, 광령이라는 지명도 북경 부근의 지명이기 때문이다. 계성(薊城)은 북경지역의 옛 명칭으로 광양군에 속해 군사적 요충지였다. 전연이 350년 이 계성을 함락하고 이곳에 두 번이나 수도를 삼았으며, 당의 안록산이 755년 반란을 일으켜 계성을 대도(大都)롤 삼았으며, 사사명은 황제를 친한 후 이곳을 연경이라 칭했다. 938년 요(遼)는 오경 중의 하나로 게성을 남경 혹은 연경으로 했으며, 금나라는 이곳은 중도(中都)라 불렀다. 이후 계성은 북방의 전략적 요충자로 변했다. 원의 쿠빌라이는 1267년부터 27년 동안 대도성을 축조하였고 명의 영락제가 현 북경의 자금성을 재경해 1420년에 완성했다.
 
고구려 시기에는 북경 부근인 홍산에는 고구려의 별동 부대가 주둔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덕흥리 고분도 광개토대왕 18년인 409년에 만들었다. 광개토대왕이 가장 영토를 크게 확장했던 이 시기에 유주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이었음을 보여주는 벽화임이 분명하다.
 
북경 공항 주변도 모두 평지이고 가로수는 대부분 버들나무다. 길포장이 안 된 곳도 있어 흙먼지가 많이 일어난다. 우리 일행은 천단공원을 먼저 보기 위해 버스로 이동하였으며, 천안문 광장과 인민대회당의 모습이 보였다. 천단(天壇)은 명(明) 영락제가 1406년에 짓기 시작해 14년 후인 1420년에 완공한 제왕의 제천의식을 지내는 곳이다.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큰 단모(壇廟) 건축물이고 4대 명승지이다. 남문에서 환구단(圜丘壇), 회음벽(回音壁)-황궁우(皇穹宇), 단폐교(丹陛橋), 기년전(祈年殿), 황건전(皇乾殿), 북문으로 이어지고 서편에 재궁(齋宮)이 있으며, 바깥 담장 길이가 6,416미터이다. 또한 긴 회랑으로 이어진 것도 특색이다.
 
천단에서 나와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다. 천안문 광장은 두 달 전 중국의 민주화 운동인 6·4사태가 일어난 곳이다. 당시 군의 무력진압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이 희생당했다. 이 천안문 사태로 인해 중국 수뇌부가 강경파와 온건파로 대립해 권력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총리였던 리펑(李鵬)은 금년 7월에 서거했다. 당시 홍콩에서도 리평을 ‘천안문의 살인자’로 비난받았으며, 홍콩 공항 화장실 문에 ‘천안문의 살인자’라는 낙서 본 기억이 새롭다.
 
북경의 가장 변화한 천안문 광장 도로에도 자전거가 도로의 3분의 5를 차지해 시민들이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버스와 승용차의 속도가 매우 느린 편이다. 출근 시간에 남녀가 탄 자전거 모습이 넓은 길을 메우는 모습도 아마 이 때가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 후 북경은 아시안게임 등 국제적 행사를 치루면서 차도에 자전거 통행을 금지시켰다.
 
저녁식사는 북경반점의 오리고기 식당으로 갔는데 오후 5시가 넘었다고 종업원들이 불평을 했다. 아직도 사회주의 습관이 중국인들에게 배어 있었다. 잔뜩 기대한 오리 요리는 너무 마르고 딱딱해 별로 맛이 없었다. 수도호텔에 투숙하였는데 천안문 사태로 인해 외국인들이 대부분 출국해 우리 한국인들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일행은 2시간 정도 호텔 디스코 바를 통째로 빌려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튿날 만리장성에 올랐다. 만리장성 가는 길이 북경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만리장성 부근 산은 온통 헐벗은 나무도 없는 회색의 산악지대다. 공개하는 장성 부분은 일부분이다. 제법 관광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일찌기 단재 신채호 선생은 만리장성은 중국인만 쌓은 것이 아니고 고조선시기의 우리 선조들도 쌓은 성곽이라고 갈파했다. 현재 중국이 동북공정의 후속 전략인 고구려·발해 성곽까지 왜곡시키는 만리장성 연장론은 모두 허구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만리장성의 실체를 밝혀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 일행은 만리장성의 사진을 찍고 내려와서 자금성으로 향했다. 자금성은 명(明) 영락제가 1406년에 짓기 시작해 14년 후인 1420년에 완공하였으며, 영락제 때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 후 1911년 신해혁명 때까지 491년간 궁궐로 사용했다. 자금성은 대청문, 천안문, 단문, 오문, 태화문의 5중문으로 구성되고 황제가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는 3대 전각은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며, 황제와 황후의 침궁은 건청궁, 소인전, 홍덕전, 교태전, 곤녕궁이다. 각종 부속 건물과 화원이 있으며, 가장 웅장한 건물은 태화전(太和殿)다. 누런 동기와를 이은 자금성의 지붕들은 매우 아름답지만 유독 태화전의 지붕 갈이는 아래 2단의 처마 길이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즉 황금률이 맞지 않는 것이 거슬린다.
 
자금성과 우리 경복궁을 비교하면 규모로는 자금성이 3배나 크나 평지에 위치한 자금성은 산과 나무, 물이 없는 삭막한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큰 나무와 못이 없는 자금성의 구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쉽게 피로하게 만들었다. 반면 경복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게 지었다. 즉 뒤의 북악산, 동쪽 삼청동의 응봉, 서쪽의 인왕산과 앞의 남산으로 이루어진 인간 중심이 아닌 자연 중심의 건물 배치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양편 계곡의 흐르는 물과 경복궁 내의 두 개의 연못 및 나무들은 피로감을 말끔하게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걷기도 지루한 자금성을 나와 점심을 먹고 명 13능으로 향했다. 들어가는 진입로의 거대한 석조물과 5~6백년 된 향나무 등은 14세기 이후 축조된 것이었다. 우리가 찾은 지하 20미터 명나라 황제의 무덤은 그 규모가 너무 장대하였으며, 마치 지하 궁전을 방불케 했다. 이것을 만든 인민들의 고통이 너무 컸으리라.
 
마지막 일정인 이화원은 북경 북쪽에 위치한 황실 후원인데 1860년 태평천국의 난 때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침입해 귀중한 보물들을 약탈하고, 소주가(蘇州街)를 불태우는 등 일부를 파괴했다. 이화원은 어림잡아 호수만 100만 평이 되는 거대한 황실 후원이다. 입구에 그 때 전소된 소주가(蘇州街)가 1986년에 복원되었는데 물과 어우러진 양편의 집들이 매우 아름다웠다. 이화원은 또한 호수 주위에 이어 만든 긴 회랑이 유명하다.
 
북경 시내로 들어와서 우의상점에서는 중국의 차(茶)를 구입하였고, 조선의 연경사절단에게 유명했던 고풍스런 유리창 거리를 거닐었다. 대부분 오래된 단층 건물이 많다. 고서적들이 많은 서점에서면서 강희자전 등 몇 권의 서적을 구입했다. 인사동 거리와 비슷하지만 책과 서화, 종이, 붓, 골동품 등을 파는 가게가 많아 보였다. 오랜 전통을 지닌 빛바랜 서점들이 많이 존재하는 유리창의 모습야말로 이 곳 중국의 진짜 문화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리 장성(萬里長城) 유리창(琉璃廠)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집안의 고구려 벽화를 실제로 보기로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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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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