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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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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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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豆滿江) 백두산(白頭山)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 토문강(土門江) # 백두산 천지 #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 현명봉
【역사】
(2020.03.16. 13:20) 
◈ 백두산 현명봉과 토문강, 두만강 원류를 답사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17C말 지리정보 어두웠던 조선 관리들, 백두산 차지하려는 淸 속셈 몰라
어제는 천지를 답사했지만 오늘은 백두산 북쪽의 현명봉 봉우리를 오르기로 했다. 중국에서는 천문봉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 일행은 지프차와 비슷한 소형차를 타고 백두산록을 굽이굽이 돌아 30분만에 현명봉 아래 주차장에 도착했다.
 
날씨는 쾌청했지만 차가운 날씨에 바람이 제법 불었다. 현명봉에서 바라본 천지의 모습을 찍고 천지 동쪽의 6호 국경비가 있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천지 서쪽의 5호 국경비는 천지를 반분하고 있는 시작이라면 6호 국경비는 천지를 반분하는 동쪽의 국경비다. 중국 측 봉우리 이름으로 5호 국경비는 마천우봉(2549m)과 옥주봉(2664m)의 중간에 있고 6호 국경비는 비류봉(2527m) 부근이다.
 
그러나 6호 국경비 부근에 중국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겨우 천지기상대 부근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차를 타고 하산했으며 온천지대에 있는 대우호텔에 들어가 온천을 하고 숙박지인 광택빈관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오전 7시 토문강 원류를 답사하기 위해 삼도향(三道鄕)으로 출발했다. 송강진을 지나 한 시간만에 삼도향에 도착했다. 지명이 말해주듯이 세 줄기의 강이 삼도향에서 합수해 송화강의 상류를 이룬다. 우리가 답사하려는 강은 세칭 토문강(土門江)이라고 하는데 이는 오도백하(五道白河)를 지칭한다. 이 오도백하를 우리는 왜 토문강이라 부르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최근 강희제가 서양선교사의 측량으로 1718년에 제작한 황여전람도의 동판에 근거한 서양고지도를 통해 그 이유가 밝혀졌다.
 
17세기 말 강희제 시기에 청의 관료들이 장백산 탐사를 하고 난 후부터 휘발하 상류의 토문하의 명칭이 오도백하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강희제와 목극등은 휘발하 상류 토문하 부근의 지형과 흡사한 오도백하를 토문하로 개칭해 소위 백두산정계비를 임의로 세웠던 것이다. 당시 백두산 일대의 지리 정보에 어두웠던 조선의 관리들은 이와 같은 백두산 일대를 차지하려는 청의 속셈을 몰랐다.
 
3일 전 눈이 제법 내렸다. 이곳 삼도향 지역에도 많은 눈이 와서 강 입구부터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눈은 내렸지만 얼지 않은 진흙투성이에 차바퀴가 빠지기 시작해 더 이상 차를 운행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오도백하 강가에서 차를 세우고 인터뷰를 하고 제법 빠른 속도로 흐르는 강물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다.
 
세칭 백두산정계비의 분쟁의 시작이 되는 토문강(오도백하)의 원류 기점의 답사를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언제 다시 답사의 기회를 약속할 수가 있을까’라는 아쉬움을 남기고 삼도향으로 차를 돌리고 말았다.
 
우리는 삼도향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백두산 인삼을 지배하는 가게에서 갓 뽑아온 1~2년생 백두산 인삼을 50뿌리를 사는 한편 10뿌리를 먹어보기도 했다. 이곳은 인삼 집산지라 인삼 한 뿌리가 1위안이니 가격이 매우 싼 곳이었다.
 
12시 40분에 청산리 항일대첩지와 두만강 원류를 답사하기 위해 출발했다. 동간도의 동부와 서부를 나눠지는 노령산맥을 넘어오니 황색의 백두산 낙엽송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늦은 가을이지만 이곳은 지대가 높아 이미 누런 황금빛 낙엽송의 광경을 처음 보았다.
 
