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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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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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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지린 시(吉林市) # 용담산성
【역사】
(2019.12.19. 19:05) 
◈ 길림시의 고구려시기 용담산성에 오르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고구려 국경 지킨 요새…중국, 고구려 역사 지우려는 흔적 포착
길림시의 고구려시기 용담산성에 오르다
고구려 국경 지킨 요새…중국, 고구려 역사 지우려는 흔적 포착
 
(전편에 이어)
 
초저녁 하얼빈을 떠난 버스는 어둠에 잠긴 북만주의 평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얼빈시도 평지에 만들어진 도시였다. 도심에서 벗어나니 울창한 검은 숲이 우리를 맞이했다. 숲 가운데로 버스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해 도로의 흰색과 주변의 검은 숲이 구분될 뿐이었다. 간혹 별빛으로만 숲의 형태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네 시간 후 장춘의 녹원빈관에 도착했다. 군부대 안에 위치해 군인들이 경비를 하고 있었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며, 이튿날 새벽 6시에 기상과 함께 조식을 먹은 후 7시에 장춘을 출발해 백두산을 보기 위한 긴 여정에 나셨다.
 
두 시간 후 우리 일행은 송화강변의 길림시를 통과할 무렵 나는 일행들에게 이곳 길림시의 고구려시기 용담산성을 답사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은 기회이어서 용담산성 답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우리 일행은 나의 제안대로 용담산성을 40분의 짧은 시간 동안 답사했다. 용담산성은 고구려의 북쪽 국경을 지키는 요새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산성이었다.
 
특히 용담산성은 송화강변 북쪽에 위치한 산성으로 길림시 일대를 모두 살필 수 있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송화강 서남쪽의 2,5㎞에는 동단산 산성이 위치해 용담산성과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용담산성 서북쪽 2,5㎞에는 삼도령자 산성이 있어 용담산성의 위성의 역할을 했다.
 
용담산성은 고구려가 부여를 정복한 후 광개토대왕 시기(4세기 말)에 축조한 것으로 부여성으로 비정된다. 길림지역은 부여의 중심지역이었다. 성은 돌과 황토를 혼합해 축조했으며, 성의 둘레 길이는 2396미터이다.
 
이때의 용담산성 답사 경험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됐다. 왜냐하면 10여년 후 중국이 추진한 동북공정의 실상들이 용담산성의 안내판의 왜곡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용담산성의 고구려의 유적을 파묻고 동물원으로 만드는 등 고구려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내가 10여년 후 용담산성을 다시 답사했는데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하튼 당시 우리 일행이 용담산성을 답사하기 위해 입구를 올라가니 왼편의 용봉사(龍鳳寺)에서 고대 악기의 연주 소리가 들렸다. 청시기에 만들었진 사찰이니 아마 전해져 오는 전통 악기 소리로 나에게 매우 익숙한 리듬으로 들렸다. 혹시 저 악기소리가 고구려 시기부터 전해진 소리인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이곳저곳 산성의 유적지를 지나 제일 높은 산성에 올라 길림시를 우회해 유유히 북으로 흐르는 송화강을 하얼빈에 이어 다시 볼 수 있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길림의 송화강도 서울의 한강 모습 마냥 큰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 산성에는 항상 식수를 이용하는 천지(天池)라는 못이 있게 마련인데 용담산성의 천지는 내가 답사한 고구려 산성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52.8m x 25.7m, 깊이 9.06m)였다. 또한 한뢰(旱牢, 직경10.6m, 깊이 2~3m)라고 하는 돌로 축조한 원형의 음식물 창고가 있었다. 아마 용담산성에 주둔한 병사들의 수가 매우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지(天池)에서 길림시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 부부를 만나 즐겁게 환담도 했으며 같이 간 동료 교수들과 사진도 찍었다.
 
거의 이천년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굳굳하게 남아있는 용담산성의 유적과 천지의 푸른 물에는 고구려의 기상이 아직도 서려 있었다. 훗날 용담산성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버스에 올랐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두 시간 동안 높은 산등성이를 여러 번 오르내리다가 평지에 이르곤 했다. 아마 돈화 지역을 지나치는 모양이다. 이 지역은 대조영이 발해의 첫 수도로 삼은 곳이다. 이윽고 제법 큰 평야에 있는 동포 마을인 조선족향을 발견하고 잠시 정차해 그곳 민가의 내부를 답사하기도 했다. 제법 큰 동포마을로 150호가 된다고 했으며, 육순에 가까운 마을 노인은 한국에 한번 가고 싶다고 했다. 이곳 젊은 사람들도 한국에 돈벌이 하려 갔다고 했다.
 
