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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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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지역의 흘승골성(訖升骨城)을 답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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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천1호분과 국동대혈을 답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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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이일걸의 지식창고 2020.05.06. 10:05 (2020.05.06. 10:05)

【역사】환인지역의 흘승골성(訖升骨城)을 답사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환인지역의 흘승골성을 다녀오다
824m의 흘승골성은 우리 답사단이 묵은 호텔에서 보니, 환인시를 품은 채 흐르는 혼강(渾江)의 푸른 물위의 떠있는 모습이다. 이 흘승골성을 중국은 ‘오녀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전설상의 다섯 명의 여성과 관련되었다고 해서 이름을 지은 모양인데 ‘옛 전투를 연상하는 고성(古城)과 아름다운 여성’이라 어울리지 않은 명칭이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사방에 깔린 고구려 역사와 문화지우기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곳은 본래 애초부터 그들의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높은 산의 정상에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홀승골성은 환인시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동쪽 면은 혼강을 막아 만든 저수지와 맞닿아 있다. 이 저수지 아래에는 2천 년 전부터 살았던 선조들의 적석총 1만 여기가 수장되어 있다. 태초부터 이 환인은 산과 물이 조화되고 평야가 넓어 살기가 무척 좋은 곳이었기에 선조들이 터를 잡았던 곳이다.
 
산의 정상이 일자문성(一字文星)의 형태로 이루고 있었는데, 남북 길이 1000m, 폭 300m 평지는 산성으로서의 좋은 요건을 갖추었다. 특히 일자문성(一字文星)의 산 기세(氣勢)는 필봉(筆峰) 형태의 목산 3개와 기운을 합친 것과 같으니 가히 이 흘성골산의 영험스런 산 기운이 엄청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산성 동편에 있는 고려묘자촌 무덤 군을 50·60년대 조사시에 700여 개의 무덤이 보고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집안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무덤 군으로 발표되었다.
 
환인에는 연강촌, 장강촌, 상고성자촌, 양가가촌, 동선연촌, 연합촌, 만만천촌, 미창구촌, 대청구촌, 사도영자촌, 천리촌, 대황구촌, 비채원자촌, 대좌촌, 다전자촌 등 16개 촌에 무덤 군이 존재하였다.
 
환인 저수지는 1958년에 착공하여 1972년에 준공하였으며, 혼강 변의 고구려 적석총이 수몰되었다. 당시 고려묘지촌 700여 기의 적석총이 수몰되었다고 하는데, 그 외 지역의 수몰 적석총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1만 여기의 적석총이 수몰되었다고 추정한다. 중국은 수몰지역의 고고학적 자료 조사 없이 적석총을 수장시켜 이 지역에 대한 고대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없게 만들었다.
 
감부식의 ‘삼국사’에는 “하백의 딸인 유화는 여러 아우들과 함께 놀고 있는데, 그때에 한 남자가 와서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웅심산(熊心山) 밑으로 나를 유인하여 압록(鴨淥) 변으로 데리고 가서 사통하고는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誘我於熊心山 鴨淥邊室中私之 卽往不返)“고 하였다. 이 삼국사의 기록 중 ‘압록(鴨淥) 변’이라는 것은 ‘압록(鴨淥)강변’을 말하는 것이다. 이 ‘압록강(鴨淥江)의 강변’이 현재의 압록강(鴨綠江)이 아니라는 점이다. 식민사학자들은 이 압록강을 현재의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압록강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14세기 이전에 현재의 압록강(鴨綠江)을 압록강(鴨淥江)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없음을 앞편에서 밝혔다. 단지 현재의 압록강은 ‘마자수(馬訾水)’라 불렸다. 15세기 이전의 압록수(鴨綠水)나 압록강(鴨淥江)은 황하와 장강과 더불어 3대 강으로 표현되었으며, 강폭이 300보이며 600여리를 배로 왕래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현재의 압록강은 아니다. 당시에 요하(遼河)를 압록수(鴨綠水)나 압록강(鴨淥江)으로 불렀던 이유는 요하(遼河)가 중국의 3대 큰 강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치통감’ 에는 “고려의 왕건이 국경 한계를 혼동강으로 정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혼동강은 곧 압록수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태조 왕건이 지칭하는 혼동강은 압록수(鴨綠水)이며 동시에 요하(遼河)였다. 금사(金史) ‘지리 상 요양부(遼陽府)’조에는 “일찍이 고려가 이곳에 진(鎭)을 두고 통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는 압록수(鴨綠水) 이동 곧 요동을 차지하고 요동의 평양인 요양(遼陽)을 서경으로 삼고 압록수인 요하를 경계를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김부식 삼국사 기록 중 ‘압록(鴨淥)을 압록강(鴨淥江)인 요하(遼河)로 볼 수 있다. 삼국유사의 ’북부여‘조에는 “전한(前漢) 선제(宣帝) 3년, 서기전 59년에 해모수가 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계인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국명을 북부여라 하였다. 아들 해부루가 상제의 명으로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가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도읍을 졸본주(卒本州)에 정하니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고구려의 시조다.”
 