이윽고 1677m의 증봉산의 기슭에 있는 청산리 마을에 오후 1시경에 도착했다. 아주머니 서너 명과 아저씨 한 분이 우리말을 하고 지나가기에 동포인 조선족으로 보여 ‘백운평’이 어디인지 물으니 위에 있는데 작은 마을이라고 했다. 마을 뒤편의 제법 높은 산 능선에 기념비의 모습이 보였다. 2001년 세워진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는 좌우로 한글과 한문을 같이 새겨놓았다. 세운지 4년이 지났지만 비석의 모서리 화강암이 떨어져나간 모습에 마음이 상했다.
 
더구나 이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건립에 대해 길림대학의 양소전 등이 당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에게 서신을 보내 “청산리전투는 한국인들이 그들의 독립을 위해 싸운 곳인데 여기에 왜 비를 세우는가. 이곳은 한국인들의 땅이 아니지 않는가.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행동과 상황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후진타오가 동북공정을 2002년 공식화시켰다는 것이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길림성 삼도구 청산리와 이도구 일대에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의군부, 한민회군, 광복단, 의민단, 신민당 등 약 2000명의 항일군 부대들이 간도에 침입한 약 2만5000명의 일본군과 교전해 1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고 대승리를 거둔 항일 전투였다. 이 전투에선 북로군정서 김좌진 사령관과 대한독립군 홍범도 사령관이 중심이 돼 연합작전을 펼친 성과였다.
 
봉오동·청산리전투가 일어났던 1920년경 이 지역이 중국의 땅이었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1911년에 손문이 세운 중화민국은 멸청흥한(滅淸興漢)의 기치 아래 한·청 봉금지역인 이곳까지 영유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우리 정부는 1897년 서상무를 서변계관리사에 임명했으며 이범윤을 1902년 간도시찰사에 임명하고 이듬해인 1903년 간도관리사로 승진시키는 등 간도지역에 통치력을 행사했다.
 
이후 간도한인들이 광복 시기까지 이 지역을 개척하고 있었다. 또 1949년에 세운 중공 역시 자신들의 건국 이전이었다. 이같은 역사적 사실에 비춰 볼 때 현 중국 정부 역시 분쟁지인 이 간도지역을 자신들의 소유로 영유권화 하려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 추진의 근본적인 목적이었다.
 
‘청상리항일대첩기념비’에서 당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김좌진ㆍ홍범도 등 항일지사들의 ‘위국수명(危’國授命)의 애국정신을 되새기고 기념사진도 찍은 후 화룡으로 출발했다. 화룡의 수퍼마켓에서 빵과 요구르트, 생수를 구입해 차 안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출발했다. 반 시간이나 산길 고갯길을 가는 등 점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 강원도 산길마냥 험했다. 문득 먼 산의 밭이 보이는 곳이 북한의 산이 아닌가했더니 정말 북한지역이었다.
 
두만강 부근에 도착한 모양이다. 두만강 북쪽은 산림이 우겨진 반면 남쪽의 북한지역의 산은 눈조차 녹지 않았다. 간혹 두만강 북쪽 층계 밭도 기온이 낮아 눈이 녹지 않았다. 차로 한 시간이 지나자 빽빽이 들어선 자작나무 숲도 보이고 낙엽송도 나타나는데 지대가 높아 온통 눈꽃이다. 간간이 산림녹화, 산불방지의 글씨도 보인다. 황금빛 낙엽송 숲이 나타난 후 마을이 보였다. 광평휴게소가 지나고 낚시터도 눈에 들어왔다.
 
두만강 폭이 10m로 매우 좁아 보였다. 여기가 두만강 흐름 중에 가장 좁고 수심이 얕은 삼장리-구청리 사이의 지역인지도 모르겠다. 북한 주민의 주요 도강지로 처음에는 양국 사이에 쇠밧줄을 걸고 왕래하다가 나무다리인 목교(木橋)를 설치했는데 홍수에 유실돼 징검다리로 왕래했다고 했다. 그 후 양국이 투자해 콘크리트 다리를 1년만인 1995년에 완성했다고 했다.
 
