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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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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도(四神圖) 지안 시(集安市) # 고구려 고분벽화 # 고구려 벽화 # 김원용 # 연변대학 # 조선학 국제학술회의
【역사】
(2019.12.19. 19:01) 
◈ 집안의 고구려 벽화를 실제로 보기로 결심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고구려 벽화 실제로 보지 않고 역사 기록 의심…역사 축소 정황 포착
집안의 고구려 벽화를 실제로 보기로 결심하다
고구려 벽화 실제로 보지 않고 역사 기록 의심…역사 축소 정황 포착
 
 
나는 간도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 고대 역사서를 접하면 접할수록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과연 수만 년 혹은 수천 년 전의 최초 동북아 문화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시원지는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칭 4대 문명의 하나인 중국 황화 유역이 정말 시원지라면 중국 문명이 동북아 문명의 시작이 될 것임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고대 역사서는 이를 부정하는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성현인 공자도 동이족의 후손이다. 공자도 논어에서 천릿길 북쪽에 예의바른 군자국이 있는데 자신은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 지역은 모사방정(母姒方鼎, 舊名 箕侯方鼎, BC 2374 주조)이 발견된 요령성 홍산 유역이며 고조선 지역이다. 모사방정의 24자의 글자 형태는 고금문으로서 한자의 초기 형상이다.
 
이 방정에는 요(堯), 순(舜)의 큰 부인 아황(娥皇), 북경지역으로 도망가서 선조가 되는 오(吳)의 이름이 나온다. 이미 4300여 년 전에 이와 같은 청동기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문화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말해준다. 더구나 화북성 보정시에서 발견된 당우삼과병명(唐虞三戈兵名)에는 BC 2467년부터 2421년까지 즉위했던 제정옥(帝正玉) 고양(高陽)씨의 3대 족보(신농씨의 孫, 曾孫, 高孫)에는 20인의 기록이 있다. 4000년 전의 족보가 발견된 것이다. 이 문화들이 홍산 문화이며, 바로 우리의 고조선 문화이다. 공자가 흠모한 문화가 우리의 고조선 문화인 셈이다.
 
중국은 이 지역의 문화를 요하문화라고 새로 이름 부치고 중국의 최고의 문화라고 홍보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고학적 측면에서도 동이족의 문화가 중국보다 앞섰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동이족의 존재는 중국 한족(漢族)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나는 두 해 전 백두산 천지를 답사하고 이 천지야말로 동북아문화의 시원지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때 연변대학에서 제2차조선학 국제학술회의에 초청장이 온 것을 빌미로 고구려 문화를 꽃피운 집안의 고구려 벽화를 실제 답사하기로 결심했다. 이와 같은 결정을 하게 된 계기는 김원용의 ‘한국미술사연구’와 ‘한국고고학개설’에 기술한 고구려 벽화 내용을 읽고 나서였다.
 
김원용은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의 발생이 중국의 영향에 의한 것이며, 끊임없이 중국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강렬한 자극을 민감하게 반영했으며, 사신도는 중국의 신선사상이나 음양사상의 영향하에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구려 벽화고분은 ‘낙랑·대방 고지’에 근거해 평양천도 이전에는 시작하지 않고 평양에 들어온 후 시작했다는 사대주의적·식민사관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물론 마지막 부분인 고구려 고분들이 고구려의 천도 이후라는 관점은 27년 뒤에 수정했다. 나는 김원용의 두 책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고학자가 분명 고구려벽화를 실제 보지 않고 발간된 고분 벽화의 자료만 보고서 책을 기술하였음을 확신 했다. 따라서 나의 두 눈으로 고구려 벽화를 봐야겠다는 오기가 일어났다.
 
연변대학의 국제학술회의가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개최돼 적어도 11일까지는 연길에 도착하는 걸 전제로 하고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을 먼저 답사하기로 했다. 따라서 8월 5일 서울을 출발해 북경에 도착하니 박영림이라는 동포 청년이 비행장에 반겨줬다. 중국의 명문인 청화대학 출신인데 목단강 부근의 조선족 마을에서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된 제법 똑똑한 청년이다. 우리는 밤 10시 경 북경에서 심양 가는 급행열차의 침대칸을 타고 대략 8시간이나 걸려 아침 6시에 심양역에 닿았다. 어두운 여명이 걷히자 심양역의 속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우리 일정은 통화(通化)시로 가서 재작년 연변대학에서 만난 김정남 기자를 만나서 국내성인 집안(集安)까지 동행해 고구려 유적을 안내받는 것이었다. 우선 심양에서 오전 9시 30분 발 통화행 열차를 타는 것이 오늘 일정의 시작이었다. 심양역 부근의 모습은 우리나라 70년대 용산역 부근처럼 어수선하고 정돈되지 않은 깨끗하지 못한 낡은 집들이 밀집해 있는 우중층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또한 역 부근에 오고가는 사람들의 얼굴과 행색이 꾀죄죄한 모습일 뿐만 아니라 세탁하지 않은 옷에다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차림이었다.
 