위의 기록에서 해모수가 ‘의주(醫州) 경계인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다. 의주(醫州)는 요령성 북진현(北鎭縣)에 있는 요대(遼代)의 지명이다. 북진현에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으며, 압록수(鴨綠水)나 압록강(鴨淥江)으로 지칭하는 요하(遼河) 상류와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따라서 흘승골성(訖升骨城)이 ‘의주(醫州) 경계’와 가깝다고 했으니 당연히 요하(遼河) 부근이며 졸본 역시 요하(遼河) 와 멀지 않은 곳이다. 그리고 졸본에서 천도한 국내성도 요하(遼河)와 가까운 곳으로 비정되어야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도 당연히 요양(遼陽)인 것이다.
 
그러므로 흘승골성(訖升骨城)과 졸본은 환인지역에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또한 동명제가 북부여를 계승하여 졸본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에는 주몽이 오이, 마리, 합보 등 3인을 데리고 ‘졸본’에 이르렀다고 했으며,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비류곡 홀본(沸流谷忽本)으로 기술하였다. ‘졸본’과 ‘흘승골성(紇升骨城)’ 및 ‘비류곡 홀본(沸流谷忽本)’은 환인지역이 아닌 요하(遼河) 부근임이 명백해진다. 그러나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우리 역사계는 ‘졸본’과 ‘흘승골성(紇升骨城)’ 및 ‘비류곡 홀본(沸流谷忽本)’을 환인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북부여를 이은 동명제가 옮긴 도읍처가 북진현과 가까운 의주(醫州) 부근이 될 가능성은 있지만 멀리 떨어진 환인지역이 졸본성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환인지역을 ‘졸본성’으로 비정하거나 ‘흘승골성(訖升骨城)’으로 부르는 것은 문헌상으로나 역사상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와 같은 단정은 부여국의 역사와 위치가 밝혀지면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다만 우리 역사계는, 단군조선 이후 천 여 년 간 중부만주를 지켰다가 고구려에 넘겨준 부여의 초기 중심지를 송화강 유역의 길림시 일대로 보고 있으며, 그곳에서 600~700년 간 활동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동부여는 백두산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식민사가의 대부인 이병도는 ‘신수 국사대관’에서 장수왕의 15년(서기 427년) 통구(국내성, 환도산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천도한 것을 다음과 같이 억측하여 기술하고 있다. “통구는 국토가 넓어진 이 때의 수도로는 그 위치가 부적당하고, 또 후고(後顧)의 환(患)이 없는 때임으로 천도가 결행되었던 것 같다. 새로운 수도 일대는 땅은 풍요하고 경제적으로 우월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고조선과 낙랑군의 중심지였기에 역사적ㆍ문화적으로 쌓은 기반과 유산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서해를 통한 남북중국과의 교통망이 편리하다. 남의 백제 방면 진출의 군사적 활동의 요충지로써 편리하였다. 고구려는 천도 후 남방경략에 손을 대어 매양 백제와 신라를 침략하였으며, 장수왕은 서기 475년에 백제 한성을 함락시키는 등 고구려의 판도를 넓혔다”고 하였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한 이병도의 이와 같은 주장은 일제의 ‘반도사관’ 이론을 실현시키기 위해 철저히 조작ㆍ왜곡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병도가 주장한 ‘고구려는 천도 후 남방경략론’이 나온 이후부터, 우리 역사학계가 장수왕의 평양 천도의 목적으로 이를 제기하였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에 대한 ‘삼국사’의 기록은 단지 7자에 불과하다. 즉 ‘15년 移都平壤’이니 일제의 ‘조선사편수회’가 조작한 것이 분명하다. 평양 천도에 대한 이유와 목적 등 자세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대동강 일대의 평양에 대하여, 낙랑시기 고고학적 유물의 조작사건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중국과 일본의 우리 고대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조작ㆍ왜곡으로 인해 그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우리 일행은 주차장에서 소형 버스를 타고 서문 입구에 내렸다. ‘오녀산산성’이라는 표지석이 보이고 백 미터가 넘는 직선의 가파른 돌계단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좌측에 난간이 있어 가끔 잡고 오르기도 하였다. 거의 다 오르니 좌측에 큰 바위 사이로 좁은 계단이 있어 한 사람이 오를 정도로 좁고, 푸른 하늘만 위로 보인다. 이곳을 천창문(天昌門)이라 하였다. 과연 요새 중에서도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산성 정체가 바위산으로 4면이 가파른 절벽이고 동쪽에는 혼강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ㄷ' 형의 옹성을 지나 제법 큰 폭의 길이 나 있다. 산 정상이 마치 좁은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길가에는 시늘대나무가 자랄 대로 자랐다. 산성의 능선에는 나무들도 울창하다.
 
