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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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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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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江東六州) 서희(徐熙) 소손녕(蕭遜寧) 요(遼) 이병도(李丙燾) # 강단사학 # 겨란족 # 내몽골자치구 # 바린 좌기 # 서랍목륜하 # 신석호 # 요 태조릉
【역사】
(2020.06.17. 21:24) 
◈ 遼 태조릉과 제단 및 요상경(遼上京) 유지(遺址)를 답사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遼 태조릉과 동남쪽의 遼上京 를 다녀오다
서울 떠난 지 5일째를 맞는다. 내몽골자치구 지역에서도 제법 깊이 들어온 것 같다. 오늘 답사할 지역은 巴林左旗 북쪽의 遼 태조릉과 그 부근에 있는 제단, 그리고 동남쪽의 遼上京 유적지다.
 
이 일대는 평균 600m가 넘는 고지대이다. 대낮의 정오 전후에만 기온이 올라가서 더울 뿐이다. 그래도 매일 생수는 꼭 챙겨야 하는 날씨다.
 
버스가 다니는 도로변에는 민가들이 아예 없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조차 보기가 어렵다. 이 지역도 소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었으며, 그 외 지역은 초원과 평야로 이루어진 야생의 들판으로 남아있었다. 과거 유목민들이 생활하던 지역의 남은 흔적들의 그림자 모습이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승차하니 버스는 遼 태조릉을 향해 마구 달리기 시작하였다. 9시경에 출발했으니 1시간 40분을 소요하여 遼 태조릉 입구에 도착하였다. 태조릉으로 가는 길을 '조주성(祖州城) 석판로'라고 이름을 붙쳤다.
 
遼는 선비족의 하나인 겨란족으로 북위 때부터, 서랍목륜하(西拉沐侖河)로 부르는 서요하 일대의 유목민이었다. 628년 거란 추장 대하(大賀)씨 마회(摩會)가 당에 귀부하니 당은 이곳에 송막(松漠)도독부를 두었다. 901년 야율아보기가 주변의 실위, 여진 등을 정벌하여 세력을 키워 916년 대거란국을 세웠으며, 후방의 근심을 제거하기 위해 발해를 정벌하고 동단국을 세웠다. 태자 야율배를 동단국 왕으로 임명하였다. 遼는 건국한 지 209년만인 1125년에 여진족에 망하였다.
 
소손녕이 8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한 것이 993년 성종 12년이었다. 이때 서희가 담판으로 강동6주를 획득하였다. 총칼이 아닌 혀 세치로 넓은 강동6주를 차지할 수 있었다. 서희의 배짱과 지혜 및 담대한 용기로 영토를 확장한 유일한 사건이다. 이 '강동6주'는 요하(遼河) 이동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사학에 물든 강단사학자들은 물론 서희의 후손까지도 압록강 이동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병도. 신석호의 제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강단사학자들은 현재도 우리 국민들에게 서희가 획득한 '강동6주'가 압록강 이동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당시의 고려의 국경선마저 요하(遼河)선을 부정하고 의주~원산만 선을 그은 교과서를 가르치고 있다. 광복 7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역사학계는 식민사학, 사대사학의 구렁텅이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들이 빠져나올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초행길인데 산세가 보통이 아닌 것 같다. 남향은 파림좌기 일대의 낮은 구릉으로 확 트인 반면 북동, 북서 지역은 높은 산으로 둘려 쌓인 형태이다. 모두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의 기운도 대단해 보였다. 30분을 가법게 등산하니 화강암 바위로 만든 직사각형의 석조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의 위치도 매우 잘 잡았던 것 같다. 명당(明堂)의 요건을 갖춘 곳이다.
 
11시가 넘어서니 이곳도 기온이 올라갔다. 석조건물의 크기는 가로 10m, 세로 5m, 높이 3m인데 남쪽 중앙에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두께 20cm 정도의 화강암 석판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자연석이 아닌 표면을 인공적으로 연마한 화강암이다. 이 건물을 만들기까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것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의 작품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일행들은 큰 규모의 건축물에 놀라고, 어떤 용도로 쓰이는 장소인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더구나 박찬희 씨가 뜨거운 차를 준비해와서, 이곳에 차례를 올리고 가자고 하는 바람에 9명의 회원들은 그만 遼 태조릉 답사를 잊어버리고 그만 제단 건물에서 차례를 올리고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말았다. 차도 마시고 기도도 드리고 모두들 산세가 아름답고 우람찬 바위산으로 둘려찬 이곳이 옛 선인들이 만들어 놓은 제단이거나 수양하는 곳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어떤 이는 단군제단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단군'이란 명칭은 고려시기에 처음 나타난 것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혹시 서기전 2500년 전후에 주조한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조사해 봐도 단군(檀君)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天君'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帝堯가 서기전 2355년에 외조부 高陽에게 바치는 제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새겨진 "丙午鼎"에 '天君'이 금문(金文)체로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4500년 전부터 나라의 지도자를 '天君'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음이 입증되었다.
 
40분이 지나니 遼 태조릉을 갔다 온 회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천천히 하산하였다. 지금까지도 그 제단에서 차례를 올렸던 감흥을 잊을 수가 없다. 비록 遼 태조릉은 못갔지만 이 곳 대 명산에 왔다가 차례를 올리고 가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하였다.
 
우리 일행은 遼上京 유지(遺址)로 가는 중에 上京박물관에 들려서 견학하기로 했지만 점심시간이라 문이 닫힌 관계로, 오후 2시에 박물관 입장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우리 일행은 할 수 없이 박물관 부근의 식당에서 요기를 하고 遼上京 유지(遺址)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遼上京 유지(遺址)는 린둥진(林東鎭)의 남쪽 외각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日'자형의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졌다. 주변 둘레는 12km이며 황성에는 4개의 대문이 있으며, 문밖에는 옹성이 있고 거란의 귀족들이 살았던 성 바깥에는 해자를 파놓았다. 황성 터는 대략 3만 평 규모로 보이고, 漢人들과 상인들이 모여 살던 한성(漢城)은 대략 2만평 규모였다.
 
우리 일행은 동쪽의 버드나무 숲의 소로를 따라 황성 내의 가장 높은 곳으로 걸었다. 숲 속에는 더위를 피해 온 현지 주민들의 모습과 타고 온 승용차도 보였다. 황성의 중심부로 보이는 곳에 마모된 비석이 홀로 서있었다. 비석을 중심으로 이을형 박사를 모시고 친구들과 함께 기념 사진도 찍고 사방으로 둘려보았다.
 
비석이 새워진 이곳은 다른 지역보다 제법 높은 지역이라 사방의 넓은 평지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남쪽에는 제법 먼 곳의 높은 아파트 건물이 보이기도 하였다. 동·서쪽에는 재법 높은 구릉이 위치하였다. 북쪽에는 먼 거리지만 높은 산맥이 위치하고 있었다. 遼가 망한지 거의 천년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맑은 북녘의 하늘 아래애서 옛 버드나무 숲의 古城을 거닐어 보는 것도 제법 운치있어 보였다.
강동 6주(江東六州) 서희(徐熙) 소손녕(蕭遜寧) 요(遼) 이병도(李丙燾) # 강단사학 # 겨란족 # 내몽골자치구 # 바린 좌기 # 서랍목륜하 # 신석호 # 요 태조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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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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