도로 옆으로 군인 10여명이 행진하고 있었다. 다시 평야가 나타나고 군사도로가 보였다. 낙엽송 군락이 나타나고 벌목장도 나타났다. 이젠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지려하고 모두들 마음은 급해지는 모양이다. 다시 두만강을 만났다. 지금까지 두만강을 따라 차길이 나있었다. 조어대(釣魚臺)가 나타났다. 김일성의 낚시장이라고 했다.
군 초소 건물도 보였다. 갈림길이 나타나고 노루 두 마리의 모습이 보였다. 원지(圓池)를 지나 오후 4시 두만강 발원지에 도착했다. 원지와의 중간 왼쪽에 21호 국경비가 보였다.
 
이곳 두만강 원류는 홍토수 물줄기의 시원지이기도 하다. 위로 올라갈수록 원류의 물줄기 폭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50미터 가장 위쪽에는 한 뼘 길이의 물줄기를 발견했으며 끊임없이 물이 쏟아진다. 홍토수의 모습이다. 우측에 높지도 않은 홍토산이 위치한다. 우리 일행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폭이 50cm 불과한 홍토수 물의 좌우로 발을 옮기면서 여기는 북한 여기는 중국이라며 서로 놀리기도 했다. 홍토수의 흐르는 모습과 둥근 형태의 홍토산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우리는 조금 전 지나쳐온 원지(圓池)로 향했다. 원지는 청(淸)의 건국신화가 깃든 곳이다. 원지는 북쪽편의 3분의 1 쯤 얼음이 언 상태의 호수였다. 오후 5시가 가까워서 해는 지고 호수 물은 검푸르게 보였다. 호수 둘레는 큰 나무들로 에워싼 모습으로 태고의 신비를 가직하고 있었다. 호수 둘레는 1.2km이고 해발 1258m에 위치하고 있다. 천지의 물이 원지에서 다시 솟아나서 못을 이룬 것이다. 이 원지의 물도 홍토수의 물과 합수해 두만강으로 흐르는 것이다. 호수 앞에는 천여욕궁지(天女浴躬池)라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청의 건국신화는 건륭제 때 편찬한 ‘만주원류고’에 나온다. 만주족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고 이름은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이다. 하늘의 세 선녀가 불후리라는 연못에서 목욕을 하다가 막내 선녀가 까치가 준 붉은 과일을 먹고 임신을 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는 대표적인 건국의 난생설화인 셈이다. 또 금(金)을 세운 누루하치는 신라 경주 김 씨인 고려인 김함보의 9대손이라는 학설도 있다.
 
만주원류고는 1778년에 편찬한 것으로 볼 때 이 원지의 비석도 만주원류고를 편찬한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세칭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1712년보다 훨씬 뒤에 세우진 것으로 볼 때 백두산을 차지하려는 청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원지에서 출발했지만 바로 해가 지고 말았다. 한 시간 쯤 가다가 군 초소에서 검문을 당했다. 조선족 안내인과 운전기사가 여러 가지 답변을 잘한 결과 통과했다. 어둠을 헤치고 높은 산 속의 험한 길을 두 시간 걸려 숭선(崇善)에 도착했고 한 시간 후에야 화룡에 도착했다. ‘전주비빕밥’ 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식사를 하고 오후 9시 30분에 출발했다. 늦게 연길시의 숙소에 도착하니 연변 소설가인 유연산 씨가 나와 있었다.
 
유연산 씨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같이 출발한 KBS의 역사스페셜 ‘발해팀’이 발해의 수도였던 영안 동경성인 ‘상경용천부’를 답사해 사진을 찍다가 적발돼 지금 연길 형무소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후 발해팀은 일주일간 매일 중국 공안의 조사를 받은 후 귀국했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국가가 아닌 말갈족의 국가라고 역사를 왜곡시키고 동경성의 발굴조차 비밀로 하는 등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우리 팀도 오늘 운이 좋아서 역사적 현장이었던 홍토수의 원류를 답사할 수 있었고 군 초소의 검문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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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두만강가에서 꽃제비를 만나고 모아산(帽兒山)에 오르다
• 백두산 현명봉과 토문강, 두만강 원류를 답사하다
•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을 다시 오르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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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