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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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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江東六州) 서희(徐熙) # 요중경 # 요중경박물관 # 요하문명 # 우하량 # 홍산 문명
【역사】
(2020.06.04. 10:25) 
◈ 우하량 홍산 문명의 핵심과 요중경박물관 전시기록의 유감
[스카이데일리 연재] 홍산 문명의 핵심, 선진 문명을 경험하다
오늘은 여행 떠난 지 4일째 되는 날이다. 어제는 홍산 문명의 핵심지역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5500~5000년 전에 존재했던 우하량 지역의 제단(壇), 사당(廟), 무덤(塚,적석총)의 삼위일체의 제사유지(祭祀遺址)를 답사하였다. 적봉에 오기 전 요중경에 들러 유명한 13층 전탐인 ‘요중경대탐’을 답사하고 ‘요중경 박물관’을 견학했지만 지난 호에서 ‘요중경 박물관’의 견학기기 빠졌음을 알았다.
 
이에 ‘요중경 박물관’의 견학기와 ‘우하량의 홍산 문명론’을 보완 기술한 후, ‘적봉박물관’의 견학기를 전개하기로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물론 두 지역의 문화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부분도 느꼈기 때문이다.
 
중국은 적봉일대의 ‘홍산 문화’의 실체를 규명하기 전까지는 세칭 ‘황하문명’이 최고(最古)의 문명으로 인식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며, 중국인들은 그와 같은 문화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황화문명의 본질을 파고들면 이 역시 또 다른 문제점이 나타난다. 여기에 대해서는 차후 논의하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이 이 홍산 문명을 다시 발굴하고 내린 결론은 홍산 문명이 자신들이 最古의 문명으로 인식했던 ‘황화문명’보다도 먼저 형성된 선진 문명임을 인식하여 이를 ‘요하문명(遼河文明)’이라 이름을 짓고, 2006년 심양에서 요령성박물관이 중심이 되어 ‘요하문명전’을 개최하여, ‘요하문명’이 중국의 최고의 문명이라고 대외적으로 홍보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홍산 문명’은 이미 25세기 전에 살았던 곡부의 공자(孔子)가 평생 살기를 원했던 ‘군자국’의 문화였으며, 이 ‘군자국’의 문화는 우리 선조인 ‘한민족(韓民族)’의 문화이지 한족(漢族)의 문화는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이와 같이 중국이 이웃 나라의 우수한 문화를 자기 것으로 빼앗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다.
 
즉 과거에는 한족의 역사나 영토가 아니더라도 현재 중국의 영토 범주 내에서 존재하는 모든 ‘소수 이민족의 역사와 국가’는 모두 다민족 국가인 ‘중국 구성원의 역사이며 중국 민족’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들 소수 이민족의 역사적 활동도 중국 역사의 범주에 속한다는 억지 이론을 전파시켰다.
 
이 중국의 역사패권주의적 의식에 몰입된 비역사의식에 의거하여 이웃 국가의 역사에 대한 왜곡과 조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2002년 공식적으로 추진된 ‘동북공정’이었다. 이후 만리장성 연장론에 따라 만리장성의 길이까지 연장하였으며, 압록강 입구에 만리장성의 동단이라는 허구의 ‘호산장성’을 축조하였다. 물론 ‘동북공정’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이들도 역사학을 연구한 학자들이었다.
 
이와 같이 ‘홍산 문명’을 중국 最古의 문명으로 주장하고 있는 홍산 지역의 박물관에 기술하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홍산 문명은 ‘중화문명의 근원’(中華文明之源)인 동시에 ‘중화문물의 원조’(中華人文之祖)이며, 또한 ‘중화종교의 시작’(中華宗敎之始)이라고 하면서 중화민족의 고국(古國)단계로부터 방국(方國)단계를 펼쳐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즉 홍산 문화의 역사는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 제국’의 발전 역사를 보여 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4000년 전 요하유역에는 다수 청동기 문화가 존재했는데, 고국(古國)시대로부터 방국(方國)시대로 발전하였으며, 상(商)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다원일체(多元一切)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중국 학계는 우하량 유지(遺址)에서 1983년 중국 최초의 사당인 종묘(宗廟)를 발견하였다고 했는데 바로 여신님묘(女神廟)이다. 흙으로 만든 여성의 두상인 소상(塑像)을 두고 신(神)으로 숭배받는 우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5000년 전 홍산인들이 진짜 사람처럼, 소상(塑像)한 여성상을 자연스레 숭배하였으며 이러한 풍속이 선조를 숭배하는 과정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중국 고고학자 소병기(蘇秉琦)는 “이 홍산인의 여성은 중화민족의 공통의 조상이다”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견학한 ‘요중경(遼中京)박물관’에 전시된 기록에는 요중경 유지(遺址)는 1007년에 축성되었으며, 金시기에 건축된 13개의 고탑이 있다고 하였다. ‘요중경전탑’은 남쪽에 2기가 남아있었다. 8각 13층의 전탐으로 높이 22m, 기단 직경 15m로 동남부에 위치하였으며, 본래는 세 개의 전탑이 있었다고 하였다. 작은 소탑(小塔)은 8각 13층의 전탐으로 높이 14m, 기단 직경 7m로 성 바깥의 서남부에 위치하였다.
 