환인현 문물지에 의하면, 동쪽 성벽은 모두 돌로 쌓았는데 산 정상에서 180여 미터 낮은 허리에 있다. 성벽은 산 정상에서 240~380m 떨어져 있는데 산성의 전체 들레는 4754m이며 천연 성벽이 4189m로 성벽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축조한 성벽은 565m로 전체 성벽의 12%이다.
 
아직도 6~8m의 높은 성벽이 남아 있고 안쪽은 1~2m가 높다. 길이는 남북 1000m이고 밑돌은 크고 무거운 것으로 썼고, 그 위에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다. 오른편으로 가다보니 “1호대형건축유적지”가 나타났다. 길이 13.5m, 폭 5m, 주춧돌이 6개인 왕궁 터였다.
 
조금 더 가니 고구려의 성터에 빠질 수 없는 저수지인 천지(天池)가 나타났다. 붉은 글씨로 새긴 표지석을 세웠다. 길이 12m, 폭 5m, 수심 2m 정도로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곧 “3호대형건축유적지”는 길이 22m, 폭 16m 보다 큰 건축물 터다. 온돌의 흔적도 보였다. 산성의 가장 높은 곳인 점장대에 도착하였다. 산성의 최고 지휘자인 성주가 군사를 지휘했던 곳이다.
 
남쪽의 점장대는 반대편 방향의 조망이 가능하고 침투하려는 적을 감시하고 경계하기 쉬운 곳에 위치하였다. 발아래 푸른 저수지의 물결이 보이고 환인 시내를 볼 수 있었다. 저 환인 저수지에는 고구려적석총 1만 여기가 수장되었다는 점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지역의 고대 역사가 물속에 잠겨있기 때문이다. 이어 동쪽에는 소점장대라는 전망대가 나타났다. 혼강 저수지 일대를 조망하기에 좋았다.
 
“2호대형건축유적지”가 지나니 가파른 좁은 계단의 내림 막의 바위길이다. 이곳을 일선천(一線天)이라 하였다. 바위 사이로 하나의 선인 하늘만 보인다고 붙인 이름이다. 동문으로 향하는 하산 길에는 음마만(飮馬灣)이라는 이름의 저수지 나타났다. 산성은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는데, 동문 역시 옹성 구조로 만들었다. 동문의 형태는 후기의 네모나 반원형의 옹성과는 다르게 ‘ㄱ’형태로 쌓은 것이었다. 이 형태가 초기 형태의 특징이다. 동문 옹성은 고구려의 가장 이른 시기의 옹성이라 하였다. 중국학자들은 이를 미완성의 옹성이라 주장한다.
 
견고하게 쌓은 고성벽은 남문까지 길게 이어졌다. 성 안쪽으로도 1~2m 정도의 높이로 경사가 완만해졌다. 이윽고 남문에 도착하였다. 남문은 남쪽 성벽과 동쪽 성벽이 맞닿은 곳에 폭 3m의 문이었다. 남문 쪽의 성벽도 숲 속 능선으로 이어지더니 험한 자연 성벽인 절벽을 만난다. 우리 일행은 다시 차량은 타고 하산하였으며, 3시간이나 소요되는 흘승골성(訖升骨城)의 답사를 끝냈다.
 
내가 답사한 고구려산성 중에서도 가장 감명을 받은 특징 있는 산성이었고, 하늘과 바위, 푸른 물빛이 조화되어 아름다운 산성으로 기억에 남는 성곽이었다. 그리고 3km 떨어진 혼강 변에 있는 평지성인 상ㆍ하 고성자(古城子)터를 답사하였다.
 
우리 일행은 ‘고려성’에서 점심을 먹고, 단재 신채호 선생 등 광복회 회원 및 항일투쟁가들이 설립한 환인시의 ‘동창학교’를 찾아나셨다. ‘동창학교’는 거의 100년 전 국권을 강제로 빼앗겼던 시기에 항일투쟁가들이 대부분 다니고 졸업했다고 하였다. 학교 옛터는 백화점이 세워져서 건물 흔적을 발견할 수 가 없었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는 환인시에서 남쪽 10km에 있는 미창구 마을의 ‘미창구 장군묘’로 향했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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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