얼마 지나 안도현에 도착했다. 제법 시가지가 발달한 것으로 볼 때 우리의 읍 소재지 규모로 보인다. 우리 일행은 고려풍 음식점이라는 미옥(美玉)반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이라 동포 규수들도 제법 있어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해질 무렵 이도백하에 도착했다. 이곳 방문도 세 번째인 나로서는 그 동안 이도백하 시가지의 빠른 변화를 실감했다. 호텔도 많아지고 우마차가 거의 점거했던 도로에는 택시가 즐비했다. 안도빈관에 투숙했으며, 이튿날 6시에 아침을 먹고 백두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도시락까지 준비했다.
 
지프차를 타고 올라간 백두산의 현명봉 산위에는 구름이 제법 낀 상태로 바람이 세차게 불고 제법 쌀쌀했다. 푸른 천지 위로 흰 뭉게구름이 휘날리고 있었다. 또 다른 형태의 천지 모습이다. 정상 아래에 펼쳐진 백두산록의 푸른 능선은 태초부터 자연으로 형성된 수림지역이다.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우리 일행은 가지고 간 소주로 한잔씩 들기도 했다.
 
온천지대에 내려와 대우그룹이 만든 호텔에서 온천을 했다. 호텔 숙박객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호텔도 머지않아 문을 닫아야 할 모양이다. 몇 년 뒤 동북공정이 공식화 되고 “백두산 호텔”을 운영하던 한국인에게 중국 정부는 호텔 이름을 “장백산 호텔”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당시 호텔 주인은 북경대학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장백산의 자료보다 백두산에 관한 자료가 수십 배 많음을 입증해 중국 정부와의 소송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그 후 “백두산 호텔”이 소송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백두산공정’에 따른 백두산을 개발할 때 이 “백두산 호텔”은 강제로 철거당했다.
 
1993년 시기는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한 해 후로 한국인들이 백두산 지역과 연길일대를 매우 많이 방문했다. 이런 와중에 북한의 탈북자들이 급증했으며, 고구려의 고토회복 등의 이야기가 난무하자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1997년부터 중·조변경지역을 답사하는 등 동북공정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 후 중국은 2002년 동북공정을 공식화하고 ‘백두산공정’을 시작해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인 백두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 ‘장백산문화론’이며 2003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은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표기해 이 일대가 여진족의 발상지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고구려가 장백산문화의 뿌리이며 고조선과 발해가 장백산 문화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국가라는 것이다.
 
즉 청과 연결된 여진족을 내세워 만주지역과 백두산으로 연결된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배제하고 이 지역을 중화민족의 역사로 둔갑시키려는 의도였다. 백두산공정은 동북공정의 연장인 것이다. 이 후 중국은 백두산 일대를 공식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백산시를 만들고 공항까지 건설하는 등 백두산공정을 실제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백두산 관할권을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길림성으로 이관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백두산관리와 경제적 수입원까지 빼앗아 버렸다. 중국의 의도는 언젠가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해체시킬 것임이 분명해진다.
 
이와 같이 중국이 왜곡시킨 장백산문화론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상징인 백두산의 가치와 중요성을 우리 모두는 다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한 중국이 만들어낸 장백산문화론이 허구임을 입증하고 알려야 할 것이다.
 
우리 일행은 다시 빈관으로 돌아와 숙박을 한 후 이튿날 장춘을 향해 다시 일찍 버스에 올랐다. 비포장도로에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지나치는 차창에 광활하게 펼쳐진 백두산록의 아름다움은 볼수록 그토록 정겨울 수가 없었다. 점심 식사는 우리 동포가 운영하는 용천식당에서 먹고 주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장춘 녹원빈관에 도착해 숙박을 한 후 오후에 장춘시내를 둘러 보았다. 오전에는 길림대학에 있는 장필화 교수에게 연락하니 빈관으로 찾아와서 만날 수 있었다. 또한 권선홍 교수와 연락이 된 양소전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양소전은 손진기와 더불어 중국이 추진한 “동북공정”의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학자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 두 차례나 초청 방문했다.
 
장춘(長春)은 1932년 일제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의 수도로 신경(新京)으로 개칭한 곳이다. 역시 장춘도 동북평야의 평지에 발전한 도시다. 점심 식사 후 우리 일행은 북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일은 혼자 정주·낙양·서안 지역으로 떠날 계획이다.
고구려(高句麗) 지린 시(吉林市) # 용담산성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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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에 참가하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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