우리는 표를 사기 위해 표파는 창구 앞에 두 시간 넘도록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9시까지가 되도록 우리 줄은 전혀 줄지 않고, 아직도 십여 명이 대기해 도저히 20여 분만에 표를 구입할 것 같지 않아 박영림에게 다른 방법을 강구토록 했다. 즉 먼저 열차 승차 후 열차 안에서 표를 사는 방법이다. 먼저 심양역의 여성 역무원에게 우리 사정을 말했더니, 허락을 해 우리는 표를 끊지 않고 승차구역으로 나가서 10 여분 후에 도착한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심양을 출발한 열차는 무순을 지나 매화구에서 아래로 꺾어지는 노선이다. 두 해 전 만주 지역 열차 여행은 야간이라 이곳 지형을 볼 수 없었지만 오늘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심양을 벗어나니 산과 구릉이 나타나고 하천이 이어진다. 때때로 마을이 산을 배경으로 위치해 우리의 마을 형태와 별 다름이 없었다. 아득한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넓은 평야로 이루어지는 천진 및 북경 지역과는 다른 형태다.
 
오후 5시 경 통화에 도착해 혼강이 내려다보이는 통화빈관에 숙소를 잡았다. 혼강은 통화시를 가로지르는 큰 강이다. 후에 밝힌 사안이지만 300년 전 강희제가 내린 유시(諭示)인 ‘동위토문 서위압록(東爲土門 西爲鴨綠)’에 나타나는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압록강이 아니라 환인의 북쪽산인 ‘계림합달령’, 즉 여진인들이 말하는 세칭 ‘장백산’에서 유래하는 혼강(동가강)이다. 동쪽의 압록강 수량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당시 강희제가 인식했던 압록강은 환인-통화를 관통하는 혼강이었다. 또한 강희제가 인식한 토문강은 ‘계림합달령’에서 북으로 흐르는 휘발하의 상류인 ‘토문하’였으며, 강희제의 명을 받은 목극등이 300리 동쪽 백두산 분수령에 국경비석을 세우고 명칭을 변조했다.
 
통화빈관에서 김정남 기자에게 연락을 취하니 숙소로 달려와 주었다. 우리는 두 해만에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이번 답사 여행의 목적과 일정을 의논했다. 김정남 기자는 기꺼이 동행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타고 갈 승용차를 예약하고 내일 일찍 출발할 것을 권했다. 우리 일행은 통화역 부근의 시장골목에서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가는 시장일대는 비포장도로에다 우리의 시골장터와 비슷한 곳이었다.
 
통화에 늦게 도착한 관계로 통화 시의 중심이 되는 번화가는 가볼 수가 없었다. 통화역 광장을 지나치면서 김정남 기자는 나에게 묻는다. 저기 산처럼 쌓아둔 곳을 가리키며 무엇인 것 같으냐고 묻기에 나는 석탄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김정남 기자는 아니라고 머리를 내젓는다. 저게 바로 백두산 일대에서 캔 더덕이라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도 중국산 더덕이 유통된다고 하더니 가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이 생산되는 더덕의 보관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무척 썩기 쉬운 것이 더덕이다.
 
백두산은 예로부터 산삼과 각종 약초가 많이 생산되기로 유명하였으며, 백두산 채삼(採蔘) 문제로 조선과 청국 간에 매우 심각한 긴장관계가 계속되었으며, 급기야 채삼하려 월경한 조선인이 청인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빌미가 돼 목극등에 의해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설치된 것이다. 물론 명칭은 정계비라 하지만 실제 양국의 국경비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했다. 나도 이 정계비는 설치과정이 국제법상 하자가 있으며 청에 의해 강제로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부정하는 입장이다. 벌써 백두산정계비가 설치된 지 300년이 넘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통화시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또한 김정남 기자의 항일군의 유적지 답사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김정남 기자는 이 지역 만주족 친구들과도 우리의 고대 민족 이야기를 한다면서 ‘우리 민족과 만주족과는 옛날에는 같은 민족이 분명하다’는 점에 공감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 의견에 동감이라며 맞장구를 쳐 줬다. 우리는 혼강(渾江)이 바라보이는 숙소에서 통화 시의 야경을 보면서 상념에 잠겼다.
 
저 혼강은 바로 주몽이 고구려를 처음 세운 홀승골성(紇升骨城)인 환인(桓仁)시로 이어진다.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에는 ‘추모왕이 엄리대수를 건너 첫 도읍을 세운 곳은 졸본인데 졸본은 비류골에 있다’고 했다. 따라서 이 혼강이 바로 엄리대수이며 비류수라 부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홀승골성을 중국인들은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 왜곡시켜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은 고대사서의 역사들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장수왕의 고구려 후기 수도를 천도한 지역이 국내성(집안)이 아니라는 학설(요양설과 임분설)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조선사편수회가 왜곡시킨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역사를 축소시키기 위해 장수왕이 천도한 수도를 평양으로 왜곡시키려고 하다 보니 국내성의 위치를 집안으로 설정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일은 고구려의 집안의 유적들인 장군총, 환도산성, 광개토대왕능비, 만개가 넘는 고분군 및 휘황찬란한 고분벽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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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수많은 고구려의 적석총을 만나고 환도산성에 오르다
• 집안의 고구려 벽화를 실제로 보기로 결심하다
• 북경의 만리장성에 오르고 유리창 거리를 거닐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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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