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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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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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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모용 황(慕容皝) 지안 시(集安市) # 고구려벽화 # 이윤기
【역사】
(2019.12.24. 12:51) 
◈ 모용황, 정말 미천왕릉을 도굴해 시신을 가져 갔을까
[스카이데일리 연재] 환도성 여부, 동황성 위치 매우 모호…침입 물리적으로 불가능
모용황, 정말 미천왕릉을 도굴해 시신을 가져 갔을까
환도성 여부, 동황성 위치 매우 모호…침입 물리적으로 불가능
 
 
이번 집안의 국제학술회의 행사 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집안의 고구려벽화 관람과 사진촬영이었다. 당시에는 1500년 전의 고구려벽화는 누구나 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의 열정과 조선일보사의 협조로 인해 세계문화유산인 고구려벽화를 직접 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평소 존경해왔던 이윤기 소장의 생사를 건 007작전으로 성사시켰다고 자신의 자서전인 ‘북상의 역사 창조’에서 밝히고 있다.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일은 연변의 젊은 학자들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게 됐다는 점이다. 특히 방기동(方起東) 중국길림성고고문물연구소장을 비롯해, 서일범, 고경수 등 연변대학 교수 7명과 함께한 별도의 저녁 회식은 잊을 수 없었다. 특히 방기동 교수의 해맑은 웃음과 대담을 잊을 수 없다. 후에 알았지만 부인이 우리 동포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마지막 날인 8월 14일 8시 30분에 집안 시내에 남아 있는 국내성 유적을 답사했다. 두 해 전에 왔던 모양 그대로 높이 2미터 가량의 돌로 쌓은 성곽의 잔해만 남아있었다. 1920년대까지 국내성의 흔적이 온전히 남았던 유리 사진을 보면 크게 웅장한 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집안의 지형은 누가 보아도 넓은 지역이 아닌 곳이다. 이곳이 400여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다. 따라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고구려의 건국의 B.C. 37년설은 남ㆍ북한 학자들이 부정하는 학자들이 증가하는 편이다. 대체로 고구려는 B.C. 3세기경에 졸본지역에서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졸본지역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것은 유리왕 22년 서기 3년이다. 초기 고구려의 수도인 졸본을 환인지역을 보고 있으며, 오녀산성을 흘승골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를 졸본성이라는 것이다. 이 지역을 흐르는 하천이 졸본천인데 현재의 혼강(동가강)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고구려 초기 수도의 비정은 이병도설로 현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국은 이 조차 부정해 ‘오녀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이병도설은 일제식민사학의 논리인 고구려 수도는 졸본성 - 국내성 천도 - 평양성으로 천도했다는 이론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병도는 1959년에 펴낸『신수국사대관』에서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이미 앞서 서술했지만 고구려의 장수왕이 천도한 후기 수도는 평양이 아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자연히 국내성도 유리왕 22년에 천도한 고구려의 수도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국내성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가 아니라면,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의 환인설(오녀산성)은 잘못 비정한 것이 분명해진다.
 
이와 같은 이병도설과 조선사편수회가 수립한 일제식민사관설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점이다. 이 두 학설의 공통점은 우리 고대사의 영토와 역사를 압록강-두만강 선 이남으로 축소시키기 위해 실제의 고구려사를 왜곡·조작했다는 점이다.
 
유리왕이 서기 3년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산상왕이 서기 198년에 환도성을 축조했으며, 209년 환도성으로 천도했다. 246년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았으며, 247년 산상왕은 평양성을 축조하고 천도했다고 했다. 고국원왕이 342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는데 8월에 환도성으로 천도했다. 11월에 모용황이 쳐들어 와서 환도성의 궁성을 불태우고 성을 파괴함과 동시에 모후를 납치하고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해 시신을 싣고 가는 등의 수모를 고구려가 당했다. 고국원왕은 이듬해인 343년 7월에 평양 동황성으로 옮겨 거쳐했는데 지금 서경 동쪽의 목멱산중이라 했다.
 
그러나 고국원왕은 371년 백제와 평양성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위에 서술한 환도성이 과연 집안의 환도성인지 여부와 고국원왕이 거처를 옮긴 평양 동황성의 위치가 어디인지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는 동황성을 서경의 동쪽의 목멱산중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국원왕은 343년에 평양으로 천도한 후 다시 국내성으로 돌아온 기록은 없다.
 
모용황의 고구려 침입과정에서 분명한 점은 모용황이 2000리나 먼 국내성의 환도산성까지 침입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모용황이 침입해 모후를 납치하고 미천왕의 시신을 도굴해 가져간 곳은 국내성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고구려의 수도를 요양이나 임분으로 설정해야 모용황이 고구려 침입 시 자행한 만행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즉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을 요양으로 보는 요양설과 산서성의 임분설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두 학설 중 요양설이 고구려 후기 수도의 평양이 맞는다고 한다면 고구려의 초기 수도를 의무려산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는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여하튼 조선사편수회가 조작한 평양은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의 후기 수도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에 승차해 통구하를 따라 환도산성을 향했다. 먼저 산성아래의 적석총 무덤군을 답사했다. 장군총처럼 완벽한 적석총은 드문 편이었지만 복원했거나 덜 파괴된 거대한 적석총이 20여개나 됐다. 아마 이곳에 묻힌 적석총의 주인공은 나라에 공을 세운 고관이나 무인 및 귀족층으로 보였다.
 
본래 집안지역에 2만여 개의 적석총이 있었지만, 거의 무너지고 해서 1만여 개의 적석총의 돌무지가 남아있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적석총 위에 올라가 보기도 했다.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 형태의 돌을 발견하고 설명을 들었다. 위가 마름모 형태인데 60센티미터 정도로 보였다.
 
우리는 통구하를 가로질러 환도산성으로 향했다. 대부분 옥수수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산성 안의 천지(天池)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동북공정이 공식화 된 10년 후 다시 환도산성을 찾았는데 이 천지(天池)의 못은 주차장으로 변해있었다. 중국은 동북공정 이후 고구려 유적을 하나 둘 지우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역사적 기록조차 없던 만리장성의 동단을 압록강 하구에 고구려 박작성을 허물고 ‘호산장성’을 축조했다. 우리 역사학계는 이에 대한 항의조차 없었다는 점에 씁쓸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환도산성의 무너진 점장대 위에서 손세일 전 국회의원, 정조묘 교수 및 홍콩 교수 등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이윤기 소장과도 기념사진을 찍고, 옥수수 밭을 지나서 궁궐터까지 답사한 후 환도산성의 서쪽 성곽의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축조한지 거의 2000년이 넘은 성곽이 무너지지 않고 온전히 있다는 것은 고구려의 성곽 축조술이 그만큼 우수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집안 시내로 돌아온 나는 오후 3시 집안 역에서 통화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를 타고 보니 김태익 조선일보 기자와 김주호 사진기자와 같은 열차의 앞뒤 좌석에 앉게 됐다. 그리고 북한학자들인 박시형, 최영식, 현명호 교수와 경철화 집안박물관 부관장, 방기동 소장, 조유전 박사, 이형규 교수는 다음날 환인의 ‘오녀산성’을 답사했다고 했다.
고구려(高句麗) 모용 황(慕容皝) 지안 시(集安市) # 고구려벽화 # 이윤기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연변대의 학술세미나 거부당하고 국동대혈을 답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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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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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