중앙대도의 동북방향에 큰 탑(大塔)이 높이 81.39m의 높이로 서 있는데 통칭 대명탑(大明塔)이라 한다. 다른 하나의 소탑(小塔)은 이미 반쯤 무너진 탑으로 보인다. 성외 서남부에 위치하며, 8각형의 전탐으로 남은 높이 6m로 속칭 반절탑(半截塔)이라 부른다. 1층 탑신의 매면에는 전(塼)으로 조각한 불상, 보살, 역사, 비천상이 끼워 넣어져 있었다.
 
또한 요중경의 상징이 ‘요중경대탑’이라서 그런지 중국 각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전탑(塼塔)의 사진들을 전시하여 소개하고 있었다. 중국의 4대 古塔은, 정주시 개원사탑(높이 83.7m), 요중경대탑(80.22m), 협서성 경양숭문탑(79.17m, 중수 후 87m), 산서성 분양사봉탑(1998년 중수 후 84.93m)이라 소개하지만 요중경대탑의 높이가 한 박물관에서 다르게 표기돼 있다.
 
요중경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유물의 분포 지도를 유심히 고찰해보니, 고려의 국경선이 이상하게 그려져 있었다. 즉 요(遼)의 동쪽 국경선이 의주~원산으로 이어진 선까지 이르고 있다. 중국 담기양이 그린 ‘중국역사지도집’처럼 그려져 있다. 고려의 실제 국경선이 압록강을 넘지 않았다는 식민사관 이론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중국학계의 주장인 셈이다. 요중경박물관은 이웃 국가의 과거의 국경선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불쾌했다.
 
그렇다면 고려의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하여 획득한 ‘강동6주(江東六州)’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분명 알 필요가 있다. 서희가 획득한 ‘강동6주(江東六州)는 요하(遼河) 이동에 위치하였다. 당시 고려의 국경선은 요하(遼河)이었으며, 압록강(鴨綠江)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국내의 강단사학자들은 서희의 ‘강동6주(江東六州)’가 압록강 동쪽에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들은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한 이병도·신석호의 추종세력으로 식민사학 전파자들이었다.
 
결국 식민사학의 영향력이 이곳 외몽골지역까지 침투하였다. 본래 고려의 서쪽 국경선은 요하(遼河)였으며, 요하의 본 이름이 압록강(鴨淥江)이었다. 현재의 압록강(鴨綠江은 마자수였다. 우리의 역사계는 70여년이 넘도록 일제의 ‘반도사관’ 등 식민사관의 고착화 정책을 충실히 이행해온 이병도·신석호 일당의 매국노들의 만행을 밝혀내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아직도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 후기 수도를 대동강변 평양으로 가르치고 있다.
 
요중경박물관 비치된 청동기에는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의 주조 연대를 ‘서주~춘추’시기로 기록했다. 또한 청동이(靑銅匜, 손대야 모양의 祭器)의 주조 연대도 ‘서주’로 기록하였다. 실제로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시기의 유물이다. 적어도 B.C 24세기 이전의 유물인데도 불구하고 중국학계가 청동기 주조의 비정시기를 실제 시기보다 천년 이후로 단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100년 전에 형성된 ‘고사부정론파‘의 영향 때문이다. 현재 중국학계는 이들 고힐강(顧頡剛) 중심의 ‘고사부정론’을 이어 받은 세대들이다. 이들은 殷商시기인 B.C 16세기 이전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이른 시기의 청동기라도 商周시기로 비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전시 안내문에는 중국 청동기의 최초 발견지는 황하유역으로 B.C 21~5세기까지 1500년의 역사라고 하면서 중국의 청동기 시대를 4기로 구분하고 있다. 1) 정성기(鼎盛期) : 상대~서주시기, 2)퇴패기(頹敗期) : 서주 중기~춘추 중기), 3) 중흥기(中興期 ) : 춘추 중기~전국 말기), 4) 쇠락기(衰落期) : 전국시기 말기 이후로 구분한 것으로, 청동기 최초 주조시기를 商 시기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청동기 문화가 유행한 시기를 ‘하가점상 · 하층’ 문화로 규정하면서 당시 주체적 민족으로 ‘산융과 동호’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중국학계의 주장은 송호정의 이론과 매우 흡사하다. 박물관에는 청동기 동검 등을 만들어낸 거푸집(石范) 보였다. 寧城 지역의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인 하가점 상층 문화는, 청동기의 구성, 요소 품격에 있어서, 중원청동기 문화의 전승체계와 서로 일치하여 공통 특징이 있다고 했다. 여하튼 중국학계는 ‘고사부정론파‘의 후예로서 언제까지 왜곡된 청동기 주조 연대를 주장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강동 6주(江東六州) 서희(徐熙) # 요중경 # 요중경박물관 # 요하문명 # 우하량 # 홍산 문명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적봉(赤峰) 박물관과 옹우특기(翁牛特旗) 박물관을 견학하다
• 우하량 홍산 문명의 핵심과 요중경박물관 전시기록의 유감
•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지와 적봉시의 홍산(紅山)으로 가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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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